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내일은 너무 늦다. (20170210. 대구)

담마마-마까 2022. 4. 4. 09:00

https://youtu.be/bF8E7ONKWEM

* 내일은 너무 늦다. (20170210. 대구)

(탁발법회 예불, 7:50 이후부터 녹취하였습니다.)

 

오늘은 「내일은 너무 늦다」 하는 제목으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운영위원들은 스님이 안 오는 때는 인터넷이든 아니면 CD든 스님 법문이 녹음돼있는 걸 그걸 틀어가지고 듣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법문을 듣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에 환희심이 일어나야 되고, 그래서 마음이 청정해지고, 그리고 그 길을 따르겠다는 어떤 계획에 도전하는 거고, 그래서 수행에서 조금 더 도움을 받기 위한 것이지, 그것만이 목적이 돼서는 안됩니다.

 

「내일은 너무 늦다」 하는 것은 바히야 장로에 대해서 한 일화입니다.

이거는 언젠가 한 번 얘길 한 적이 있습니다. 표류하다가 떠내려가서 옷이고 다 벗겨졌으니까 나무껍질을 가지고 몸을 추렸는데 사람들이 성인이 나타났다 해가지고 추앙하는 거를 얘기하는 겁니다.

나무껍질 하나 두른 것만 해가지고 좀 기이한 행동들을 하면 "성인이다" 할 것 같으면 그건 조금 이상하죠? 그런 것들을 성인이나 아니면 장로라고 얘길하지 않습니다. 기이한 행동들이나 남들이 안 하는 특별한 것들을 한다고 해가지고 그분들을 장로라고 얘길하지 않습니다.

장로라고 보통 얘기할 때는 나라별로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보통 출가한지 10년 이상 그렇지 않으면 30년 이상, 엄격하게 얘기하면 30년 이상 되어야 됩니다. 그럴 때 장로라는 명칭을 사실은 붙입니다. 그것은 나라별로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꼭 몇년이다 라고 얘기하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보통 '우리말로 큰스님이라고 얘기할 때는 30년 이상이라고 봐야 적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개인적으로는 가집니다.

 

앙굿따라 니까야에 보면 "장로가 갖추어야 될 것들을 갖추지 못하면 장로 자격이 없다"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면 다섯 가지 장애 알죠? 수행에서 다섯 가지 장애가 뭐뭐가 있습니까? (수행자 : 감각적인 욕망, 악의, 혼침·졸음, 들뜸·후회, 희의적인 의심) 그렇죠.

그런 것들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 못 하면 모범을 보일 수 없겠죠? 그럴 것 같으면 출가자의 자격도 제대로 갖추지 못할 뿐 아니라 장로의 자격을 갖추지도 못합니다.

남이 비난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화를 내거나 또 악의를 가지는 것들, 또는 수행 중에서 수행이 여법하게 잘 되는 것이 아니고 꼬박꼬박 조분다든지, 아니면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할 것 같으면 거기에 금방 마음이 가서 감각적인 것에 휩쓸려 버린다든지, 이럴 것 같으면 장로의 자격이 안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을 해야만이 장로의 자격이 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꾸준하게 해야 만이 가능한 것이지 어떤 특별한 기이한 형상들이나 여러 가지들을 해가지고 그것이 장로가 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다음 두 번째가 뭐냐면 교만하지 않고 위선적이지 않는 것.

가끔씩 스님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성품 자체가 조금 대쪽같은 성격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굉장히 딱딱하게 보입니다. 그럴 때마다 스님이 자꾸 느끼는 것이 뭐냐면 ‘아, 내가 스님이라는 직책을 앞으로 드러내가지고 사람들에게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자주 해가지고 인제는 그것들 없이 얘기를 할려고 하고 그런 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게 인제 교만한 것들이 몸속에서는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쌓아온 습관들이 쭉 그런 성향들이 될 것 같으면 그것이 은연중에 밖으로 드러나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굉장히 경계를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어떤 분들은 뭐랄까 좀 위선적으로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도 하지 말아야 만이 장로의 자격을 갖춘다 하고 얘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쓸데없는 말, 그다음에 궤변들, 쓸데없는 불교의 고유한 사상과는 다른 어떤 사상들을 자기의 사상으로써 받아들여가지고 그걸 가지고 설파를 할려고 하는 것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물론 그것이 꼭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분들이 테라와다 스님들이 아닌 것은 아닌데, 이게 도가 지나치면 잘못 방향을 바꾸면 어떻게 되느냐면 괜히 남을 아는 것처럼 한다든지, 아니면 한국 스님들 중에도 그런 스님들이 있죠? 특이한 글씨를 잘 쓰는 거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점을 봐주는 거라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 귀신을 본다고 얘기해서 죽은 사람이 어디로 태어났다고 얘기를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바뀌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굉장히 경계를 해야 되는 부분이고, 그러한 것들을 만약에 한다 그러면 그것은 장로로서 올바른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하고 여러분들이 스스로 잘 알아야 됩니다.

