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붓다가 발견한 진리 갈애 (20170623. 대구)

담마마-마까 2022. 5. 3. 09:00

https://youtu.be/Vxcsd08hsUs

* 붓다가 발견한 진리 갈애 (20170623. 대구)

 

오늘은 「붓다가 발견한 진리 갈애」 라는 제목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거기 2페이지에 보면 갈애의 의미에 대한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갈애」라고 하는 빨리어 용어가 딴하(taṇhā)인데, [taṇhā(딴하-)는 「마르고 있다」 「채워지지 않았다」 「가지고 싶다」라고 하는 생명의 근원적인 욕망] 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굶주리는 상태를 얘기합니다. 굶주리기 때문에 뭔가를 먹어야 되고, 뭔가를 해야 되고 하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이렇게 합니다. 사실은 그게 살아가는 건데, 그런 갈애를 통칭해서 얘기합니다.

 

보통 그런 갈애를 세 가지로 얘기해서,

감각적인 욕망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들,

살고 싶어하는 것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들,

또 부숴버리고 싶어하는 파괴의 욕구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들,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조금 전에 우리 막내가 사진 찍을려고 하는데 “사진 찍지 마세요!” 이렇게 한 것은 어떤 갈애에 해당이 될까? (수행자 : 감각적인 것)

감각적인 것에 해당이 되는 거에요?

그럼 다시 한번 설명을 할게요. 오늘 공양물을 가지고 왔는데, 예를 들어봅시다. 감자를 가지고 뭔가 요리를 해가지고 스님한테 공양물을 올렸다. 그럴러면 먼저 감자를 가서 사가지고 와야 되겠죠? 사가지고 와서 씻고 다듬고 벌레 먹은 거 있으면 도려내고, 그러고 나서 삶든지 조리해가지고 해야만이 그걸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게 일반적인 거죠?

그런데 감자가 어떤 게 좋은 건지 골라가지고 가지고 오기만 할 거 같으면 내가 먹을 수가 없죠? 그리고 그렇게 가지고 온다고 하더라도 씻고 다듬고 하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삶고 조리를 하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먹는다는 행위에는 이 세 가지가 다 포함이 되는 겁니다. 다 있어야만이 됩니다.

고르고 한다는 것은 좋고 싫음에 따라서 고르는 겁니다. 감각적인 욕망에 따라서 고르는 겁니다.

 

저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 만약에 나이키 브랜드다. 그럼 본인은 아, 나도 나이키 브랜드 옷 입고 싶다 할 것 같으면 그걸 사고 싶은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건 감각적인 욕망입니다.

그렇다고 자기 옷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럼 자기가 가서 골라야 됩니다. 이게 맞을지 저게 맞을지. 그럼 그건 사기 위한 겁니다. 그건 쉽게 말하면 생존욕구와 마찬가집니다. 살려고 하는 욕구와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해서 옷을 샀다. 사서 오더라도 자기가 입어야 됩니다.

이 3가지가 다 갖추어졌을 때 본인이 그 옷을 입게 되고 하게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자칫 잘못 해석을 하면 이 갈애를 문자적으로만 해석을 하면 3가지를 자꾸 분리를 시켜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욕구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되느냐면, '세 가닥의 실을 꼬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3가닥의 실은 그냥 1가닥으로 보여지는 겁니다.

그걸 좀 눈 밝은 사람이 일일이 보니까 아, 이게 3가닥이라서 3가닥으로 분리는 할 수는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 3가닥의 실은 하나로 꼬아가지고 내가 옷을 입고 뭘 하고 하는 것들로서 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모든 행위가 이루어지고 하는 것들은 실제로는 대부분은 보면 엄밀하게 보면 3가닥이 다 있게 되는데,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걸 눈치를 못채는 거라.

 

조금 전에 그래서 사진 찍을려고 하는데 “사진 찍지 마세요” 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3가지가 다 포함이 돼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크게 드러나지는 것은 좋고 싫어하는 것만 눈에 보이기 때문에 ‘아, 이게 감각적인 욕망에 감각적인 갈애에 속한다’ 하고만 이해를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왜 찍기 싫어했어? 네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싫지? 그게 자기 자신에 대한 견해들이 성립이 되고, 자기 자신이 남에게 드러내는 것들이 싫고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들이 드러나고, 살고 싶기 때문에 자기가 드러내고 싶은 겁니다.

