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마음의 오염원(upakkilesa) 세탁 (20170407. 대구)

담마마-마까 2022. 4. 23. 09:00

https://youtu.be/uJ2yF6Rk_3g

* 마음의 오염원(upakkilesa) 세탁 (20170407. 대구)

 

오늘은 「마음의 오염원(upakkilesa) 세탁」이라는 제목으로 얘기를 하는데, 이 자료의 일부는 테라와다 홈페이지에 2014년도에 올려놓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게 불완전해가지고 그 뒤에 부분을 좀 첨가를 했습니다. 첨가를 하고, 사실은 오늘 내어주는 여기 것도 완전한 건 아닙니다.

이것 말고 위빳사나 우빡낄레사(vipassanā upakkilesa) 라고 하는 것은 위빳사나 수행할 때 일어나는 장애들 열 가지 장애들인데, 그 부분까지 해야만이 우빡낄레사(upakkilesa) 부분이 완전해지는데, 그 부분은 오늘 설명하는 것으로 대체를 하겠습니다.

 

낄레사(kilesa)는 번뇌인 줄은 알죠? (예)

번뇌는 왜 번뇌라고 그래요? 번뇌가 일어나면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게 되는 거고, 그리고 그런 번뇌가 일어나면 도덕적으로도 말이나 행동이나 마음이나 이런 것들로 인해가지고 오염돼버리게 되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에게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거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자신은 정신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육체적으로도 괴롭힘을 당하고 괴로움이 일어나고 합니다. 낄레사라고 의미는 그런 의미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낄레사하고 우빡낄레사 하고는 실제적으로는 경전에서는 같은 의미로써 쓰입니다.

우빠(upa)라고 하는 것은 '가까이에 있다' 라는 뜻입니다. 안 그러면 '낄레사를 좀 더 잡아당긴다'는 의미로써 얘기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빳사나 우빡낄레사 라고 할 때는 사실은 그것은 낄레사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건데, 열심히 노력할려고 하고 그다음에 사띠가 일어나서 아주 자연스럽게 되고 하는 것은 좋은 일들인데, 그것이 장애가 된다는 것은 뭐냐하면 그것들이 착 달라붙어 버려가지고 그것들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그걸 우빡낄레사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보통 경전에는 낄레사 라고 하는 단어 보다는 이렇게 우빡낄레사 라고 하는 단어로써 많이 쓰게 됩니다.

 

보통 우빡낄레사(upakkilesa) 라고 할 때 크게 나누면 한 세 종류는 되죠?

··치로 인해서 오염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얘기할 때를 얘기합니다.

그것 말고 지금 여기서 얘기하는 열여섯 가지 종류가 더 있습니다.

또 16가지 종류가 여기서는 중부경전을 가지고 쓴 건데,

다른 경전에서는 앞에 두 가지 부분을 여기서는 탐욕이라도 '지나친 탐욕', 그리고 성냄이라도 '지나친 성냄'을 얘기하는데,

또 다른 경전에서는 그냥 '일반적인 탐욕, 탐욕 전체'에 포함이 되고, 그다음에 성냄도 성냄의 '일반적인 성냄' 그래서 '도사' '로바'로써 명칭이 바뀌는 부분도 있습니다. 16가지가. 그래서 그 두 종류로 나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전에서는 이 우빡낄레사를 세 부류로 나누어 놓은 것들도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몸으로 인해서, 말로 인해서, 마음으로 인해서 오염되는 것들 그것들을 한 부류로 하기도 하고.

 

또 한 부류는 악의를 가지고 도덕적인 감각적인 욕망을 일으키고 하는 것,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해치려고 하는 것, 쉽게 말하면 선한 의도가 아니고 불선한 의도로 인해서 일어나는 3가지가 우빡낄레사의 영역 두 번째 중간에 속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마지막 미세한 부류에 속하는 것들은 보면, 보통 출가한 스님들에게 많이 일어나는 것들이 됩니다. 가족에게 매달리는 것들, 그다음에 자기가 거주하는 곳에 대해서 매달리는 것들, 또 대접을 안 해주는 것에 대해서 마음을 일으키는 것들, 그러니까 남들이 멸시·무시하고 하는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미세한 번뇌 더러움을 얘기할 때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 부류로 얘기하는 경우들도 있고.

그래서 우빡낄레사는 경전에 이와 같이 다양하게 쓰여집니다.

 

여기에는 그중에 대표적인 거 하나, 이 16가지를 예로 들어서 얘기를 해놨습니다.

그거는 아마 16가지를 보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읽어보면 이것들을 보통 알 수가 있고, 또 여기에 대한 법문은 붓다의 길따라 선원에서 2014년도에 한번 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오늘 설명할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한 번 읽는 것으로써 지나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마음을 오염시킨다는 정도만 알고 그것에 대한 자세한 것들은 그 법문들을 참조를 하면 됩니다.

 

「마음의 오염원이란 무엇인가?」 16가지 마음의 오염원의 종류

 

① 첫 번째가 아빗자(abhijjhā) 라고 해서 '탐욕은 지나친 욕구로 마음의 오염원이다' 하는 겁니다.

② 그다음에 브야빠다(byāpāda) 라고 하는 분노 지나친 분노·해치려는 마음.

③ 세 번째 꼬다(kodha) 라고 해서 강한 분노.

④ 네 번째, 우빠나하(upanāha) 라고 해서 원한.

⑤ 다섯 번째, 막카(makkha) 라고 해서 위선적인 것, 악을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숨기는 것들.

 

⑥ 여섯 번째, 빨라사(paḷāsa) 라고 해서 다른 사람이 선한 일을 하고 덕행을 지니는 것들에 대해서 그걸 일부러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길려고 하는 것들. 다른 사람의 덕행을 경시한다.

⑦ 일곱 번째가, 잇사(Issā) 질투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잘 되는 것들을 별로 바라지 않는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⑧ 여덟 번째, 맛차리야(macchariya) 라고 해서 인색함.

잇사 하고 세트로 돼서 보통 잘 나옵니다.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인색하게 하는 것들.

