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중수행] 오온을 분리해서 보게 될 때 무아를 이해할 수 있다. (20190824)
오늘은 힘이 없어가지고 법문을 안 할려고 했는데 간단하게 할게요.
위빳사나 수행의 삼상(三相)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무상·고·무아.
무상한 거 관찰해서 안 사람?
(수행자 대답 : 무상은 다 관찰합니다.)
다 하죠? 고를 관찰해서 안 사람?
(수행자 대답 : 무상·고·무아는 다 관찰합니다.)
다 관찰합니까? 그래. 뭐 그렇다고 칩시다. 무상한 것과 고는 관찰하기가 쉽습니다. 변하는 것들이 보이고 할테니까. 그거는 사띠가 강하든 약하든 관계없이 보기가 좀 쉽습니다.
그런데 무아는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완전히 분리할 수가 있고, 그것이 내가 콘트롤 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봐야만이 무아를 증득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상과 고를 분명히 본 사람과 무아를 본 사람은 차이가 많이 납니다.
왜 무아를 보라고 할까? 무슨 이익이 있기 때문에?
(수행자 대답 : 집착을 잘라낼려고..)
그거는 무상만 봐도 됩니다. 무상만 봐도 거의 대부분의 집착은 떨어져나갑니다. 그런데 꼭 무아를 관찰하라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가끔 그런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하여튼 자기한테 나쁜 일이 닥치는 경우들, 나는 이 사람에게 좋은 의도로써 뭔가를 말을 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거를 나쁘게 받아들여서 오히려 돌아오는 것은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와지고.
왜 그럴까 그게? 그거는 윤회하는 세월 동안 쌓아온 업의 습성들 때문에 그렇게 드러나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적게 일어나게 하고 끊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무아를 분명하게 봤을 때"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앞에 무상과 고를 보는 것하고, 무아를 분명하게 봐서 아는 것 하고는 마음가짐도 다를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일어나는 현상들도 다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신견(身見) 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몸에 대한 견해가 확연하게 바뀝니다. 보통 몸이 하는 일이 뭐가 있죠?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말은 쉽지, "몸이 늙는 것은 당연히 늙는 것이지, 병드는 것 어쩔 수 없이 병드는 거지, 죽을 때 되면 죽는 것이지" 말은 하지만 실제로 여러분들은 반대로 자꾸 할려고 합니다. 더 안 늙을라고 그러고, 더 건강할려고 그러고, 죽기 싫어서 발버둥을 치고, 그게 짧은 순간이든 그렇지 않으면 온 생애를 통해서 다 드러나는 것이든 그것은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누구든지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을 지니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가지는 그런 견해들입니다.
그 신견(身見)이 쉽게 말하면 확연하게 바뀝니다. 무아를 분명하게 본 사람들은.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이 분리돼서 보이고, 그것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진짜 찰나 간에 바뀌는 것들을 보게 되면은 그런 몸에 대한 견해들이 바뀌어버립니다.
그걸 어디다 비유를 하면 좋을까?
염주를 예를 들어봅시다. 염주를 돌리기 위해서는 그 염주를 하나하나씩 끼워주는 실이 필요합니다. 실이 있어야 만이 그것들을 지속적으로 계속 돌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위에 염주를 돌리면 밑에 염주는 지가 좋든 싫든 한칸 위로 올라오게끔 돼있다는 거라. 지가 원하지 않든 원하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실에 엮여있기 때문에.
그런데 실이 탁 끊어져 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 염주알은 따로 놀게 됩니다.
몸에 통증이 일어났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아프다고는 아는데 이것이 '몸 전체'라고는 얘기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병이 들었다, 병이 들어서 이걸 낫게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몸 전체에 대한 집착은 하지 않는다는 거라. 염주알이 분리되듯이 각각의 것들은 분리돼어져버리는 거라.
그리고 각각의 것들에 대해서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속성들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잠깐의 집착이 일어날지는 몰라도 그것에 대해서 오래도록 묶여있고 집착하는 법은 없어져버립니다.
그게 아까 무수한 윤회 속에서 일어나는 악업의 결과로 내가 의도하지 않는 것들이 일어나지기도 하고 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고리가 끊어지고 나면 그러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지기도 합니다. 가끔씩 일어나더라도 그냥 정도가 약할 뿐인거고, 그것은 아주 단편적으로 해서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면서 무아에 대한 성품들을 자꾸 분명하게 볼려고 해야 됩니다.
물론 그것을 완전하게 볼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도와 과에 이르기 전에는 완전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도와 과에 이르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무아를 분명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뚜렷하고 완전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 이것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들을 알 수 있는 것들이
"오온에 대한 속성들을 분리해서 보게 될 때" 볼 수 있습니다.
"상카라가 나를 존재하게끔 하는구나" "의도하는 것에 따라서 모든 것들은 뒤따르는 것이구나"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게 되면은 적어도 무아에 대한 성품들을 어렴풋이라도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할 때 무상하고 또 불만족스럽다는 사실만으로써 만족을 하지 마십시요.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집착하는 것들을 엷게는 만들어주고, 또 '나'라고 하는 것들을 엷게는 만들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본다고 해서 무아를 보지 못하면 아직은 불완전한 겁니다.
주석서 같은데는 그런 얘기를 써놓았습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셨든 안 오셨든 이 세상은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진리는 존재한다. 그런데 부처님 같이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 태어났기 때문에 적어도 무아에 대한 것들을 완전하게 가르칠 수가 있었다. 부처님만한 분이 아니었다고 할 것 같으면 무상한 거, 고라고 하는 것들은 가르치고 보여줄 수 있을지 몰라도 무아에 대한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완전하게 보여줄 수가 없다.」
그마만큼 수행, 특히 위빳사나 수행에서 무아에 대한 성품을 분명하게 본다는 것은 그마만한 이익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받아들여야 될 것들은 받아들여야 되고, 몸은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게 돼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견해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은 무아에 대한 성품이다 하는 것들을 잊지 말고, 수행에서 무상·고·무아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자꾸 볼려고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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