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방일하지 말라는 붓다 최후의 말씀 (20170602. 대구)

담마마-마까 2022. 4. 29. 09:00

https://youtu.be/INa2XtTcfAE

* 방일하지 말라는 붓다 최후의 말씀 (20170602. 대구)

 

··· 그 반대방향의 게으름 부리는 상태를 얘기할 때는 '알라시양(ālasiyaṁ)' 이라는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보통 '알라시양' 이라고 얘기를 할 때는 일반 세속적인 의미로써 좀 많이 쓰여지는데, 여기서 '빠마다(pamāda)'라고 할 때 또는 '압빠마다(appamāda)' 라고 할 때는 보통은 불교적인 용어로, 특히 수행적인 용어로써 많이 쓰여지는 그런 용어입니다. 이걸 잘못 이해해서 뭔가 열심히 노력하면 방일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에 대한 정의를 좀 하면서, 부처님이 마지막에 말씀하신 최후의 말씀이 뭡니까?

 

「appamādena sampadetha」 「압빠마데나 삼빠데타」

"방일하지 말고 수행 열심히 하라. 목적한 바를 성취하라" 그런 뜻이죠.

그런데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그것을 부처님의 유언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임종게라고 하는 것이 있죠? 보통 큰스님들이 열반할 때가 되어가면 상좌들이 가서 큰스님한테 여쭈어봅니다. “큰스님 뭐 남기고 싶은 말씀있습니까?” 아니면 “마음에 뭐 미흡한 것이 있습니까?” 그렇게 물어보든지, 아니면 “스님 아직도 마음이 여여하십니까?”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큰스님들이 얘기를 하게 되는데, 그걸 보통 임종게라는 형식으로 쓰는데, 그건 어찌 보면 순수하게 대승적인 생각입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부처님은 유언을 하지 않았다." 하고 얘기했습니다.

부처님인 처음부터 45년간 쭉 법을 다 설한 상태에서 단지 마지막에 그 말씀이 있으신 것뿐이지, 그것을 유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유언이라고 할 것 같으면 두 가지 형태입니다.

이때까지 내가 말하는 것 중에 뭔가 말 안 하고 미흡한 것이 있을 때, 여러분들 재산상속 할 때도 유언하잖아. 미흡한 것이 있어서 그걸 매듭지어주고자 할 때 그렇게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아니면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아, 이건 틀렸다. 하고 얘기할 때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한다든지 이럴 경우에는 그걸 유언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은 마지막 말씀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법이 완벽하지 않은 법은 없습니다. 또 자기의 말을 부정하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진리 그 자체를 설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그것을 임종게나 유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나라에서는 마지막 최후의 말씀을 각각 다르게 얘기합니다.

 

어떤 데서는 "압빠마데나 삼빠데타.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라" 하는 그것을 마지막 말씀으로 하기도 하고, 아니면 또 다른 데서는 아니다. "이 몸은 형성된 것들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니까 너희들은 더욱더 목적한 바를 성취하도록 노력하라." 하고 긴 문장으로 된 것들을 마지막 말씀이라고 얘기하고, 또 다른 데서는 또 다르게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각각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은 대반열반경을 기준으로 잡아가지고 얘기들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후의 말씀은 조금씩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공통적인 것은 거기에 다 들어가는 말이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수행하라"는 말이기 때문에 그것이 부처님이 함축적으로 하신 말씀이다 하고 얘기들을 하는 것뿐입니다.

부처님의 최초의 말씀이 있죠? 초전법륜경이라고! 최초의 말씀도 있고 또 중간에 하신 말씀도 있고, 쭉 이어서 하신 말씀도 있듯이, 마지막에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유언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단어가 압빠마다(appamāda), 빠마다(pamāda) 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을 게으름뱅이라고 할까? 세속적으로 한번 봅시다. 어떤 사람이 게으른 사람입니까? (수행자 : 할 일을 제때 하지 않고 미루는 사람) 그렇지. 할 일을 제때 하지 않고 미루는 것들입니다. ‘나중에 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게으름 피운다고 얘기합니다. 그게 보통 세속적으로 얘기하는 게으름 피운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게으름 부리는 사람들의 특성들이 뭔 줄 아세요? 되게 바쁩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은 만날 바빠. 그래서 보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사람들하고 약속 잡기가 더 힘들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사람들은 굉장히 바쁩니다.