그걸 “찍지 마세요” 하는 것은 그게 싫은 거라. 그건 파괴욕구와 마찬가집니다. 게으름 부리는 것도 파괴욕구에 해당이 되듯이, 실제로는 보면 세 가지가 다 포함이 된다고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게 갈애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갈애는 사성제 중에서 두 번째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로써 부처님이 설해놓았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르고 나서 맨 처음, 삼명이라 해서 초야 중야 후야 이렇게 해가지고 삼명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삼명 그 각각에서 얻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석서에 쓰여진 겁니다.

마지막 후야 쪽에서 정립이 되는 것이, 얻어지는 것이 사성제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확립합니다. "아, 이게 괴로움이구나!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구나! 아, 이것이 괴로움이 소멸되는 상태구나! 괴로움이 소멸되기 위해서는 어떤 길을 걸어야 되는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정립을 하게끔 됩니다.

 

그런데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그 한밤중에 보니까 본인도 살아있는 사람을 보니까 ‘아, 저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 하는 생각을 일으키고, 젊은 사람들을 보니까 자기 자신이 젊었을 때 ‘나도 언제 저렇게 나이 들고 늙게 될지 모른다.’ 자신이 건강한 상태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 저렇게 병든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경각심을 일으켜가지고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출가를 하게 된 겁니다.

 

출가를 해서 탁 보니까 사성제의 진리를 발견했어요. 그런데 그게 원인이 뭐라?

왜 나이 든 사람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건강한데 나도 나이가 든다고 생각한 것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 거라? 왜 병든 사람을 보고 나는 건강한데 나도 저렇게 병들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으킨 거라? 죽은 사람 보고도 마찬가지고.

(수행자 : 사성제를 모르는 그 무명 때문에)

그렇죠. 그거는 무명 때문에 그런 건데, 그것은 있는 그대로는 내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할 거 같으면 항상 나에게는 이런 갈애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갈애들로 인해서 나는 괴로운 거라. 젊어도 괴롭고, 병이 안 들고 건강해도 괴롭고, 아직 살아있어도 괴로운 거라.

그런데 그 괴로움의 원인을 보니까 아, 이것은 갈애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여기에도 적어 놓았듯이,

[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이 일어나는 과정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이다.

그것(괴로움)은 바로 갈애로부터 생기니,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좋아함과 애착이 함께하며, 언제든지 마음에 들어한다는 (3가지 특색을 가진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欲愛], 존재하고 싶어하는 갈애[有愛], 존재하고 싶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 (3종류의 욕구)가 그것이다. (초전법륜경) ]

괄호 쳐서 넣은 것들은 원문에는 없는 것들을 좀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첨가해놓은 겁니다 이!

 

초전법륜경 맨 처음 여섯 번째 단락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해하기 쉽죠?

그래서 괴로움은 갈애로부터 생겨난다, 내가 괴롭고 하는 것들은 갈애로부터 생겨난다 하는 걸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사성제가 성립되는 것이 실제로는 이게 키포인트입니다.

"나에게 왜 괴로움이 생길까?"

왜 괴로움이 생겨요? 지금 덥죠? 에어컨 틀었으면 좋겠죠? 더우니까 괴롭습니다. 왜 괴로워요? 시원하고 싶어지니까!

 

뭔가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그것들을 바꿀려고 하고 더 채울려고 하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래서 갈애의 의미가 뒤에 적어 놓았듯이 지금 현재 굶주리고 있는 상태, 그리고 말라가고 있는 상태라는 거라.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상태, 가지고 싶다는 상태 이걸 갈애(taṇhā)라고 그럽니다.

 

여러분들 아마 채워지지 않았으면 채울려고 할 겁니다. 그렇죠? 그래서 갈애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실제로 보통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갈애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냥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동안에는,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동안에는 '아윗자' 라고 하는 무명이 거기에 들어올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분명히 알고 있는데, ‘아, 생겨난 것들 변해가고 있구나, 부서지는구나, 사라지는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고 있고, 그것도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구분해가지고 그렇게 분명히 알고 있게 됩니다.