 

장로라고 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장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 법대로 그대로 따라가는 경우, 그런 경우에 일정한 수준 이상이 될 것 같으면 또 일정한 법납 이상이 될 것 같으면 장로라고 할 수 있다 하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는 뭐냐면 여러분들에게 만약에 부처님 법과 다른 종교의 법이 뭐 별반 차이가 안난다, 동일하다 할 것 같으면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아마 없을 겁니다.

그것은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의 부분입니다. 믿음이 확고할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그런 얘기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삼보에 대한 믿음들이 이미 정확하게 확립이 돼있어야 되는 거고, 그래서 그런 것들이 확립이 돼있는 상태에서 계행이 잘 갖추어질 것 같으면 부끄러워하고 창피한 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아니고 악행의 위험성을 알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이미 멀리 피해있게 되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도 갖추어져 있어야 됩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뭐냐면 나중에 수행부분에서 조금 설명을 하겠지만, 어떠한 경우든지 소리나 형상들이나 맛이나 이런 것들에 인해서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겁니다.

여기 앞에 말리까님이 있다. 그럼 만약에 예를 들면 말리까님이 '오늘 굉장히 나이가 들어서 아파보인다.' 그럴 것 같으면 그 형상에 끄달려 들어갈 것 같으면 마음에서 슬픈 생각이 확 일어납니다. 슬픈 생각하고 자비(慈悲)의 비심(悲心)하고는 다른 겁니다. 연민하게 여겨서 아, 어떻게 하면 저분의 저런 모습들이나 저런 나쁜 것들로부터 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줄까 하는 마음하고는 다른 것들이기 때문에 형상에 매료돼버리면 그렇게 돼버립니다. 아니면 소리에 매료돼버릴 것 같으면 좋은 음악이 나올 거 같으면 거기에 취해버린다든지, 아니면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맛있는 음식에 대해서 집착을 한다든지, 아니면 오늘 하루 한 끼 먹고 말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세 끼 먹는 것처럼 많이 먹어가지고 몸을 유지할려고 한다든지, 이렇게 과도한 부분들로써 치우쳐버리고 그것에 끄달려 들어가버리게 되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도 경계를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가 뭐냐면 적어도 삼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남들에게 잘 설명할 수 있는 상태가 돼야 됩니다.

그래서 삼장에 대해서 스스로 잘 정리가 돼있을 때, 그것에 대해서 잘 법을 설할 수가 있게 됩니다. 말솜씨가 뛰어난다든지 아니면 미사여구를 많이 쓴다는 것이 아니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다른 사람에게 부처님 가르침의 진짜와 가짜를 전달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들, 그것은 삼장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고 잘 듣고 또 많이 큰스님들로부터 법을 듣고 이렇게 해가지고 익혀지지 않으면 힘드는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일곱 번째가 일반적으로 장로라고 얘기하는 출가한지 오래 된 것. 그래서 아까 같이 스님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30년 이상이 됐을 경우, 그럴 때는 큰스님이라고 부를 자격들을 갖추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럴 경우의 어디를 보더라도 나무껍질을 걸쳤다고 해서 성인이라든지 장로라고 부를 수 있는 조건은 안 됩니다. 아니면 어떤 기이한 현상들을 한다 해가지고 그렇지도 않고, 아니면 예언할 수 있다고 해가지고 그렇지도 않고, 내가 삼매에 들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삼매에 든 모습들을 보여주고 하는 것들로 인해서 장로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런 것들은 여러분들이 잘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어쨌든 인도 옛날의 부처님 당시 때나 아니면 지금 한국의 모습들이나를 보면은, 그래도 큰스님이라고 부르는 경우들을 보면은 보통 보면 빨리어 경전에서 얘기하는 장로의 조건, 자질하고는 거리가 먼 상태에 있습니다.

