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 전도는 확신으로부터 시작된다. (20170922. 대구)
오늘은 「불교 전도는 확신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한국에 테러와다 불교가 들어온 지도 인제 거의 십수년 이십년 가까이 돼갑니다. 물론 그전에 테라와다가 소개되고 또 수행들은 했지만, 교단으로 설립돼서 시작이 된 것은 십년이 아직 채 못되었네요. 99년에 설립이 된 거니까. 어쨌든 한 8~9년 이렇게 지나면서 보니까 참 테라와다 불교가 한국에 뿌리내리는데 힘이 드는 조건은 틀림없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도 그 기본 틀은 바꾸지 않고 또 힘이 들어도 나아갈려고 하는 이유가 그것이 맞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나가는 것들입니다.
쉽게 할려고 할 것 같으면 그냥 한국 사찰 같이 그냥 여러 가지 기도나 제사나 이런 거 곁들이면서 또 사람들에게 의식 부분에 대한 것을 제공하면서 해나가면 수월할 겁니다. 그러면 재정적인 것도 어느 정도 확보되고 당연히 신도들의 틀도 단단하게 되고 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해나가는 데는 용이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교단이 설립이 되면서 처음에 원칙이었던 것이 "테라와다의 기본적인 조건은 세계 어디든지 공통적인 것이다. 그것이 한국적인 특수한 상황이라 해서 그것들에 좌우되고 해서는 안 된다. 힘들어도 그냥 그 길을 우리는 가자!"
아직 십년이 안 됐지만 설혹 이십년 후에 우리나라에서 테라와다가 소멸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일이 아닌 것이지, 그 일을 가지고, 소멸될 것을 염려해가지고 기본적인 방침을 바꿀 수는 없다 하는 것들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돌아보니까 우리만 그렇게 어려웠던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보면 부처님도 전도-포교를 하면서 어려운 걸 많이 겪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이나 미국이나 여러 곳들에 테라와다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참 어렵습니다. 힘들어합니다. 이번 겨울에는 스님이 말레이시아 하고 영국에 한번 가볼려고 합니다. 거기서는 어떤 어려움들이 있고 그곳에선 어떻게 헤쳐나가는가? 하는 것을 보고 올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 있는 스님들하고 얘기를 해보면 참 어려운 거는 사실인데, 그래도 거기는 불모지에서 출발했으니까 오히려 좀 수월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기존에 있던 불교들하고 많이 상충되기 때문에 그 부분을 바꾸는 것이 그렇지 않고 그 부분과 따로 테라와다 불교만의 색깔로 간다는 것은 그래도 더 힘드는 부분이 아닌가 그런 생각들을 해봅니다.
부처님은 어땠을까?
부처님은 옛날에 바라문교라고 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바라문교에 대항해서 새로운 사문계급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각각의 가르침들을 펴고 있습니다. 경전에는 60여 가지의 사견이니 육사외도니 하는 것들은 그런 새로운 신흥종교집단들입니다. 각각의 새로운 종교집단이 생겨날 때, 부처님도 거기서 새로운 것들을 개척을 해낸 것이죠? 그러면서 참 어려움들은 많았을 겁니다.
인도적인 그때의 배경으로 봤을 때는 참 그래도 조건은 좋았다, 뭔가 새롭게 탐구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있었고, 알려고 하는 마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게 맞춰서 다른 새로운 것들을 주지 못하는 것들을 불교에서 주고 그것들이 생활하고 밀접하게 연관이 되면서 불교가 급속하게 퍼져나가는 그런 역할들을 합니다.
한국에서 예를 들면 테라와다 불교가 뿌리를 내릴려고 할 것 같으면, 기존에 있는 불교와 다른 어떤 새로운 대안 세력들이 사실은 거기서 생겨나야 됩니다.
지금은 기존의 불교의 대안 세력으로 테라와다 밖에는 눈에 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럼 당연히 이것은 뿌리내리기가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스님의 개인적인 생각은 새로운 어떤 종교체계들이 자꾸 좀 생겨났으면 하는 그런 바람을 가져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의 안정이나 아니면 깨달음으로 나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대안이 될 수가 있겠죠. 그런데 대부분은 그것들이 대안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도의 예를 들어보더라도 부처님 당시 때 새로운 신흥종교들은 각각의 나름대로의 교리들을 만들어 나왔습니다. 그 교리들은 또 다른 교리들이 생겨나면 서로서로 그것들을 탐구를 하고 논쟁을 합니다. "니것이 맞니, 내 것이 맞니" 하면서.
