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예류과에 이르는 길_법수행과 신수행-후편 (20171020. 대구)

담마마-마까 2022. 5. 11. 09:00

https://youtu.be/mwXQhc9EEZM

* 예류과에 이르는 길_법수행과 신수행-후편 (20171020. 대구)

(3:50 이후부터 녹취하였습니다.)

 

오늘은 스님이 목이 조금 안 좋아가지고 짧게 하겠습니다.

여기 법수행과 신수행 부분도 있기는 있는데, 여러분들이 생각하듯이 법수행과 신수행이 간단한 것이 아니고, 그리고 내가 믿음을 가지고 수행을 해나간다고 또는 그냥 위빳사나 수행이나 사마타 수행을 한다고 해가지고 법수행자나 신수행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것을 저번 시간에 분명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괴로움이 생겼다, 정신적인 괴로움이든 육체적인 괴로움이든 아니면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한 괴로움이든 외부적인 괴로움이든 이런 괴로움이 생겼다.

어떻게 해결해나가요?

보통 그게 두 가지 타입들이 있습니다.

부처님한테 열심히 매달려가지고 기도하는 방식, 아니면 또 그런 괴로움이 아니라도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 아들 대학 합격이라든지 뭐라든지 아니면 돌아가신 분 좀 더 좋은 세상에 갔으면 하는 그런 원하는 게 있다, 그리해도 부처님한테 매달려서 기도를 하는 것, 그게 보통 일반적인 방법의 하나입니다.

강한 소망을 가지고 부처님에게 매달려서 이런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고 이러한 소망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들입니다. 첫 번째 방법.

 

두 번째 방법은 어쨌든 그런 괴로움도 항상 있었던 게 아니고 형성된 거잖아. 뭐로 인해 생긴 겁니까? 내가 마음으로 만든 것이든 아니면 육체로부터 일어난 것이든 외부에서 일어난 것이든 어쨌든 일어난 것들이라는 거라. 새로 생겨난 것들이라는 거라. 생겨난 것은 부처님은 반드시 멸한다, 소멸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생겨난 거니까 언젠가는 소멸한다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러고 나서 마음을 고요하게 해서 그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을 괴로움이라고 느끼는 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니까, 그 마음을 관찰해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것.

보통 이렇게 두 가지 패턴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불교에서는 선호하지를 않습니다.

두 번째 방법이 일반적으로 불교적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첫 번째 방법이든 두 번째 방법이든 무엇 때문에 그럴까?

일어나는 것들,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 아니면 원하는 것들, 그것들이 이루어지고 그것들이 사라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들이 사라진 경지는 어떤 경지라? 해탈·열반의 경지입니다. 괴로움이 완전하게 소멸돼버리는 것,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방법은 사라졌기는 사라졌는데 또 비슷한 것이 또 나타납니다. 계속적으로 다른 것들이 이것 끝나고 나면 또 다른 것들이 대상이 나타납니다. 여러분들 살아가는 것들이 비슷할 겁니다. 뭐하나 문제 있어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또 여기서 문제가 생기고 또 문제가 생기고 끊임없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일시적으로 소멸은 됐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다시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두 번째 방법은 거기도 마찬가지로 또 문제들이 생겨나는데, 사실은 보면 강도가 그전보다는 약해져 있다는 거라. 생겨난 것이 강도가 약해지고, 또 좀 지나고 나서 생겨난 것들은 보면 더 강도가 약해지고, 나중에는 그런 것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인제는 별로 신경 쓰이지를 않게 되는 상태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마음이 그마만큼 성장을 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방법을 불교에서는 권장하고, 그게 불교적이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법수행과 신수행도 그와 조금 닮아있습니다.

스님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신수행도 물론 예류과에 이르는 방법 중에 하나이지만 되도록이면, 법을 이해하고 법을 실천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해탈·열반으로 나아가는 길들을 추천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뭔가 열반을 아니면 해탈의 끝자락이라도 조금이라도 맛을 보고 나면 사실은 마음이 백팔십도 확 바뀌어버립니다.

그러기 위해서 순서를 알려드릴테니까 한번 잘 기억해놓았다가 그 순서대로 할려고 해보십시요.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든 아니면 밖에서 일어난 것이든 나하고 관계된 것들, 그 모든 것들은 무상한 것이다 하고 항상 관찰하라."

