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이 여기 계시다면 기뻐하는 일 (20171216. 서울)
오늘은 프린트물이 없습니다. 미처 아직 이사하고 준비를 못했어요.
거기가 많이 춥거든. 손이 막 트더라고, 이사하면서.
내년에 3월달에는 아마 울산 웅촌에서 담마스쿨을 매주 토요일날 개최하게 될 겁니다. 시간 나시는 분은, 그런데 거리가 멀어가지고. 전에 서울에서 담마스쿨을 한번 했었죠? 하고 중단이 됐었는데, 거리가 멀어도 거기서 개최를 할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왕 생긴 거니까 서울이든 대구든 어디든 관계없이 법을 들을려는 사람들은 거기서 계속 들을 수 있도록 하시고, 인제는 숙박이 조금 될 겁니다. 그래서 토요일 와서 일요일까지 수행을 하고 가면 되고, 오전에는 강의가 이어지고, 오후에는 수행지도들을 가지고 그런 형식으로 이어질 겁니다.
여러분들 도움 덕분에 어쨌든 붓다의 길따라 선원이 이사를 거의 마쳤습니다. 여러 가지 아직 해결이 안 되어 있는 것들이 몇개 있기는 한데 그건 조금 조금씩 해나가겠습니다. 이왕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교단소속에 법인으로 등록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교단 소속 회원이면 누구든지 와서 무료로 숙박을 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인제 올해 마지막입니다. 그렇죠. 내년은 1월달 2월달은 스님이 법문이 없습니다, 서울에서는. 외국에 나가있기 때문에. 대신에 3월달 돼서 서울 법회에서 요청이 있으면 또 올라와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부처님이 여기와 계신다면 어떨까? 여러분들은 좀 마음에서 겁이 날까, 아니면 마음이 기쁨을 느낄까? 어떨 거 같애요? (수행자 : 기쁨을 느낄 것 같습니다.) 기쁠 거 같애요? 뭐 잘한 일들을 했는데? (하하하) 보시하고 공양 올렸다고? 기뻐할 거라며? (수행자 : 법을 들을 수 있어서) 부처님 법을 들을 수 있어서?
물론 부처님 법을 들을 수 있으면 좋지. 그래서 만약에 부처님이 계신다면 단박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사람들도 있을 거고, 아니면 그 법으로 인해서 오래 걸리지 않아서 깨달을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사람들도 있을 수가 있겠죠.
그런데 이미 그런 시대는 지났죠? 부처님이 이미 열반하셔가지고 다시는 여러분들한테 안 옵니다. 그런데 상상만으로도 ‘부처님이 계신다면 참 좋겠다’, 나쁜 짓 안 할 거 같죠? 그런데 여기서 벗어나면 나쁜 짓 할 사람은 또 합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그랬고.
그래서 가끔씩 일반 사회인들하고 이렇게 얘길 하다 보면 처음엔 언성이 높아지다가도 내하고 같이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음성이 낮아져. 톤이 다운되고 조용해지고 그런다고 그러더라고. 그런데 그게 계속되면 좋은데 있을 때만 딱 그러다가, 나하고 헤어지고 나면 다시 원상복귀.
부처님이 계셔도 아마 마찬가지일 겁니다. 부처님이 있는 데서는 기쁘고 뭔가 선한 일들을 계속할 거 같고 그런데 벗어나면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때도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이 자기들 옆에 있기를 바랬어요. 그래서 항상 우리 옆에 있으면서 법을 설해주길 바라고, 되도록이면 내가 언제든지 찾아가서 찾아뵐 수 있고 법을 들을 수 있고 공양 올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하는 마음들을 가졌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스님들을 대하는 것과 별반 차이는 없을 겁니다. 주변에 그런 스님들이 있어서 언제든지 바른 법을 들을 수 있으면 참 좋지만 조건이 그렇지는 않죠? 그래서 그렇게 안 될 때는 대단히 속상해합니다.
부처님의 특징 중에 하나가 뭐냐면 부처님이 결정했다 할 거 같으면 어떤 누구도 번복을 못한다 하는 것!