실제적으로는 자기한테 도움되는 일이 아닌데 바빠. 몸으로도 바쁘고 몸이 안 바빠도 정신적으로도 바쁩니다. 뭔 생각을 하는지 그렇게 하루종일 계획하고 뭘 하고 하면서 바빠. 그래서 게으름뱅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요하고 좋을 거 같지만 실제적으로는 되게 바쁩니다.

 

그래서 별 소득도 없이 바쁘기만 할 것 같으면 세속적으로 생각해가지고 ‘어? 내가 게으름 부리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한번 생각을 해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뭔가를 할 것 같으면 세속적으로라도 뭔가 결과가 나오든지, 아니면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가 행복해야 되는데, 행복하기보다는 편안한 것은 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들이 대부분 많습니다. 그런 것들은 좀 조심해서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게으름이라고 할 때 세속적인 용어들로써 많이 쓰여지는 게 '알라시양' 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편해지고 게으름 부리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반면에 또 '수카까마'라고 하는 '행복해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빠마다(pamāda) 압빠마다(appamāda) 라는 용어를 쓸 때는 보통 불교적인 용어로써 많이 씁니다. 이 용어로 쓸 때는 어떤 의미들을 가지게 될까?

그걸 스님은 불교적으로 방일한 것을 게으름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그걸 이렇게 보면 됩니다.

첫 번째는 뭐냐면 지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

수행으로 한번 예를 들어볼까요? 수행에서 게으름 피우는 사람들이 지금 해야 될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뭐냐면 좌선하면 고요하고 좋거든. 경행을 하다가도 좌선을 1시간 했으면 경행을 1시간 하라고 스님이 분명히 얘기했는데도 경행 1시간 안 합니다. 안 그러면 경행을 대충 발란스 맞추기 위해서 때워버리고 그냥 좌선하고 앉아버립니다. 지금 해야 할 것들을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것이 수행에서 게으름이 일어났다는 생각을 못 일으킨다는 거라. 그래서 지금 해야 될 것들을 하지 않는 것도 게으름 피우는 것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다음에 또하나가 불교적으로 게으름 피운다고 하는 것이 어떤 거냐면, 자기합리화 시켜버리는 것. 마음에서 뭔가 하고 싶은 욕망이 탁 일어났는데 그걸 이성적으로 생각할 것 같으면 ‘아니야. 그건 하면 안 돼!’하고 탁 막아야 되는데 그걸 자기합리화 딱 시켜버리는 거라. ‘아니야. 나는 지금 열심히 노력해가지고 돈 벌어야 되기 때문에 이런 선원에 와서 수행할 시간 없어!’

아니면 나에게 성냄이 일어났다. 그럼 자기가 먼저 수행적으로 아니면 불교적으로 아, 성냄은 자기 자신을 해친다는 마음이 들 것 같으면 성냄을 먼저 이성적으로 판단해가지고 성냄을 제거해야 되는데 ‘아니야. 이 성냄은 너로 인해서 일어났다’ 하면서 합리화시켜버리는 거라. 나는 성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타당하다고 자꾸 생각을 해버리는 거라. 그런 것들도 하나의 예에 들어갑니다.

 

그다음에 또 불교적으로 게으름에 들어가는 것들은 뭐냐면 올바른 방법으로 수행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자기 방식대로 합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 방식대로 해가지고 좋은 방향으로 넘어가면 좋은데, 대부분은 보면 자기 방식대로 하는데 딱 걸려가지고 못 넘어가진다는 거라. 그런데도 자기 방식대로 합니다.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수행하다가 잠깐 삼매에 들어서 너무 좋거든. 그러면 그다음에 수행할 때는‘ 아, 내가 삼매에 들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게 됩니다. 그런데 똑같은 삼매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데도 그 삼매를 자꾸 체험할려고 합니다.

