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오력(五力, pañca balāni)과 수행 (20180330. 대구)

담마마-마까 2022. 9. 16. 18:39

https://youtu.be/QbuP_J1kaec

◈ 오력(五力, pañca balāni, 빤짜 발라니)과 수행 (20180330. 대구)

 

오늘은 오력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오근(五根)하고 오력(五力)하고 차이점을 아는 사람 한번 얘기해 봐요.

믿음(삿다), 노력(위리야), 알아차림(사띠), 마음집중(사마디), 지혜(빤냐) 내용은 똑같습니다. 하나는 인드리야(indriya 根)라고 하고, 하나는 발라(bala 力) 아니면 발라니(balāni)라고 그렇게 얘기하기도 하고. '인드리야'하고 '발라'하고 차이점이 뭐라? 근(根)하고 력(力)하고 차이점이 뭐라? (수행자 대답)

 

오근(五根)으로도 수행을 하고 오력(五力)으로도 수행을 하는데 그 차이점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 두 가지는 사실은 똑같습니다. 똑같은데 드러나는 형태는 분명히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어서 수행을 해나가는데 게으름이 일어났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어떻게 게으름을 없애고 바르게 사띠를 해나갈 수 있어요? 또는 수행을 해나가는데 몸이 많이 들뜨고 안정이 안 된다. 그럴 때는 또 어떻게 할 거라?

 

그것을 제어할 경우에 그걸 ()이라 그러고,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차려서 그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 경우에는, 그래서 그때 선한 마음들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그것을 ()이라고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강 가운데 있으면서 왼쪽과 오른쪽의 차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한쪽은 선한 마음들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 선한 마음들을 계속 키워나갈 거 같으면 그거는 ()의 역할이 되는 거고.

그런데 항상 선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잖아? 나쁜 마음이 일어나면 나쁜 마음이 일어났다 해서 빨리 선한 마음 쪽으로 돌려주려고 하는 것, 제어할려고 하는 것들이 일어났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발라, ()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해하기 쉽죠? (예!)

 

경전에서는 "()의 역할과 힘()의 역할은 동일하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해서 동일하다 하고 얘기를 하는데, 분명히 수행에서는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런데 이걸 기술적으로만 또는 문자적으로만 해석을 할 거 같으면 오근, 오력은 차이가 나질 않습니다. 그런데 수행을 해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오늘 오력에 대한 설명들을 하면서 이 오근과 오력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고 어떻게 이 오력을 잘 조절해가지고 수행에 유익하게 하느냐 하는 부분으로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력이 아니고 오근이라 할 때는 '인드리야(indriya)'라는 용어를 씁니다. '인드리야'는 뭘 얘기하죠? 쉽게 말하면 제석천을 얘기할 때 '인드리야'라고 하죠. 제석천은 모든 걸 관장하죠! 모든 걸 관장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오근이 더 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힘이 강한 것은 오력의 힘이 훨씬 더 강합니다. 힘이 강하다는 것은 여러분들 마음이 좋은 쪽보다는 나쁜 쪽으로 끌리기가 쉽기 때문에 개발해야 되는 것은 오력(발라) 쪽이 더 맞다는 겁니다.

 

수행이 잘돼나갈 것 같으면 뭔 문제가 있겠어요? 그런데 대부분은 수행을 하다 보면 장애들이 일어납니다. 그 장애들을 제거해나가는 것은 힘이 없으면 해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그것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힘이 없으면 그것들에 끌려들어가 버립니다.

 

예를 들면 대상이 있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음을 관찰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을 관찰을 해나갑니다. 그럼 그 대상은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고요한 상태에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관찰을 계속해나갈 것 같으면 마음은 관찰이 잘될지 몰라도 그 이상으로 넘어가는 것이 힘이 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뭔가를 알고는 있었고 그게 사라졌는데 또 다른 대상이 나타나고 또 그것에 대해서 마음 관찰하고 다시 그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고요해지기는 하는데, 자그마한 것들이 일어났을 때는 그게 문제가 안 되는데, 큰 것이 일어났을 때는 힘이 없으면은 그 마음을 미처 관찰하기 전에 이미 정복되어있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분명히 뿌리들은 알았는데 그것들을 제어하는 힘들은 아직 키워주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을 관찰하는 것과 동시에 대상, 그것이 물질적인 대상이든 아니면 정신적인 대상이든,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이걸 분리를 시키게 됩니다. 물질적인 대상을 관찰하면서 그것을 관찰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물질적인 대상이 사라지는 거를 보고 마음도 그와 같이 사라졌다 하는 걸 알 거 같으면, 물질적인 대상과 정신적인 대상이 분리되어 있고, 그 각각은 따로따로 논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렇게 관찰하는 사람들은 대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싫은 대상이든 아니면 장애의 대상이든 그것들을 물리치는 힘이 훨씬 더 강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자신이 그것들로 인해서 다시 일어나는 마음들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대한 관찰보다 몸에 대한 관찰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고통스런 느낌들이나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설혹 다리가 잘렸다 하더라도 그것들로 인해서 마음이 요동을 친다든지 아니면 그것에 대해서 집착한다고 하는 것들은 좀 적어지는 형태들을 띄게 됩니다.

