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까티나 축제 법회_구별과 차별 (20171015. 대구)
조금 전에 사사나 스님이 "공양물을 올릴 때 사띠를 가지고 올리는 분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분명하게 구분을 할 수 있더라" 하고 얘기했습니다.
만약에 스님이 악한 감정을 품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구분을 했는데, 이 사람은 사띠하는 사람이니까 조금 더 자애의 마음을 내고, 이 사람은 그냥 사띠도 안 하고 있으니까 뭐 축복해주는 걸 해주지 않고,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게 밖으로 드러나겠죠?
그런데 사띠를 지니고 있으면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뭘 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심지어 저 사람이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조차도 보입니다. 한번 알아맞춰 볼까? 신통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한국말로 쉽게 얘기하면 "구별"하는 겁니다.
"이거는 이렇고 저거는 저렇다." 구별은 그래서 크게 나쁘지는 않죠? 그런데 구별하고 나면 거기서 그치면 좋은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걸 "차별"하게 됩니다.
차별을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스님하고 여러분은 다릅니까? 같습니까?" (수행자 : 같습니다.) 우째 같노? 나는 이 가사를 입고 있고, 여러분들은 이 가사를 안 입고 있는데? (수행자 : 다릅니다.) 다르죠?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 내가 뭐 여러분들보다 눈이 한 개 더 있어요? 코가 한 개 더 있어요? 그건 아니죠? (예) 똑같은 조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나도 늙고 병들고 죽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구별하는 것은 '저분은 스님이고 나는 일반 재가자다' 하는 것은 분명히 구분은 하는데, 그런 외형적인 걸 빼고 나면은 크게 뭐 ‘니나 내나 뭐 다를 거 없지’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똑같이 ‘나도 늙어가고 병들어가고 죽음을 맞듯이 저분도 그럴 것이다’ 하는 마음을 지니게끔 됩니다.
적어도 여기까지만 하면 크게 "자아"라고 하는 것이 개입을 안 합니다.
단지 구별하는 것들만 있으면 이렇게 되는데, 하나 더 질문해볼게요.
"스님이 수행이 높습니까? 여러분이 수행이 높습니까?"
(수행자 : 당연히 스님이 높습니다.)
이게 문제가 뭐냐면 여기서부터 발생을 하게 됩니다.
스님이 수행이 높다? 확인해봤어요? 단정을 하고 있다는 거라. 여러분이 스님이 수행이 높은지 어떤지 아니면 뭐 다른 것들이 뛰어난지 어떤지, 확인을 해보지도 않고 없다고 어떻게 얘기하고, 나는 낫다고 얘기할 수가 있어요?
아까까지는 "자아"라고 하는 것이 크게 문제가 안 됐는데, 이제부터는 이 "자아"가 문제가 돼버리는 겁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스님같이 안돼.’ ‘스님 한 것보다 오히려 내가 더 높을 수도 있어.’ 아니면 ‘나도 열심히 노력하면 똑같이 경지에 갈 거야.’ 이렇게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처음에 질문을 할 때 "스님과 여러분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하고 할 때 어떤 사람은 "같다" 하고, 어떤 사람은 "다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같다고 보는 사람들은 출가한 스님이 잘못을 했을 경우에는 그 잘못에 대해서 크게 부각을 시킬려고 합니다.
또 스님하고 다른 사람하고 다르다고 구분하는 사람들은 “뭐 스님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지”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똑같은 일을 벌였는데도 그렇게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차별과 구별」에 대한 것은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싶어서 이렇게 꺼냈습니다.
서두에서 얘기했지만 구별하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차별하는 것에서는 문제가 생겨나버립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다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래서 본인에게 맞는 것들을 해나가도록 하는 것이 바른 방법이기는 합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럽니다.
“스님, 사마타 수행을 해야 될까요?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될까요?”
스님 입장에서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출가한 스님이면 사마타 수행을 하고 나서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하는 것이 맞다." "여러분들은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린다. 차라리 어느 정도 사마타를 할 수 있는 마음의 안정만 가져온다고 할 것 같으면 바로 위빳사나로 해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조건과 스님들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구별"해서 수행법을 지도를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두 부류 어떤 부류든지 먼저 닙바나에 이르는 것은 장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바르게 불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을 "차별"해버리게 될 거 같으면 문제가 생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죠? 어느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합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동일합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 죽을 수 있어”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것도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 중심이 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고 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의 가장 사랑하지 않는 걸 버려버리고 ‘너를 사랑하겠다느니, 너를 위해 죽는다느니’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한 성격이 윤회를 하면서 여러분들은 계속적으로 굳어져왔습니다. 과거생부터 지금생까지 계속, 앞으로 윤회한다 할 것 같으면 앞으로도 계속 그리할 겁니다. 살아있을 동안에는.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마다 성향이 드러나집니다.
