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무관계한 일에도 휘말려 들어간다. (20170331. 대구)

담마마-마까 2022. 4. 20. 09:00

https://youtu.be/bLqJWTeQ00k

* 무관계한 일에도 휘말려 들어간다. (20170331. 대구)

 

오늘은 「무관계한 일에도 휘말려 들어간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별로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일인데 거기에 휘말려 들어가서 갖가지 일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일들이 가끔씩 있죠? 보통 보면 되게 관계가 친밀했을 때 이렇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친하지 않은 사람일 거 같으면 그 일에 그렇게 휘말려 들어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 많이 좀 친하면 본인이 생각했을 때 별 쓸데없는 것에 휘말려 들어가가지고 나중에는 그게 분쟁 당사자가 되어있는 경우들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스님도 한번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진주에 아버님이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한 삼년지나서 재혼을 한다는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집안에서는 자식들이 난리가 났어요. 다들 반대를 하는데, 스님이 그래도 현명한 판단을 할거니까 스님이 결정을 내려주십시요 하고 얘기를 하더라고. 내가 뭔 결정을 내려주겠노?

그래서 그거는 아버님 판단에 맡겨라. 아버님이 여러 가지를 고려해가지고 재혼을 해야 되겠다 싶으면 재혼을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뭐 그냥 같이 살겠다 할 것 같으면 같이 사는 거고, 아버님 판단에 맡겨야 되는 것이지 자식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그 차후에 일어나는 일들은 그 이후에 일을 처리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까지 대비해가지고 지금 할 이유는 없다 하고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결과적으로는 아파트도 뺏기고 뭐도 뺏기고 나중에 그런 결과가 됐어요. 그래서 집안에서는 나한테 원망을 하는 거라. 다른 자식들이 다 반대했을 때 스님이 같이 그냥 반대했을 거 같으면 그런 일은 안 일어났을 건데, 결국 아버지 판단에 맡겨가지고 그렇게 됐다 하고 원망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속으로 내가 출가해가지고 뭐 그걸 나한테 물어본 것도 잘못인 것이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아버님 판단을 무시하고 자식의 의견대로 하는 것도 그것도 말도 안 되는 거고, 참 난처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집니다. 관계가 없는 일에 휘말려 들어가는 경우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고, 그런 부분에서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 그러한 것들이 일어나는 것들로 인해서 일들을 자기가 지은 업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조상들 때문에 내가 잘됐다. 아니면 조상들 때문에 내가 뭐가 잘못된다" 하고 판단하는 그런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든지 조상의 업은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습니다.

업(Kamma)의 법칙에도 안 맞는 거고, 업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것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습니다. 그거는 분명한 것이기 때문에 잘 이해를 하도록 해야 됩니다.

 

일화를 적어 놨습니다. 사위성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일화로 적어 놓았습니다.

일화가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일화를 조금만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 부부가 깨달음을 이루신 아라한 한 분을 매일같이 탁발을 올리면서 시봉을 했어요. 그러니까 아라한도 이 가족하고는 되게 친해져있는 상태거든. 사실은 이 스님도 잘못한 게 뭐냐면 탁발을 나갔으면 어느 집 한 곳만 가서 탁발을 해가지고 그것을 먹으면 안 되게 돼있습니다. 그때는 계율이 생기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던 거죠.

그래서 뭐 한집에 가서 탁발을 해서 그 자리에서 먹고 법을 설해주고 하니까 그 집으로 봤을 땐 참 좋죠. 올바르게 법을 전해 받을 수도 있고, 또 공덕도 지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이게 친하게 지내다 보니까 아직 밥때가 안 되었는데 가서 기다리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스님은 어디 가면은 딱 그 시간에 갈려고 합니다, 일부러. 그래서 그런 위험성으로부터 피할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찍 가면 거기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눈에 목격하기도 합니다. 태국에 있을 때도 집에 초청되어가면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멀리 있을 경우에는 시간을 못 맞춰가기 때문에 어떨 때는 일찍 도착할 때가 있습니다. 요즘은 일찍 도착해도 그 시간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가는데, 옛날에는 그냥 바로 들어가니까 막 음식하면서 싸우는 모습이라든지 안 좋은 모습들을 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공양을 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한 경우들이 있었어요.

