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지식욕 (20170414. 대구)

담마마-마까 2022. 4. 25. 09:00

https://youtu.be/bkBj2lS4RxI

* 지식욕 (20170414. 대구)

 

오늘은 「지식욕」이라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왜 '지식'이라고 안 하고, '지식욕'이라고 그랬을까?

'욕심, 욕구'라는 단어를 같이 결합을 해놓았습니다.

 

첫머리 서두에 얘기해 놓았는데, 꼭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이 수행을 하든 안 하든 뭘까? 하고 생각을 해봤습니다.

명예나 재산이나 이런 것들은 있으면 좋기는 좋은데 부작용들도 많죠? 그 부작용들은 항상 있게 돼있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긴 한데, 부작용 때문에 그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꼭 좋다 하고 얘기하기에는 좀 어려운 부분들은 있습니다.

그 대신에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도 많이 알고 있으면 안 좋겠나 하는 마음들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실제적으로 보면 잘못된 것들도 있고 아니면 잘못 사용되는 것들도 있고 또 그러한 것들이 부작용을 초래하는 경우들도 틀림없이 있는데도 그런데도 많이 배울려고 합니다.

 

선원에 나오는 사람들을 쭉 한번 살펴보면은 우리 여기 대구 같은 경우에는 그런 분들이 잘 없는데, 다른 데 보면 뭔가 배울려고 하는 경향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불교를 알려고 하더라도 자기가 궁금한 게 있어가지고, 예를 들어봅시다.

큰 사찰에서는 49재를 지내는데, 초기불교에서는 49재 그거 안 지내도 된다 이렇게 하니까, ‘왜 그럴까?’ 하는 궁금증 때문에 와서 법문을 듣기도 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질문하는 경우들도 있고, 업장소멸 한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도 좀 의문점이 있으니까 그걸 배워볼려고 하고, 그런 경우들을 봅니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보면은 자기 의문점을 안고 있는 것들이 어느 정도 해결되고 나면은 그다음엔 안 옵니다. 자기가 필요한 것들은 지식적으로는 분명하게 습득을 해서 그것에 대해서 확립은 하게 되죠.

 

확립을 해서 아는 것 그 이익은 있기는 있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지식적으로 확립만 되고 나서 그것이 실천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가서 다른 사람들 하고 또 싸웁니다. 자기가 다니던 절에 또 가가지고 “아니더라. 부처님이 설한 것은 그게 아니고 요거다.” 하면서 얘기를 하게 되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 그것들에 대해서 반발하게 되고 싸우게 되는 거라. 그러다 보면은 여기도 못가고 저기도 못가고 하다가, 또 다른 의문점이 생기면 또 그것에 대해서 알려고 하고, 이런 경우들을 허다하게 봅니다.

 

사회에서도 꼭 마찬가질 겁니다. 그런데 필요한 것은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살아가는데 상당히 애로점들이 있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의 기준이 뭘까? 어떤 것들은 배워야 되고, 어떤 것들은 배우지 말아야 될까? 하는 기준들은 틀림없이 있어야 되는데, 그 기준들이 없이 막무가내로 이렇게, 특히 요즘 같은 경우에는 정보량이 얼마나 많아요? 그걸 그냥 그대로 습득할려고 그럽니다. 그냥 많이 알면 되겠지 하고 자기가 스스로 그걸 취사선택 할 수 있겠지 생각하고, 그냥 막 배울려고 하는 그런 것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기준들은 틀림없이 있어야 될 필요성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불교에서도 틀림없이 뭔가 기준점이 있어야만이 그게 배우는 것에 시발점이 될 수가 있는데, 그 불교도 배우는 시발점이 되는 것들이 바르게 성립되지 못할 것 같으면 그냥 배움으로 끝나버리고, 아니면 남들하고 계속 그것에 대해서 토론하고 논쟁하고 하는 것으로, 아니면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것으로 이렇게 바뀌어버릴 가능성도 커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기준점도 틀림없이 있어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경전에는 그 기준점들을 분명하게 제시를 해놓았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기준점에 대한 것들을 조금씩 얘기해볼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사회적인 것보다는 불교적인 얘기들을 해보겠습니다.

