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성자는 속박을 끊는다. (20171110. 대구)

담마마-마까 2022. 6. 8. 12:33

https://youtu.be/4R4JaJcZaR0

* 성자는 속박을 끊는다. (20171110. 대구)

 

오늘은 「성자는 속박을 끊는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의 일화부터 얘기할게요.

여러분은 오늘 스님한테 탁발공양 올렸죠? 부처님 당시 때도 그런 분들이 많았습니다. 매일 부처님이 탁발을 나가서 농부가 있는 논을 지나서 가면서 농부에게 한마디씩 얘기를 하고 가게 됩니다. “잘 지내십니까?” “열심히 하십시요.”

매번 그 길을 지나가니까 농부도 ‘아, 내가 그래도 부처님이 지나가시고 하는데 내가 공양을 한번 안 올려가지고 되겠나’ 그래서 공양을 한 번 올리겠다 해가지고 “부처님 내일 저희 집에 오십시요. 공양청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스님들이 공양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면 탁발하는 것, 나가서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들을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아와서 먹는 것, 그걸 "탁발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또 다른 방법이 하나가 뭐냐면 지금과 같이 공양청을 했을 때 가는 것, 공양청을 하지도 않았는데 가서는 안 되는 거고, 공양청을 할 때 가는데 그때는 혼자를 공양청을 할 때도 있고, 다섯 명을 할 때도 있고, 아니면 그 선원에 있는 스님 전체를 다 청할 때도 있고, 그것은 형편에 따라서 다르겠죠.

그래서 스님들 직책이 정해지게 됩니다.

 

반드시 선원이 있으면 스님들 직책 중에 하나가 뭐냐면, 스님들의 식사 공양청이 오면 그 순번을 정해가지고 보내는 것들을 하는 직책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1번부터 3번까지 갔다 그러면 다음에는 다섯 명을 청했다면 4번부터 8번까지 가도록 순번을 정해놨는데, 딱 그대로 되는 게 아니고 공양청을 하는 사람이 “스님, 이번에는 진용스님을 반드시 오도록 해주십시요” 이럴 것 같으면 그거는 들어주어야 되는 거라. 그럼 거기에다 진용스님을 끼워 넣고, 다음 순번에서는 진용스님을 빼야되니까 셈이 복잡합니다. 그래서 그걸 담당하는 스님이 반드시 존재를 하게끔 됩니다.

 

스님들이 공양을 하는 방법이 이렇게 딱 두 가지가 있습니다.

스스로 끓여 먹고 하지는 못합니다. 그 대신에 이렇게 탁발한다든지, 아니면 누가 “스님, 공양하십시요” 해가지고 차려놓고 공양을 하도록 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서는 그게 참 힘들죠? 그래서 편법이 생겨난 게 뭐냐면 "조리돼있는 음식을 데워먹는 것은 허용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햇반 같은 것, 아니면 국 다 조리돼가지고 포장되어 있는 것, 그거는 그냥 데워가지고 먹으면 되거든. 그거는 직접 내가 조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리"라는 것은 생쌀이든 아니면 나물 같은 것을 자기가 다듬어서 만들든 이런 것들을 얘기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래서 라면 같은 것도 조리된 것으로 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지금 테라와다 상가에서는 허용한다 하고 공포가 돼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스님들이 먹는 것 가지고 일부러 맛있게 먹을려고 자기가 조리해 먹을 필요는 현대 사회에서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옛날에 그 없는 상황에서도 그렇게 하고 살았는데, 지금 현재 괜한 핑계 대가지고 편하게 밥 잡술라고 한다, 그럼 그건 게으른 거지, 그렇게 밖에 이해가 사실은 안 됩니다.

지금도 스님은 탁발공양 안 올리는 날은 햇반 데워먹습니다. 햇반에다가, 냉장고는 일주일에 한번씩 사람들이 와서 터치를 하게끔 해주거든. 일주일을 넘길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럼 냉장고에 있는 반찬 그릇 채 꺼내가지고 그냥 덜어가지고 먹지도 안 해. 그냥 그릇채 먹고 그대로 다시 냉장고에 넣어버리고 이렇게 합니다. 한끼 먹는 게 그렇게 힘든 게 아니거든.

적어도 먹는 것으로부터는 해방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되는 거고.

