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괴로움에 협박되어 윤회한다. (20170811. 대구)

담마마-마까 2022. 5. 8. 09:00

https://youtu.be/g-CadwZj1HE

* 괴로움에 협박되어 윤회한다. (20170811. 대구)

 

오늘은 「괴로움에 협박되어 윤회한다」 하는 제목으로 설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문답할 때 자주자주 묻는 게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아이가 사춘기가 왔어요. 그래서 못된 짓을 많이 합니다. 괴로워 죽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많이 괴롭습니까?” 그렇게 물어보면 괴로워 죽겠대요. 그러면 스님이 대답하는 게 거의 비슷합니다. 괴로움을 좋아하니까 괴로운 거지, 괴로움을 안 좋아하면 안 괴롭습니다!”

이해를 잘 못하겠죠? 대부분 사람들은 그럽니다. 남은 힘들어 죽겠는데 자기가 괴로운 걸 좋아서 괴로워한다고 얘기를 하는 것이 되니까 좀 기분 나쁘게 들릴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보면은 괴로움인 줄 아는데 그게 진짜 무서운 괴로움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걸 안 합니다. 아직 덜 괴롭다는 거지. 덜 괴롭기 때문에 아직은 견딜만하다 해서 말은 괴롭다 하지만 그 괴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아이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어떤 방향으로 됐으면 하는 바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괴로움은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보통 여러분들이 괴롭다고 하는 것들을 잘 살펴보면 크게 4가지 정도에서 괴로움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필요 없는 욕구를 일으켰을 때.

그냥 일반적인 욕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필요한지 안 하는지에 대한 분간을 못 하고, 그냥 필요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욕구를 일으키는 것, 그래서 '불필요한 욕구'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이 있을 때 괴로움들이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도 불필요한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것은 일으킬 이유가 없는데 참지 못했다든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로 해서 분노를 확 일으키게 됐을 때. 그런 것들은 보면 나중에 ‘어, 내가 왜 그걸 일으켰지’ 하고 의아해할 때나 아니면 후회하는 때가 참 많습니다. 분노를 일으켰으면 분노에 합당한 게 돌아와야 되는데, 오히려 돌아오는 것은 없고 자기 스스로 ‘어, 내가 이건 잘못했네’ 하는 걸 일으키게 되는 것, 그걸 쉽게 말하면 불필요한 분노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잘못된 방식으로 인해서.

조금 전에 얘기한 아이의 비유를 들었듯이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거라. 아이가 공부 잘했으면, 더 좀 좋은 청소년으로 성장했으면, 수행하는 사람들은 내가 빨리 도와 과에 이르렀으면, 삼매를 체험했으면, 이런 것들입니다.

그건 어찌 보면 옛날 인도의 비유를 들면, 지금도 인도 여행 가보신 분들은 나발수행자라든지, 아니면 옷을 안 입고 있는 수행자라든지, 아니면 고행하는 수행자들을 가끔씩 볼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도 그런 얘기를 했죠? 그런 것으로 인해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이 청정해지지 않고 해탈·열반에 이르지 못한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괴롭힐 뿐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잘못된 방식이라는 거죠. 그런 것들로 인해서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삼매를 바란다고 할 것 같으면 삼매가 일어날 수 있게끔 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해서 삼매가 일어나야 되는 것이지, 바란다고, 도와 과에 이르고자 한다고 해가지고 그게 이르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삼매를 개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로 다 설해놓았습니다. 또는 도와 과에 이르는 방법은 이런이런 차례를 밟아간다는 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본인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해서 그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삼매에 이르게 되고, 도와 과에 이르게 되는데, 그걸 바라고 있다고만 하는 것은, 수행은 안 하고 그것들에 대한 기대만 가지고 있다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아이가 나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아이를 바르게 인도해야 되는 것이지 자신이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바른 방법은 아니라는 겁니다.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 동안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아이를 선도할 경우에는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자신의 것이 옳다고 하는 것들.