많이 사람들이 모이고 따를 때, 그리고 어떤 다른 불교외적인 특출한 능력이 있을 때 이럴 때 그렇게 부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경계를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어쨌든 바히야가 그러한 나무껍질을 걸치는 것으로 인해서 성자라는 것으로 추앙을 받고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았지만, 친구가 그 모습을 보고 “너는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너는 장로가 아니고 아직 성인이 아니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본래 본성 자체가 나쁜 마음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 내가 바른 가르침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어딘가’ 하는 것들을 알아서 그곳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가 성인으로 추앙받고,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큰스님으로 아니면 스님으로 대접받고 살아온 시간 동안 자기는 공부를 안 하고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게 10년이든 20년이든 30년이든 지났다, 그거 안 아까워? 아마 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거 같으면 굉장히 아까울 거라.

그 사람이 특출한 능력이 있든 아니면 법을 잘 설하든 뭘 어쨌든 간에 자기 자신이 부처님 가르침 대로 수행해서 어느 단계 지혜의 단계나 어떤 성자의 위치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시간 동안 뭐 하고 있느냐는 생각을 일으키면은 급한 거라. 그러니까 하루빨리 법을 얻을려는 생각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여러분 경우를 들어볼까요? 어제 어떤 분이 부산에서 한 분이 왔어요. 부산의 범어사에서 한 3~40년 넘어 쭉 다니고 있는데, 이때까지는 계속 무슨 행사 있다, 뭐 있다 할 것 같으면 ‘돈 내고 하면 스님이 알아서 해주겠지’ 이렇게 다 하고 다녔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까 그렇게 다니다 보니까 불교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어느 정도 위안을 가질지는 몰라도 무슨 문제에 부딪치면 그걸 해결하고 타파해나갈 방법조차도 모르고 있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나이는 먹어가지고 인제는 죽음이 닥쳐온다고 생각하니까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다, 이래가지고 계속 1~20년을 더 한다고 해가지고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나’ 하는 생각이 급하니까, 어제 와가지고 계속 법에 대해서 질문을 하더라고.

 

어제 법문을 하고 나서 밥을 먹어야 되는데 밥을 먹지 못하게끔 질문을 하는 거라. 그래서 “밥 좀 먹고 나서 얘기합시다.” 그런데도 질문할 게 많으니까, 뭔가 자기가 이때까지 가졌던 것들이 다른 것이 많으니까 계속 할려고 하는 거라. 그래서 나중에는 선원에 있는 사람이 “조금 나갔다가 조금 있다가 오세요.” 밥을 먹고 있는데 중간에 또 똑똑 두드려가지고 “스님, 공양 다 하셨습니까?” 그런 상태인 거라. 급한 거라.

뭐 그분만 그러겠어요? 여러분들은 안 그러겠어요? 여러분들도 급합니다.

급하게 서두르지 않으면 늦습니다.

 

마찬가지로 바히야도 탁발하고 있는 부처님한테 가서 “나에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법을 설해주시오” 하고 부처님한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땡깡을 부리는 거라. 그런데 부처님도 출가한 스님이기 때문에 출가한 스님들이 금지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법을 설할 수 없는 조건들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탁발하고 있을 때는 법을 설할 수가 없습니다. 탁발할 땐 어떻게 하죠? 걸어가고 있죠? 걸어가고 있는데 법을 설하면 이중적인 것들을 하게 되죠? 걷는 것 하나, 그다음에 법을 설하고 있는 것 하나.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탁발하고 있을 때는 법을 설할 수가 없습니다.

가끔씩 스님들이 탁발할 때 아니면 오늘 같이 이렇게 간소하게 선원 안에서 탁발을 할 때 그대로 받으면서 멈춰서가지고 마음속에서 ‘아, 이와 같은 공덕으로 하루빨리 닙바나에 이르기를’ ‘이와 같은 공덕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하는 짧은 게송들만 하게 됩니다. 그것은 법을 설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에게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을 간절하게 내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탁발할 경우에는 어떤 경우든지 법을 설할 수가 없어요.