 

옆길로 샜는데, 어쨌든 부처님께 내일 공양청을 오라 하고 청을 하고 나서 있었는데, 그날 밤에 홍수가 나가지고 논에 벼를 타작해야 되는데 그 논에 벼가 전부다 쓸려내려가 버렸어요. 하나도 남김없이 돼버렸어요.

그다음날 부처님이 공양청이 있으니까 가서 그 집에 가보니까 그 농부가 울고 있거든. 그래서 왜 우느냐 하니까 사정이 이렇게 됐다 하면서 부처님한테 공양을 올릴 수가 없습니다. 아마 그런 성자들이 아닐 것 같으면 퍼뜩 일어나가지고 그날 배를 채울 데를 찾을 거라. 일반적인 사람으로서는.

 

조심해야 되는 것이 또 뭐가 있느냐면, 탁발을 나가든 공양청을 나가든지 한번 가고 나서 거기서 먹을 것이 없어서 못 먹었다 해가지고 다른 데로 옮겨서는 안 되는 거라.

그래서 한국에 참 탁발이 어려운 것들이 뭐가 있느냐면 어쨌든 열두 시 전에 밥을 다 먹어야 되는데, 탁발나가는 데를 가보면 문을 안 열어놓습니다. 시장통이 아니면. 그리고 시장통에 가서라도 한정 없이 기다릴 수도 없는 거고, 탁발을 해주는 것도 쌀이나 주지, 쌀은 출가한 스님들이 받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거는 조리를 해야 되기때문에 그거는 먹을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는 먹을 수 있는 건 별로 없어요. 어떨 땐 빵만 먹기도 하고 이럽니다.

 

그러니까 자칫 잘못 생각하면 그 탁발의 모습은 보이지만 거기서 먹을 것이 없으면 와가지고 선원에서 누군가 조리해주는 것을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그건 계율위반이 돼버리는 거라.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탁발을 나갈 때는 한국에서는 무지 긴장을 하는 거라, 스님들이. ‘야, 이거 못 얻으면 오늘 굶어야 되는데’

어쩔 수 없는 거라. 그 각오로 탁발을 나가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고 그냥 괜히 부처님 당시 때 흉내낸다고 탁발의 형식만 취했다가 나중에 와서 있는 거 그냥 먹을 거 같으면 그것은 오히려 안 나가니 보다도 못하는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계율이 위반되면 반드시 그것은 '마낫따'를 해야 되는 상황이 돼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참 스님도 처음에 한국에 와서 태종사에서 있을 때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봤거든. 탁발을 처음에는 시장통으로 가서 해보기도 하고, 도저히 너무 굶어서 안 되겠다 해가지고 이번에는 내가 요 방향으로 나가니까 신도들한테 그 방향으로 나오시요 해가지고 받아도 보고, 처음에는 그게 좀 되는 것처럼 보이더라고. 그래서 ‘어, 인제 한국에서 되겠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직은 그런 습관이 안 됐어요. 한두 달 너머 지나고 나니까 사람이 점점 없어지고 나중에는 그것조차도 안 되더라고.

 

그래서 ‘아, 이건 인식의 변화가 있기 전에는 참 힘들구나’ 그래서 할 수 없어가지고 절에 있을 테니까 “절로 탁발오시오.” 해가지고 절에 사람들이 오도록 해서 맨발로 쭉 내려오면서 탁발을 해가지고 가가지고 공양을 하고, 이런 형식을 취하기도 하고, 그것도 매일이 안 되니까 그럼 일주일에 한번씩만 해라. 나머지는 공양주가 지어주는 거, 그걸 터치해가지고 공양청 하는 형식으로 해서 먹는 형식을 취하고, 참 처음에 왔을 때는 참 고생이 많았어요.

 

그걸 계율을 위반하지 않고, 어쨌든 그 탁발을 끊이지 않게 할려고 참 많이 했는데, 그래서 여러분들도 그런 것은 고려를 좀 해야 됩니다. ‘그날 스님이 여기 나와서 탁발하면 되겠지’ 못 얻어먹으면 굶어야 되는 거라. 그 생각을 항상 해야 되는 거라.

 

부처님이 슬피우는 그 모습을 보고 그런 얘기를 합니다. 여기에서는 이렇게 비유를 했습니다.

인생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것이나 기대하지 않는 것이 돌연 일어나기도 한다.”