 

수행의 방법에서 어떤 것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입니다. 개인의 문제인데 스님이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것이 몸에 대한 관찰과 마음에 대한 관찰은 항상 같이 해라! 같이 해라!

힘이 커진다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힘이 커지고 그것들로 인해가지고 다시는 그러한 현상들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게 된다는 겁니다.

다섯 가지 장애는 일정한 수준이 되기 전에는 여러분들에게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고 아예 영향을 미치지 않게끔 만들려고 할 것 같으면 몸에 대한 관찰과 마음에 대한 관찰을 동시에 했을 때 훨씬 수월합니다. 용이합니다.

그래서 그 장애가 일어나지 않게 됐을 때 삼매에 들기도 쉽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인의 경지에 이르기도 훨씬 수월하다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하지 않고 한쪽으로만 자꾸 치우칩니다. 몸에 대한 관찰만 하고, 아니면 마음에 대한 관찰만 하고. 그러니까 수행하는 동안에 끊임없이 대상들이 자꾸 일어납니다. 장애들이!

여러 가지 정신적인 기쁨의 현상이라든지, 지루하다든지, 아니면 몸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느낌들이라든지 이젠 안 일어날 때도 됐는데도 끊임없이 그게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건 어떤 면에서는 힘을 아직 키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장애들이 계속 일어난다고 보면 됩니다. 또는 그 힘이 한쪽으로 치우쳐가지고 균형을 갖추지 못했을 때 일어나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힘은 반드시 균형을 맞춰야 되고 점진적으로 계속적으로 키워나가야 되는 것이지 그걸 한 번에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설명입니다.

 

교재를 한번 보겠습니다 .

1페이지 중간쯤 보면 '인드리야(indriya 根)는 정신적 요인이라는 능력·기능이고 그 능력을 실제로 알아차리며 힘을 갖추는 것을 발라니(balāni)라고 한다.' 하고 적어놨습니다. 예를 들어서

「믿음은 신뢰, 의심하는 것의 부족을 통제하고,

노력은 나태를 통제하고,

알아차림은 부주의를 통제하고,

마음집중은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을 통제하고,

지혜는 어리석음을 통제한다.」

통제해서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통제하는 것은 아는데, 그것들이 일어나는 것은 아는데, 힘이 부족하면 그것이 실제로는 통제가 안 됩니다. 그럴 때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 선한 방향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겁니다.

 

예를 들면 믿음(saddhā)이 부족하다. 그래서 의심이 들거나 이렇게 하면은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더 강화시켜주는 방향으로 하는 거라. 불·법·승 그리고 계율을 지키는 것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더 강화시켜주는 거라.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아, 부처님은 훌륭하신 분이다' '아, 저 분의 가르침은 확실하다' 하는 생각을 점점 일으켜주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믿음을 확립을 시켜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그것은 (인드리야)의 영역에 속해버립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불·법·승이나 계율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의심이 일어나는 것은 아예 놔둬버리게 되는 거라. 그런데 그게 강화 돼가지고 완전히 확립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의심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러면 힘을 키워줄려고 하는 사람은 그것을 행함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가지고 의심이 일어나는 요인을 자꾸 제거시켜줘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의심을 관찰할 때 '어, 의심이 일어났네' 하면서 알아차리면서, 그것을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그 의심을 바라봐야 되는 거라.

그 의심이 분명하게 일어난 것을 알고 또 그 의심이 사라진 걸 분명하게 보고 나면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상태에서 다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확신들이 더 강하게 들 수가 있고, 또 부처님에 대한 확신들이 강하게 들 수가 있고. 이런 식으로 바뀌어나가게 됩니다.

그럴 때 그것은 (발라니)이 더 강해졌다고 얘기합니다.