 

이 스님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날따라 조금 일찍 도착을 했는데, 이 집에서는 금방에서 원석을 가져와가지고 세공일을 하는 분인데, 이 세공이 스님에게 요리를 대접하기 위해서 고기를 짜르다 보니까 고기가 손에 묻고 이렇게 돼있었어요. 그때 마침 꼬살라 왕이 원석을 시자에게 보내가지고 이걸 좀 이렇게 이렇게 가공해주시오 하고 부탁을 했거든. 그 원석을 손으로 받아놔놓고 손을 씻으러 갔어요. 그런데 그 원석 보석에는 손에 묻은 피가 그대로 묻어버린 거라.

그런데 이 냄새를 맡고 학의 일종인데 거위라고 표현은 해놓았습니다만 거위하고는 조금 종류가 다른 겁니다. 학 종류를 집에서 키우고 있었는데, 요즘 같으면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이게 고깃덩어린 줄 알고 꼴딱 삼켜버렸네, 이 보석을. 그 스님은 이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었던 거라.

 

그런데 세공하시는 분이 와서 보니까 그 보석이 없어졌거든. 의심을 누구로 하겠어요? 그 스님을 의심하게 되는 거라. 그 스님이 나쁜 맘을 먹고 보석을 숨겼다고 생각을 하는 거라.

그런데 불교에 대해서 잘 아는 분일 거 같으면 적어도 그런 마음을 안 품었을 건데, 적어도 아라한일 거 같으면 그런 것을 훔칠 수도 없을 뿐아니라 그런 욕심도 부릴 수가 없게 돼있는 구조인데. 자기하고 똑같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좋은 거 있으면 가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고 판단을 하게 된 게 잘못인 거죠. 그래서 이 스님을 다그칩니다.

그런데 이 스님이 ‘저 거위가 먹어버렸소’ 하고 말을 할 수가 없는 거라. ‘거위가 먹었소’ 해버리면 어떻게 하겠어? 당장 거위를 죽일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러니까 자신의 입으로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무 소리를 안 합니다.

그러니까 더 의심을 해가지고 이 스님을 막 두드려팹니다. 이 모습을 보고 부인이 와가지고 스님에게 그리해서 되느냐? 스님이 이때까지 우리한테 해준 게 얼만데, 그래도 법을 설하고 우리를 위해서 참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축원을 해주고 한 스님인데,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신 성자께서 그렇게 남의 물건을 훔칠 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거는 그렇지가 않을 것이다 하고 말려도 성이 나있는 사람은 그 소리가 안 들립니다.

 

살인은 어떤 때 저질러 지느냐면 욕심이 일어나서 살인이 저질러지는 게 아니고,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살인이 저질러지는 게 아니고, 성냄으로 인해서 일어나집니다. 성내는 것들이 과해질 거 같으면 자기도 모르게 그게 살인을 저지르는 형태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살인은 성냄의 영역에 속한다" 하고 주석서에 써진 게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공인은 그렇게 하다가 이 스님한테서 막 피가 터지고 하니까 그 거위가 다시 또 그 앞에 먹을 게 없는가 해가지고 냄새를 맡고 기웃기웃하게 되어서 세공인이 화가 나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제정신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거위를 발로 뻥 차버립니다. 당연히 거위는 저쪽에 가서 죽어버리게 되는 거라.

그때사 이 스님이 얘기를 합니다. 거위 상태를 한번 확인해봐라. 거위가 움직이지 않고 죽어있으니까 그때사 얘기합니다. “거위가 그것을 삼켰다” 그래서 실제로 그 거위의 배를 갈라보니까 보석이 나오거든.