 

⑨ 아홉 번째가 마야(māyā) 라고 해서 속이는 것, 자기 자신을 자꾸 정당화시키는 것들. 사기·속임·기만

이 마야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⑩ 열 번째 사테이야(sātheyya 사테이야) 라고 하는 아첨·교활함이라고 하는 것.

아홉 번째 '마야'하고, 이 열 번째 '세테이야'는 보통은 자기 마음에 나쁜 것들이 일어나더라도 그게 나쁜 줄을 모르고 괜찮은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들이 바로 이 아홉 번째하고 열 번째입니다. 이 부분은 굉장히 조심해야 될 부분입니다.

 

⑪ 열한 번째, 탐보(thambho) 라고 해서 완고한 것, 귀기울일려고 하지 않는 것.

⑫ 열두 번째가 사람보(sārambho) 라고 해서 다툼, 겨루는 것, 논쟁할려고 하는 것.

⑬ 열세 번째가, 마나(māna) 라고 해서 만, 자만.

만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높게 보고 낮게 보고 동등하게 보고, 아니면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에 비해서 비교해 봤을 때 그렇게 분류하고 하는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겁니다.

 

⑭ 열네 번째가 아띠마나(atimāna) 라고 해서 교만한 것, 거만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하는 것들.

⑮ 열다섯 번째, 마다(mada) 라고 해서 나태하고 쉽게 뭔가에 현혹돼버리는 것들.

⑯ 열여섯 번째, 빠마다(pamāda) 라고 해서, 게으름·부주의·나태한 것들.

그런데 열다섯 번째하고 열여섯 번째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뒤에 '마다(mada)'는 똑같은데 여기 열여섯 번째는 빠마다(pamāda) 라고 해서 게으름·부주의한 것을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사띠를 놓쳐버리는 것들을 빠마다라고 하고, 사띠를 놓치지 않으면 '압빠마다(appamāda)'가 되는 거고,

그다음에 '빠마다'에서 빠(pa)를 빼버리고 나면 '마다(mada)'가 될 것 같으면 쉽게 대상에 빠져버리는 것 쉽게 말하면 나태해지고 뭔가 현혹돼버리는 것을 얘기할 때 '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고, '빠마다(pamāda)'라고 하는 것은 사띠를 놓쳐버리는 게으름에 속하는 종류입니다.

 

이 16가지는 이런 것들 16가지 마음의 오염원의 종류가 있다 하고 분명하게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면 일어난 것을 분명하게 알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수행을 하더라도 망상이 일어나면 망상도 그냥 '망상' '망상' 하는 것보다 '아, 이게 무슨 망상인가?' 하는 것들을 알면은 아, 이게 내가 남을 해치려는 생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망상인지, 아니면 욕심부리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망상인지 그것들도 구분해서 보면은 그 망상에서 빠져나오기가 쉽듯이, 이 16가지도 이렇게 분류를 해버리고 나면은 여기서 빠져나오기가 쉬워집니다.

 

이것들을 분류해서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보통 여기서부터 마음이 더러운 것부터 마음이 오염된 것으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특히 여러분들 같이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잘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물들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런 것들을 자꾸 방해하는 것들이 마야 하고 사테이야 라고 하는 것들이 자기 자신이 착한 것처럼 정당한 것처럼 자꾸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것들도 더러움(번뇌)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19페이지에 보면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방법」에 대한 것들

그때그때 마음에 나타나는 더러움을 인식하고 발견하는 것, 그것을 확인만 하면 그 더러움은 그 오염된 것들은 사라져버린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인하고 사라져버리고 나면 마음은 다시 맑고 깨끗한 상태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들여서 계속적으로 이런 실천을 해나가야 됩니다.

수행을 할 때든 아니면 일상생활을 할 때라도 이런 것들이 일어나는지 분명하게 확인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확인하는 습관들만 들이더라도 크게 이것들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하는 것들이 중요합니다.

 

그다음에 이렇게 계속 해나가다 보면 마음이 어느 정도 이런 탐·진·치의 영역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상태가 되게 돼있습니다. 그러면은 마음에서는 '아, 내가 인제는 마음이 쉽게 이런 더러움으로부터 물들지 않는다' 하는 것들을 알 거 같으면 확신(saddha, 확신, 믿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확신들이 생겨나버리면 이 부분에서는 보통 90% 이상은 빠져나온 상태가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확신들이 생겨나고 그런 확신들이 들면 더욱더 노력해서 실천할려고 하게 됩니다. 선한 마음을 더욱더 가질려고 하게 되고, 부처님 가르침을 더욱 더 배울려고 하게 되고, 또 수행들을 좀 더 열심히 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진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고 체득하게 되면 그것으로 인해서 즐거움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빠못자(pāmojja)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즐거움이 일어나면 기쁨(pīti)들이 일어납니다.

몸과 마음에서 기쁨들이 일어나면 점점 몸도 가벼워지고 편안해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대상에 대해서 알아차리면서 집중하는 사마디(samādhi)가 더욱더 일어나지게 되고, 마음이 대상에 오롯하게 몰입되게 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 상태가 되면 인제는 더욱더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들도 수월하게 되고, 그것을 만약에 사무량심(Catu-Appamaññā) 수행을 할 것 같으면 멧따 수행을 하더라도, 아니면 까루나, 우뻭카, 무디따 수행들을 하더라도 그 수행들이 아주 수월하게 돼나가게 되는 거라.

그러한 것들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아·에고는 점점 더 없어지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들이 점점 더 강하게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부처님이 마음을 세탁하는 프로그램으로써 얘기해 놓았습니다.

 

그걸 부처님이 "시나또 안따레나 시나네나 띠(sināto antarena sinānenā'ti)"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의 내적관찰·목욕으로 인해서 완전하게 목욕을 한 자가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 일화들을 부처님이 강을 비유를 해가지고 얘기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무수한 강들이 있지만 그 강에 가서 목욕한다 해가지고 업이 소멸된다든지 아니면 신이 있어가지고 자기 스스로는 죄를 소멸하지 못하고 신의 부름에 의해서 죄사함을 받는다든지 이런 것들은 없다 하고 분명히 단언적으로 얘기합니다.

