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우안거(vassavaso, 雨安居)_담마의 본질 (20170707. 대구)
결제 우안거 목욕가사 준비를 안 했어요?
합장하고 따라서 하십시요.
"왓상 와산따낭 담미" "결제에 들어가는 상가에 보시합니다."
"왓상 와산따낭 담미" "결제에 들어가는 상가에 보시합니다."
안거게송을 먼저 전체 다같이 하겠습니다.
Imasmiṁ vihāre imaṁ temasaṁ vassaṁ upemi.
이마스밍 위하-레- 이망 떼-마상 왓상 우뻬-미
이마스밍 위하-레- 이망 떼-마상 왓상 우뻬-미
이마스밍 위하-레- 이망 떼-마상 왓상 우뻬-미
"저는 안거 세 달 동안 이곳 사원 구역 내에서 수행 결제하며 머물겠습니다."
다같이, 사두! 사두! 사두!
편하게 앉으십시요.
'왓타도 붓디 완나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결제 들어가는 상가 스님들에게 쉽게 얘기하면 목욕가사를 보시하는 공덕은 여자들은 이뻐진대요. 남자들은 출가한 거와 같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결제가사를 보시하는 것이 수다원에 이르른 거와 같은 공덕이 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다원에 이른다는 것은 어떤 겁니까? 다시는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공짜로 되는 것은 아니고, 가사를 보시 공양 올렸다고만 해가지고 바로 되는 것은 아니고, 결제받은 스님이 우안거 기간 동안에 사무량심 자·비·희·사 사무량심을 잘 닦아가지고 그것을 우안거 목욕가사를 보시한 분들에게 공덕을 회향할 때 그때 그런 결과가 나온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스님이 사무량심을 여러분들한테 내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 돼버립니다. 어쨌든 보시를 했으니까 보시 값은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되겠죠.
우리는 안거를 원래 내일하고 모레 하게끔 돼있는데, 재가자들은 음력 6월 보름, 그다음에 출가자들은 우리로 치면 음력 6월 16일날 안거를 하게끔 됩니다.
왜 이때 안거를 시작하게 됐느냐면, 처음부터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첫 설법을 한 것이 초전법륜경이죠? 그때도 경전에 바로 처음부터 부처님은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첫해부터 안거에 바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경전의 기록에도 안거를 하면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나 탁발을 나가고, 스님들은 부처님을 포함해서 여섯 명이니까 나머지는 앉아서 수행을 하고 그리고 부처님한테 법에 대한 것을 듣고 해서 안거를 났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법을 초전법륜경을 듣고 나서 마지막 안거 해제 때가 될 때가 되서 아낫따락카나숫따 라고 해가지고 무아상응경을 설하면서 나머지 다섯 분들이 다 아라한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야만이 비로소 상가가 형성됐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날을 기려가지고 '상가의 날'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쨌든 처음 법을 설한 날이기 때문에 '담마의 날'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안거 기간 동안 어떤 부처님 담마를 체험하고 공부하게 될까?
뭐 하고 싶어요, 안거 기간 동안에? 어떤 부처님 담마, 부처님 가르침을 얻고 싶어요?
담마의 본질은 아닛짜(aniccā), 둑카(dukkha), 아낫따(anattā) 그렇게 얘기합니다.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세 가지입니다.
그래서 무상 고 무아를 얻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아라한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수다원 이상은 이를 재간이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담마의 날을 택해가지고 안거에 들어가는 것도 그 담마를 틀림없이 여러분들이 체험을 해야 됩니다. 체험하지 않으면 사실은 안거를 끝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평생 안거를 해야 되는 거라. 안거 시작 됐으니까 안거가 끝날 수 있도록 우안거 기간을 좀 더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할려고 하는 마음들을 가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게 불교의 안거의 본질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생물들이 자라나고 또 기어다니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밟아서 죽이거나 상처를 입힐 염려가 있기 때문에 안거에 들어가서 혼자 고요하게 지내는 것들이 목적이었지만, 불교의 안거는 그거하고는 다릅니다. 어떤 식으로든 대중들이 같이 모여서 수행을 해야 되고, 같이 모여서 공부를 해야 되고, 또 같이 모여서 수행도 해야 되는 것이 안거라는 것입니다.
혼자서 지내는 분들도 적어도 출가한 스님들도 이 기간 동안에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보름에 한번씩은 꼭 모입니다. 모여가지고 스님들하고 얘기하고 수행질문도 받고 또 스님들이 읽어야 될 계목들도 외우고, 그렇게 하고 갑니다. 그래서 어떤 스님들은 왔다갔다 하는 시간이 하루종일 걸리는 데가 있습니다. 그리해도 그걸 무릅쓰고 오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모여서 있다고 하는 것은 상가가 그마만큼 소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움직일려고 할 것 같으면 수행하는 것은 초보 수행자들은 금방 깨져버립니다. 알아차리는 것들이.