괴로움도 무상한 것이고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무상한 것이고, 내가 항상 눈에 보고 마음속에 담아두고 나보다도 더 아끼는 자식이라든지 뭐 물건이라든지 하는 것들도 모든 것들은 항상 무상하다는 생각을 항상 잊어서는 안됩니다.

항상 그래서 무상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러한 대상들을 자꾸 대할려고 해야 되고, 그 대상들에 대해서 내가 항상 좋은 방향으로 인도할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할려고 하면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들이 뭐냐면, 말하는 것들을 많이 바꿔야 됩니다.

내가 말을 하더라도 이게 때가 맞는지, 이게 첫 번째 부분입니다. 때가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해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때가 맞도록 하는 것이 좋고, 화가 일어났을 때 얘기해서는 안 되는 거고, 아니면 그 사람이 듣기 싫을 때 얘기를 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딱 때가 맞아야 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내가 저 사람에게 뭔가 도움을 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나무라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 그러니까 그 말에는 도움이나 이익을 주기 위한 것들인지 하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말을 하는데 내가 자애를 지니고 하는 것인지, 자애가 없는 말은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됩니다.

 

적어도 말하는 것에서 이 3가지만 잘 유의해서 하다 보면, 그래도 말하는 습관들이 조금 더 많이 바뀌어지게 됩니다.

내가 말을 하더라도 그렇게 말한 것들에 대해서 보답이나 대가를 바라게 될 거 같으면 안 되죠. 제행은 무상한 것인데 무상한 것은 흘러지나가버리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강물이 쭉 흘러갔으면 여기 있던 물은 흘러가버리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한 것에 대해서 대가를 바란다고 하는 것은 그걸 붙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그렇게 말하는 것에도 무상하다는 성품을 항상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내가 설혹 선한 행위를 했다, 저번주 일요일 날 까티나 행사를 했다, 선한 행위를 했다, 선행에 대해서 보답을 바랄 것 같으면 이미 그거는 불교적인 것들을 벗어나버리게 됩니다. 행위는 반드시 그 결과를 낳습니다.

그건 내가 바라고 안 바라고에 관계없이 반드시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거는 여러분이 관할할 부분이 아닌 것이지, 여러분이 바란다고 되고 안 바란다고 해서 안 되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 뭐가 남느냐면 지금 여러분들이 그걸 결과를 바란다고 하는 것은 까티나에서 선행을 한 것들하고는 관계없이, 새로운 악한 의도들이나 악한 마음들을 품어서 그 결과들을 또 받게 된다는 겁니다. 그거는 항상 명심을 해야 됩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항상 모든 것들은 무상하다는 것들을 기본적인 것으로써 딱 두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여러분이 화를 내고 욕심내고 아니면 감정들이 일어나고 하는 것 그게 향하는 것이 어디라? 분노가 향하는 것이 어디라? (수행자 : 바깥 대상) 그게 밖에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분노는 여러분들이 일으켰으니까 여러분들이 낸 거잖아. 만약에 설혹 저사람이 뭘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화를 확 내면 화내는 게 저 사람한테 미칠 거 같죠?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분노가 향하는 곳은 자기 자신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 향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설혹 자기 자신한테 향한다는 걸 인식을 못하고 하더라도 저 사람에게 화를 확 내고 나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탐·진·치를 일으켜가지고 그것들에 대해서 만족하는 법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저 사람이 그것으로 인해서 조용해질 수 있고, 마음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일인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부분은 어떠한 경우든지 찾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만족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서 탐·진·치가 아니라 선한 것들이 일어났을 때 만족을 얻을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나쁜 게 향하는 것도 자기 자신에게 향하고, 만족하는 것들도 얻을 수 없고, 그리고 또 하나는 탐··치를 일으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어떠한 경우든지 집착을 하게 됩니다.

집착을 계속적으로 하게끔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계속적으로 윤회의 괴로움은 되풀이 돼야 된다는 거라. 두 번째가 그 부분을 항상 염두에 두라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는 앞에 두 가지가 되고 나면, 그다음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 대상을 무상·고·무아로써 자꾸 관찰을 할려고 해야 됩니다.