그것은 뭐냐면 "마음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인해가지고 그것들이 사라질 수 있다" 하는 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를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16가지에 대한 것들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 우선 첫 번째가 되고,

그것이 되고 나면은 그다음에 하는 것들이 를 잘 지키는 것,

그다음에 생각하고 하는 것들을 악한 것들을 하지 말고 선한 것들을 하는 것,

그다음에 뭔가를 하더라도 감정적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하는 것들,

그다음에 살아가는 것들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되기 위한 것들로서 자꾸 전환해가지고 해나가는 것, 그래서 그런 방법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

그다음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마음이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게 되는 것들을 유지해 나갈려고 하는 것들,

그다음에 보통 더러움은 외부적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빡낄레사라고 얘기할 때 보통 보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오염원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육근을 잘 관리해가지고 마음에서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그렇지 않으면 수행할 때 무상··무아라고 하는 것, 그다음에 이 몸이 부정하다고 하는 것, 그다음에 호흡을 열심히 관찰하는 것, 이런 것들로 인해가지고 자기 자신이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것, 그렇지 않으면 자애수행 하는 것,

그다음에 자신 중에 가장 잘 안되는 것들, 탐욕이 많다 라고 하면 탐욕 하나만 이번 달에 실천해가지고 그걸 없애도록 만들고 하는 것들, 이렇게 하나하나씩 잡아가는 방법,

 

이런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는데, 이 방법들을 다 동원해도 되지만 자기 자신에게 맞는 방법들로써 해나가면 큰 무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수다원과 불환자와 아라한에 이르렀을 때 사라지는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하고 얘기해놓았습니다.

⑤~⑩번째까지는 수다원에서 제거되고, 불환자는 ②~④번째와 ⑯번째가 사라지고, 아라한은 나머지 모든 부분들도 ①과 ⑪~⑮ 모두가 완전히 사라진다 하는 것들을 얘기해 놓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보통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번뇌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오늘 얘기하고 싶은 것은 위빳사나 우빡낄레사(vipassanā upakkilesa) 부분입니다.

위빳사나 수행하면서 알아차리는 것이 오염돼버린다는 겁니다. 오염되는 것으로 인해서 문제가 생겨난다는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뭐가 있어요?

 

언제 위빳사나 수행에서 이런 오염된 것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잘 관찰돼나가고, 그래서 이것은 정신적인 현상이고 이것은 육체적인 현상이고 하는 것들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상태, 원인·결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끔 되고, 그래서 법에 대한 확신들도 어느 정도 들고나면, 그다음에 위빳사나 수행할 때 오염원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게 보통 '빛' 같은 것, 그다음에 모든 것들이 '무상하다 고다 무아다' 하는 이해는 하고 있는데 그것들이 '지혜인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들, 그렇지 않으면 더욱더 노력하는 것들이 오히려 '지나친 줄도 모르고 계속 달리다 보면' 꼭 과속페달 밟아가지고 사고가 일어나는 것처럼 사고가 일어나게 되는 것들, 딴 방향으로 가버리게 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이런 것들이 보통 "10가지 위빳사나 수행에서 일어나는 오염원이다" 하고, 그걸 "위빳사나 우빡낄레사(vipassanā upakkiles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하나 하나로 보면 수행하다 보면 반드시 일어나는 것들이고 또 그것들은 참 좋은 현상들입니다. 여기에는 보면 사띠 부분도 있어요. 사띠 있으면 좋잖아? 그런데 왜 이게 수행할 때 일어나는 오염원이라고 할까?

또 어떤 경우에는 열심히 노력하는 것, 그거 좋은 거잖아? 그런데 왜 이게 또 오염원이 될까? 하는 그런 여러 가지 의문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것들에 대한 이해들을 분명하게 할 줄 알아야 만이, 수행할 때 이런 오염원으로부터 빨리 빠져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거기에 머물러버리고 자신이 '아, 내가 해탈했다' 아니면 '내가 수다원에 이르렀다' 하고 착각을 해버릴 수가 있다는 거라. 그 부분은 주의해야 됩니다.

 

이 위빳사나 우빡낄레사 부분은 그래서 오염이 일어났을 때 오염인 줄 알 것 같으면 바른길로 다시 접어들게 되고, 그런데 오염원인 줄 모르고 그냥 그것에 머물러 가지고 있을 것 같으면 그것은 도가 아닌 상태라는 거라. 그래서 이것을 칠정정에서는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이라고 합니다.

그게 오염원인 줄 알고 빠져나오면 도(道)라고 분명하게 알아서 청정의 상태에 이르게 되고, 그런데 오염된 상태인 줄 모르고 그대로 그냥 쭉 그게 좋은 것 마냥 머물러버리게 될 것 같으면 비도(非道) 라고 하는 것에 머물러서 거기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도비도지견청정의 부분에 들어가면은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도비도지견청정 부분은 오염원에 오염돼있는 상태가 반이고,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와서 그다음에 일어나는 지혜의 단계가 반이고, 그렇게 구분이 되게 됩니다.

 

경전의 10가지 부분하고 수행에서 일어나는 순서는 조금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알아차려서 빨리 몰아내기 쉬운 순서하고 또 경전의 순서하고는 조금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스님이 지금 얘기하는 10가지 부분은 자주 일어나는 것과 빨리 몰아낼 수 있는 순서대로 해가지고 얘기를 하겠습니다.

 

맨 처음에 일어나는 것이, 수행 잘하면 맨 처음에 보통 호소하는 것이 "어, 스님, 제가 뭔가를 봤습니다." 뭔가 자기 자신이 새로운 걸 본 것, 그러니까 몸도 가벼워지고 몸에서 광명도 나고, 뼈마디가 다 보이고, 부처님이 확 나타나가지고 자기 머리 쓰다듬어주는 것처럼 보이고, 맨 처음 나타나는 게 보통 그것들입니다. 거기에 보통 빠져버립니다.

