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비판만 하는 사람의 마음은 악한 사고로 가득하다. (20170324. 대구)

담마마-마까 2022. 4. 16. 09:00

https://youtu.be/J6jmEIn1c2g

* 비판만 하는 사람의 마음은 악한 사고로 가득하다. (20170324. 대구)

 

오늘은 「비판만 하는 사람의 마음은 악한 사고로 가득하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올해 3월 학기 초에 스님이 어느 초등학교에 와서 축사를 해달라 해서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 갔는데 교장선생님이 학부모들한테 당부를 하는 얘기가 있었어요. “애들에게 뭐라하지 마라. 너무 뭐라 하지 마라.” 뭐라 하는 애하고 하지 않는 뭐라 하지 않는 애하고는 차이가 난다는 거라.

그러니까 만약에 선생님이 그 아이를 “누구야!” 하고 부르면 뭐라 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아이는 ‘어, 선생님이 나한테 뭐라 하려는가 보다’ 해가지고 오는 게 쭈삣쭈삣 하고 대답도 잘 안 하고 잘 안 온대. 그런데 뭐라 하지 않고 애하고 잘 놀아주고 하는 부모들 밑에서 사는 아이들은 “누구야!” 하고 부르면 “예! 선생님!” 하면서 쪼르르륵 쫓아온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만 봐도 아이들이 이미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자기의 세계관이 어느 정도 형성이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뭐라 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애들은 자기 자신만 그러면 되는데 계속 다른 사람들하고 관계를 가질 때 부정적인 일들을 자꾸 만들어낸다고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 그래서 “되도록이면 하지 마십시요!”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주위를 통해서 인식하게 됩니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는 것들. 그 인식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 "좋고 싫고 그다음에 재미없다" 라는 것. 무덤덤하다 라는 것은 재미없다는 얘기지. 이 3가지 감정이 일어납니다. 이 3가지 감정은 자기 세계를 딱 형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반응에 대해서 자기의 세계관이 판단기준으로 탁 형성이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누가 부르면 ‘어, 뭐라 할려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판단기준으로 들어있기 때문에 바로 대답하거나 그 선생님한테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런 게 있죠? 뭘 무슨 소리를 들었다, 아니면 뭘 봤다 이리 했을 때 그걸 봤을 때 어떤 반응들을 일으키느냐는 거라. 좋다는 반응이나 싫다는 반응이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게 되는 거라. 그게 자기 세계로써 판단기준으로 탁 형성이 돼버리면 나중에는 참 고치기가 힘이 들어집니다.

 

가끔씩 스님들을 초청해가지고 공양청이 있어가지고 가보면 꼭 스님들이 한소리들을 합니다. 많이 차려놨으면 “아이고, 뭘 이렇게 많이 차렸어요?” 이렇게 합니다. 먹고 나면, 이게 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중에 일부 먹는 건데, “먹고 나면 나머지는 어떡할 거냐?” 이렇게 얘기하는 스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그 차려놓은 것에 대해서 “아, 이거 기름진 것만 차려놨다, 뭐 어떻다” 하고 얘기하는 스님도 있고 그래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조그만한 인제 초등학교 입학하는 애들뿐 아니라 인제 성인이 돼서 그렇게 출가하는 그 스님들도 그런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기준들을 가지고 그거를 하고 있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뭐.

 

그게 꼭 좋은 부분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런 판단기준이 생기면은 그 판단기준은 보통 보면 자기자신이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합니다. 자기 자신의 판단기준에서 너무 많이 차려놓고 쓸데없는 거라고 한다는 거라.

그런데 어떤 스님들은 이게 쓸데 있든지 없든지 간에 내가 맛있게 먹어주면 되는 거라. 맛있게 먹어주면서 아, 내가 먹을 만큼만 먹고 이것들은 내가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어서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써 쓴다 생각을 하면서, 작게 차렸든 많이 차렸든 이 차려준 것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표하면서 그래서 집착함이 없이 되는 것이 맞는데, 대부분 그렇게 안 하는 경우들이 많다는 거라.