관찰해보니까 화가 일어났는데 1번 2번에 따라서 화를 일으키지 않고 ‘어, 화가 일어났네’ 하고 관찰을 해보는 거라. 그럼 화가 싹 사라지고, ‘아, 참 무상한 게 맞구나’ 하게 되고.

어떠한 경우든지 세 번째는 자기 스스로 그것을 확인하는 습관들을 자꾸 들여야 됩니다. 말로써 ‘무상하다’ ‘그 화는 자신에게 돌아온다’, 관념적으로만 배우지 말고, ‘화를 안 내니까 내가 당연히 그것을 관찰하면 사라졌으니까, 그것이 나에게 돌아올 것이 없어지는구나. 내 마음은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영향을 받지 않게 되는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게끔 되는 겁니다.

그게 세 번째 부분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을 정확하게 자꾸 관찰하도록 해야 됩니다.

관찰이 잘 되어나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면, 그게 순식간입니다.

이게 수행을 많이 한 사람에게만 그런 것들이 아니고, 수행을 전혀 안 한 사람도 이것들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순식간에 탁!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 대상으로부터 착 벗어나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일시적인 해탈'이라는 겁니다.

수행을 통해서든 아니면 이러한 순서에 따라서, 그 대상으로부터 탁 벗어나게 되면 마음이 아주 개운합니다. 꼭 밤하늘에 요즘 가을이니까 구름 한 점 없는데 보름달이 또롱또롱또롱하게 탁 빛나고 있듯이, 탁 그런 느낌이 일어나져버립니다. 마음이 그런 것처럼 느껴져버립니다. 그게 바로 '일시적인 해탈'이라고 얘기합니다.

'따당가 위뭇띠(tadaṅga-vimutti)' 그렇게 얘기합니다.

 

지금 현재는 수행을 많이 했든 작게 했든 간에 이 순서에 따라서 살아갈 때는, 마음은 어떤 경우에든 욕계마음 입니다.

선정의 마음이라든지 무색계의 마음이라든지 해탈의 마음이라든지 이런 것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욕계의 마음인데, 욕계의 마음에서 번뇌가 일시적으로 딱 중지돼버리면, 그게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완전하게 착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아마 가끔씩은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들은 해봤을 겁니다. 그런데 오래는 안 가죠? 그래서 일시적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한번 탁 그러고 나서 다시 또 돌아오는 거라. 저 사람에게 화를 안 내고 분명히 (1950----) 탁 그런 경험을 했는데, 찰나 간에 또 저 사람이 보이면 분노가 확 일어납니다. 그게 번뇌가 완전히 제거된 게 아니고 일시적으로 정지된 것입니다.

번뇌가 일시적으로 정지되어도 그런 경험들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또 자꾸 훈련을 하는 거라.

 

그래서 다시 또 화가 일어나면 ‘어, 내가 화가 일어났네’ 하면서 또 관찰을 하게 되고, 그럼 또 그런 경험들을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이걸 반복적으로 자꾸자꾸 할 것 같으면 일시적인 해탈이 중복돼서 자꾸 그런 경험들을 하는 거라.

그걸 '중복된 해탈'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거라.

'윅캄바나 위뭇띠(Vikkhambhana-vimutti)'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하다 보니까 번뇌가 당분간은 안 일어난다는 거라. 그러니까 찰나 간에 탁 억눌려진 상태가 아니고, 지속적으로 계속 눌렸다가 또 일어날려고 할 것 같으면 또 눌리고 또 눌리고 하니까 그 눌리고 있는 동안에는 당분간에는 안 일어나고 마음은 참 좋다 하는 거라.

이거는 꼭 욕계의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선정에서도 일어나는 것들이고, 그래서 욕계 색계 무색계에서도 이것들이 일어나집니다. 나중에 선정에 대한 걸 설명할 때 이 부분을 조금 더 얘기하겠습니다.

 

그렇게 계속해나가다 보면 그다음에는 마음이 인제는 번뇌가 딱 끊어졌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것이 다시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그것이 자꾸 눌리고 불리고 하면은 이 번뇌라는 것의 속성이 어떤 거냐면 자기 자신보다 힘이 센 사람에게는 그것이 안 일어나집니다.