예측한다 해가지고 해결되는 법이 없고, 기대한다 해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갑작스럽게 바뀌기도 하고 얼마든지 변경사항이 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약속한 것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거하고 네가 우는 거하고 뭔 관계가 있느냐? 하고 부처님이 그럽니다. “왜 슬피 우십니까?”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인데 왜 그것 가지고 슬피 우느냐 하고 부처님이 물어보게 되는 거라.

 

왜 울었어요? ‘아이고, 내 쌀, 내 논’ 이미 휩쓸려 지나갔는데, 그것에 대해서 애착이 있었기 때문에 슬피 울게 되는 거라.

그걸 되돌릴 수 있을 거 같으면 애착을 가질 수도 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되돌릴 수 없는 것에는 애착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 이런 애착은 가지지 말고 내가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뭔가 하는 것을 생각해가지고 그 일을 하면 되는 거거든. 운다고 해결될 것 같으면 다 울면 되지.

그래서 부처님이 그 말씀을 하시는 거라.

"이 농부는 자기 논에 있던 벼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또 하나는 부처님 당시 때 어느 부인이 출가를 했어요. 출가를 했는데, 이미 배에 아기를 가진 상태에서 출가를 했는데, 출가를 부처님한테 바로 한 것이 아니고 데와닷따 존자가 있던 그 무리에 출가를 했어요. 데와닷따가 보니까 출가를 했는데 비구니계를 주고 나니까 배가 이미 불러져 있거든. 그래서 나중에 되면 큰일 나겠다 싶은 거라. 괜히 의심을 살 수도 있고. 그래서 쫓아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분이 나는 부처님한테 출가할려고 했지 데와닷따 밑에 출가할려고 한 게 아니다. 인도로 오다 보니까 똑같은 테라와다 스님이니까 나는 다 똑같은 스님인 줄 알고 그냥 온 것이지. 그래서 나를 부처님이 있는 곳에 데려다주시오 해가지고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갑니다.

 

부처님이 와서 보니까 배가 불러 있으니까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옷을 벗고 쫓겨났으니까 일반인의 신분으로 오게 된 거죠. 이 사실을 재가자들에게 맡기게 됩니다. 이분이 언제 임신을 했고, 어떻게 돼서 이렇게 여기까지 온 건지에 대해서 조사를 해달라 하고 얘기합니다.

재가의 몸일 때는, 재가의 일일 때는 재가자한테 맡깁니다. 그거를 스님들이 관여를 안 합니다. 그 정신 때문에 테라와다 불교에서도 운영위원회나 이런 거를 할 때는 스님들이 누가 운영위원이 되든 그건 관여를 안 합니다.

 

그 대신에 출가의 소관일 때, 만약에 이분이 출가자인 상태일 거 같으면 재가자한테 일을 안 맡깁니다. 그건 출가자들끼리 의논하도록 그렇게 합니다. 그 대신에 어차피 출가를 할 것이기 때문에 재가자들이 그걸 알아보고 그걸 계율제일인 우빨리 존자에게 얘기를 해라. 그럼 우빨리 존자가 판단을 내릴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최종적인 판단은 출가를 할 사람이기 때문에 우빨리 존자한테 맡깁니다. 부처님이 직접 하는 것이 아니고.

 

우빨리 존자에게 보고되어서, 우빨리 존자가 보니까 이미 출가 전에 임신을 한 상태라고 하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출가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하고 부처님한테 보고하니까 부처님이 바로 출가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고 나서 비구니 몸으로 아이를 낳게 되는 거죠. 아이를 낳아가지고 일정한 나이가 되니까, 아이는 다시 출가를 하게 됩니다.

 

주석서에는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 아이가 승가 내에 있을 수가 없으니까 왕에게 의탁을 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왕에게 의탁을 했든 아니면 승가 내에서 길렀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자신이 일곱 살이 될 때까지는 자기 집이 선원인 줄 알았다는 거라. 만약에 죄수가 감옥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아이는 자기 집이 어딘 줄 알겠어요? 감옥인 줄 알 거라. 자기가 갇혀있으면서 갇혀있는 줄을 모르는 곳. 그런데 선원에서 생활을 하는 것은 출가자가 하는 건데도 자신은 그것이 자신의 집으로 착각을 하게 되는 거라. 사실은 여러분들도 그런 착각들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출가를 하고 나서 스무살이 너머 돼서 한 15년 정도 지나고 나서 이분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서 아라한이 됩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비구니인 어머니가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 그래서 아들 한번 볼려고 한 15년 정도 지나고 나서 아들이 있는데 가니까, 오는데 보니까 이미 저 엄마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있는 거라. 아들을 본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데 아라한인 아들은 이름이 꾸마라 깟사빠라고 그럽니다. 꾸마라는 작다는 뜻이고 그래서 작은 깟사빠라는 그런 뜻입니다. 꾸마라 깟사빠가 보니까 어머니가 계속 저런 식으로 자식에 대한 집착이 있어가지고는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매정하게 대합니다.