사회적인 부분들도 꼭 이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보면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사실입니까, 진리입니까? (수행자 : 진리입니다.)

사실은 아닙니까? (수행자 : 사실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객관적인 사실인 거죠? 쉽게 말하면 "도둑질하지 말아라". 하는 것은 진리적인 측면보다는 사실적인 측면이 강하죠? 그렇기 때문에 그거는 사실이지만 그거는 꼭 불교가 아니고 다른 종교나 아니면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객관적인 것이라는 거라. 보편적인 사실이라는 거라.

 

그러면 진리는 이런 보편적인 사실이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리고 개인적인 견해는 아니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진리가 될 것 같으면 보편적인 사실에다가 플러스 돼가지고 누구에게나 그 길을 따라갈 것 같으면 실천할 것 같으면 똑같은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상태! 이걸 얘기할 때 그것을 진리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한 가르침은 보통 보면은 진리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누구나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성에다가 개인적인 견해들이 없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견해들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확립할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몸소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수행을 한다고 할 거 같으면 부처님이 아, 모든 것들은 괴로움이다 하는 것을, 만약에 호흡을 통해서 ‘호흡이 진짜 괴로움이구나’ 하는 것들을 불만족스럽고 그러한 것들이 괴로움이다. 또는 무상하다 할 것 같으면 그것들이 아, 진짜 많이 변하고 항상하는 것들이 하나도 없구나 하는 것들을 스스로 경험을 통해가지고 알아야만이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이 배워 알고 있는 사실에다가, 자기 스스로의 경험이 더해야만이 그것이 진리로써 성립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런데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거하고는 다른 겁니다.

경험은 있든 없든 그건 관계가 없습니다. 사실적인 부분만 열심히 알면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실천을 안 해도 내가 많이 알고 있으면 됩니다.

뭐 10가지 바라밀 하면 보시 지계 부터 해가지고 쭉 알고는 있는데, 실제로 그 사람은 보시도 안 하고 계도 안 지키고, 그리해도 그 사람은 그러한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해나가면 문제가 뭐냐면 조금 공허한 거라.

스님이 처음 한국에서 출가하고 나서 가슴이 답답한 것들이 뭐냐면 강원에서 불교 교리를 배우긴 배웠는데, 이게 가슴에 와 닿지를 않아. 사성제에 대해서 고집멸도, 팔정성도는 뭐다 이렇게 쭉 배우기는 한데 그것들이 가슴에 와 닿지를 않는 거라. 보니까 이것들이 어떻게 실천이 돼가지고 이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되는지 방법들을 모르고 하니까 더 답답한 거라. 그래서 ‘아이, 이거 안 되겠다. 진짜 부처님이 이렇게 말한 건지 내가 원전을 한번 읽어봐야 되겠다’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밖으로 나가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렇게 공허해져버리는 거라. 많이 알고 있기는 있는데. 스님 같은 경우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해서 불교 학생회 활동을 했고 대학교도 마찬가지고 이런 식으로 쭉 활동들을 했기 때문에 불교적인 지식을 출가하기 전부터도 이미 많이 알고 있었던 상태라는 거라. 그런데도 한국에 있을 때는 출가하고 나서도 한번도 그것이 내 것이라는 생각을 안 한 거라. 누가 물어보면 잘 대답하기는 하는데. 자신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하기는 하는데 실제로는 보면 그것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거라.

그래서 누군가가 “스님! 나에게 고가 뭔지 분명하게 자기가 이해하고 설득이 될 거 같으면 스님을 하늘같이 받들겠습니다!” 해도 내가 그걸 설명할 줄을 모르는 거라.

팔고가 있고 사고가 있고 열심히 하더라도 그 사람 입장에서는 나도 그것을 체험을 안 해봤는데, 그 체험 안 한 것을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해본다고 해가지고 그 사람들이 그걸 납득을 할 수 있겠어요? 모르는 거라. 안 되는 거라. 그게 더 답답한 거라.

여러분도 아마 불교 공부를 하다가 보면 그런 것들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에 스리랑카에서 그런 적이 있습니다. 배우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되느냐?

