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모든 것은 스스로 확인하라 (깔라마경) (20170630. 대구)

담마마-마까 2022. 5. 4. 09:00

https://youtu.be/R5t8gFeFljY

* 모든 것은 스스로 확인하라 (깔라마경) (20170630. 대구)

 

오늘은 「모든 것은 스스로 확인하라」는 깔라마경을 가지고 얘기를 하겠습니다.

대충 깔라마경은 여러분들이 내용은 알고 있죠? 먼저 하나 물어볼게요.

비판하고 비방하고 차이가 뭘까?

(수행자 : 비판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판단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구요, 비방은 자신의 감정이 포함된다고 생각됩니다.)

일부는 맞습니다. 감정을 가지고 그것을 남을 비난할 목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비방이 되는 거고, 비판은 어떤 것이든 자기의 견해이든 아니면 어떤 다른 책에 쓰여져 있는 것이든 그런 걸 비교해가면서 증거를 가지고 얘기하는 것들은 그것은 견해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건 비판의 영역에 속합니다.

 

비판과 비난·비방은 조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판을 할 경우에는 만약에 그것이 자기의 생각이나 자기의 견해나 아니면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 잘못됐다고 판단이 들면 그걸 바꿀 줄 알게 되면 그건 비판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얼마든지 비판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감수를 했고, 그것들에 대해서 나쁘게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냥 무턱대고 자기의 감정에 따라서 그걸 비방하고 이런 경우들이 문제가 됩니다.

 

건전한 비판은 어찌 보면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도 관심이 있으니까 그렇게 비난을 하면서 비판을 하게 되는 것이지 관심이 없으면 그것조차도 안 합니다. 내가 남이 뭘하든 어떻게 살든 나하고 전혀 관계가 없는 거면 별로 관심을 안 가지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일정한 관심을 가지고 안타까운 마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한다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런 경우엔 부처님도 수용할 것들은 수용을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율 같은 경우들도 상황에 따라서 각각의 비판들을 받고 그래서 부처님도 바꿔야 될 것들은 계속적으로 바꿔 왔습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부처님 재세시 때 그것들이 완성이 되게끔 됩니다. 그래서 그거는 어찌 보면 우리 불교에서 봤을 때도 괜찮은 부분에 속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그런 비판은 사실은 문제가 안 되는데, 비난할 경우에 비방할 경우에 그것이 비판인지 비방인지 그걸 구분을 못할 때 문제가 돼버립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부처님을 굉장히 비방하는 게 많았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조건은 뭐냐하면 그렇게 그 사람이 얘기한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싫어하지 말아라. 그게 일차적인 조건입니다. 분노를 일으키거나 아니면 싫어하는 것들을 일으키는 것들은 일단은 기본적으로 그것들에 대해서 일으켜서는 안 되는 마음일 뿐 아니라 그렇게 일으켜버리면 계속적으로 상대방과 싸움이 될 수밖에 없고, 또 내가 바르게 법에 따라서 그것을 판단할 능력들을 잃어갈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조건은 그겁니다.

부처님을 당시에 뭐라고 했느냐면 "허무주의자다" 아니면 "파괴주의자다" 아니면 아주 완고한 "엄격주의자다" 하는 그런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말해도 나는 할 말 없다. 사실 그렇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말하는 허무주의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은 살 가치가 없기 때문에 그냥 자살한다는 것을 용인한다" 하는 식으로 얘기했는데, 부처님은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번뇌를 파괴하고 그리고 그것을 소멸시켜야 되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서는 나는 허무주의라고 말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세상이 고(苦)라서 살기 싫어서 목숨을 끊어라는 그런 허무주의자가 아니라 번뇌라고 하는 것을 버려버리고 그걸 소멸시켜야 되고 파괴시켜야 되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서 허무주의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마찬가지로 뭐든지 자기 자신이 자살한다든지 그리고 세속에 살 필요가 없다든지 그래서 모두 출가해야 된다든지 그런 파괴주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탐·진·치의 파괴를 얘기한다. 탐·진·치는 어떤 경우든지 그것은 소멸돼야 되고 파괴되어야 되고 없애버려야 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서 나에게 파괴주의자라 할 것 같으면 그것도 맞다.