 

“이렇게 변해가는 것들은 참 불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허물이 많은 것이다, 그걸 내가 집착할 이유가 없다, 갈애를 일으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게 된다는 거라.

그걸 빨리어 단어로 '아디노와'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에 대해서 그것들이 불완전하고 그것들이 허물이 있다 하고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대상에 대해서만 분명하게 알아차릴 것 같으면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속에 무명이 없게 되는 거고, 그 속에 갈애가 없게 되는 거고, 그 속에 집착하는 것이 없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없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무명이든 갈애든 집착이든 하는 것이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는 거라. 반대로 알아차림이 있으면 무명과 갈애와 집착이라고 하는 것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조건이 안 되는 거라.

그런데 그냥 알아차리더라도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사라지는 것들을 알아차린다 해가지고 변해가는 속성을 모르게 될 거 같으면, 이것들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냥 그거는 알아차리는 것뿐이라는 거라.

 

알아차림이라고 하더라도 완전하게 알아차리는 것들, 변해가는 속성들, 그리고 그것들이 분리되어서 이것들의 특성과 이것들의 특성이 분명히 다르다는 걸 알고, 이것들의 특성은 그 나름대로 반드시 일어났으면 사라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고, 그래서 그것은 나의 것도 아니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 같으면 적어도 거기에는 갈애라든지 이런 것들이 생겨날 여지가 없게 돼버린다 하는 겁니다.

 

만약에 ‘어, 내가 조금 더 건강했으면, 내가 좀 더 오래 살았으면, 내가 좀 안 죽고 싶었으면, 아니면 내고 좀 더 게으름 부리고 싶었으면, 아니면 내가 뭔가 이것들을 더 갖고 싶으면’ 하는 이런 생각이 일어나면은 ‘어, 내가 지금 현재 알아차림이 없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알아차림을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에다가 정신적인 현상이 일어났든 물질적인 현상이 일어났든 그 대상에다가 알아차림을 자꾸 유지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왜? 그 갈애가 일어나는 것은 괴로움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갈애가 일어나면 괴로움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아, 이거 괴로움이 없게 할려고 할 것 같으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게끔 끊임없이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이 수행을 해봐서 알겠지만, 알아차림을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갈 수 있느냐면 한동안은 좌선하면 어쨌든간에 뭔가 좀 아는 것 같애도 고마 좌선에서 털고 일어나면은 그냥 살아가는 거라. 알아차림 없이.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일상생활 자체가 전부 수행이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이어져야 되는데, 알아차림이 끊어지는 순간에 어떠한 경우든지 이런 갈애라든지 집착하는 거라든지, 어리석음이라든지, 무명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탁 그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참 힘이 들긴 할 겁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것들은 자신이 그게 갈애가 일어나는데도 갈애가 일어나는 줄을 모르고 있는 경우들, 그런 경우들은 그것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지를 않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그 갈애의 특성 특색에 대해서 갈애는 이런 특색을 가진다 해서 세 가지로써 얘기를 해놓은 것입니다.

 

갈애의 첫 번째 특색은 뿌납바와(punabbhava)

이것은 뿌나(puna, 다시) 라고 하는 것과 바와(bhava, 완성되는 것) 라고 하는 것, '계속해서 다시 완성되어 가는 것', '계속해서 뭔가를 갈망해나간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것은 계속적으로 반복해나가는 것으로서 끝이 없는 상태라는 겁니다.

‘이것이 갖고 싶다’ 그냥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것들을 갖고 싶게 되는 것이고 계속적으로 그렇게 하게 되는 거라. 그럴 때 나한테 갈애가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가끔 스님이 법문을 이곳저곳 다니면서 ‘아, 이거 괜히 사람들한테 갈애만 계속 일으키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왜 그래요? 법문만 지속적으로 자꾸 들을려고 한다는 거라. 이것 듣고 나면 좀 있으면 다른 것 또 해주길 바라고.

스님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쨌든 이곳저곳에 가더라도 법문을 다르게 자꾸 하려고 그럽니다. 똑같은 주제라고 하더라도. 갈애를 일으키려고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그래도 분명하게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를 해야만이 ‘아, 이것이 갈애구나’ ‘이것이 수행하는 법이구나’ 해서 그걸 실천해나갈 수가 있게 되는 거라.