여러분도 자리를 굳건하게 딱 지키고 있으면 아무리 다른 사람이 와서 이 자리를 뺏을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약하면 강한 나를 이기지 못합니다.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당연히 이 자리에 올려고 하는 마음을 버려버리고 포기해버리게 됩니다. 번뇌의 속성이 그런 겁니다. 강한 상태가 있으면 그것들은 거기에 침투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본인은 압니다. ‘어, 이제 저거는 나한테는 안돼’ 나는 저거보다는 훨씬 쎄다는 거라. 그래서 저거는 인제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게 뭐냐면 ‘아, 인제 그 하나는 번뇌가 다른 거 다 끊어지는 게 아니고 적어도 그 하나는 인제는 나하고는 관계없이 나에게는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는 걸 분명하게 압니다. 그게 성냄에 대한 것이든, 아니면 밥 먹는 것에 대한 것이든, 아니면 욕심부리는 것에 대한 것이든, 아니면 기도해갖고 뭔가를 해결할려고 하는 마음이든, 어떤 것이든 여러분들은 적어도 그 하나씩들은 아마 끊어진 것들이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테라와다 불교만 정확하게 알아서 어느 정도만 익혀나가더라도, 점보고 하는 것은 참 의미가 없다 하는 걸 분명하게 압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겨도 점보려고 하는 마음이 안 일어나는 거라.

그걸 '정단 해탈'이라고 그럽니다. '사뭇체다 위뭇띠(samuccheda-vimutti)'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거 하나는 적어도 탁 떨어져나간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적으로 하다가 보면은 그렇게 떨어져나가는 것이 점점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본인이 ‘아, 내가 어느 단계에 있다’는 걸 분명하게 탁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걸 '빠띠빳삿디 위뭇띠(paṭippassaddhi-vimutti)' '안식 해탈' 그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어느 단계에 있다는 걸 분명하게 알아서 그 밑에 거는 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해도 아직은 도와 과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계속적으로 지속해나가면 이제는 완전하게 번뇌가 끊어졌다는 걸 압니다. 그걸 여러분들이 보통 그런 얘기를 많이 하죠? '지혜의 검으로 짤라버렸다.' 탁 짤리는 게 보입니다.

그걸 '출리 해탈' '닛사라나 위뭇띠(nissaraṇa-vimuttīti)'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탈출해버렸다.

쉽게 말하면 번뇌가 완전히 끊어졌다고 하는 것은 이 윤회의 세계로부터도 탈출했다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세 번째 열반을 경험하는 것으로 인해서 이렇게 해탈도 순차적으로 이루어지게끔 됩니다. 그런데 세 번째 것의 단초는 뭐냐 하면 견해가 바로 서야 됩니다. 견해가! 견해가 바로 서지 않으면 세 번째 것은 출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견해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부단하게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간단하게 얘기해서 이게 여러분들이 세 가지 방법으로 적어도 자신이 부처님 법을 만난 기쁨을 맛보는 「열반을 체험하는 과정」이라고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법을 수행하는 자를 따를 자는 없습니다.

오늘은 그걸 얘기할려고 한 것은 아닌데,

 

수행은 사실은 순서가 있습니다.

수행의 기법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수행의 기법 중에는 심념처 수행을 한다든지, 수념처 수행을 한다든지, 법념처 수행을 한다든지 그것은 '수행의 기법'입니다.

기법의 부분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나아갈 방향들을 잃어버리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법을 자꾸 마음에 두지 말고 그 수행의 순서에서 내가 지금 똑바르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자꾸 자신이 체크를 해야 됩니다.

 

스님이 추천하고 싶은 것은 경전에 써있듯이,

계율을 지키는 것들이 우선이 돼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은 습관적으로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그다음에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항상 고요하고 평온하고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마음이 요동하지 않는 마음들을 자꾸 가질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경전대로 견청정들이, 지견청정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견해가 똑바로 서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사마타 수행을 하든 위빳사나 수행을 하든 수행에 뛰어들면 결과들이 진척이 빠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걸 하지 않고 수행의 기법만 가지고 자꾸 할려다 보면, 계율도 무시해버리고, 마음의 청정도 자꾸 무시해버리고, 그러면서 자기는 수행기법만 따르다 보니까 남들하고 다툼도 자꾸 많아지게 되고 이런 거라.