아니면 실천하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되느냐? 해가지고 논쟁이 붙었어요.

누가 이겼을 거 같애요? 배우는 게 먼저다 하는 것!

결국은 배우는 것이 먼저다 하는 것이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계속 배우는 것만 하다 보니까 스리랑카에서는 지금 교학은 굉장히 발달돼있습니다. 그런데 실천하는 수행자 그룹은 그에 비해서 훨씬 적어. 이게 균형이 잘 맞았을 거 같으면, 아니면 그런 논쟁을 통해서 딱 확정적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을 거 같으면 또 다른 방향으로 바뀔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보면 뭘 실천을 할려해도 뭘 어떻게 하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라? 그래서 배우는 것이 우선이기는 한데, 어느 범위까지 배워야 되느냐 하는 것은 그때 결론을 내려 줬어야 되는데, 무조건 많이 배워야 된다고만 생각을 하는 거라.

경전을 다 배우고 그다음에 논서들 배우고 그다음에 주석서들 배우고, 또 다른 종교들하고 비교하는 것도 배우고 내내 계속 그러게 되는 거라. 그런데 실제로는 보면 그게 양이 엄청납니다. 평생해도 이걸 다 못하고 끝나는 경우들이 많다는 거라.

그럴 뿐 아니라 그렇게 해서 가설을 세워가지고 자기 견해를 확립한다고 하더라도 이게 다른 상황이 또 생길 것 같으면 그걸 또 외워야 되는 상황이 되는 거라.

 

버마에서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이 먼저냐? 사마타 수행이 먼저냐?

해가지고 논쟁이 붙었거든. 그것도 종교재판에까지 가가지고 그런 적이 있었어요.

그때 거기서 얻어진 결론들은 사마타 수행을 알아야만이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 수월하다 하는 식으로 결론이 났어요.

그거는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전까지는 어떤 사람은 사마타 수행이 우선이다 해서 사마타 수행만 쭉 하다가 보니까 평생 사마타만 하다가 위빳사나는 실제로 해보지도 못하고, 선정은 달인이 될지 몰라도 해탈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상태가 돼버리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위빳사나 수행만 쭉 하다가 보니까 사마타 쪽은 전혀 관심조차도 기울이지 않다 보니까, 나중에는 저 밑바닥에 있는 번뇌들이 일어날 것 같으면 그걸 어떻게 제어를 하지 못하고 그냥 환속해버리는 경우들도 있고, 이게 비일비재하게 바뀌어져 왔습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지만 실천하는 것들도 분명한 기준점들이 성립이 돼야만이 그것들을 실천하는데 용이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런데 어쨌든 실천하기 위해서 그것을 실증하기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뭔가를 많이 배우지 않으면 안되게 됩니다.

 

경전에도 출가한 수행자든 재가의 수행자든 수행자라고 하더라도 갖추어야 되는 것이 있다 하면서 15가지를 쭉 얘기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계율부터 해가지고 보시도 해야 되는 거고, 뭐 여러 가지를 하는 중에 배우는 것들도 하나의 항목으로 들어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배워가지고 내가 분명하게 이해했다고 하는 것은 주관적인 견해죠? 납득해가지고 자기 방식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만 있어가지고는 어떠한 경우든지 다른 사람들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길 하다 보면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 그렇게 주관적인 것으로 납득해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만 있어가지고는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았다 해가지고 그 가르침이 올바르다 하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는 거라. 부처님 가르침은 올바르다고 하는 증거로써 될려고 할 것 같으면 자기가 뭔가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납득해가지고 견해를 세우는 것뿐 아니라 더 나아가야 되는 부분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올바르다 라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아, 부처님 가르침은 진짜 올바르다 하는 것을 증명해낼 수가 있어야 될 거 아니라. 증명을 해야만이 아, 그 사람은 인제 할 일들을 다했다 하고 얘기들을 하게 됩니다.

