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스승을 존경하는 방법과 스승의 역할 (20170609. 대구)

담마마-마까 2022. 4. 30. 09:00

https://youtu.be/TamaE2fL47M

* 스승을 존경하는 방법과 스승의 역할 (20170609. 대구)

 

오늘은 「스승」이라는 제목으로 법문을 하겠습니다.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분은 부처님 밖에는 없었습니다. 불교 역사상에서.

그래서 부처님 이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스승을 의지해서 수행을 하고 또 배우고 또 깨달음에 이르고, 그렇게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출가한 스님들 같으면 계율적으로 아예 정해져있습니다. 출가하고 나서는 5년간 스승을 떠나지 못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엄격하게 적용되는 데는 5년 이내에 그 스승 밑을 떠나게 될 때는 승적을 반환하는 일까지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5년이고 좀 넓게 잡으면 10년 간은 스승 밑에서 잡다한 걸 배웁니다.

 

출가할 때 보면 스승은 세 분이 있습니다. 자기가 의지하는 화상-은사스님이 있고, 그다음에 각각의 법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스승이 있고, 그다음에 여러 가지 행동거지들 상가에서 화합되게 지내기 위해서 그러한 여러 가지들을 가르쳐주는 스승이 있고, 그렇게 기본적으로 세 분의 스승이 있습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어떤 경우든지 세 분의 스승 이름은 반드시 외우고 알도록 그렇게 합니다.

그 세 분의 스승은 끊임없이 속된 말로 하면 잔소리를 해주게끔 돼있습니다. "이래라. 저래라. 이건 틀렸다. 뭐 어쨌다" 하면서 연속적으로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5년 동안 기본적인 것들을 익히게끔 해줍니다. 계율에 대한 것들도 익히고, 교리적인 것에 대한 것도 익히고, 수행에 대한 것들도 익히고, 그렇게 하게 됩니다.

 

이 세 분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루라도 먼저 출가한 스님은 선배 스님이라 해서 깍듯이 삼배를 드려야 됩니다. 그 선배스님들도 끊임없이 간섭하고 이렇게 합니다.

처음에는 이게 어떤 면에서는 참 귀찮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수행을 가고 싶다고 하더라도 여기 있는 은사스님이나 법을 가르치는 스승이나 율을 가르치는 스승들이 싸인을 해줘야지, 아니면 저쪽에 가서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저쪽에 가서 저쪽 수행법들을 익히고 싶은데 반드시 여기서 허락을 해주고 나서 또 저쪽에 가서 저쪽에서 아, 이 스님을 받아들여 가지고 누가 이 스님을 지도할 것인가를 정해지고 나서 그쪽에서 또 싸인을 하고나야 만이 그쪽으로 이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 스님들은 승적을 기록하는 노트가 있습니다. 그 노트에 보면 이동하는 것이 정확하게 기록이 돼있습니다.

그마만큼 한 5년간은 이렇게 레이더망에 포착되게끔 해서 그렇게 가르치는 형태들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게 테라와다의 전통적인 출가자들의 방식입니다.

 

그에 비해서 재가자들은 그런 규율이 없습니다. 누구를 스승으로 하고 또 여기서 만나면 저쪽으로 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출가한 스님들도 재가자와 테라와다 방식대로 안 한다 할 것 같으면 가르치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좀 모질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이게 스승과 제자들의 관계가 맞나 할 상황이 되기도 하고 하지만, 그래도 재가자들도 마찬가지고 그러한 스승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배워나가게 됩니다.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스승들은 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해석이 되야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날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있게끔 됩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그래서 스승의 자격을 갖추게 될 때는 최소 10년 이상이 지나야만이 스승의 자격을 갖추도록 계율적으로 정해놓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출가한 스님이든 아니면 처음 테라와다 불교를 공부하는 재가자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5년이나 10년간은 한 스승 밑에서 꾸준하게 배우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 스승이 잘났든 못났든 간에 또 많이 알고 적게 알고 간에 부처님 가르침에서 어긋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실제적으로는 맞습니다.

