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불만의 이해가 마음을 향상시킨다. (20171201. 대구)

담마마-마까 2022. 6. 11. 02:48

https://youtu.be/LCxqnkkwUpY

* 불만의 이해가 마음을 향상시킨다. (20171201. 대구)

 

인제 12월인데 12월 10일날 웅촌으로 이사를 갑니다. 혹시 시간 되시는 분들은 부산에서는 부산에서 짐싸고 하는 것들을 할 거고, 웅촌쪽에 와서 정리하고 하는 것들을 혹시 시간 되고 하는 분들은 와서 조금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일부러 일요일날 잡았으니까, 부산에서는 아마 아침 7시부터 짐을 싸게 될 겁니다.

아마 다음 주에는 조금 바빠가지고 대구 법회는 못 보고, 그다음 주 지나고 나서는 스님이 또 출국을 해야 되니까 이게 올해 마지막 법회가 됩니다.

 

오늘 제목은 「불만의 이해가 마음을 향상시킨다」 하는 것입니다.

'둑카'의 의미 중에서 '불안과 불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둑카를 '괴로움'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둑카의 의미는 상당히 다양합니다. 보통 크게 4가지다, 5가지다 하고 주석서에서 얘기를 하는데, 그중에서 오늘은 둑카 중에서 '불안과 불만'에 대한 것들을 좀 얘기하겠습니다.

 

살아가는 게 좀 불안합니까? (수행자 : 아니요.)

불안하지 않아요? (수행자 : 불안하지는 않은데, 불만이 생깁니다.)

불만이 생기니까 불안이 있겠죠. (수행자 : 그런 것 같아요)

누구든지 불안과 불만 없이 사는 건 참 힘이 듭니다. 그런데 “불만 없습니다. 불안하지 않습니다.” 하는 사람들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만족하고 크게 불편함이 없으니까, 또 바랄 것이 없으니까 그렇게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보통 불만과 희망을 항상 반대적으로 보게 됩니다. 희망이 많으면 많을수록 불만은 더 늘어났다는 거라. 희망이 하나 생기면 불만도 하나 생겨나게 되는 거고, 희망이 두 개 생겨나면 불만이 두 개 생겨나게 되는, 그런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거라.

희망하는 것이 더 많아질수록 불안과 불만은 자라난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희망이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포기해버려요? 삶에 대해서?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희망이 없어지면 보통 에너지들이 긍정적으로 작용을 안 하고 반대방향으로 작용을 합니다. 게으름 부릴려고 할 때도 있고, 그냥 나쁜 방향으로 파괴적인 작용들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됩니다. 어찌 보면 희망이라는 것은 참 좋은 건데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희망이 있어야만이 조금 더 노력하려고 하는 것들이 있는데, 또 반대로 불안과 불만이 생겨나게 되고, 그래서 '양날의 검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희망이 꼭 “좋다, 나쁘다” 하고 불교에서 얘기하는 것은 없습니다.

불안과 불만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좋다, 나쁘다” 하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분명하게 얘기했습니다. "불만이 있다는,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먼저 이해를 하라." 그럽니다. 그 불만이 없앨 수 있고 개선할 수 있는 것일 거 같으면 그래도 희망을 품어서 그것을 없앨려고 해야 되는 것이고, 그게 실현불가능할 거 같으면 아예 포기해버리라는 거라.

 

그럴려면 우선 불만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만이 가능합니다. 그게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과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불안과 불만 또 희망이라는 것은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좋은 작용을 하는 반면에 또 부정적인 작용도 하기 때문에 참 어떤 면에서는 딜레마입니다. 그걸 한쪽으로만 치우쳐갖고 "희망을 가지지 말아라!" "불만을 가지지 말아라!" 이렇게 얘기해버릴 것 같으면 문제해결이 안됩니다.