 

마찬가지로 완고하고 엄격하다고 하는 그런 것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어떤 실수도 일으켜서는 안된다. 그리고 마음이 선한 방향으로 자꾸 움직여야 되는 것이지 불선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면 안 된다. 그래서 마음을 꼭 붙잡고 선한 방향으로 자꾸 움직일려고 해야 되고, 그래서 그런 것에 완고해야 되는 것이고, 그래서 조그만 실수도 스스로에게 용납하지 않을려고 하는 것들은 엄격한 것들이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나에게 엄격주의자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맞다.

 

그래서 세상인들이 생각하는 허무주의나 이런 것들하고 부처님이 생각하는 것들하고는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바른 방법으로 그것들을 유도했을 때 다른 사람들도 "아, 그거는 맞다. 부처님이 저렇게 하는 것이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허무주의나 완고한 엄격주의나 이런 것들이 아니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그렇게 봤을 때 그것을 이해했을 때는 그것은 비판이 됩니다.

 

그런데 이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왜 이해를 하지 못할까?

꼭 비방이 목적일 때는 남의 말을 들을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뭔가 잘못생각하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나 이런 것들이 잘못돼있다는 걸 인정을 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냥 맹목적으로 비난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했을 때, "그래 그것도 맞다" 하면서 자기 생각을 바꾸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쓸데없는 소리" 하면서 자기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그냥 계속적으로 비난을 하는 경우들도 있고 그랬습니다.

 

아까 얘기를 했습니다. 그게 비판이든 비방이든 간에 가장 기본적인 것들은 마음이 분노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어떠한 경우든지 그 사람이 다시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든지 '아, 저 사람이 뭔가 대항하는 것이 나를 미워하고 싫어해서 그렇구나' 하는 마음을 일으킨다고 할 것 같으면 이것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경전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을 비방하고 담마를 비방하고 상가를 비방하고, 그런다고 해가지고 그것들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기분 나빠해서도 안 되고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켜서도 안 된다.

만약에 그것들에 대해서 분노하고 싫어하는 마음들을 일으키게 된다면 그것은 뭐라고 그랬어요? "너에게 바로 그것은 장애가 된다." 너에게 장애가 되기 때문에 "장애가 된 상태에서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그것들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법에 맞지 않다" 하는 거라.

 

「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탐·진·치가 없이, 그리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떠난 상태를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있을 거 같으면 법에 맞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싫어하거나 분노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될 것 같으면 남들이 하는 얘기조차도 그것이 올바른지 그른지를 분간하지도 못하고, 똑같은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거라. 감정적으로 대하면 나도 감정적으로 대하게 되고, 저 사람이 자기 것이 최고다 할 것 같으면 나도 마찬가지로 내 것이 최고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은 굉장히 조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모든 것은 스스로 확인하라." 자기가 확인해가지고 이것이 법에 맞는 것이다, 그리고 율에 맞는 것이다, 할 것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이것은 바른 법이고 이것은 틀린 법이다. 이것은 바른 율이고 이것은 그른 율이다 하고 분명하게 얘기할 수가 있게 된다는 거라.

그렇게 하지 못할 거 같으면 그것은 가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원칙을 세워 놓은 것이

첫 번째가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이 설혹 비방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라 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그것이 아무리 진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법이라고 하더라도 아니면 그것이 바른 율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은 이미 그것은 바른 진리나 바른 율이 아니라는 거라.

 

보통 그것을 법집(法執) 율집(律執) 그렇게 얘기합니다. 법에 대한 집착, 계율에 대한 집착!