보통 여기 우리 김기식 교수 같은 분들이 잘 걸리는 부분들입니다. 자신의 것이 옳다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이 올바른 것이고, 다른 것은 틀렸다 이렇게 했을 때, 지식이나 견해나 아니면 수행방법이나 어떤 것이든 그런 것들에 매달려가지고 괴로움을 일으키는 경우들입니다. 자기 혼자 있을 때는 괴로움이 안 일어나겠죠? 그런데 거기에 뭔가가 충돌할 경우에는 괴로움들이 일어납니다.

 

보통 이런 것들이 괴로움을 일으키게 됩니다.

 

아까 맨 처음에 예를 들었듯이 아이 때문에 괴로움이 일어난다, 그럼 괴로움이 지금 없는 상태에서 아이를 바르게 인도할 경우에는 어떤 경우가 될까?

또는 자신의 견해에 매달리지 않고 담론을 할 경우에는 어떠한 상태에서 하게 될까?

또는 수행을 할 때 바라는 것이 없이 수행을 할 경우에는 어떤 마음의 상태일까?

불필요한 욕구나 분노들이 없는 상태에서 뭔가를 행하고 말을 하게 될 때 어떠한 상태일까? 하는 것들이 여러분들이 견주어봐야 될 그런 부분입니다.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도 중요하지만, 지금 자신이 괴로움이 있는지 없는지를 잘 판단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대한 것들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건 나중에 마칠 때 정도 되어서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목에서 얘기했듯이 「괴로움에 협박되어 윤회한다.」

괴로움으로 인해서 끊임없이 괴로움이 일어나기 때문에,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이 그러한 업을 짓고 있다는 얘깁니다. 업을 짓고 있으면 윤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괴로움이 안 일어나는 적이 있는가?

 

살아가기 위한 조건에서는 그래서 여기 존속하기 위한 영양이라는 얘길 했습니다. 그 영양분을 필요로 하는 건데, 그 영양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보통 그 영양분을 전에 '마음의 영양소' 인가 하는 제목으로 프린트물 내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육체적인 것은 먹는 음식들, 정신적인 영양원은 촉, 의지, 식 이런 것들이 영양원이다." 부처님만이 그렇게 얘기한 부분입니다.

 

그런 영양원들은 쉽게 말하면 어리석음이 원인이 돼가지고 그런 영양원들이 진짜 중요한 줄 알고 그것들을 취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다 보니까 괴로움은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걸 괴롭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 그걸 "괴로움에 협박됐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않게 하기 위해서 취하는 것들이 계속적으로 윤회하는 길밖에 없다는 거라. 그런 사이클을 가진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존속하기 위한 영양은 여기에 불이 들어와 있듯이 끊임없이 전기가 공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공급이 안 되는 찰나에 이 불은 한순간에 탁 꺼져버린다는 거라.

그걸 위해서 계속 공급해주기 위해서 스위치를 넣어서 전기를 지속적으로 계속 공급을 해주는 거라. 그럼 불은 계속 밝게 들어와 있습니다. 형광등은 누군가가 스위치를 눌러주면 우리는 여기 빛을 계속 받을 수가 있지만, 존속하기 위한 영양은 누가 공급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스스로 만들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게 다른 것과 다른 것들입니다.

 

그게 첫 번째로 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것에 대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해서 괴로움이라고 하는 위협에 대한 부분을 얘기해 놓았습니다.

끊임없이 괴로움이 위협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괴롭지 않기 위해서 뭔가를 합니다. 호흡하는 것도, 뭔가를 먹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망상하는 것도, 뭔가를 인식해가지고 알려고 하는 것들도, 끊임없이 하는데 이걸 잘못 이해하면 그것이 사는 것이라고 착각을 해버립니다.

