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이상적인 불교도의 죽음 모습 (20180406. 대구)

담마마-마까 2022. 9. 28. 12:50

https://youtu.be/m8uvQxpPl_o

* 이상적인 불교도의 죽음 모습 (20180406. 대구)

 

오늘은 「이상적인 불교도의 죽음 모습」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죽어있는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으로 다가갈 때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들을 얘기할게요. 하나 물어볼게요.

여러분들이 인제 죽음을 기정사실화해서 받아들이게 될 때, 쉽게 말해서 만약에 암선고를 받았다, 그래서 1개월 후에 죽는다, 하고 확정이 됐다, 아니면 지금 몸이 많이 안 좋아가지고 곧 죽어야 되는 상황이다, 상태를 봐가지고는 하루 이틀 못넘기겠다, 이랬을 경우 그럴 때 여러분들은 할 수 있는 게 뭘까?

 

요즘 말하는 임사체험이라는 그런 거 말고, 죽어보는 연습하는 거 있잖아. 관에 들어간다든지 해가지고, 그러고 나서 관뚜껑 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죠? 그런 거 말고! 또는 다른 사람이 죽은 모습을 보고 ‘아, 나도 죽는구나’ 하고 그걸 객관화시키는 경우, 그런 것도 빼고!

이게 확정돼있는 상태, 그게 기간이 오래지 않아가지고 인제는 '반드시 죽는다' 하고 자신이 받아들이게 될 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게 불교도일 거 같으면 뭘 할 수 있을까?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보통 세 가지를 합니다.

 

첫 번째가 스님들 초청해가지고 공양을 올립니다.

내가 지금 몸져 누워가지고 일어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의식이 있는 상태일 거 같으면,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립니다. 내가 다음 생에서 더 좋은 세상 선처에 태어나길 바랍니다." 하고 바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조금 젊은 스님들을 초청했을 때는 스님들에게 와서 부처님 말씀, 경전을 독송하도록 해달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서 하는 경전 내용들은 죽음 직전에 아나타삔디까에게 했던 부처님과 사리뿟따 존자가 임종 직전에 했던 말씀이 있습니다. 그걸 토대로 해서 경전을 만든 게 있습니다.

부처님이 한 게 뭐가 있느냐면,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과 계를 지키는 것들, 그것만 잘하면 네가 선처에 태어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삼보에 대한 독송, 그다음에 계를 지키는 것의 이익에 대한 독송, 그런 것들이 주가 되고.

 

또 사리뿟따 존자 같은 경우에는 몸과 마음을 분해해가지고 얘기합니다.

"이 몸도 네 것이 아니고, 이 마음도 네 것이 아니고, 귀도 네 것이 아니고, 들리는 소리도 네 것이 아니고, 보이는 대상도 네 것이 아니고, 이런 식으로 6처, 6근, 18계 이런 식으로 쭉 분해하면서 그것은 어떤 것도 네 것이 아니다." 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을 합니다. "헤뚜 빳자요, 아람마나 빳자요..." 하면서 쭉 하는 게송이 있습니다.

그걸 보통 '빵수꿀라 게송'이라고 그렇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걸 독송하든지,

 

또 다른 경우에는 죽음에 대한 것 그걸 "사수관"이라고 그러죠. "나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은 내정되어있다, 이것은 어떤 식으로도 거역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게송이, 그걸 "사수관" 게송을 한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독송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다음 마지막 세 번째는 조금 법랍있는 스님들을 초청했을 때는 직접 법문을 들려주기도 합니다.

법문 들려주는 것이 어찌 보면 가장 빠른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큰스님들이 가서 돌아가실려고 하는 사람들한테 “의식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고 의식이 없다 하면 그건 할 수 없는 거고, “의식이 있습니까?” 하면 고개를 끄덕끄덕하든지, “의식이 있으면 손을 잡아보세요!” 하면 손을 꼭 잡는다든지 해서 의식이 있다고 판명이 됐을 때는, 부처님 말씀 중에 일부를 발췌해가지고 들려줍니다.