그러니까 이 세공인이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겠어? 괜히 생사람을 두드려 팬 상태가 되니까.

 

그런데 이 스님도 맞은 게 원인이 돼서 결국에는 죽음을 맞습니다. 거위도 그 세공인이 발로 차서 죽여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세공인도 결국 그 일이 원인이 돼가지고 오래 살지 못하고 조금 있다가 죽음을 맞습니다. 부인도 남편이 없는 상태에서는 오래 살지 못하고 얼마 안 가서 죽음을 맞습니다.

그런데 네 사람이 똑같은 이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태어난 곳은 다 다르게 됩니다.

아라한은 당연히 깨달음을 이루었으니까 열반에 들어버린 상태가 됩니다. 빠리닙바나에 들어간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런데 거위는 여러분들도 집에 애완견을 키워봤으면 알 겁니다. 죽을 때 굉장히 애처러워합니다. 떠나기 싫어합니다, 그 가정을. 그런 경우에는 보통 보면 다시 그 집안에 태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부인 몸에 아이로서 잉태됩니다. 그 부인은 아이를 낳고 나서 나중에 그래도 좋은 일들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나중에 천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공인은 아라한을 죽인 게 원인이 돼가지고, 직접 죽인 것은 아니죠? 그런데 그게 원인이 돼서 나중에 죽음을 맞는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아라한에게 상처를 입힌 게 원인이 돼서 지옥에 떨어져버립니다.

이 네 부류들이 똑같은 사건으로 인해서 다른 결과들을 받게 되는 상황들이 됩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유념해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업이라는 게 뭘까? (수행자 : 자신이 행한 행위들) 자신이 행한 행위들, 그런데 업은 그런 행위와 결과를 같이 얘기할 때 업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예)

왜 그러냐면 행위는 결과를 낳지 않는 행위는 없습니다. 그런데 결과를 낳지 않는 행위도 있죠? 그거는 업에 속하지 않습니다. 결과를 낳지 않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수행자 : 아라한이 하는 행위들) 그 아라한들이 하는 행위들은 결과를 낳지 않습니다. 그런 똑같은 행위들이라고 하더라도 결과를 낳지 않습니다.

그래서 업이라고 할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행위와 결과를 통틀어서 얘기할 때 업이라고 얘기합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여러분들이 숨 쉬는 것, 이거는 업에 들어갑니까? 아니면 음식을 소화시키는 것 이것도 업에 들어갑니까? 이것도 하나의 행위인데 이걸 두고 업이라고 얘기 안 합니다. 결과를 낳지 않는 것은 업의 영역에 속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손으로 뭔가를 남에게 좋은 일을 했다 해가지고 그 결과를 손이 받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받는 거죠! 내가 받는 겁니다. 남이 나에게 칭찬을 한다든지 이렇게 해서 받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손이 움직이게끔 한 것은 마음이 움직이게끔 해가지고 행위를 한 겁니다. 마음이 원래 움직이게끔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받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마음으로 알아차려가지고 마음으로 뭔가 말을 한다든지 뭔가 물질적인 도움을 준다든지 하게 되는 겁니다. 마음으로 결과를 주게끔 했기 때문에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겁니다.

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의 행위와 결과인 것이지 물질적인 부분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예를 들면은 여기 유리창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돌을 탁 던져가지고 유리창을 탁 깼어요. 그럼 행위는 어떤 게 돼요? 돌을 던질려고 하는 마음 의도부터 시작해가지고 돌을 던지는 행위, 그다음 돌이 유리창에 탁 닿는 행위까지가 전부 행위가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써 유리창이 탁 깨집니다.