부처님이 한 곳에만 있으면 다른 데서는 부처님의 법을 들을 수가 없겠죠? 요즘은 인터넷이라도 되어서 다른 곳에서라도 들을 수 있다지만 옛날에는 그런 상태도 못됐고, 그러니 부처님 입장에서는 한 곳에서만 계속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고, 또 저 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가고, 이렇게 부처님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면 거기 있던 사람들은 “부처님 가지 마십시요” 하고 다들 말리게 되는 거라. “부처님 우리가 시봉 잘 할게요. 그러니 여기 조금만 더 있어주십시요” 그리하는데, 부처님은 한번 결정되고 나면 그게 변경된 적이 한번도 없었거든.
만약에 이번에 안거를 끝내고 나서 나는 라자가하로 가겠다 그렇게 결정을 했다, 그거 번복할 수 있는 자격을 누가 갖췄을까? 왕이 와서 “부처님 계셔주십시요” 한다고 해서 머물러줄까? 아니면 아나타삔디까가 와서 얘기한다고? 아니면 위사카 부인이 와서 얘기한다고? 한번 결정하고 나면 바꿀 재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꿀 수 있는 수단이 있습니다. 뭘까 그게?
아까 첫머리에 얘기했습니다. 부처님이 여기 계신다면 여러분들은 되게 기뻐할 것 같죠? 기뻐할 일을 한다고 맹세를 하면 부처님이 결정을 바꿉니다. 그런데 맹세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그것을 완전히 지켜야 되겠죠. 인제. 누구든지 “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맹세를 하기는 쉬운데 그걸 지킬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가 되느냐 하는 거라.
부처님 당시 때도 경전에는 그런 결정을 바꾼 적이 딱 한 번 있습니다.
아나타삔디까의 하녀로 있던 어린 아이가, 아나타삔디까가 몸져누워가지고 밥도 안 먹고 전에는 부지런하더니 인제는 귀찮고 게으름 부리고 하기에,
“무슨 일이냐?”하고 물어보니까 인제 부처님이 다른 데로 떠난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거든.
“그러면 부처님이 여기서 조금 더 머물게 내가 해볼까요?” 하니까 네가 뭐 어떻게 할 것이냐? 내가 가서 얘기해도 안 듣고, 왕이 가서 얘기해도 안 듣고, 많은 사람들이 가서 합창으로 “계십시요” 해도 말을 안 듣는 고집쟁이가 부처님인데, 꼬맹이 네가 뭘 어떻게 할 것이냐?
“만약에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머물 수 있도록 해볼까요? 1년이라도 더 머물러 있도록 해볼까요?”
그럼 그렇게 해라. 만약에 네가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너를 내 딸로 맞아들이겠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인도는 카스트 사회이기 때문에 종으로 있던 분이 그 장자의 딸이 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사실상은 불가능하죠. 그런데 그거는 요즘 같으면 고위층에서 구제를 해주기 전에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나타 삔디까가 내 딸 삼겠다 하는데 누가 뭐라 할 거라?
그래서 이 소녀가 부처님한테 가서, 부처님 하고 제자들이 짐을 꾸려가지고 다 산문 밖을 나서는 땐데 그 앞에 탁 나타나서 그럽니다. “부처님 여기 계셔주십시요” 하니까, 부처님이 뭐라고 하느냐면 “내가 여기 더 머물러 있겠다고 할 것 같으면 너는 나한테 줄 게 뭐냐?” 하고 물어봅니다.
여러분이 부처님이 계시길 바라면 여러분이 부처님한테 줄 게 뭐 있는데? 뭔가 부처님이 머물만한 조건이 돼야만이 부처님이 머물 거 아니라?