그런데 일반 대중들이 봤을 때는 그거 머리 아픕니다, 쉽게 말하면. 그것을 배워봐도 그것으로 인해서 그냥 마음이 안정된다든지 아니면 진리가 무엇인지 하는 것들을 알려고 하는데, 그것들을 안다는 보장을 못하거든. 그러다 보니까 새로운 세력들을 계속 생겨나고 있지만 그것들이 대안이 되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회계층에서는 뭔가 변화가 있어야 된다는 그런 마음들이 지속적으로 있게 되고, '아, 나는 진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싶고 나도 진리따라 살아가고 싶고 그래서 깨달음이 뭔지는 분명하게 모르지만 나도 깨닫고 싶고' 하는 마음들이 끊임없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있어야만이 그것을 찾아서 얘기를 할 경우에는 그것을 따라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러한 탐구정신들이 없으면 애초부터 테라와다 불교 뿌리내리기가 참 힘이 듭니다.
요즘은 한국에 기존의 불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서 각각의 일들을 가지고 발표를하기도 합니다. 그걸 가만히 보면 교리적인 부분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체계를 세워서 발표를 하는 경우가 있고, 또는 승단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승단을 부정하는 경우가 있고, 이런 방향으로 지금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대안으로써 형성돼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것은 새로운 세력이 등장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소모적인 논쟁만 계속 이어지는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직은 한국에 대안 세력이 자라날 토양이 안 됐는가 그런 생각을 가끔 해보기는 합니다.
바르게 되어나갈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아,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하는 것들이 분명하게 정립이 되어야 하는 거고, "그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다" 하는 것들이 분명하게 성립이 돼야 됩니다.
기존의 세력들하고 다툼을 자꾸 해나갈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것대로 놔두고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따르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하면서 이렇게 따르는 무리들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겠다 하면서 독자적인 세력들을 형성해 나가도록 만들어져야만이 하나의 새로운 세력으로써 형성이 돼나갑니다.
한국에 테라와다 불교가 들어와서 처음에 실패를 했던 이유가 뭐냐면 기존 세력에 대한 비판들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비판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거는 그것대로 놔두고, "나는 부처님 가르침을 이렇게 이해하고, 부처님은 이런 길을 가셨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간다" 하면서 그것들 보여주는 것밖에는 사실은 할 일이 없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비판으로 인해서 서로 치고받고 하는 상황으로 바뀌어버린 것들이 그 패인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도 테라와다 불교 교단이 8~9년 전부터 만들어지면서부터는 적어도 그러한 일을 줄어들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이렇게 이해했고, 그래서 우리는 이 길을 간다" 하는 세력이 생겨나게 된 거죠. 그런데 이런 것들이 여러 개가 생겨나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까 상당히 궁핍하게 형성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부처님이 45년 전도 생활하면서 “부처님 어서 오십시오. 부처님 법을 설해주십시오.” 이렇게 한 적이 있었을까?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은 “법을 설할테니 와서 들어라” 이럴 거 같으면 대부분은 안 듣습니다. 또 들을려고 하더라도 '저거 무슨 꼬투리 잡을 일이 없는가' 하고 해서 듣지, 그것을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탐구하기 위해 진리를 들을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는 경우들은 참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테라와다 불교는 그걸 그대로 따라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고 저번에도 얘기했습니다.
바른 견해가 생겨나기 위해서, 테라와다 불교가 계속해나가기 위한 그런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선 법을 들어야 되는 거고, 그리고 그 법에 대해서 스스로 마음을 기울여가지고 그걸 잘 숙고해가지고 아, 이것은 이렇게 적용이 되고 저것은 저렇게 적용이 되고 하는 그러한 숙고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야 됩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됐을 때 ‘아, 이 길을 걸어가보겠다’ 하는 확신들이 생겨나고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 때도 처음부터 법을 들을려고 하는 적이 없었습니다. 다섯 비구도 부처님이 “내가 법을 설할테니까 제발 들어라.” 세 번이나 얘기해도 콧방귀도 안 뀌었습니다. 그 뒤에 깟사빠 삼형제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에게 각각의 기적을 행하고 하더라도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했지 법을 들을려고 하질 않았습니다.
