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웨사카 붓다의 날을 축하하는 방법 (20170512. 대구)

담마마-마까 2022. 4. 27. 09:00

https://youtu.be/nNpkK4AvYQ4

* 웨사카 붓다의 날을 축하하는 방법 (20170512. 대구)

 

오늘은 「웨사카 붓다의 날을 축하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붓다의 날은 성스러운 날이죠?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성도하시고, 또 완전한 열반에 드신 그런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날이기 때문에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데 힘을 써야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프린트물에 적어놨듯이 "믿음을 재확인하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날이다" 하는 뜻입니다.

 

뭘 가지고 믿음을 재확인하죠?

여러분이 믿고 있는 것이 그대로 올바르다고 할 것 같으면 믿음은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그대로 올바르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믿음은 다시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 붓다·담마·상가 또 부처님이 가르친 수행법 그것대로 실천하니까 ‘아, 그것이 올바르구나’ 하고 다시 확인하게 될 때 믿음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믿는 것으로 인해서 차이가 나야 됩니다.

믿기 전에 하고 믿고 나서 차이가 나지 않으면 그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그것은 피상적인 것이고 맹목적인 것이 되는 것이지, 내가 바뀌어나가고 또 조금 더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이런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져야 됩니다.

 

믿음을 재확인할 때는 그런 것들이 재확인하는 방법입니다.

아, 내가 믿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아닌가? 올바르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잘 믿고 있구나. 또 믿은 것으로 인해서 내가 분명하게 차이가 있다 하는 것들이 확인이 되고 했을 때, ‘아, 그러면 계속 믿어도 관계가 없다’ 믿음을 확인할 수가 있게 되는 거고.

 

그렇게 하게 될 때 마음은 맑고 깨끗하게 됩니다.

왜? 스스로 이해해서 납득하게 되고 그것을 스스로가 증명하게 되기 때문에!

그래서 마음은 더욱더 맑고 깨끗하게 되는 그런 것입니다.

사실은 붓다의 날은 이렇게 믿음을 재확인 하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그런 날입니다. 소란스럽게 떠들고 하는 날이기보다는 그런 날이다 하는 생각을 항상 잊어서는 안됩니다.

 

왜 그럴까? 왜 이렇게 믿음을 재확인하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날이라고 했을까?

경전의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Yathayidaṁ brahmacariyaṁ addhaniyaṁ assa ciraṭṭhitikaṁ."

"야타이당 브라흐마짜리양 앗다니양 앗사 찌랏티띠깡" 그렇게 합니다.

"순수한 가르침이 확립되어서 오래도록 이 가르침이 이 세상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이 법을 설하셨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 법을 듣고 그 법대로 따르고 함으로 인해가지고 우리는 믿음을 다시 재확립 할 수 있고, 마음도 맑고 깨끗하게 되서 결국에는 해탈·열반에 들게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것들이 올바른 것들이고, 그 올바른 것들이 지금 나에게 확인이 되지 않고, 나도 그렇게 따라가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밖에는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부처님으로 인해서 그 법을 우리도 실천할 수 있고 나도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이르를 수 있기 때문에, 아 부처님이 말한 것이 한 글자도 틀린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변경 불가능한 것이고 이러한 부처님 가르침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오래도록 유지됐으면 하는 그런 바램들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 이렇게 부처님에 대해서 떠올리기만 하더라도 ‘아, 참 기쁘고 행복한 날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보통 서양에서는 이 붓다의 날을 영어로 쓸 때 「해피 웨삭데이(Happy vesak day)」 그렇게 얘기합니다. 행복한 날이라는 거라. 웨삭(vesak)이라고 하는 날은 행복한 날이라는 거라. 이렇게 우리가 행복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하는 그런 날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단지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더욱더 배우고 익히고 하는 것들을 해야 됩니다.

두 번째로는 그것들을 갈고 닦아서 증명할 수 있도록 체험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해탈·열반에 들어야 됩니다.