그래서 행위와 결과는 이렇게 연이어서 일어나는데, 그 행위에는 갖가지 원인들이 있습니다. 내가 괜히 돌을 던졌겠어요? 저쪽에 나한테 나쁜 말을 하는 놈이 있어가지고 그놈 맞칠려고 돌을 던지는 수도 있고, 그러면 유리창은 깨졌지만은 실제로 유리창에 지은 원인과 결과하고 나하고는 관계 없는 겁니다. 나는 그 사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증오심을 품은 그것이 원인이 돼서 나중에 그것에 대한 결과는 받게 돼있는 건데, 유리창이 깨진 것은 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럼 이것은 자기가 받아야 될 업의 결과는 아닙니다.

그럼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게 된다는 거라. 던질려고 하는 마음을 먹은 것도 원인이 되고, 그리고 나아갈 때 그 속도나 이런 것들도 원인이 되고, 유리창의 상태도 원인이 되고, 유리창이 이렇게 안 되고 만약에 푹신한데 있을 거 같으면 안 깨질 거라. 그럼 원인은 굉장히 많다는 거라.

 

하나의 행위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행위로 인해서 하나의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행위가 실제적으로 보면 여러 가지들이 복합돼있어 가지고 행위들이 일어나게끔 돼있다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이 받는 결과라는 것은 하나의 원인으로 인해서 그 결과를 받는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런데 어쨌든 간에 하나의 원인으로 인해서 하나의 결과는 일어나게끔 돼있습니다. 그게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겁니다. 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이 짓는 행위와 결과다 하고 받아들이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꼭 이 유리창과 같이 바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유리창도 마찬가지 내가 던지는 행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게 지금 안 깨지고 한 일년 뒤에 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깨진 것은 내가 던진 게 원인이 돼서 깨진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또 세월이 흘러가지고 이게 금이 가서 깨지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깨진 결과는 여러 가지의 원인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내가 제공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결과를 나도 받아야 된다는 거라.

 

만약에 그 거위를 죽일려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발로 찼다고 할 것 같으면 찬 행위는 성냄이나 여러 가지들로 인해서 그 결과는 받아야 되겠지만, 죽였다는 사실에 대한 결과는, 그 살인에 대한 결과는 그 자신이 받지 않는다는 거라. 사회적인 부분하고는 좀 많이 다르죠? 업이라고 하는 것이.

왜? 나는 거위를 죽일 의도는 없었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살인에 대한 결과는 받지 않게 되는 거라. 다른 원인들은 틀림없이 지었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에 대한 결과들을 받게 되는 거라.

 

그런데 이 세공인이 아라한을 그렇게 때리고 피를 나게끔 했다고 하는 것은 업 중에서도 굉장히 중한 업에 속하게 됩니다.쉽게 말하면 부모를 죽였다든지, 아라한을 죽였다든지 이런 것은 가장 큰 죄에 속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게 큰 죄인지 아닌지 하는 것은 어떻게 구분하게 될까?

죽는 것 가지고 구분하게 될까? 똑같은 살인이라 하더라도 이 사람은 사회적으로 덕망이 높은 사람이다, 그럼 그 사람 죽였을 때는 중죄가 되는 거고, 뭐 사회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이다, 이 사람을 죽인 것은 경범죄에 해당이 되는 걸까?

업은 아까 뭐라 그랬어요? 마음의 문제라고 그랬죠!

의도를 내는 것이 얼마만큼 강하게 내느냐!

비록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 사람에 대해서 강한 의도로, 죽일려고 하는 의도를 낸다고 것 같으면 이것은 중죄에 들어가게 됩니다. 중죄냐 아니냐 하는 것은 마음을 내는 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강도를? 영향력이 남게 되는 거라.

내가 강하게 의도를 냈을 거 같으면 그것은 나에게 영향력으로써 남아있습니다. 아무리 그것이 사회에서 가벼운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에는 영향력이 남아있다는 거라. 그럼 불교적인 업의 결과는 다르게 받을 수가 있다는 거라.