 

여기 일화를 들어놓은 띳사 스님도 마찬가집니다. 계속 뭘 하면 불평불만 하고 이런 스님이라. 작으면 작다, 많으면 많다, 좀 뜨거우면 뜨겁다, 차가우면 차갑다, 그렇게 얘기를 하니까. 보통 그게 살아온 가정환경이 영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출가한 스님이라 해서 다 집착함이 없이 그냥 겸손하고 고맙게 생각하면서 단지 자기먹을 만큼만 일정한 먹을 양 만큼만 먹고 그만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맛있는 거 많이 있을 거 같으면 좀 더 많이 먹을려고 하고, 그런 거는 있습니다.

그거는 과거부터든지 아니면 이생에서 습관 쌓여진 것들이 그렇게 됐을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드러나지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면 크게 문제가 돼버립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 봤을 때는 그게 옳다고 판단을 할 경우에는 그게 문제가 커집니다. 자기 자신이 옳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전부 틀린 것들만 보이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요? 지적질 자꾸 하게 되는 거라. 부부간에도 아마 그럴 거라. 맨날 싸우는 게 자기는 잘하는데 이 사람은 못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걸 자꾸 지적하니까 싸움이 되는 거라. 그 사람이 봤을 때는 그게 크게 문제가 안 되는 건데, 계속 비판받으니까 좋아할 이유는 없게 되는 거라.

 

그런데 이 띳사 스님은 그런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정당화 할려고 자꾸 그러는 거라. 왜 내가 이렇게 되었는가? 왜 자꾸 이렇게 지적하고 비판하고 하는 것들을 하게 됐을까? “나는 원래부터 풍족하게 잘 살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풍족하게 되지 않을 거 같으면 항상 그것에 대해서 말을 하게끔 된다” 하고 이렇게 거짓말을 하게끔 되는 거라.

다른 스님들이 봤을 때는 이게 좀 불합리하거든. 계속 그렇게 할 것 같으면 같이 살고 있는 스님들도 불편하게 됩니다. 그런데 '쟤는 뭐 저렇게 귀하게 컸기 때문에 아직은 출가한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래도 좀 봐줘야지' 하는 생각이 들 것 같으면 좀 참을만한데, 만약에 그렇지 않고 자기가 부유하게 컸다라는 것도 거짓말일 것 같으면 스님들은 그것에 대해서 반응을 크게 한다는 거라. “자기가 뭐라고 그런 얘기를 하느냐” 그렇게 얘기하게 된다는 거라. 그 얘기를 부처님한테 가서 하게 됩니다.

 

그때 부처님이 한 말이 "비판만 하는 사람의 마음은 악한 사고로 가득하다" 하는 얘기를 이렇게 쭉 하게 됩니다.

 

까따하(Katāha) 라고 하는 빨리어 용어가 있는데, 물병이라는 뜻입니다. 인도의 물병들은 주둥이가 요렇게 쭉 깁니다. 밑에는 굉장히 너르고. 그러니까 만약에 그 속이 비어있을 거 같으면 거기에다가 뭔가 말을 할 것 같으면 그 울림이 굉장히 크게 들립니다. 비어있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 물이 차 있다든지 다른 것이 들어있을 경우에는 거기에 입 주둥이에서 말을 하더라도 그 소리는 그렇게 크게 울리지는 않게 되는 거라.

그래서 까따하(Katāha) 라고 하는 빨리어 용어가 물병이라는 용어로도 쓰이지만 '허풍쟁이'를 뜻할 때 이 까따하라는 용어를 쓰기도 합니다. 비어있기 때문에 소리가 크다는 거라. (수행자 : 빈수레가 요란하다 하는...) 그렇죠. 빈수레가 요란하다 그러하기는 한데, 그것보다도 빈수레는 울림은 없지만 빈 호리병 같은 경우에는 그 울림이 굉장히 크다는 거라.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게 영향이 미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도 굉장히 영향이 미친다는 거라.

허풍을 떨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악한 감정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울림이 크게 돼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해치게 될까?

 

보통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가지가 있다고 그럽니다.

수치스러움을 아는 것과 그다음에 두려움을 아는 것들.

'아, 내가 이런 행위를 했을 경우에는 내가 참 부끄러운 일이다.' 하는 것과

'이러한 것들을 했을 경우에 내가 받게 되는 악업들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 하는 마음을 가질 것 같으면 그건 안 하는데, 이걸 모르면은 그냥 하게 됩니다.

사실은 이 호리병을 채우고 있는 것은 이 2가지입니다.

