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인간에게 필요한 네 가지 요소(특색) (20170317. 대구)

담마마-마까 2022. 4. 15. 09:00

https://youtu.be/nRaoei9fCyA

* 인간에게 필요한 네 가지 요소(특색) (20170317. 대구)

 

오늘은 「인간에게 필요한 네 가지 요소, 네 가지 특색」에 대한 것을 얘기하겠습니다. 그중에 4가지 중에서 오늘은 '칸띠(khanti)'라고 하는 '인내'라고 하는 부분에 대한 것을 치중해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부처님이 설한 「중도」라는 것은 어떤 거를 얘기할까?

쉽게 얘기하면 지금 살아가는 방식을 전면적으로 다시 보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불교적인 입장에서 그걸 다시 한번 보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어떠한 것에서든 객관성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 자기의 주관이나 아니면 고정관념에 의해서 어떤 사물을 봐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객관적이어야 되는 것이지, 저 사람은 나한테는 나쁜 사람인데 자기 가족에게는 되게 좋은 사람이다, 그럼 이건 객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죠? 그걸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볼 것 같으면 그건 고정관념이 돼버리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삶을 보고 있는데 그렇게 보지 말고 객관적으로 보라는 거라. 그게 첫 번째의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보통 보면 살아가는 방식이 조금 더 잘 살려고 하고, 조금 더 건강할려고 그러고, 좀 더 오래살려고 그러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선한 마음으로 그렇게 살 수 있나? 좀 더 잘 살려면 똑같은 파이가 있으면 그걸 내가 조금 더 가지려고 할 것 같으면 뭔가 남을 속이든지, 아니면 욕심을 부리든지, 그렇게 해야 됩니다. 탐·진·치 없이 남들보다 좀 더 잘살게, 아니면 남들보다도 조금 더 오래 살든가 하길 바란다, 그거는 생존욕구나 탐욕이든지 갈애가 없으면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불교적인 중도라고 하는 것은 그런 걸 일단 다 배제를 한다는 거라. 탐진치 없이 바른 생각으로써 그것들을 대한다는 거라. 설혹 그렇게 해가지고 내가 조금 더 못 가진다든지 아니면 내가 빨리 죽음을 맞는다든지 그리 하더라도 그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들, 이런 것들도 중도에 해당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른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는 상태, 이게 인제 중도의 두 번째 부분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마찬가지로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것들도 그런 바른 것들로 인해서 말을 하고, 바른 행동들을 하게 되는 것들, 이런 것들이 중도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세 번째는 여러분들이 이해하기가 좀 수월할 겁니다.

 

네 번째가 뭐냐면 마음이 대상으로부터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을 놓쳐서는 중도의 상태를 버려버린 상태가 됩니다. 시소라고 하는 것은 딱 가운데에서 조금만 한쪽으로 기울어도 무게중심이 쏠려도 그렇게 움직이게 돼있습니다. 저울추라고 하는 것은. 대상을 놓치는 것은 그와 마찬가집니다. 어떤 식으로든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돼있다는 거라.

일어나는 대상은 굉장히 많이 있다는 거라. 육근을 통해서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대상들, 그것들에 대해서 그 대상으로부터 마음이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거라.

 

이런 것들을 통상적으로 중도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중도라는 것이 그냥 편하게 생각해가지고 괴로운 상태도 아니고, 즐거운 상태도 아니고 중간적인 상태 어중간한 상태를 얘기하는 결코 아니라는 뜻이라. 그런 중도의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해나가는 것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침착해 있는 상태" 이걸 보통 불교에서는 "인내(khanti)"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인내'라는 것이 그냥 고통 괴로운 것들을 참는 것들을 인내라고만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따로 불교용어에서는 '띠띡카(titikkhā)'라고 하는 용어를 써놨습니다. 괴로운 것들도 참는 거고, 쉽게 말하면 좌선수행 한시간 해야 된다, 3~40분 지나면 나는 다리가 아파 죽겠어, 그러면 대상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그 괴로움도 사라질 건데 그걸 못하니까 나중에는 1~20분은 죽을 맛인 거라.