그런데 어떨 때는 ‘내가 이럴 이유가 있나?’ 계속적으로 사람들은 갈애를 일으키고 있다는 거라. 듣는 것에 대한 갈애, 끊임없이 듣는 것에 대한 갈애를 일으킵니다. 듣고 또 듣고 또 듣고, 그런데 들은 만큼 그만큼 실천이 자꾸 돼나가야 되는데 실천은 안 되고 계속 듣는 갈애만 일으킨다는 거라.

 

그게 쉽게 말하면 뿌납바와와 마찬가집니다. 계속 다시 반복하고 반복하는 거라. 그런데 실제로는 보면 자기의 정신상태나 아니면 행위하는 것들이 바뀌어나가지는 않고 있다는 거라. 갈애가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뭔가를 하나를 갖고 싶다는 것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한다는 거라. 여러분 삶이 아마 대부분 그럴 겁니다. 그게 혹자들은 살아가는 힘이고, 또 사회를 돌려주는 원동력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거 없다고 해가지고 자기가 못사는 것이 아니고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 것은 아닌데도 계속적으로 갈애를 일으키는 방향으로 나간다는 거라.

TV에 광고라든지 뭐든지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들을 계속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자극이라는 것은 가면 갈수록 세지지 약해지지를 않는다는 거라.

 

갈애의 특성이 그겁니다.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그것이 더욱더 커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갈애를 보통 두 가지로 나눈다고 할 것 같으면 약한 갈애가 있고, 강한 갈애가 있다는 거라. 약한 갈애가 계속 반복되면 당연히 강해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게 갈애의 특성이다, 뭔가를 반복해서 계속적으로 하고 싶어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아무리 선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갈애의 영역에 속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나쁜 마음 안 가지고 또 선한 일들을 많이 한다고 해가지고, 만날 스님한테 보시하고 선원에 회비도 내고 여기도 내고 저기도 내고 그렇게 한다고 칩시다.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좋은 과보를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갈애가 안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들로 인해서 다시 또 윤회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좀 더 좋은 조건으로 윤회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윤회의 조건들로 돼버린다는 겁니다.

고리를 끊을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그 고리를 놔둬버린 채 나는 지금 좋은 일만 하고, 좋은 생각만 하고, 좋은 말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버릴 것 같으면 안 된다는 거라. 법문 듣는 거는 좋은 일 아니라? 그런데 그것을 끊임없이 들을려고 하는 것은 갈애에 해당 된다는 거라. 괴로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을 자꾸 만들지는 말아라는 거라.

 

그다음에 갈애의 두 번째 특색이 난디 라가사하가따(nandī rāgasahagatā)·

난디(nandī) 라고 하는 「기쁨」, 라가(rāga) 라고 하는 「애착」, 그다음에 사하가따(sahagatā) 라고 하는 「따르고 있다」. 기쁨과 애착, 기뻐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기뻐하는 것들을 따르고 있다.'

예를 들어봅시다. 조금 전에 보니까 모기가 들어왔던데, 모기 보면 어떻게 해요? 착 죽이고 싶습니다. 죽여놓으면 어때요? 무덤덤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그걸 분명하게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되게 좋습니다. 인제는 내가 이것한테 안 물릴 수가 있고, 또 저거는 필요 없는 것들이고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여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파괴욕구로 인해서 그것들로 인해서 뭔가를 죽였다고 하는 것들로 인해서 기쁨이 수반되는 거라.

 

안 좋은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지금 핵무기가 전 세계에서 다섯 나라인가만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다섯 나라는 “다른 나라는 핵무기 가지지마!” 북한이 가지려고 합니다. 왜 못가지게 하겠어요? 자기들이 그것들에 대해서 그거 외에는 다른 나라는 못 가지게 하려는 욕구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못 가지면 기쁨이 일어납니다. 가지니까 파괴욕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저걸 부술라고 그러는 거라.