 

부처님 같은 경우에는 보통 우리가 얘기할 때는 큰 스승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들을 가르치는 스승들은 어떤 면에서는 무엇에 대한 스승, 법에 대한 스승, 수행에 대한 스승, 아니면 심념처면 심념처에 대한 스승, 아니면 계율에 대한 스승, 이렇게 각각의 스승들이 있게 됩니다. 스님도 그러한 스승들이 한 열 분 정도는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거의 대부분이 다 열반에 드신 분들입니다.

 

가끔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승은 오직 한 분만 정해야 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테라와다에서는 스승은 한 분으로 한정이 되는 법이 없습니다. 여기 와서 배우고, 또 저기 가서 배우고, 각각의 스승들을 둘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분으로만 한정이 되는 것도 없고, 또 스승을 마음대로 떠나는 것도 출가자는 본인이 마음대로 안 되지만 재가자는 가능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또한 스승이 제자에게 쟤는 아무리 가르쳐줘봐야 가르쳐주는 대로 안 따르고 만날 엉뚱한 짓 하고 나쁜 짓만 할 거 같으면 가르치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승이란 존재는 어떤 면에서는 여러분들에게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수행에서 진보가 있게끔 하고 해탈·열반으로 향하도록 하는 데는 필수불가결한 그런 존재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길상경에 보면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뿌자 짜 뿌자니야낭 에땅 망갈랑 뭇따망" 그럽니다.

"존경해야 될 사람들을 존경하는 것이 최상의 길상이다."

"뿌자 짜 뿌자니야낭" 존경해야 할 사람들을 존경하는 것,

"가라오 짜 니와또" 그럽니다. <존경할 줄 알고 겸손하며>

존경할 대상이 아니면 존경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들 통상적으로 한번 보십시요. "존경해야 될 대상들"은 뭐가 있을까?

 

테라와다 불교도에게는? 부처님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2600여년간을 쭉 그것을 이어오고 지켜온 상가입니다.

붓다·담마·상가는 어떠한 경우든지 존경해야 할 대상이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권위를 훼손할려고 해서도 안 되고,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해서도 안 되고 또 그러한 상가를 분란을 일으키게 해서도 안 되고, 상가들을 욕되게 해서도 안된다 하는 것이 기본적인 방침입니다. 그것은 존경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있게 됩니다.

 

가끔씩 그런 부분들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재가자들이 상가답지 않다고 상가 전체를 다 매도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각각의 스님들이 잘못했을 경우에는 각각의 스님들에 대해서 잘못을 지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상가 전체에 대해서는, 어떤 경우에는 만약에 조계종이다 그러면 조계종 폭파해야 된다. 이런 아주 경망된 말들을 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상가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도 조심해야 될 부분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다음에 존경해야 될 대상 4번째가 뭐냐면 여러분들 낳아주고 키워주고 한 부모님들입니다.

경전에도 분명히 얘기를 합니다. "부모님을 범천과 같이 대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범천과 같은 마음을 내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범천과 같은 마음은 어떤 겁니까? 사무량심입니다. 자·비·희·사 부모님을 대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자비희사의 마음을 가지고 부모님을 대하는 것이 존경할 대상들을 존경하는 방법들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나쁜 마음을 가지고 나쁜 행위들을 하고 하는 것은 그것은 불교적인 것은 아니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스승은 부모와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스승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사무량심을 지니고 스승을 대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을 가르치지 않는 스승이라 하더라도 스승은 스승입니다. 그 스승은 존경하지 않고, 자신을 가르치는 스승만 존경한다 할 것 같으면 그것도 맞지 않는 겁니다. 내 부모가 소중하듯이 다른 부모들도 다 소중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부모님뿐 아니라 다른 연장자들 부모님들도 마찬가지로 사무량심을 지니고 존경하는 대상으로써 대하도록 그렇게 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스승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든 없든 간에 스승은 스승으로서 대하도록 반드시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게 4번째 부분입니다.