 

불만이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안 일어날 거 같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그리고 희망하는 것들도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항상 일어나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걸 '가진다 안 가진다' 하는 부분으로 자꾸 극단적으로 얘기해야 되는 게 아니고, 그것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를 가져야만이 문제해결을 해나간다 하는 겁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생명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많든 적든 간에 불안 불만이 있고 희망이 있다, 그걸 분명하게 알아라, 이해하도록 하라" 하고 가르치는 그런 입장이다 하는 것을 먼저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저번에 '둑카'에 대한 걸 하면서 「괴로움에 협박되어 윤회한다」 하는 부분을 한번 한적이 있습니다. '살고자 하는 것, 존재욕구 때문에 윤회를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살고자 하는 것들도 지금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날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거기에서 얘기하는 '둑카의 의미는 '괴로움'에 대한 의미로써 쓴 것'이고, 오늘 '둑카에 대해서 쓴 것은 '불안과 불만'에 대해서 쓴 것이다' 하고 이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교재를 한번 봅시다.

먼저 "나에게는 불안과 불만이 있다" 하는 걸 분명하게 먼저 이해를 한 상태에서 이 글을 읽도록 해야 됩니다. “나는 불만 없습니다.” 실제로는 있는데 불만이 있는 걸 모르는 상태에 있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를 안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하는 거라는 걸 알고, 불만에 대한 이해를 분명하게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걸 없애기 위해서 희망을 가지는 것인데, 그러한 의미에서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됩니다. 여기에도 적어놨지만 부처님이 경전에 "게으름 피우는 사람은 소와 같다" 하고 비판했다는 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나아가는 방향이나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나아간다 하면 그건 게으름 피우는 거와 마찬가지다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목표가 뭘까? 테라와다 불자들은, 태국이나 버마나 이런데 있는 분들은 목표가 분명합니다. 여러분들한테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목표가 분명합니다.

왜 이런 보시를 합니까? 왜 이런 수행을 합니까? 하고 물어보면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사악처에 태어나지 않기 위해서 그럽니다.”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그럽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그럽니다.” 그런데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그런다는 사람은 참 적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부처님이 태어나면 부처님 밑에서 수행해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그럽니다.” 목표들이 분명한 상태입니다.

또 원하는 것들이 분명하게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한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왜 불교 공부하고 왜 수행합니까? 왜 그런 거라? 얘기해봐. 그냥 좋아서 공부하는 거라? 자기가 이것을 공부하고 공덕을 쌓고 하는 이유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바르게 노력하려는 방향이 설정이 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조그만 선한 공덕 쌓았으니까, 반대적으로 나쁜 짓도 좀 해도 무마되겠지’ 이래 버릴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으면 ‘조금 뭐 쌓아놨으니까 조금 게으름 부려도 되겠지’ 이렇게 해버리게 됩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 때문에 한다는 걸 분명하게 방향 설정들을 하라는 거라.

 

저번에 「테라와다 불자의 발원문(서원)」이라고 하는 걸 한번 프린트물로 내준 적이 있죠? 그것들을 참조해가지고 하든지 아니면 자신이 고유한 것들을 정하든지 해서 방향을 분명하게 하도록 해야 됩니다.

단지 그게 내가 부처님 가르침을 많이 알고 많이 듣고 하는 것으로만 그쳐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안된다는 거라. 또는 스님이 좋아서, 아니면 테라와다 불교가 좋아서, 그냥 해나가는 방향을 그냥 따른다 할 것 같으면 그것도 안 된다는 거라.

 

분명하게 자신이 그것들을 하면서 ‘아, 내가 한 단계 또 발전했네’ 스스로 확인하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나서 좀 더 노력할려는 마음들이 일어날 수 있는 방향들을 내가 설정을 해야만이 그것이 바른 길이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일대기를 배운다든지 경전을 공부한다든지 또는 수행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그렇게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하는 걸 일단 먼저 염두에 두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게으름 부리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그러기 위해서 '삼마 와야마' 라고 하는 '정정진'에 대한 걸 4항목으로써 부처님이 정리를 해놓았습니다. 도덕적이고 훌륭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올바르게 컨트롤하며 노력한다 하는 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아, 저 사람 조금 더 나아졌네’ 하는 걸 알 수가 있어야 되는 거고, 또 자기 스스로도 ‘아, 내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네’ 하는 걸 확인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럴려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자꾸 콘트롤 해나가야 됩니다. 나쁜 거 안 하고, 좋은 거 자꾸 할려고 안 하면 그냥 대부분의 사람들은 핑계거리를 찾게끔 됩니다. 그것이 좋은 핑계이든 나쁜 핑계이든 핑계를 댄다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 하고 있는 것들을 자꾸 잊어버린다고 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이 4항목들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악행을 그만둔다.