쉽게 얘기하면 좀 잘난 체하는 사람, 또는 다른 사람들한테 친근하게 대하면서 같은 사람으로 대할려고 열심히 노력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조금 뭔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도 못하다, 가진 것이 없다’ 하고 마음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될까? 똑같은 것들을 대하더라도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자기애」라고 하는 것이 「자아」로써 변질 된 상태가 됐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자아가 드러나는 것이 조금 전에도 세 가지 부류로 들어서 얘기했습니다.
"나는 너보다도 뛰어나, 나는 너하고 비슷해, 나는 너보다도 더 못해." 열등감에 빠져버리고, 이렇게 드러나져버립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차별"하게 되는 겁니다.
아까는 그냥 "구별"하는 정도만 있었는데 이제는 "차별"하는 것으로써 드러나져버리는 겁니다.
한번 여러분들 보십시요. 구별만 하고 끝내는 사람 있어요? 없습니다.
구별을 했으면 반드시 차별하는 것으로써 넘어가져버리게 됩니다.
왜 그럴까? 「자아」라고 하는 것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이 개입되지 않으면 참 좋은데 요놈이 딱 개입돼버리니까, 이게 자기보다 높고 낮고 비슷하다는 식으로써 딱 차별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테라와다 불자가 맞습니까? 대승불교 불자들보다도 더 좋습니까? (예) 이게 차별인 거라! "다르다"고 해야지, "좋습니다"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여러분은 대승불교 불자와는 다릅니다. 까티나 의식도 다르고 의식하는 것도 다르고 뭐가 다 다릅니다. 수행법도 다르고. 그렇게 구별을 할 수는 있을지언정 구별로 인해서 내가 너보다 더 뛰어나다? 나는 이게 더 좋다? 너는 좋은 거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걸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럼 그거는 진리가 아니라는 거라.
그것은 차별인 것이지 구별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구별은 실재하는 것이지만, 차별은 누구에게든지 동등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감정에서 일어나는 것뿐입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만 알아차릴 것 같으면, 적어도 차별하는 것까지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그걸 안 하니까 차별을 하게 됩니다.
아마 오늘 또 지나고 나면 틀림없이 SNS나 무슨 까페인가 뭔가 하는 것들, 뭐라 그래요? (밴드) 아, 밴드에 저들끼리만 볼려고 딱 만들어놔가지고, 그런데다가 막 자랑질을 합니다. "나 이런 거 했다." 조심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하지 마라 하는 것이 아니고, 조심해야 되는 것이 뭐냐면 ‘나는 이런 것들을 했다’는 구별하는 마음을 가지고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남에게 보이고 드러내고 차별하기 위해서 해가지고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고, 또 누구든지 태어났으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하는 것들은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 이런 차별이 참 많습니다. 세상에는. 여러분들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테라와다 불교, 대승불교 구분하면서 차별하게 되고, 인종을 구분하면서 차별하게 되고, 또 민족 간에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게도 또 스님과 일반 재가자 아니면 유명인 연예인과 일반인, 구별을 하면서 자꾸 차별을 하는 것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되도록이면 그런 마음들을 적게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아'라고 하는 것은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룬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어느 누구든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조금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라도 그런 구별을 자꾸 안 할려고 하는 습관을 가져야 됩니다.
구별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나는 차별하는 것들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부처님이 출가를 하고 나서 왜 바라문교에 들어가서 수행자가 되지 않았는지 아세요?
바라문은 어떤 겁니까? 머리에서 툭 태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럴까? 다른 사람들과 차별하기 위한 겁니다.
"나는 바라문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바라문의 경전들 보지마! 나만 알고 나만 독송할 거야! 의식 집행하는 것은 우리들끼리만 할 거야!"
인도에 카스트가 생겨난 것은 그래서 생겨난 겁니다.
부처님이 봤을 때는 그런 형태를 띠고 있는데 가서 수행할 거 같으면 당연히 거기에 그냥 물들게 되는 것이지, '모든 이들이 다 평등하고 모든 이들이 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사상으로는 발전할 수가 없다고, 그래서 새로운 사상들인 사마나-사문 계급들에 들어가서 수행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보니까 이 모든 것들을 포용할 필요가 있었다는 겁니다
.
바라문 사람들도 자기를 구별하든 차별하든 간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을 지니고 있는 거고, 사문 계급들도 마찬가지고, 그냥 일반 대중들도 마찬가지고.
이 모든 대중들을 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가르칠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여러분들 아까 빨리어 경전 독송할 때 빨리어로만 하지 않고 한글로 뒤에 독송을 했죠? 자기가 알아들을 수 있어야만이 그것을 이해하고 따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빨리어를 씁니다. 빨리어는 자기들이 쓰는 언어라는 것입니다.