 

그래서 보통 들려주는 것들이 죽음 직전에 일으키는 생각이 참 중요합니다.” 그런 얘기들을 하면서, 내 말을 듣고 있으면 호흡을 따라해보세요 하면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을 관찰하게 한다든지 하고, 그래서 사띠가 유지되도록 한다든지,

또는 "죽을 때 일으키는 생각이 다음생을 많이 좌우하니까, 평소에 잘했던 거 꼭 생각하면서 마지막 임종을 맞으시오." 한다든지.

또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잘하는 것 중에서 "나는 반드시 선처에 태어날 것이다 하는 확신들을 가지고 죽음을 맞으라" 하든지,

아니면 삼보에 대한 믿음들은 내가 있는지 다시 돌아보고 그것에 대한 확신이 딱 들었다 그러면 '아, 내가 삼보를 믿고 잘 살아왔다' 하는 생각이 들 것 같으면, 인제는 당신에게는 바른 견해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바른 견해가 생기도록 해서 '아, 이 세상은 참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나도 그 이치 따라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구나.' 하고 반드시 받아들이도록 하고, 무상··무아에 대한 견해가 바로 성립될 수 있도록 법문을 합니다.

법문하는 것은 그 사람의 근기에 맞게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렇게 법을 설하게 됩니다.

 

그게 보통 테라와다 불교권에서 임종을 맞는 사람들에게 가서 하는 것들입니다.

크게 나누면 세 가지죠! 공양올리는 것, 독송하는 것, 그다음에 법을 설하는 것.

 

그러고 나서 돌아가시면 어떻게 할까?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같이 삼오제(삼우제) 지낸다 하면, 삼오제 지낼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돌아가신 분이 인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유가족들이 "내가 올린 이 공양은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공양 올립니다. 그래서 이것을 돌아가신 분께 회향합니다." 회향하는 것만 할 수 있는 거라. "내가 이 법문 듣는 것도 돌아가신 분에게 회향합니다."

직접 그 돌아가신 분이 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스님들도 와서 법문해주는 것이 돌아가신 분을 대상으로 "당신은 죽었으니까 빨리 극락왕생하시오" 이렇게 얘기하는 법도 없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한테 "봐라. 너도 저와 같이 죽는다. 그러니 빨리 공부해라. 빨리 바른 견해를 가져라." 이런 법문을 합니다.

 

경전을 독송하더라도 올리는 사람들, 유가족들에게 "너희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하는 것이 우선인 것이지 '내가 경전독송 하는 것으로 인해서 돌아가신 사람이 극락왕생하기를' 하고 축복게송하는 법도 없다는 거라.

삼일간 스님들이 그렇게 하지만 그건 어떻게 보면 살아있는 사람들이 우선인 거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공덕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이지, 돌아가신 분에게 그게 회향되는 것인지 아닌지, 법문하는 스님들도 모르고 유가족들도 모르고 아무도 모릅니다. 정직하게 얘기하면.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돌아가시고 나서 하려고 하지 말고, 돌아가시기 전에 해라"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도 그것은 반드시 명심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눈과 귀와 코가 있고 할 때, 의식이 있을 때 법문을 하나라도 더 듣고, 또 바른일이라도 하나 더 하고, 또 수행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할려고 해야 되는 것이고, 그 힘으로 내가 다음생에 좀 더 좋은데 태어났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이지, 그냥 무작정 해가지고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임종 순간에 일으키는 생각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죽음'을 보통 빨리어로 '마라나' 라고 그럽니다.

'죽음으로 다가간다' 할 때 그럴 때는 '아산나 마라나'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인제 죽음은 확정적이어서 곧 내가 죽는다 해서, 요즘 불교에서도 호스피스 교육들 많이 하죠. 그거와 같이 인제는 죽음이 확정되어 죽음으로 다가가는 사람들, 임종을 도와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도 사실은 이런 교육이 필요합니다.

무조건 "아이고, 그냥 편안하게 돌아가십시요." 이렇게 한다고 해가지고 사람이 다음생을 좋은 생을 받는 법은 없다는 거라.

 

또 여러분들 잘하는 거 있잖아. 돌아가시는 사람한테 “죽지마! 죽지마!”

돌아가시는 사람이 의식이 있으면 그거 들으면 얼마나 시끄럽겠어. 그럼 쉽게 일으키는 생각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이고, 시끄러워 죽겠네’ 하는 나쁜 마음이 일어나든지, 둘 중에 하나일 거라.