 

다섯 번째가 여러분들하고 직접 관계가 있는 여러분들을 가르치는 스승.

어릴 때부터는 선생님들도 있었을 거고, 또 불교에 들어와서는 대승불교를 먼저 받아들였으면 불교에 입문하도록 만들어준 스승도 있을 거고, 또 나름대로 여러 가지 부분들을 조언해주는 스승들도 있을 거고, 또 테라와다 불교에서도 이 스님 저 스님 많은 스승들을 만나 왔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스승들은, 여러분들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스승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을 가르치고 자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었던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은 존경해야 될 대상이다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왜 이렇게 다섯 가지 스승들을 존경할 대상으로 존경해야 된다 하고 얘기할까?

 

그게 '구나뿟다'라고 합니다. 그분들을 존경할 때는 자신에게는 계율을 어긋날 일이 없고 또 마음이 평온해지고 또 지혜가 일어나집니다. 계·정·혜 삼학을 닦아나가고 증대시키는 사람이 되어나갈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분들은 존경할 대상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guṇa

 

그다음에 '와야뿟다' 라고 얘기합니다. 지금까지 예를 든 분들은 전부 여러분들의 연장자입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고, 담마도 여러분들보다 먼저 생겼고, 상가도 2500년 2600년전부터 계속적으로 이어져왔고, 또 여러분들의 부모님이든 여러분들의 연장자이든 아니면 여러분을 가르치는 스승이든 실천하려는 스승이 적을지는 몰라도 불교를 가르치고 불교를 접해왔던 것은 여러분들보다 훨씬 먼저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보다 연장자입니다. 그래서 연장자에 대한 것들을 존경하는 마음들을 가지면 공덕이 된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 부분 때문에 "존경해야 될 대상들을 존경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어찌 존경하면 될까?

간단합니다. ··!

몸으로 행할 때 존경하는 행위들을 하라. 그러한 대상들이 만약에 가까이 온다 할 것 같으면 합장하고 존경하면 됩니다. 몸의 행위들을 해야 되고, 그리고 말을 할 때도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사무량심의 마음을 지니고 말을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마음으로 품은 것들도 존경하는 마음들을 지니고 항상 하면 됩니다. 그래서 신·구·의로써 존경을 해야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그러한 대상들, 부처님이든 상가든 아니면 여러분들을 깨달음에 이끌려는 스승이든, 아니면 여러분들의 부모님이든 하는 스승들은 경제적인 기반들은 사실은 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을 존경하는 네 번째가 뭐냐면 보시하는 것.

그런 대상들에게 끊임없이 보시하는 것, 그게 네 번째가 되는 거고.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뭐냐면 그 네 가지보다도 더 중요한 겁니다. 부처님은 어떤 분들을 좋아했습니까? 법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법에 따라서 법을 실천해서 해탈·열반에 이르도록 하는 것, 그걸 '법으로 공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것들 다섯 가지가 "존경해야 될 대상들을 존경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대상 중에 한 분이 바로 스승이라고 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은 다른 어떤 거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여러분과 관계가 있고, 또 여러분들을 좀 더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대상이 또 이 스승이라고 하는 존재일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적어놨지만 스승은 부모의 대역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부모님을 사무량심으로 대하듯이 스승을 사무량심으로 대하도록 하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누가 존경할 대상들을, 아까 얘기했던 스승이든 다섯 부류들을 존경하지 않을까?

단언적으로 얘기하면 자만심을 지니는 자!