그게 일반적으로 불교도들이 나아가는 패턴들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중간중간에 무수하게 다툼들도 일어날 수밖에 없고, 여러 가지 사건들이나 일들이 항상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런 다툼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실증돼서 ‘아, 이게 진짜 부처님 가르침이 올바르다’ 하는 것이 확립되기 전에는 문제들이 심각해지는 것들이 많다는 거라.

 

! 그러면 어디까지 배워야 되고, 어떻게 배워야 되는가 하는 기준점들은 뭔가 하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

부처님 가르침 배우는 것들에 대해서 ‘아, 이것이 참 올바른 것이구나’ 하고 그래도 납득을 할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확고하게 이해하고 알아야 됩니다.

그걸 '아까라왓띠 삿다' 라고 합니다. '이성에 근거한 확신'이 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성에 근거한 확신이 딱 들어야만이 그다음에는 실천하는 부분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경전에는 삼법인을 설해놨습니다. 그런데 어떤 다른 곳에서는 삼법인이 아니라 사법인을 얘길합니다. 열반적정까지 포함을 해가지고.

그런데 경전 어디를 보더라도 사법인이라는 것은 없어. 그럼 이성적으로 경전들을 전부 조사해보니까 "사법인은 없다" 그럴 것 같으면 자기 스스로 이성적으로 '아, 아니다. 부처님은 삼법인을 설한 것뿐이다!' 하고 분명하게 확신이 탁 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확신이 들고나면 누군가가 사법인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거라. 난 이미 경전을 다 조사해보니까 그런 것은 없다 하는 것이 딱 확인이 된 상태라.

그걸 쉽게 말하면 "이성적인 확신이 들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다른 것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아, 부처님 어떤 분인가? 하는 거 아무리 다른 사람이 설명을 한다고 하더라도 각각은 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럼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스스로 자기 자신이 경전을 통해서든지 뭘 통해서든지 그걸 다 조사를 해보니까 ‘아, 부처님은 이런 분이다’ 하는 확신이 탁 들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들지 않을 거 같으면 그냥 신적인 존재나, 아니면 구하면 뭔가 나에게 답을 주고 해결해 주는 분이나, 아니면 범아일여 같은 그런 아주 온천지에 존재하는 존재로서의 부처님을 상정한다든가, 이렇게 각각 다른 존재로서 성립되게 됩니다.

 

그런데 그거는 자기 자신이 부처님에 대해서 확신이 들려고 할 것 같으면 이성적으로 그걸 낱낱이 다 조사해봐야 된다는 거라. 진짜 그러는가? 조사를 해보니까 진짜 부처님은 그런 존재가 아니고 이런 존재다 하는 확신이 들어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붓다 담마 상가에 대한 것들, 아니면 다른 것들, 업에 대한 것들, 아니면 연기에 대한 것들, 이런 것들도 낱낱이 다 조사를 해보고 그것에 따라서 이성적인 믿음이 확립이 탁 돼야만이 ‘아, 그래도 경전 공부하고 불교 공부하길 참 잘했다’ 하는 마음은 들게 된다는 거라. 적어도 그거는 해야 된다는 거라.

실천하는 부분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확립이 돼야만이, 그다음에는 그다음 방법으로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찾는 하나의 방법이 있고,

 

또 하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살아가면서 참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내가 왜 살아갈까?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할까? 다른 사람들은 죄지어도 잘 살아가는데 그사람들은 왜 그런 조건으로 인해서 저렇게 잘 살아가게 될까?

그런 의문점들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 또 공부들을 해야 되는 거라. 그런데 실제로 공부를 해보면 경전에 그게 다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사는 목적이 뭔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확립을 하게 되고, 남이 잘못하고 잘 살아가는 것은 그 어떤 법칙에 따라서 지금 현재는 그렇게 되는데, 다시 또 과보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 확립이 되게 되고.

또는 나는 항상 마음이 좀 깨끗해져서 있고 싶은데 왜 자꾸 마음이 더러워질까? 왜 이렇게 불결한 것들이 자꾸 나한테 들어올까? 그걸 자꾸 조사를 해보게도 되는 거라. 마음은 청정한 줄 알고 있었는데 마음이 청정해지는 게 아니고 자꾸 더러워지고 있다는 거라. 왜 그럴까? 하는 거라.