 

가서 “아이고, 우리 아들” 하고 얘기를 하는데, 이 꾸마라 깟사빠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뭐하는데 나를 그렇게 집착하고 있는데?” 하는 식으로 얘기하게 됩니다. 그때 이 비구니인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아, 그래도 나는 밤이나 낮이나 저놈 생각하고 있었는데, 좀 잘되기를, 밥이나 먹고 사나 어쩌고’ 하면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만나니까 이 아들은 어머니 생각을 요만큼도 안 하고 있었거든. 괘씸한 생각이 드니까, 내가 그렇게 애지중지하고 그리워했던 얘가 그냥 단숨에 내가 애착해야 될 대상이 아니다 하는 사실을 탁 그때 깨닫습니다.

 

애착이 끊어지는 순간에 속박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식에 대한 애착은, 자식에 대한 속박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볼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서 이 비구니 스님이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분이라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은 애착해서는 안 되겠지만 뭘 의지하고 나아가야 될 거라?

그냥 범부중생이다 할 것 같으면 의지해야 될 대상이 있습니다. 부처님이나 담마나 상가를 의지해서 나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범부중생을 벗어났다? 그래도 인제는 법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무상·고·무아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그것들을 체험을 했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뭘 의지하고 살아갈까? 뭘 의지해요? 자기 자신을 의지하게 됩니다. ‘아, 내가 더 열심히 하면 저기에 목표가 보이기 때문에 나는 저기에 도달하겠구나’ 하고 마음을 먹게 됩니다.

아직은 완전하진 않지만 그래도 부처님 가르침이나 아니면 상가나 부처님이나 이런 것들을 의지해가지고 나아가겠지만, 의지하는 강도는 많이 약해져 있습니다. 그러다가 딱 수다원에 이르게 되면 인제는 의지처가 완전하게 자기 자신이 됩니다.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 중에서 다음생에서 천상세계에 태어날려고 하는 사람들, 혹시 있어요? 없어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다시 윤회하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보장을 못하는데? 어떡할 거라?

그래서 테라와다 불자들은 천상 세계에 태어나는 걸 굉장히 원합니다. 천상 세계에 오래 머무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조건에서 있다가, 다시 윤회를 하면 인간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천상이 깨달음의 차원에서는 시간적으로 거기서 있을 동안에는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려버리게 되면 손해가 될지는 몰라도, 먼 윤회의 차원에서는 오히려 다시 한 번 더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들을 원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만약에 그런 분들이 있다, 그러면 그런 분들은 "반드시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왜? 자기 자신이 행한 것에 따라서 천상에 태어나고 안 태어나고 한다는 거라. 자기가 좋은 행위하고 좋은 말 하고 좋은 마음을 썼으면, 그리고 나쁜 것들이 결과에서 나타날 것들이 적고 없으면 천상 세계에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지금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내가 막연하게 천상에 태어난다는 생각으로 하면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 그럼 그 사람은 당연히 천상 세계에 태어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더 안 좋은 상태에 처할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천상에 태어나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은, 붓다·담마·상가보다도 더 으뜸이 되어야 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신··의다" 하고 얘기합니다.

 

또 한 부류는 내가 이생에서 깨달음에 이르겠다, 해탈을 목표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 자신을 의지해야 됩니다.

자기 자신의 뭘 의지할까?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것! 사띠가 그분들의 의지처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사띠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또 부처님이 말씀하는 대로 살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 됩니다. 사띠는 누가 합니까? 스님이 대신해 줄 수 없죠? 여러분이 스스로 해야 됩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라는 거라.

 

그런 의미에서 "이런 두 부류들은 반드시 자기 자신을 의지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어쨌든 말이 좀 벗어났긴 했는데, 속박을 끊는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여러분들에게 참 어려운 말입니다.

