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예류과에 이르는 길_법수행과 신수행 - 전편 (20170929. 대구)

담마마-마까 2022. 5. 10. 09:00

https://youtu.be/cfvAQemPlQE

* 예류과에 이르는 길_법수행과 신수행 - 전편 (20170929. 대구)

(4:40 이후부터 녹취하였습니다.)

 

자! 오늘 할 거, 프린트물이 좀 많죠? 다음 주가 추석 주간이기 때문에 추석 주간에는 차가 막혀서 스님이 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몇 번이라도 추석 주간에라도 좀 읽으라고 해서 프린트물이 좀 많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이걸 지금 다 하지는 못하고 중요한 부분만 추려가지고 할게요.

 

법수행과 신수행에 대한 예류과에 이르는 길에 대한 겁니다.

경전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그건 알죠? 도와 과에 든 성인을 여덟 부류로 분류하는 것은 알 겁니다. 여덟 부류로 분류한 데가 있고, 또 어떤 경전에는 아홉 부류로 분류해서 '고뜨라부'라고 해서 종성을 포함을 시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법수행과 신수행자는 종성보다도 한 단계 위에 올라가 있는 단계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성자를 향해서 나아가는 길에 있는 맨 밑에 성자가 예류과에 도달한 자이기 때문에, 예류과에 도달하기 위해서 열심히 수행하는 자를 얘기할 때 그걸 보통 예류도 아니면 예류향이라고 그럽니다.

 

그걸 일러 가지고 두 가지 길이 있는데 법수행 하는 방법과 신수행 하는 방법 두 가지를 그렇게 경전에는 분류를 해두었습니다.

나중에 경전에 근거하면 그렇게 수행이 익은 사람들이 나중에 예류과에 이르고 나서도 그다음에 나아가는 길이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가지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위빳사나 수행으로써 쭉 나아가는 사람도 있고, 또는 사마타 수행으로 나아가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방향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런 부분에 대한 것들을 쭉 적어놓았습니다.

 

그런데 한번 더 얘기를 할게요.

성자의 가장 아래에 있는 게 사향사과 그러니까 사쌍팔배로 봤을 때 예류도나 예류향이 되게 되는데, 어느 시점부터 예류도나 예류향이라고 할까?

범부중생을 성자의 반열에 놓지는 않을 거 아니라?

범부중생과 성자의 차이는 뭐죠?

욕계의 마음으로 사는 경우, 쉽게 말하면 우리 몸을 가지고 있는 보고 듣고 맛보고 하는 감각기관으로 인해서 좋고 싫음으로 사는 것이 범부중생이라고 보면 되고, 이 보고 듣고 맛보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욕계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색계나 무색계의 마음, 또는 그것으로 인해서 변하는 성품으로 보는 경우, 또는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고요해서 하나에 오롯하게 집중이 되는 경우, 이런 경우는 성자의 계열에 속한다고 그렇게 간단하게 보시면 됩니다.

 

성자는 예류과부터는 분명하게 이해가 될 겁니다. 이미 과위를 얻었기 때문에! 그다음에는 일래도 일래과 이런 식으로 쭉 가는 것은 분명하게 이해하는데, 예류도나 예류향은 어떻게 그 기준을 잡을 것이냐?

거기부터는 성자의 반열에 들게 됩니다. 그것은 경전에는 써져있지 않습니다.

경전에는 써져있지 않는데, 여러 경전들을 취합해가지고 결론을 내려보면, 여기서 얘기하는 고뜨라부의 상태에 도달한 것부터 예류도라 한다 하는 경우들이 있고, 쉽게 말하면 붓다의 가족이 된 것, 부처님의 피를 나눈 거와 같은 상태가 됐을 때를 성자의 반열에 속하는 예류도의 시작이다 하는 경우들도 있고, 또 조금 더 엄격하게 얘기하면 법수행과 신수행자들을 예류도라고 얘기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또 태국 같은 경우에는 테라담마 열 가지라 해서 열 가지가 고루고루 갖춰져가지고 그게 몸에 익었을 경우에는 그런 경우에 그때부터는 예류도라고 한다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그 테라담마 열 가지를 간단하게 얘기하면 경전에 대한 것들을 완전하게 이해를 해가지고 경전에서 어긋남이 없이 법을 설할 수 있는 경우에, 또 수행이 무르익어서 어떤 수행 방법이든 자기가 하는 수행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신수심법이라고 알고 있을 겁니다. 신념처 수행을 하든, 수념처 수행을 하든, 법념처 수행을 하든 어떤 수행자가 와서 법을 묻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그 법에 대한 인도를 해줄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 또 마음이 어떠한 경우든지 안정되어가지고 감각적인 것들 외부적인 대상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있는 경우, 그리고 법을 많이 들어서 그 법하나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 법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지, 삼법인과 사성제와 팔정도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연결고리들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것을 자유롭게 이해해서 인식하는 경우들, 보통 크게 나누면 그런 계통들을 얘기합니다.