참 어려운 건데도 부처님이 그래도 지속적으로 한 것은 법을 들을 수 있는 조건이 된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찾아갔다는 거라. 봤을 때 '아, 저 사람은 법을 들을 수 있는 상태가 됐구나' 하고 알면은 초청하기 전에 부처님이 가가지고 법을 설하는 거라.
그런 걸 보면서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테라와다 불교가 한국에서 뿌리를 내릴려고 할 거 같으면 가장 주안점을 두어야 되는 것은, 바른 법을 이해하고 그것을 설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 스님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꾸 법을 설해야 됩니다.
그 법을 설하는 것들을,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든 아니면 그것들을 지식적으로 내가 알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든 어떤 경우든 자꾸 듣는 일이 생겨나야만이, 그것들에 대해서 다시 숙고할 수 있는 기회들이 생겨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법을 설하는 일을 등한시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흐름에서 그래도 이 길이 맞다고 확신하는 분들이 한 명이든 두 명이든 간에 그 법을 자꾸 설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법을 설하는 것들을 자꾸 제한을 둬버린다, 여기 온 사람 외에는 법을 들을 수 없도록 만든다든지, 아니면 법을 설하는 것들을 특정하게 상품으로 만들어가지고 돈을 주고 사야만이 그걸 보고 들을 수 있다든지, 이렇게 만들어버리면 그나마 그래도 바른 법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들이 자꾸 차단되게 됩니다.
우리 붓다야나 선원은 누구든지 회원 가입하면 법을 들을 수 있게끔 돼있죠? 누구든지 거기에 올라온 글들을 읽을 수 있게끔 돼있습니다. 그렇게 돼야 됩니다.
어떤 조건도 걸지 말고 법을 들을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부처님이 찾아가서까지 법을 설했는데 법을 듣도록은 해줘야지!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바른 방법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테라와다 선원이 그래도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테라와다 선원에서 스님과 같이 법을 설하고 있을 건데 법문이 올라오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자기들끼리만 공유를 하는 건지 아니면 법을 설하지 않는 건지 어떨 때는 참 의문이 갑니다. 아니면 과연 이분들이 한국에 테라와다 불교가 뿌리내리길 바라고 있는 건지 하는 그런 의문까지도 듭니다.
지금 한국에는 '아, 내가 좀 바른 불교를 듣고 배우고 따르고 싶다'는 그런 마음들은 생겨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와 다른 것이 별로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바라문에 대한 염증으로 인해서 신흥 사문계급들이 새로 생겨났습니다.
한국도 "기존에 하고 있는 방식·의식이나 의례가지고는 나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자명해진 사실입니다. 그러면은 바른 법을 듣고 그것을 따를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드러난 것이든 아니든 간에 곳곳에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바른 법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우리가 조금 있으면 까티나 행사도 합니다. 까티나 행사하면서 각 선원에서 분담금을 책정해서 돈을 내라 하고 강제하게 됩니다. 여기 붓다야나 선원도 작년에 얼마 분담금 교단에 냈죠? 어디든지 선원은 분담금을 내게 합니다. 어떨 때는 힘이 드는 선원들도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걸 내가지고 그 돈 가지고 과연 뭘 했나 하고 돌아봐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법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한테 법을 들을 수 있게끔 만든 건지, 그렇지 않으면 그 돈 가지고 좀 더 유익한데 쓴 것인지, 아니면 그냥 다음을 위해가지고 보관을 하고 있는 건지, 한번 이제는 돌아봐야 될 시기가 됐습니다.
그렇게 각각의 분담금을 힘들어가면서 내는 이유는, 그 의식이 좋아가지고 여러분들한테 공덕을 짓게 하기 위해서만 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공덕을 지어지게는 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만 끝날 거 같으면 그것은 거기에 참가한 사람밖에는 해당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가지고 몇백만원이든 모일 거 같으면, 그 돈 가지고 법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법을 들을 수 있는 장치들을, 어떤 보시들을 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되는 것이 의식을 하는 목적입니다.