∙지금까지 했던 적이 없는 악행은 앞으로도 하지 않는다.

∙지금 하고 있는 선행을 완성시킨다.

∙지금까지 했던 적이 없는 선행을 일으킬려고 한다.

 

나쁜 것은 안 하고 좋은 것은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성냄은 나쁜 것이다 하는 걸 이해를 할 것 같으면 성냄은 안 일으키게 돼버린다는 거라. 잠재돼있는 성냄도 제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해나가야 된다는 거라. 보시하고 탁발하고 이런 선행들은 좋은 것이다 할 것 같으면 그걸 계속적으로 할려고 해야 되는 거고, 법문 듣고 수행하는 것이 좋다 할 것 같으면 그것도 계속적으로 자꾸 해나가야 된다는 거라.

 

그러면서 자기에게 부족한 것들이 아, 내가 평온한 마음을 가지는 것, 아니면 어떤 것들에 대해서 결정해가지고 나아가는 힘이 부족하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더욱더 일으킬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그걸 완성시키기 위해서 또 다른 좋은 것들을 더 일으키기 위해서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오늘보다도 내일이 더 나아지는 거고, 내일보다는 모레가 더 나아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4항목으로 정정진을 얘기한 것을 간단하게 얘기하면 "날마다, 어제보다도 좀 더 좋아지도록 노력한다" 하는 의미입니다. 매일매일 노력하지 않으면 이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분명하게 본인이 좋고 나쁜 것에 대한 이해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에 대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오늘보다 내일이 좋아질 수가 없다는 거라.

그렇게 계속해나갈 때 내가 설정한 방향에 도달을 하게 되고, 또 그렇게 하다 보면 그 방향은 어떠한 경우든지 궁극적으로는 해탈에 이르게 돼있다는 겁니다. 지금 현재 방향이 4악처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세계에 이르는 것이든 뭐 어떤 것이든 간에 그 방향대로 해나가다 보면, 그 방향으로 인해가지고 해탈의 길들이 열리게 된다는 얘깁니다.

 

조금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오늘 삶, 또 내일 삶, 똑같은 삶 뺑뺑이 돌고 있는 거.

자신이 그것들에 대해서 '지긋지긋하다' 안 할 때는 그분은 이미 성자의 경지에 이르른 겁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단지 인제 살아있는 동안에 내가 할 일들만 한다고 그러는 거라. 완성을 했기 때문에 오늘 삶, 내일 삶이 뺑뺑이를 돌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긋지긋하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을 분명하게 해나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그게 크게 보면 윤회하는 세계 중에서 이생, 다음생, 또 다음생 넘어가면서 계속 뺑뺑이 도는 것이 참 힘들고 지긋지긋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오는 두려움들은 더 큽니다.

 

왜 불안과 불만이 생기는 거라?

‘어제보다 오늘이 못하면 어떻게 할까?’ 그런데 그런 불안이나 불만들은 반드시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윤회하는 구조 내에서는, 또 삶을 살고 있는 구조 내에서는. 그럼 그걸 끊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할 필요성이 있다는 거라. 여러분의 삶이 곧 윤회하는 삶이라는 생각들을 반드시 가지고, 그래도 어차피 지금 현재 내가 윤회를 해야 된다 할 것 같으면 조금 더 나은 윤회, 어차피 살아간다 할 거 같으면 조금 더 나은 오늘 내일이 되도록 자꾸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수행자 : 스님, 그 자체가 고달퍼요.)

그게 불만이지. ‘아, 고달프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그걸 피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받아들여야 됩니다. 내가 지금 왜 고달프느냐는 거라. 아직 내가 윤회의 삶을 끝내지 못했으니까 당연히 고달프게 돼있는 거라. 그런데 지금 현재 살면서는 살아가야 된다는 거라.

그럼 어떻게 살아가야 되느냐 하는 게 방향은 정해져 있다는 거라.

그래서 실현할 수 있는 것과 실현할 수 없는 것들이 분명하게 구분이 집니다.