 

스님이 자꾸 “그러지 말아라. 마음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뿐이지 그때의 마음을 그대로 다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렇게 얘기해도 본인은 그 말 안 듣습니다. 자기 방식대로만 하고 다시 그 삼매 체험을 할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삼매를 비슷하게 체험했다 치자. 그런데 거기서 넘어가야 되는데 만날 거기서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는 거라. 자기의 방식대로만 하는 거라.

자기의 방식대로만 해가지고는 안 되는 거고, 또 자기의 방식대로만 하는 것은 불교적으로 봤을 때는 게으름 부리는 것입니다. 좀 더 빠른 길이 있는데 왜 자꾸 그 길을 가느냐는 거라.

 

그리고 또 게으름 피운다는 의미는 여기에 써진 주된 내용이 그겁니다. 죽어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 쉽게 말하면 알아차림이 없이 그냥 흘려보내 버리는 것! 어떠한 경우든지 알아차림을 가지고 사띠 하면서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을 해야 되는데 그거는 하지 않고 대충 해버린다는 거라.

문을 열 때도 문을 연다는 것을 알고 해야 되는데, 이미 문을 열면서 쓰윽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문을 여는 것은 대충 그냥 인식하고 넘어가버리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대충해도 문제가 없을 거 같으면 괜찮은데 항상 그리 할 경우에는 그것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반드시 마음에는 불선한 마음이 탁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알아차림 없이 뭔가를 자꾸 할려고 하는 습관들이 돼있다는 거라. 그것도 불교적으로 봤을 때는 게으름 피우고 있다 하는 그런 의미가 됩니다.

 

이렇게 봤을 때 세속적으로 게으름 부리는 것하고 불교적으로 게으름 부리는 것은 좀 차이가 많이 납니다.

세속적으로는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 되는 것으로 인식을 하고 있지만, 불교적으로는 그것이 아니라는 거라. 열심히 하더라도 그게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있고, 할 동안에 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거고, 또 하는 동안에 하는 것들이 나쁜 행위들이나 나쁜 것들일 거 같으면 그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게으름의 종류에 속한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인 것들로서 빠마다, 압빠마다 라는 것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불교적으로 탐진치가 일어났으면 탐진치가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것을 없앨려고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정해지는 것들대로 좌선-경행, 또 와서 집중 수행할 때는 집중 수행하고, 선원에 와서 수행할 때는 수행하고, 문답하고, 또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이런 것들을 해야 만이 적어도 그때만큼은 게으름 부리지 않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참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은 전에도 언젠가는 얘기했지만 "감기 바이러스와 같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다른 바이러스들은 몸에 항체가 생기면은 그 바이러스는 다시는 침투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방접종 받고 하는 것이 그런 의미들을 가집니다. 그거 딱 한번 맞고 나면 그와 같은 종류는 변종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다시는 나를 해치지 못하는데, 감기는 안 그렇다는 거라. 계속적으로 변종을 일으킨다는 거라.

그래서 감기가 들어오면 감기약을 먹고 감기를 떨어뜨린다고 해가지고 또 며칠 뒤에 감기가 안 든다는 보장을 못한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끊임없이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주사를 맞고 약을 먹고, 또 들어오면 또 주사를 맞고 약을 먹고, 끊임없이 해야 된다는 거라.

 

불교적인 게으름도 그와 같다는 거라. 그와 같이 감기 바이러스와 같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것을 알아차려가지고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경전에서는 "진흙에 빠진 코끼리와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진흙에 빠진 코끼리는 열심히 자기가 노력해가지고 그 진흙에서 스스로 빠져나와야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번뇌가 들어올 것 같으면 스스로 노력해서 그 번뇌를 제거할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그런데 방일하고 게으름 부리는 것이 이와 같이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지속적으로 계속 일어나는 것이듯이, 방일하지 않고 있는 것들은 경전에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압빠마다-불방일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성품보다도 최상이다."