집착을 하게 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독점적인 것이 돼버립니다. 여러분이 뭔가에 집착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누구하고 나눌려고 해요? 안 나눌려고 합니다. 진리는 어떤 경우든지 보편적인 것이지 독점적인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진리를 확인할 수 있고 누구든지 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그것을 누릴 수가 있고 하는 건데, 그래서 독점적인 것은 아닌데 진리 자체를 내가 지금 하는 것에 따라서 독점적인 진리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이분 말이 최고다!" "이 수행법만이 최고다!" "계율은 이렇게 이렇게 지켜야 된다!" 이렇게 해버릴 것 같으면 그것은 독점적인 것이 된다는 거라. 그래서 나머지 것은 틀렸다 하는 거라.

그래서 그 두 번째가 뭐냐면 진리나 율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스님도 남방국가 가서 수행하고 공부하면서 얻어지는 아집(我執)이 뭐냐면, ‘아! 이게 최고다!’ 하는 거라. 내가 진리의 맛을 조금 봤거든. 크게 맛봤으면 그런 생각도 안 드는데 처음에 안 보던 맛을 보니까 ‘어, 이게 바른 것이다’ 하는 거라. 그러니까 나머지 것은 전부 배타적으로 보는 거라. 그러니까 처음 나가서 수행하고 나서 5년째인가 됐을 때 태국에 있는 큰 스님을 모시고 한국에 온 적이 있어요.

그래가지고 그때 범어서 방장 스님하고 대담을 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스워. 대담을 하면서 서로 얘기하는 것들을 보니까 기가 찬 거야. 그때 내 입장에서는. 틀린 얘기 허무맹랑한 얘기를 방장스님이 하고 있는 걸 들으니까 그게 아닌 거야. 그러니까 내가 나중에는 태국 큰스님하고 범어사 방장 스님하고 대담하는 것이 아니고, 그 범어사 방장스님하고 나하고 대담하는 형식이 돼버리는 거라. 왜 그렇겠어요? 내 것에 대한 집착이 있기 때문에.

나중에 돌아가서 조금 지나고 나서 ‘아, 그것들을 일으켜야 되는 것이 아닌데, 내가 그것들에 대해서 상을 일으켰구나.’ 금강경에도 그런 것이 나오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하고 그렇게. 그냥 내가 거기서 법이라는 상뿐 아니라 나에 대한 상 그리고 중생심들도 발휘하고. 전부 다 발휘된 상태라는 거라.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게 두 번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참 불교가 좋다는 것이 뭐냐면 다른 종교하고 다르게 아무런 의식이 없어도 됩니다. 아무런 배움이 없어도 됩니다. 또 어떤 믿음을 가져도 그것이 전제조건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그런 것들이라는 거라. 의식에 대한 집착들을 가지는 것! 이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남을 비난하고 비방할 수 있는 근거가 돼버린다는 거라.

 

가끔씩 선원에 사람이 오면 우리 선원 식구들이 테라와다 식으로 인사할 줄 모르니까 “아이, 그렇게 절하면 안 됩니다. 스님한테 이렇게 절 하십시요.” 하면서 가르치는 경우들이 있어요. 절을 지금 하고 있는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지금 절하고 있는 사람한테 일어서지 말고 하라고 얘기할 정도가 되느냐는 거라. 거기에 딱 매여있게 되는 거라. 안 하면 어떻고, 그 식으로 하면 어때서? 그런데 절을 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분명히 있는데,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들인 것이고, 그리고 내가 마음을 비우고 법을 듣고 바르게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그런 것들인데, 그 알맹이는 쏙 빼버리고 그 껍데기에 딱 집착을 하는 거라.