 

여러분들도 잘 알다시피 위두다빠라고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부처님 종족에서 태어나서 나중에 꼬살라국에 왕이 된 분이죠. 그런데 이 분은 굉장히 자존심·자만심이 강했습니다. 나이가 어리더라도 어느 누구에게도 존경을 표하고 예를 표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러한 마음을 지니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부처님이 갔을 때는 부처님한테 깍듯이 예를 표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들 놀라게 됩니다. 그럴 때 위두다빠 왕 자신도 의아하게 생각해서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어느 분들을 존경해야 됩니까? 하고 얘기합니다. 그때 얘기한 것이 "이 다섯 부류들을 존경해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존경하지 않는 것은 자존심·자만심이 있기 때문에 존경하지 않는다 하고 그렇게 얘기하게 됩니다. 자만심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굴레에 모든 것들을 끼워넣을려고 합니다. 생각도 자신의 생각에 맞출려고 하고, 견해를 세우더라도 자신의 견해와 다른 것들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스승이든 아니면 부처님이든 관계없이 깍아내려버리게 됩니다. 아주 난처한 상황이 되게 됩니다.

 

실제적으로는 불교에서는 가장 먼저 버려야 되는 것이 자만심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을 버리지 않고 수행에 진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만심이라고 하는 것 자아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느낌의 확대입니다.

‘내가 최고다, 아니면 내가 뛰어나다.’ 그럼 자기의 생각이고 자기의 느낌인 것일 뿐인 것이지, 그걸 누구든지 인정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면 스스로 자꾸 「나」라고 하는 것들이 견고하게 되어가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이게 나중에 점점 더 견고해지게 되면 자신의 견해를 확립하게 되게 되고, 또 나라고 하는 것들이 더욱더 견고해지면서 나·영혼·견해라고 하는 것들이 딱 형성돼버립니다.

 

그런데 그것이 있는 사람들은, 나라고 하는 것이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깨달음하고는 관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형성된 나·영혼·견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사실은 잘못되고 나쁜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데 본인은 그게 나쁜 것인 줄 모른다는 거라. 그런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존경을 표하는 것들을 잘 안 할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스님이 진주에 칠월달부터 다시 하게 됐는데, 진주에 가면 진주시장이 어떨 때는 가끔 올 때가 있어요, 법문들으러. 또 대학교수들이 올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분들은 보면 조금 뭐라고 할까? 좀 거만한 게 몸에 배어 있어요. 본인은 절대 그렇게 안 한다고 하는데 자신도 모르게 그런 것이 딱 배어져 있는 거라.

그것은 수행적인 측면에서는 굉장히 안 좋은 부분이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참 재밌었던 게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태국 국왕에게 스님도 여러 차례 공양물을 받아보고 가사도 받아보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제 갓 출가한 스님한테도 앞에 가가지고 국왕이 무릎 꿇고, 스님들은 어디에 앉아 있느냐면 대부분 이렇게 높은 단상에 앉아있습니다. 연세 드신 태국 국왕이 저렇게 무릎 꿇고 앉아가지고 그 앞에 공양올리고 딱 삼배하고 합장하고 무릎 꿇고 뒤로 물러가요.

처음에 어릴 때는 그게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나중에는 그것이 맞다는 거라. 그것은 그 스님에 대한 예의보다는, 존경해야 될 대상들을 존경하게 될 때 그 스님들이 바르게 성장하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학문적으로도 내가 너보다 뛰어나고, 아니면 세속적인 권위도 내가 너보다 높고 뭐 가진 것도 많고 할 것 같으면 그런 것 가지지 않고, 자존심·자만심을 더 내는 경우들이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러한 것들은 주의해야 될 것들이다 하는 것들을 가지기 바랍니다.