 

미얀마 같은 경우 특히 파욱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기준을 잡느냐면?

위빳사나 수행의 단계에서 '상카루뻭카냐나'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외부적인 대상에 대해서 흔들림 없이 마음이 항상 고요하게 안정돼있어서 모든 현상들은 변한다고 분명하게 아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 상태는 어떤 거냐면 잠깐이라도 열반을 체험해 보는 것, 잠깐이라도 무상·고·무아 중에 하나는 분명하게 체험해 보는 것을 말합니다.

 

호흡을 봤을 경우에 호흡이 굉장히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들, 그래서 그것들이 ‘아, 이게 무상이구나’ 분명하게 체험하는 것들, 그냥 슬그머니 변하고 하는 것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아주 빠른 속도로. 그거와 마찬가지로 마음은 그거보다도 훨씬 빠르게 변화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경우나,

아니면 어떠한 경우도 그속에 원인·결과로써 이어지는 것이지 나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알아서 유신견이 떨어지면서 그리고 영혼이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는 생각을 아예 버려버리는 경우들,

그런 것들을 "열반을 체험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열반을 체험했는데 후딱 지나고 나면 다시 또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런 열반을 체험해가지고 그게 무르익었을 경우에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도 마음이 탐·진·치가 일어나는 것이 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나가는 경우 그걸 일반적으로 얘기할 때 '상카루뻭카냐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상카루뻭카냐나'는 거기에 도달하면 그다음 단계는 자동적으로 밟아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최소한의 단위가 일단은 '상카루뻭카냐나'에 도달한 것으로부터 실제적으로는 예류도에 들어가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실제로는 예류도가 아니지만 그거와 진배없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삼보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게 되어가지고 쭐라소따빤나-작은 수다원과를 분명하게 거기에 이르게 됐을 때, 수다원은 아직 예류과나 예류도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작은, 아주 작지만 그래도 내가 크게 악한 일은 인제는 더이상 하지 않는다, 물론 성냄도 일어나지고 욕심도 일어나지고 하지만 크게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하는 걸 자신이 분명하게 알고 내가 걸어가는 길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는 상태, 이걸 쉽게 말하면 '작은 수다원에 이르렀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상태에 이르렀을 때부터를 "예류도의 시작부분이다"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는 예류도나 예류향은 각 나라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사실은 잡기가 힘이 듭니다. 그리해도 그게 여러분들을 성자와 범부로 가르는 기준점인데, 적어도 거기에는 이르러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예류과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그 예류도나 예류향으로 나아가는 길에 대한 설명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여기에 이르를까 하는 그런 겁니다.

 

예류과에 이르면 세 가지 번뇌가 떨어진다고 그러죠?

유신견, 계금취, 의심 그 3가지가 완전히 떨어져서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예류과에 해당이 되는 거고, 예류도는 그것이 아직 있는 거고,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쉽게 구분할 때.

그 대신에 예류도와 예류과의 차이는 실제로는 거의 없습니다. 이미 상카루뻭카냐나에 도달했든, 테라담마가 몸에 익어진 경우든, 아니면 법수행이나 신수행을 열심히 해서 그것이 익어지는 자이든, 실제로는 이 세 가지 번뇌는 거의 없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성자와 범부를 구분하는 수행자들에게 가장 눈에 드러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수행을 할 때 오력이 갖추어져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오력은 여러분들 잘 알죠? 뭐 뭐가 있어요? 다섯 가지가 집중하는 힘과 노력하는 힘들이 균형이 맞아지는 경우, 어떨 때 내가 집중을 해야 되고, 어떨 때 내가 더욱더 노력을 해야 되는지 분명하게 알아서 그것들을 균형을 맞추어서 이 오력이 동반적으로 상승해 나가는 경우,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에서 오력은 균형이 맞아지고 그 오력은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들이 없는 경우는 없는 상태, 이 상태가 범부와 성자를 구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두 번째가 뭐냐면 보통 여러분들 다섯 가지 장애라고 얘기하죠? 다섯 가지 장애가 수행상에서 아니면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느냐, 안 나타나느냐? 그게 나타난다고 할 것 같으면 아직 범부중생인 것이고,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억눌러진 것이면 문제가 다르지만 그렇지 않고 아예 나타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할 거 같으면 이미 성자의 길에 든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구분하기 쉽죠?