특히 올해 같은 경우에는 여기 대구 붓다야나 선원에서 까티나 행사를 합니다.
행사를 할 때 주의해야 될 것은 떠들썩하게 할려고 하지 말고, 행사를 거창하게 해서 의식에만 집중할려고 해서는 안 되고, 그 의식은 내가 공덕을 짓기 위한 방편인 것이지 그렇게 해서 공덕을 지어가지고 나오는 잉여재물들은 모든 이들에게 회향할 수 있는 조건이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냥 웃고 떠들고 먹기 위해서 그냥 단순하게 행사를 진행하면은 안 됩니다. 그래도 테라와다 교단은 그런 행사가 일 년에 몇개 안됩니다. 기도를 하기를 해? 제사를 하기를 해? 아무것도 안 합니다.
그냥 웨삭 때 붓다의 날을 기념하는 거 한 번 하고, 스님들 안거할 때 한 번 하고, 해제 때 한 번 하고, 또 까티나 때 한 번 하고, 겨우 그 정도입니다. 그래도 그렇게 해가지고 ‘아, 이러한 의식들이 다르다’ 하는 것만 머리에 두지 말고, 그러한 것들을 하는 이유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법을 널리 펴기 위해서 무얼 해야 되는가 하는 것들을 주목을 해서 해나가면 됩니다.
그래서 붓다의 날 이런 때도 물론 특정한 집단에 보시를 해서 그분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도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좋은 일들은, 법을 무제한적으로 들을 수 있도록, 들을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들입니다. 그것 같이 좋은 것들이 아마 없을 겁니다.
법은 어떠한 경우든지 듣도록 해줘야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부처님의 전도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 "불교가 확산되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그 밑에 적어 놓았습니다.
여러분들도 테라와다의 소중함을 알면 이 부분을 좀 더 눈여겨보고 그래서 가슴에 새겨서 ‘아, 우리도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되겠다’ 하는 마음들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수행하고는 조금 먼 부분이기는 합니다.
첫 번째가 「탐구 정신」 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인도에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들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그런데 기존에 있는 바라문들은 특정한 계층을 만들어서 자기들만이 그러한 의식을 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을 행하는 것들은 재산이나 명예나 이런 것들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을 한 것이지 일반대중들에게 진리가 뭔지를 알려주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습니다.
"율장은 스님들만 보는 책이다" 이렇게 한정해버리면 그것은 바라문의 사상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율장은 부처님이 설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설해놓았을 때는, 경·율·론을 설했을 때는 그것을 누구든지 보도록 만든 겁니다. 그래서 스승에게 비밀스럽게 감추어 놓은 것들은 없다 하고 얘기했습니다. 누구든지 이것을 보도록 한 것이지 출가한 스님들에게만 해당되도록 율장을 한정 지어놓은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 때, 그것들을 알려고 하는 마음들이 생겨날 때, 진리에 대한 것들을 열심히 얘기를 하고,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그게 실제 부처님이 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라문과 반대된 사문 계급들이 각각의 사상들은 설파했지만 생활과는 동떨어져버립니다. 또는 자기들만의 축제가 돼버립니다.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진리를 발견한다든지, 아니면 마음이 고요해진다든지, 아니면 탐·진·치가 소멸된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더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 부처님이 얘기한 것이 '진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들이 불교가 확산되는 첫 번째 요인이 됩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조금 진리를 알려고 할 때 바른 진리를 전해줄 수 있는 것, 이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두 번째가 「개방된 진리」 라는 것입니다.
개방되었다 하는 것은 쉽게 얘기하면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특별한 것들이 없습니다. 특별하게 불교신자가 되기 위해서 오계를 지킨다. 오계를 지킨다 해가지고 사회생활을 저해한다든지 아니면 사회생활을 못 한다든지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수행을 한다 해가지고 일상생활을 못 해나간다든지 이런 것들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안 되는 것들이 뭐냐면 바로 이 부분들입니다.