히리와 옷땁빠(hiri-ottappa)라고 하는 2가지가 있어야 만이 이 세상이 그래도 좀 더 건전하게 바르게 돌아가지고, 그래서 이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가지 지렛대 역할을 하는 것들이고,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세상도 바르게 조절할 수 있는 지렛대 역할을 하는 건데, 이게 없으면 쉽게 말하면 마음대로 자기가 사실을 왜곡해버리고 자기 자신이 올바르다고 하는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비판한다든지 하는 이런 것들이 되게 된다는 거라.

 

곰곰히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요. 남을 비판할려고 할 거 같으면 선한 마음으로 선한 의도로써 비판할 수 있는가? 못합니다!

이 글을 쓰게 된 것도 그 부분이 조금 작용을 했습니다. 요즘 같은 때 계속 양쪽으로 나뉘어가지고 비판을 하게 되는 거라. 없을 때도 됐는데 계속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서 다른 쪽이 틀렸다고 계속 얘기를 한다는 거라. 얼마나 마음이 악한 마음들이 많이 일어날 거라? 자기 자신이 다친다는 생각을 못 한다는 거라.

그러면서 가끔씩 누군가가 와서 “스님, 이러한 때 테라와다 불교에서도 뭔가 성명을 발표해야 안 됩니까?” 뭐라고 발표할까? 이 사람이 옳다, 아니면 저 사람이 옳다고 얘기할까? 뭐라고 얘기할까?

악한 감정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불교적인 것이고 테라와다적인 것인데 어느쪽 한편을 들 수도 없는 거라. 그렇다고 중립을 취하면 중립을 취한다고 뭐라 할 거라. 이거는 부처님이 보면 무기에 빠지듯이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차라리 선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뭐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그게 통하지 않을 거 같으면 자기 스스로 악한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상책이라는 거라.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자꾸 까먹습니다.

자기 세계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 반대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항상 틀렸다고 하고 비판을 하게끔 된다는 거라.

문제는 그렇게 비판을 해가지고 해결될 수 있는 것 같으면 그나마 비판하는 것이 효용이 있다고 하는데, 해결책도 없어. 대안도 없어. 그러면은 심각해져버리는 거라. 자신도 해치고 다른 사람도 해치고 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남이 잘못했다고 생각했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모든 사람들이 그 남이 잘못했다고 하고 있는가?

그런데 이번 사태 같은 경우에는 한쪽에서는 옳다고 그러고 한쪽에서는 틀렸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럼 모든 사람들이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그것들에 대해서 잘못했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러면 사실은 비판할 수 있는 상황이 사실은 아니라는 거라.

그게 첫 번째 부처님이 말한 해당 사항에 해당이 안 되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상대가 그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아, 내가 잘못했다' 하고 인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해도 잘못했다는 소리를 안 합니다. 인정을 안 한다는 거라. 자신이 한 것들은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걸 인정을 안 한다는 거라.

그래서 두 번째도 해당 사항이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내가 그것이 틀렸다고 얘기하든 옳다고 얘기하든 간에 그 상대방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것들에 대해서 나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있는가?

너 두고 보자! 아니면 그것으로 인해서 아, 내가 참 잘못했다 해가지고 자살을 한다든지 이런 상황이 되고 어두운 마음이 되고, 이런 상황이 안 될 수 있는가 하는 거라. 세 번째도 아니라는 거라.

 

그럼 네 번째, 그렇게 하고 나서 양쪽의 관계가, 비판을 하는 사람이나 비판을 받는 사람의 관계가 보다 더 좋은 관계로 바뀔 수 있는가?

 

"4가지 조건이 성숙됐을 때 그 사람에 대해서 비판하라"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비판하는 것 자체부터가 이미 잘못됐다는 거라.

왜 비판할려고 할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이 악으로 물들고, 다른 사람들도 악으로 물들고. 왜 선하게 살아갈려고 하면서 악으로 물들게끔 일을 만드느냐는 거라.

비판하는 것만 하더라도 이 조건이 충족되어야 되는 것인데, 부처님은 거기서 끝나는게 아니고 비판한다고 하더라도 해결책이 있지 않을 거 같으면 그거는 의미가 없고, 그것도 쉽게 말하면 관념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해결책이 있어야 될 거 아니냐는 거라.