 

그냥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일상생활 할 때든 수행할 때든 ‘사마짜리야’,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하는 것이 선한 것들만 일어나지 불선한 것들은 일어나지 않는 상태라는 겁니다. 티끌만큼도 그 불선한 마음들, 여러 가지 종류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할 것 같으면 ‘응 그래. 나는 인제 선정에 들었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것 말고도 구분하는 기준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각각의 나라에서는 그것들을 측정하는 기준들을 각각 둡니다.

어떤 경우에는 질투하고 인색한 것들이 일어나느냐 안 일어나느냐? 그런데 실제로는 예류과 하고는 관계없는 겁니다. 질투와 인색함이라고 하는 것은 성냄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류과에 도달하더라도 성냄은 항상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이 남에게 영향을 줄 정도, 남에게 언짢고 싫은 것을 가지고 그것들이 미운 마음이 일어나게끔 하는 것은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엄밀하게 볼 것 같으면 인색함과 질투라고 하는 것이 예류과하고는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측정하는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것들이.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측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분이 어떤 길을 걸어왔느냐, 쉽게 말하면 신수행을 해왔느냐, 법수행을 해왔느냐에 따라서 측정하는 방법이 조금씩 다릅니다.

 

여러분은 대부분은 법수행자라고 보면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물론 스님을 통해서든 아니면 경전을 통해서든 그걸 듣고 ‘옴마! 좋은 거!’ 이렇게 마음을 탁 먹고 ‘그래! 내가 저거 한번 따라 해봐야지!’ 하면서 그대로 따라 할려고 하는 것, 그러면서 그렇게 따라 해보니까 ‘어, 진짜 부처님 말씀이 맞네!’ 그리하니까 나에게는 성냄이나 질투심이 일어나지 않고, 그렇게 또 수행을 해보니까 그것들을 제거하는 방법도 알고, 이런 식으로 계속 진행되어나가는 것, 그걸 쉽게 말하면 법수행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신수행자는 어떤 거냐 하면, 만약에 내게 안 좋은 무슨 일이 있다, 예를 들으면 남이 나에게 싫은 소리를 했다, 화가 확 일어나는데 부처님 생각하면 ‘아이고, 부처님! 부처님!’ 요즘 여러분들 말로 할 것 같으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면서 관세음보살 명호를 하니까 마음이 고요해지고 성냄이 확 가라앉았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싫은 마음이나 아니면 안 좋은 마음들이 일어날 것 같으면 그런 식으로 제거를 해나가게 되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더 강해지게 되는 거라. 그 방향으로 계속적으로 해나가는 경우를 신수행자라고 간단하게 보시면 됩니다.

 

후자의 경우는 드물죠? 아마 조금 드물 겁니다. 있는가? 있기는 하겠죠, 게중에는. 그런데 그런 신수행자가 될려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부처님에 대해서 부처님 일대기는 읽었을지 몰라도 부처님에 대해서 확고하게 믿음을 가지는 것은 사실은 힘이 듭니다.

언제든지 나는 부처님을 버리고 기독교를 믿을 수 있습니다. 또는 나는 언제든지 여기 빤냐와로 스님 버리고 다른 스님한테 갈 수가 있습니다. 나는 언제든지 테라와다 불교 버리고 대승불교 할 수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단 몇 퍼센트씩은 다 존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아예 차단돼버리고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탁 확신이 들었을 때, 그러한 상태에 있는 자를 '신수행자'라고 하게 됩니다. 신수행자의 범위는 굉장히 넓죠?