어떤 선한 법, 사띠든 삼빠자나든 아니면 다나든 사마디든 이런 것보다도 오히려 더 크다는 거라. 모든 발자국이 코끼리 발자국 안에 포함되듯이 모든 선한 법을 행할 때는 압빠마다-방일하지 않는 마음들이 항상 거기에 따라야 된다는 뜻입니다.

방일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든 선법의 기본이 되게 돼있다는 거라. 그 정도로 게으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최후의 말씀으로 "게으름 부리지 말고 수행 열심히 하라"고 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보면 모든 부처님 가르침을 여기에다 함축적으로 얘기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내가 사띠해야 되고, 어떻게 내가 마음 써야 되고, 어떻게 또 내가 목표를 잡아서 나아가야 된다는 것들을 분명하게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방일하지 않는 것, 게으름 부리지 않는 것들이 열반으로 향하게 하고 해탈에 이른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없는 길로 간다" 하고 얘기합니다.

'불사(amata)'라고 하죠. 불사는 죽지 않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불교 안 믿고 차라리 기독교 믿으면 되지.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하느님만 믿으면 간단한 건데, 그런데 불사는 그런 것을 얘기하는 것은 분명하게 아닙니다.

 

불사(amata)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다시 태어나지 않을 만큼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들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지금 현재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살아가는 것들을 불사'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죽음이 없다는 것은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없다는 것은 죽은 자와 같다" 하고 경전에서 설명합니다.

그래서 불사라고 하는 것을 영원불멸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오해해버려서는 안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방일하지 않는 자는 해탈하는 자가 되고, 해탈에 이르는 자격을 지닌 자" 라고 합니다. 그걸 빨리어 용어로 '밥바' 라고 그럽니다. 'bhabba(밥바), 자격을 지닌 자'라는 뜻입니다. '해탈의 자격을 지닌 자, 불사의 자격을 지닌 자, 열반의 자격을 지닌 자' 라는 뜻입니다.

"자격을 지닌 자(bhabba)"라는 뜻은 보통 경전에서는 그걸 9개로 얘기해 놓았습니다.

탐·진·치가 안 일어났을 때, 나에게서 탐, 진, 치 이런 것들이 안 일어나게 되는 사람은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거고.

 

실제적으로 이 탐·진·치의 영역에서 오는 건데, 경전에서는 그걸 9가지로 얘기해 놓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 , 치가 없는 것, 원망하는 것이 없는 것, 질투 안 하는 것, 위선적이지 않는 것, 기만하지 않는 것, 아끼는 것들이 없는 것, 크나큰 분노 크게 분노를 일으켜가지고 하는 것들이 없는 것, 9가지로 얘기합니다.

실제적으로 이것은 대부분 탐·진·치의 영역에 속합니다.

 

쉽게 말하면 "탐, 진, 치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해탈에 이를 자격이 있다" 하는 뜻입니다. 어찌 보면 불교도의 자격과 비슷한 맥락을 지니고 있는 겁니다. 그마만큼 '밥바'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인데, 그 자격을 갖춘 자를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 방일하지 않는 자, "방일하지 않는 자가 해탈에 이를 자격을 갖추게 되고,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열반을 체험한다" 그런 뜻이 됩니다.

 

자! 한번 봅시다 이.

[ pamāda는 「게으름, 방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반인이 이해하는 게으름과 부처님이 말씀하신 게으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Appamāda는 불교의 실천, 수행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이다. 그런 뜻입니다.

 

탐·진·치가 소멸하는 것들이 바로 도의 길로 가는 겁니다.