그런데 이거 없이 또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괴로움을 만들어내는 것들이라는 생각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그 생각을 하지 못하면 그것으로 인해서 계속적으로 윤회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먹을 때 먹는 것을 혐오스럽게 생각해본 적 있어요?

적어도 먹는 것이 윤회를 만들어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분명하게 이해한 사람들은 먹는 것을 구하는 것, 또 먹고 나서의 일들에 대해서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굉장히 혐오스러울 겁니다. 그게 괴롭다는 거라, 그것만 생각하면. 그런데 그걸 감추기 위해서 우리는 보통 입속에 들어간 음식은 안 뱉어냅니다. 보지 않으면 어떻게 생겼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먹습니다.

 

부처님이 가끔 설하신 것 중에서 '음식에 대한 혐오'라는 수행이 있습니다.

"음식에 대해서는 반드시 혐오하는 마음을 일으켜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몸을 유지하기 위한 영양소인데, 그걸 영양소라고 생각하지 않고 먹는 도구로써 생각할 것 같으면 자꾸 맛있는 걸 찾아 먹게 되고 또 아직은 불필요한데도 먹게끔 된다는 거라. 오늘 아마 당장 그럴 거라. 오늘 팔계를 지녔으니까 오후에 뭔 음식을 먹으면 안 됩니다. 오후 되면 습관적으로 배고프다는 거라. 왜? 그게 습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괴로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거라.

끊임없이 자극을 하는 거라. 괴롭기 때문에 안 괴로울려고 그걸 먹게 됩니다. 그러면 팔계는 당연히 깨지게 되는 것이고, 또 불필요한데 또 뭔가를 먹게 될 것 같으면 내가 계를 깼다는 후회도 들고, 또 몸은 그것이 필요하지 않은데 오늘 수행을 쭉 해서 몸이 그렇게 움직일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영양과다 하게 되어서 몸은 오히려 더 나쁜 상태가 되어버리는 거라. 끊임없이 이걸 반복들을 하게끔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십시요. 그걸 주석서에서는 비유를 해놓기를 "아들 고기와 같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막에서 길을 잃었는데 먹을 것이 다 떨어졌어요. 보통 인간은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 일주일이 넘어가면은 아사(餓死)하는 상태에 이를 수가 있다 하고 경고를 합니다. 실제적으로 일주일을 안 먹고 있으면 여러 가지 세포 기능들이나 여러 가지 기관들이 고장을 일으키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가만히 누워있을 거 같으면 좀 더 버틸 수 있겠지만 활동을 하고 걸어가야 될 경우에는 일주일이 되기 전에 뭔가를 섭취를 해야 됩니다.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 부모들은 아들을 죽여서 먹어야 된다는 거라. 아들을 죽여서 그 고기를 오늘 조금 먹고 또 내일 조금 먹고 해가지고 몇달 걸려가지고 사막을 넘어간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 먹는 것이 올바르게 먹을 수 있겠어요? 단지 지금 현재 내가 이 사막을 건너가기 위해서 몸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써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석서에는 "음식은 아들 고기라고 생각하고 먹어라." 그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필요한 것만 먹어야 되는 것이지, 그걸 잘 먹을려고 아니면 맛있는 것만 먹을려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먹는 것이 하나 또 못된 짓을 하는 것이 뭐냐면 속이는 일들입니다. 아직 몸이 지탱할 수 있는데도 배고프다고 속입니다. 또 그냥 이것만 먹어도 괜찮은데도 맛있는걸 먹을려고 하면서 자신을 속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맛있게 한걸 먹을려고 하지 맛없게 한 건 안 먹을려고 합니다. 그런데 맛이 있는 맛이 없든 그건 혀의 일이지 몸을 지탱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그렇게 자신을 속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음식은 반드시 그런 것들을 잘 생각을 해야 됩니다.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윤회하기 위해서 자꾸 본인을 협박하는데, 괴롭지 않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데도, 그 음식을 먹는 것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먹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바른 방법은 아니라는 겁니다.