오바사(Obhāsa 光明 ) 부분은 경전 곳곳이나 주석서에서는 세세하게 그걸 나눠놨습니다. 어떨 때는 그런 빛들이 나타나는 것이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정도로 될 때도 있고, 어떤 경우는 번개치듯이 확 일어날 때도 있고, 아니면 집채만한 파도가 확 몰아닥치듯이 이렇게 올 때도 있고, 그런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안 그러면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확 스며들어가지고 완전히 거기에 흠뻑 젖어버리는 것처럼 될 때도 있고, 그런 여러 가지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한 것들은 꼭 빛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전부 수행을 하면서 일어나는 빛의 오염원들이라고 판단들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런 경험 해본 사람들 많죠? 그런데 본인은 해탈했습니까? 그냥 하나의 현상일 뿐이죠? 현상인 줄을 모르면 자꾸 다음 수행할 때도 그걸 경험할려고 그럽니다. 그러면 계속적으로 거기에 딱 걸립니다.

본인은 먼저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아, 이것은 위빳사나 수행하면서 일어나는, 가장 먼저 일어나는 위빳사나 수행할 때 일어나는 오염원이고 그것은 하나의 대상일 뿐인 것이지, 지혜하고 전혀 관계없고 더더구나 해탈하고는 전혀 관계없다고, 도와 과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자꾸 인식을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꾸 대상으로써 볼려고 해야만이 그것으로부터 탈출을 해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아까 얘기했듯이 소름끼치도록 하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파도치듯이 온다든지, 빛이 나와가지고 온몸을 감싼다든지, 갖가지 현상들이 자꾸 크게 해가지고 자기 자신에게 덮치게 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 거기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고 망상의 영역으로까지 빠져버리게 된다는 거라. 자기 자신이 그 빛을 타고 하늘나라로 가서 부처님을 만나고 오는 경우도 있고, 그런 망상의 영역으로 자꾸 속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빠져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이 오바사(Obhaāsa)가 일어나면 수행에서는 하나의 대상이라고 자꾸 인식을 해야 됩니다. 전혀 도와 과하고는 관계없다 하고.

 

단지 그런 것들이 일어나면 '아, 내가 호흡을 하고 있는데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대상을 어느 정도 잘 알아차려지고 있구나' 하고 자기 스스로는 위안은 가질 수가 있습니다.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할 거 같으면 이런 현상은 안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 위안을 가질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의 습관이 바뀐다든지 어떤 다른 경지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하고 분명하게 자꾸 인식할려고 해야됩니다. 그게 첫 번째 부분입니다.

 

그것은 꼭 위빳사나 수행이 아니라도 사마타 수행으로도 일어나지는 겁니다.

니밋따라고 하는 종류들이 전부 여기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렇지 않고 꼭 불교적인 사마타수행 40가지 종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냥 한국식으로 염불한다든지 이렇게 하더라도 일어날 수가 있는 겁니다. "이거는 아주 흔하디 흔한 것이다" 하고 자꾸 판단을 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단지 내가 어쨌든 집중이 잘되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들이 있으니까 이런 것들이 일어난다 하고 위로는 삼을 수 있지만 어떠한 경우든지 이것은 해탈은 아니다 하고 마음을 먹고 그것들을 관찰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들은 놔줘버리면 그것들은 저절로 싹 사라져버립니다. 집착하는 힘이 약하면 약할수록 빨리 사라져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그거는 일어나면 사라지도록 자꾸 놔줘버려야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방법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냐나(ñāṇa )라고 하는 겁니다.

보통 지혜라고 얘기하는데, 여기 위빳사나 우빡낄레사에서는 왜 지혜를 빤냐(paññā 智慧)라고 안 했느냐면 냐나(ñāṇa) 하고 빤냐(paññā) 하고는 다릅니다.

지혜(paññā) 부분에 속하면은 만약에 무상하다고 본인이 분명하게 알았으면은 무상하다고 알고 그냥 끝나버립니다.

 

그런데 이게 장애가 될 경우에는 그러니까 냐나(ñāṇa)로 바뀔 때는 무상하다고 아는데 그것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됩니다. ', 무상하구나' 하고 매달려버린다는 거라. 빠르게 변하고 있으니까 '아, 이것은 무상하다' 하고 아는데, 알고 나면 그걸 놓아버려야 되는데 그걸 못놓고 거기에 빠져버리는 거라.

쉽게 말하면 '무상하다는 관념'에 빠져버린 상태라는 거라.

실제 무상한 성품들은 이미 빠르게 변해가지고 사라져버리고 없어! 그걸 무상하다고 알면 되는데, 그렇게 안 하고 무상하다고 알면 사라져버리고 실제적인 것은 무상한 성품은 사라져버리고 없는데 본인은 '무상하다'고 마음속으로 딱 매달려있는 거라. cittassa

 

우빡낄레사라고 하는 것은 보통 '찟땃사 우빡낄레사(cittassa upakkiles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육체나 이런 거하고는 관계없이, 쉽게 말하면 목욕하면 외부적으로 목욕하는 것이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우빡낄레사라고 얘기할 때 '오염을 세탁한다'는 것은 '찟땃사 우빡낄레사' 라고 해서 '마음의 세탁'을 얘기합니다.

마음이 깨끗하게 청정하게 돼있는 상태일 거 같으면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데,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집착을 해버린다는 거라. 무상한 것, 아니면 어떤 사람은 괴롭고 불만족스러운 것들, 이런 것들을 분명하게 알면 '아는 것에서 그것을 딱 집착하는 상태'라는 거라.

그걸 얘기할 때 여기서 장애가 되기 때문에 빤냐(paññā)라고 안 하고 냐나(ñāṇa)라는 용어를 쓰게 됩니다.

 

이것도 본인이 무상하다고 알고 나면은 무상한 성품이 사라지고 나면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분명하게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런데 계속적으로 무상하다 하고 알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본인은 수행에서 이 위빳사나 우빡낄레사의 영역의 하나가 탁 걸려가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빨리 그것들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뭐냐면 이것을 왜 냐나(ñāṇa)라고 했느냐면, 무상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았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해탈하고 관계있습니까?