그런데도 스님이 1시간은 어쨌든 채워라 했다 할 거 같으면 그거 참고 했는데 실제적으로는 그 뒤에는 수행 별반 한 거 같지는 않는데 어쨌든 1시간을 채우고 나서는 ‘아, 그래도 1시간은 채웠다’ 하는 마음이 드는 거라. 그런 것들을 얘기할 때 '띠띡카'라고 얘기합니다. 그걸 쉽게 말하면 '괴로운 것들도 고통스러운 것들도 참는 것'들입니다.

 

만약에 슬픈 일이 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슬픔을 계속 표출하고 살 수는 없잖아. 그것을 견디고 참으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계속적으로 해나가고 그렇게 하는 것들을, 누가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슬프지만은 그걸 참아가면서 장례를 치뤄나가는 거라. 그런 것들을 얘기할 때는 '띠띡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인내'라고 하는 것은 빨리어 용어로 '칸띠(khanti)'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칸띠는 그런 의미들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으로부터 딱 떨어져가지고 중도의 상태로써 마음이 형성돼있는 상태, 그래서 항상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가 되어있는 것들 이런 것들을 얘기할 때 보통 우리는 그걸 "인내하고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마음의 평안이나 평화를 얘기할 때' 그때 부처님은 "인내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무조건 뭔가 괴로운 것들이나 아니면 즐거운 것들이라 하더라도 그걸 다 참아가지고 있는 것들을 얘기할 때는 이 칸띠라는 용어를 잘 안씁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필요한 4가지 요소 중에는 '띠띡카'가 아니고 '칸띠'를 부처님이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또 다른 경전들에 보면 "이 두 가지가 열반으로 이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괴로운 것도 참고 그다음에 마음도 고요하게 해서 애써 평화로운 상태를 만들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될 때 이때야만이 열반으로 이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보통 "인내가 열반으로 이끈다" 할 때의 그 인내는 띠띡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칸띠'를 얘기합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평온하게 된 상태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들을 얘기할 때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참으면 내가 열반에 들 것이 아닌가 이렇게 착각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어쨌든 인내는 저 뒤에 보면 3페이지에 적어놨습니다.

「불행해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

그 여섯 번째 줄에 보면 「일반적인 인내는 싫은 일에 대한 대응이지만」 이건 띠띡카를 얘기합니다.

「불교에서의 인내」 여기는 칸띠를 얘기합니다.

「불교에서의 인내-칸띠(khanti)는 침착성이다.」

방해, 모욕, 공격 등의 그런 상황에 지지 않고, 성냄이나 미움이나 이런 것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잘 방어를 해가지고 그렇게 노력하는 것, 이런 것들도 띠띡카(titikkhā)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인내라고 하는 그러한 것들로 인해서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들, 좋은 것으로 인해서 들뜨지도 않고, 괴로운 것들에 인해서도 정신적인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 상태, 그래서 냉정하고 침착하고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경전에는 「인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가 비난하거나 화내거나 때렸다고 해도 분노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인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인내의 실천자는 자기 수행의 진척 상태를 알 수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어째서 수행의 진척 상태를 알 수 있을까?

이 인내라고 하는 것은 간단하게 얘기하면 "담마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좋고 싫음으로부터 떠나버릴 것 같으면 있는 그대로가 보여집니다. 담마를 담마로써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계속 성장하는 상태로서 있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내 마음에서 인간이 갖춰야 될 4가지 조건 중에서, 요소 중에서, 특색 중에서,

이 두 번째 요소인 인내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해보는 기준점을 얘기를 할게요.

 

◈ 불행에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 ◈

첫 번째 나마(nāma)와 루빠(rūpa)로 보고 있는가?

대상을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써 보고 있는가? 그래서 어떤 물질적인 현상에 대해서도 끄달려 들어가지 않고 어떤 정신적인 현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에 방해받지 않고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으로 구분해서 볼 수 있는가 하는 거라. 만약에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나는 인내하고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어떤 대상이든지 일순간에 일어나고 일순간에 사라진다 하고 알고 있는가?

원인에 의해서 일어났다가 또 다른 원인에 의해서 사라지는 결과가 있게 되는 거라. 원인·결과로써 이루어진다는 거라. 그것도 일순간에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다 하는 거라. 마음이 항상 내마음이 아니고 그것도 찰나 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 대상이 있어도 그 대상도 찰나 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어떠한 대상이든지 순간에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다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을 때, 나에겐 칸띠를 하고 있다는 거라. 그런 바라밀들이 자꾸 성숙해가는 거라.