일상생활에서는 오계를 안 지키다가 절이나 선원에 오면 오계를 지키고, 일상생활에서는 수행을 안 하다가 절에 오면 수행을 하게 되는 거고, 일상생활에서는 법을 듣는것을 등한시 했다가 절에만 오면 법을 듣는 것, 그건 개방됐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방됐다는 것은 어떠한 조건들이 없다는 뜻입니다. 시간이라든지 장소라든지 아니면 여러 가지 조건들이 하나도 걸리는 것이 없이, 어느 때라도 그 진리를 실천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행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자꾸 이분법적으로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강제하기 위해서 여기 붓다야나 선원도 매주 금요일은 요 선원에 와서 법문 듣고 수행하고 합니다. 그거조차도 안 하면 일상생활에서 안 하니까 그러는 거라. 그런데 그걸 하는 이유는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게 해나가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사띠를 배우는 것은 일상에서 사띠를 하기 위한 겁니다. 여기서 법을 듣는 것은 일상에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겁니다.
조건이 따라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나만 할 수 있는 거라든지 특별한 것들을 만들 경우에는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불교가 사회에 퍼질 수 있는 것은 개방돼있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어느 때 어떤 상황이든 그곳이 어느 곳이든 그 진리를 따라서 실천할 수 있고, 그 진리 따라서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세 번째가 「믿는 것이 아니라 납득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믿을려고 하면 안 됩니다. 얼마 전에 스님이 "부처님 가르침도 의심을 해보고, 그 가르침이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을 해봐라." 이렇게 얘기하니까,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진리인데 진리를 어떻게 의심을 하느냐?” 이렇게 얘기합니다. 본인에게 진리여야 되는 것이지, 진리인 줄 아는 사람은 의심은 안 합니다. 그런데 진리인 줄 모르는 사람은 의심을 해봐야 됩니다.
"에히 빳시꼬(Ehi passiko)!" 와서 보고 확인하라 했지, 와서 믿으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무조건 와서 믿으라고 부처님이 얘기한 적이 없다는 거라.
앞에 두 가지 조건이 되면은 그것들에 대한 확신이 생겨납니다.
'따타가떼 삿당 빠띨라바띠(tathāgate saddhaṁ paṭilabhati)'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듣고, 들으면 따타가따(tathāgata) 여래(如來)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법은 듣는 것이 우선이 됩니다. 들어야만이 그것들에 대해서 숙고를 해보고 ‘어, 이것이 맞는가 틀린가?’ 하는 마음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아, 이게 맞다!’ 싶으면 그것들에 대해서 믿음이 생겨나고 그 믿음 따라서 내가 ‘아, 이렇게 실천해봐야지’ 해가지고 실천해보니까 ‘어, 진짜 맞네!’하고 확신이 딱 들게 되는 거라.
그러면 그 길에 대해서 벗어나는 것이 없이 계속 그 길을 가게 됨으로 인해서 부처님이 궁극적으로 얘기한 진리를 분명하게 발견하게 된다는 거라.
그렇게 될 경우에 바른 견해가 생겨나게 됩니다.
바른 진리를 분명하게 듣고 그것에 대해서 심사숙고 해서 그 길을 따라가게 될 때 견해가 확립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들이 힘들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됩니다. 무조건 믿어가지고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처님을 믿어라?!" 뭐로 가지고 증명할 거라?
"부처님 가르침이 진리다?!" 뭐로 가지고 증명할 거라?
부처님이 살아온 길을 보고, 그래서 그것들에 대해서 숙고를 해보니까 ‘아, 부처님이 간 길이 맞구나! 그래서 저분은 내가 믿을 수 있어!’ 하고 마음이 들 때 믿음이 생겨나는 거라.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서 그걸 듣고 그것을 실천을 해보니까 ‘어, 맞네!’ 그래서 확신이 생겨나면 그 가르침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게 되고 확신이 들게 되고.
부처님도 믿지 말고 부처님 가르침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확신을 가지도록 하는 것들이 우선이 되는 것이지 무조건 믿음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아물리까 삿다' 라고 그럽니다. 근거가 없는 믿음은 불교에서는 용인되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근거는 뭐를 가지고 만듭니까? 그걸 듣고 자신이 실천해봤을 때 자신 속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기둥과 같이. 그래서 그런 기둥이 생겨났을 때는 비바람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믿음이 있는 자는 흔들림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무조건 믿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확신이 들 때 흔들림이 없이 되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조건 믿고 따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들을 납득해서 확신이 들 때까지 어떠한 경우든지 의심을 해봐도 괜찮습니다.