 

여기 사리뿟따 존자의 예를 들어놨습니다. 자주 사리뿟따 존자에 대한 얘기를 스님이 합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앗사지 존자로 인해서 불교에 귀의하고 또 수다원에 이르고 그러고 나서 부처님 제자가 되죠! 그리해도 사실은 앗사지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의 스승이 아닙니다. 계를 준 적이 없었으니까! 부처님이 계를 줬지, 앗사지 존자는 단지 법의 한 구절을 가르쳐준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리뿟따 존자는, 모든 상가스님들의 으뜸이라고 하는 사리뿟따 존자가 바른 법으로 인도해줬다는 그 이유만으로 앗사지 존자에게 항상 아침에 일어날 때 삼배 드리고, 잠자리에 들 때 삼배 드리고, 여기 이 자리에 있든 없든 간에 만약에 앗사지 존자가 사위성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사위성 방향으로 해서 하고, 누워있을 때도 사위성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사위성 방향으로 발도 뻗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법을 인도해 줬다는 딱 그거 하나 뿐입니다. 자기의 스승도 아닌데도. 그런데 여기 있을 거 같으면 스님 있는데 가서 예배드리고 삼배드리면 되겠지만, 여기 없을 땐 어떻게 해야 돼?

만약에 예를 들어서 앗사지 존자가 서울에 있다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서울이 어느 방향인 줄 알고 있어요? 여기에서 보면 북쪽이잖아. 그럼 북쪽으로 할려면 방향을 봐야 됩니다. 어, 해가 요쪽에서 뜨니까 북쪽이 어디다 하는 것을 가려가지고 그 북쪽 방향을 향해가지고 삼배를 드리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이걸 봤을 때 꼭 바라문교 같은 느낌이라. 방위를 따져가지고 예경드리는 것, 그걸 육방예경 이라고 그러죠? 바라문교. 우리 경전에도 육방예경이라고 하는 경전이 있죠? 그런데 바라문에서 하는 육방의 예와 불교에서의 육방의 예는 다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건 불교적으로 다르게 설명을 하고 했던 부분입니다. 어쨌든 바라문교는 여섯 방위를 따지고 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바라문교는 다른 종교하고는 다릅니다. 다른 종교 불교 자이나교 인도에서 생겨난 이런 것들은 계급하고는 관계없이 그걸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종교집단을 이루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 바라문교라고 하는 것은 그런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카스트입니다. 바라문 인, 수드라 인, 등 인도에는 4가지 계급이 있다고 그러죠?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의 전유물로써 신과 인간을 맺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도 가끔 그런 게 있죠? 그리고 대승불교가 처음 태동될 때도 불을 숭배하는 것, 불을 꺼뜨려서는 안된다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는 지극히 바라문적인 사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이 절에 가면 제일 먼저 뭐부터 해요? 촛불부터 먼저 켭니다.

그런데 바라문은 일평생 불을 꺼트리지 않고 불을 피워놓고 그 불에 희생제물을 올려 가지고 그것이 타는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면서 그것들이 신들이 먹는 음식이다 하고 생각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먹는 음식은 재물이 타는 연기가 신들의 음식이다 하는 겁니다. 어쨌든 그런 것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 바라문교 라고 합니다. 거기서 대표적으로 하고 있는 게 방위를 따져가지고 신에게 예경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리뿟따 존자가 하고 있는 것들이 똑, 사리뿟따 존자가 원래의 계급이 바라문 종족이었어요. 바라문교였어요, 출가하기 전에는. 그러니까 출가 전에 습관들을 하고 있다고 비아냥거리게 됩니다.

그 소리를 듣고 부처님이 사리뿟따 존자를 불러서 물어봅니다. 부처님이 참 좋은 게 뭐냐면 부처님은 이미 그걸 알고 있습니다. 왜 사리뿟따 존자가 방향을 따져가지고 방위를 따져가지고 절을 하고 하는가 하는 걸. 그런데도 직접적으로 말을 듣습니다. “너 왜 방향을 따져가지고 그 방향으로 절을 하느냐?” “부처님은 그걸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맞다. 그것을 위해서 한 거 아니지?” “예! 아닙니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이 사리뿟따 존자를 대신해서 얘기를 합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스승을 존경하기 때문에 그 스승이 있는 방향으로 예를 올리는 것이다 하면서 사람들이 이해를 하도록 그렇게 해줍니다.