"속박" "속박" 얘기하는데 뭘 끊어라는 얘기라? 뭐가 속박이냐?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사실은 개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만약에 '수다원에 이른 분', 아니면 '아라한에 이른 분'하고 생각을 할 것 같으면 여러분이 그걸 직접적으로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 있겠어요? 모릅니다. 그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다원에 이르지 않으면 수다원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라한에 이르지 않으면 아라한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개념은 그냥 여러분들에게 설명해주기 위한 도구인 것이고 명칭인 것이지 그것이 진리에 이르도록 해주지는 못합니다. 그것이 진리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속박"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그걸 여러 가지로 분리해서 설명을 부처님이 하는 겁니다. 너 성냄이 있어? 성냄이 있다, 성이 납니다. 그런데 나는 성이 안 난다, 성내는 것으로부터 벗어났다, 성냄으로부터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그 성냄의 속박으로부터는 벗어났다. 이러한 자는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 하고 얘기합니다.

실제로는 수다원이 뭔지 아라한이 뭔지 개념만 얘기해가지고는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뭔지 먼저 얘기합니다. "이런 거, 이런 거, 이런 것 가지고 있는 것 그거 끊어버리면 무엇이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진리를 설하고 성인의 경지에 대해서 설명할 때 그러한 방법을 동원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지 않게 되는 거라.

 

그런데 실제로는 속박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애착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 조금은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조금 전에 얘기했듯이 아들에 대한 애착, 자기 자신의 재산에 대한 애착, 왜 그럴까? 어떤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다 변하게 되어 있는 것이 진리인데, 변하는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거기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게 됩니다.

변하는 것들을 받아만 들이면 적어도 그런 애착은 생기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고.

 

왜 여러분들이 성자에 대한 것들을 이해하기 어렵느냐 하면, 여러분들은 보통 아는 것들을 가지고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눈 감고 걸어봐라” 할 것 같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 있다가 눈이 이렇게 자동적으로 뜨려고 하게 됩니다. 왜? 안 보면 불안하기 때문에.

뭘 의지하고 있는 거라? 감각기관을 의지하고 있는 거라. 살아가는 것은 감각기관을 의지해가지고 살아가는 거라. 잠시라도 뭔가 멈춰있으면 뭔가 불안하고 뭔가 잘못되는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편한 건데.

감각기관이 없는 상태에서 선정에 들면 너무나 편안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쨌든 감각기관을 의지할려고 하는 거라.

그러니 감각기관을 의지하지 않는 성인들을 감각기관을 의지하는 부류가 이해한다? 그건 있을 수가 없는 거라. 이해할 방법이 없어지는 거라. 그래서 일반 사람들이 성인을 이해하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래서 빨리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도록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그래서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미지에 도달하자.」

여러분이 속박되어 있는 것들이 뭔지, 그 속박되어 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날려고 자꾸 노력을 하라는 겁니다.

처음에 스님도 한국에서 태국으로 갔기 때문에 그 음식이 너무 안 맞습니다. 기름지고 하니까 굉장히 부담됐어요. 그래서 맨 처음에 마음먹은 것이 뭐냐면 적어도 이 먹는 것 하나 이것 자유롭게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먹어보자, 그래서 처음에는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거라.

탁발을 해온 것 중에서 그래도 우리 물김치하고 비슷한 깡통에 들은 게 있어요. 그것만 먹을려고 하고, 다른 건 너무 기름지니까 몸에 부담되니까. 또 어떨 때는 곡물 중에서 찹쌀 종류가 있으면 찹쌀 종류만 먹을려고 하고.

 

처음엔 그렇게 하는 것이 다른 것으로부터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줄 착각을 한 거라. 알고 보니까 그럼 그게 없을 땐 어떻게 할 건데? 어쩔 수 없이 그걸 먹어야 되는 거라. 그러면 내 마음에서는 그것에 대해서 좋고 싫어하는 마음이 또 확 일어나게 되는 거라. 먹는 것 하나에서 계속 그러고 있는 거라.