그 도의 길로 가는 것은 바로 팔정도의 실천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경전에는 그렇게 써놓았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팔정도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하는 것들을 바르게 행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걸 바르게 행하게 될 때 도의 길로 가게 되는 거고, 도의 길로 가는 것들을 쉽게 말하면 압빠마다 라고 한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압빠마다는 계율을 지키는 것, 명상하는 것, 자애를 지니는 것, 모든 것들에 압빠마다 없이 행할 수 있는 법은 없다는 거라.

 

보통 “수행 왜 합니까?” 할 것 같으면 좀 더 많은 공덕을 쌓기 위해서 한다고 그럽니다. 많은 공덕을 쌓는다는 거는 내가 뭔가를 하더라도 보시를 하든, 계를 지키든, 아니면 수행을 하든, 그런 모든 것들은 선한 마음으로써 자꾸 하게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많이 공덕을 쌓게끔 됩니다. 항상 알아차리면서 살게 됩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방일하지 않고 게으름 부리지 않는 마음들이 항상 일어납니다. 왜? 그렇게 알아차리지 않을 거 같으면 언제든지 게으름 부리는 마음이 마음으로 향하는 것 두 개 중에 하나가 탁 일어나게끔 됩니다. 게으름 부리려고 하는 마음은 항상 일어나게 돼있기 때문에 항상 내가 그걸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에서 사띠를 실천하는 것 자체가 곧 압빠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띠를 실천하고 있으면 압빠마다가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빠마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띠 없는 삶은 죽은 자와 같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사띠를 하고 있으면 당연히 압빠마다가 있기 때문에, 그건 불사의 길이다. 항상 죽지 않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나아가는 길이다 하는 뜻입니다.

깨달음의 길이 불방일의 길이고, 방일하지 않는 것이고, 그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은 방일한 게으름뱅이와 같다, 게으름뱅이다 하는 것들을 여기 적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압빠마다라는 단어를 구분해가지고 빨리어 용어로써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 appamāda는 mad라고 하는 어간으로부터 된 것. mad는 취하는 것입니다.]

취하면 뭔가 분간 못하죠? 그와 같이 무지에 딱 가려진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무지한 삶은 괴로움이 증가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은 빠마다에 해당이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 마음을 고요하고 바르게 유지하고, 순간순간을 알아차려서,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힘쓰는 것은 appamāda입니다.]

끊임없이 현재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그게 압빠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잘못 해석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방일하지 않는 것을 해석하는 경우들, 또는 법화경에도 그런 용어들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다음에 선방 스님들 선문답으로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잘못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압빠마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경전에도 그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경전 구절을 적어 놓았습니다.

Appamādo amatapadam, pamādo maccuno padam;

Appamatta na miyanti, ye pamatta yatha mata.

[ 불방일은 불사의 길이고, 방일은 죽음의 길이다.

불방일을 실천하는 사람은 죽지 않고, 방일한 사람은 이미 죽어있는 것과 같다.]

하는 걸 적어 놓았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어떻게 될까? 사띠는 어떠한 경우든지 지금 현재를 알아차리는 거죠? 과거나 미래로 가 있을 거 같으면 그건 죽은 것과 같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현재를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게 인제 일반적인 '압빠마다'라고 하는 불교적인 용어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에 대해서 잘못 오역하는 일이 없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압빠마다라고 하는 용어들이 대표적으로 나오는 것이 부처님 최후의 말씀에 보면 "압빠마데나 삼빠데타"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부처님 유언이다 하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뒷부분에 적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분명하게 스승의 주먹에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것은 없다 하고, "사권(師拳), 이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에 비밀스럽게 내가 유언으로써 남겨야 될 것들은 사실은 없습니다. 이미 모든 것들을 완전하게 설해놓았다는 거라.