나라 간의 관계도 꼭 마찬가집니다. 무슨 테러하고 하는 것들도 기쁨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애착하는 것들이 수반되지 않을 거 같으면 파괴욕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뭔가를 죽일려고 한다, 싫어하는 것들도 파괴욕구가 수반되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자기가 좋아하지 않고 하고 싶어하지 않을 거 같으면 안 합니다. 그런데 하고 싶어하고 행한 것들에 대해서 즐거워한다? 그거는 갈애들이라는 거라. 그것이 갈애의 두 번째 특색입니다.

 

그다음에 갈애의 세 번째 특색은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tatra tatrābhinandinī)·

따뜨라 따뜨라(tara tatra)는 「그 자리 그 자리에서」, 아비난디니(abhinandinī)는 「기쁨」을 수반하는, '기쁨을 가진다' 하는 의미입니다.

자기가 할 일에 대해서 전부 마음에 드는 거라. 이걸 했으면 이거 한 것에 대해서 만족하게 되고, 저거 한 것에 대해서 만족하게 되고, 자신이 한 상태에 대해서 전부 다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 게으름에 빠져도 나는 지금 쉬어야 되니까, 몸이 피곤하니까 하면서 그냥 게으름 부리는 것도 뭐 그냥 좋아. 또는 엉뚱한 딴짓을 하면서도 그것들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은 만족하고 기뻐하는 거라.

 

갈애의 특색은 이렇게 보통 세 가지로 나눠지게 됩니다.

그런 갈애가 한번만 일어나면 참 좋겠는데, 갈애는 체워지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그걸 채울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갈애들을 채울려고 하면서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약한 갈애에서 강한 갈애로 자꾸 넘어가지게 되고, 그럼 그게 습관화돼버리는 거라. 습관이 돼버리면 나중에는 선악에 대한 구분조차도 없어져버리게 됩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행한 것들이 맞다고 판단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가 사실은 불완전한 것인데도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자꾸 얘기를 하게 된다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서 얼마나 괴로움들을 많이 받느냐는 거라.

 

IS 같은 경우도 그렇습니다. 스님 같은 경우에는 그거 그냥 인정해줘버리면 간단할 건데, 그거 인정 안 해줄라고 그러는 거라. 그러니 끊임없이 불안에 떨어야 되고 자기 나라 사람들이 테러를 당해야 되고, 그런데 만날 뭐라 하기는 왜 테러하느냐고 막 뭐라 합니다. “그거 나쁘다!” 그거 나쁜 줄 누가 모르나? 그런데 근원적인 부분을 자꾸 빼먹어 버리고 갈애만 자꾸 일으키는 행동들을 계속하고 있는 거라.

 

여러분들이 사람을 대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갈애없이 대할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그 사람이 한 것들에 대해서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은 행한 일들도 그리고 행할 때의 마음도 지금 현재는 바뀌어져 있습니다. 끊임없이 바뀌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현재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자꾸 대해야 되는 것이지, 과거에 했던 것들을 자기가 집착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갈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들이라는 거라.

 

얼마 전에 뉴스에 초등학생들 폭력 사태가 있었던 거를 기사로써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아이들 싸움이 실제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건데, 어른들 싸움으로 바뀌어버립니다. 인제 아이는 없습니다. 그거는 어른들 간에 자꾸 소송하고 고발하고 어쩌고 하는 것으로써 계속 바뀌어져 나가는 거라.

그런데 돌이켜 생각할 것 같으면 간단합니다.

우리 아이가 내가 지금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우리 아이한테 이로운가? 아이가 거기서 계속 생활하고 공부를 해야 된다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이로운가 하는 것만 생각해버릴 것 같으면 문제는 간단해져 버리는데, 갈애가 자꾸 일어나서 갈애가 강해지니까 그걸 덮어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갈애의 3가지 특색 중 2가지가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거라. 좋아하는 거라. 기뻐하는 거라. 그래서 우리는 갈애라고 하는 것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갈애의 특색을 통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도록 해야 됩니다.

 

뒤에는 갈애의 종류에 대한 걸 얘기해놓았습니다.

Kāma taṇhā(까-마 딴하-, 欲愛), Bhava taṇha(바와 딴하-, 有愛), Vibhava taṇha(위바와 딴하-, 無有愛)

 

까마 딴하(Kāma taṇhā)는 여러분들이 잘 알겁니다.