 

그다음에 대상은 무상··무아다 라고 알고 있는가?

변해가고 있구나, 그렇게 변해가는 것들은 참 부질없는 것들이고, 참 안 변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든다. 그렇게 변해가는 것들을 내가 어떻게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그렇게 분명하게 아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 대상을 알아차릴 때 사띠(sati)와 삼빠자나(sampajāna)가 같이 하고 있는가?

알아차림이 분명하고 그 알아차림이 지속적으로 연결돼서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아는가 하는 거라. 글을 읽더라도 사띠를 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부터 마음이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분명하게 착착착 읽어나갑니다.

그런데 삼빠자나가 있을 것 같으면 그걸 읽어나가면 나중에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기억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인내하는 거라고 하는 것은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를 연결하는 콘센트와 같습니다.

이 따뜻하게 덥혀주는 이 기계와 벽에 붙어있는 전기가 있습니다. 전기가 있으면 이걸 연결해주는 콘센트-접속기가 없을 거 같으면 이것은 따뜻하게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인내하는 마음이 있으면 쉽게 말해서 마음이 평정하고 고요한 상태가 돼있을 거 같으면 그 접속기-콘센트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콘센트가 있어서 탁 꽂으면 따뜻한 바람이 싹 나오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이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것을 뭐라 그러느냐면 '요니소마나시까라' 라고 그럽니다.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서 그 대상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그런 접속기가 없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요니소마나시까라(yonisomanasikāra)' 라고 하는 것들이 선하게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그 대상에게 바르게 겨냥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들이 자꾸 끊어져버리게 된다는 거라.

 

이런 6가지들로 보통 나에게 지금 칸띠가 있는가? 인간이 갖춰야 되는 조건, 요소 중에서 칸띠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판단해야 됩니다.

 

그런데 좀 이해하기 어렵죠? 다른 방법으로 얘기해보겠습니다.

락카나(lakkhaṇa) 라고 하는데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어떤 것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그냥 그것을 받아들에게 된다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칸띠에 라사(rasa)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 칸띠가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 좋은 것에도 끄달려들어가지 않고 싫은 것에도 참아내고 그러한 기능들을 하고 있을 때 ‘아, 나는 칸띠를 하고 있다’

 

그래서 거기에 따라서 내 마음은 빳쭈빳타나(paccupaṭṭhāna) 라고 해가지고 일어나는 마음들이 어떠한 경우든지 부드럽고 너그러운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대상에 대해서 항상 부드럽고 너그러운 마음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은 뭐가 원인(padaṭṭhāna)이 돼서 그런 마음들이 일어나는 거라?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대상을 대상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객관적으로 싫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야 되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원인이라서 아, 저 싫은 사람도 그때 일어난 마음일 뿐이다 하고 싫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무덤덤한 사람으로서 그냥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그럼 내 마음은 그것으로 인해서 온화하고 고요해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그 대상에 대해서 또 뭔가 싫은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걸 참아내야 되는 거고. 그래서 아, 다시 평온한 마음으로써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칸띠라고 하는 것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계속 일어나져야 그것이 좋은 효과들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그래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때는 칸띠는 어떠한 경우든 일어나지를 않는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칸띠는 살아가는 데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일상생활 할 때도 꼭 마찬가지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고, 또 그것들이 변하고 하는 것들을 성품으로써 보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그 대상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들이나 하는 것들이 없는 대신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평온합니다.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떻게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그 평온함을 잊어버리지는 않는다는 얘깁니다.

 

처음에 스님도 수행할 때는 한두 시간 지나고 나면 다리가 아파서 괴로워서 힘들었어요. 그리해도 나중에는 스승이 그 고통을 알아차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거 안 알아차려져요. 처음에 할 때는. 그런데도 참고 견디어나가는 거라.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그 대상으로부터 탁 떨어져서 그 고통을 보게 되니까 그 고통도 순간순간 자꾸 변하는 것이 보이는 거라. 그러니까 재미가 있어지니까 당연히 그 변하는 것이 더 빨리 변하게 되는 거고, 그리고 장소도 변하게 되는 거고, 깊이도 변하는 거고, 강도도 변하는 거고, 느낌들도 변하는 거고, 계속적으로 바뀌어나가는 그것만 보게 되는 거라. 그게 뭐냐면 그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때.