 

법수행자도 마찬가집니다. 법을 듣고 환희심을 일으켜서 그것에 따라서 실천하고 하지만 항상 그게 잘 되는 것은 아니죠? 그런데 진짜 잘 돼가지고 자연스럽게 내가 수행할 것 같으면 사띠가 이루어지게 되고, 자연스럽게 모든 대상들을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볼 수 있게 되고, 이렇게 됐을 경우에는 그걸 '법수행자'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실제적으로는 법수행자와 신수행자가 성자의 길에 들기 위해서는 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을 때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법수행을 해야 되고 신수행을 해나가야 됩니다. 그 길을 따라.

그래서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아라한에 이르는 것은 한번에 아라한과에 이르는 것은 없다." 그래서 부처님이 경전에 뭐라고 하느냐면 "차례차례 배우고, 차례차례 실천해서, 차례차례로 그 도와 과로 나아가는 것, 그렇게 해야만이 최고의 지혜를 완성한다"하고 경전에는 써져있습니다.

한 번에 확 다 이루어지면 여러분들이 과거생에서 그래도 공덕들을 많이 쌓았거나 또 그런 조건들을 타고 났든지 하겠지만, 대부분은 그게 힘이 듭니다.

 

장로스님들, 옛날에 스님이 공부할 때 그런 얘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인제는 부처님 당시 때 같이 부처님 말씀 한 번 듣고 수다원에 이르는 것, 그거는 끝났다" 하고 얘기합니다. "끊임없이 듣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실천하고 해야만이, 그것도 일생에서 겨우 수다원에 이를동 말동한다. 그것도 사실은 힘들다!" 하고 장로스님이 우스개소리로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해야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단지 그게 법을 통해서 수행하는 것이든, 믿음을 확고하게 해서 수행하는 것이든 그 어떤 방법이든 그것들은 한만큼의 이익들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지금 현재 내가 설혹 성자의 계열에 들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한만큼의 이익은 틀림없이 나에게 가져오게 된다는 것은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아까 얘기했지만 법수행자든 신수행자든 오력의 균형을 맞추고 오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안됩니다. 쉽게 말하면 법수행자라 해가지고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수행자라 해가지고 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내가 알아차림이 없이 사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찌 보면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품이나 성향에 따라서 구분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보면 크게 그렇게 차이 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수행이 무르익은 사람들은 어떨 때는 사마타 수행을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위빳사나 수행을 하기도 합니다. 그걸 자유롭게 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린다.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만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가 있고,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고 할 때 변하는 성품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수행의 대상인 것이지, 그 수행의 대상을 넘어서지는 않는다고 판단들을 합니다. 그럼 내가 몸이 안 좋고 몸이 피곤하다 할 것 같으면 사마타의 방법으로 몸을 안정시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많이 피곤하지 않다 그럴 것 같으면 사마타를 계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더욱더 변하는 성품들을 알아서 그것들이 무르익도록 위빳사나 수행 방법으로 해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밖에서 봤을 때는 그게 표가 안 납니다. 사마타를 하는지 위빳사나 방법으로 하는지. 그런데 본인은 분명하게 그걸 압니다. 법수행을 하는지 신수행을 하는지는 그 사람 본인이 분명하게 알지만 실제로는 수행이 무르익으면 그것은 큰 의미는 없어지는 상태가 됩니다.

단지 그게 법수행을 하든 신수행을 하든 그 수행은 욕계의 차원으로 하는 적은 없다는 거라.

 

-신수행의 과정은-

예를 들어봅시다.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고 있다. 그럼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알아차릴 때는 그냥 숨을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만 아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코의 느낌으로 아는 법이 없습니다. 코의 감각으로 그걸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에 사마타 수행을 하면서 코의 감각으로 그걸 알아차리고 있다, 그럴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사마디가 무르익지를 않습니다.

왜 그럴까? 감각을 통해서 대상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신 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는 제거된 상태에서 마음의 문만 열어놔 놓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숨을 들이쉴 때는 들이쉰다고 분명하게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내쉴 때는 내쉰다고만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그것은 코의 감각이나 안·이·비·설·신 이 다섯 가지 중 어떤 것도 관계가 없이 하게 됩니다.

그럼 의문(意門)만 열려서 그 대상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이때도 아직은 욕계차원입니다.

 

그런데 언제 그러면 욕계차원에서 색계차원으로 넘어가지냐 하면,

그러한 호흡이 항상 일정해서 내가 알아차리는 마음과 호흡이 일치가 됐을 때, 그때는 의문(意門)조차도 일어나지를 않게 됩니다.