 

요즘 나도 몰랐는데 부산에서 화요일날 사람이 전에 보다도 반 이상 뚝 떨어져. “왜 이렇게 사람이 적어?” 하니까 요즘 생전예수제인가 백중인가 그거 한다면서요? 그래서 거기 간다고 해가지고 사람들이 안 오는 경우들이 있다는 거라. 그것도 어찌 보면은 그것들에 대한 집착들입니다. 의식에 대한 집착, 설혹 49재 안 하고 3재 하고 끝내면 또 어때서? 그거 꼭 49재를 다 해야 되는 거라? 안 하면 큰일 나는 것처럼 합니다.

 

실제로는 부처님 법은 그거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건데, 그런 것들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집착을 하는 거라. 그러면은 그것들에 대한 견해가 확립되고 남들하고 자꾸 싸우게 되는 거라. 그게 학문적으로만 공부할 것 같으면 학문적으로서 서로 논쟁거리가 되고, 실제적으로는 전혀 논쟁거리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도 테라와다 불교에서도 대한 질문이 사띠의 용어에 대한 정의, 무엇에 대한 것 하면서 계속 논쟁거리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게 왜 논쟁이 되어야 되느냐는 거라. 그런 것들이 세 번째에 해당이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비방이나 비난과 칭찬은 수행의 장애다 하는 것들을 반드시 인식을 해야 됩니다.

자기를 칭찬하고 “참 잘한다”, “사-두” 한다고 해가지고 그것들이 장애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비판한다고 해가지고 그것들이 장애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자신이 지금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수행을 해서 마음을 다듬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런 비난과 비방, 칭찬, 뭘 많이 얻고 적게 있고, 그다음에 명예가 높아지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야 됩니다. 그것은 살아가는데 사회생활 할 때 그것이 필요할지는 몰라도 불교공부를 할 때나 아니면 부처님의 길을 따라서 도와 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그런 것들이 필요한 부분은 아니라는 거라. 오히려 그것들을 빨리 버리면 버릴수록 수행은 발전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법이 높고 낮고 하는 기준은 어떻게 잡을까? 아니면 이 법이 맞는지 안 맞는지 기준은 어떻게 잡을까?

경전에 비추어 봐가지고 경전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기 때문에 이것이 맞다, 또 어떤 사람은 경전에 요렇게 써져 있기 때문에 이것이 맞다, 다른 경전을 가지고 이렇게 서로 비교해가지고 서로 자기가 맞다고 하는데, 어떤 것이 열등한 것이고 어떤 것이 우등한 것이라? 그 기준을 경전을 기준으로 한다? 그건 참 잘못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뭐라고 그러느냐면 "진리에 대한 법의 우열 기준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밖에 있는 것, 경전에 있든지 아니면 스승의 가르침이든지 뭐 전해 내려온 전통이든지, 어떤 경우든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안에 있는 것이라는 거라.

스스로 확인된 것들이 그것이 맞는 것이지, 확인해서 자기 스스로 ‘아, 이것이 맞다!’ 그리고 ‘내가 지금 현재 법의 기준에서 요정도의 상태에 있다’ 하는 것들을 분명히 자신이 알고 있는 상태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맞는 것이지,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든 아니면 법의 기준을 다른 어떤 근거를 둬가지고 ‘맞다, 틀렸다’ 하는 것은 그것은 밖의 기준이라는 거라. 왜 자꾸 밖의 기준을 가지고 그것을 잣대로써 삼을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런 것들이 만약에 비난이나 비방에 부딪치게 됐을 때 이것들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이 판단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부처님도 그런 경우에 그것에 대해서 동의할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부정할 경우도 있고, 아니면 내용을 다른 식으로 변경해서 말할 때도 있고, 또 그렇지 않으면 아예 법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면서 얘기할 상황도 못된다 할 것 같으면 아예 침묵하는 경우도 있고, 각각 다양했습니다.

오죽했으면 뭔가 감정적으로 자꾸 비난하고 하는 사람들한테는 “그냥 그 사람에게는 아무리 얘기해도 안 들리니까 그냥 조용히 너 혼자 침묵해라. 그것 가지고 네 마음 어지럽게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너 혼자서 마음 지키면서 침묵해라.” 합니다. 법에 대해서 바르게 하는 것이 아닐 것 같으면 오히려 성스러운 침묵으로 보낸다는 거라.