여러분은 뭘 줄 수가 있어요? 공양 올리는 거? 그건 당연한 겁니다. 부처님이 아니라 인제 막 출가한 스님이 거기 머문다고 여러분들이 청해가지고 거기 머물고 한다고 할 거 같으면, 또 아니면 스님같이 법문하러 온다고 할 것 같으면, 오전일 거 같으면 반드시 해야 될 것은 그 스님이 먹을 거는 제공을 해줘야 됩니다. 그래서 항상 스님이 여기 올 때는 탁발을 하는 겁니다.
그거는 기본적인 거기 때문에 그거 해주겠습니다 해가지고 부처님이 머물 수 있는 조건은 안 됩니다.
뭐 해줄 수 있어요? 여러분들 잘하는 게 뭐가 있을까?
수행? 수행해서 얼마만큼 수행할 건데? 하루에 한 열두시간씩 할 거라? 열두시간씩 해가지고는 의미가 없고, 부처님이 계시는 만약에 1년 동안 아니면 부처님이 계시는 3개월 동안, "내가 상카루뻭카냐나에는 도달하겠습니다." 한다든지 뭔가 결과물이 나타나야 될 거 아니라?
무조건 수행하겠습니다. 앉아있는데 자고 있는지 수행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 그냥 막연하게 수행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고,
수행이라면 "아, 스님 이번에는 내가 법에 대해서 확고하게 흔들림이 없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상태에는 이르겠습니다." 아니면 "무상한 성품을 완전하게 봐서 변하는 성품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없도록 만들겠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아니면 조금 전에 얘기했던 "상카루뻭카냐나에 도달하겠습니다."
아니면 "수다원에 이르겠습니다." 하고 대답을 해야 걸망지고 나서는 부처님 하고 제자들이 걸음을 멈출 거 아니라? 어렵죠, 그거는? 부처님이 계신다고 해도?
그럼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게 뭐가 있어요?
이 여자아이가 얘기한 것이 “오계를 철저히 지키겠습니다!”
오계를 지킬 수 있을 거 같죠? 그런데 그것도 참 힘듭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평생 모기 안 죽이고 살 수 있어요? 아니면 옛날에 스님도 그런 적이 있는데, 누가 와서 내가 밥을 안 하니까 공양간에서 밥을 하는 사람이 쌀벌레가 생겼다고 얘기를 하더라고. 그래서 스님한테 죽이지 마라는 소리는 들어놔놓으니까 이걸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는 거라. 그래서 “스님, 저 쌀벌레를 골라가지고 쌀벌레를 다른 데다 놔주면 안 됩니까?”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골라지겠어요, 그 조그만 것이? 골라지다가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고 할 건데.
그래서 “쌀 채로 해서 그대로 먹고 살 수 있게끔 만들어버리고 다른 쌀을 사용하라” 하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시한 사람 쌀을 보시한 입장에서는 아까워 죽겠는 거라. 쌀벌레 그게 뭐라고, 저것들이 쌀벌레 해봐야 오래 살지도 못하는데 그 쌀이면 충분히 자기들이 먹고 죽을 때까지 있을 수는 있는 거죠.
그 대신에 다른 사람들은 좀 꺼림칙 하겠죠. 저 쌀벌레가 튀어나와가지고 다른 데로 가면 어떻게 할까? 그럼 쌀벌레가 생기지 말도록 해야 되는데, 이미 생긴 걸 어떡할 거라? 그렇다고 죽일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한번 얘기를 해서 보낸 적이 있어요. 그래서 스님은 그 덕분에 쌀을 보시한 사람한테 욕은 좀 들어먹었어요.
그런데 그게 맞는 거라. 예를 들어서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회충약은 요즘은 안 먹잖아. 그런데 몸 안에 뭔가가 생겼다, 그럼 죽이기 위해서 약을 내 스스로 먹어야 되는 거라. 의사가 그걸 먹어야 건강해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약을 먹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안에 있는 건 죽겠죠?
오계를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게 첫 번째 계율 부분입니다. 쉽게 오계를 지킨다고 약속도 사실은 하기 힘든 입장이라.
그런데도 이 소녀는 당차게 “오계를 지키겠습니다”
부처님은 그걸 믿은 거라. 제자들한테 다시 가서 “보따리 풀어라” 하고 거기서 다시 1년간을 더 머뭅니다. 결국 그 소녀는 그것이 인연이 돼서 수다원에 이르르게 됩니다.