특정한 지역에서만 쓰고 아니면 특정한 계층에서만 쓰는 언어가 아니라, 일반 대중들이 쓸 수 있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네가 만약에 일본 가서 법문할 거 같으면 일본말로 해도 된다. 미국 가서 할 거 같으면 영어로 해도 된다. 하고 부처님이 허용을 하게 됩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빨리어를 사용하는 계기가 되게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시대 때도 산스크리트어를 쓰자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다른 데서는 다 산스크리트 고급언어, 쉽게 말하면 궁중 언어, 「진지드셨어요?」 아니면 임금님한테는 뭐라 그래요? (수랏상) 임금님한테 '수라 드셨다'고 그래요? 뭐 이렇게 쓰는 용어들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다 이해하고 알아듣는 용어가 아닌데 조금 고급스럽기 때문에 그 고급스러운 언어가 쉽게 말하면 바라문교의 성전들입니다. 리그베다를 비롯한 4 베다라고 하는 그 성전들입니다.
후대에 가서도 빨리어가 나중에는 궁중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산스크리트라는 것 자체가 특정계층을 위한 언어입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의 모태가 된 언어들은 나중에는 특정인 계층만을 위한 것들로서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 제자들은 진정한 바라문이 될 목적으로 수행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바라문이 쓰는 언어라든지 바라문이 형성된 카스트라든지 이런 것들은 부정하지만, 그걸 그대로 차용을 합니다. 부처님은.
왜 그럴까? 저분들도 동등하게 깨달음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바라문이라는 용어를 바꾸어버리게 됩니다. 특정한 계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브리흐마나라고 하는 것은 사무량심을 지니고 항상 그것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브라흐마나라고 해서 바라문입니다."
계급으로 인해서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또는 특정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청정히 하고 사무량심을 항상 닦는 사람들이 바라문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청정히 하고 또 깨달음으로 향해서 나아간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이 바로 바라문이 됩니다. 출가를 했든 출가를 하지 않았든 아니면 어떤 직업에 있든 아니면 가난하든 부자이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용어 자체를 부처님은 변형시켜버리게 됩니다.
구별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차별하진 않는 것들을 가르친 겁니다.
만약에 부처님한테 조금이라도 자아의식이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산스크리트어를 쓰라고 했을 것입니다. 또는 특정한 스님들만을 위한 교단으로 만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는 거라.
하나 더 묻겠습니다. 남을 구별하고 차별해보니까 좋습디까? (수행자 : 안 좋습니다.) 왜 안 좋아요? 내가 너보다 뛰어난데 좋지. 당장은 좋은 것같이 보이지만 본인도 그러한 거를 계속 가질려고 할 것 같으면 힘들어집니다. 남한테 부자인 것처럼 계속 보일려고 한다? 내가 너보다 뛰어나니까? 얼마나 힘들어? 그걸 유지할려고 하면.
그래서 마음에서는 끊임없이 번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거짓말을 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전환을 한다든지, 부처님 가르침하고 어긋난 것들을 계속적으로 하게 됩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가 여러분들에게 자아의식을 강화시켜준다는 걸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마음이 항상 고요하고 청정하게 되도록, 마음이 선한 마음들을 품어서 선한 말을 하고 선한 행위들을 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별하는 것을 넘어서 차별하는 것으로써 바로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나쁜 걸 알면 그것은 버려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다르다는 걸 인정을 해줘야 됩니다. 스님하고 여러분들은 다릅니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다르지만은 다른 걸 인정하고 나서, 그것들에 좋은 것이 있으면 내가 따라갈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들로 인해서 차별하는 것으로써 바뀌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자아라는 것이 생겨나는 것들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들이 차별로 바뀌지 않게끔 하는 결정적인 것이 뭐냐면 행위입니다.
선한 행위를 하느냐? 불선한 행위를 하느냐? 선한 말과 선한 행위와 선한 마음을 품었을 때, 그러한 행위들은 차별로 넘어가지 않게 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여러분들은 구별하는 것이 차별로 넘어간다는 걸 이해를 하고, 항상 그러지 않기 위해서 사띠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마음에서 번뇌가 일어나서 마음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면서 ‘아, 이렇게 부처님 법을 만난 것은 참 행복하구나’ 하는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더욱더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덧붙여서 오늘 대구 붓다야나 선원에서 까티나를 했는데, 스님이 전혀 관여를 안 했습니다. 그래도 참 여법하게 잘 치뤄냈습니다. 처음 해본 건데, 처음 해보죠? 붓다야나 선원에서는? 다른 사람들 도움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또 말리까님을 비롯해가지고 여기 붓다야나선원 식구들이 그래도 여러분들을 따뜻하게 먹이고, 스님들한테 공양올리기 위해서 노력한 겁니다.
이런 날을 그래서 '까티나 찌와라 뿌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축제와 같은 기간이다! 하는 겁니다. 먹고 마시기 위한 축제가 아니라, 부처님 말씀을 되새기고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행복하게 되는 그런 날이 되도록 하고, 다같이 수고하고 고생하신 분들께 "사-두" 세 번 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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