 

왜 그렇게 사리뿟따 존자든 다른 테라와다 스님들도 선배 스님들에 대해서 그렇게 존경을 할까? 그러한 스승들을 행복으로 이끌어주게 된다는 거라. 자기 자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게 되는 거라!

무슨 재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높여 주는 것도 아니고, 어떠한 것들도 아니지만 자기 자신이 행복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계율에 뛰어난 스님들은 행동 범위에 대해서 이끌어주는 스승이 되는 거고, 교리적으로 많이 아는 분들은 그러한 교리적인 법에 대한 것들을 이끌어주는 스승이 되는 거고, 수행력이 높은 스님들은 수행력으로써 이끌어주게 되고, 또는 상징적인 존재로서 어른의 행세를 해야 될 때는 그러한 은사나 스승으로서의 값어치를 하면서 가만히 있어주면서 그 사람들을 이끌어주고, 그러한 역할들을 각각 한다는 거라.

 

그러한 모든 스승들은 제자들을 어떠한 경우든지 바른 방향으로, 좀 더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좀 더 괴로움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바른 이익들이 생기게끔 하기 위한 것들이라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행복을 주고 이익을 주고 해탈·열반으로 이끄는 분들은 반드시 존경을 해야 된다 하는 뜻입니다.

 

그 3페이지 마지막에 보면 「스승을 존경하는 방법」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가 웃타나(uṭṭhāna) 라고 해서 기립하는 것.

서는 것, 다가오면 합장하고 일어서는 것. 앉아 있을 때는 합장하고 예를 표하는 것, 무릎 꿇고 앉아가지고, 그걸 기립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가 우빳타나(paṭṭhāna) 라고 합니다. 시중드는 것.

시봉 드는 것인데, 스승이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시봉을 드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오늘도 보면 물을 갖다놨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시봉입니다.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아프면 치료하도록 해주고, 또 잠자리가 불편하면 잠자리가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이런 모든 것들이 시봉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분들을 보호해야만이 법이 보호되는 거고, 내가 그 법의 가르침을 따를 수가 있고 들을 수가 있게 됩니다. 그게 두 번째 우빳타나라고 그럽니다.

 

세 번째는 숫수사(sussūsā) 라고 그럽니다. 귀를 기울이는 것.

법을 청해서 듣고, 그리고 수행방법에 대해서 듣고 그 인도에 따라서 나아가는 것.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부산에 스님 시봉하는 애 중에 수한이라고 마헤시라고 하는 애가 있는데 버마 가서 수행한다고 해서 가서 하라고 했는데 버마 가서 국제전화를 매일 같이 하는 거라. 수행에 대한 걸 물어보는 거라. 그래서 한 몇번 해주다가 나중에는 그리해선 안 된다. 거기서는 거기 스승님들이 있는데, 그 스승의 말에 귀 기울여서 들을려고 해야 되지, 자기와 안 맞다고 해서 귀를 딱 닫아버리는 거라. 그래가지고 미얀마에서 만날 한국에 전화해서 수행문답을 듣고 그리하는 거라.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냥 단순히 법을 듣는 것이 아니고, 그 수행법을 하러 갔으면 그 수행 스승에게 수행지도를 받고 그것을 따라야 되는 거라.

여러분들이 만약에 마하보디 선원에 갔을 거 같으면 그 마하보디 선원에 사사나 스님이 있습니다. 그러면 심념처를 수행법대로 따라 해야 되는 거라. 그거 하기 싫으면 거기 가지 말아야 되는 것이지, 거기 가가지고 자기의 수행법대로만 하고 수행지도를 받지 않겠다 그럼 귀를 기울이지 않겠다는 얘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어떠한 것이든 그것이 도와 과를 성취하게끔 하고, 해탈을 향해 나아가는 것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들을 무시하지 말고 그것들을 배워야 될 필요성은 반드시 있다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빠리짜리야(pāricariyā) 수행하는 것들입니다.