「Kāma taṇhā」는 오관(안·이·비·설·신)에 자극을 주고 싶다고 하는 욕구입니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가지고 자극을 받고 싶어 하는 것, 끊임없이 자극을 받고 싶어 하는 것, 미식가 또는 법문 돌이, 이런 것들이 전부 그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보고 듣고 할 수 있는데, 만약에 예를 들어서 보는 기능이 없다. 아마 되게 갑갑해할 거라. 왜 그래요? 갈애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법문 들을 때는 듣기만 해도 충분히 가능한 것인데도 보면서 듣고 싶어합니다. 아마 이것도 인터넷에 올릴 건데 그냥 거기서 듣기만 하면 되지 여기 뭐 하러 왔어요? 보고 듣고 맛보고 하는 것을 계속 즐기고 싶어하는 거라. 감각적인 욕망 때문에 계속 끊임없이 일어나는 거라.

여기 오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고, 감각적인 욕망을 끊임없이 계속 일으킨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잘못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볼 때는 자꾸 볼려고만 하고 들을 때는 들을려고만 해야 됩니다.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보통 어느 한 스님이 법문을 하면 다른 스님들은 그 스님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냥 눈감고 듣기만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일반 사람들은 여러분들 같이 말똥말똥 하게 스님 쳐다보면서 법문 듣습니다. 안 보면 좀 이상하거든. 실제로는 그게 필요 없는데도 그러고 있다는 거라. 감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을 즐길려고 하지 마십시요. 그래서 그것은 여러분들이 이해하기가 쉬울 겁니다.

 

두 번째는 바와 딴하(Bhava taṇha) 라고 합니다.

「Bhava taṇha」라고 하는 것은 생존 욕구입니다. 「살아가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라고 하는 기분입니다.

 

좀 더 살고 싶어 하고 죽고 싶어하지 않는 것. 이런 생존욕구는 실제로는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갈애의 3가지 종류 중에서 가장 끊기 힘든 게 이 생존욕구입니다. 오히려 까마 딴하라든지 위바와 딴하는 끊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부처님 당시 때 ‘모든 것은 무상하다, 변해간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자살하는 스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파괴욕구들이 일어나서. 그분들이 다 아라한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또는 감각적인 것들에 대해서, 내가 견해를 가지는 것들에 대해서 견해를 가지지 않게끔 되고 어떠한 상황 어떠한 조건이라도 여기 와서 법문을 듣든 아니면 인터넷에서 듣든 그거 관계없이 법문을 듣는 것이 동일하게 되고, 그리고 아,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들은 부처님 가르침이 확실하게 맞다 하는 것들에 대해서 확신들을 가지게 되고, 이것들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거라. 아라한이 아니라도.

그래서 먹는 것들도 좋고 싫음에 따라서 먹지 않고 그것들은 할 수 있는데, 바와 딴하 라고 하는 것은 그거하고는 경우가 좀 다릅니다.

 

살아가고 싶다는 생존욕구는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것은 참 끊기 힘든 것 중에 하나입니다.

그 사람이 어느 정도의 수행 정도에 이르렀느냐 하는 것을 아는 측정의 기준으로 삼는 게 이 생존욕구가 얼마만큼 엷게 돼있느냐, 아니면 아예 끊어져 있느냐에 따라서 도와 과의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래서 좀 더 건강해지고 싶고 조금 더 젊어지고 싶고, 그리고 죽는 것들이 좀 더 먼 후에 일어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들을 자꾸 버리도록 해야 됩니다. 어차피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괴로움은 자꾸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리고 마지막에 위바와 딴하(Vibhava taṇha)는 바와 딴하와 용어상으로 보면 대칭적인 것입니다.

「Vibhava taṇha」라고 하는 것은 파괴 욕구, 「싫은 것을 배제하고 싶다」라고 하는 욕구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다리를 구부리고 있습니다. 구부리고 있는데 괴롭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요걸 펼려고 합니다. 펴고 싶어하는 마음이 위바와 딴하 입니다.

그런데 위바와 딴하가 펴고 싶어하는 마음만 있다고 해가지고 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이 존재를 해야만이 다리를 펴지게 되고, 또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은 내가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펼려고 하게 됩니다. 라고 하는 것들이 있어야만이 펴지게끔 됩니다.