부처님이 우리들에게 바라는 것도 그것이고,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도 그런 것들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기본적인 것을 토대로 해서 붓다의 날을 기념을 해야 되는 것이지, 다른 외부적인 것들에 너무 치중돼버리면 항상 그런 형식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조금 전에 꽃·향·초 같은 거 올렸죠? 올릴 때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꽃 향 초를 올렸을 겁니다. 아까 게송들을 읽었죠? 그걸 요약한 것이 그 프린트물에 있습니다.

 

지금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도 이윽고 시든다.

양초도, 향도 곧바로 모두 불타서 없어져버린다.

그와 같이 우리 생명도 쇠약해져 사라진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됩니다. 그냥 아름답게 밝혀주고 항상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아, 저렇게 피어있는 꽃도 지듯이 나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는구나. 향도 마찬가지고 초도 마찬가지고 청정수도 마찬가지고, 그것들이 다른 것들에 오염되면은 향도 나쁜 향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청정수도 혼탁한 물이 될 수밖에 없고, 양초도 불타다 꺼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내 마음에 혼탁한 것이 들어오지 않도록 자꾸 노력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됩니다.

그래서 언젠간 나도 죽음을 맞게 되기 때문에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래서 나의 소유물이나 나의 가족들이나 나 자신에 대해서도 집착하는 것을 자꾸 버리도록 그렇게 노력해서 아,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을 다 해 마친다 하는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우빠까라고 하는 분에게 한 얘기가 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에 이겼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 육근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은 어떤 것이든 나는 그것들로 인해서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난 승리한다는 거라. 눈을 통해서 본다고 하더라도 본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번뇌에 휩싸이지 않고 감정적으로 대하지를 않게 되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그런 감정으로부터 전부 싸워서 이겼을 때 나는 모든 것들로부터 이겼다 하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알았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내 몸은 뭐로 구성되어 있는지? 아,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거는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조건지워진 것밖에 안 되는구나. 그런 생명으로 태어났을 때 내가 해야 할 일이 뭔가?

보다 더 남들 보다도 더욱 더 공덕을 많이 쌓고, 또 빨리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노력해야 된다는 거라. 이런 것들을 분명하게 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부처님이 얘기한 것이,

모든 것들로 인해서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번뇌가 있으면 마음은 더러워지고 동요하게 됩니다. 번뇌를 소멸해버릴 것 같으면 마음이 동요하는 일은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내 자신에게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 이르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집착을 버려버려야 됩니다.

갈애가 있기 때문에, 뭔가 붙잡고 매달리고 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윤회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뭔가 생각에 딱 꽂혀있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계속적으로 생각들이 일어나고, 그것으로 인해서 항상 괴로움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갈애가 있기 때문에 윤회를 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 갈애는 존재하는 데서, 감각적인 욕망에 대해서, 그리고 더 오래 살려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냥 흐지부지 아무렇게나 살려고 하는 이런 것들도 전부 다 갈애에 해당이 돼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열심히 살려고 하고, 감각적인 욕망에 빠지지 않을려고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어떠한 경우든지 살아있으면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받아들여서 더욱 더 열심히 살려고 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다시 되새길 수 있는 그런 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향과 꽃, , 청정수 이런 것들을 부처님한테 올립니다. 아, 나는 얼마만큼 번뇌를 버려버리고 있는가? 얼마만큼 나는 감정에 이기고 있는가? 나는 얼마만큼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고 있는가? 하는 걸 잘 새겨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각각의 나라에서는 이러한 붓다의 날에는 보통 물고기나 육고기 종류들을 잘 먹지를 않습니다. 법적으로도 4월 보름 전후 이틀간 아니면 삼일간은 도축하는 것조차도 법령으로 금지를 시켜버립니다. 그마만큼 성스러운 날에 생명을 빼앗는 그런 나쁜 일은 하지 말아라는 뜻입니다.