부처님이 결정한 것들을 반복할 때는 그에 합당한 이유들이 틀림없이 있어야 됩니다.
뭘 바라고 그걸 번복했을까? 그 소녀가 오계 지키는 거하고 부처님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서?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법을 설한 목적이 뭔가요? 여러분들이 행복해지고, 여러분들이 좀 더 기뻐해지고, 또 마음이 청정해지고 그래서 나중에는 해탈에 이르르게 되는 것들을 목적으로 법을 설하게 되는 겁니다,
그럼 적어도 여러분들이 부처님이 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이 옆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이 기뻐할 일들을 여러분들이 해야 된다는 거라.
한번 가슴에 손을 탁 얹고 생각해보십시요.
이 자리가 아니고 집에서라도 과연 내가 부처님이 기뻐하는 일들을 하고 있는가?
부처님에 대한 예경은 삼보예경을 하고, 공양물을 올리고 여러 가지들을 준비를 해서 치장을 하고 무슨 행사를 하고 하는 것이 부처님에 대한 예경이 아니라. 그것이 예경이 안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도 여러분들이 더 마음이 청정해지고 여러분들이 더 행복해지는 것이 부처님에 대한 예경이라는 겁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스님도 외국으로 좀 나갔다가 와야 됩니다. 두 달 반 정도, 두 달 조금 너머. 물론 스님 있을 때도 수행 그렇게 열심히 한 것은 아니죠? 그런데 스님 없는데 어떡할래? 다른 스님 통해서 수행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다시 수행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든지, 그래서 없을 때라도 스님이 기뻐할 수 있는 것, 그런데 스님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일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오늘 하루 지나고 나서 ‘아, 나는 법에 대한 기쁨들을 누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스님도 기뻐하고 부처님도 기뻐할 것이다’ 하고 마음을 낼 수가 있는 상태가 되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래요? 어떻게 하면 그러한 상태에 이르게 될까? 무조건 수행만 열심히 하면 돼요? 그런데 수행을 열심히 하더라도 바르게 해야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보면 간절한 게 없습니다.
이 수행을 통해서 내가 도와 과에 이르겠다는 마음보다는, 지금 나한테 일어나는 성냄이라든지 아니면 나쁜 마음이라든지 요거 잠깐 몰아내는 것으로써 그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은 해보니까 가능하거든. ‘어, 성냄이 있네’ 알아차리다 보니까 성냄은 가라앉았는데, 뭐 또 다른 조건이 되면 성냄이 또 일어나게 되고, 알아차린다고 하고 있는데 가끔씩 보면 내가 남한테 싫어하는 말들도 하고 남에 대해서 비난하는 말들도 하고, 괜히 사람들 얘기에 시비장단을 가릴려고도 하고, 그럴 때마다 알아차린다 하고 또 돌아오지만 또 또 그런 일이 생기는 거라.
안 지겨워요? 살아가면서 계속 그거 하기?
다른 것들이 윤회가 아니라 그게 바로 윤회입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들이 윤회를 만드는 것들입니다. 한번 확 좀 끊어 봐! 다 못 끊겠으면 하나씩이라도 끊어라는 거라.
수다원이 일곱번 이내에 해탈을 한다는 것은 한생에서 요만큼 끊어내고 그다음 생에서 또 이만큼 끊어내고 하기 때문에 그게 가능하다는 거라.