 

밥을 먹을 때 어떻게 먹으면 좋을까?

수행에서는 그러죠! 씹으면 씹는다고 알고 먹고, 숟가락을 들으면 숟가락을 든다고 알고 먹고, 그리고 먹는 것을 배가 부르기 전에 딱 중단하라고 그럽니다. 보통 경전에는 그걸 "4~5숟가락 적게 먹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일상적으로 먹는 양에서 4~5숟가락을 뺀 양이 적정한 양이다 하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할까?

왜 그것을 알아차리면서 먹고 조금 부족한듯 하면서 중단을 하게끔 할까? 배부르다고 만족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먹으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적당량을 알아서 먹을 거 같으면 그것으로 만족을 합니다.

배가 부를 경우에는 만족감으로 인해서 감각적인 기쁨이나 쾌락은 있을지 몰라도, 내가 적당하게 먹고 그리고 바르게 알아차리면서 먹었다는 것으로 인해서 오는 정신적인 기쁨은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먹는 양을 분명하게 알고, 먹는 것에 대해서 가리지 않고 먹게 되고 할 거 같으면 먹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지혜가 분명히 일어납니다.

 

먹고 나서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십시요. 내가 만족하면서 먹었는지? 정신적인 기쁨을 누리면서 먹었는지? 먹는 것에 대해서 지혜가 일어났는지?

지혜가 일어났다는 것은 먹는 것으로 인해서 다른 번뇌들도 잘 일어나지 않고 또 그것이 소멸했다는 걸 얘기합니다.

먹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번뇌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분노, 욕구, 그다음에 성욕 이런 것들은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잘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는가?

 

적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일 거 같으면 이것이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이지만 그래서 그 괴로움을 계속 받아서 윤회하는 것보다는 그 먹는 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받지 않고 윤회로부터 탈출하는 길을 빨리 찾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들은 먹을 때 ‘내 아들고기다’ 생각하고 한번 먹어보십시요.

경전에는 비유를 굉장히 강하게 해놓았습니다.

 

스님들은 탁발하게 되면 걸어갈 때부터 알아차리는 법, 그다음에 음식을 탁발할 때 알아차리는 것, 먹을 때 알아차리는 것, 먹으면서 알아차리는 것, 먹고 나서의 생각, 그다음에 대소변으로 빠져나갔을 때의 것, 그래서 보통 그걸 7단계로 나누어가지고 그걸 관찰하도록 합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탁발이 그래서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단순히 내가 음식을 해먹지 않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수행의 도구로써 훌륭하게 작용을 하기 때문에 탁발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음식을 대할 때 3가지는 일어나도록 하면서 먹어라" 하는 겁니다.

만족감이 일어나도록 하고, 희열이 일어나도록 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지혜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 이 3가지는 빼먹지 말고 일어날 수 있도록 해서 그것이 견고해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적어도 그리하면은 괴로움에 협박당해서 먹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윤회하는 원인을 짓지는 않는다는 거라. 몸과 말과 마음에서 행하는 것들에서 내가 업을 쌓지 않게 되면 윤회를 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2페이지에 보면 자극이라고 하는 영양 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또 「존속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더 필요하다. 귀에 소리가 접하는 것, 코에 냄새가 접하는 것, 눈에 밖의 세계가 비치는 것, 혀로 맛을 느끼는 것 등은 마음의 영양이 됩니다. 즉 안·이·비·설· 신·의에 색·성·향·미·촉·법이 접촉되면 에너지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정리해 불교에서는 촉이라고 하는 양양소라고 말합니다.」

 