그 대신에 방생하는 일을 자주 합니다. 새를 날려준다든지 물고기를 방생한다든지 뭐든지 자꾸 생명을 살아갈 의무가 있고 사는데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인정해주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어지럽히는 술집 같은 것들 이런 것들도 문을 닫아버리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런 날에는 불교도들은 여러분들은 잘 안 그러는데, 불교도의 상징은 흰옷입니다.

부처님도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꿈을 꾼 것 중에 몸은 하얗고 머리는 까만 개미들이 수없이 자신의 몸을 기어오르는 꿈을 꾸었다 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얀 옷을 입고 머리가 까만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주위로 많이 모여들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에 이른다는 그런 뜻입니다.

거기에 착안이 되가지고 불교도들은 보통 그날은 흰 옷을 입고 그렇게 사원에 모입니다. 그날은 보면 재가자들이 전부 흰색으로 다 입고 옵니다. 그중에는 나라마다 청색을 입기도 하고, 분홍색 옷을 입기도 하고 그런 경우는 있지만 기본적인 것은 항상 하얀 옷을 입고 오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이날이 불기가 시작되는 날이죠? 쉽게 말하면 한 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아딧타나-결의합니다.

‘아, 내가 올해는 뭔 일을 하겠다.’ 돈을 더 많이 벌어야 되겠다 이런 것이 아니고, 이번에는 내가 좀 더 선원을 위해서 좀 더 노력을 하겠다, 아니면 자기 자신이 성이 많으니까 성질내는 것들을 줄이도록 하겠다, 없애도록 하겠다. 그래서 아딧타나-결정심을 냅니다. 결의를 하게끔 됩니다. 아, 올해는 잘 지킬지 안 지킬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게 결의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날 하루 동안은 오늘 여러분들이 받았듯이 팔계를 받아지니게 됩니다. 좀 더 재가자로써 청정범행을 닦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출려고 하고, 그러면서 하루종일 그날은 머물면서 탑돌이도 하고, 경전독송도 하고, 스님 법문도 듣고, 또 수행도 하고 이러면서 그날 하루 동안은 그래도 재가자라기 보다는 출가자와 다름없는 그런 청정한 날을 보내려고 그렇게 노력을 합니다.

 

그날은 스님들도 법문을 여러 차례 해줍니다. 돌아가면서, 이 스님이 했다가 저 스님이 했다가, 그리고 시간만 나면 스님들이 또 모여있는 사람들한테 가서 “같이 경전 독송합시다!” 해가지고 경전 여러 가지들을 같이 독송하기도 하고 그렇게들 합니다. 온전하게 붓다의 날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여기에도 써 놨지만 「타인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행위」들을 행합니다.

사원에서 모여있으면 서로 당연히 화합하고 서로 존중하게끔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사원의 일인 것이지 다른 외부적인 일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일이지 사회적인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날은 붓다의 날은 사회적인 일들을 같이 겸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저번 주에 그런 일 했습니까? 양로원에 가서 보시도 하고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날은 다른 사람들에게 좀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일들을 합니다. 고아원이든 양로원이든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든 또 병에 걸린 사람들이든 이런 사람들에게 평온하고 행복하게 되기 위한 것들을 자꾸 행하게 됩니다.

보시를 하기도 하고, 노력 봉사를 하기도 하고, 그뿐만 아니라 길가든지 사원 앞이든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꾸 뭘 먹일려고 그럽니다. 음료수 한잔이라도. 그리고 내가 만든 반찬이나 떡 한조각 이라도 같이 나누고 먹일려고 그렇게 합니다.

 

어찌 보면 붓다의 날은 참 그래서 좋습니다. 개인은 개인대로, 또 사원은 사원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해야 할 일들을 하게끔 합니다.

개인은 스스로 믿음을 확인하고 마음을 맑게 하게 되고, 또 사원에 모여있으니까 서로 화합하도록 서로 법에 대해서 듣고, 또 그것들을 드넓혀 가지고 사회에서 모든 이들이 다 행복하게 되기 위한 날을 만들려고 하는 것들, 그런 날이 바로 붓다의 날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 밑에 적어 놓은 것이 「연등행렬」 입니다.