그리고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밖에 심소라는 것이 있어가지고 그것들로 인해서 마음이 더러워지기도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거 같으면, 마음은 항상 청정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렇게 해서 조사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다 보더라도 참 끝이 없습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뭔가 또 다른 것들이 또 도전할 것이 생겨나고, 뭔가 또 다른 배울 것들이 생겨나고, 하나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가지고 그다음 문제가 또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가 뭐냐면 그렇게 하다가 보면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 착각을 하게 된다는 거라. 남들이 물어보면 내가 대답할 수 있으니까.

“마음이 왜 청정하지 못하느냐?” “어. 심소하고 이런 이런 것들이 있어가지고 마음이 더러워지기도 한다.” 내가 대답할 수도 있으니까.

“사성제 삼법인 이것에 대해서 이러이렇게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은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 배운 스승으로서 항상 하게 됩니다.

가끔씩 부산에 있으면서 그러한 모습들을 보기도 합니다. 내가 봤을 때는 저 사람은 별로 수행하고 실천하는 것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가 뭔가를 다 얘기해줘야 되는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위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도 보면 끊임없이 계속 공부를 하면서 하긴 하는데 그것으로 인생을 다 허비해버린다는 거라. 어찌 보면 그게 자신에게 장애가 된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재산이나 명예나 이런 것들은 크게 개의치를 않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실제적으로는 그런 행세를 할려고 하고 있는 거라.

얼마 전에 누군가가 와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어느 유명한 스님을 초청할려고 그러는데 초청하는 비용을 천만원을 달라고 그랬다나, 한 시간 와서 이리 해주는데 그걸 마련을 못해가지고 초청을 못하는 게 아쉽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럼 이미 그 스님은 거기에 젖어 있는 거라. 그것이 아니면 가서 법을 설해주지 않으니까. 하잘것없다고 하면서 자신은 거기에 빠져가지고 있는 상태가 돼버린다는 거라. 출가자들도 그러는데 재가자들도 그런 모습들을 보이는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끔씩 스님들에게 공양을 하는데 계율상으로는 재가자하고 같이 공양을 못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도 부득부득 자꾸 와서, 저쪽에 상이 있는데도 스님 자리에 와서 먹을라고 하는 사람이 꼭 있어요.

“그거 안된다. 같이 먹을 수가 없다. 계율적으로” 그렇게 하더라도, 자기를 무시한다고 자꾸 생각을 한다는 거라. 나는 그러한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

자기 자신에 대한 만, 아만이 자신도 모르게 자꾸 생겨나게 됩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이미 그러한 것들을 지적을 해도 그것에 대해서 귀를 열지를 않습니다. 같이 밥 먹을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소리가 그 사람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거라.

 

그래서 불교에서는 분명하게 얘기를 합니다.

불교적인 것들을 배우는 것은 수행의 하나로써 배우는 것들을 권하고 있다는 거라.

조금 배우고 나서 수행을 해서 확인해보고 확인해서 의문나는 것들은 다시 또 배워가지고 그것들을 보충하고 하는 그런 역할로써 지식이 필요한 것이지, 그 외의 것들은 사실은 필요하지 않다 하고 얘기합니다.

실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스님이 뭔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스님은 모릅니다. 그거 배울려고 생각도 안 했고, 마음을 기울여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는 요즘 선원 이렇게 하는데 선원을 어떻게 짓는지, 돈을 어떻게 모아야 되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걸 모으는 재주도 없고 방법도 모르고 아예 모릅니다. 또는 어떤 사람들은 그럽니다. “스님! 우리 교단이 조금 더 융성해지기 위해서 지금 불교방송에서 스님 법문하는 거 좀 내보내고 싶은데 그것 좀 해주십시요.”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라. 내가 뭐 유명해지기 위한 거나 아니면 교단을 확립하기 위해서 내가 법을 설하는 것이 아닌데, 구태여 그럴 이유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거라.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들에 대해서 계속 아쉬워하는 거라.

“좀 해주면 될 건데.” “스님 이거 다 알고 있을 건데" "그냥 요거 요렇다 하고 얘기해주면 우리가 하기 수월할 건데” 모르는 걸 내보고 어떡하라고 그걸 갖다 자꾸 얘길 하느냐는 거라.