뭔가가 접하는 촉, 촉이라고 하는 것이 없으면 아마 여러분들은 살아있다고 생각하기가 힘들 겁니다. 죽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의 차이가 그겁니다. 여러분은 뭔가 접하면 접촉하는 줄은 압니다. 왜 그럴까? 접촉으로 인해서 느낌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뭔가가 접촉해도 느낌이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촉은 느낌을 알아차리기 위한 좋은 수단입니다.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접촉,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좋고 싫고 무덤덤한 느낌들, 그것은 반드시 알아차려야 됩니다. 좋은 느낌이 일어났으면 좋은 느낌이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고, 싫은 느낌이 일어났으면 싫은 느낌이라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고.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살가죽이 벗겨진 소와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도 아마 뭔가 피부가 벗겨지고 나면 뭔가가 접촉하면 굉장히 예민하게 그 느낌들이 일어날 겁니다. 접촉하지 않아도, 바람만 불어도 그곳에서 느낌이 일어납니다. 가죽이 벗겨진 소는 굉장히 그런 느낌들이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은 그런 느낌들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손을 여기에 대서 한번 쓰윽 문질러보면 느낌들이 무수하게 일어납니다. 실제로. 그런데 여러분들은 대부분 그 느낌들을 놓쳐버리고 산다는 거라. 어떤 느낌이 일어났는지를 모르고 지나쳐버린다는 거라.

 

왜 이 느낌들을 알아차려야 될까? 촉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왜 알아차려야 될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느낌들이 괴롭다고 분명하게 아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서 악의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즐거운 느낌이라고 하더라도 그 즐거운 느낌은 언젠가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 내 즐거운 느낌을 누군가가 뺏어갔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당연히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악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 느낌을 관찰하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그 즐거운 느낌도 내가 관찰해보니까 ‘아, 이게 즐거운 느낌이 아니고 끊임없이 변해가기 때문에 그것이 굉장히 괴롭다’ 하는 것을 알게 될 거 같으면 그 즐거운 느낌을 뺏어갔다 해가지고, 그 뺏어갔다는 의미는 내 괴로운 걸 뺏어갔다는 의미입니다. 괴로운 걸 뺏어갔는데 내가 악의를 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느낌을 알아차렸을 때 맨 먼저 일어나는 것이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나 남에 대해서 악의를 품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남에 대해서 비난하고 또 자기 잘난체 한다든지, 아니면 자기를 내세울려고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사라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느낌은 분명하게 대상으로써 느낌으로써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은 괴로운 것으로써 알아차리고, 괴로운 느낌은 무상한 것으로써 알아차리고, 무덤덤한 느낌은 쏜살같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으로써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걸 다 통합해보면 모든 느낌들은 변해가기 때문에 괴롭다 하는 것으로써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뜻입니다. 느낌은 변하기 때문에 그것도 너무나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들이다 하는 겁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 대해서도 악의를 품지 않을 뿐아니라, 어떠한 형식에도 매이질 않게 됩니다.

여기에 왔으니까 아까 누군가한테 시키던데, “절하는 것은 요렇게 하고 요렇게 하라.” 그런데 만약에 내가 마음속에서 기분 나쁜 느낌이 탁 일어났다, 그럴 것 같으면 그렇게 절하는 것에 대해서 반감이 탁 일어납니다. 뭐라요? 시킨 사람도 이러한 방식으로 하라는 형식에 매여있을 뿐 아니라 따라오는 사람도 그 형식에 딱 매여있게 되는 거라. 계금취에 딱 묶여있는 것이라는 거라. 그 느낌을 느낌으로써 분명하게 알아차릴 것 같으면 적어도 그런 계금취에는 얽매이지 않게 된다는 거라. 그걸 하면서도 그냥 하게 되는 거라.

 

삼배 올리는 것이 테라와다 방식으로 하면 어떻고 대승불교 방식으로 하면 어때? 오히려 어떠한 방식으로든 하면서 그러한 느낌에 얽매이지 않고 그러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을 거 같으면 그건 훌륭한 겁니다. 마음속에서 분명하게 자신이 일어난 느낌들을 알아차리고, 그리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마음에서 고요한 마음이 일어나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존경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 같으면 그것은 훌륭한 예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느낌을 보지 못할 거 같으면 그러한 형식에 딱 매여버리게 됩니다.