또 그것들에 대해서 토론을 해봐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테라와다 불교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가끔 기독교 믿는 목사님들을 만나서 얘기하면 "자신은 아직도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의문을 가진다" 하고 얘기합니다. 왜 그럴까? 거기서는 먼저 믿으라고 그럽니다.
"신이 있다?!" 신이 있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도 먼저 믿으라고 그럽니다. "영혼불멸 할 수 있다?!"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영혼불멸 한다, 불멸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사실을 증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믿음은 확립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수십 년이 되어도 "내 신앙에 대해서 의문이 든다" 하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불교하고 다른 종교하고의 차이점이 바로 그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믿으라고 한 적이 없다는 거라. 바른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리고 테라와다 불교를 따르고자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들이 확신이 들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영혼불멸 한 것은 없다, 영혼불멸 한 영혼은 있다" 그거 아무리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확신이 들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냥 믿을려고 하지 말고 확신이 들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네 번째가 「이승에서 확인된다.」
저승이 아니라 바로 이번 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러분들에게 내 손에 금덩어리가 있으니까 나를 따르면 이 금덩어리 주겠다 얘기하면 따를 수 있겠어요? 아마 이성적인 사람이면, 상식적인 사람이면 안 따를 겁니다. “보여봐봐. 보여봐야 내가 너를 따르든지 안 따르든지 하지, 보여주지도 않고 할 거 같으면 그걸 따를 수 있겠어요?”
그런데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반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안 보여주고도 사십구재 지내면 극락왕생한다, 극락을 보여줘 봐야지. 극락에 가봐야 증명할 수 있는 건데, 증명 안 되는 것들을 가지고 그걸 그냥 믿습니다. 그러면서 그걸 그냥 따라 합니다. 49재 지낼 때 얼마만 내면 극락으로 보내줄게. 예수님 믿으면 천국에 간다, 그거하고 다른 게 뭐가 있어요? 지금 여러분들에게 그게 확인이 안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바른 불교는 아니라는 뜻이라.
부처님이 말을 할 때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말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말을 해보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나쁜 마음 품는 마음도 적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성내는 마음들도 안 생기고,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거라.
그래서 '나는 말을 할 때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말을 해야 되겠구나!' 확인됐으니까 그것은 지금 이생에서 바로 확인된 겁니다.
그렇게 계속 노력을 하다 보면 내가 계속 이 길을 따라가다 보니까 '어, 이런 확신이 들었다!' 하는 거라. 확신이 한번 든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그다음 단계로 또 넘어갑니다. 확신은 점점 더 강화돼나갑니다.
그래서 흔들림이 없는 상태가 딱 돼버리고 나면 그때야 예류과에 듭니다.
그런 예류과에 드는 것은 경전에는 다섯 가지로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확신이 들었을 때 그런 예류과에 들 수가 있고, 또는 계율을 잘 지켰을 때, 또는 가르침을 많이 듣고 해서 그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했을 때, 또는 수행을 열심히 해가지고, 또는 지혜가 일어나가지고 부처님 가르침을 일상생활에 활용할 수 있게 됐을 때, 그런 다섯 가지 상황에서는 예류과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이 확신이 들어서 그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자기 것이 되어야 됩니다. 자기 것이 되어서 그것이 일상에서 그대로 행해지게 될 때 가능한 겁니다.
계를 지키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된다든지, 아니면 법을 듣는 것들이 항상 일상생활화돼서 법을 듣고 있다든지,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이 가능했을 때 나는 인제 흔들림이 없게 된다는 거라. 그게 바로 이승에서 확인된다는 뜻입니다.
이승에서 확인이 되는 것들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늘 분명하게 확인을 해야 됩니다. 또 내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일 확인을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확인하는 확신들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강화돼나가야 됩니다. 그럴 때 '아, 내가 부처님 가르침 따라 참 잘 살아가고 있다' 하고 분명하게 자기 자신을 위안 삼을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다음 세상을 목표로 하지 마십시요! 이생에서 그것들을 여러분들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여러분이 스스로 알게 됩니다.
그 외의 이유로써 부처님과 제자들의 생활 습관, 이것은 바꿀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출가한 스님들 오후에 먹지 마! 또는 출가한 스님들은 경제적인 것들, 사찰의 재정문제 일절 관여하지 마!" 그건 이미 정해진 겁니다. 생활 습관들은.