 

아이가 잘못했으면 아이한테 뭐라고만 할 것이 아니고 뭔가 해결책이 있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해결책을 제시를 하면서 그 아이한테 이 4가지 조건을 충족하면서 말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비판이 아니고 선한 마음을 일으키게끔 합니다.

 

그래서 남하고 얘기할 때는 말을 할 때는 항상 뭘 먼저 하라고 그래요?

말을 할 때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말을 하도록 하라." 자애의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말을 할 거 같으면 그 말은 자신의 감정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남을 칭찬하는 것이든 남을 비판하는 것이든 자신의 충동에 의해서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런 사람을 부처님은 "허풍쟁이와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뒤에 보면 「세간은 출가 사회 속의 상황을 모른다.」 하고 나와있습니다.

이걸 자칫 잘못 이해할 거 같으면 "세간 사람들은 출가사회에 대해서 간섭하지 마라." 이렇게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왜 간섭을 못해? 출가한 스님들이 잘못할 거 같으면 거기에 대해서 합당하게 재가자들이 취할 조치들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일화에서도 그런 것들이 나옵니다. 스님들끼리 막 싸우고 분쟁이 있고 하니까 아예 탁발을 안 해줘버립니다. 그리고 그 선원에 아예 가지를 않습니다. 법문들으러도 가지 않고, 수행하러도 가지 않고, 아예 탁발도 안 하고 아무도 사람이 가지를 않으니까, 그 절에 있는 스님들이 '아이고, 우리가 뭐 잘못했다' 그래서 나중에 화합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런 일화들은 경전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출가사회에 대해서 재가인들이 간섭하지 말아라는 것이 아니고, 간섭을 하게끔 됩니다. 그리고 스님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두 명의 아주 현명한 재가자들을 임명해가지고 이 스님이 뭔 잘못을 저질렀는지 판단하게끔 합니다. 그게 '불이법'이라고 해가지고 비구계율에 나와 있습니다.

스님들 간에 이것은 판단할 수 없는 근거다 할 경우에는 오히려 재가자들한테 이 판단을 맡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물며 그런데 어떻게 세간 사람들이 출가사회의 상황을 아예 몰라라 할 수 있느냐는 거라.

 

그것은 아니고, 이거는 뭐냐면 출가사회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예를 들어봅시다.

이 스님이 어느 정도 공부가 돼있는지, 아니면 이 스님이 어느 정도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지, 여러분들 구분해낼 수 있습니까? 부처님 같으면 구분이 가능하겠지. 부처님은 32상이라는 걸 만들어가지고, 그래서 그 부처님 상호대로 32상 대로 부처님을 만들면 아주 이상한 형상이 돼버립니다. 손발에 물갈퀴도 있고 뭐, 그거는 쉽게 말하면 그런 것들을 상징화시키는 겁니다. 뭔가 일반인하고 다르다는 걸.

 

그러니까 부처님 이후에 똑같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던 수많은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일반 다른 스님들하고 구분할 수 있습니까? 물론 경전에는 목갈라나 존자는 검푸른 회색을 띤다, 이런 특징들은 있지만 그건 그 종족일 거 같으면 그러한 색깔을 띨 수밖에 없는 거지,

그거는 인종적인 부분인 것이지 그 스님이 어느 정도의 도력이 있는지 어느 정도의 공부가 됐는지 그걸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경전 어디에도 그걸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출가한 스님들 간에는 자주 접하고 있기 때문에 이 스님이 어느 정도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재가인들은 기껏 해봐야 한달에 한두번 아니면 뭐 하는데, 출가사회 속의 스님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사실은 부처님 이후로 여러 명의 아라한들이 있지만 그거 구분하는 것은 사실은 힘들다는 거라. 심지어 어느 분이 부처님인지조차도 재가인들은 구분을 못하는 경우들도 허다했다는 거라. 사리뿟따 존자가 부처님인지 아니면 목갈라나 존자가 부처님인지, 어, 부처님은 여기 있는데 이분이 부처님이라고 판단하는 경우들도 허다했다는 거라.

 

그걸 얘기할 때 「세간은 출가 사회 속의 상황을 모른다.」 하고 하는 겁니다.

그러한 사회를 모르기 때문에 출가한 스님들 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서로 화합하면서 서로 잘 보조하는 역할들을 하라 하는 얘기를 합니다.