 

또 하나 어떤 경우가 있느냐면 스님도 가끔 그럴 때가 있는데, 걸어갈 때 사람들이 법을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탁발이 아니라도. 그럴 때는 법을 설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스님 잠깐만 좀 앉아서 저하고 얘기 좀 합시다.” 바쁜 일 없을 거 같으면 당연히 앉아가지고 법에 대해서 담론을 하지. 그런데 꼭 걸어가면서 얘기를 할려고 해. 그럴 때는 되도록이면 조심을 해야 됩니다.

 

또 스님이 앉아 있을 때 일어서가지고 법에 대해서 묻는다. 이것도 스님들이 법을 설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도 조심해야 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조건들일 때는 법을 설할 수가 없는데, 지금 바히야가 딱 그 상태거든. 탁발하고 있는데 부처님한테 법을 설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세 번 거절을 하고 나서도 계속 법을 설해달라고 땡깡을 부리니까 결국 법을 설해줍니다. 그 법을 설한 것이 뭐냐면 뒷 페이지에 중간 정도에 보면,

 

「바히야여! 보이는 것은 보기만 하고, 들리는 것은 듣기만 하고, 느끼는 것은 느끼기만 하고,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기만 하여 머물러라. 그러면 그대는 밖에는 없다(대상에 잡히지 않는다고 하는 의미). 그러면 안에도 좋게 머물기에(마음속에서 집착·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의미), 안·밖으로도 좋게 머물게 되어, 그대는 어느 쪽으로도 좋게 머물게 된다(해탈 상태). 그것이 모든 괴로움의 소멸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스님 한번 봐보십시오. 보여지기만 하는 사람 손들어 보십시요. 모양과 형태로써 보여지기만 하는 사람? 없죠?

여기 뭐라고 했어요? 보이는 것은 보기만 하라 했는데 보기만 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느냐면 그냥 모양과 형태로써 보인다고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어, 스님이네!’ 하고 판단을 하고, 또 ‘스님이 뭐 어떻게 변했네’ 하고 변화된 모습도 알려고 하고, 이렇게 바뀌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니까 마음에서 또 다른 마음의 작용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부처님 명호를 외울 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처님을 떠올려가지고 부처님이 자기 앞에 전방에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부처님을 딱 떠올립니다. 그러고 나서 한국 같으면 ‘석가모니불’ 하면서 떠올립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그모습 그대로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그 모습이 오롯하게 그대로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그 부처님의 모습이 부처님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든지, 아니면 부처님이 나를 쓰다듬는 것처럼 느껴진다든지, 이런 것들은 어떤 거에요? 마음이 다른 작용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계속되다 보면 부처님한테 광명이 나기도 하고 이런 것들로 바뀌기도 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러한 것들이 일어나더라도 그러한 것들은 무시를 해버리고, 그냥 부처님이 그대로 오롯하게 있는 것처럼 봐야 됩니다. 그것이 한동안 계속해서 눈을 감고 있어도 그 모습이 그대로 보이도록 만들어야만이 바르게 선정에 들 수 있는 조건들이 됩니다.

그래서 인제는 석가모니불이라고 하지 않아도 그 모습 그 형태가 그대로 그냥 계속 지속돼있는 상태가 될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인제는 석가모니불을 안 해도 부처님이 그대로 계시는 거라. 쉽게 말하면 마음속에 그대로 들어와 있는 거라. 그래서 움직일 때라도 그렇게 되고 밥을 먹을 때라도 그렇게 되고, 그게 선정에 들기 위한 기초조건입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첫 번째 봤을 때 부처님이라고 얘기했을 때, 그 이상 발전시키질 않습니다. 부처님의 모습이나 형태를. 마찬가집니다. 여러분들이 스님을 봤을 때 그냥 스님이라고 보이는 것이 아니고, 그냥 모습과 형태로써 보이면 ‘보인다’ 하고만 분명히 알아차릴 것 같으면 거기서 끝나버립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면 그게 관념화 돼가지고 '스님이다 아니다', 또 '스님의 모습이 바뀌었다 어쨌다', '잘생겼다 못생겼다' 이렇게 자꾸 바뀌어버린다는 거라.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보이는 것은 보기만 자꾸 해야 됩니다. 들리는 것은 듣기만 해야 되고.

