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감사(upakāra)의 마음 (20180309. 대구)

담마마-마까 2022. 7. 6. 15:13

https://youtu.be/q3i8Okxz8y0

* 감사(upakāra)의 마음 (20180309. 대구)

 

오늘 제목이 뭐죠? (수행자 : 감사의 마음) 우빠까-라(upakāra) 입니다.

오늘은 교리적인 부분보다는 스님이 여러분들한테 고맙다고, 여러분들 덕분에 잘 여러 나라들을 만행을 하고 잘 돌아왔습니다. 아프지 않고 돌아왔으니 다행이죠? (예)

느낀 게 그래도 이렇게 테라와다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는데 벌써 스님이 31년째입니다. 그것에 어긋나지 않게끔 제사를 한번 지냈어, 기도를 한번 했어, 그런 거 없이 요만큼 살아가게끔 해준 것도 여러분들이 후원해주고 여러분들이 그래도 끊임없이 테라와다 상가, 테라와다 스님들이 유지되게끔 해준 데 대해서 고마움을 표합니다.

 

이번 만행도 스님 역량으로는 도저히 갔다 올 수 없는데 여러분들이 후원해가지고 잘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런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감사라는 빨리어 단어가 있습니다. 거기 뭐라고 되어있죠? (수행자 : 우빠까라)

우빠까라(upakāra)라고 하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면서 여러분들도 무엇에 대해서 감사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은혜를 안다는 것은 보통 '까딴뉴 까따웨디(kataññu-katavedi)'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단어가 보통 같이 붙어서 빨리어 경전에는 등장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단어가 있고, 여기서 얘기하는 단어가 또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걸 분명하게 하는데, '까딴뉴 까따웨다'는 아주 옛날에 부산에 붓다의 길따라 선원에 있을 때 그때 한 번 그거에 대한 의미들을 설명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걸 참조를 하시면 될 겁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우빠까라(upakāra) 라는 것들을 가지고 얘기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걸 잊고 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번에 다니다 보니까 특히 전통 테라와다 불교를 유지해나가는 사원들이나 스님들이 좀 그런 불만들을 많이 가집니다. "우리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보시도 안 하고 이 선원 유지하기가 너무 힘들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저도 예전에 그런 마음들을 가졌었고, 그래도 이렇게 살아가는 스님들한테 재가자들이 좀 알아줬으면, 그래서 스님 자신이 영화를 누리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 선원이래도 재정적인 걱정없이 잘 돌아갔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 근래에는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 내가 내 방식대로 살면 되는 거지, 그 선원 문 닫고 유지하고 계속 오래가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는 거라.

스님 입장에서는 스님이 해야 될 것들 법을 전하고 수행지도하고 수행하고 하는 것들만 신경을 쓰면 되는 것이지, 나머지 것들을 생각을 할 것 같으면 지금 얘기하는 감사함에 대한 것들이 사라져버립니다.

 

대부분 이번에 갔다 온 곳들이 법랍들이 오래된 스님들도 있고 출가한지 얼마 안 된 스님들도 있고 한데, 성향들이 보면 법랍이 오래된 스님들은 그냥 받아들입니다. 할 수 없는 거지. 그렇다고 우리가 그 재정적인 것들을 메꾸기 위해서 다른 이벤트를 한다든지 뭐 기도나 제사를 할 수 없지 않느냐. 받아들여야지 우짜겠노. 그렇게 하는 입장이고, 다른 젊은 스님들은 지금 당장 힘드니까 여기가 좋을까, 저기가 좋을까 하면서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는 것들을 많이 봤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출가한 스님들이 그런 것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마하 목갈라나 스님이 탁발을 하러 가다가 봤어요. 일반인들은 잘 보지 못하는데, 신통력이 있으니까 아주 뼈만 남은 상태에서 가사를 걸치고 있는 스님이 뭔가를 주워먹을려고 애를 쓰는, 그러니까 뻬따(peta)죠, 아귀의 모습을 봅니다. 일반인도 그런 모습을 봤어요.

그래서 ‘저 스님은 과거 전생에 무슨 죄를 저질러갖고 저런 모습으로 태어났을까’ 궁금해가지고 부처님한테 여쭤봤어요.