그런데도 그런 것들을 무릅쓰고라도 모이는 것은 모여가지고 그래도 법에 대해서 담론하고 또 같이 수행을 하고 또 그러면서 조금 더 화합되게 얘기들을 하고 하는 것들이 부처님이 상가를 만든 본질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감수하고서라도 올 수밖에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재가자들은 사실은 어떤 특별한 규정은 없습니다. 재가자들은 안거가 끝났다고 해가지고 한 살 더 법랍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안거 기간 동안 어떤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억지로 만들어놓은 것이 재가자들은 그냥 사원에 머물도록 그렇게 합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따로 떨어져있으니까, 떨어져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크게 벗어나는 것은 없는데, 재가자들은 사회에 갔다고 그러면 그냥 나쁜 마음을 먹기가 수월하기 때문에, 안거 지낼려고 할 것 같으면 아예 사원에 들어와서 지내라.
그래서 재가자들의 안거를 규정하는 것이 매일 사원에 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삼개월 동안 사원에 머물러라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사실은 경장이나 율장이나 어떤 것을 뒤져봐도 그런 규정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완화해가지고, 매일같이 이렇게 올 수 없으니까 적어도 재가자들은 보름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번씩 우뽀삿타라고 하는 포살일이 있으니까,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와가지고 수행점검도 받고 법문도 듣고 또 수행도 하고, 법담도 나누고 그리하고 가라 해가지고 일주일에 한번씩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각각의 사원마다 조금 경우들을 달리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그리하더라도 그것은 법과 율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원이 자율적인 판단에 맞깁니다.
즉 재가자들은 스님들과 틀리게 안거에 대한 강제규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더 공부를 많이 해야 되는 사람들은 재가자들입니다. 그런 위험들에 훨씬 더 많이 노출 돼있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를 사실은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의미에서 안거를 자꾸 지낼려고 하고, 안거 기간동안에는 그래도 자꾸 사원에 모여가지고 수행도 하고, 정 안되면 스님 법문 옛날 거라도 틀어놓고 들을려고 하고, 그러면서 거기에 대해서 토론도 하고, 그런 시간들을 자주 가질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서두에 얘기했지만 담마의 본질은 아닛짜(aniccā), 둑카(dukkha), 아낫따(anattā)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뭘 신경써야 될까, 그중에? 둑카는 아닛짜가 어느 정도 명확해지지 않으면 잘 알지 못합니다. 피상적으로 그냥 ‘아, 참 무상하다, 사는 것이 괴롭다, 나에게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진아라고 하는 것들은 없는 것이구나’ 하고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 체험을 통해가지고 그것들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사람의 성품에 따라서 무상한 성품을 잘 캐치해내는 사람이 있고, 또는 불만족스럽고 괴로운 것들을 잘 캐치해내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습니다. 그거는 사람마다 다르지만은 그리해도 불만족스럽다고 하는 것들도 변해가는 것들을 알지 못하면 불만족스러운 것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수행하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대중적으로 일반적으로는 대부분 스님들이 "아닛짜를 많이 알려고 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변해가는 것들'
여러분들은 책을 통해서나 법문을 통해서나, 아니면 여러 가지들을 통해서 무상 고 무아에 대한 것들을 잘 익혀왔습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반드시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있어야 됩니다.
지금 과학계에서 가장 작은 단위가 '원소'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원소의 규정이 정확하게 얘기하면 '아닛짜(aniccā)'입니다. 원소는 자기 혼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조건들로 인해서 원소가 생겨나는 것이고, 여러 가지 충돌이나 어떤 것으로 인해서 원소가 생겨나는 것인데, 그 원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죽음을 맞는다, 사라져버리고 또 그게 원인이 되어서 다른 원소가 생겨난다고 하는 게 '핵융합이론' 입니다.
지금의 핵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작은 단의 원소를 폭발시킨 겁니다. 하나를 쪼개서 두 개가 되고 그럼 그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됩니다. 이 두 개가 다시 또 네 개로 쪼개지고 이 먼저 있던 두 개는 반드시 죽어야 됩니다. 사라져버립니다. 그 사라지는 힘으로 인해서 4개로 바뀌고 또 다시 8개로 바뀌고 그래서 이렇게 팽창하는 것이 핵융합이론 입니다.