그거는 살고자 하는 마음도 악한 마음이고,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악한 마음인데, 그것으로 인해서 임종이 일어나면 다음생이 좋겠어? 마지막 일으키는 생각이 다음생을 좌우하는데! “죽지마! 죽지마!” 하는 그것도 사실은 바르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보통 '임종'이라고 하는 빨리어 단어를 '아산나 마라나'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또는 '짜와 마야' 라고 그렇게 얘기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미야 마야'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거는 뭐냐면 의식이 흩어져버린다는 거라. 꽃잎이 하나씩 둘씩 떨어져버리는 꽃잎과 마찬가지로 그건 다시 붙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게 흩어져버리는데 뭐 하러 '흩어지지 마라' 한다고 꼭 붙잡아둘 수 있는 게 없다는 거라. 그건 자연적으로 꽃잎은 떨어질 위치가 될 것 같으면 자연스럽게 하나씩 둘씩 떨어져가지고 나중에는 하나도 안 남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의지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그래서 '미야 마야'나 '짜와 마야' 라고 할 경우에는 의지할 곳이 전혀 없다는 거라. 나를 의지할 수도 없고, 나의 몸이나 나의 마음도 의지할 수도 없고, 나의 가족도 의지할 곳도 없는 거고, 나의 재산도 의지할 곳도 없는 거고, 아무것도 의지할 곳이 없다고 얘기할 때 그것도 '임종'이라는 의미로써 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임종에 이르렀을 때는 그 어떤 곳도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뭘 의지해가지고 죽어야 될까? 여러분은 뭘 의지하고 죽을 수 있을 것 같애요?

"나무아미타불"을 그걸 의지해가지고 할까? 그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것도 염불 종류라고 그럽니까? 그것도 좋은 방법 중에 하납니다. 어쨌든 나무아미타불을 하면서 마음은 나무아미타불 하는데 마음이 가 있으니까 싫은 마음은 안 일어나겠죠. 싫은 마음이 안 일어난 상태에서 임종을 맞게 되는 것도 좋은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보통 붓다눗사띠 해가지고 부처님에 대해서 생각을 일으켜가지고 부처님을 찬탄하는 마음을 내서 그것으로 인해서 임종을 맞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 중에 하나로써 돼있기 때문에 꼭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실존하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인 것이고, 아미타불이 실제 존재했던 것인지 아니면, 부처님이 실제 존재했던 인물인지 그것은 차후의 문제인 거고, 그렇습니다.

 

왜 임종 때 이렇게 중요하다고 얘기할까?

빨리어 주석서에는 임종 때 다음 순간이 결정되는 것들을 여러 가지로 쭉 적어 놓은 게 있습니다. 실제 중요한 게 뭘까?

그 4가지를 다 통틀어가지고 실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 만약에 예를 들어서 주석서에서 지은 큰 업이 다음생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여러분 살아가는 것을 한 번 보십시오. 그렇게 큰 업 짓는 거 있어요? 크게 잘못해가지고 엄마 아버지 죽이는 적 없죠? 크게 마음을 내갖고 절 하나 탁 지어주고 한 것 없죠? 아마 비슷비슷합니다. 쉽게 말하면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은 고만고만 합니다. 어찌 보면 플러스 마이너스에서 왔다갔다 하는 정도지 크게 그게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실제로 빼고 나면은 보통 4가지가 탁 떠오릅니다.

 

첫 번째가 뭐냐면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떠올리는 생각,

내가 과거에 잘했던 게 탁 떠오르는 건지, 과거에 못했던 게 탁 떠오르는 건지.

어쨌든 나쁜 짓 좀 많이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중에 그래도 착한 일 한 것들도 한두 개는 있을 거니까 마지막 순간에 그게 탁 떠오른 사람은 경전대로 할 것 같으면 천상에 태어납니다. 경전에는 그런 설명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좋은 생각 탁 떠올리게끔 해주는 것은 보통 습관지어진 사람들이, 보통 부정적인 생각이 많은 사람들일 경우에는 나쁜 게 떠오를 가능성이 크고, 긍정적인 생각들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잘한 것들을 떠올릴 가능성이 크고 그렇습니다.