 

띳사 스님이 잘못했을 때 부처님이 맨 처음 지적한 것이 뭐냐 하면 아무리 출가한 스님들이지만 아직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업은 반드시 기능을 한다는 거라.

업이 기능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는 거라. 그냥 그대로 드러나진다는 거라. 업은. 띳사스님이 만날 불평불만을 한다는 것도 그 업은 기능을 반드시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럼 그 과보는 띳사 스님이 받는 거고, 그러한 띳사스 님에 대해서 저 스님이 틀렸다 하고 악한 감정을 가지는 다른 스님들도 업이 기능하는 것은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너는 왜 그것에 대해서 너는 업이 기능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거라.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업은 어떠한 경우든지 기능을 하게끔 돼있다는 거라. 스스로 자꾸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런데 그런 기능을 한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면은 어떻게 되냐면, 재가자들에게 돌아갈 공덕들을 반감시켜버리게 된다는 거라.

예를 들어서 오늘 탁발공양을 올렸다, 그러면 스님이 마음속으로 ‘아이, 참 밥을 요것밖에 안 줘’ 이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럴 것 같으면 공양 올린 공덕이 반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공덕이라고 하는 것은 보시받는 사람이 일으키는 마음과 보시물품과 그다음에 보시하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마음과 이것들이 다 융합됐을 때 그게 공덕으로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한쪽이 변변찮은 것이라고 해가지고 싫은 마음을 일으켜버린다, 그럼 그 공덕은 반감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한테 계율로써 정해놨습니다.

"누군가가 공양물을 올릴 것 같으면 공양물을 보지 마라"

스님은 공양물을 봐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공양물을 올릴 때는 눈을 감습니다. 일부러 감습니다. 감으면서 마음속에서 ‘이런 공양물을 올린 것으로 인해서 행복해지고 빨리 닙바나에 이르기를’ 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거는 내 마음이 선해질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공양 올린 사람의 공덕이 조금 더 바른 방향으로 공덕이 되도록 만들기 위한 겁니다.

 

출가한 스님들에게도 반드시 그 업은 기능들을 하게끔 되는데 출가자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고, 재가자에게도 미친다는 거라. 공덕의 영향으로 인해서도 많이 미칠 뿐아니라 재가자가 다시 또 그것으로 인해서 일으키는 마음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게 안 될 거 같으면 아무 소리 하지 말고 그냥 맛있게 먹으라는 거라. 딱 먹을 만큼만. 적어도 그것만 하더라도 반은 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다음부터는 공양 올리고 하는 데서 시비하고 하는 스님이 있으면 공양 안 올리게 되는 거라. 공덕도 되지 않는 거 왜 해? (수행자 : 그거는 아니지요.)

그래도 해야 돼요? (수행자 : 해야 되죠. 받고 안 받고는 스님들의 몫이고, 저희들은 저희들이 할 도리만 하면 되니까)

맞습니다! 그거는 맞습니다.

대신에 스님들도 그러한 부분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 업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미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일으키는 마음이 똑같이 그런 업의 기능들을 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잘못한 사람이 ‘아, 내가 잘못했다’ 해서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 하고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상대방이 일으키는 마음이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비판만 하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항상 마음이 선한 마음을 일으킬 수 없다는 거라. 악한 사고들이 항상 가득차 있기 때문에.

수행할 때 선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수행의 대상에 집중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하고 가벼워져 있지 않을 거 같으면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좌지우지 돼버립니다.

꼭 사회에서 자기 세계가 형성이 돼가지고 그것이 옳고 그르다고 말하는 상황과 꼭 마찬가지 상황이 돼버립니다.

 

그래서 두 번째, 부처님이 얘기한 것이 뭐냐면,

「사마디가 없으면 지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을 자칫 잘못 이해할 것 같으면 사마디 수행을 하지 않으면 위빳사나 수행을 할 수 없다 하고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했을 때의 부처님의 상황이나 여러 가지 상황들을 봤을 때 여기서 '사마디'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평온함'을 얘기하는 겁니다.

수행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들이라는 거라. 마음의 평온함이 없을 거 같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무상·고·무아의 성품대로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이걸 글자 그대로 그것만 딱 따가지고 '사마타 수행을 해야만이 위빳사나 수행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오해해 버리면 이거는 크게 문제가 돼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사마타 수행 없이 위빳사나 수행해서 깨달음에 이른 분들은 뭔데?