그래서 핵융합이론이 이렇게 팽창하는 수순을 밟는 방법이 있고, 또는 수축하는 이론을 받는 게 있고 그렇다고 그럽니다. 스님은 거기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없지만 어쨌든 그것은 맥락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이미 2600년 전에 거기에 대한 것들을 명확하게 밝혀놨습니다.
핵보다도 훨씬 작은, 핵도 핵의 원소 부분을 다시 쪼갤 수 있다. 지금의 현대 과학은 그것도 다시 쪼개지네 하고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원소가 가장 최소의 단위라고 했는데, 그것보다도 작은 단위들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미 그것보다 훨씬 작은 단위가 있다. 그것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은 여덟 가지 조건으로 인해서 그렇게 된다 하면서 그걸 '깔라빠(kalāpa)'다 하고 부처님은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여러분들이 지·수·화·풍이라고 하는 기본적인 요소가 바탕이 돼서 색이나 아니면 영양소나 이런 나머지 네 가지들이 부수적인 것들로 첨부돼가지고 그것이 생겨나고 다시 사라지는 원리를 가진다 하고 부처님이 선언을 해놓았습니다.
그게 주석서에는 찰나 간에 일조개가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부처님이 발견한 담마를 이해할려고 할 것 같으면 그 정도의 빠르기로 아닛짜를 알고 있어야만이 명확하게 ‘아, 이게 무상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렇게 빠르게 알 수 있을까? 평생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마음이 고요해지고 그 대상에 집중해있으면 그게 가능합니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데 그게 가능하다는 거라.
그런데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현대 과학에서는 그 물질만 얘기하는데, 부처님은 그 물질과 마음을 들먹여놨습니다. 그 물질이 있으면 어, 이게 변하는구나 하고 아는 건 뭘로 알아요? 마음으로 압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물질이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거기에 따라서 계속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다른 것이구나 하고 분명하게 선언을 해놨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물질이라고 하는 이 깔라빠가 변하는 속도보다도 마음이 훨씬 더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거라.
왜 그런가? 마음은 하나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인식할 때도 몇 개가 생겨나요? 크게 봤을 때? 수·상·행·식 4개가 생겨나죠. 4개가 동시에 생겨납니다. 아무리 작게 보더라도 이 4개가 존재를 하는 거라. 그런데 그걸 다시 또 쪼개면 훨씬 더 많은 마음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상카라라고 하는 충동질이 있는 것들로 인해서 마음이 일어나는데 그 마음으로 인해서 내가 물질이 변하고 있는 것들을 인식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인식하는 것들이 한 순간이라도 끊어져버리면 변하고 있는 것이 없어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내가 그걸 인식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가 차이가 나는 거라.
그래서 얼마만큼 마음이 빨리 변하고 있다는 걸 인식은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무상한 성품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는 부분들입니다.
부처님이 설한 담마의 본질을 처음 이해하는 조건이 바로 그겁니다.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 만약에 그것이 되었다 할 것 같으면 수행하면서 고요한 거 좋다고 즐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고요함이 있다고 하는 것은 내가 마음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데 변하고 있다고 생각 안 하고, 그냥 고요하게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든지, 마찬가지로 물질도 관찰하는 대상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데 그 변화하는 것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고요해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을 하고 이해를 했다고 할 것 같으면 수행을 할 때 고요함을 자꾸 얻을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고요하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지 않을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게으름 부리고 있다는 뜻이고, 또는 대상을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아니면 마음이라고 하는 정신적인 것이든 그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안 변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거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따라서 그것에 붙잡혀있을 거 같으면 변하는 것이 안 보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특히 위빳사나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변하는 것들을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호흡을 들이쉬었으면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이 다르다는 걸 분명하게 인식해야 됩니다. 코끝에 손을 대보면 들이쉬는 숨은 시원하고 내쉬는 숨은 텁텁하다. ‘오, 이게 다르네!’ 적어도 이것 먼저 알아야 되는 거라. 그리고 들이쉴 때 알아차리는 마음과 내쉴 때 알아차리는 마음이 ‘어, 다르네!’ 똑같다 할 것 같으면 들이쉬고 나서 내쉬는 걸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데 어떨 때는 내쉬는 걸 알기도 하고 어떨 때는 그냥 모르기도 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거라. 분명히 다르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 초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을 분리할려고 해야 됩니다.