 

노력(viriya)하는 힘들. 노력의 힘은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나쁜 것은 일어나지 않게 하고, 아예 안 일어나는 나쁜 것은 일어나지 않게끔 마음을 잘 단도리를 하고, 일어난 선한 것들은 더욱더 증장되도록 하고, 안 일어난 선한 것들은 일어날 수 있게끔 만들어 주고.

그 역할들을 분명하게 할 것 같으면,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근(인드리야)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리한다 해가지고 나태나 게으름이 안 일어나져요? 일어나집니다. 수행에서도 앉아서 고요해지면 경행 안 하고 좌선할라고 그럽니다. 본인의 마음에서 나태와 게으름이 일어난 것은 아예 까마득히 잊고, 나는 노력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압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맑은 상태에서 고요하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게으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잊어먹어 버리는 거라.

그럴 때는 게으름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관찰을 하고 '어, 게으름이 일어났구나. 그래서 내가 계속 경행 안 하고 좌선할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났구나' 하고 알고 빨리 일어나서 경행을 해가지고 노력의 힘을 배가시켜줘야 됩니다. 노력의 힘을 키워주는 방향으로 나가야 되는데 노력의 힘을 키워주지 않고 계속 좌선만 할려고 하는 거라. 이게 노력의 힘(발라니)입니다.

 

나머지 부분도 마찬가집니다.

알아차림(sati). 알아차리는 거? 신수심법 알아차리면 됩니다. 몸이면 몸을 알아차리고, 느낌을 알아차리고, 마음을 알아차리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알아차리고. 즉각 즉각 알아차리는 건 뭐가 알아차립니까? 마음이 알아차립니다! 어찌 보면 마음의 역할같이 마음만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의 힘은 강하지마는 실제로 사띠의 힘은 그리 강해져 있지는 않습니다. 계속 근(인드리야)의 훈련만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라는 겁니다.

 

사념처를 분명하게 확립해가지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되는데 자기 것으로 못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대상이 일어나면 대상이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기는 하는데.

예를 들면 지금 여러분들이 스님 보고 있죠? 그러면은 본다, 보인다고 '봄' '봄' '보임' '보임' 하고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스님 볼 때 모양이나 형태는 안 보입니까? 보이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마음에 대해서 관찰을 하고 마음에 대해서 집중하면 '보임' '보임'만 하게 된다는 거라. 자꾸 애써 무시합니다. 이 모양이나 형태를.

 

그런데 모양이나 형태는 어떻게 해서 갖춰진 거라?

'사띠'의 힘이 강해지면서 사띠에는 분명히 '삼빠자나(sampajāna)'라고 하는 그것들에 의해서 분명히 알아차리는 마음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사띠가 좀 더 예리해가지고 보니까 보여지고 이것들이 형태나 모양들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게끔 하는 능력들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그거는 자꾸 무시할려고 하는 거라. 사띠의 힘이 계속 키워져가지고 사띠와 삼빠자나가 함께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상태가 돼야 되는데, 사띠만 할려고 그러는 거라. '들림' '들림' '보임' '보임'... 안 커집니다. 사띠의 힘들이.

 

그래서 사띠를 확립해가지고,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라고 그럽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확립을 해야 되는데, '사띠'하고 '빳타나'를 하는 게 아니라, '사띠'는 하고 '우빳타나'는 빼버립니다. '사띠'만 계속합니다. 순간 순간의 '사띠'만 계속적으로 합니다. '사띠빳타나'라고 하는 것은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되어있는 상태입니다.

 

(발라)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거라. 사띠에는 분명하게 '삼빠자나'가 연결돼가지고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 거라. 그렇게 인식하지 않으면 오늘 공부한 거 내일되면 이거 다 까먹어 버립니다. 무슨 내용인지 모릅니다. 확립이 되어있으면 내일 돼도 뚜렷하게 다시 기억이 납니다.

 

삼매(samādhi) 부분도 마찬가집니다. 삼매는 일선정부터 사선정까지 쭉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음이 삼매에 든다고 하더라도 산란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삼매에 들었다. 본인은 생각할 때 아주 고요한 상태에 있어서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경적을 꽝 눌렀다. 그러면 깜짝 놀랩니다. 삼매에 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깜짝 놀래? 마음이 그 대상에 오롯하게 가있지 못하고 아직 산란한 상태에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깜짝 놀랩니다.