 

어느 정도 마음이 청정해지고 견해가 어느 정도 서고 나면은, 수행에서 집중하는 훈련들을 자꾸 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분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선정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들을 경험하지 않고는 위빳사나 수행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은 분들은 차라리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 어떠한 대상에도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가볍게 하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대상을 먼저 볼려고 하지 말고!

 

대상은 그 이후에 아주 잠시잠깐 보더라도 얼마든지 빨리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들을 자꾸 우선적으로 해야 되고, 그러면서 집중하는 훈련들을 가끔씩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내가 소리만 듣겠다 하고,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가 됐으면 ‘내가 소리만 듣겠다’ 하고 집중하는 것을 할 것 같으면, 내가 보고 있고 냄새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한테는 그 소리밖에 안 들리게 되는 거라. 보이는 게 하나도 없고 냄새 맡는 게 없이 소리만 오롯이 들리게 되는 거라.

스님이 법문을 하고 냄새가 있고 하더라도 ‘나는 보기만 하겠다’ 할 것 같으면 스님만 오롯이 보이게 되는 거고, 소리는 하나도 안 들리고.

 

그게 마음이 고요하고 청정하게 돼있는 상태에서 집중하는 힘이 생겨날 때 가능해지는 거라. 평상시 때도 그렇게 훈련을 해야 됩니다.

설거지 할 때는 설거지 하는데 집중하겠다 할 것 같으면 설거지 외에는 전혀 몰라야 됩니다. 자꾸 그렇게 훈련을 해야 됩니다.

마음이 새로운 마음이 일어났으면 생각이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저쪽 대상들이 보인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 닦고 있는 그것만 보이게 되는 거라.

평상시 때 그런 훈련들을 자꾸 해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걷고 있을 때는 설혹 내가 부딪치는 한이 있더라도 걷는 데만 마음을 두도록 해야 되고, 좌선하고 앉아있으면 대상이 있으면 대상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대상 외에 다른 것들은 전혀 안 일어났고 이 세상에 없는 것이라고 치부할 정도로 그 대상만 오롯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의 대상만 분명하게 보려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게 뭐냐면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게 위딱까(vitakka)와 위짜라(vicāra) 입니다.

대상이 있고, 대상에 대해서 바르게 겨냥을 해서 그것에 대해서 집중하는 것.

그것이 있으면 금방 그것들을 관찰을 하게 됩니다. 알게 됩니다. 설거지 하면 설거지 하는 걸 분명하게 알고 있는 상태에서는, 설거지 하고 있는 걸 분명하게 압니다. 소리만 듣고 있을 거 같으면 그 소리를 분명하게 듣게 됩니다. 사띠의 힘에 따라서 그 소리의 들리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뿐인 것이지, 들리는 것은 분명하게 들립니다.

기억하는 것이 달라지고 또는 그것을 이해하는 폭들이 달라지고 또는 그걸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아는 것들도 달라지고 하겠지만, 처음에는 완전하게 그렇게 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분명하게 들리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게 뭐냐면 수행에서 보통 그러한 훈련들을 자주 해나가면 대상을 관찰하고 대상을 아는 것들이 자유롭게 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들리는 것만 들을려고 할 것 같으면 진짜 들리는 것만 들리고, 다른 건 아무것도 나하고는 관계없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태가 되게 됩니다.

 

삼매를 체험하는 첫 번째가 이겁니다.

그러한 훈련들을 평상시 때 해나갔을 때, 만약에 여기 예류과에 이르는 길에 써놓았듯이 대상을 보면 대상에 오롯하게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나 이런 것들에 집중이 되는 것이 아니고, 대상만 오롯이! 분명하게 그것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순서에 따라서 자꾸 관찰을 해나가면 나중에는 사마디-삼매의 다섯 가지가 자유롭게 되어나가게 됩니다.

 

그게 위빳사나 수행을 하든 아니면 사마타 수행을 하든 그것이 기본적인 포인트라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다음에는 선정의 다섯 가지 자재에 대한 걸 조금 더 자세하게 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위빳사나로 전환하는 것들에 대한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예류과에 이르는 길」은 다 마친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조금 더 읽고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