적어도 여러분이 촉 없이, 접촉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괴로움이란 사실을 알아서 그것으로써 윤회한다는 사실을 알 거 같으면 그 촉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느낌들은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윤회로부터 벗어날 희망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자극이라고 하는 영양입니다. 그 자극에는 망상하는 것도 있고, 생각하는 것도 있고, 스스로 영양을 만드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극에는 그 밑에 부분에 「간사하게 마음은 고민이나 괴로움, 불안도 영양으로써 사용합니다.」 하고 적어 놓았습니다.

 

왜 괴로워하고 왜 불안해할까?

맨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자기가 괴로움을 좋아하니까 계속 일으키는 거라. 내가 그 의도를 내지 않으면 괴로움은 끊어져버립니다. 의도없이 행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들도 의도가 없으면 그것은 끊어져버립니다. 의도가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이걸 주석서에는 "시뻘겋게 달구어진 숯덩이 앞에 사람을 꽉 붙잡고 그 불 가까이에 다가가도록 한다"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굉장히 뜨겁겠죠. 벗어날 수가 없으니까.

 

"의도는 갈애를 일으킨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감각적인 욕망에 대한 것, 존재할려고 하는 것들, 게으르고 빨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갈애" 이 3가지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뭔가 괴로움이 일어났다, 그럴 것 같으면 감각적인 욕망이 있는 건지, 내가 쟤를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 건지 아니면 쟤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있는 건지를 먼저 봐야만이 애를 바르게 선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지 못하면 자기 방식대로 애를 인도할려고 합니다. 애는 계속 벗어날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고민이나 괴로움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뭔가로 인해가지고.

 

그럼 거기에 내가 감각적인 욕망이 있는 건지, 아니면 나라고 하는 것을 내세워가지고 내 방식대로 할려고 하는 것이 있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된다는 거라.

괴로움이 일어났을 때 이런 갈애들을 알아차리기에는 굉장히 수월합니다. 그마만큼 강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알아차리기가 수월합니다.

어? 이것은 내가 나의 생각을 중심에 두고 그것을 맞출려고 한다는 것들을 알아차릴 수가 있고, 내가 뭔가를 원하는 것이 있어가지고 이런 괴로움들이 일어났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들이 일어나고 또는 고민들이 되고 할 때는 갈애들이 있는지를 분명하게 잘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적어도 갈애를 알아차리면, 그리고 그 갈애가 소멸되는 것들을 자꾸자꾸 경험하다 보면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 밑에 사고·망상이라고 하는 영양그것도 마찬가집니다.

망상도 괴로움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으면 망상은 끊어져버립니다. 망상이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틀림없이 그 속에는 3가지 갈애 중에 하나가 일어나있습니다.

그 갈애를 알아차리면 망상은 끊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사고·망상이라고 하는 영양도 그와 같이 이해를 하도록 해야 됩니다.

 

쭉 읽어보면, 망상 때문에 병이 들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보통 병만 치료할려고 하지 망상은 치료할려고 안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병을 치료하는 게 우선이 아니고 망상을 먼저 치료하라, 망상을 먼저 치료하면은 병은 치료된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망상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할 수가 없습니다. 망상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안·이·비·설·신은 물질이므로 한없이 영양을 거두어들일 수는 없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계속할 거 같으면 소리는 약해져버립니다. 청각을 잃게 됩니다. 또 눈도 망가져버립니다.

스님이 대표적입니다. 눈하고 귀가 오른쪽이 거의 망가져버렸어요. 내가 좋아서 하다가 그게 신통이든 뭐든 하면서 계속적으로 마음속에서 그 신통을 개발하려고 하는 망상이 일어납니다. 육체는 일정 부분 육체는 계속할 수 없는데도 그걸 계속하면 망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순간에 탁 망가져버립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맛있는 걸 계속 먹을려고 그래도 혀는 계속 맛있는 걸 먹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맛있는 걸 느끼지만 나중에 가면 무덤덤해져 버립니다. 나중에는 맛을 느낄 수 없게 돼버립니다. 육체를 통해서 할 수 있는 것들은 계속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영양을 계속 공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망상은 어떨까? 끊임없이 하는 거라. 끊임없이.