그런데 삼매에 든 사람은, 정확하게 삼매에 든 사람은 그것들에 대해서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일어났는지조차도 모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좌선하고 삼매에 들었는데 그날 폭우가 내렸는데 폭우가 내렸는지조차도 몰랐다는 거라. 그게 정확한 삼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삼매에 들면 강한 자극이 왔을 경우에는 그 자극에 반응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삼매에 들어도 그 좋은 상태를 만끽할려고 합니다. 들떠버리고 있다는 거라!

 

그거는 힘을 키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거라. 삼매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자재할 수 있는 능력이 키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그 삼매가 좋은 상태에 좋다고만 느끼고 빠져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든지 삼매는 일선정에서는 일선정에서 싫어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선정에서는 이선정 이것도 완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일어나야 되는 거고. 삼선정 사선정도 마찬가집니다.

사선정까지 얻었다고 하더라도 이것 가지고는 깨달음하고는 관계가 없구나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데,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느냐는 거라?

삼매에 드는 인드리야 가지고는 힘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 힘은 틀림없이 마음이 산란하거나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빠져나와 있을 때 힘은 생겨난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다섯 번째 지혜(paññā) 부분도 마찬가집니다.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분명하게 본다, 그걸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다, 그거는 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잘하고 있다고 해가지고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에게 생겨난 지혜를 '발라 냐나'라고 그럽니다. '인드리야 냐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발라 냐나'라고 합니다. 힘이 커졌을 때, 지혜의 힘이 커졌을 때 그것들로 인해서 특별한 능력이 생겨나는 것들, 부처님에게 있는 특별한 능력이 생겨난 것을 얘기할 때 '발라 냐나 10가지(dasa bala ñāṇa)'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능력들 하나라도 갖췄을까? 그거는 안 갖춰졌다고 치더라도 지혜제일 사리불 존자, 아니면 아라한들이 된 분들은 그분들의 특별한 지혜들이 있습니다. 그 지혜들은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상카루뻭카 냐나' 어떠한 상태든 고요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지혜들이 일어났을까? 그걸 일으켜주는 것은 힘(발라)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인드리야(근)의 영역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여러 가지 장애가 일어나서 장애에서 벗어나는 것도 힘(발라)이 있어야만 벗어날 수가 있는 거고, 여러 가지 지혜들이 일어나서 다른 특별한 능력들이 생겨나는 것도 힘(발라)이 있어야만이 가능해진다는 얘깁니다.

 

문자적으로만 자꾸 해석해가지고 아, 이것은 지혜다, 이것은 정진이다, 이것은 사띠다 하고 아무리 알고 있어봐야 그건 의미가 없어. 실제로는 힘이 갖춰지지 않으면 끊임없이 계속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런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마음이 항상 고요해지고 평온해지느냐면 안 된다는 거라. 급작스런 다른 대상이 닥쳤을 때는 마음이 팍 깨져버리는 거라.

 

여기 심념처를 주로 지도하는 스님이 있지만은 심념처의 위험성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심념처가 아주 훌륭한 수단인 건 틀림없는데, 그것 말고 다른 것들을 몰라버리면 위험성은 항상 존재한다는 거라. 또 여러분들은 순수 위빳사나를 한다고 칩시다. 순수 위빳사나를 하는 사람들의 위험성은 뭐냐면 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한 상태에서 그것들을 즐길 수 있는 상태가 되지 못하는 거라.

 

그래서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은 같이 병행해 주는 것이 참 좋은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수행에서도 몸에 대한 관찰과 마음에 대한 관찰을 같이 하는 것이 참 좋은 방법 중에 하나라 하고 스님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가지고 순수 위빳사나만 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든지 마음에 대한 관찰만 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든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굉장히 힘이 듭니다.

 

어찌 보면은 본인도 모르게 이기적인 마음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고, 본인도 모르게 그 상태에 만족해서 머무르게 되고, 그런데 실제로는 수행은 아직 멀었다는 거라. 또는 알아차리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내가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는 마음들을 일으키는 거라.

 

경전에는 뭐라고 돼있냐면, 게으름 '꼬삿자(kosajja)'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마음챙김을 놓아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실재하는 무상‧고‧무아의 성품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을 '뭇타삿짜(muṭṭha-sacca)'라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을 '윅케빠(vikkhepa)'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아윗자(avijjā)'라 해서 어리석은 것, 그것들에 흔들리지 않는 힘은 '발라(bala)'라고 합니다.

'발라를 끊임없이 수행하는 것으로써 기를 수 있다(bala-bhāva)'고 얘기합니다.