 

그러니까 고통이 그냥 하나의 대상일 뿐인 것이지, 대상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지, 고통이 나로 인해가지고 내가 아프다는 생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렇게 되니까 그 고통도 나에게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거라.

똑같이 호흡이 대상이듯이 고통도 대상으로써 받게 되는 거라.

 

그래서 마음에서 ‘아, 인제 그러한 것들이 나에게는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크게 괴롭고 즐겁고 하는 것들로서 바뀌지 않고 평온한 마음이 그대로 유지하게 되는 거라. 하나가 그렇게 되면 다른 것들도 연달아서 그렇게 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상이 일어날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대상으로써 보게 되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만이 이 칸띠를 자꾸 기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대상을 자꾸 피해버린다든지 아니면 내가 조작할려고 한다든지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영원히 그 상태에 이르지 못하고 자꾸 넘어가게 되는 거라.

 

이 칸띠가 계속될 거 같으면 「그냥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체크한다.」 그 뒤에,

상카라 우뻭카 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 행사지), 모든 조건지워진 것들 형성된 것들은 변하게 돼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뻭카(upekkhā) 항상 평온한 마음을 가지는 지혜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해탈에 이르기 위한 직전의 단계의 가장 큰 지혜가 이 인내로 인해가지고 일어나는 것들이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내를 완성하면 해탈에 이르는 도에 들어간다" 하고 얘기합니다.

 

상카라우뻭카냐나가 일어나고 나면 그다음에는 조금 지나고 나면, 연속해서 훈련하고 나면, 대상들에 대해서 번뇌들이 떨어져나가는 게 보입니다. 견해가 확실하게 자리잡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견해, 유신견이라고 하는 것이 탁 떨어지는 것이 보여집니다.

아, 이게 나라고 하는 것만 탁 떨어지고 나면 대상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서는 인제는 어떠한 것들이든 대상을 보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유신견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법에 대해서 의심들도 안 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이 길을 나아가는데 어떤 것들도 장애가 되지 않는 거라.

시끄러운 시장통에 있든지, 아니면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설혹 독송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니면 시장통을 걸어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평온한 마음을 해치는 것은 아닌 상태가 돼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자신은 아, 내가 인제 바른 길에 들어섰다, 도의 길에 들어섰다 하는 걸 본인이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과에 이르는 마음이 탁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계속적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거라.

그마만큼 칸띠라고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도 굉장히 유용하게 쓰이고, 수행에서도 반드시 갖추어야 되는 것들입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칸띠가 갖추어지고 나면은 다른 바라밀들을 행하기는 굉장히 수월해집니다. 내가 보시바라밀을 행하든 지계바라밀을 행하든 아니면 결정심바라밀을 행하든 칸띠가 있을 거 같으면 그것들을 행하는 것이 바른 방향으로 되어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인간이 갖춰야 될 4가지 조건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들이 이 칸띠라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3가지는, ◈ 여름에 시원한 바람과 같은 사람 ◈

 

첫 번째가 계율, 도덕적으로 잘 살아가는 것.

성내는 것들의 해로움을 알면 성을 안 냅니다. 마음이 욕심을 부리는 것들이 얼마만큼 나에게 해로움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라고 하는 것들은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수행해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도구다 하는 생각을 가질 것 같으면 3번째 계율을 잘 지키게끔 됩니다.

 

네 번째는 강한 정신력,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바른 말을 하고 사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이 5계 중에서 가장 힘드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항상 정직하고 항상 사리분별 할 수 있는 말, 그리고 이익되고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말들만 자꾸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자꾸 갖추어나가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가 어리석지 않고 건강하고 바르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요즘 보면 그 뭐라고 그러드라? 포켓몬? 스님이 부산약국 앞에 있으니까 그 앞에 대학생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내내 그거 꿰고 탁 이렇게 해가지고 잡는 거라고 그러대. 걸어가면서 내내 그거 하고 있는 거라. 열명 중에서 다섯명 여섯명은 그러고 걸어가요. 그래서 그게 뭔가 해가지고 보니까 그게 포켓몬이라고 하는 거라고 그러더라고.