 

여러분들도 평소에 살아갈 때 자꾸 남 비난한다든지 부정적인 것을 자꾸 생각하기보다는, 지지리도 못나도 ‘그래. 난 잘할 수 있어’ 하는 긍정적인 생각, 남에게 칭찬하는 말들을 많이 하고 하는 긍정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마지막 임종 순간에 떠오르는 생각이 좋은 곳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거라.

그게 임종 순간에 참 영향을 많이 미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크게 잘하고 크게 못한 것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마지막 임종 순간에 비중이 크게 미치는 것은 뭘까? 계행입니다. 계행!

조금 전에도 오계를 받았죠. 계행 잘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가지고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대부분은 잘못 살아오고 나쁜 일을 했다는 것은 계행을 안 지켜가지고 나쁜 일 하고 실수한 것들인 거고, 잘 살아왔다는 사람들은 보면 계행을 잘 지키고 했기 때문에 선한 일들이나 선한 마음들이 많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생전에 살아올 동안에 선업이 많으냐, 악업이 많으냐 하는 것은 계행을 잘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의 문제로써 판별된다고 해도 사실은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살아있을 때 재가불자의 의무가 상계(常戒)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항상 지켜야 하는 계(戒), 여러분은 뭡니까? 오늘 받은 오계입니다.

오계는 어떠한 경우도 지켜야 되는 거라. 그게 테라와다 불자의 의무라. 계를 지키는 게 훨씬 많고 그런 날이 훨씬 많았다고 할 것 같으면 다음 세상은 선처에 태어날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거라.

계를 무시하고 수행한다? 계를 무시하면 마음이 안정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도 못합니다. 수행이 잘 될래야 잘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칠청정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계청정 다음에 심청정이 나와 있지, 심청정 먼저 하는 법이 없다는 거라. 칠청정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 순서를 따르게끔 되어있습니다. 순서를 바꿔가지고 심청정 먼저 하고 계청정 한다? 그런 법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게 두 번째고.

 

그다음에 세 번째,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죽기 전에 스님들을 초청한다고 그랬죠? 왜 그렇겠어요? 스님들 밥 먹으러 와가지고 떠들고 놀겠어? 그래도 밥만 먹고 가는 경우는 대부분 없습니다. 뭐라도 부처님 말씀 중에 하나를 전해줄려고 하게 되는 거고, 부처님 말씀 경전 독송할 때도 도움되는 얘기들, 게송들을 하지 쓸데없는 걸 하지는 않을 거고. 그냥 산만하게 그냥 관념적으로 무슨 명호만 쭉 부른다든지 이런 경은 없다는 거라. 법을 설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쉽게 말하면 세 번째가 뭐냐면 그래서 임종 순간에 듣는 소리, 무슨 소리를 듣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법을 들으면 법을 들으면서 죽음을 맞을 거 같으면 참 그것 같이 좋은 것이 없고, 부처님 말씀 독송하는 것 들으면서 한다, 그것 같이 좋은 것도 없다는 거라. 또는 스님들 공양하는 모습들을 보면 편안하게, 그 많은 스님들이 모여있어도 떠들면서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참 고요합니다. 그 모습만 봐도 마음에서는 환희심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럼 마음에서 ‘아, 내가 공양 올리기 참 잘했어.’ 하는 소리들을 합니다. 임종 순간에 듣는 소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들도 누가 주변에 그런 분이 있다, 그러면 괜히 울고불고 “더 살아라” 하고 괜히 그런 얘기 하지마라. 오히려 더 나쁘게 작용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특히 수행하는 스님들이 잘하는 게 호흡을 알아차리게끔 하는 것.

마지막 순간에 사띠를 하고 있는가, 아닌가? 이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들 감기 걸려봤으면 알 겁니다. 호흡 자연스럽지 못하죠.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걸 그냥 알아차리는 거라. 죽음의 순간에 호흡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또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사띠가 있을 거 같으면 숨을 들이쉬는 숨이 먼저인지 내쉬는 숨이 먼저인지, 잠자리에 들 때 어떤 숨을 마지막으로 잠자리에 드는지, 그거 여러분들 구분해가면서 자고 일어나고 해요? (수행자 : 아니요) 그마만큼 사띠를 안 한다는 얘기라. 평상시에 사띠를 안 하면 죽음의 순간에는 더더구나 힘이 없기 때문에 사띠를 못합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가서 억지로 해주는 거라. 코에다가 요렇게 손가락을 대보고 어느 길이만큼 지금 숨을 쉬고 있나 하는 걸 측정을 해봅니다. 이게 펄덕펄덕펄덕 하는 경우도 있을 거고, 아주 가늘어가지고 감촉을 느끼지 못할 때도 있고, 손을 대가지고 안 될 거 같으면 이게 파르르르 떨리도록 돼있는 깃털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걸 대가지고 측정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 스스로는 못하니까 스님들이 가서는,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이렇게 옆에서 따라해줍니다. 그러면 죽어가는 사람은 그걸 자기 호흡에 맞게끔 알아차리면서 죽음에 든다는 거라.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사띠를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는 참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임종 순간에 어떤 견해를 지니고 있느냐? 바른 견해를 지니고 있는건지, 그렇지 않은 견해를 지니고 있는지.