 

관심을 기울이지 말아야 될 것에 관심을 가지면 항상 문제점이 일어나게 됩니다.

얼마 전에도 교단에서 뭔가 문제점 때문에 스님들하고 재가자들하고 다툼이 있었어요. 그걸 귀로써 들었어요. 그런데 스님들이 몰라야 될 것들을 재가자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거라. 그래서 재가자들한테 이것은 스님들이 할 게 아니니까 너희들이 이런 방식으로 해라 하면서 자꾸 강조하다 보니까, 재가자들 입장에서는 왜 스님이 그런 쓸데없는 것들을 간섭하느냐고 이렇게 됩니다.

필요 없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런데 왜 그런 불편하게 그런 것들을 하느냐는 거라.

 

부처님도, 증지부 경전에 보면 그런 것이 나옵니다. 나기타 라고 하는 장로하고 부처님하고 대화를 하는데, 부처님이 어디 초청되어가지고 공양청을 갔어요. 그러니까 그 마을에서는 부처님이 오신다니까 오만 거 좋은 거 다 갖추고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거라. 부처님은 그냥 그쪽에 가서 공양 할려고 갔는데 이거는 그게 아닌 거야. 그러니까 부처님은 거부를 합니다.

그렇게 보시받는 것들에 대해서 거부를 합니다. 그러니까 나기타 장로는 아쉬운 거야. 그냥 받아주면 될 건데 왜 안 받아주느냐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때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출가자들은 명예롭게 되는 것이라든지 뭔가 이익되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분명하게 알아야 된다.” 그걸 모르면 거기에 빠져버리게 된다는 거라. 부처님은 거기에 빠지지 않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몸소 제자들한테 보여주는 거라.

그 재가자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아쉽겠어? 바리바리 싸가지고 왔는데. 부처님은 그거 안 받고 차려진 음식 몇개만 먹고 법문만 하고 씩 가버리니까 얼마나 아쉽겠어?

그리하더라도 그게 바른길이라는 거라, 출가자로서는.

 

! 그래서 많이 배운다고 하더라도 경계해야 되는 부분들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항상 스님이 얘기하는 것, 뽀띨라 스님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삼장법사였습니다. 많이 알고 있고, 다 배우고 알고 있는 삼장법사인데도 부처님이 항상 “골빈 뽀띨라야!” 머리가 텅비었다는 거라. 아무것도 모른다고. 나는 다 알고 있는데.

왜 그럴까? 그래가지고 수행하게 됐는데, 일곱 살짜리 사미한테서 수행법을 배워가지고 단시간에 아라한에 이릅니다.

그 뽀띨라는 어떻게 그렇게 단시간에 아라한에 이를 수 있었을까?

배운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 그리고 자기 자신이 「나」라고 하는 것을 내세우지 않는, 마나라고 하는 것을 내세우지 않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게 가능하다는 거라.

 

그래서 어찌 보면 불교적인 지식이나 이런 것들은 빠르게 수행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는 굉장한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그걸 잘못 이해하고 잘못 사용할 것 같으면 수행에는 오히려 장애가 될 뿐 아니라 또 어떤 경우에는 필요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경우들도 더러 있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도 그 부분은 조심 해야 될 필요가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많이 배워서 논쟁에 이기기 위한 것들, 아니면 자기 자신이 만족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으로서는 별 의미가 없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도움이 되는 실천적인 가르침, 그것만이 배워야 될 그런 것들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지식과 지혜는 다릅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지혜는 열리지 않습니다. 지혜는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 스스로 실천할 때 지혜는 일어나게 됩니다. 그 실천은 배운 것들을 가지고 실천을 해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교재에는 없습니다.

 

부처님 제자(수행자)가 배워야 될 것, 배워가지고 실천해야 되는 것 열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수행자가 갖추어야 되는 것 15가지>

교재에는 없습니다.

첫 번째, 올바르게 믿음을(saddhā) 가지는 것, 그리고 확신이 들게끔 만드는 것.