 

마라가 부처님께 인제는 깨달은 사람들도 있고 부처님 말씀을 잘 따르니까 돌아가셔도 안 됩니까? 하고 얘기했을 때 부처님이 살펴본 것들이 뭐냐 하면,

내가 설해놓은 것들이 불완전한 것이나, 설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전혀 없다는 거라. 다 설해놨다는 거라. 그래서 인제는 내가 죽고 나서도 이 법이 스승이 되어서 사람들을 이끌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인제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괜찮겠다 해가지고 삼개월 후에 반열반에 들 것이다 하고 예언하게 됩니다.

이미 그전에 부처님은 완전하게 설해놓았다는 거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완전하게 설해지지 않는 것은 없다는 거라. 그것을 고칠 것도 없고 변경할 것들도 전혀 없다는 거라.

그리했는데 마지막에 가서 또 남길 게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이걸 최후의 말씀이라고 이해를 해야지, 유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것이 밑에 「부처님 최후의 말씀」 이라는 것에서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처님이 얘기를 해놓았는데도 사람들은 마음을 안 바꿀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 자기 자신을 왜 바꿀려고, 자기 자신을 혁명할려고 하지 않을까? 참 아니러니하죠? 완전한 것들을 그냥 따르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따르기가 그렇게 힘드는 모양이라.

그게 왜 그러냐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여러분들은 "탐진치의 충동으로 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조심해야 됩니다.

자주자주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됩니다. ‘아, 나에게 탐심이 있는가? 나에게 진심이 있는가? 나에게 치심이 있는가?’ 하는 것을 자꾸 돌아보아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충동질이 없을 거 같으면 사는 보람이나 살아간다는 의미들을 찾기가 힘든 게 보통 일반적인 세속의 삶이라는 거라.

 

그런데 그거 계속했다가는 또 윤회하는데! 계속 뺑뺑이를 돌아야 되는데! 좀 확! 바꿀려고 마음을 먹어야 되는 거라. 바꿀 수 있는 길은 부처님이 완전하게 설해놓았기 때문에 그 길을 그냥 따라버리면 되는데, 대부분 안 합니다.

한번 예를 들어볼까요? 그 길에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출가의 길이다. 그럼 지금 여기 사람들이 다 출가할 수 있겠어요? 못한다는 거라. 할 일이 있고, 갖가지 핑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자꾸 돌아보아야 됩니다. 세속적인 삶이든 출가의 삶이든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면 그것은 그러한 지위가 크게 문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세속적으로 사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러한 위험성들은 훨씬 더 많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자꾸 생각을 해야 됩니다. 어찌 보면은 출가한 스님들보다도 여러분들이 더 부처님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것들을 경책으로 삼을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한번 보십시요. 우리가 뭐 자식 걱정을 해? 아니면 집안 걱정을 해? 어떻게 돈 벌 걱정을 해? 뭘 해? 사실은 그거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거 다 해야 됩니다. 거기서 일어나는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훨씬 더 탐·진·치에 더 많이 노출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어찌 보면은 여러분들이 더 좋은 조건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 그거 그냥 따라야 됩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자꾸 실천하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아이, 우리는 출가자가 아니기 때문에 대충해도 된다’ 그건 오히려 더 아니라는 거라. 오히려 더 열심히 살아가야 되는 것이 재가자의 삶이다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망상 부리는 것들, 이런 것들 하지 말아라는 겁니다. 자꾸 현실하고는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 것들 하지 말고 좀 더 바르게 살려고, 의존하는 것들도 없이 바르게 사려고 하는 것들을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가끔씩 스님이 그런 걸 많이 봅니다.

자꾸 여기 있는 빤냐와로 스님한테 자꾸 의존할려고 합니다. 재가자들이.

물론 걱정해주고 위하는 것은 좋지만 왜 자꾸 의존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의존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한테도 의존하지 마라 했는데, 아난다가 그랬잖아. “부처님 돌아가시고 나면 누굴 의지해서 살아갑니까?” 그거 아니라는 거라, 부처님은.

법과 율을 자꾸 의지해가지고 살아가야 되는데, 부처님도 의지하지 않는데, 스승한테 자꾸 의존할려고 그런다는 거라.