있는 그대로 본 것은 맞지만 있는 그대로 봤다 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몸과 마음이 해탈하고 도와 과에 든 것은 아니라는 거라. 있는 그대로 봤으면 있는 그대로 보고 그냥 놓아버려야 된다는 거라.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아, 나는 있는 그대로 봤다!' 하고 그것을 계속 붙잡고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빤냐라고 하는 지혜의 영역에는 속하지 못하게 된다는 거라.

그것들이 보통 수행에서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들입니다.

 

수행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성품들을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보게 되더라도 그것들은 '대상일 뿐이다'라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 성품들은 대상일 거 같으면 당연히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면 사라져버렸으면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집착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되는 것이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버리면 안된다 하는 겁니다.

어쨌든 이렇게 무상·고·무아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보고 나면은 그다음부터는 인제는 되게 기뻐집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것들이 삐띠(pīti )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이거는 보통 경전에서 얘기하고 있는 순서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수행에서 보통 많이 일어나는 것들인데, 삐띠 부분들이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한 삐띠들도 삐띠가 일어나면 좋지. 기쁘면 더 노력할려고 하고 사띠를 더 열심히 할려고 하게 되는데, 왜 그러면 삐띠가 오염원일까, 수행에서?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삐띠가 항상 있든가요? 집중 잘 되고 사띠 잘되고 할 것 같으면 삐띠는 일어납니다. 그런데 집중력이 조금이라도 깨져버리면 삐띠는 확 사라져버립니다. 집중하고 알아차리고 노력하는 힘들이 어느 정도 발란스가 맞을 때 일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이 삐띠는 물결을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삐띠가 강도가 약하고 강하고 하는 것들이 자꾸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러면은 그렇게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아, 이것은 집중력이 약하면 삐띠도 약해지고, 집중력이 적어지면 삐띠도 사라진다' 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것이지,

 

그 삐띠 일어났다고 해가지고 그것 좋다고 할 거 같으면 이것은 수행에서는 장애가 돼버린다는 거라. 참 좋은 것들을 얻었는데도 이것이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그러면은 오히려 집중하는 힘들이 너무 과해서 수행에 진척이 없는 건지, 아니면 내가 노력하는 힘들이 너무 과해서 수행에 진척이 없는지를 스스로 자꾸 살펴봐야 된다는 거라.

 

살펴봐가지고 너무 집중만 할 것 같으면 삐띠만 계속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집중력을 떨어뜨려야 되는 거라. 왜 자꾸 삐띠만 보이도록 나타나도록 만드느냐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삐띠라고 하는 것은 집중력으로 인해서 그것들을 분명하게 아는 것들로 인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수행의 목표는 아니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을 때 이 집중력은 발란스를 맞추어 나가게 된다는 거라.

이게 보통 세 번째 일어나는 겁니다.

 

보통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에서 많이 헤맵니다.

그리고 이것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자꾸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들도 수행에서는 하나의 장애가 된다. 나에게는 오히려 마음을 청정하고 밝고 깨끗하게 하는데 오염원이 된다 하고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여기로부터 탈출을 하기 시작하면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빳삿디(passaddhi 輕安)라고 하는 겁니다. 경안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되게 가벼워집니다.

인제는 수행하는데 사띠하는데 방해하는 것이 전혀 없어요. 다섯 가지 장애도 안 일어나고, 몸도 되게 가볍고 마음도 굉장히 가벼워가지고 대상이 일어나면 즉각즉각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그런데 왜 이 빳삿디가 장애가 될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라.

빳삿디가 계속 돼버릴 것 같으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질 것 같으면 존재해야 될 이유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살해버리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이것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날 것 같으면 '아, 이게 부처님이 말한 공이구나' 하고 착각을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대상을 알아차리면 즉각 사라져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돼버리니까. 몸도 아주 가벼워져가지고 새털같이 되어서 아무런 무게감도 느끼지 못하고 되고, 그럼 공(空)이나 무(無)의 상태에 자꾸 들어가게 되는 거라.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과 테라와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은 약간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공에 대해서 알았다고 해가지고 해탈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러면 마음을 빨리 그것으로부터 되돌려야 됩니다. 대상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으면 다시 대상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이지, 대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거기에 그대로 있어버릴 것 같으면 그냥 빳삿디 자기는 좋아. 너무나 마음도 고요하고 몸도 편안하고 하기 때문에.

그래서 걸어다니고 하더라도 무게감이 전혀 없이, 가끔씩 보면은 걷는데 디딘 것 같지도 않게 디뎌지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실제로 안 디딘 것은 아닌데, 그 상태를 계속 유지를 하게 되는 거라.

그럴 때는 빨리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시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발 디디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는 거라. 앉아서 수행하다가 공의 상태에 빠지더라도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와야만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게 되는 거라.

 

이것은 내가 여기에 떨어져버린 것이지 이것들이 해탈이나 도와 과하고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닫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참 좀처럼 여기서도 빠져나오는 것이 사실은 힘듭니다.

앞에 거 3개에서는 조금 쉬웠는데 그것들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빠져나오는데, 이 빳사디의 영역에 속하면은 참 힘듭니다. 그런데 앞으로 일어날 위빳사나 수행에서의 장애들이나 오염원들에 비하면 이것은 쉬운 겁니다, 실제로는. 그래서 빨리 경안 상태에 빠져있는 것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내가 실제적인 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관념적으로 빠져있는 것만 탁 알 거 같으면 여기에부터 착 빠져나옵니다. 걸어가는데 디딘 것 같지도 않고 아주 경쾌하고 하더라도, 그럼 왜 아무것도 디딘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내 발은 움직였어? 그것은 내가 관념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

마음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빠진 것도, 내가 무슨 사마디에 빠진 것도 아닌데 그런 상태에 있는데 정신은 말똥말똥한 상태에 있다, 그럴 것 같으면 관념에 빠진 거라. '아, 내가 관념에 빠져있다'는 것만 탁 알 거 같으면 여기서부터 착 빠져나올 수가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수카(sukha )라고 하는 겁니다.