왜? 아까도 얘기했지만 갈애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갈애를 끊기 전에는 망상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망상은 수다원과에서도 있고 불환과에서도 망상을 부린다 하고 얘기합니다. 아라한이 되어야만이 망상이 떨어진다 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들입니다. 그마만큼 무서운 것이 사고하고 망상하는 것들이라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을 윤회하도록 만들어주는 것들입니다. 그걸 빨리 떨어뜨릴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런 망상하고 사고하고 감정이 일어나는 것들은 감정의 자급 생산을 합니다. 스스로 생산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살려고 하기 때문에 인식할려고 하게 됩니다. 인식할려고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그걸 바르게 인식하면 좋은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 인식하는 것만 떨어뜨려가지고 독립된 것으로 자꾸 만들려고 합니다. 특별한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수·상·행·식은 동시에 일어날 뿐 아니라 연결되어서 일어나게 됩니다. 식(識)만 스스로 일어날 방법이 없는데도 식만 떨어뜨려 볼려고 합니다. 또는 이 식이 무슨 특별한 것처럼 생각 해가지고, 이것들에 대해서 진아라는 이름을 붙인다든지 뭐라는 이름을 붙여서 영원불멸하는 것처럼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몸은 죽어도 식(識)은 죽지 않고 다음 생을 잇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긴 한데, 그 식은 다른 식입니다. 그런데도 똑같은 식으로써 인식을 하게 됩니다.

 

? 계속 살고자 하는 생존욕구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다른 것에 비해서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그런데 여러분이 만약에 숨을 쉬면서 이것이 육체적인 현상이고 이것은 정신적인 현상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명색(名色)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신적인 것들은 스스로 독립해서 일어나지 않고 대상이 있어야만 일어난다는 사실을 압니다.

정신적인 부분은 수·상·행·식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대상으로 인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식(識)이 독립돼있다고 착각을 한다는 거라.

그래서 끊임없이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 구분해서 보게 될 때, 정신적인 현상은 수·상·행·식으로써 구분해서 보게 될 때, '이것은 느낌이다, 이것은 의도다, 의도로 인해서 뭔가 하는 행위가 일어나고, 그것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알게 될 것 같으면 적어도 그것이 독립돼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명색에 대한 구분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이게 정신적인 현상이다, 물질적인 현상이다만 구분해가지고, 이 식(識)이 독립된 것이 아니다 하는 걸 알 수 있을까? 모릅니다!

명색을 구분하더라도, 그 명색이 무상하다는 것으로써 분명하게 알게 될 때, 식은 독립돼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질적인 현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한다는 사실, 그것에 따라서 그것을 알아차리는 정신적인 현상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지, 하나의 정신적인 현상 하나의 물질적인 현상이라고만 알 거 같으면 식은 또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정신적인 현상과 육체적인 현상을 알아차릴 때는 무상한 성품으로 알아차려라 하고 얘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상하다고 알게 될 때 물질적인 현상-숨이 들이쉬는 것이 그냥 쑤욱 들이쉬어지는 것이 아니고 파도치듯이 끊어지고 이어지고 하면서 다른 개체로써 다가와지게 되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도 끊임없이 다른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때 ‘아, 식이라는 것은 독립할 수가 없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거라.