그거는 자기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 확신이 들 수가 없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계율에 대해서 자기가 배워서 그것을 수지하는 것(silasaṁvara).

계율을 자기가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을 수지할 수가 없습니다. 받아 지닐 수가 없습니다. 배워가지고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사띠(sati)하는 것.

사띠가 뭔지는 분명하게 경전을 통해서 이해하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직접 본인이 그것을 대상들에 대해서 사띠하지 않으면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게 되는 거라.

 

네 번째, 수따(suta) 라고 해서 많이 배우는 것(bāhusacca).

수따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su'라고 하는 것은 '좋다, 잘'이라는 뜻입니다. 그것들 배운 것들이 잘 응용이 된다는 뜻입니다. 배우는 것들이 서로 연결돼가지고 그것들이 한 덩어리가 되도록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은 배움으로써 의미가 없습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 지혜(paññā).

지혜가 뭔지는 압니다. 무상·고·무아, 그다음에 몸과 마음에 대해서 분리하는 것, 배우기는 배우더라도 그것을 스스로 확인해서 실천해보지 않으면 지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그다음에 히리와 옷땁빠(hiri-ottappa) 두 가지입니다.

히리와 옷땁빠는 부끄러워하고 무서워한다는 건데, 어떤 것이 악이고 어떤 것이 선이다 라는 걸 분명하게 알고 배워 나가면 그것들에 대해서 두려워할 줄 알고 부끄러워할 줄 알고 무서워할 줄 알게 될 것 같으면 아예 그것들이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것들 히리와 옷땁빠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실천이 가능할 때 하는 것이지, 자기가 이미 죄를 짓고 나서 그것들에 대해서 ‘아, 이것은 무섭다’ 하는 그것은 히리가 아닙니다. 자기가 이미 죄를 짓고 나서 ‘아, 이거 참 부끄러운 거다’ 이것들을 얘기하는 것들이 아니라는 거라.

아예 그것들이 일어나지 못하게끔 만들어주는 것들이 히리와 옷땁빠 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실천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여덟 번째가 위리야(vīriya)라고 합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것.

어떻게 노력하는 것들이 노력이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런데 그 노력은 분명하게 뭔가를 구별할 수 있는 상태가 됐을 때 그 노력은 완전하게 되고 자연스러워지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위리야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이 될려고 할 것 같으면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서 적어도 분명하게 대상을 알아차리고 그것들이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이것들을 개발해낼 것이냐, 아닌 것들에 대해서 구분할 수 있는 상태가 되고, 그리 해야만이 자연스럽게 위리야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다음에, 인드리야 라고 해서 감각기관을 지키는 것(indriyasaṁvara).

감각기관이 뭔지를 압니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어떻게 내 마음이 오염되고, 그다음에 감각기관을 통해서 내 마음이 어떻게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배웠습니다. 배워도 그걸 지키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지키는 것은 그것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 그것을 지키면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열 번째가 먹는 것을 잘 조절하는 것(bhojane mattaññutā).

경전에는 먹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어떻게 먹어라 하는 것이 잘 설명돼있습니다. 그걸 잘 배워가지고 자기 스스로 먹는 걸 조절할 줄 알아야 됩니다. 먹는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좋고 싫음으로부터 떠난 상태에서 자기의 식사량을 완전하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될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계속적으로 자기가 실천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열한 번째가 활력이 있고 생기있게 계속적으로 해나가는 것(jāgariyānuyoga).

그거는 본인이 계속적으로 그것들에 대해서 중요함을 알고, 그리고 어느 정도의 수면시간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이해를 하고 나머지 시간들은 어떻게 조절해야 된다는 걸 알 것 같으면 그 시간 동안 헛되이 보내지 않을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열두 번째부터 열다섯 번째까지는 선정(jhāna) 부분입니다. 1선정부터 4선정까지.

이해는 하고 있었고 알고 배우고는 있더라도 그것에 도달하지 않으면, 그것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이런 것들은 배움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실천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끊임없이 실천을 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암이 생겼습니다. 이거 놔두면 어떻게 돼요? 점점 더 커져서 나는 죽게 됩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돼? 항암제를 맞아야 됩니다. 방사선 치료를 한다든지 뭘 한다든지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런 항암제는 항상 부작용이 있습니다.