부처님이 그때 하신 말씀이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4가지를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거주처부터 해서 그다음에 여러 가지 오늘 같이 탁발을 하고 의약품들 보조를 받고 그리고 또 춥지 않게끔 가사와 옷가지들을 보시를 받고 이렇게 살아가는데, 실제로는 자기가 그걸 마련한 것은 아닌데 그 보시해준 것들에 대해서 감사할 줄을 모르는 거라. 당연히 받는 것처럼.

그래서 시주받은 것에 대해서 그 은혜를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고, 출가한 스님이 닦아야 될 것들을 닦지 못하게 된 거라. 법을 전한다든지 수행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등한시해버리고 그냥 편하게 출가생활 하다가 죽음을 맞게 됐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마음을 낼 때 악한 마음이 많겠어요, 선한 마음이 많겠어요? 거의 대부분은 악한 마음이 많이 일어납니다. 악한 마음이라는 것은 크게 내가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에게 비교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는 것, 또 남을 시샘하는 것, 여러 가지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마음을 들여다볼 줄 모르면 그걸 모르는 거라. 그게 악행인 줄을 모르게 된다는 거라. 그냥 내가 행동만 남한테 나쁜짓 하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하고 마음을 먹게 되는 거라. 말만 그냥 꾹꾹 화가 나도 참으면서 화를 안 내면 되지 않을까? 실제로는 마음에서 이뤄지는 것들은 굉장히 악한 것들이 많이 있다는 거라.

 

출가한 스님도 부처님 법을 배우지 않고 수행하지 않으면 범부중생과 똑같습니다. 그러니 일반인들은 만약에 그렇게 하다가 죽을 거 같으면, 남의 거 얻어먹은 죄는 없으니까 그래도 아귀로 태어나지는 않았을 건데, 출가한 스님은 얻어먹었거든. 언젠가는 갚아야 되는데, 업의 과보는 분명합니다. 자신이 받은 것은 반드시 그 결과를 낳게끔 됩니다. 그렇지 않은 업은 없습니다. 그러니 남한테 신세 많이 지면 반드시 갚아야 되는데 갚질 못했으니까 아귀로 태어나는 거라.

그런데 본인은 악행을 저지르는 줄 모른다는 거라. 경전에도 있듯이 지금 살아있는 스님들, 이번에 만행을 다니면서 보면 그 스님들도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거라.

 

‘아, 나도 인제 출가한지 한 십년 됐으니까 내 선원 누가 차려주면 좋을 건데, 나는 그럴 자신 있는데, 또는 내가 여기 머물고 있는 동안에 뭔가 조금 풍족하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하는 그런 마음 악한 마음을 계속적으로 가지고 있는 거라. 시주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마워할 줄은 모르고 그런 마음들만 자꾸 커져나가게 된다는 거라.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과보를 가진다 하는 걸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인식을 해야 됩니다.

 

우리나라에는 노동절이라고 하는 게 있죠? 노동자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 그런데 그날 하루라도 여러분들이 그런 노동자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본 적 있어요? (수행자 : 근로자의 날이요?) 예. 근로자의 날. 그런데 평소에 그렇게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들은 일년 열두달은 둘째치고, 그 노동자의 날조차도 그 노동자들에게 감사할 줄을 모르게 됩니다.

실제로 스님도 지금 웅촌에 있으면서 가끔씩 햇반을 가지고 밥을 해먹는 때가 있습니다. 햇반은 이미 밥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내가 조리하는 것에는 속하지 않게끔 돼있습니다. 그래서 계율상으로는 위반은 아닙니다. 그래도 뭐 그렇게 먹는 것은 좋은 것은 아닌데, 햇반이 얼마나 편한 걸 압니다. 그냥 딱 전자렌지에 2분만 돌려버리면 밥이 되어나오니까. 그러고 나서 냉장고에 있는 반찬 김치 꺼내가지고 그냥 그거하고 같이 비벼먹으면 참 맛있습니다. 맛있는 줄은 아는데 그것의 편리함이나 그것들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얼마만큼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해서 그 노동자들이 나를 먹여살리고 있고 나를 편하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생각을 잊어버린다는 거라.

 

가끔 사회적으로, 일당이라고 그럽니까? (수행자 : 시급)

시급, 이번에 오른 것에 대해서 막 반대하고 할 때 ‘참, 저래서 되나’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또는 가진 분들은 못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더 착취를 하고 자기들은 더 불리려고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그 사람들이 무너지면 자기도 무너진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있다는 거라.