 

예를 들어서 스님이 뭘 보고 있을 때 보이기만 한다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 그렇게 계속 보이기만 한다, ‘보임’ ‘보임’ 하면서 보기만 하고 있을 때는 마음의 작용이 어떻게 되느냐면, 밖에 있는 형상이 있습니다.

그건 물질적인 현상입니다.

그런데 보는 것은 누가 봅니까? 내가 봅니다.

그 마음은 따로 있습니다, 그 보는 마음은.

그럼 눈을 감고 있어도 그 모습이 그 형태가 그대로 보입니다. 형상이 없어도 마음으로 보여진다는 거라. 그러면은 구분해볼 수가 있는 거라. 물질적인 보이는 현상과 형태와 그것을 보는 마음을 구분해볼 수가 있습니다.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구별이 돼야만이 수행의 첫 단추를 끼워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에서 물질적인 현상이 그대로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에서 보는 마음이 시시때때로 바뀌는 걸 알게 됩니다. 가끔씩 망상이 일어나기도 하고, 또 가끔씩 형태가 바뀌기도 하고, 정신적인 현상이 변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오롯하게 하나의 대상을 그대로 보고 있을 것 같으면 그렇게 바뀌는 것이 빨리 바뀌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두려운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빨리 바뀌게 되고 바뀌는 것이 계속 사라지는 것으로만 보이기 때문에. 마음은 끊임없이 앞에 있는 대상을 보는데 ‘보임’ ‘보임’ 하는데도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사라지는 것만 계속 보이기 때문에 두려움들이 일어나는 거라. ‘아, 이게 이렇게 빨리 변하는 거구나.’ 이렇게 빨리 변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조절할 수가 없구나 하는 것을 현상으로써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라.

그렇게 돼야만이 밖에 있는 대상에 붙잡히질 않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보기만 하고 들리는 것은 듣기만 하고 이렇게 하게 될 것 같으면 거기에 머물르고 있을 거 같으면 그때는 밖에는 없다는 거라. 밖에 소리에 끄달려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라. 밖에 형상에 끄달려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밖으로 향해 버립니다, 마음이. 마음이 밖으로 향할 수가 없는데도 이미 마음은 밖으로 가 있습니다. 소리가 들리면 마음은 들리는 자기의 귀에 있어야 되는데, 마음은 이미 스님이 말하고 있는 여기에까지 와있게 된다는 거라. 그럼 대상에 사로잡혀 버리게 됩니다. 보이면 보이는 눈에다가 의식이 가 있어야 되는데, 밖에 있는 형상에 마음이 가버리는 거라.

밖에 대상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됩니다. 첫 번째가.

 

그리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서 집착이나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야 됩니다. 마음이 오롯하게 듣기만 하고 또 보기만 하는 데다 의식이 딱 가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이 변하는 것으로 보이면 집착하질 않습니다. 지금 소리도 여러분들에게는 변하는 것으로서 들릴 겁니다. 물질적인 현상은 계속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럼 변하는 것으로 계속 들려야 됩니다.

단지 사띠가 깊어지면 변하는 것들이 분명하게 인식돼서 그것들이 기억되게 돼있는 거고, 사띠가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중간중간에라도 자꾸 끊어지면 그것이 끊어져서 들리는 경우는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지금 사띠의 깊고 낮음에 따라서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뿐인 것이지, 그 어디에도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지는 않게 됩니다.

 

사로잡히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되면은 안팎으로는 바르게 머물게 된다는 거라.

그러한 상태가 계속 진행이 되면 그 사람은 해탈의 상태로 이르게 된다는 거라.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어떠한 경우든지 평온한 마음들을 유지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내가 조절하는 능력들이 생겨납니다.