견해는 다르게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견해만 지니더라도 이생에서 수다원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그건 전제조건이 뭐라? 바른 견해입니다. 그 바른 견해는 바른 '빠사다(pasāda)', 바른 확신으로 인해서 일어나지는 겁니다.

'아, 나의 스승은 부처님이구나. 참 훌륭하신 분이구나.' 그래서 나는 그 부처님이 가르치신 것들을 '아, 이것은 무상한 것이구나, 이것은 고이고, 이것은 팔정도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이해한 것들을 내가 잘 실천할 때 수행을 통해서 실천하든, 아니면 일상에서 십업(十業), 열 가지 선한 업을 짓기 위해서 보시를 하고 계를 지키고 여러 가지를 하고 하면서 그걸 실천하든, 그걸 실천하는 것으로 인해서, '아, 이렇게 실천해서 부처님 가르침이 맞구나, 그래서 그 가르침을 설했던 부처님은 참 훌륭하신 분이구나' 하는 것들을 다시 증명할 수가 있고, '그분들이 2600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왔구나.' 그게 출가한 스님들이든 아니면 일반인들이든.

 

그런 것들에 대해서 확신들을 분명하게 가지게 될 때 그럴 때 견해는 바로 서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아, 나에게는 그런 바른 견해들이 서있다'고 확신이 들것 같으면 다음생엔 틀림없이 선처에 태어납니다. 그런데 견해를 지니지 않고,

아나타삔디까 여러분들이 잘 알죠? 그분이 수다원이 되기 전에 잘 못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부처님 말씀들에 확신들이 잘 안 드니까, 남에게 부처님 말씀들을 조리있게 잘 설명해주지 못해.

또 하나는 뭐냐면 견해가 아직 완전하게 정립이 안 돼있으니까, 부처님이 자주 있는 급고독 장자의 아라마에 있지 않을 거 같으면 다른 종교를 믿어버리는 거라. 그렇게 큰 정사를 건립했던 분인데, 초기에는 그랬습니다. 그게 뭐냐면 바른 견해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도 죽음 직전에 누가 목사님이 와서 “하나님 믿으시오 .천국갑니다.” 하면 홀라당 넘어갈지 누가 알아? 그건 모르는 거라. 그마만큼 바른 견해가 참 중요합니다. 아니면 “죽고 나서 나 49재 할 돈 여기 마련해놨으니까 49재 해줘.” 이럴지 또 누가 알 거라? 그런데 사실은 쓸데없는 것들이고 그게 바른 견해가 아닌 줄 알면서도 마지막 죽고 나서 좋은데 태어날려고 그리들 하는 거라.

 

이런 것들이, 보통 이렇게 다섯 가지 정도가 보통 죽음의 순간에 다음생을 결정짓는 역할들을 합니다.

주석서에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들을 설명을 해놓았지만 실제로는 보면 이겁니다. 그래서 경전에도 아무리 나쁜 짓을 하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좋은 생각 한번 탁 했는데 천상에 태어나고, 바른 믿음을 지녀가지고 바른 견해가 탁 확립되니까 천상에 태어나고, 굉장히 많이들 일어납니다.

그마만큼 임종의 순간이라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또 하나는 임종의 순간에 깨달음에 이르는 분들은 숱하게 있습니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평상시 때는 그렇게 안 되던 게,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게 죽음의 순간에 그 짧은 동안에 가능할까?