참 중요한 부분인데 적어도 서로 상생관계에 있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들을 연기법만 분명하게 이해할 것 같으면 저렇게 반응은 안 할 건데, 하는 그런 생각들을 합니다.

 

여러분들 여기 대구 도심이니까 공기가 깨끗한 줄 모르죠? 그런데 여기 있다가 제가 있는 웅촌에 가면 공기가 되게 깨끗합니다. 부산에 있을 때는 저녁마다 코를 쑤시면 시커먼 게 나왔거든, 먼지가. 거기는 완전 대로변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웅촌에서는 코딱지가 안 생겨요. 코를 휴지를 갖고 후벼봐도 더러운 게 안 나와. 그마만큼 공기가 깨끗하다는 거라. ‘아, 참 공기가 이렇게 소중한 것이구나’ 하고는 압니다. 그럴 것 같으면 그걸 아는 사람들은 적어도 공기를 더럽힐 수 있는 행위들은 안 해야 됩니다.

산림을 벌목해가지고 일회용 젓가락 만드는 것들도 되도록이면 자제해야 되고, 이런 것들을 되도록이면 자제하면서 공기를 더럽힐 수 있는 조건들을 안 만들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기에 대해서 집착해서는 안 되죠? 공기에 대해서 집착을 함과 동시에 본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공기를 나쁘게 한 것에 대해서 삿대질하게 됩니다.

그게 맞는 줄은 알지만 남하고 삿대질하고 싸울 거 같으면 그거 좋다고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쁨을 누릴 줄 알고, 그리고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순간에 문제는 항상 다른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거라. 감사할 줄 안다는 것은 그런 것이 포함이 돼있습니다.

집착하는 것들이 없는 상태가 돼야만이 되는 것이지, 집착이 있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 감사함은 반감이 되게끔 돼있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인내력! 자기 자신이 그것들에 대해 지킬려고 노력하고 힘든 건 알지만 그것이 맞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꾸준하게 해나가야 됩니다.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리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에 대해서 이해하고 분명하게 주관이 있을 때까지는 포용해주는 포용력들입니다.

 

감사함에는 이렇게 여러 가지들이 포함이 돼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일화를 하나 드려드릴게요. 아이 4명이 있었어요. 장성해가지고 다들 결혼을 했는데 결혼을 하고 나서는 이 부모가 자기 재산 중에 반을 떼가지고 애들한테 골고루 나눠줍니다. 반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으면서 여생을 즐길려고 그렇게 했는데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됐어요. 그러니까 아들 입장에서는 나이든 아버님이 걱정이 되는 거라. ‘아, 아버님 저대로 두면 안 되는데’

우리가 모셔와서 아버님하고 같이 살아야 되겠다. 해서 가족들이 모였어요. 그럼 가족들이 균일하게 한 달은 큰애 집에서, 그 다음달에는 둘째 집에서 모시기로 약속을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그렇게 하려다 보니까 식구가 하나 느니까 돈이 더 들잖아. 그럼 아버지가 반 가지고 있는 재산을 우리가 다시 공평하게 나눠가지고 아버님 모시면 안 될까? 그렇게 생각을 한 거라. 그래서 아버님한테 얘기하니까, “응, 너희들이 나를 그렇게 해준다면 그렇게 하자” 해가지고 다시 남아있는 재산을 다 4 자식들에게 나눠주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받을 때 마음하고 아버님 모실려고 하는 마음은 또 다릅니다. 자기가 혼자 있을 거 같으면 괜찮은데, 결혼한 다른 당사자들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번 달에는 우리 집에서 한 달간 머물기로 했는데 어떤 일로 인해서 한달이 조금 넘었다 그러면 왜 아버님이 저리 안 가지? 불만을 가지게 되는 거라.

그럼 당연히 아버님은 눈치 보게 되니까 또 다른 집에 갔는데 또 다른 집에서도 그런 눈치를 봅니다. 나중에는 그 눈치가 두려워가지고 나중에는 나가버립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분이 길거리로 나가면 뭐 하겠어요? 그냥 동냥하고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모습을 부처님한테 보이고 나서는 부처님한테 하소연을 합니다.

그때 부처님이 제시한 4가지가 있습니다.