 

그 대신에 '아디목카 락카나(adhimokkha-lakkaṇa)'라 해서 확신이 들도록 마음에 결정심을 일으키는 것, 그리고 마음이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들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것을 '아칸빠나(akampana)'라고 흔들리지 않는 것들. 그리고 마음이 항상 분발(paggaha)하고 확립(upaṭṭhāna)되어 있는 것, 그리고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 것(avikkhepa), 꿰뚫어서 아는 것(pajānana), 이런 것들은 '인드리야 바와(indriya-bhāva)'라고 그럽니다. '인드리야'를 수행하는 것에 속합니다.

 

어떤 논문에서 근(根)과 력(力)의 차이점을 그렇게 설명을 해놓은 것도 있습니다. "긍정적인 부분에서 더욱더 키워주는 것, 부정적인 것들을 제거할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근과 력의 차이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일정 부분은 맞습니다. 일정 부분은 맞는데 일정 부분은 틀립니다. 인드리야의 영역에 속하는 것도 나쁜 것들이 일어나지 않게끔 방어하는 것들도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을 잘 조절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럴러면 끊임없이 마음에서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고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과, 수행해보니까 어때요? 대상이 약간 들뜨는 것이 있죠? 맨 처음 할 때, 그걸 '열의'라고 합니다. '찬다'라고 합니다. '마나시까라' 하고 '찬다'는 어떠한 경우든지 근과 력의 공통된 요소다 합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에 약간 떨리는 마음들이 있는 것들 그거는 노력하는 힘들에 의한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는 '찬다(chanda)'의 영역에 속한다는 거라. 그리고 대상에 끊임없이 마음을 기울이는 것, 대상으로부터 마음이 벗어나지 않게끔 하는 것 그걸 '마나시까라(manasikāra)'라고 합니다.

그 두 가지는 공통적인 요소입니다. 그게 없으면 그게 근이든지 력이든 간에 또는 노력의 요소든지 사띠의 요소든지 이런 모든 것들은 아예 배재되어 버린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분명하게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오력의 균형을 맞추라고 하는데, 오력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까?

"스님! 나는 사마타 수행만 할려고 그럽니다." 그런 사람은 오력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까? 또는 "나는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을 병행할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오력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까? 또한 "나는 순수한 위빳사나를 할랍니다." 그런 사람은 오력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까?

이게 동일할까? 오력의 균형이? 절대 동일하지 않습니다!

 

본인이 뭘 하고 있는걸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아까 얘기한 근의 영역에 속하는 네 가지 계율에 대한 확신들, 그다음 불··승에 대한 확신들을 끊임없이 계속 강화시켜줘야 합니다. 이게 강하면 강할수록 마음은 고요해지고 하나의 대상에 몰입하기가 쉽습니다.

 

그다음에 위빳사나와 사마타 수행을 병행하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데 신경쓰면 안 됩니다. 하나의 대상만 잡아서 고놈만 자꾸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그걸 '에깍가따'라고 그럽니다. 집중하는 힘! 이 대상 집중하고 놔버리고 또 저 대상 집중하고 놔버리고, 하나의 대상만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듣고 있다, 그러면 듣는 데만 알아차리려고 하고 보는 것은 아예 차단을 자꾸 해야 됩니다. 집중하는 힘 에깍가따라는 하나의 힘에 집중하는 힘이 강하지 않으면 사마타하고 위빳사나하고 동시에 병행하기 힘듭니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오력 중에서 에깍가따만 계속적으로 많이 키워나가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돼요? 어떠한 대상이든지 삼법인으로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무상‧고‧무아로.

'이것은 무상한 것이구나, 이것은 불만족스러운 것이구나, 어떤 것에도 영혼이라고 하는 나의 것, 나라고 하는 것이 없구나!' 하는 식으로 자꾸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런 식으로 지혜가 계속 강화되는 식으로 드러나집니다.

 

쉽게 말하면 어떠한 수행을 하느냐에 따라서 오력은 각자 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런데 경전에는 천편일률적으로 동일하게 써놓았습니다.

"믿음의 힘과 지혜의 힘은 균형을 맞춰야 된다.

노력하는 힘과 삼매의 힘은 균형을 맞춰야 된다.

사띠는 어떤 식으로든 강화돼야 된다."

그런데 자신이 그것대로 할 수가 없는데 어떡할 거라?