대상과 마음을 분리를 해야 될 뿐아니라, 마음과 물질도 자꾸 분리하는 연습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수행을 할 때 대상을 적어도 붙잡을려고 하지도 않을 뿐아니라, 고요함들을 즐긴다고 하면서 노력하는 힘들이 떨어져버리는 것들을 방어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이렇게 물질적인 것들도 생겨났으면 사라지게 돼있고, 정신적인 것들도 생겨났으면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정신적인 것은 가만히 보니까 하나가 아니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인 줄 알았는데 ‘아, 이게 아니구나’ 어떨 때는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고, 알아차리지 않는 마음이 있고, 또는 선한 마음이 있고 악한 마음이 있고, 크게 봤을 때 그렇게라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아, 뭔가 충동질이 있어가지고 내가 마음이 일어났는데, 그 마음이 선한 마음이 일어날 것 같으면 내가 선한 말이나 선한 행동을 하게 되고, 악한 마음이 일어났으면 악한 말이나 악한 행동을 하고 있구나 하는 걸 분명하게 알게 될 거 같으면 ‘어, 이거 상카라를 내가 좀 조절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끔 해야지 악한 마음이 일어나갖고 자기한테 이익을 가져오지 않고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지 않는데 누가 그걸 자꾸 할려고 하겠느냐는 거라. 그래서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지 않는 것들은, 그것들에서 오는 위험성을 분명하게 알 때 안 하게끔 됩니다. 악한 마음인 줄 알아야만이 안 하게 되는 거라.
수행도 마찬가집니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았을 때, 그것들의 위험성을 알게 됩니다. ‘아, 이게 참 불완전한 것이구나.’ 그리고 ‘이것들은 참 보잘것없는 것이구나.’ ‘이것은 참 위험한 것이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잠깐 찰나 사이에 마음은 달아나버리게 됩니다. 잠깐 찰나 사이에 악한 마음이 벌떡 일어나게 됩니다. 그걸 조절을 좀 잘했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어떨 때는 수행을 하는데 무상한 성품을 쭉 계속 보였으면 좋겠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거라. 그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생겨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불완전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위험한 것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들은 자칫 잘못하면 악한 것으로써 흘러가기가 쉽고, 이것들은 ‘아, 내가 빨리 이렇게 변하지 않고 고요한 상태로 있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킬 수가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럴려면 끊임없이 수행에서 대상이 변하는 것들을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변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다 보면 이러한 것들이 점점 더 빨리 느껴지게끔 됩니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들이 참 악으로 흐르기가 쉽고, 그것이 불완전한 것이고, 아, 참 피하고 싶은 것들이고, 이것들이 고요해지길 바라게 되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대상을 대상으로써 보질 못하게 될 때 포기를 해버립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 싫기 때문에. 그런데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은 대상일 뿐입니다. 대상을 변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게 되면 항상 문제가 생겨납니다. 좋은 것 대상이 일어나면 거기에 폭 붙잡혀버리고 그냥 좋다고 하게 되고, 싫은 거 일어나면 그거 피할려고 막 하게 되고.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변한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싫은 것들이 그러한 마음이 항상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강도가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지나가야 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대상들에 대해서 아, 인제는 어떠한 대상을 만나더라도 변하고 있는 것은 알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좋고 싫은 것들에 끄달려 들어가지 않는 상태에 딱 이르르게 될 것 같으면,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끊임없이 훈련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딱 그렇게 됐을 때 ‘아, 인제는 싫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탈출을 하게끔 됩니다.
그러면 수행은 굉장히 수월하게 돼나가게 됩니다. 그냥 일어나는 대로 알아차리고,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 대로 그 고요함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렇게 되어나갈 때 아닛짜라고 하는 것들을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이 첫 번째로 얘기한 아닛짜(aniccā)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아, 이것이 내가 아직 그렇다고 해서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른 것은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아직은 내가 더 나아가야 될 길이 있다 하는 것을 알게 되면 둑카(dukkha)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아직 이 몸을 지니고 있고, 내가 아직 윤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인식을 하게 될 것 같으면 ‘아, 이렇게 있는 것, 윤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괴로움이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것이 그래서 그런 윤회의 사이클에 있다는 것 자체가 참 괴로움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더 노력을 하게 됨으로 인해서 자기 중심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저 사람도 마찬가지고 또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고, 모든 생명체들은 동일한 조건을 지니고 있고, 동일한 상태로써 진행이 돼나가고 있다, 자기도 윤회하면서 다른 사람 윤회하는 사람들을 불쌍하다 할 이유도 없는 거고, 또 그 사람에 비해서 내가 잘났다고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라. 그러면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부터 탁 벗어나게끔 됩니다. 완전하게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점점 더 엷어지게 됩니다. 그게 아낫따(anattā) 입니다.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겁니다. 그래서 그것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분명하게 확신을 가지고 이해를 하고 나면은, 그다음부터는 목표에 이르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져버리게 됩니다.