 

법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일 때는 아까 얘기한 다섯 가지 조건들을 따져가지고 내가 거기에 맞게끔 어떤 식으로 해야만이 그 사람에게 바른 식으로 전달해줄 수 있느냐? 그래서 그런 비난이나 비방을 비판적인 것으로 바꾸어와서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을 바꿀 수 있느냐 하는 것들이 중요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사실은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그걸 적어 놓은 것이 뭐냐면 모든 것은 스스로 확인하라 하는 깔라마경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이 깔라마 경을 얘기할 때 "열 가지 해서는 안 될 것" 이것만 기준을 잡습니다. 여기 보면

첫 번째는 다른 사람의 말이라 해서 그대로 믿지 마십시오.

두 번째는 전통이라고 해서 그대로 믿지 마십시오. 원인과 결과가 없는 전통은 쓸모없는 것이다.

세 번째는 소문을 그대로 믿지 마십시오. 소문은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네 번째는 책에서 말하는 것을 그대로 믿지 마십시오. 종교적인 가르침을 설명하는 책(경전)을 믿지 마십시오.

다섯 번째는 논리적인 말이라 해서 그대로 믿지 마십시오.

여섯 번째는 어떤 스승에 관한 말이나, 평가를 그대로 믿지 마십시오. (부처님도 포함됩니다.)

일곱 번째는 이치에 맞는 것처럼 보이는 견해라 하여 그대로 믿지 마십시오.

여덟 번째는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이라도 그대로 믿지 마십시오.

아홉 번째는 좋게 여겨지는 생각이라 하여 그대로 믿지 마십시오.

열 번째는 심지어는 당신의 스승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믿지 마십시오. (부처님도 포함됩니다.)

 

사람들은 깔라마경을 얘기할 것 같으면 이 부분을 자꾸 강조를 합니다.

실제적으로는 깔라마경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그 밑에 부분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것은 불선업을 짓고, 이것은 허물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현명한 자에 의해 비난받는 것이고, 이러한 행위는 불이익과 근심을 부르는 것이라고 자기 스스로 안다면 여러분들은 그러한 일을 버리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니라.

 

만약에 불선업을 짓고, 허물을 가지고 있고, 현명한 자에 의해 비난받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러한 것들은 버려버려야 된다는 거라.

그렇지 않고 탐·진·치가 없는 행위들을 하게 되고, 허물을 짓지 않고, 현명한 자들도 참 잘한다고 할 경우에는 그것은 널리 행해야 된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선한 마음을 지니고 하는 것들은 더욱 더 해야 되는 것이고, 선하지 않는 것들을 지니게 될 때는 그것은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 깔라마경의 근본적인 취지입니다.

 

깔라마경에서 얘기하는 것은 그겁니다.

그것은 선한 것들을 할 것 같으면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있고 행복을 가져오게 되는 거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더불어서 평화롭게 되어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선하지 않은 것들은 그것이 마음이든 신·구·의를 통해서 하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이익이나 행복을 가져오는 것들이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탐욕을 가지면, 분노를 가지면, 또는 게으름이나 어리석음을 가질 것 같으면 그것들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마음이 전염되고 그것들로 인해서 자기 자신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행위라는 거라.

탐·진·치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잘 보고 해야 되는 것이지, 다른 방법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깔라마인도 각각의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와서 "아, 우리 것이 최고다! 다른 건 틀렸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사람들은 헷갈린다는 거라. 그래서 그 기준을 잡아달라 하고 얘기한 게 부처님이 이 경을 설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을 열 가지를 가지고 기준을 잡아줬는데 그것들은 뭘 얘기하기 위한 것이냐면 뒤에 부분을 얘기하기 위한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앞에 기준만 자꾸 갖출려고 합니다. 그것도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이나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이해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계속적으로 그건 다툼밖엔 안 된다는 거라.