보통 행복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수행에서 얘기할 때는 '행복하다'고 하는 것보다는 '안락하다'는 표현이 오히려 더 맞습니다. 왜 그러냐면 아까 경안은 가볍고 고요한 상태인데 그래서 텅 비어 보이는 상태인데, 이제는 반대 몸 세포 세포 하나가 전부 깨어나가지고 아주 편안하고 아주 안락한 상태라는 거라. 그러니까 온몸이 아주 편안하게 바뀌어버리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온몸이 다 깨어나는 상태라는 거라. 뭔가 물을 마시면 이 식도를 통해서 쭈욱 내려가면서 시원한 걸 마시면 위로 들어가는 게 느껴지잖아. 그것과 마찬가지로 세포 하나가 아주 안락하게 바뀌는 것들이 느껴지게 되는 거라. 이걸 얘기할 때 수카라고 얘기합니다.

 

이것도 아까 빳삿디와 마찬가지로 빠져나오기는 참 힘드는데 그래도 이것으로부터 빠져나와야 됩니다. 세포 하나가 깨어난다 해가지고 안락하다 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해탈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럴 때는 이 실제적으로 안락한 것들을 딱 관찰을 해야 됩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물을 먹었다. 여기 목젖을 타고 갈 때는 목젖이 시원하다고 알고, 조금 더 내려가면 조금 더 내려가는 것에서 시원하다는 것을 알고, 이 느낌을 분명하게 관찰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 가슴을 통과할 때는 가슴을 통과하는 것을 느낌으로 분명하게 알 때는 요것들을 모릅니다.

그런데 수카의 상태에 빠졌을 때는 이것 전체가 이 앞에도 안락하고 요 밑에도 안락하고 하는 전체가 다 보인다는 거라. 그러면 본인은 알아야 됩니다. 아, 내가 실재하는 안락함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걸 뭉뚱그려가지고 '행복하고 안락하고 편안하다는 상태'에 빠져있다는 거라.

 

아까는 다 빠져나가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된 것처럼 느껴졌는데, 인제는 전체가 다 꽉 찬 느낌인데 아주 편안하고 안락한 상태가 돼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것도 하나하나를 자꾸 관찰해야 됩니다. 세포가 하나가 편안하다 할 것 같으면 만약에 손끝이 아주 편안한 상태다, 아니면 손이 편안한 상태가 있다, 그러면 이게 점점 퍼져가지고 몸 전체로 쭉 다 퍼지는 것들이 보입니다.

그럼 이걸 다 따라갈려고 하지말고,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다 따라가집니다. 이 전체가 다 보이게 됩니다. 다 편안하게 돼는 것들이 보입니다.

그러고 나면은 하나씩 구분할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손이 편안하면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가슴이 편안하면서 안락하면서 행복감을 느끼면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대상을 자꾸 구분할려고 했을 때 이것들로부터 빠져나오게 되는 거라.

 

그런데 이렇게 말처럼 쉽게 안됩니다. 왜 그러냐면 행복한데 어떡할 거라? 보통 여러분들 뭐 때문에 사는데? 행복하기 위해서 살잖아. 그런데 행복한 것이 실제 수행에서 온몸 전체가 행복한데 마음까지도 다 행복한데, 그걸 누가 빠져나올려고 하겠어? 그래서 여기에서 많이 헤맵니다. 그러더라도 이것은 장애이고 오염원이라고 분명하게 자꾸 알려고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가 뭐냐면 아디목카(adhimokkha 確信)라고 얘기합니다.

아디목카는 집중하는 것들을 얘기할 때 보통 아디목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아디목카는 그거하고는 다릅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아디목카 하고 수행에서의 아디목카 하고는 다릅니다.

', 내가 가는 길이 이게 진짜 맞다!' 하고 확신이 탁 들었을 때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이거 외에는 안 보여! 그래서 수행이 잘 될 때는 수행 이외에는 다른 거는 안 할려고 그럽니다. 밥도 안 먹고, 누가 불러도 아예 그것들이 마음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냥 내내 수행하는 것만 계속합니다. 아디목카의 상태에 빠지게 됐을 때입니다.

 

보통 보면 몇날 며칠 그냥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대상을 계속적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본인은 이걸 위빳사나 수행에서 일어나는 오염원이라고 더러움이라고 생각을 못한다는 거라.

여기서 말하는 아디목카라고 하는 것은 '아, 내가 이 길로 계속가면 도와 과에 이르겠다'는 확신이 일어나는데, "확신이 일어난 것""확신이 일어났다는 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런데 그 확신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집착을 하게 되니까 실제로 본인은 그것이 집착인 줄 모르고 그냥 계속해나가고 있는 거라. 이걸 얘기할 때 아디목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위빳사나 우빡낄레사 라고 할 때 앞에 부분에서도 빤냐라고 안 하고 냐나라는 용어를 쓰듯이, 여기서도 삿다(saddhā)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아디목카라는 용어를 쓴 것을 보면 부처님이 용어선택도 적절하게 참 잘하는 거 같애.

 

예를 들어봅시다. 수행에서 배를 관찰하고 있는데 배가 계속적으로 변하는 것들이 보인다,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은 이걸 변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계속 달라붙어 버립니다.

그러면 배가 불러오고 꺼질 때마다 계속적으로 변하는 현상들이 보입니다. 거기에 딱 달라붙어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재밌으니까 더 계속해나가는 거라.

여기 달라붙어 있는 것만 알아차리면 딱 여기서 도와 과로 넘어가지는데 이걸 못하고, 보통 여기에 그런 확신들이 일어난 것들에 무상·고·무아를 알고 있기 때문에 무상·고·무아에 딱 달라붙어 있게 되는 거라.

 

그러면 달라붙어 있는 것과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은 다릅니다. 무상한 것들을 알고 있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그냥 그대로 또 흘러가버립니다. 그런데 달라붙어 있을 경우에는 그 무상한 것이 계속적으로 보여버리는 거라.