아무리 존경하고 시봉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수행 안 하면 말짱 꽝입니다. 의미가 없습니다. 스스로 자꾸 수행하고 실천할려고 해야 됩니다.

수행한다고 하는 것은 꼭 여러분들이 얘기하는 사념처만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천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배웠으면 실천을 해야 됩니다. 남들에 대해서 항상 자애의 마음을 지니라고 할 것 같으면 지니도록 자꾸 실천해야 되는 거고, 남에 대해서 좀 더 이로운 행위들을 할 것 같으면 이로운 행위들을 하는 것도 실천하는 것들입니다. 다 수행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래서 그런 수행을 하는 것들입니다.

 

다섯 번째는 삭깟짜십뿍가하나(sakkaccasippuggahaṇa) 락 그럽니다.

'삭깟짜십' 하고 '뿍가하나'가 합해진 건데 성실하게 잘 배우는 것들, 반복해서 잘 배우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수행의 테크닉적인 부분이면 테크닉적인 부분, 그다음에 계율의 어느 부분이면 계율의 어느 부분, 그다음에 법에 대한 어떤 부분이면 그것들을 잘 배워서 자기 것이 되도록 해서 몸에 익히도록 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여러분들도 언젠가는 그런 스승이 됩니다. 십년이 지나고 나면 스승의 자격을 갖출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까지는 열심히 그렇게 익히고 배워나가야 됩니다. 조건이 될 때 그 조건에 맞게끔 시험을 통과하고 나면은 가르칠 자격이 주어지게 됩니다. 조건이 되는 것과 자격을 갖춘다고 하는 것은 그래서 다릅니다. 어쨌든 배우든 안 배우든, 익히든 안 익히든 십년이 지나고 나면 그런 조건을 갖추게 됩니다. 조건을 갖췄을 때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지 못하면 그것 같이 바보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어떤 경우에는 그게 스트레스가 됩니다. 법납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해야 할 일들은 많아지고 배워야 될 것들은 많아지고 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하지 않고 도태가 되면은 자기에게 조건이 될 때 그 자격을 갖출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그분에게는 법을 들으러 가지도 않고 수행을 배울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거라. 그렇게 해서 뒷방 스님 같이 있는 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형태들은 되지 않도록 더욱더 자꾸 노력해가지고 자기 것이 되도록 몸에 지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이 다섯 가지가 스승에 대한 존경을 하는 방법이다 하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 스승의 역할은 많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역할을 밑에 다섯 가지로 얘기해 놓았습니다.

그 스승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는 스승이 자격을 갖추지 못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제자를 인격적으로 올바르게 가르친다.

(Suvinītaṁ vineti 수위니-땅 위네-)

그냥 교리적인 것만 가르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스승의 자격이 되지 못합니다. 인격적으로 올바르게 가르친다 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면 그 사람이 그 법을 배웠을 때 도덕적인 부분들이나 아니면 남들을 대하는 부분들이나 이런 것들이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법을 배웠다고 해가지고 도덕적으로 개차반이 된다든지 아니면 남을 비난하는 것들이 많다 할 것 같으면, 스승이 그렇게 가르쳤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잘못 가르치고 있는 거라. 그걸 배우는 학생의 잘못이 아니고, 가르치는 스승이 역할을 잘못했다는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스님 밑에서 배우는데 만날 싸움박질만 다른 사람들하고 교리적으로 다툼만 자꾸 할려고 한다 그러면 여러분들을 욕하는 것이 아니고 스님을 욕하게 됩니다.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테라와다 불교를 배웠다면서 만날 행동하는 것은 엉뚱한 것들만 자꾸 하고 남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한다 할 것 같으면 그것도 마찬가지로 스승을 욕하게 된다는 거라.

 

두 번째는 가르침이 자기 것이 되도록 한다.

(suggahītaṁ gāhāpenti 숙가히-땅 가---)

자기 것이 완전하게 되도록 만들어줘야 됩니다. 그냥 암기식으로 그걸 하면 세월이 지나면 그건 다 까먹어버리게 됩니다. 자기 것이 될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것들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돼야 됩니다.