그래서 ‘아, 이거는 아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람들한테 "나는 망사윌랏(?) 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나는 채식주의자다." 그래서 탁발을 나가서도 “채식이 아니면 주지마라” 그렇게 거부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아니면 밥상에 차려놓은 것도 채식만 차려 놓은 데 가서 먹기도 하고. 그런데 그렇게 해가지고는 문제해결이 안 되더라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에 대한 속박하는 것들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와야 되는 것이지, 그걸 안 먹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라. 물론 그때는 몸이 빼짝 말라가지고는 그냥 힘들어가지고 어쩔 수 없이 먹은 경우도 있지만, 그래서 그냥 먹었어요. 그냥. 그것도 그걸 그냥 일일이 먹으니까 또 이게 좋고 싫은 것들이 일어나니까 그냥 다 비벼가지고 그냥 먹었어요.

한참 지나고 나니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음식에 대한 것은 어떤 것이든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져요. 그러고 나서 다시 각각의 그릇에 담긴 거, 맛있는 거 맛없는 거, 이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먹더라도 그것을 '맛있다, 맛없다'로써는 먹어지지 않게 되는 거라. 그래서 어느 순간에 탁 마음에서 일어나는 게 "아, 나는 음식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 하고 선언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지금 현재 속박돼있는 것, 자식에 대해서 속박돼있든 아니면 뭔가 애착을 가지는 물건이 있든, 그러면 정면으로 그것하고 부딪쳐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아, 나는 이 번뇌가 떨어졌다’는 거를 알게 되는 거라. 부처님이 음식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낫다 해가지고 음식을 안 먹습니까? 그건 아니죠. 그대로 먹게 됩니다. 먹게 되더라도 여러분들하고 먹는 방법이 다른 것뿐입니다.

그런 게 좋은 게 뭐냐면 그 하나가 떨어져나가면 다른 것들도 연쇄적으로 약해져 있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도 그러한 방법으로 지금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도전을 해봐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설명을 하고 너한테 만약에 분노가 있으면 분노를 끊을려고 해라. 분노를 끊고 나면 적어도 분노로부터는 해탈한 자가 된다.”

그 얘기는 뭐냐면 부정형으로 자꾸 성자의 위치를 설명을 하지만 실제로는 네가 그렇게 실천하도록, 실천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거라.

 

그런데 다른 종교들은 이렇게 부정형으로 쓰는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빠니샤드나 이런 것들을 보면 굉장히 부정형쪽으로 사용을 해서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것도 똑같은 개념으로써 부정형으로 써놓았기 때문에 실천할 수 있는 게 없어져버립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무엇입니까?” 하고 누군가 물어봤다. 그러면 부정형으로 쓰면,

“네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뭐로 가지고 그렇게 하면 실천할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천하는 것들이 없어요.

부처님한테 만약에 “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얘기할 것 같으면,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할 것 같애요?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나인데, 그것은 무상한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무상한 것들을 보기 위해서 자기가 노력을 하게 되는 거라.

‘아, 마음이 이렇게 변하고 무상한 것이구나. 몸도 이렇게 변하고 무상한 것이구나.’ 실천하는 것으로써 연결하는 것들이 됩니다. 부처님은 똑같은 부정형으로 쓰지만 이렇게 차이가 나버립니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실천되지 않는 것들이라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는 거라. 그냥 논리적인 것들만 정립이 되고 실천하는 것들하고는 관계없이 지식적으로만 많이 습득이 되는 것,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삼법인이 뭐다, 사성제가 뭐다, 알면 뭐할 거라? 그게 삼법인과 사성제와 팔정도가 어떻게 연결돼 있고, 어떻게 해야 실천하는 것이다 하는 것이 드러나야 되는 것이지, 그거 알면 뭐할 거냐는 거라.

그거는 꼭 우빠니샤드의 철학과 마찬가지가 돼버립니다.

 

사람들은 가끔씩 그런 실천되지 않는 것들을 얘기할 때 불교도 하나의 철학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거하고는 완전하게 다르다 하는 걸 여러분들이 이해를 해야 됩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좀 넘어가겠습니다.

「끊을 수 없는 존재욕구」 그다음에 「범부는 속박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속박이 오해를 부른다.」 쭉 읽어보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면 생명은 누구든지 존재욕구가 있습니다.

여러분 죽고 싶어요? 살고 싶어요? 대부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것이 뭐냐? 하고 물어보면 모릅니다. 호흡하는 것이 살아가는 겁니까? 밥 먹는 것이 살아가는 겁니까? 여러분 일상생활 하는 것이 살아가는 겁니까? 어떤 거라? 모른다는 거라. 이걸 개념적으로 자꾸 이해 해버리면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실천적으로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죽고 싶지 않고 살고 싶다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존재욕구라는 거라.