장기들이 손상을 입는다든지, 얼마 전에 이사장 스님같이 방사선 치료하는 게 뼈가 약해진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리고 그냥 여기에 임플란트 할려다가 그냥 이 뼈가 금이 가가지고 하는 상태가 됩니다. 부작용이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그런데도 지금 내가 항암제를 안 맞을 수가 없습니다. 안 맞을 수 없는데, 심각하게 문제가 생기는데 어쩔 수 없이 맞아야 되는 거라. 방사선 치료를 해야 되는 거라.

그런데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라. 지식은 그와 같습니다. 실천되지 않는 지식은 항암제와 마찬가집니다. 방사선 치료하는 거와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하고 나서 치료를 하고 나면 당연히 그다음에는 몸이 고쳐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해탈의 길로 나아가야 되는 거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지녀야 되는 것이 불교적인 지식이라는 거라. 그리하더라도 그 기준은 분명하게 세워라는 거라.

 

그게 지식에 대한 주의사항에서 적어 놓은 겁니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것, 해가 되는 지식은 피하라는 거라. 피해를 입히는 것들은 그것은 모르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거라.

 

그다음에 해가 없더라도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을 얻을려고 고생하지 말아라.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되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든지 뭔가 도움되는 것들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아무 피해 없다고 해가지고 그거 알고 있다고 해가지고 그것들이 실천하는 데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거라.

불교적인 지식이 아무리 많아 봐야 그거 자기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들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오히려 지식만 늘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 일부러 고생고생해가면서 할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거라. 차라리 적게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천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거라.

 

그다음에 지식욕을 채우기 위해서 지식을 쫓아도 그것은 무의미하다는 거라.

그건 욕구만 늘려주는 것뿐이라는 거라. 욕구 늘려줘가지고는 해탈하고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리고 그렇게 많은 방대한 지식이 있는 것은 본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자랑할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되지는 못한다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또 하나는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얻을려고 하는 지식의 실용성. 실천성을 잘 확인하라는 거라.

이게 실천 가능한지? 또는 이것들이 입증 가능한지?

실천 가능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들은 의미가 없는 거고, 그것들이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일 거 같으면 그거는 지식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져 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불교의 지식은 적어도 그것을 실천하는 것으로써 의의가 있다 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들,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는가?

지식을 뭘 불교적인 것들을 많이 알고 있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계속 논리적인 것들만 되고 마음은 고요하고 깨끗해지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 또한 의미가 없어진다는 거라.

 

그다음에 또 하나는 이것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에게 향상이 있는 것인가?

인격적으로 향상이 되고 마음이 향상이 돼서 해탈의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하는 거라. 반대 방향일 거 같으면 그것도 큰 의미는 없다는 거라. 단지 그것은 지식으로써만 그래서 지식욕으로써만 끝나버리게 된다는 거라.

 

경전에는 분명하게 다섯 가지를 제시를 해놓았습니다. 스님은 다른 방향으로 지금 설명을 하는 것이고.

 

경전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는 뭐냐면

첫 번째가, 자신에게 이것이 관계가 있는 건가, 아닌가?

출가자는 출가자가 배워야 될 것이 있고, 재가자는 재가자가 배워야 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하고 관계가 없는 것일 거 같으면 그것도 필요 없는 거라는 거라.

두 번째, 이것이 도움이 되는가?

내 자신이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나 아니면 사회에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

세 번째가, 증명할 수 있는 것인가? 실천 가능한가?

네 번째가, 마음이 고요하고 맑게 되는가, 아닌가?

다섯 번째가 해탈로 나아가는가, 아닌가?

 

경전에는 이 5가지를 제시를 해놓았습니다.

그것들이 맞다고 할 것 같으면 배울 필요성은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분명하게 본인이 경계를 해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식욕은 항암제와 마찬가지다 하는 생각을 떨쳐버려서는 안 됩니다. 필요한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들은 항상 부작용을 만들 수밖에 없다 하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