올해가 인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없는 동안에 적어도 "스님이 없는 동안에 나는 요거 하나는 뭔가는 탁 끊어내겠다, 그래서 이것은 다시는 나에게 일어나지 않게끔 하겠다" 하는 그런 다짐들을 좀 해야 됩니다. 건성으로 그냥 앉아있으면 수행한다고 하고 또 경행한다고 하고 그거 해가지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시대는 진짜 죽을 것처럼 열심히 수행해야만이 도와 과에 이릅니다. 한참 시간이 흘러서, 그것도 출가한 스님들이 그것만 전문적으로 했을 경우에. 그런데 일반 재가인들은 더욱더 피나는 노력을 해야 됩니다. 지금 조그만한 성취를 했다 해서 그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잠깐의 삼매를 체험하고 또 수행을 통해서 아, 이것이 고요함이구나, 아 이것이 마음의 청정해지는구나 경험했다 해가지고 그게 끝은 아닙니다. 인제 겨우 단추를 하나 발견한 정도에 지나질 않습니다. 더 부단히 노력을 해야 됩니다.
스님과 부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것들을 세 가지만 얘기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뭘 할 수 있는지 한번 잘 판단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부처님도 법을 바르게 지키고 이해한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결정을 양보를 했습니다. 그래서 어린 소녀에게 떠나는 결정을 양보를 하고 계속 있어 주게 됩니다. 그래서 그 소녀를 비롯한 다른 많은 사람들이 법의 기쁨을 누리게끔 되는 겁니다.
첫 번째, 욕구
경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더러워진 생각을 멈추어라. 잘못된 생각을 멈추어라. 올바른 생각을 해라.」
뭔가 사고하는 것이 더러워져 있을 거 같으면 당연히 멈춰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돼있으면 그것도 멈춰야 됩니다. 올바른 것들 올바른 생각들을 반드시 자꾸 하도록 해야 됩니다.
마음이 선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으면 행하고 말하는 것들은 반드시 나쁜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올바른 생각을 자꾸 하도록 해야 됩니다. 계를 지키는 것만 하더라도 올바른 생각을 일으키게끔 만들어줍니다.
적어도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데가 오계가 익숙하도록 만들어주지만, 행하는 것들이 익숙해지면은 생각도 자연스럽게 선한 방향으로 이동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 얘기하는 것이 바로 욕구 부분입니다.
오늘 여기 와서 여러분은 어떤 이익을 챙겨갈 수 있을까? 여기 오면 스님 법문 듣는다는 거 생각하고 왔죠? 법문 안 해주면 어떡할 건데? 기분 나빠?
그게 바로 욕구입니다. 뭔가 다른 조건이 됐을 때, 내 생각하고 맞지 않았을 때, 마음이 불선한 방향으로 기울어져버리는 거라.
욕구는 뭔가를 집착하고 그것들을 가질려고 하는 것들이 아니라,
사고의 작용에서는 항상 내가 뭔가를 조금 더 유리하고 조금 더 이익된 것들을 찾아서 마음을 쓰는 것들이 욕구에 속합니다.
여러분들 마음이 그런 욕구의 마음이 욕구의 사고가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마음은 항상 청정한 상태에서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도록 돼있어야 됩니다.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리고 지나간 것들은 반드시 놓아버려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걸 붙잡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욕구의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번에 한 두세 달 열심히 한번 해보십시요.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구가 어떤 건지를, 아, 이게 부처님이 얘기한 욕구구나 하는 것들을 경험하도록 해봐야 됩니다. 욕구에 대한 이해를 하고 나면은 그것으로 인해서 시시비비를 가리지를 않습니다.
처음에 스님이 출가를 한 게 해인사에서 했었습니다. 테라와다 비구계를 받기 전에.
해인사에서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그때 철 스님하고 여러 스님들이 계셨는데, 그 주지 스님이 밭을 팔아먹었어요. 그런데 다른 대중들한테 알리지 않고 아주 가난한 사람한테 아주 헐값에 해인사의 소유로 돼있던 밭을 팔았어요. 그래가지고 그 스님은 밭 판 돈을 가지고 다른 노스님들 머물 수 있는 요사채를 하나 더 지었어요. 사람들이 처음에는 몰랐다가 나중에는 그게 해인사에서 발칵 뒤집어졌어요. 알고 보니까 시세보다도 반값도 안 되는 값에 그 밭을 팔았거든. 그래서 그 노스님한테 따지러왔습니다. 대중들이.