 

바히야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 아라한에 이르렀던 것은 그 소리로 인해서 그 소리가 부처님 말씀이 법에 맞는 소리라서 그 법을 듣고 아라한이 된 것이 아니고, 이런 작용들을 했기 때문에 아라한에 이를 수가 있는 겁니다.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고요하게 삼매에 들어있다고 해서 아라한이 되는 것이 아니고, 또 어떤 특정한 것들로 인해서 아라한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리를 분명하게 무상·고·무아로써 듣게 되고, 그로 인해서 통찰지혜가 일어나서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또 어디에도 대상에 사로잡히지 않게 될 때, 그럴 때 해탈의 상태로 들어갈 수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아주 짧은 찰나지만 바히야가 이때 아라한에 이르르게 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아라한에 이르렀으면 어떻게 될까? 출가를 하게 될까, 하지 말아야 될까? 논쟁이 많은 부분들입니다. 테라와다의 전통적인 스승들이 가르치는 방식에 의할 것 같으면 "출가를 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물론 그 스승들마다 하루가 지나기 전에 출가를 한다,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출가를 한다, 이렇게 얘기를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아라한이 되고 나면 어떠한 경우든지 생존욕구조차도 없고 집착하는 것들도 없기 때문에 사회생활 할 조건이 안 돼버립니다.

당연히 그러니 출가를 하게 됩니다. 단지 출가해서 출가자의 옷을 입었느냐 안 입었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실제적으로 아라한이 되고 나선 그 사람은 이미 출가자와 마찬가지가 돼버립니다.

그러니 당연히 바히야가 “부처님! 저 출가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마 여러분들이 공덕을 많이 쌓아놨다고 할 것 같으면, 이때 당시에는 부처님이 "에히 빅쿠" 라는 의식을 할 때입니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출가를 시키는 방식이 여러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에히 빅쿠" 방식이 있고, "띠사라나" 방식이 있고, "우빠삼빠다" 방식이 있고 그렇습니다. 쉽게 말하면 에히 빅쿠 방식은 “이리오너라! 비구여!” 얘기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머리가 확 깍이고 몸에 가사가 입혀지고, 바리때가 들려지고, 공덕이 많으면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런데 띠사라나 빅쿠는 자기가 스스로 바리때하고 가사하고 챙겨와가지고 해야 된다는 거라. 그리해도 간단하게 삼귀의 삼창을 따라하는 것으로 인해서 비구가 되는 거라. 그 뒤 후대에 부처님 말년 정도에 이르게 되면 우빠삼빠다 빅쿠라 해가지고 계를 주면서 계를 받고 하는 것들을 정확하게 해서 출가를 하게 됩니다.

 

지금은 테라와다 스님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우빠삼빠다 빅쿠 외에는 출가할 조건이 안 돼버립니다. 이미 부처님이 돌아가셨고 그것이 법으로써 율로써 정해져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 스스로 머리를 깎는다든지 아니면 꿈속에서 부처님이 나타나가지고 출가시켜 준다든지 이런 허황된 얘기는 있을 수가 없게 돼버리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에히 빅쿠 시대인데도 바히야는 그러한 선근공덕을 안 지어놓은 거라.

 

여러분들도 과거생이나 아니면 이생의 얼마 전까지도 선근공덕을 많이 지어놓았다 할 것 같으면 지금 스님의 법문을 듣는다든지 아니면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게 될 것 같으면 가슴에서 환희심이 일어나는 것들이 훨씬 더 많아집니다. 또 그 소리만으로도 그 가르침만으로도 법을 이해하는 능력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됐을 경우에는 그냥 쌓다가 여기서 나갈 때 돌돌 털고 나가버리는 형태들이 되는 거라.

 

빨리 그런 조건들을 만들려면 선근공덕들을 자꾸 지을려고 해야 됩니다.

열 가지 바라밀 알죠? 열 가지 바라밀들을 자꾸 실천하려고 해야 됩니다.

언제 여러분들에게 그런 조건이 딱 맞닥뜨릴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그러한 조건은 탁 그렇게 기회가 맞을 때, 아마 일생에서 스님의 경우를 봤을 경우에 일생에서 저도 10번 미만입니다. 그런 조건이. 딱 한 차례 탁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10번 미만입니다.

물론 자기 자신이 그런 공덕을 지어놓았기 때문에 과감하게 뭘 할 수도 있고 하겠지만, 어쨌든 그런 공덕을 이 바히야는 안 지어놓았기 때문에 바리때하고 가사를 구하러 가다가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나중에 부처님이 탁발하고 돌아오다가 이 모습을 보고 제자들에게 그럽니다.