마음은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만 몰입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여섯 가지 문으로부터 벗어나서 사마타 수행을 오롯이 하게 될 때 그때만이 색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실제로 그때가 제1선정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에 이게 까만색입니다. 사마타 수행 40가지 중에서 까만색을 가지고 수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까만색을 처음엔 어떻게 해야 돼요? 눈으로 보고 해야 됩니다. 그러면 육근 중에 하나에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눈을 감고도 까만색이 오롯하게 될 때는 육근 중에 다섯 개는 닫혀버리고 의문만 열려있는 것들이 됩니다.

그런데 그 까만색이 가만히 있으니까 변하기도 하고 확장되기도 하고 또는 그것이 코앞에 있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이렇게 됩니다. 그리할 때도 어떤 경우든지 의문은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런 니밋따들이 한참안 진행되다 보니까 내가 까만 것들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까만 것이 오롯하게 되는 상태가 돼야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여기 우리 김기식 교수님을 보더라도 김기식 교수님이 전부 까매. 모든 것이 대상을 보면 전부 까만 것으로, 모든 대상들이 까만 것으로 됐을 때, 그럴 때 욕계의 차원으로부터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변해가는 것들', 그래서 니밋따를 할 때는 그걸 관찰대상으로 삼지마라 하고, 거기에 관찰 대상으로 삼음과 동시에 그래도 비슷하게 사마디 쪽으로 흘러가려고 하는 마음이 탁 깨져버리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부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처음에는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하겠지만, 문에 있는 대상을 보고 부처님을 떠올리고 나중에는 그것들을 마음으로 일으켰는데 그것들이 온갖 작용을 해가지고 부처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고 뭘 하기도 하지만 그걸 대상으로 삼지 않고 그냥 '부처님' '부처님'만 했을 때 부처님이 오롯하게 됐을 때, 그때 인제 사마디의 문이 처음으로 열리기 시작을 하게 됩니다.

그게 신수행의 과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법수행은 호흡을 통해가지고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봅니다.

그런데 볼 때 어떻게 봐요? 호흡이 변하는 걸 보죠? 들이쉴 때 호흡이 어떨 때는 길기도 하고 어떨 때는 짧기도 하고 처음엔 그리하더라도, 처음에는 그렇게 알던 것이 들이쉬는 호흡이 ‘이게 변하네’, 그래서 들이쉬는 숨도 들이쉬었다가 뭔가 멈췄다가 다시 또 들이쉬었다가 멈췄다가 이런 상태가 계속 지속되고 합니다. 그럼 어떠한 경우든지 그냥 있는 그대로 그걸 그대로 관찰하면 됩니다.

그러다가 이 변하는 것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변합니다. 그래서 그 변하는 것들이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그것이 어떨 때는 '고통스럽게' 다가오기도 하고, 어떨 때는 그것이 ‘아, 참 무상하구나’ 하고 알아차리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나라고 하는 것이 진짜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걸 또 알기도 하고.

탁 그렇게 알았을 때 그 사람은 선정이 아니라 예류도에 들어가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장애없이 오력의 힘이 균형이 갖춰진 상태에서 하나의 대상에, 육근을 통한 것들이 제거된 상태에서 욕계의 마음만 존재하게 됐을 때 선정으로 들어가는 사마타 수행을 하게 되는 거고,

오력과 다섯 장애가 없이 수행을 해나갈 때 대상이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알아서 분명하게 그것을 보게 될 때 수다원부터 해서 아라한까지 이르게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그게 대체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선정과 도와 과가 그렇게 대체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예류도, 예류과에 이르는 준비과정은 사마타의 과정과 위빳사나의 과정은 사실은 동일합니다.

그게 간단하게 얘기한 신수행과 법수행의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해야 될 일은 뭐가 있을까?

수행에서 균형을 맞추도록 하는 것.

그리고 어떠한 경우든지 장애는 반드시 제거를 하라.

그리고 강제로라도 아니면 억지로라도 사띠는 반드시 있도록 하라.

그게 여러분들이 도와 과에 이르는 길이다 하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교재를 천천히 읽으면서 물론 경전에 있는 것들을 추려가지고 했기 때문에 조금 딱딱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아직은 이 과정에 이르지 않은 분들이 많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수행해나가는 데는 이게 여러분들에게 길잡이가 되니까 자주 읽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만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