 

가장 친한 사람을 죽일려는 의도는 강하게 마음을 내지 않으면 그걸 죽일 수가 없습니다. 모르는 사람을 죽일 때의 의도의 강도와, 잘 알고 나하고 친한 사람을 죽일려고 했을 때의 의도의 강도는 훨씬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부모는 당연히 여러분들에게 가장 친한 사람들이라. 마찬가지로 아라한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거라. 자기하고 같이 접하면서 같이 법을 듣고 같이 쭉 생활해왔던 분이기 때문에 그러한 분들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분이라는 걸 엄연히 알면서 그것을 죽였다고 하는 것은 강한 의도를 가지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는 거라.

그런 것들이 원인이 돼서 이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업(kamma)이 작용하는 것에는 보통 4가지 패턴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다음에 태어나는 것들을 정하는 것, 지지하는 것, 지탱하는 것, 그다음에 그것들을 살해할려고 하는 것, 이런 것들 4가지가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부숴버릴려고 하는 것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보면은 업이 굉장히 다양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사건으로 인해서 한 사람은 아이로 태어나고, 한 사람은 천상에 가고, 한 사람은 지옥에 가고 있다는 거라.

마음에서 저지르는 것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여러분들을 수행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자'를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사마짜리야(samaccariya)'라고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짜리야(cariya)는 '행위'입니다. 사마짜리야는 '선한 행위'입니다. 선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수행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하는 선한 행위들을 하는 것들을 쉽게 말하면 수행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든지 몸과 말과 마음에서 선한 의도를 내서 선한 말과 선한 행위들을 해야만이 수행자라고 얘기를 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 본인은 수행자라고 얘기를 할 수가 없다는 거라.

이게 나중에 발전돼가지고 '사마나(samaṇa)'라고 하는 '출가자'를 얘기할 때 사마나(samaṇa)라고 하는 용어를 쓰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몸과 말과 마음으로 선한 마음을 내서 마음이 항상 청정하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해있는 사람들을 얘기할 때 그렇게 얘기합니다.

 

업이 작용하는 것들은 선한 것도 업이 되고 악한 것도 업이 됩니다. 선한 일을 지은다고 해가지고 그게 업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나쁜 것들에 대해서만 업이라고 생각하고, 선한 것들에 대해서는 업이라고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마음으로 짓는 선하고 악한 것들 전부가 업이 된다고 하면 어떤 걸 행하겠냐는 거라. 악한 것보다는 선한 걸 행하라는 거라.

그리고 자신이 짓는 것들이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그것이 자신이 받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알 거 같으면 적어도 조심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왜? 업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든지 나하고 관계없는 사람이 지은 것들은 나에게 전이되지도 않고, 또 내가 저지른 것들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사실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든지 그것을 받을 준비가 돼있지 않을 것 같으면 전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공덕회향도 아귀계에 있는 세상이 아니면 공덕회향이 안된다고 그럽니다. 천상 존재들이나 다른 어떤 존재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공덕회향을 할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죽은 이들을 대상으로 할 때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의 문제라는 거라.

 

여러분들이 공덕을 쌓았다. 오늘 탁발을 했다, 그러면 이 탁발한 것들에 대해서 아, 내가 쌓은 이 공덕들이 다른 사람들게도 같이 회향되기를 마음을 지녔다. 그럴 것 같으면 그 사람 마음에는 그것이 원인이 돼가지고 더 좋은 결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이 뭘 내는 것이 강할 것 같으면 전이가 된다는 거라.

살아있는 생명에게는 그게 가능합니다. 그래서 식물에게도 물을 줄 때 선한 마음을 내어서 물을 주었을 경우에는 잘 피고, 악한 마음을 내어서 물을 줄 것 같으면 잘 피지 못한다 하는 것들이 그런 이유들입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일 것 같으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거라. 그게 업이라고 하는 부분이라는 거라.

 

그런데 업은 다양하게 활동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원인이 돼서 이 결과가 일어났다 하고 단정 짓는 것은 사실은 참 힘이 듭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든지 자신이 지은 행위들은 반드시 결과를 나타내야 된다는 거라.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법은 없다는 거라.