어찌 보면 지금 걸어가면 걸어가는 것들을 마음에 두고 걸어가야 되는데 왜 저럴까 하는 거라. 술을 안 먹는다고 해서 자기 정신이 취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것에 마음이 뺏겨버리면 정신이 취하게끔 돼있습니다.

걸어갈 때는 걸어가도록 해야 되는 거고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게 어리석지 않고 잘 살아가는 것이지, 걸어가면서 그런 것들을 하는 것들은 꼭 바른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어떨 때는 뉴스를 이렇게 보면 그것들을 한다든지 아니면 술 먹고 무슨 일들이 일어난다든지 이런 것들을 보면 참 어리석게 살아간다 하는 그런 마음이 듭니다.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를 않습니다. 자신이 어리석지 않게끔 제정신을 가지고 살아갈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계율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그런 것들을 도덕적으로 잘해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항상 이로움을 주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알든 모르든 간에 자기 자신은 그것으로 인해서 행복해지는 거라.

그래서 "계율을 잘 지키면 여름에 시원한 바람과 같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편할 수가 없는 거라 본인이.

 

그게 인제 첫 번째고, 두 번째가 여기 3페이지부터 5페이지까지 적어 놓은 '인내'라는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 일관성이 있는 사람 ◈

 

처음에 스님이 한국 와서 참 힘들었던 게 이 일관성이 있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계속 방해를 하게 됩니다. 나는 테라와다적으로 살고 또 그렇게 나아가기를 바라는데 주변에서는 그걸 원하지를 않는 거라. 특히 대승불교 사찰 태종사라고 하는 절이 있습니다. 염불도 하라고 하고 뭘 또 하라고 하고 그러니까 그게 참 많이 부딪치는 부분이었어요. 그래도 나는 그냥 꿋꿋하게 내 일을 이렇게 해나가는 거라.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그게 참 잘한 거라. 일관성 있게.

지금도 태종사에서 지금 빨리 들어오라고 그럽니다. 내가 거기 들어가면 내가 일관성있게 사는 삶이 또 깨지는데 내가 그 불구덩이로 왜 또 들어가느냐는 거라. 그런데 거기서는 내가 거기 있음으로 인해서 어쨌든 수행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그런 사람들이 자꾸 많아지니까 사찰의 경제가 조금 더 잘 돌아가고 하니까 그걸 바라고 자꾸 또 오라고 하는 거라. 그러니까 내가 망가지든 말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그런데 그걸 아는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피해버리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일관성있게 살아가야 되는 것이지, 쉽게 말하면 대승불교적인 것도 거기서는 거기대로 그냥 괜찮고, 여기 와서는 여기대로 또 괜찮고, 그거 어떤 게 맞는 건데 그럼? 그거는 꼭 이 말을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전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전하고 다르게 전하는 거와 마찬가지가 돼버리는 거라.

적어도 일관성 있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될 때 자기 자신이 ‘아, 내가 참 그래도 잘 살아오고 있다’ 하는 마음들이 들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일관성이 있게 살아가는 것은 되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 지혜가 있는 사람 ◈

 

여러분이 없으면 지혜가 있는 사람들 옆에 가까이 가서 자꾸 있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법을 자꾸 듣고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거고, 그것이 어떠한 존재에 있든지 간에 관계없이 배울 수 있는 것들을 그렇게 자꾸 배울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도 지혜가 있게끔 자꾸 해야 됩니다.

뭔가 자꾸 다툼이 있는 곳들에 가서는 안됩니다. 또 그런 사람 옆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자꾸 뭔가를 논쟁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그런 사람 가까이 가서도 안 되는 거고.

지혜 있는 사람은 문제를 만들지를 않습니다. 문제를 만들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들이 일어날 일이 없게 되는 거라. 또는 그런 문제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순간순간 잘 판단해서 거기로부터 빠져나오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런 지혜 있는 사람이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적어도 이 4가지는 여러분들에게 꼭 필요한 4가지 요소입니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되는 특색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중생, 동물하고 차이나는 것이 그런 겁니다. 이런 것을 갖추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어야 되는 다른 존재들하고 차이나는 것들이 없어져버립니다.

여러 가지 좋은 조건들을 가지고 태어났을 때 이것들을 자꾸 가질려고 노력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