 

그래서 쉽게 말하면 조건을 바꿀려고 하는 것들은 위바와 딴하에 속하지만 실제로 위바와 딴하는 그거 혼자서는 잘 안 일어난다는 거라. 다 같이, 다른 갈애들이 같이 일어나야만이 가능하다는 거라.

그래서 위바와 딴하는 남을 부수고 싶어 한다든지 자기 자신을 부수고 싶어하는 것들에 해당이 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했다가는 철창신세를 지게 되고 자기가 해코지를 당하기 때문에 잘 안 일어나게 됩니다.

 

그럼 여러분들에게는 뭐가 자주 일어나겠어요? 게으름 부리는 것들!

알아차리는 것들을 안 알아차릴려고 한다든지, 알아차려야만이 살아가는 것이 되는데 안 살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알아차리지 않을려고 하는 것은. 게으름 부리니까 알아차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편해질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한없이 편해지는 것은 아닌데도, 지금 현재는 편해지고 싶어 합니다. 그러고 나면 또 다른 편해지는 걸 또 바꿀려고 하게 됩니다. 알아차림이 없이 게으름 부릴려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은 전부 위바와 딴하에 속한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걸 잘못 해석하면 무조건 자기 자신이 자살할려고 한다든지 남을 죽일려고 하는 것만 위바와 딴하에 해당이 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는 극히 안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갈애가 항상 일어나게 됩니다. 갈애가 없이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은 보면 게으름의 종류들이 전부 위바와 딴하에 해당이 된다고 여러분들은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알아차림 없이 살아가는 것들은 거기에는 갈애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마지막에 보면

[갈애에는 이렇게 「Kāma taṇhā」, 「Bhava taṇha」, 「Vibhava taṇha」 3가지의 측면이 있습니다. 3가닥의 실을 꼬아 하나의 실로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인 것입니다.]

 

갈애에는 이렇게 3 종류가 있다 하는 것들을 3가닥의 실을 꼬아서 하나의 실로 하고 있는 거와 같은 상태다 하고 적어 놓았습니다.

실제로는 3가지가 같이 연속해서 일어난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모든 괴로움의 아래에는 「살아가고 싶다」 「가지고 싶다」라고 하는 마음의 기능입니다. 불교에서는 「살고 싶다, 가지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실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명으로부터 갈애가 태어납니다. 무명과 갈애가 잘 얽혀, 수없는 과거로부터 끝이 없는 괴로움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탈출합시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는 것으로 무명과 갈애를 지워갑시다” 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을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변화되는 것으로써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무명과 갈애를 지워나가라.

그래서 [갈애는 모든 좋다의 두목으로 사는 괴로움의 근원입니다.] 하고 적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포인트를 보면

• 모든 것은 납득하기 이전에 사라져 갑니다.

• 무상이라는 것은 갈애를 낳습니다.

• 갈애에는

· 인생을 즐기고 싶다

· 죽고 싶지 않다

· 산다는 것을 어떻게든 그만두고 싶다고 하는 3종류가 있습니다.

뭔가 하지 않고 게으름 부리려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이 다 포함이 된다는 걸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것은 갈애로 인해서 살아가는 것이지만 갈애를 갈애로서 분명하게 알게 될 때, 내가 지금 현재 끊임없이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갈애가 자리잡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하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Q 수행자 질문 : 질문있습니다. 5페이지에 보면

[죽는 것을 피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천국에서라도 영원히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이래 적으셨잖아요?

이건 천국에서라도 영원히 살아가고 싶다는 거는 죽어서 천국에 태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다고 하는...

 

A 스님 답변 : 자기가 영생이라도 거기서 누릴려고 하는 그게 바와 딴하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불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들은 갈애에 의해서 성립됩니다. 그렇게 판단하면 됩니다. 그게 기독교이든 아니면 바라문교이든 지금 한국에서 말하고 있는 진아니 뭐니 하는 것들은 전부 갈애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건데도 그렇게 해서 영원히 살고 싶어 하고 영원히 존재하고 싶어 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윤회를 만드는 것들이라고 판단을 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