생각만으로는 고달픈 삶을 끊을 수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생각하지 말아야 되는 거라. 고달픈 걸 이해를 하고 나서는, 그다음에는 지금 살아가는 것들이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 더 나은 방향이 되기 위해서 하는 일들을 끊임없이 해나가야 되는 거라.

 

희망하는 것도 이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분명하게 판단해서 해야 되듯이, 불안과 불만이 오는 것들도 이게 지금 실현가능한 건지 가능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판단을 먼저 해야 되는 거라.

그럴려면 나에게는 그런 불안과 불만이 항상 상존한다는 것을 먼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되는 거라. 그래야 할 수 있는 것들과 할 수 없는 것들을 구분해서 할 일들을 해나갈 수 있게 된다는 거라.

 

부처님 가르침은 다른 것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조금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그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으로 인도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거라. 받아들이는 사람이 잘못 받아들였든 아니면 설하는 사람이 잘못 설했든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불안과 불만에 대한 이해를 하고 끊임없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때 아, 인제 내가 희망이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것이 조금 더 행복해지고 조금 더 나은 방향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게 깨달음의 완성이라고 하는 해탈입니다. 그래서 희망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해탈에 이르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가장 큰 희망이 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중생들을 주석서에서는 보통 4부류로 정하고 있습니다.

목갈라나나 사리뿟따 존자 같이 누군가가 글귀 하나만 탁 들려주면 착 예류과에 이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부처님한테 법문을 듣고 끊임없이 그것에 대해서 숙고하고 수행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도 있고, 여러분들 같이 부처님 없는 세상에 태어나가지고 많이 듣고 많이 수행해야 겨우 성자의 경지에 이르는 사람들도 있고, 아예 그것조차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뒤에 후자의 두 부류입니다. 부처님이 없는 세상에 태어나있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자들은 아, 이생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하고 판단을 잘못 내리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거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다음생을 위한 것이다 하고 판단하는 경우들도 있고, 그래서 목표를 거기에 잡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꼭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법에 대해서 듣고 알고 노력하고, 그렇게 해가지고 수행을 완성해야만이 성자의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마야를 보통 3부류로 얘기합니다. 숫따마야, 찐따마야, 바와나마야. 앞에 두 부류는 이미 여러분들에게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바와나마야, 자신이 갈고 닦고 해서 수레의 두 바퀴, 보고 듣고 익히고 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들이 두 개의 양 바퀴가 조화를 이룰 때야 만이 여러분들이 원하는 해탈에 이르게 될 수 있다는 것들이라.

그러니 여러분들은 그냥 경전에서 부처님 말씀 한마디 듣고 탁 깨달으니까 ‘나도 저럴 수 있겠지’ 그런 시대 아닙니다! 그거는 아예 포기를 하고, 끊임없이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방향, 그리고 올바른 노력에 대한 이해가 되어서, 그 방향으로 끊임없이 노력해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적어놨지만 구체적인 것 그리고 합리적인 것, 실행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언제 달성될 수 있는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실증을 해서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됩니다.

 

조금 있으면 스님이 없는 두세달이 다가올 겁니다. 그 두세달 동안 여러분들은 어떤 목표를 정해서 해나갈 거라? 본인이 분명하게 하나씩들은 정해야 됩니다. 그 기간 동안은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그것을 위해서 노력해서 스님이 돌아올 때 되어서 “스님, 나 이거 했습니다!” 하고 탁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돼야 됩니다.

너무 거리가 먼 것들을 잡지 말고 지금 구체적으로 내가 실현할 수 있는 것들을 방향을 잡아서 한단계 한단계 넘어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나가기 위해서 "나는 조금 더 오늘보다 내일 더 좋은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하는 목표를 분명하게 가지도록 하라는 겁니다.

 

스님뿐 아니라 출가한 스님들은 대부분 그런 생각을 가집니다.