그러면은 실제로는 실재하는 것들이 계속 보이는 경우도 있고, 그 달라붙어 있는 마음으로 인해서 그 무상한 것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걸 할 때는 모르는 거라. 그래서 거기에 빠져버린다는 거라.

 

그럴 때 이것은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확신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에 대한 확신도 일어나게 되고, 수행에서 확신이 일어나게 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들도 일어나고, 그다음에 부처님 가르침에 의해서 깨달음에 이르신 분들 예류과부터 해서 아라한이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들도 일어나고, 그러니까 불교도의 특성인 삼보에 대한 확신들이 탁 일어나게 됩니다.

 

거기까지만 하면 딱 좋은데 요게 아디목카로 딱 바뀌어버리면 자신이 예류과에 이르렀다고 착각을 해버립니다. '어, 부처님이 삼보에 대한 확신이 분명하게 서면 예류과라고 그랬는데, 그럼 내가 예류과에 이르렀네' 하고 착각을 해버립니다. 아디목카는 그래서 위험하다는 거라, 수행에서는.

확신들이 일어난 것은 좋은데 확신이 딱 달라붙어버리면 자신이 그러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착각을 하게끔 만들어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이것들도 수행에서는 분명하게 넘어가야 될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법에 대해서 논쟁을 한다고 칩시다. 그러면은 부처님이 만약에 A를 설했다. 그럼 누군가가 부처님이 B를 설했다고 얘기할 것 같으면, 나는 "아냐! 부처님은 A를 설했어!" 하고 얘기를 해줍니다. 그것까지만 하면 좋은데, 그런데도 이 사람이 "아니야! B를 얘기했어!" 하고 자꾸 얘기할 것 같으면 나중에 이 사람은 성질내면서 "아니야! A라고 얘기했어!"

이렇게 했을 때는 A가 중요한 게 아니고, "왜 A인데 너는 자꾸 B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중심에 놓여버리게 되는 거라. 그때부터는 A니 B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게 중요한 게 돼버리는 거라.

 

쉽게 말하면 삿다가 중요하냐, 아디목카가 중요하냐 할 것 같으면, 삿다가 우선에 놓여질 거 같으면 그런 확신들-아디목카라고 하는 것은 안 일어나게 되는데, 아디목카가 우선이 될 것 같으면 삿다는 아디목카의 밑에 놓여버리게 되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럼 이거는 장애가 돼버리는 거라.

논쟁에서도 그게 다툼이 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자기 자신이 예류과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예류과에 이르렀다고 착각을 해버리는 상태가 되는 거와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런 확신들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확신들이 일어난 것들에 대해서 달라붙는 마음이 없어야만이 예류과에 탁 이르는데, 달라붙어버리는 마음이 생겨나버리면 예류과에 가지를 못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본인은 예류과에 이르렀다고 착각을 해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일곱 번째가 빡가하(paggaha 策勵)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 빡가하는 원래 노력이라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하면 노력으로 인해서 발란스가 무너져버리는 겁니다. 아, 인제 이것에 대한 확신들이 분명하게 일어났고, 이 길로 갈 것 같으면 인제는 끝이 보인다. 지혜도 일어나지고 이미 위빳사나 16단계 중에 몇 가지는 분명히 일어났기 때문에 그 지혜들은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럼 더욱 더 달려가게 되는 거라. 아까도 얘기했지만 브레이크가 고장나가지고 엑셀레이터를 밟는 것과 마찬가지 상태가 된다는 거라. 이걸 얘기할 때 빡가하 라고 얘기합니다.

 

노력이라고 해서 위리야(vīriya)나 와야마(vāyāma)라는 이런 용어를 쓰지 않고 빡가하라고 쓴 것은, 이게 장애로써 쓰여질 때 이게 오염원으로써 쓰여질 때는 노력이라는 이 용어들을 쓰게끔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차가 규정속도로 갈 거 같으면 앞에 브레이크를 밟으면 내가 그 차를 밟지 않고 분명하게 섭니다. 그리고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유지할 것 같으면 딱 서게 되는데 바짝 좁혀 붙인다든지 아니면 규정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할 것 같으면 앞에 밟아버리면 그대로 가서 부딪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또 빨리 달릴 것 같으면 주변이 안 보입니다. 주위 것들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그런 상태에 도달하면 자신에게는 대상이 아주 수월하게 관찰이 돼나가기 때문에 게으름 부리고 있는 것들이 전혀 없는 것으로 착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실제로는 지금 내가 과하게 엑셀레이터를 밟고 있는데도 그러한 상태가 아니라고 알게 되는 거라.

 

그래서 아, 내가 너무 과하게 지금 노력하는 힘이 있다고 알고 마음을 조금 더 안정시켜주어야 됩니다. 그럴 때는 대상을 바꾸지 말고, 한 대상을 계속적으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사실은 사마타 수행이 여기에서는 굉장히 용이하게 쓰입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서 노력의 힘이 균형을 맞추도록 자꾸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대상이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보이더라도 그걸 보지 않고 계속적으로 안정만 시키는 거라.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계속적으로 알아차리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사마디 상태에 이르러서 사마디 상태에서 다시 또 빠져나오고 나면 이 빡가하가 사라져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사실은 스님이 개인적으로 사마타 수행을 너무 등한시하지 말아라, 위빳사나 수행한다고 그냥 그것만 줄기차게 하라 하고 얘기 안 하는 이유가, 나중에 이것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힘들을 거기서 얻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그다음에 여덟 번째가 우빳타나(upaṭṭhāna 安住)라고 하는 겁니다.

우빳타나는 쉽게 얘기하면 사띠입니다. 사띠! 사띠를 하면은 사마디 상태와 마찬가지 작용들을 합니다. 고요하게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이 동요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족족 그대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런데 왜 이걸 우빳타나라고 해서 '거기에 머물러 있다'고 얘기할까? 안주하고 있다는 거라. 뭐가 빠졌어요? 사띠(sati)가 일어났으면 삼빠자나(sampajāna)가 같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런데 삼빠자나가 안 일어나고 사띠만 지속적으로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거라. 몸과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는데, 알아차림만 계속 지속되는 거라.