“스님, 이래도 됩니까? 대중들한테 아무 얘기도 없이 그것을 팔아가지고 노스님들 요사채를 지어도 됩니까?” 그리하니까 그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밭이 없어졌냐?” 그렇게 얘기합니다. 소유가 바뀐 겁니다. 해인사에서 그 가난한 사람에게 소유가 바뀐 겁니다. 밭이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거라.
해인사 입장에서는 그 가만히 노는 밭보다는 차라리 스님들 머물 수 있는 요사채를 지은 것이 더 이익인 거고, 그 가난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인제 일해서 먹고살 수 있는 밭이 생겨서 이익인 거고, 그 노스님의 입장에서는 하등 이상한 게 없는 거라.
그런데 일반 사람들 대중 스님들은 이걸 왜 반값에 팔았느냐? 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거라. 그 노스님은 어떤 욕구도 가지지 않고 일을 잘 처리한 거라.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거라. 지금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를 자꾸 따지게 됩니다. 이게 나한테 어떤 도움을 주는지, 그것만 자꾸 따지다 보니까 자신의 마음에서 욕구가 일어나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자꾸 싸울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걸 알지 못하게 되는 거라.
욕구는 단순히 그것 자체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으로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항상 그것으로 인해서 자신이 윤회할 수 있는 조건들을 먹이를 자꾸 제공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나는 또 다른 사람들과 계속 다툼을 만들어내게 되는 거라.
윤회하더라도 좋은데 윤회하는 것이 아니고 동물들 같이 다툼이 있는 세계에 가는 조건들을 또 자기가 만들게 되는 거라.
안 두려워요? 여러분이 나중에 개나 소나 하는 것으로 태어나는 것이?
윤회가 있든 없든 간에 지금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불편을 겪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면서도 그걸 끊어낼려고 안 한다는 거라.
첫 번째 욕구는 반드시 여러분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보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이것으로 인해서 덕을 보겠다 하는 그런 마음들이 자꾸 일어나지 않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설혹 본인의 것이라도 잠시 내가 쓰는 것이고, 내가 보관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쌀도 누군가가 보시를 했지만 그것을 내가 잠시 쓰는 것뿐 인 것이지, 그 쓰는 걸 다른 생명체가 쓴다고 해가지고 그 생명체를 몰아낼 이유는 없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낙담.
주석서에서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없어져버렸거나, 잘 되었으면 하는 것에 대해서 실패했거나, 욕구를 가지는 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분노가 낙담이다」 하고 적어 놓았습니다.
분노의 마음입니다, 낙담하는 것은. 자신에게 이익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안 됐을 때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낙담하는 것들은 욕구보다도 더 위험하게 됩니다.
언젠가 대구에선가 한번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분노는 핵연료가 분출되는 것과 같다. 새는 거와 같다' 하고 한 적이 있습니다. 핵연료는 그게 새나가면 지금 당장은 영향을 적게 미칠지 모르지만,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순간 나는 평생토록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오히려 욕구는 일어났으면 자신이 그것을 잘 관리해가지고 눌러버릴 것 같으면 크게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데, 분노는 그거하고는 다릅니다. 이미 일어났을 경우에는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이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은 나에게 언제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나에게 원한을 가지면 어떻게 할 건데? 평생 가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나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그걸 지니고 있는 거라.
그래서 분노라고 하는 것은 핵연료가 유출돼서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다 하고 자꾸 마음을 먹고 어떠한 경우든지 그 분노가 자신의 마음에서 분출되지 않도록,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꼭꼭 봉인을 해둬야 되는 부분입니다.
낙담하는 것이 분노의 일종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미 낙담하게 됐을 때는 본인은 분노가 분출된 상태가 됩니다. 살아가면서 아마 모르긴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낙담하는 경우들이 참 많을 겁니다. 마음이 우울해진다든지, 아니면 마음이 침체된다든지, 그래서 어떨 경우에는 그게 병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아니면 일상생활이 자꾸 부정적으로 바뀐다든지 이런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그런데 뭐 그렇게 붙잡을 것들이 많아서 그런 마음들을 계속 지녀야 됩니까? 더더구나 바른 부처님 가르침을 배운다는 사람들이. 모든 것은 무상하다 하면서 그 마음도 무상하다 하는 것을 분명히 아는데, 왜 그걸 지속해나가야 됩니까?