"4가지 만따라, 4가지 주문을 사람이 모인 곳에서 주문을 외우면 옛날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어떤 주문을 외워야 될까? 지금 여기 연세드신 분들이 많은데, 만약에 여러분들이 의지할 곳이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돼? 그걸 들려드릴게요.

 

첫 번째 주문은, 나에게는 4명의 자식이 있었다. 4명이 태어났을 때 각각마다 몹시 기뻐했고 그 애들을 잘 키워서 결혼까지 시켰다.

그게 첫 번째 만따라 입니다. 나는 다른 생각 없이 이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자기 밥벌이 할 때까지 열심히 잘 키웠다는 거라.

 

두 번째는, 그 아이들이 나를 아버지, 아버지하고 부른다. 그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얘들은 진정 내 자식이 아니다. 얘들은 악마이다.

이게 두 번째 만따라 입니다, 자식일 거 같으면 아버지에게 해야 될 의무가 있는데 의무는 하지 않고,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은 자기 자신을 현혹시키는 것밖에는 안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내 자식이 아니고 악마라는 거라.

여러분들이 부모들한테 해야 할 일들은 하지 않고 “어머님, 아버님” 하고 부르는 것은 꼭 그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세 번째는, 이제 키우던 강아지가 늙어가지고 힘없이 비틀거리니까 그 강아지를 버리는 것같이 아이들은 나를 버려버렸다.

그런데 나는 힘없고 의지할 곳이 하나도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가 이 게송의 요점입니다.

그렇게 힘없고 늙어서 의지할 곳이 없으니까 지팡이가 나에게는 의지가 되는데, 그 지팡이가 나의 자식보다도 훨씬 낫다.

그래도 지팡이는 적어도 넘어지지 않게끔 해주고, 나를 그래도 먼 곳으로 이동하게끔 해주는데, 그 지팡이가 아이들보다도 훨씬 낫다는 거라. 아무것도 생명이 없는 지팡이가 자식보다도 더 훨씬 낫다는 거라.

길가에 떨어진 지팡이가 여러분보다도 훨씬 낫다고 할 것 같으면 그마만큼 모욕적인 것은 없습니다.

 

가끔씩 여러분들도 부모에게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고 그 고마움을 모르고 있을 때 이 게송들을 자꾸 한번 되돌아보십시요.

과연 내가 부모한테 자식인지 아니면 악마인지? 부모한테 내가 혹시 저 지팡이보다도 못한 존재가 아닌지? 그리고 나를 이때까지 성장시켜 준 것은 부모들의 도움이 없으면 여러분들은 성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들에게 내가 지금 해야 할 도리를 하지 않고, 그 은혜를 갚을려고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것도 부모들에 대해서 감사함을 아는 습관을 들이면 적어도 이렇게까지 바뀌진 않는다는 거라.

 

또 하나, 여러분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서 살아갈려고 노력하고, 또 열심히 그 가르침대로 실천할려고 합니다.

부처님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 스님이 생각해도 아득합니다. 아마 나는 무수하게 헤매고 다녔을 거라. 처음에 스님이 해인사에 출가하고 나서 법을 들어도 가슴에 와닿지 않고 스님들을 봐도 존경하는 마음이 안 일어나고, 여기 있는 불상 외에는 부처님이 보이지를 않아. 살아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는 거라. 그러니 가슴은 또 다른 걸 찾는 거라. 그래서 여러 가지들을 합니다,

라즈니쉬도 읽어보고, 크리슈나무르티도 읽어보고, 다른 도가 무엇입니까 할 것 같으면 거기에도 좀 귀기울여보고, 또 저기 선지식에게 가면 좀 나을란가? 안 채워지는 거라.

 

부처님에 대해서 덕과 은혜를 알고 감사할 줄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제는 부처님이 고맙고 위대한 존재인 걸 아는 거라. 여기 있는 불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하고 외치는 부처님이 얼마만큼 위대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실제로 이것이 윤회이고, 이것이 업이고, 이것이 악이고, 이것이 선이고, 이런 것들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스님 입장에서는 테라와다 불교를 만나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그러니 해인사에서 계를 받고 내려오면서 신부락에서 낙지 먹으러 간 거라. 산낙지. 죄책감 하나도 없이, 나 혼자 먹는 게 아니고 계 받은 스님들 몽땅 내려와가지고 산낙지를 먹는 거라.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부처님이 노했다고 그러는데, 산낙지를 먹는 처음에 마음이 꺼림칙하니까 그랬겠지만 입천장에 탁 붙어가지고 이게 떨어지질 않는 거라. 그래 떼어내다가 입천장이 홀라당 벗겨졌어.