그걸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아, 그래도 참 부처님이나 부처님 제자들 훌륭합니다. 잘 합니다” 하면서 불교를 믿을려고 한다는 거라. 그거 안 하면 안 따라간다는 거라. “너는 말은 뻔지르르하게 하면서 너는 욕심은 다 부리고 있고, 그대로 행하지도 않는데 내가 너를 왜 믿느냐?” 합니다.
테라와다 불교를 할려면 그것들은 전제조건입니다. 지금 힘이 들어도 그걸 따라가게 됐을 때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해서 희망을 볼 수가 있게 됩니다.
그다음에 부처님의 설법의 방법.
스님이 말하는 것들, 법문하는 것들 어렵지 않죠? 어렵게 얘기하면 안 됩니다. 못 알아들어버리면 그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법문이든 가슴을 적셔가지고 ‘아, 내가 이렇게 노력해야지’ 마음이 일어나고, 실천할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된다는 거라. 부처님 설법 방법이 그런 겁니다.
보시에 대한 얘기를 하더라도 “돈을 내라” 하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보시하면 너는 이런 훌륭한 성품을 지니게 된다 하고, 이러한 깨끗한 마음을 지니게 되고, 그래서 너는 더욱 더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인해서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냥 무조건 “돈 내라” “계 지켜라” 이러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누구든지 알아들을 수 있게끔 부처님은 법을 설했습니다. 일곱살짜리 어린아이들에게 대하든 아니면 칠십 된 어른들에게 하든 그분들에게 맞게끔 법을 설한다는 거라. 이것이 반드시 전제조건이 돼야 됩니다.
그리고 사람의 어떤 질문에도 정중하게 대답하는 태도.
정중하게 대답한다는 것은 그 대답에 대해서 지금 현재의 상황에 맞게끔 그냥 대답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그걸 양성이라 그러나, 뭐라 그러지? "동성애를 인정하느냐?" 부처님 가르침을 분명하게 알고 이해하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좀 높은 자리에 있는데, 다들 동성애를 부정하고 인정하는 걸 거부한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내가 부처님 가르침을 어겨가면서 침묵을 할 거라? 아니면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 거라?
진리는 어떠한 상황이 되어도 설혹 내가 몽둥이 맞고 내가 해침을 당해서 내가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진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누가 “아프다, 괴롭다”고 할 거 같으면, 같이 울어주는 것이 진리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봐봐라. 네 자식만 죽나? 다른 사람들도 다 죽지? 그걸 가지고 슬퍼하느냐? 그게 다 무상한 것이다” 하고 얘기해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게 위로가 안 될지 몰라도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정중하게 대답을 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어떠한 경우든지 왜곡하지 말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의 견해로써 진리를 전할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문제에도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상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 해결책은 반드시 있게 됩니다. 단지 그게 시간이 걸리고, 또 그것을 지금 당장 못 받아들이는 경우는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다른 해결책이 있어서 다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때는 그 해결책밖엔 없습니다.
그다음에 시대를 거쳐도 가르침이 낡지 않는 것,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이나 시기에 따라서 그 진리가 바뀔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모든 생명에 대해서 자애를 실천하는 것.
모든 말하는 것, 행동하고, 마음 가지는 것들은 자애를 가지고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일상의 삶의 방법이 모두 부처님 가르침에 다 있다 하는 것.
이런 것들이 합해져서 인도에서 불교가 널리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반드시 여러분들도 명심을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 범주를 벗어날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뒤에 부분은 한번 쭉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빨리 바른 견해들을 가지고, 그리고 바른 방법으로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말하는 것들이나 행동하는 것들이나 이런 것들에서 바르게! 그래서 그런 것들 모든 것들을 사띠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걸 「법의 요소」 라고 그럽니다. 법의 요소가 확립이 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 법의 요소가 확립이 돼야만이 여러분들이 추구하는 진리를 볼 수가 있습니다. 도와 과에 이를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자! 그래서 이번 포인트는
• 불교의 전도·포교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 다른 종교는 믿음·신앙의 세계입니다.
• 불교는 신뢰감이 생겨서 납득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 불교는 진리를 발견하는 세계입니다.
불교는 단지 그냥 믿음 만 가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 하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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