누군가가 수행 잘해가지고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 그럴 것 같으면 샘이 납니다. ‘아이, 나도 할 수 있는데’ 샘이 나기 때문에 자기도 그걸 도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합니다. 조건이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과 여러분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은 똑같습니다. 여러분들도 똑같은 감각기관을 지니고 있고 부처님이 특별나게 다른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감각기관으로 인해서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깨달음에 이르렀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 조건이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좀 더 좋은 상태, 좋은 경지에 이르렀다 할 것 같으면 자기 자신도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을 지녀야 됩니다. ‘아, 저 사람은 스님 밑에서 공부하더니 참 많이 바뀌었다. 나도 그렇게 돼야지’ 하고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 사람에 대해서 자꾸 시샘하고 멀리 할려고 하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점점 더 그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똑같이 스님 밑에서 법을 듣고 수행을 하고 했는데도 두 사람의 경우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경전에 부처님이 출가한 스님들에게 경책하기 위해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스님이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들었다면, 분해서라도, 자만심을 가지고서라도, 자신도 깨달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

그 사람은 할 수 있는데, 왜 나는 할 수 없는가? 자만심이나 분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이용해서 자만심을 없애게 되고 분한 마음들을 없애게 될 수 있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이용하라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즉 부처님은 분명하게 '자만심을 가지고서라도' 자신도 깨달토록 노력하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몸은 무상한 겁니다. 여러분들 몸은 자아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몸과 마음을 이용해서 수행을 해야만이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이용해서 더 높은 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들어라는 뜻입니다.

 

「올바르게 희망을 가지고 마음의 불만을 조금씩 없애도록 노력하는 사람은 최종적으로 일체의 불만을 없애어 최고로 행복한 해탈에 이를 수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이 불안하고 불만을 가지는 것들이 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구체적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구체적이지 못하고 그냥 불안하고 불만이 있다? 이럴 것 같으면 그걸 고칠 수가 없다는 거라.

무엇 때문에 불안한지, 무엇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그것들을 없앨려고 노력할 때, 그것을 이용해서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두리뭉실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수행에서도 꼭 마찬가집니다. '잠이 온다' 잠이 온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잠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잠은 그냥 개념일 뿐입니다. 잠이 올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분명하게 보고 무겁다든지, 쑤신다든지 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게 됐을 때 잠을 다스릴 수가 있게 됩니다. 그냥 무조건 '잠이 온다', '잠이 온다', 이렇게 해가지고는 잠이 오는 것을 막아낼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냥 내가 '불안하다', '불안하다', '불만이 있다', 개념을 자꾸 잡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걸 막아낼 거라? 그래서 아, 이게 불안하고 불만을 가지는 것이 없앨 수 있는 건지, 없앨 수 없는 건지, 분명하게 판단해서 없앨 수 있는 거면 그걸 없애도록 노력해야 되는 거고, 아, 이게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없앨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생존해 있는 상태에서는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언제든지 불안과 불만이 있다 할 것 같으면 그건 포기를 할 수 있어야 되는 거라. 막연하게 그냥 불안·불만을 가지지 말고.

그래서 「없앨 수 있는 것, 없앨 수 없는 것」 그것들을 분명하게 설정해서 놔줘야 될 것은 놔주고, 나아가야 될 것은 나아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희망을 가지더라도 꼭 마찬가집니다. 「실현할 수 있는 것과 실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것, 단순히 그냥 망상부리고 하는 것들은 그건 놔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불만에 대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살아가는 것들이 두리뭉실하게 넘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선한 것이다, 이것은 악한 것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내가 선한 일을 했다 해가지고 악한 일을 한 것들이 묻어진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이 저지른 것들은 그것이 설혹 조그만한 악행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결과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것 같으면, 내가 아무리 선한 공덕을 지어놓았더라도 조그만한 악행도 저지르지 않도록 자꾸 하게 됩니다.

아무런 잘못을 안 하고 선한 일들만 해도 말리까 부인은 딱 하나 잘못한 것 때문에 결국은 다음생에 나쁜 곳에 태어나서 그 고통을 당하는 처지에 놓여버리는 거라.

 

업은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단, 분명한 것은 지은 것들은 반드시 결과를 나타낸다 하는 겁니다. 결과를 나타내지 않게 할려고 할 것 같으면 그 정도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그것들을 나타내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자연적인 법칙에 따라서 반드시 결과들은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무서움을 알 거 같으면 적어도 바른 방향으로 노력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불안이나 불만이 있다고 얘기를 하지 말고, 그것을 주석서에 비유를 해놓기를 "눈을 가린 사람이 숲에 들어가는 거와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나뭇가지에 찔리기도 하고 긁히기도 하고 무얼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이 숲속에서 헤매고 있을 거 같으면 빠져나오고 하는 방법도 모를 뿐 아니라 자신이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개념이라는 것은 그런 겁니다.