 

여러분은 영원히 살 수 있습니까? 늙고 병들고 죽게 돼있죠! 좋은 사람 항상 옆에 있고 싶지만 그렇게 못한다는 것을 알죠? 그리고 여러분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오온-색·수·상·행·식이라고 하는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관념적으로 아는 것이지 실제적으로 아는 것은 그것들을 무상한 성품으로 분명하게 알게 될 때 ‘아, 이것이 영원하지 않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집착을 버려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괴롭지 않을려면 부처님이 팔정도를 설하시면서, 고에 대한 것들을 쭉 설명을 하고 마지막에 설명을 한 것이 뭐냐면 "오온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될 때 분명하게 열반에 이르를 수 있다" 하고 얘기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오온에 대해서 집착하는 순간에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괴로움으로 다가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윤회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속에 식(識)이 포함돼 있습니다. 식도 영원한 것이 아니고 조건 따라 일어났다가 조건 따라 사라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식(識)이라는 것은 자기 혼자서 일어나면 참 좋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생존욕구와 죽음의 공포감이라고 하는 감정에 질투, 미움, 원망, 인색함, 오만, 비하, 허세, 경쟁심 등의 동료가 따라옵니다.

식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든지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같이 따라오게 됩니다. "내 견해가 최고다!" 아니면 뭔가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날려고 하고, 이런 것들이 항상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게 「자급 생산」이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스스로 생산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걸 주석서에는 인식하는 것들을 "백 개의 창으로 인식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창을 백 개를 꽂으면 얼마나 괴로움이 많이 일어나겠어요? 그런데도 안 죽었다, 그럼 또 백 개를 꽂게 되고, 백 개의 창에 꽂힌 사람은 끊임없이 아마 괴로움이 일어날 겁니다.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더불어 동료들과 같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이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내가 안 괴롭기 위해서 영원한 것들을 찾게 되는 거고, 영원한 걸 찾다보니까 영원한 뭔가가 있다고 그 식을 가지고 7식, 8식들을 자꾸 만들어내게 되는 거고. 또 다른 이름을 붙이게 되고, 관념을 자꾸 거기다 덧씌우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게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여러분이 괴롭지 않기 위해서 영양을 취하는 4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부분에 설명을 해놓은 게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 많다」 하는 부분입니다.

살아가는데 여러분들은 실제적으로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자꾸 사람들은 그걸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괴로움만 있는 것은 아니야! 즐거움도 있어!" 그런데 그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괴로움을 들였다는 걸 까먹어버립니다. 맛있는 걸 먹을 때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걸 먹기 위해서 얼마만큼 힘들여가지고 괴로움을 받으면서 돈을 벌었고, 그걸 만들기 위해서 얼마만큼 노력했다는 것을 까먹어버리고 먹을 때 즐거우니까 즐거움이 있다고 착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훨씬 그거보다도 괴로움이 더 많은데도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거라.

 

? 누구든지 마음은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괴롭지 않을려고 하는 방향, 게으름 부릴려고 하는 방향!

마음은 항상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을 즐거움이 있다고 착각을 해버리게 됩니다.

 

그게 바로 4페이지에 있는 존속 욕구의 함정 입니다.

생존할려고 하는 것 때문에 그렇게 함정에 빠져버리면 그렇게 착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생존욕구가 얼마만큼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도와 과가 정해집니다.

생존욕구가 완전히 없어져버리면 아라한에 이르게 됩니다.

생존욕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때가 묻은 범부중생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그게 생존욕구의 함정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생존욕구에 집착하면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생로병사에 집착하는 것들도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생로병사에 대한 집착 윤회에 대한 집착을 하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하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 이러한 사이클을 계속 도는 것들을 부처님은 '무명'이라고 얘기했다 하는 것입니다.

 

이번 포인트를 한번 봅시다.

 

• 살아가기 위해서는 항상 영양이 필요하다.

• 오근으로부터 영양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 인생에는 괴로움이라고 하는 위협이 있다.

• 살아가면서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더 많다.

• 생존욕구가 있는 한 해탈할 수 없다.

여러분은 오온을 집착하는 일이 없이 오취온으로써 만들지 않도록 하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