 

뭐가 자기 자신에게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이 자기 자신에게 불선한 것인가 하는 것들을 잘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오죽했으면 부처님이 부처님도 믿지 말아라, 부처님의 가르침도 그대로 믿지 말아라 그랬을까?

그 얘기는 너 스스로 확인해보라는 거라. 확인해보면 그것은 틀림없이 안다는 거라. 왜 여기선 이 말하고 저기선 저 말합니까? 자기가 수행해보면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와서 “스님 어떻게 해야 됩니까?” 깔라마인들과 똑 마찬가지라.

 

중요한 부분들을 자꾸 사람들은 빼먹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 그 법을 확인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견해들이 분명하게 서가지고 그 견해들이 무상·고·무아를 바탕으로 한 것이 되어서 열반으로 나아가게 될 때 그것들이 바른 것인데, 그래서 그러한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거라.

지혜가 선한 것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법은 없습니다.

사띠가 선한 것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법은 없습니다.

사띠를 계속적으로 해나갈 것 같으면 마음은 항상, 그리고 그렇게 행하고 말하는 것들은 전부 선한 것들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일어나는 지혜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지 잘못된 길로 인도해주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깔라마인들에게 얘기하는 것은 바로 그거라.

열 가지 하지 말아라 하는 것들을 얘기했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고, 바로 뒤에 부분을 부처님이 얘기하신 겁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스스로 확인된 것들이 아니다, 그럴 것 같으면 본인이 스스로 자꾸 확인하는 그런 습관들을 가져야 됩니다.

 

가끔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사대교법(四大敎法)」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승 경전들도 부처님이 한 말씀에 속하느냐 안 되느냐 얘기할 때 4대교법을 얘기합니다. 거기에 예를 든 게 앞에 부분에 뭐라고 하느냐면, 스승이 그렇게 말을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에 속한다. 아니면 어떤 특정한 집단이 그렇게 정립한 것들이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에 속한다. 이렇게 왜곡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4대 교법의 내용들을 다 들여다보면 거기 말미에 항상 적어 놓은 것이 법과 율입니다. 법과 율에 맞을 경우에는 그것이 그 스승의 가르침이나 아니면 그 무리들이 따르는 것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속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법과 율은 빼먹어버립니다. 쉽게 말하면 이게 부처님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맞는지 안 맞는지, 부처님이 얘기한 그 율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지 그른지를 판단을 먼저 해야 되는데, '아, 이것은 비밀스럽게 감추어둔 것들이다' 아니면 '후대에 위대한 분들이 깨달음에 이른 분들이 한 거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얘기한 것이다.' 이렇게 자꾸만 왜곡을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을 들을 때 아, 부처님이 이 말씀을 한 것들은 어떤 것들이 주안점이 되느냐 하는 것들을 항상 중점에서 봐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부처님의 진의를 왜곡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4페이지에 보면

「부처님은 선, 불선은 스스로가 아는 것이어야 하고, 스스로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고 깔라마 경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책에 쓰여져 있다든가, 전통이 있다든가,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이라고 해도, 그것이 진실하다고 한정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스스로 확인해 실증을 얻은 다음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고 불교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것들은 스스로 그것들에 대해서 실천해보면 그것들은 무상·고·무아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 어떤 것들도 변해가고 있고, 자기 것도 아닌데 그것들에 대해서 나를 내세운다든지 아니면 탐욕이나 성냄을 일으키지 않게끔 된다는 거라. 그걸 스스로 체험하라는 거라.

 

그래서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고, 그리고 자기 것이 옳다는 그런 주장을 하는 것 자체도 바꾸어 얘기하면은 스스로 실증하고 믿지 못한다는 얘기와 꼭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수행에서 그것을 스스로 체험하고 그런 모든 고통을 소멸해서 닙바나(nibbāna)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이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그런데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