낙담하는 것도 실체가 있습니다. 오는 경로가 반드시 있습니다.
스님은 분노로 인해서 낙담이 일어난다고 얘기를 했는데, 어떤 식으로 낙담이 일어나는지를 분명히 한번 보도록 해보십시요. 자신의 생활패턴이 많이 바뀌어버립니다.
게으름 많이 피우는 성향에서 좀 더 활동적인 성향으로, 부정적인 성향에서 긍정적인 성향으로, 사고뿐 아니라 행동 자체도 많이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그 낙담하는 성품을 분명하게 봄으로 인해서 그렇게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본인이 지금 있는 상황들에 대해서 그대로 머물려고 하지 말고 바꿀려고 한번 노력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폭력이라고 하는 겁니다.
가끔씩 수행문답하러 오는 사람들 중에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인이 미워 죽겠대요. 수행을 열심히 잘하고 싶은데 수행이 마음대로 잘 안돼서 본인이 미워 죽겠대. 여러분은 여러분이 밉습니까? 이 정도 수행했으면 도와 과에 이르러야 되는데 이르지 못하고 있는 본인이 미워요?
아니면 뭔가 나쁜 짓을 한 아이가 미워가지고 그걸 반드시 벌을 줘야 됩니까? 요즘 테러들 많죠? 테러한 사람들 벌을 줘야 되는 겁니까? 다 싹다 잡아 죽여야 되는 겁니까? 굉장히 무서운 사고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회에서 정당화시켜 준다고 해서 불교에서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은 아닙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볼게요. 여러분들 집에 도둑이 들어왔다, 그럼 여러분은 어떻게 할까? 자고 있는데 이리 보니까 도둑이 들어와서 뭔가 물건을 훔쳐 갈려고 한다, 그런데 그냥 물건만 훔쳐가는 것일 거 같으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리 안 하겠지만, 부처님 같으면 그냥 훔쳐가도록 할 거라. 그 대신에 부처님 같으면 그렇게 얘기를 하겠죠. “겨울에는 추우니까 나갈 때 문 닫고 나가” 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를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거라.
만약에 그래가지고 그 사람이 나중에라도 그게 발각이 됐다, 그래서 어디서 훔쳤어? 그러니까 어디서 훔쳤다! 그래서 부처님을 그 경찰서에서 소환을 했다, 경찰이 물어봤을 때 부처님은 뭐라고 했을까? 수다원 이상이 됐을 거 같으면 거짓말을 할 수는 없고, 저 사람이 훔쳤어요 이렇게 얘기했을 거 같애요?
“내가 가져가게끔 했다.” 가져가게끔 했다는 거라. 그래서 그 사람이 적어도 그 훔친 것으로 인해서 벌을 받는 것들은 면하게끔 해줍니다. 실제로 부처님이 가져가게끔 했거든. 뻔히 보고도 가져가게끔 했으니까.
여러분들도 누군가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고 바르게 또 법답게 살아갈려고 할 것 같으면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내어서는 안됩니다. 설혹 자신에게 손해가 나고 또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것들은 안 하려고 자꾸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세 가지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중에 하나 정도는 스님이 없을 때나 아니면 가까운 시일 내에 달성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부처님 제자는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해서 그것들이 자기 것이 될 때 부처님 제자라고 얘기를 할 수가 있는 겁니다.
법을 많이 듣고 또 수행한다고? 그걸 담마다로라고 얘기하는 법은 없습니다. 자기 것이 될 때, 그것을 부처님 제자답게 법을 지켜나간다 하고 얘기를 한다는 걸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전은 여기까지 하고 오후는 간단하게 와서 수행이나 여러 가지 물어볼 것들만 하고 스님은 떠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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