 

그때는 살아있는 부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고, 신적인 부처님을 생각했어요. ‘아, 부처님이 노했다!’ 계를 바로 파하니까 부처님이 노했다. 그 이후로는 살아있는 것들을 먹는 습관들을 안 가졌어요. 그게 참 좋은 부분이기는 한데 핀트가 잘못 나간 거라.

신으로서의 부처님을 생각한 거지,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다는 거라.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생각을 했을 거 같으면 그렇게 헤맬 이유가 전혀 없는 거라.

부처님이 "이것이 나쁜 것이다" 하고 설한 것이다 하는 걸 분명히 알 것 같으면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생각하면서 ‘아이고, 부처님! 이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나에게 주어서 고맙습니다’ 하고 살아있는 부처님한테 감사함을 표하게 된다는 거라.

뭐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분이 무슨 노할 이유가 뭐 있고, 죄를 줄 이유가 뭐 있어? 그런데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렇게 분명하게 아십시요. 뭔가 이것이 참 좋은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아이고, 부처님 고맙습니다.’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생각을 하라는 거라.

 

그리고 담마.

부처님이 법을 설했고 그 법을 우리가 공부하기 때문에 법의 소중함은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법은 부처님도 살아있듯이 법도 살아있어야 됩니다. 살아있는 법이 되어야 되지, 지금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의미 없는 것들 삼귀의가 뭐고 사성제가 뭐고 그걸 부처님 법이라고 그냥 달달달 외우고 있다? 그거 어디에서 쓸 건데?

사성제가 나에게 드러나서 분명히 체험을 해야 되고, 삼법인이 뭔지를 분명하게 가슴으로 알아서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없도록 만들어야 되는데, 그것만 알고 있는 거라.

 

이번에 만행을 다니면서 본 것들이 대부분 그 나라들은 테라와다 불교가 들어간지 50년 60년 훨씬 이전부터 들어갔습니다. 초창기 때 지금 한국의 실정과 비슷합니다.

교리적으로 열심히 가르치고, 아비담마, 그다음에 담마에 대한 것, 수행법에 대한 것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데, 남는 게 없는 거라. 지금 현재.

그렇게 배운 사람들도 불교신자로서 남아있는 사람들도 드물고, 그렇게 배운 게 실제 그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쓰여가지고 몸으로 체득되어서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드물고, 인제 그걸 그쪽에 있는 스님들은 아는 거라. '이게 의미가 없는 거구나.'

수행을 열심히 해서 자기 스스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을 때, 그 담마 그 법은 살아있는 것이 돼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상가.

상가는 출가한 스님들을 얘기합니다. 지금은 비구 상가만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존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2600년 전부터 부처님의 담마를 유지해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상가가 사라지면 법도 사라지고 부처님도 사라져버립니다. 불교 자체가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상가가 우선인 것이지 개인이 우선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그 상가의 소중함을 자꾸 기억을 하고, 상가가 유지되게 하기 위해서 자꾸 노력해야 되는 것이지, 지금 한국 테라와다 불교에서도 문제점이 뭐냐면 진용스님, 진용스님 요것만 합니다. 진용 스님 외에는 다른 스님들은 눈에 안 보여.

 

그럼 진용스님이 상황이 바뀌어가지고 저 태국에 가서 열반에 들기 위해서 아니면 거기서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그리 가버렸다. 그럼 어떻게 되는데? 그 스님에 대해서 존경하고 고마움을 알고 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만이 상가가 아니라는 거라. 상가는 그 스님이 유지되고 보수되고 그리고 계속 성장될 수 있도록 후원하는 것은, 상가가 존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자꾸 빼먹어버린다는 거라.

여기도 이 선원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율적인 보시들이 계속 쌓여야만이 이 붓다야나 선원이 유지가 됩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잊어버릴 것 같으면 내가 내는 보시에 대해서 뭔가를 반드시 돌려받아야 되는 것이고, "기브 앤 테이크"로 자꾸 바뀌어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런 상가에 대해서 고마움을 표하는 것은 눈물겹도록 해야 됩니다. 이런 것은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법을 알고 법을 체득하고 또 부처님에 대해서 알고 하는 것은 상가를 통해서 입니다. 바르게 인도해주는 상가가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래도 눈을 뜰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상가에서 결정되는 것은 무조건 따라야 되는 거라.