무상을 아무리 설명해줘가지고 머릿속에 있어도 무상을 체험하지 못하면 무상한 것들을 만나면 무상하다고 알지를 못하게 됩니다.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른팔 여러분들 것이죠? 그러면 이 컵을 잡을 때 팔을 뻗어가 잡을 줄은 압니다. 자기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오른팔이 자기 것인 줄 모를 거 같으면 컵이 아무리 있어도 잡을 방법을 모르게 됩니다. 자기 것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또 스승의 역할이라는 겁니다.

 

세 번째는 모든 가르침·수행법을 완료시킨다.

(sabba-sippa-sutaṁ samakhāyino bhavanti 삽바 십빠 수땅 사마카-이노- 바완띠)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윤회로부터 벗어나고 해탈·열반에 이르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은 스승은 끊임없이 그렇게 가르쳐주게 됩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처음에는 기본적인 것들은 사리뿟따 존자한테 가서 배우고, 좀 더 고차원적인 것들 수다원에 이르고 그 이상 가고 하는 것들은 목갈라나 존자한테 가서 배우도록 이렇게 합니다. 그 스승들은 자기의 영역 내에서는 그것들을 끊임없이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해탈·열반에 이를 수 있게끔 만들어주게 됩니다.

 

네 번째는 동료 스승에게 제자를 소개한다.

(mittāmaccesu parivedenti 밋따-맛쩨-수 빠리웨--)

조금 전에 얘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리뿟따 존자가 자기가 가르친 제자라고 해서 자기가 모든 걸 다 책임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맡은 영역이 지나면 다른 스승에게 보내가지고 공부를 더 시키고. 여기 붓다야나 선원에 재가자들은 스님의 신도라 해가지고 다른 스님들에게 소개를 안 시켜준다든지, 다른 선원에 가지 못하도록 한다 할 것 같으면 그건 참 바보 같은 스승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다른 스승들에게 인도해야 되고 또 가야 되는 것들이 있을 때는 흔쾌하게 보내주고 가도록 만들어줘야 되는 것들입니다.

 

다섯 번째는 자신의 제자를 보호한다.

(disāsu parittānaṁ karonti 디사-수 빠릿따-낭 까론-)

물론 잘못한 것들이 있는 것에 대해서 보호해서는 안 되겠죠. 그런데 자신의 제자는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이 잘 보호하도록 해야 됩니다. 법에 맞게끔 살도록 해야 되는 것이고, 그래서 "스승은 신원보증인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제자들을 보증하는 겁니다. 제자가 잘못되면은 그건 신원보증인이 책임져야 된다는 거라. 자신이 잘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은 스승의 역할이고 스승이 또한 책임져야 되는 것들입니다.

어찌 보면 스승에게 여러분들이 존경해야 될 부분이 있는 반면에 스승들이 반드시 해야 되는 부분들도 틀림없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한 것들을 잘 조화될 때 한 사람의 제자가 바르게 성장할 수 있고 그것을 몸에 익히게 된다는 겁니다.

 

이번 포인트 한번 봅시다.

• 의식으로는 사람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의식적인 부분에 대해서 너무 치중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가끔씩 보면은 촛불 안 켰다고 해서 “아, 촛불도 안 켜고 뭐 하노?” 그거 안 켤 수도 있는 거지, 자꾸 그런 형식적인 걸 가지고 트집을 잡을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러냐면 그런 의식에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속에 진리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사람을 구할 수가 있겠지. 그런데 거기에는 진리가 없는 겁니다. 의식은 단지 형식일 뿐이라는 거라.

• 의식에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은 자신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 제자는 스승을 올바르게 존경할 줄 알아야 되고.

그리고 스승은 제자에게 스승의 역할을 다 하여야 하는 것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승이라는 제목으로써 글을 썼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