 

여러분들에게 다 먹여줄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먹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뿐 인 것이지, 실천하고 해야 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라는 거라. 그래서 스스로 자꾸 노력해서 스승의 경지 또 부처님이 이른 경지에 이를려고 자꾸 노력해야 되는 것이지, 스승에게 자꾸 의존하려고 하는 것들도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은 그게 좀 덜합니다. 스스로 내가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마만큼 일반 재가자들은 더 한층 부처님 말씀을 자꾸 가까이 접해가지고 더 노력을 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스승이나 다른 어떤 것들에게 자꾸 의존할려고 하는 것들도 버려버리고, 부처님 말씀대로 자꾸 따를려고 노력을 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방일의 실천, 압빠마다라고 하는 방일하지 않고 게으름 부리지 않는 것들을 자꾸 실천해나가야 됩니다.

 

내가 왜 살아가야 되는가? 생각에 빠져버릴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사나? 자기 자신이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자기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할 것 같으면 그때그때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럼 잘 살아가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자꾸 머릿속으로만 굴리고 ‘아,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렇게만 할 거 같으면 개념적으로만 자꾸 바뀌어버리게 되는 것이지, 그것들이 실제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차라리 그럴 시간에는 손을 뻗으면 손을 뻗는다고 분명하게 알고, 걸어가면 걸어가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살아가는 것들이 바른 실천이고, 그게 부처님이 원하는 것입니다.

“에고! 부처님 돌아가시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거 얘기할 필요가 없다는 거라. 그 시간에 자기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수행하는 자들을 부처님은 오히려 칭찬한다는 거라. 그게 여러분들이 해야 할 길이라는 거라. 해탈에 이르는 길을 분명하게 따라가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말루와(Māluvā) 라고 하는 것, 우리 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덩쿨성 식물, 꼭 칡 같은 겁니다. 우리 산에도 보면 칡이 번져버리면 그 나무들이 다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우리 칡은 땅에다가 뿌리를 박고 크지만, 이 말루와 라고 하는 것은 나무에 기생해가지고 덩쿨 떡잎같이 큰 겁니다. 열대에서. 그게 하나가 성장을 시작하면 그 나무만 죽이는 것이 아니고 그 숲 전체를 전부 다 말려 죽여버립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떠한 경우든지 항상 그런 게으름은 계속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자기 자신을 죽이는 거라는 걸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말루와가 뿌리를 내리지 않게끔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처음 애초에 말루와가 조금 나올 때 아니면 뿌리를 내리려고 할 때 싹둑 짤라버렸을 거 같으면 문제가 없는데, 그걸 모른다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는 방일하고 게으름 부리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은 갈애가 말루와 덩쿨처럼 증가한다.하고 나옵니다.

갈애는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생존욕구라고 하는 것들, 그리고 욕망이라고 하는 것들, 그리고 그냥 편하게 게으름 부리고 지낼려고 하는 것들은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 '갈애가 말루와와 같다' 하고 자꾸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일어나지 않게끔 자꾸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의 위험성을 보지 못하면 그것이 덮어버려서 결국은 자기 자신이 계속적인 윤회에 빠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는 거라. 성냄이 일어나든 아니면 탐심이 일어나든 이러한 것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리게 됩니다. ‘뭐 이게 대수인가?’ 실제로는 안 그렇다는 거라.

자기 자신을 말리고 죽여버리는 거라는 것을 자꾸 생각을 해야 됩니다.

 

● 이번 포인트는

 

• 부처님에 감추어진 비밀스런 것은 없습니다.

완전하게 해탈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설해놓았다는 것입니다.

• 부처님의 유언은 없습니다.

• 부처님은 최후의 말로 불도의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

뭐라고 말했어요? 압빠마다!

• 불방일하다는 것은 불도의 키워드입니다.

• 지금을 사띠하는 것이 불방일입니다.

사띠 없는 삶은 죽음과 같다 하는 걸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말루와와 같이 자기 자신을 말려버린다 하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