 

그래서 오력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인식하고, 나에게 부족한 것은 어떤 것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서, 자기 수행법에 따라서 그것을 더욱 강화시키든 아니면 그것을 통제하든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일한 패턴이 돼버립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이든 사마타 수행을 하는 사람이든 동일하게 자꾸 오력을 볼려고 하기 때문에 거기서 문제가 자꾸 생겨나버립니다.

 

다섯 가지의 힘 부분을 적어놓았습니다.

믿음의 힘(saddhā-balāni) 부분은 두 가지로 적어놓았습니다.

··승 삼보와 업(kamma), 업의 결과(vipāka)에 대한 믿음! 그거는 더욱더 일어날 수 있게끔 자꾸 만들어줘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의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서 마음이 분명해지고 평온한 상태가 되는가?

오늘 탁발을 했습니다. 상가에 대한 믿음이나 부처님이나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탁발을 할려고 그럽니다. 그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예 탁발을 안 할려고 그럽니다. 안 옵니다 그런 자리에는. 법을 듣는 자리든지 수행하는 자리에만 갈려고 그러지 안 옵니다 그런 때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게 있기 때문에 와서 합니다. 그런데 그거 할 때 어떤 마음들이었어요? 마음이 분명해지고 평온한 상태가 됐습니까?

분명해졌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이 걸어오는 걸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내가 넣을 때 넣는 걸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빼먹어 버리는 거라. 그럼 믿음을 기르는 것이 반쪽짜리가 자꾸 돼버립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이 두 가지는 항상 같이 일어나져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만이 그것이 확신이 돼나갑니다. '아, 이것을 하면서 내 마음이 참 깨끗하고 분명하게 내가 하는 것을 알아서 나는 너무 좋다'하는 마음이 들었을 때 확신들이 생겨납니다.

 

맹목적으로 삼보에 대한 확신, 게송 따라서 '아라한 삼마 삼붓도 바가와' 그거 한다고 해서 계속 길러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평온한 상태의 자신의 마음이 되고 나서 담마에 대한 확신들이 들고, 부처님에 대한 확신들이 들고, 그것을 따르는 상가에 대한 확신들이 들고. 또 그렇게 할 때 나에게 오는 결과들에 대한, 업의 결과들에 대한 확신들이 들게 되는 겁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 균형이 잡힌다는 것은 이렇게 믿음들에 대한 것들이 분명하게 힘이 키워질 때 균형이 잡히는 시발점, 시초가 됩니다.

단순히 그냥 경전에서 "믿음이 수행의 기본이고 삼매의 기본이다" 하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해졌을 때 삼매에 들 수 있는 겁니다. 그 속에서는 나는 감각적인 것들, 이 세상에서 집착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이미 떠나버립니다. 욕계의 세계로부터 떠나있는 마음이 되어야만이 색계선정에 들 수가 있는 겁니다. 욕계로부터 떠나지 못하는 마음은 색계선정, 1선정, 2선정에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사마타 수행뿐 아니라 위빳사나 수행에서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아, 이것은 무상한 것이구나' 아는 것도 마음이 깨끗한 상태에서 그 마음이 욕계로부터 떠나있을 때 가능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믿음을 강화시킬 때, 마음이 분명하게 대상을 알아차리고 평온한 상태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믿음은 절대 키워질 수가 없는 거라. 그 힘이 증장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노력의 힘(viriya-balāni)!

믿음이 기초가 되어야 노력의 힘이 강하게 일어나집니다. 믿음을 분명하게 그러한 방법으로 믿음을 자꾸 확립해 나가면은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래야만 내가 더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날 거 아니라? '어, 그리하니까 내가 점점 더 나아지네'

다음에 또 할려고 하는 마음이 자꾸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아, 내가 언젠가는 도와 과에 이르겠지' 하는 결정심을 분명하게 내릴 수가 있는 것이지. 그게 노력입니다. 그냥 무작정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확신 그리고 서원을 가지고 있을 때 노력의 힘들은 강화된다 하는 거라. 바른 믿음, 믿음이 어떤 것인가 하면서 그 힘을 키워나가는 것으로 인해서 노력의 힘들은 따라오게도 되고 그것들을 더욱더 키워나갈 수가 있게 됩니다.

 

3페이지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오력 부분이 지금 16페이지까지 나갔죠? 그런데 16페이지 말고 또 더 있습니다. 지금 작성해 놓은 게 25페이지까지인가 돼잇습니다. 이 오력 부분이 다음 한 시간 가지고 다 되겠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렇게 계속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력에 대한 걸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인식해서 그것을 수행에서 힘을 키울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