여러분들에게는 선택의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확정돼있기 때문에 그걸 여러분들이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저 많은 재산 내가 가져가지 못한다는 걸 분명히 압니다. 체념해버리게 되는 거라. 버려버리게 되는 거라.

탁 집착을 놓는 순간에 내가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다, 호흡이 아주 잘됩니다.

탁 집착의 순간에 내가 분명하게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들을 체험을 탁 하게 됩니다.

 

그게 죽음의 순간에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되는 그런 부분입니다.

 

그런데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한번 쭉 읽어보십시요. 「이상적인 불교도의 죽음 모습」 여기서는 맨 처음에 얘기하는 거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출가자든 재가자든 아니면 나이가 많든 적든 또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부처님은 항상 평등하게 말했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재가자도 아라한에 이를 수 있고, 또는 어린아이라고 하더라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아라한에 이르고 나서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그건 차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은 누구든지 평등합니다.

'나는 수행을 많이 안 해서', '나는 출가하지 않아서', '나는 그냥 공덕이나 쌓을래', 요런 생각들 애초부터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래서 그 비유를 찟따 거사에게 들어서 쭉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왜 이걸 비유를 해놓느냐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야 됩니다. 마음이 항상 어디에도 끄달려 들어가지 않고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되는데,

그것들이 빨리어 경전 중에 상요자나(saṁyojana(결박·구속·집착) 라고 하는 거하고,

상요자니야 담마(saṁyojaniyā dhamma(속박되는 대상·현상) 라고 하는 집착되는 것 결박되는 것과 속박되는 대상·현상이라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구분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자! 한번 예를 들어볼게요. 나하고 누구하고 한번 싸웠다. 누가 잘못했어요? 만약에 예를 들어서 스님 편드는 사람은 상대방이 잘못했다 할 거고, 또 상대방의 친지들은 스님이 잘못했다 할 거고, 그럴 겁니다. 아마 이것 가지고 토론을 할 것 같으면 밤새도록 해도 답이 안 나옵니다. 그럼 누가 잘못한 겁니까?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 예쁜 여자를 봐가지고 탐욕을 일으켰다. 이 눈이 잘못했다 해가지고 눈을 파낼 겁니까? 아니면 탐욕을 일으키는 제자가 있으니까 제자를 죽여버려야 됩니까? 꼭 그와 같습니다.

 

탐욕을 일으킨 건 뭐가 일으킨 겁니까? 마음이 애착을 가지고 집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으킨 겁니다. 이게 잘못돼가지고 이걸 바꿀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눈이나 여자를 상대를 해가지고는 답이 안 나온다는 거라.

그런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걸 안 하고, 요 두 개, 요 속박되는 대상이든지 이런 걸 가지고 계속 문제가 됩니다. '내가 잘못됐니, 니가 잘못됐니.'

여러분이 적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를 하고 있다면 그것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야 된다는 거라. 사회에서는 여러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러 문제들에서 뭘 내가 지금 다스려가지고 바로 잡아줘야만이 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들을 알아야만이 그 문제를 바르게 해결해나갈 수 있다는 거라.

 

예를 들어서 “그건 너가 잘못했어” 한다고 해가지고 그 문제가 해결되느냐는 거라. 절대 안 됩니다. 또는 “너는 그래도 부처님 가르침 많이 알고, 가르침 따라서 사니까 너가 맞아. 무조건 너는 이거 따라라!” 그거 해결 안됩니다. 그렇게 해결할 거 같으면 911테러 때 미국에 빌딩 두 개 폭파한 사람들은 자기가 그렇게 순교하고 나면 자기 신 옆에 간다는 믿음이 있을 건데, 그것도 맞는 거네? 그런 법이 없다는 거라.

 

그 부분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 부분뿐 아니라, 이 찟따 거사는 살아있을 동안에 법에 대한 가르침을 분명하게 이해했고 본인도 그런 체험을 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도 아주 잘했고, 출가자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충분히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바르게 이해할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쭉 한번 읽어보십시요. 임종 때 하는 것들.

그런데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도 나쁜 습관들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공덕 많이 쌓는 것들, 천상에 태어나려고 공덕 쌓습니다. 보통 얘기하는 것이.