아마 올해도 한국에서는 제등행렬이라고 해서 많이 했을 겁니다. 그런데 부산이든 서울이든 대구든 마찬가집니다. 너무 제등행렬이 거창합니다. 어찌보면 ‘저거 하는데 뭐하러 저렇게 돈을 많이 들일까?’ 하는 그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테라와다 국가에서는 제등행렬이 없습니다. 거기에 돈을 안 쓴다는 얘깁니다. 그 돈이 있을 거 같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맛있는 걸 먹일 수가 있는데, 왜 그 돈을 쓰느냐고 그럽니다.

 

그런데 스님이 개인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는 필요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고, 그것을 너무 과하게 하는 것들이 문제가 됩니다.

적당하게 해서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들은 필요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그 신심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그 신심이 불교를 믿는다든지 부처님 가르침 대로 살아가는 신심을 일으키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한계를 지닌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거기에 너무 지나치게 치중할 필요는 없다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오신날 되기 전에는 등 만든다고 몇달 동안 난리가 납니다, 절에. 그런데 그것도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테라와다 불교 국가에서는 개인이 자기 등을 만들어 옵니다. 개인이 각각의 마을에다가 등을 설치하고, 자기 집 앞에 설치하고, 아니면 사원에다가 걸기도 하고, 아니면 마을에다가 큰 법륜 같은 것들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볼 수 있게끔 하고 그런 것들을 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사원에서 그것들을 전담해서 하는 법은 없습니다.

 

어찌 보면은 한국은 모든 것들을 사원에서 다 대리해주는 그런 역할들을 합니다. 기도도 개인이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전담해서 하고, 부처님 오신날 등 만들고 하는 것도 사원에서 전담하고, 돌아가신 분들 뭐 하는 것도 전부 사원에서 전담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찌 보면은 참 안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들을 많이 봅니다. 중요한 것들은 그게 아닌데, 중요한 것을 자꾸 빼먹어버린다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사원에서도 각각으로 전담해주는 것은 있을 수 있다고는 쳐. 그렇지만 좀 더 큰 등 만들어놓고 그것은 십만원이고, 작은 등은 오만원 하고. 그걸 그렇게 구분한다고 하는 것은 참 잘못된 부분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자기 형편 따라 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은 방법이고, 또 안 하면 어때? 안 한다고 해가지고 등을 달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단지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등도 그렇게 사원에다가 달아놓기도 하고 집에 달아놓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 마을을 지난다든지 사원에 왔을 때, 그래도 엄숙하고 마음이 고요해지기 위한 활동들만 합니다.

청소를 한다든지 아니면 벽화를 무섭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편안하게 부처님 일대기들 얼마나 좋아! 그런 것 그려가지고 사람들이 ‘아, 부처님 참 훌륭하신 분이구나’ 하는 것이 떠오를 수 있게끔 해준다든지, 이런 것들을 참 많이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날 가면 아, 부처님 오신날에 대해서 진짜 행복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는 그런 것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기에도 적어놨지만 그런 행사들보다는 「부처님에게로의 경의」를 표하는 것! 존경의 예를 표하는 것들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아난다 존자에게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슬퍼하지 말아라. 나는 죽음을 맞는다. 이렇게 구성된 것들은 모두 다 죽음을 맞게 된다." 소멸된다. 그러니 그것은 예외가 없는데 내가 안 죽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됐다는 거라. 내가 죽고 나서는 인제는 내가 너희들에게 법을 설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법을 의지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성도하고 나서도 부처님이 의지했던 것이 법입니다.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었지만 아, 이제 내가 의지해야 되는 것은 소중한 내가 깨달은 이 법이다 하는 거라. 그래서 이 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펼치도록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 법을 의지하도록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대신하는 것이 '담마'와 '위나야'이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실제적으로는 부처님을 자꾸 의지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담마를 자꾸 의지할려고 해야 됩니다. 담마에 맞게끔 살아갈려고 하고 담마에 머무를려고 자꾸 해야 되는 것이지, 부처님 오신날이라고 해가지고 부처님 개인적인 숭배를 자꾸 할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부처님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른 방법은 아니라는 거라.