 

존재욕구가 얼마만큼 엷어지느냐에 따라서 성자의 지위는 점점 더 올라가게 된다는 겁니다. 존재욕구가 없어졌다 해서 안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살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속박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가 되더라도 그것들로 인해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받아들이게끔 됩니다.

아라한이 된 분이 누군가에게 맞아 죽었다, 당연히 번뇌가 안 일어나겠죠? 안 죽기 위해서 노력하나? 그것도 아니라는 거라. 내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그래도 한 자라도 더 법을 전해주기 위해서 차라리 죽을 때까지 법을 설하고 죽는다는 거라.

 

속박이라는 것들에 대한 것들은 애착이 있다는 것으로써 이해하는 것들이 좋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애착을 발견하자.」 자기 자신이 무엇에 대해서 애착하는 것이 많은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다음에 밑에 「10종류의 속박」에 대해서 써져있습니다.

그것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수록 점점 더 떨어져 나가는 속박된 것들을 얘기합니다.

 

"몸과 마음이 무상한 것이다" 하고 분명하게 이해를 할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항상 하는 것이 있다 하고 보는 견해는 떨어져나갑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유신견입니다. 내가 있다, 진아가 있다, 전부 유신견에 속합니다. 뭔가 영혼이 있다, 몸과 마음에 대한 걸 분명하게 이해할 것 같으면 원인·결과이고 어떠한 것들이든 항상하는 것이 없이 변하는 것들이고, 조건 따라 일어나고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뿐이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삭까야딧티(sakkāya-diṭṭhi)' "유신견으로부터 벗어났다" 하고 얘기합니다.

 

또 하나는 그것은 끊임없이 몸과 마음에 대해서 관찰해야 가능한 거거든.

붓다·담마·상가, “부처님이 완전한 분이다.” “아니야 부처님도 완전하지 않아”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을 제하고 자기가 이론을 만들려고 합니다. 아니면 부처님이 설하지 않아도 이것은 부처님이 설했다 하면서 공갈 칠려고 그럽니다. 또는 새로운 상가를 만들어가지고 내가 대장이 되겠다 하고 그럽니다.

그거는 아직 수다원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얘깁니다.

 

붓다·담마·상가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것은 붓다·담마·상가는 완전하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들입니다. 더 이상 건들지도 못하고 변경할 수도 없고, 첨가할 수도 없고, 그런 것이 붓다·담마·상가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여러분이 어찌 보면 참 보수적이다 할지는 모르지만 완전한 거는 바꿀 수가 없는 겁니다.

진리는 완전한 겁니다. 부처님은 진리에 이르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런 진리에 이른 분들이 모인 것이 상가입니다. 뭘 어떻게 바꾸고 어떻게 첨가하고 할까?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면은 그분들에 대한 믿음들이 확고하게 자리잡게 됩니다. 붓다·담마·상가에 대해서.

 

또 업에 대한 것, 내가 지으면 내가 받는 거고, 선한 일 했으면 선한 결과 받는 거고, 악한 일 했으면 악한 결과를 받는다는 거라. 깜마에 대한 것,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 다시는 의심하지 않게 되는 것, 이걸 "위찌낏차(vicikicchā)로부터 벗어났다, 의심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냥 단순하게 ‘저게 뭐 잘못한 거 없나?’ 하고 의심하는 이런 걸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에서 적어도 몸과 마음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서 ‘아, 나라고 하는 것들이 실체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변하는 성품이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되면 적어도 의심하는 것들은 사라지게 됩니다. 부처님의 담마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다음에 이 부분을 오해하기 쉬운데 계금취(sīlabbataparāmāsa)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여러분이 오늘도 "아라항 삼마삼붓도 바가와" 하고 테라와다 방식으로 그 형식에 따라서 했습니다. 그것도 계금취겠네? (수행자 :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에 오늘은 그걸 안 하고 내가 오늘은 "귀의불 양족존" 하자 해가지고 "귀의불 양족존" 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왜 테라와다 스님이 그걸 합니까?” 이런 것은 계금취의 일종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들을 어떤 카테고리를 씌워가지고 뭔가 거기에 딱 자신이 매여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계금취가 되는 거라.

 

또 수행을 하지 않고 내가 아라한에 이를 수 있다? 그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어떤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계금취 입니다. 잘못된 견해로 인해서 자기가 거기에 딱 매여있게 될 때는 계금취가 되는 겁니다.