‘나는 뭐 쎄가 빠지게 수행해봐도 하나도 안 되더라.’ 해서 그건 포기를 해버리고 내가 착한 일만, 좋은 일만 자꾸 할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스님들한테 탁발나오면 보시 올릴려고 그러고 그래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잡생각 하더라도 절에 와가지고 불재일 지킬려고 그러고, 흰옷 입고 와가지고. 그렇게 갖가지 공덕행을 합니다.

그래서 “너 왜 그러는데?” 하고 물어보면 “천상에 태어날려고요” 그럽니다.

 

그런데 경전에는 뭐라고 되어있느냐면, 천상에 태어나는 조건은 그것으로 인해서 천상에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없다는 거라. 그것이 중요한 부분이라서 행해야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임종 순간에 그것으로 인해서 ‘참 잘했어’ 하면서 좋은 생각을 일으켜야 천상에 태어나기라도 하는데,

그것은 좋은 생각으로 인해서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지 행해온 것들로 인해서 태어나지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라. 그런데 그렇게 습관 쌓아오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에 좋은 생각을 일으키지도 못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또 해야 돼. 그렇다고 해가지고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는 거라.

 

그렇게 좋은 것일 거 같으면 천상신들도, 여기에도 얘기해놓았지만 찟따 거사한테 죽고나서 "전륜성왕이 되라고 서원하라"고 그럽니다. 천상에 태어나서 자기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신이 돼주시오' 하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륜성왕이 되시오" 그렇게 얘기합니다.

찟따 거사는 뭐하는 사람이라서? 계율을 잘 지키고 법을 청정하게 잘 따르고 거기에 대해서 체험을 해서 불환과에까지 이르른 사람이라. 그런 사람이 뭐 좋다고 '전륜성왕이 되시오' 하고 천신들이 와가지고 그런 얘기를 할까?

'범천신이 되라고 서원하시오' 하는 것은 결정심을 내라는 뜻입니다. 아딧타나.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전륜성왕이 되라는 거라. "죽지마시오" 하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전륜성왕은 불교적으로 얘기할 때 보통 일반적으로 아소카 왕을 전륜성왕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영토도 많이 넓히고, 또 법에 따라 통치를 하고. 그런데 그게 순서가 다릅니다. 불교적인 전륜성왕 이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만약에 '나는 오늘부터 오계를 지키니까 모기 한 마리도 안 죽인다' 하고 딱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모기를 안 죽이고 어떠한 생명에 대해서도 자애의 마음을 자꾸 낸다, 그럼 자기의 마음을 점점 넓어지게 됩니다. 자애의 영토가 점점 넓어지게 됩니다. 다른 식구들이 나를 봤을 때 ‘어, 저 사람 바뀌었네’ ‘그럼 나도 한번 그래볼까? 나도 저렇게 편안한 마음이 되는가?’

그러면 그 사람한테 너도 요렇게 요렇게 자애수행 하고 너도 요런 결정심을 내봐라. 어느 생명도 죽이지 않을려고 해봐라. 그럼 그 사람은 더 넓어집니다. 두 사람이 되고, 세 사람이 되고, 가족 전체가 됩니다.

이게 바른 전륜성왕의 방법입니다.

 

그걸 한 나라로 칠 거 같으면 영토확장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먼저 그것들에 대해서 잘 다스리게 될 때 그것은 넓혀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내 자식이라고 해서 내 것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영토확장이 됐다고 해가지고 내 것이나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법이 점점 더 넓어져가게 될 때 그것은 내가 전체를 다스리는 거와 마찬가지가 됩니다. 법이 전체를 다스리게 됩니다. 불교적으로 전륜성왕이라는 것은 그런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륜성왕이 아니고 그런 개념인데, 신들이 와서 찟따 거사한테 "전륜성왕이 돼라" 하고 그럽니다. 왜 전륜성왕이 되라고 그럴까?

 

그마만큼 천상에 있는 신들도 윤회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욕계천신이든 색계천신이든 어떠한 천신이라고 하더라도 그 세계 밖의 것들은 알 방법이 없다는 거라. 욕계 천상에 있는 신일 거 같으면 욕망이 많아가지고 아주 평화롭고 잘 살아가는 것, '나는 다음생에는 전혀 끼니 걱정 안 하고, 잘 살아가지고 돈 걱정 안 하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 그런 거 바라게 돼있다는 거라.