 

예를 들어봅시다. 알아차림이 지속돼나갈 때 배가 불러오면 배가 불러온다고 알아차립니다.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한 거라? 배를 대상으로 하는 겁니다. 그런데 배를 대상으로 했다는 것을 까먹어 버릴 경우에는 배가 계속 불러올 때 '불러온다'고만 알게 되는 거라. 실제로 불러오는 게 이 배인지 아니면, 다른 데서 불러오는 것인지 그걸 구분을 못하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걸 사띠만 있고 삼빠자나가 빠져버린 상태라고 하는 거라.

 

그래서 어떤 경우엔 사띠도 사띠는 있으면 있을수록 좋은데, 그것은 전제조건이 삼빠자나가 있을 때의 사띠를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삼빠자나가 빠져버렸으니 그 사띠도 아까 노력이 과한 것과 마찬가지로 과한 상태가 돼버리게 되는 거라.

그럴 때는 다시 대상을 자꾸 챙길려고 해야 됩니다. '어, 대상이 있지' 그리고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지' 그래서 대상쪽으로 자꾸 돌아가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띠에 대해서 자기가 사띠하고 있다는 것들을 과신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스님이 물어보게 됩니다. “사띠하고 있어?” “사띠 잘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사띠를 하고 있다는 거라. 사띠는 하고 있지. 그런데 삼빠자나가 빠져버리면 뭐가 일어났는지를, 뭘 했는지를 모르게 되는 거라.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에 글자가 '가 나 다 라' 라고 있다. 사띠를 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가''를 보면 '가'인 줄 분명하게 알고, '나'면 '나'인 줄 분명하게 압니다. '다'면 다'인 줄 압니다. 그런데 '가 나 다 라'는 분명하게 따라가면서 다 알았는데 '가' 다음에 '나'가 있는 줄을 모르고, '나' 앞에 '가'가 있는 줄을 모르면 삼빠자나가 빠져버린 상태라는 거라. 그럼 그거를 기억을 못하고 이해를 못하게 되는 거라. 그러한 상태라고 딱 보면 됩니다. 잘 따라갔는데!

그러면 화가 일어났으면 화가 일어났다는 건 분명히 알지. 그런데 화가 나쁜 걸 모를 것 같으면 알아차림이 있다고 하더라도 화는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아홉 번째가 우뻭카(upekkhā )라고 하는 겁니다.

사무량심에도 나오는 우뻭카 인데, 여기서 말하는 장애가 되는 우뻭카는 냉정한 우뻭카입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 했으면 됐다' 하는 마음이 드는 것, '인제는 더 이상 나는 할 거 없다' 하고 판단을 해버리면 여기서 끝나버리는 거라. 우뻭카에서.

분명하게 사띠도 있고 삼빠자나도 있고 모든 것들이 다 잘 갖추어져서 탐·진·치도 안 일어나고 아주 잘되고 있어. 이게 해탈이지 더이상 없다고 착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더이상 할 것이 없이 만족해버리는 상태에 빠져버리면 이 우뻭카라고 하는 장애가 탁 일어나서 거기에 머물러버리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런데 자신에게 돌아보면 됩니다. 아직 내가 생존에 대한 욕구들이 있는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뻭카의 상태가 지금은 장애로써 드러나졌다고 알아야 됩니다.

 

그다음에 열 번째가 니깐띠(nikanti 微欲)라고 하는 것, 미세한 욕구, 이거는 미세한 욕구라기보다는 그냥 이렇게 알아차리고 있는 수행 자체를 좋아하고 있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미세하게 좋아하는 것들, 좋아하기 때문에 더욱더 계속하게 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좋아하고 싫어한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떨쳐내고 버려버려야 되는 것들이지,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들을 한다고 해서 그것들을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들이 욕구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본인은 그걸 모른다는 거라. 좋아하는 것으로 인해서 계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미세한 욕구가 일어난 줄을 모르고 그냥 해나가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이거는 참 어렵습니다. 왜 그러냐면 수행에서 수행을 계속 지속해나갈려면, 약간의 이런 대상을 좋아하는 마음이 '미세한 떨림' 같은 것들이 있지 않으면 계속적으로 수행해나가는 것이 힘듭니다. 어찌 보면 동전의 양면과 마찬가집니다.

 

이게 참 힘듭니다. 앞에 아홉 가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극복해나가는데, 이 미세한 욕구들은 참 힘듭니다. 실제로 수행을 하다 보면 이런 장애가 아닌 상태라고 하더라도 사띠를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약간의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는 욕구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대상을 잘 알아차리기가 힘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행이 잘 되어나가도 그 수행하는 것들을 좋아하는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그걸 계속해나가기가 참 힘듭니다.

 

그런데 이것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이것도 수행에서의 장애이고, 오염원이다 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다른 것들에서 흥미가 없고 하는 것은 좋기는 좋은데, 그것이 미세한 욕구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일 거 같으면 이것도 버려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이런 것들 10가지가 위빳사나 수행에서 일어나는 장애들이고, 그것들도 위빳사나 우빡낄레사라고 해서 오염원들이다 하고 분명하게 인식해야 됩니다.

 

그런데 따로따로 하나씩 떼어놓고 나면 참 좋은 것들입니다. 일어나야 될 것들이고 권해야 될 것들이고 하는 것들인데, 그것들이 장애가 되는 것들은 아니다 하는 거라.

한마디로 얘기하면 '특출한 걸 뭔가 알았다', '신비한 체험을 했다' 그것은 수행에서는 장애다 하고 판단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보면 이 위빳사나 수행에서 일어나는 오염원들로부터 빨리 탈출을 할 수가 있다 하는 겁니다. 필수적으로 일어나는 능력이고 갖추어야 될 능력인데도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겁니다.

 

자! 오늘은 우빡낄레사를 얘기할 때, 위빳사나 우빡낄레사 부분에 대한 것들에 치중해서 얘기했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