무상·고·무아를 설해놓은 게 부처님의 담마의 본질입니다.
이번 안거 때는 적어도 그것 하나는 "아, 이게 부처님이 설한 삼법인이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럴려면 끊임없이 책을 통해서든 법문을 통해서든 수행을 통해서든 그것들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고 또 체험하고 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수행이 중요한 것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또 수행을 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되는 것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왜 법을 공부해야 되고 들어야 됩니까? 왜 여러분들이 마음이 항상 고요해 있도록 만들어야 됩니까? 왜 여러분들이 이렇게 일주일마다 와서 팔계를 지키면서 계를 수지하도록 해야 됩니까?
그것들이 전제조건이 돼있지 않으면 더 높은 상태로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도 등한시 해서도 안됩니다.
안거를 지내면서 이런 붓다야나 선원 같은 이런 정사에 머물게 되는 경우는 아나타삔디까 라고 하는 분에 의해서 정사에 머물게 되는 습관이 들게 됩니다. 그 아나타삔디까가 처음 부처님을 만났을 때 아나타삔디까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랍니다. 이미 부처님이 어떤 분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이 세상에 부처님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 했는데, 부처님이 출현했다는 거라.
부처님을 만났을 때 부처님이 이 아나타삔디까에게 처음 말한 것이 뭐냐면,
"갖추어야 될 것들을 먼저 갖추는 것".
마음을 좀 더 바르게 가져서 뭔가를 자꾸 움켜쥘려고 하고 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말아라. 너의 생각이나 너의 견해도 바뀌는 것들이다. 바뀌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럼 그것들에 대해서 내 것이라고, 내 것이 맞다고 할 것 같으면 항상 충돌이 있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을 먼저 버리라는 거라.
하물며 자신의 몸이나 자신의 생각 견해조차도 자기 것이 아니고 변하는 것이고 그때 일시적으로 형성된 것일 뿐인데, 그것이 완전한 것이 아닌데, 네가 모으고 있는 재산이나 아니면 명예나 이런 것들도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거라.
그러면 그런 것들은 바른데 쓸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것이고, 그것들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이로운 곳에 쓰여질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것이 맞는 것이다 하는 거라. 그리고 너 자신을 위해서도 반드시 지켜야 될 도덕적인 것들은 지켜야 된다. 그것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적어도 윤회를 할 때 좋은 곳으로 태어날 방법은 없다는 거라.
부처님이 맨 처음 설한 것이 바로 「보시, 지계, 생천」이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것들에 대한 이해를 한 후에 부처님이 설한 것이 바로 「무상·고·무아」 라고 하는 것. 그리고 「고·집·멸·도 라고 하는 사성제」에 대한 것들을 설해주게 됩니다.
그랬을 때 이 아나타삔디까는 '아, 부처님의 법이 이렇게 소중한 것이구나' 그래서 부처님을 모셔와가지고 내 옆에 딱 붙잡아 놔놓고 내가 저 법을 계속 들어야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부처님을 모셔올려면 다른 방법이 없는 거라. 집을 지어 놔놓고 "이리 오십시요!"
불교가 획기적으로 바뀌게 되는 계기가 정사가 지어지면서 바뀌어지게 됩니다. 우안거도 확립이 되는 것들이 그런 정사가 지어지면서 끊임없이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들이 법을 설하면서 그것을 따르고 체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불교가 획기적으로 바뀌어나가게 됩니다.
안거는 그런 개념입니다. 안거는 그냥 자기 혼자서 나쁜 짓 안 하도록, 그리고 남 해치지 않는 것들만 신경써가지고, 그것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큰일입니다. 그것들은 안거의 원래의 정의가 아닙니다.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러야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더불어서 살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을 거 같으면 그 깨달음에 이르렀다 하는 것들도 반쪽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수행이 아무리 좋고 여러분이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같이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도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가지는 견해들이나 또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은 아직은 미완성이고 불완전하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내가 그러듯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다툼없이 잘 지내게 됐을 때, 그것을 "안거를 잘 지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항상 부처님이 제자들이 안거를 마치고 찾아왔을 때 맨 처음 물어보는 것이 너는 깨달음에 이르렀느냐 하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고, 또는 부처님 법을 얼마만큼 알고 있느냐 하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고, “안거 기간 동안 화합하며 잘 지냈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여러분은 안거 기간 동안 적어도 화합하면서 부처님의 담마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그런 시간들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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