'1차 결집 때 요런 결정이 났고, 2차 결집 때 이런 결정이 나고, 그리고 지금 6차 결집에 이런 결정이 났다.' 그러면 상가스님들 뿐 아니라 재가자들도 결정을 분명히 따라야 되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상가를 후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상가에 대해서 응원하고 후원하는 것들은 끊이지 않아야 됩니다.

그리고 각각의 개개인의 스님들은 상가의 일원이다 하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 스님에게 후원하고 봉사하면 이 스님이 잘되면 상가가 유지된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 스님의 밑으로 또 출가자들이 존재를 하게 되고, 그래서 또 상가가 구성되고, 그래서 또 퍼져나가고, 이런 생각을 자꾸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이 상가에 대한 것과 비구상가를 후원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상가를 후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여러분은 고마워할 줄 알아야 된다는 거라. 여기도 마찬가집니다. 힘듭니다. 이 선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거는 그래도 법이 존재하기 위해서 법을 듣기 위해서 수행하기 위해서 이 선원을 유지해야 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는 거라.

그냥 단순히 내가 와서 법을 듣고 마음에 안 들면 훅 떠나버리고 요즘은 인터넷에 얼마든지 진용스님의 법문이라든지 아니면 다른 스님들의 법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계속 듣기는 하는데 후원은 안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아, 저렇게 비구상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고생한 사람들 얼마나 고마운가, 그래서 내가 편하게 앉아서 인터넷으로 스님 법문을 들을 수 있고 수행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참 고맙다. 내가 여력이 닿으면 나도 그렇게 상가를 후원하는 일원이 되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은 자꾸 먹어야 되는 거라.

 

뒤에 부분 보겠습니다.

「빨리어 “우빠까-라(upakāra)”, 이것은 유명한 말입니다. 은혜를 받았을 때 그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삼귀의를 믿고, 계율을 지키고, 위빳사나 지혜까지 갖추고 있으므로, 감사해야 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자신의 계·정·혜도 높아지도록 노력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지기 위해서, 비구 상가에 대해서 보시나 봉사의 공덕 등을 쌓으면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응원해 보십시오. 그리고 항상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함을 잊지 않고, 감사해야 할 일을 감사하며 사는 것은 현세에서도 편안합니다. 다음 세상도 편안합니다. 열반에 이를 때까지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해야 될 것들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떼자사미 스님도 있고 하니까 탁발 올리고 또 이렇게 선원 유지를 위해서 노력하는 분들 모두에게 감사함을 표하면서, 아누모다나 회향게송을 하겠습니다.

합장하시구요.

 

"Sabbītiyo vivajjantu, sabbarogo vinassatu,

삽비-띠요 위왓잔뚜 삽바로-- 위낫사뚜

 

mā te bhavatvantarāyo, sukhī dīghāyuko bhava.

-- 바와뜨완따라-- 수키- -가 유꼬 바와

 

Abhivādanasīlissa, niccaṁ vuḍḍhāpacāyino,

아비와-다나실-릿사, 닛짱 웃다-빠짜-이노-,

 

cattāro dhammā vaḍḍhanti, āyu vaṇṇo sukhaṁ balaṁ.

짯따-- 담마- 왓단띠, -유 완노- 수캉 발랑.

 

Bhavatu sabbamaṅgalaṃ, rakkhantu sabbadevatā

바와뚜 삽바망갈랑 락칸뚜 삽바데-와따-

 

Sabbabuddhānubhāvena, Sabbadhammānubhāvena,

삽바붓다-누바--, 삽바담마-누바--,

 

Sabbasaṃghānubhāvena, sadā sukhī bhavantu te.

삽바상가-누바--, 사다- 수키- 바완뚜 떼-.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흘러가듯이

이러한 공덕들이 끊임없이 흘러가서

부처님의 위신력과 담마의 위신력과 상가의 위신력 입어

살아있는 동안에 건강하고 행복하고

몸도 마음도 평안하기를 바라겠습니다.

 

-두 사-두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