바히야는 나의 가르침을 듣고 가장 빨리 깨달음에, 아라한에 이른 쉽게 말하면 상수제자다 하고 얘기합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는 얘기 많이 들었죠?

그런데 테라와다 불교에서 '십대제자'라는 명칭은 없습니다. 80명의 가장 뛰어난 제자는 경전에 등장합니다. 그 80명의 제자에는 출가자도 있고 재가자도 있고 그렇습니다. 남녀가 다 같이,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다 있습니다. 80명 안에.

 

그런데 부처님은 이 바히야를 "출가비구 제자로서 나의 말을 듣고 가장 빠르게 깨달음에 아라한에 이른 자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특수한 조건들을 갖춘 80명의 제자가 될려고 할 것 같으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과거전생에 나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깨달음에 이르러서, 부처님 말씀을 듣고 가장 빨리 아라한이 되기를 하고 서원을 세웠다. 그것이 굉장히 강했다. 그래서 이생에서 그러한 조건이 돼가지고 만약에 가장 빨리 아라한이 됐다. 그럼 그 사람은 그런 서원에 인해서 그런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서원 세우는 것이 결코 헛되이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생에서 '내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기를' 하는 서원을 세웠다, 그러면은 그것은 그 나름대로 조건을 갖추어가지고 깨달음에 이를 수도 있고, 만약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다음에 그것들이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또는 오래도록 수행을 하더라도 첫 번째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가장 뛰어난 자가 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또는 성품이 목갈라나 존자하고 사리뿟따 존자하고는 성품이 다르죠? 성품의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초심자들을 지도하기에는 사리뿟따 존자가 낫고, 좀 어느 정도 수행해서 수다원이나 이런 성인의 경지에 이르른 사람 중에 아직 아라한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목갈라나가 지도하는 게 좋고, 성품이 다릅니다.

그런 성품의 차이에 따라서 어떤 사람을 지도하는 데는 이 사람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을 지도하는 데는 이 사람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하고 얘기들을 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도 적어도 바히야는 이런 과거전생에서 그런 서원들을 많이 세운 덕분에, 그래도 부처님 말씀을 듣고 가장 빨리 아라한에 이르렀던 사람이 되었던 겁니다.

여러분들도 가끔씩 서원을 세워보십시오.

태국이나 미얀마 같은 경우에는 스님한테 탁발을 하고 나서 스님이 간단하게 마음속으로라도 발원을 해줄 때, 아누모다나 라고 해가지고 축원을 해줄 때, 사람들은 대부분 서원을 세웁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을 쪼르륵 따르면서, 어떤 사람은 스스로 마음속으로 서원을 세웁니다. ‘내가 이러한 선근공덕으로 인해서 뭐 어떻게 되기를’, 서원들을 세웁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꼭 탁발이 아니라도 법문을 듣는 이것도 선한 마음을 유지한 채 법문을 들었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이 법문 듣는 이 공덕으로 인해서 뭐 어떻게 하기를’ ‘내가 이 법문 듣는 공덕으로 인해서 좀 더 수행이 무르익기를’ 아니면 ‘내가 좀 더 건강해지기를’ 아니면 ‘내가 지혜가 일어나기를’ 그런 서원들을 세우는 것들은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이 많을 때 나중에 결정심으로써 작용들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항상 명심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이런 게 바히야 존자에게 일어났던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것을 보고 "아무리 많은 구절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하나의 구절을 당할 수가 없다. 그것이 가장 뛰어나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청정해지고 깨끗해지게 하기 위해서 자꾸 ‘다음에 하지’, ‘다음에 하지’ 하고 미룰 수 있는 조건은 안 됩니다.

 

내일은 없습니다.

내일은 여러분들에게 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내일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늦은 시간이라는 겁니다.

지금 현재 하고 있을 때 적어도 내가 이런 서원이라도 세우고, 또는 선한 마음들을 계속 유지할려고 하고, 또 조금 더 수행을 할려고 해야만이 내일이 보장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내일은 여러분들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는 겁니다.

그걸 항상 여러분들이 명심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이 바히야 스님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얻을 수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