 

법을 자꾸 실천해서 법에 따라 살게 되고, 법을 내가 증득할 수 있게 될 때 그것이 가장 큰 부처님에 대한 경의라는 거라. 마지막 열반에 들 때 다른 사람들은 다 부처님한테 와서 꽃 올리고 하는데도, 한쪽에서 수행하는 사람을 보고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저 사람들이 바로 나에게 가장 큰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법을 의지하는 것만큼 더 좋은 것이 어디 있느냐는 거라.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직하게 가르침을 실천하고 정직하라는 거라. 그런 것들을 잘 되새기게 될 때 우리는 웨사카 붓다의 날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축하하는 일들을 하게끔 됩니다.

 

축하하는 방법이 참 많이 있습니다.

많이 있더라도 올바르게 붓다의 날을 축하할 수 있는, 또 스스로 행복해지는 일들을 자꾸 찾도록 그렇게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질의 응답 >

Q 수행자 질문 : 조금 전에 「모든 육체가 소멸해도 한탄하지 마라. 내가 죽은 뒤에는 법이 너희들의 스승이 된다」 이런 유언을 하셨다는 것은...

A 스님 답변 : 부처님은 유언을 하시지 않습니다.

수행자 : 이 글에 보면 이렇게...

스님 : 그것은 경전에 보면 아난다가 부처님 떠나고 나면 으짭니까? 하고 슬퍼하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대답하신 것뿐입니다.

 

Q 수행자 질문 : 그런데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부처님이 너가 나를 돌아가시지 말라고 만류를 했으면 나는 더 살 수 있다는 이런 말씀을...

A 스님 답변 : 붓다의 수명연장은 붓다의 능력으로는 가능한 일입니다.

나중에 1차 결집 때 아난다 존자가 장로들에게 참회를 했던 것 중에 하나가 "왜 부처님은 더 살 수 있다고 하셨는데, 너는 귀담아 듣지 않고, 부처님 더 머물러 주십시요 하고 너는 더 청하지 않았느냐?"

청하지 않으면 부처님은 하지를 않습니다. 공양도 청하지 않으면 가지 않고 하듯이, 누군가가 나에게 더 머물러달라고 했을 때는 더 머물 수 있었는데, 부처님은 수명을 연장하는 법을 압니다. 더 오래도록 머물 수가 있는데도 그러지 않고 3개월 전에 붓다가 목숨을 유지하는 것들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놓아버리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3개월 후에 열반에 들 것이다 하고 말씀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인데, 어찌 보면은 연장은 할 수가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계속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부처님은 바란 것은 뭐냐면 모든 이들이 다 법을 따라서 실천해서 모든 이들이 다 그렇게 해탈하기를 바랬는데 그렇다고 해서 다 해탈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이 바라는 대로 할 것 같으면 모든 이들이 해탈할 때까지 다 그렇게 살 수가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실제로는 연장하는 데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부처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살아도 100년 200년 더 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해가지고 후세에 오는 사람들까지 내가 그것을 챙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겁니다. 단지 돌아보니까 인제 내가 설한 법이 완전하다는 것은 인식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없더라도 이 법이 스승이 돼서 사람들을 인도할 것이다 하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수명연장을 포기를 하시게 된 겁니다.

 

그런 것이고, 어떠한 경우든지 착각을 하면 안됩니다.

부처님 열반하실 때 유언을 하신 건가? 유언하신 적은 없습니다!

부처는 어떠한 경우든지 유언을 하지 않습니다. 이미 유언을 하시기 전에 모든 것들을 다 설해놓았기 때문에 유언할 필요성이 없는 거죠. 그래서 이 부분을 "내가 죽은 뒤에 법이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하는 것은 당부이지 그것을 유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