또는 선정삼매 잘 누리고 해가지고 그런 색계천상 신일 거 같으면, 평온하고 고요하고 행복한 그런 것들이 아주 강해진 그런 것들, 그래서 거기서 머무는 것들이 항상 머무를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도달하라고 할 거라.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거라.

 

그런데 찟따 거사는 그것을 거절합니다. 왜 그럴까? 그것도 윤회의 세계라는 거라. 윤회의 세계는 항상 안정돼있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죽음을 맞게 돼있고, 그리고 윤회의 세계라는 것은 항상 무상한 성품을 지닙니다.

내가 발원한다고 해가지고 전륜성왕이 되었다. 평생 살 수 있어요?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얘기하는 것이 무상하고, 덧없다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은 다 버려버려야 되는 것들이라. 버리고 가야 되는 것이지 그 전륜성왕이 좋다고 그걸 서원한다든지, '나는 죽고 나서 천상에 태어나기를' 하고 서원한다든지 그런 거 하지 마라라는 거라.

 

단지 다음 세상에 그래도 전륜성왕이 되든지 천상에 태어날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도덕을 잘 지키고, 계율을 잘 지키고, 선법을 따르는 것! 선한 법을 따라가는 것!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래서 임종 때 찟따 거사가 한 것이 있습니다.

평상시 때 "붓다·담마·상가에 대한 믿음을 반드시 지녀라."

여기도 돼있죠? Buddh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ā bgavissāma.

(붓데- 아웻짭빠사-데-나 사만나-가따- 바가윗사-마.)

삿다(saddhā)라고 안 하고 빠사다(pasāda) 라고 돼있습니다.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삿다'라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보통 '믿음'을 얘기하는데, 그 믿음은 여러 가지들이 있습니다. 확신도 그 믿음 중에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잘못된 믿음들도 있을 수가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 '빠사다'라고 하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얘기할 때 빠사다 라고 그럽니다.

 

부처님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말고, 가르침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말고, 상가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 평상시 때 그렇게 하라는 거라, 여러분들이.

그리고 평상시 때 나누어주는 것, 무엇이든 보시할 것이 있으면 나누어주라는 거라. 누구한테? 계율따라 잘 살아가고,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그게 출가한 사람이든 아니면 내 가족이든 그런 사람들이 있을 거 같으면 그런 사람들에게 자꾸 베풀어라는 거라.

 

이걸 「4법」 이라고 그럽니다.

··승 그다음에 계(보시) 이 4가지를 하라는 거라.

 

적어도 이 4가지를 할 거 같으면 다음 세상에서는 선한 곳에 태어나든지 이생에서 수다원에 이른다는 거라. 수다원에 이를 거 같으면 또 돌아올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해탈·열반에 이른다는 거라.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그걸 적어 놓은 겁니다.

여러분들도 살아있을 동안에 불·법·승에 대한 확신·믿음들, 보시를 실천하는 것, 이런 것들은 반드시 자꾸 생활화하도록 해서 임종 순간에,

 

임종 순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한테 그런 말을 전해줄 스승이나 스님이 없으면 어떡할 건데? 죽을 때 스님이 옆에 있을 거라고 누가 보장을 할 거라? 내일 되어서 내가 여기에는 다시는 안 오게 될 수도 있는 거고, 또는 다른 스승들이 여러분들한테 가가지고 진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해준다고 누가 얘기를 할 수 있을 거라?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반드시 이 4은 살아있을 동안에 자꾸 해라는 거라.

그래서 임종의 순간에 선처에 태어날 수 있고, 임종의 순간에 바로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거라.

 

임종의 순간은 여기 마지막에 적어 놓았는데

임종은 해탈에 이르기 위한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든지 임종의 순간에 해탈에 이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됩니다. 이 4법이라고 하는 것을!

 

그래서 설혹 스님이 없든, 아니면 내가 가르침 하고 멀어진 곳에 혼자 있든 그거하고 관계없이 다음에 해탈에 이르든지 선처에 태어나든지 그렇게 하라. 그게 불교도로써 바르게 죽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은 항상 그걸 명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적어도 임종의 순간에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는 ‘아, 내가 해탈에 이른다’든지 아니면 ‘아, 그래도 나는 인간이나 천상 세계에 반드시 태어날 것이다’ 하는 확신들을 스스로 가지게 되도록 그렇게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