'아호시깜마(ahosi kamma)' 라고 해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수행해서 아라한이 됐을 때 그 결과를 받지 않습니다. 짓는 행위들이 결과를 낳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이전에 지은 행위들은 결과를 받지 않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그런데 결과를 받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나타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아라한들도 심지어 이와 같이 관계없는 일에도 자신이 그것으로 인해서 죽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합니다. 그거는 과거의 업이 작용을 하기 때문에! 지금 현재의 것이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업이 작용을 하는 거라. 그래서 언제 지은 것들이 내가 지금 이 결과가 나타날지는 누구도 모른다는 거라. 그래서 이렇게 복잡한 게 업인데 그냥 쉽게 말해서 ‘아, 이거는 업이다, 업으로 인해서 이랬다’ 이거는 사실은 불가능한 말들을 하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 세공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스님이 공양을 할려고 일찍 오지 않았을 거 같으면 그런 일에 휘말려 들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공인의 입장에서도 좀 억울한 거라. 괜히 저 스님하고 친하게 지내가지고, 이렇게 일찍 왔다는 거라. 적어도 깨달음을 이루신 분들일 거 같으면 이 사실을 압니다.

아, 내가 여기에 괜히 일찍 와가지고 내가 이런 결과를 받았다는 게 아니고, 저 사람에게 괜히 쓸데없는 일에 휘말려 들어가게끔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그러니 그다음부터는 어떡하겠어요, 이 스님은?

그다음부터는 탁발을 나가더라도 여러 군데 가서 분별없이 탁발을 하든지, 아니면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밖에서 탁발을 한다든지, 거기 탁발해서 가서 자기 혼자서 먹는다고 해도 자기가 집안으로 들어가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지 않겠다 하고 마음을 먹게끔 된다는 거라.

그게 적어도 업의 법칙을 이해한 아라한일 거 같으면 당연히 일으키는 마음들이라는 거라. 나로 인해서 관계없는 사람들이 그 일에 휘말려 들어가는 일을 만들지 않는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하고 어떨 때는 자기가 원인이 돼가지고 ‘아, 저 사람에게 괜히 쓸데없이 이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게 했다’ 하는 경우들을 겪은 적이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현명한 사람일 거 같으면 적어도 마음을 그렇게 먹어야 됩니다. ‘아, 나로 인해가지고 저 사람이 괜히 휘말려 들어갔구나’ 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오히려 연민심을 일으켜야 되는 것이지, ‘왜 쓸데없이 네가 여기에 끼어들어가 가지고 네가 일을 자초하느냐’ 하고 그 사람을 원망해서는 될 일이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은 이렇게 관계없는 일에도 많이 휘말려 들어갑니다. 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 일을 만들지 않는 아라한의 상태에 이르기 전에는 그런 일들은 세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빈번하게 일어날 때에 여러분들이 어떤 마음을 품어야 되느냐는 거라.

그게 이 글을 쓴 이유입니다.

 

적어도 마음의 법칙에서는 분명한 것들이 있다는 거라. 예를 들어봅시다.

내 곁에 도둑질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 같으면 내가 도둑질하는 성향이 되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둑질하게끔 만들어주는 원인을 제공해주는 일이 있습니다. 같은 부류끼리 만나게 되는 거라.

나에게 괜히 쓸데없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되는 거라. 내 주위에 그러한 부류들이 많은 것이 아닌가 하고. 그러면은 잘 살펴봐가지고 그 일로부터 빠져나오게끔 해서 괜히 관계없는 일들에 의해서 계속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자꾸 자기 자신을 만드는 상황으로 바꾸어야 되는 것이지 그 남 탓을 해야 될 것은 아니라는 거라.

어쨌든 원인을 지었으면 결과를 받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괜히 그 일로 인해서 나쁜 결과를 받을 이유는 없다는 거라.

 

또 하나 명심해야 될 것은 뭐냐면 보통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좋은 일도 연속으로 오고 나쁜 일도 연속으로 온다" 하고. 연속으로 일어납니다.