 

부처님이 하신 속뜻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마음의 평온함이나 고요함 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다는 거라. 너희들이 출가한 것은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출가를 한 것이고, 여러분들이 수행하는 것에 있어서도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언제 남을 비판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가 있느냐는 거라. 그거 할 것 같으면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는데. 마음의 평온함을 항상 유지를 하라는 거라.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를 해야 만이 사물의 실상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지게 된다는 거라.

 

그게 인제 「세상의 거센 파도에도 요동하지 않는 평온한 마음을 가져라」 하는 겁니다.

원래 경전에는 이렇게 써놓은 것이 아니고, 「사마디가 없으면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돼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의미 자체는 사마타 수행하고 나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에게 닥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칭찬, 비난, 많이 있고 없고,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세상의 파도들, 그 파도들에 대해서 어떠한 경우든지 평온함을 유지하지 않을 거 같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어제 뉴스 보면 세월호 배를 건져 올리고 있는 거라. 평행을 유지해서 올리지 않으면 항상 떨어지게 돼있습니다. 바다가 아무리 출렁거린다 하더라도 그것들에 대해서 평행을 유지해야만이 그것들을 건져 올릴 수가 있다는 거라. 여러분들에게는 그러한 파도들은 작게 크게 살아가면서 엄청나게 받게 됩니다.

그 모든 것들에 평온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거라. 평온함을 항상 가져야만이 그 평온함으로 인해가지고 ‘아, 이것은 변하는 것이구나’ 하고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는 마음들을 일으킬 수가 없다는 거라.

 

그게 부처님이 얘기한 겁니다. 그 잘못한 것에 대해서 잘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부처님이 뭐라 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지적질하는 사람들도 결코 선한 마음들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하고 얘기들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평온한 마음들을 가지도록 하라" 하고 부처님이 얘기하는 겁니다.

 

마지막 4페이지에 보면 「어떠한 악한 감정도 가지는 일 없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구별도 하지 않고, 집착함이 없이, 무상, 부정 등을 관찰하라.」

음식물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고, 대상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일과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구분하라는 거라. 다른 사람이 비판한다 해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감정 가지지 말아라는 거라. 그것은 그 사람의 업으로써 기능을 하게 되는 거라.

그 사람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 때는 비판할 때의 4가지 조건들을 말을 할 때 그 4가지 조건들을 갖추어 가지고 말을 하라는 거라. 그것도 대안을 제시를 하면서.

 

그래서 말을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함부로 말을 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어떠한 경우든지 자애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침착함과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항상 말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말을 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 마지막 부분에 보면은 「비판하는 것,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답과 해결 방법, 어떤 제안」을 가지고 있는지, 그 비판은 해결책으로 이끌 수 있는지 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해답이 있어도 그것을 상대방이 실행할 수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관념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의 파도들에 대해서 마음을 어지럽게 하도록 놔두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뿐 아니라 어느 정도 수행에 이르는 사람들은 그 어떠한 경우든지 세상의 파도에 대해서 평온한 마음이 나가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러한 것들을 항상 조심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인격, 자기 자신의 마음의 성장을 위해서도 항상 정신적인 침착함과 그리고 마음에 자애를 항상 지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번 포인트

• 허풍쟁이는 흐트러진 성격의 결과이다.

막 부풀려서 하려고 하지 말아라. 있는 그대로 드러낼려고 해야 된다는 겁니다.

• 허풍쟁이는 「나는 신뢰할 수 없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꼴이다.

• 업의 기능이 불합리하다고 느껴도 업의 결과로는 도망칠 수 없다.

저 사람이 잘못한 건데 왜 내가 이런 과보를 받아야 되느냐, 그 잘못에 대해서 자기가 몸과 마음으로 일으키기 때문에 그 결과를 받는 거라. 그래서 업과 업의 결과는 분명하게 기능을 합니다.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잘 지키도록 해야 됩니다.

• 세상의 거센 파도로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 결코 여러분들이 목적하는 것으로부터 이탈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내가 왜 스님 법문을 듣고 왜 수행하는가 하는 거라. 그걸 자꾸 잊어버릴 것 같으면 마음은 이탈할 수 있다는 거라. 그러지 않도록 자꾸 마음을 다듬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