부처님이 어느 곳에서 누구하고 싸우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견해로 인해서 다른 사람 하고 만날 비방하고 있다, 그거는 계금취에 딱 매여있기 때문에 자신의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거라.

 

그다음에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탐·진·치, 욕심을 부릴 수도 있고, 화를 낼 수도 있고, 좀 게으름 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악처에 떨어질 정도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거라. 욕심부린다 해가지고, 어떨 때는 다른 사람 거 가져오고 뺏어올 수도 있는데 그걸 가져오기 위해서 남을 죽일 정도가 된다, 그럼 그거는 악처에 떨어질 정도가 돼버린다는 거라.

화를 내가지고 저 사람하고 원수가 돼버린다, 그럼 그 사람은 두고두고 나를 원망합니다. 악처에 떨어지는 근거가 돼버린다는 거라. ‘아이고, 오늘은 수행하기 싫어’ 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계속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치가 적어도 악취에 떨어질 정도가 돼지 않게끔 되는 상태, 이러한 것들을 보통 얘기할 때 "수다원에 이르렀다" 하고 얘기합니다.

 

어려운 건 아니죠? 어려운 건 아닙니다.

그런데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과거에 머물지 말고, 미래에 머물지 말고, 현재에 붙잡히지도 말아라.

지금 현재는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뭔가가 변하고 여러분들에게 대상이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육근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게 사는 겁니다. 그러면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즉각 즉각적으로 그것을 알아차려나가야 됩니다. 그래야 몸도 무상하고 마음도 무상하다는 걸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것이 전제조건이 되지 않으면 첫 번째로 얘기한 삭까야딧티(유신견)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삭까야딧티가 없어져야만이, 그다음 것들이 엷어지면서 탁 끊어지는 걸 알게 됩니다.

 

「10종류의 속박」에 부분에 대한 걸 쭉 읽어보십시요.

앞에 다섯 가지는 수행해나갈 때, 그걸 역경계(逆境界)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안 좋은 것들이 나한테 다가와질 때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것.

 

그 뒤에 것은 어찌 보면은 참 좋은 것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순경계(順境界)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수행을 하는데 ‘빛이 보인다, 아주 행복하고 아주 좋다’ 그런 것들도 전부 다 장애들이라는 거라. 그런데 장애라고 생각을 안 하면 거기서 머물러버리게 된다는 거라.

내가 없다고 하는데 무슨 기뻐하는 것이 계속 연결될 이유가 없잖아. 그런데 그거는 나라고 하는 것들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봐야만이 그다음 상태로써 넘어가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좋은 것들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극복해 나갈 때 그걸 "순경계를 극복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는 것들이다 하고 보면 됩니다.

 

점점 더 해나가면서 무명은 엷어지게 돼있습니다. 무명이 엷어지면 밝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무명이 엷어진다"는 것은 쉽게 여러분들한테 닿는 용어로 쓸 거 같으면 "생존욕구들이 점점 더 없어진다" "집착하는 대상들이 점점 더 없어진다"는 것으로써 바꾸어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보면 의심에 대한 것 이런 것도, 여러분들한테 천신에 대해서 얘기한다, “스님이 수행할 때 천신에 대해서 보았다” 이렇게 하면 재미로 듣는다는 거라. 전부 의심의 영역에 다 속한다는 거라. 의심의 영역을 그냥 앎에 대한 의심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할려고 안 하고 계속 공부만 할려고 하는 것, 그것도 의심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다음에 생활패턴을 바꾸지 않는 것, 그런 것도 계금취에 해당이 됩니다.

그다음에 수행하면서 주관이 자꾸 뚜렷해지고 객관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거는 첫 번째인 유신견에 해당이 됩니다.

 

그러니까 수행을 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이 점점 더 겸손해지고 남에 대한 배려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자신이 수행을 똑바로 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이 세 가지를 비춰보면 보통 표가 납니다.

 

그래서 「개념으로부터 벗어난 성자의 경지」에서 개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걸 여기에 적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생존욕구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마음에서 고민, 괴로움, 두려움이나 어떤 흔들림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이게 여러분들이 과거에 붙잡히지 않고, 미래를 기대하지 않고, 지금 현재에도 집착하지 않고 사띠하면서 살아가면 여러분도 성자의 경지에 도달한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