왜 그럴까? 한 개의 행위로 인해서 하나의 결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개의 행위들로 인해서 하나의 결과가 일어나기도 하고, 또 단순하게 하나의 원인으로 하나의 결과가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여러 개의 행위로 인해서 결과를 받은 것들은 그 여러 개의 행위들은 또 다른 결과들을 낳게끔 된다는 거라. 그럼 그 지은 행위들이 나쁜 행위들일 것 같으면 나쁜 결과는 여러 번 받을 수도 있다는 거라.

그래서 자기가 지은 행위들을 살펴봐야 되는 거라. 내가 지은 행위들이 어떤 행위들을 지었는가를 잘 살펴봐가지고 그 받는 결과들이 좋은 것들을 연속해서 받도록 자꾸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업이라고 하는 것은 운명론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하고 불교에서는 얘기합니다. 자기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업은 바뀌어나간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업에 대해서 부처님이 얘기할 때 항상 얘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스스로 노력해라." 스스로 힘써서 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고 선한 일들을 할려고 하라는 거라. 그래서 더욱 더 노력해가지고 그러한 결과를 받을 수 없는 행위가 되도록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러라. 받을 것이 더 이상 없으면 더 이상 윤회할 것이 없어져버립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지 어떠한 경우로도 되지 않는다는 거라. 많은 아라한들이 태어났지만, 앞으로도 많은 아라한들이 태어나겠지만 그것은 부처님이 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해서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 자신도 “내가 한 명의 아라한도 만들지 않았다.” 부처님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업은 그와 같다는 거라. 업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해서 만들어지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해서 짓는 행위들이고,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서 받는 결과들이라는 거라.

그 사실을 알 것 같으면 적어도 쓸데없는 것으로 인해서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일들은 스스로 자꾸 만들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거기 마지막에 보면 「관계가 없는 것 무의미하게 함정에 빠져서 죄를 범해 버릴 우려가 누구라도 있기 때문에 이성을 잃지 않고 주의 깊게 노력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끊임없이 올바른 방향으로 죽는 순간까지 노력하는 것, 여러분들이 노력할 수 있는 것은 뭐겠어요? 끊임없이 선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도록 지금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 그래서 지금의 대상을 적어도 알아차린다고 할 것 같으면 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거라. 화가 일어나는 것 또는 욕심이 일어나는 것, 또는 게으름을 부리는 것, 이런 것들은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선한 것들로서 바뀌어져 나간다는 거라. 그래서 내가 짓는 행위들이 나는 적어도 좋은 결과를 받는다고 알 것 같으면 지금 현재는 그것들을 계속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윤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좋은 결과를 받을 줄 알아야 되는 거라.

그게 업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밑에 적어놓았습니다.

• 업은 개인의 책임이다. 그 결과도 그 개인이 받는다.

자기 자신이 짓는 것은 자신이 받는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만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업이 되기 때문에

• 관계가 없는 것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은 누구라도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조심해야 됩니다.

• 이성을 유지해서 탐·진·치 없는 마음으로써 선하게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적어도 좋은 결과가 있기 때문에 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거라. 선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거라.

 

그것이 관계가 있는 일이든 관계가 없는 일이든 그것으로 인해서 나에게 좋은 결과가 일어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지만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항상 관계가 없는 일에 휘말려 들어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럼 그 사람들을 비난하고 그 사람들에 대해서 안 좋은 마음을 품으면 나 자신이 또 그 결과를 받아야 된다는 거라. 누구든지 그럴 수 있는, 아직은 아라한이 되기 전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상태라는 걸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 사람들에 대해서 이해하고 그 사람들을 받아들일 준비들을 할 수 있는 것들이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거라.

 

그래서 무관계한 일에도 휘말려 들어간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을 해야 됩니다.

휘말려 들어가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에 일어나는 결과들은 다르게 작용을 한다는 거라. 내가 어떻게 그것들을 행위들을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다르게 작용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