분명하게 눈을 뜨고 숲에 들어갔을 때는 그 어려움들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서 결국에는 빠져나올 수가 있다는 거라. 이게 나뭇가지인지, 이게 돌맹이인지, 아니면 곰이 나타나는 건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만이, 구분하고 확인이 가능해야만이 그것들을 피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냥 지금의 삶을 대충 두리뭉실하게 해서 ‘음, 조금 좋은 거하고 하면서 살면 되지 않을까’ 하고 가볍게 여기지 말아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보는 힘, 힘은 반드시 키워야 됩니다.

 

그런데 4페이지에 보면, 「문제는 우리에게 불만을 보는 예리한 이해력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안대를 벗고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이해력이 있는가 하는 거라.

대부분은 없다는 거라. 스님도 안경을 쓰고 있으면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식별이 됩니다. 그런데 안경을 벗고 나면 여러분이 누가 누군지를 모릅니다. 꼭 그와 같다는 거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 있기는 있는데 이게 누군지, 이게 뭔지를 잘 모르고 살아간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그걸 명확하게 볼 것 같으면 불안할 이유도 없고 불만이 있을 이유도 없는데, 막연하기 때문에 불안과 불만이 계속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러면은 빨리 안경을 써야 됩니다. 이해하는 능력들을 반드시 키우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이해력을 기르기 위해서 먼저 해야 될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마음의 예리함을 무디게 하는 나쁜 감정을 하나하나 공부해서 없애나가는 겁니다.

탐·진·치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또 그냥 막연하게 이생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가르침이 아닐 것 같으면 그것도 여러분들을 둔하게 만들어준다는 거라.

그런 것들에 대해서 먼저 분명하게 공부를 하고 이해하고 할 필요가 있다는 거라.

 

「주변 사람에게 경쟁의식을 가져서 그 사람에 대해서 적대감을 만들면 반드시 자신의 마음이 더러워진다.」 탐·진·치를 가지면 먼저 자신이 더러워지고, 자신이 거기에 진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불교를 공부하면서 얻어지는 이익 중에 하나가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가지는 경쟁의식을 가지고 하는 것들은 없어진다는 거라. 그 사람이 뛰어났으면 자신이 더 노력을 하면 되는 거라. 그런데 그걸 경쟁상대로 봤으면, 자신이 그것들에 대해서 싫어하고 좋아하는 마음들을 자꾸 낸다고 할 것 같으면 자신의 마음이 먼저 더러워져 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여기에 적어 놓았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듣는 것은 덕 중에서도 매우 높은 덕으로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칼날처럼 명쾌해집니다.

머리가 명쾌해진다는 것은 마음이 더욱더 청정해진다는 겁니다. 싫은 나쁜 감정들이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아직 여러분들이 뭐가 불안한지 불만인지 모를 것 같으면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은 이것이라는 거라. 그냥 무조건 배워서 많이 알고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불안과 불만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해서 그것들에 대해서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는 것들이 돼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 해야 되는 것은 수행입니다. 수행을 통해서 그것들을 완전하게 뛰어넘어야 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완전히 제거를 하고 그것들을 개발을 하게 됐을 때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뛰어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수행을 통하는 길밖엔 없습니다.

수행을 통해서 이것들은 진짜 나쁜 것이고 그래서 넌덜머리가 나게 될 때 그것들은 툭 떨어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기만 하더라도 이미 마음은 그것으로부터 떠나버리게 됩니다. 일어나기만 하더라도 마음이 떠나기 때문에 그것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좋은 것들은 아, 이것을 하면 할수록 내가 더욱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일어나자마자 더욱 더 증폭시킬려고 하게 됩니다.

 

수행이 좋은 것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배움과 수행은 여러분들이 바르게 지금 가지고 있는 불안과 불만들을 없애고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어주고, 좋은 목표들을 설정해서 그곳으로 이끌어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을 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불만의 이해가 마음을 향상시킨다」 하는 제목으로 얘길 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