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Uxbajzeg5go?si=EBwt10TuacEWSK7a
* 똑같은 법문이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서 얼마만큼 차이가 날 수 있는가? (2001 0224)
자, 인제 편안하게 좀 앉고, 오늘 법문은 좀 쉽게 해보겠습니다. 만날 어려워가지고 헤매는 경우들이 많아서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부처님 외의 진리를 설하는 사람들을 불교에서는 외도(外道)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크게 여섯 무리로 나눠가지고 육사외도(六師外道)라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육사외도에는 많은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 육사외도 중에서 '니간타 파'에 대한 얘기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만큼 우리가 똑같은 법문이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날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자리에 부처님 말씀을 들으러 와가지고 각자 스님이 하는 부처님 말씀을 받아들이기엔 다 각자의 차이가 있을 거라는 겁니다. 근데 비슷한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비슷하게 들리는데, 마음의 문을 열어놓지 않는 사람들이나 다른 사상에 물들어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든지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게 돼 있다 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 니간타 수행자들과 부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나집니다.
아무리 좋은 법이지만 어떤 데는 똑같이 얘기를 했는데 '참 장하십니다' 하는 "사두 사두 사두"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고, 또 어떤 데 가서는 전혀 그런 소리를 못 들었을 뿐 아니라 이해를 못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하는 겁니다.
자, 그런 니간타에 대한 얘기입니다. 니간타는 여러분들이 익히 알고 있을 겁니다.
부처님의 양대 제자 중에서 사리뿟따 존자,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가 부처님의 양대 제자입니다. 이 사리불하고 목련존자가 맨 처음 출가해서 속했던 파가 이 니간타 파라. 거기서 열심히 수행을 하고 또 따라하고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부처님의 제자인 앗사지 존자를 만나가지고 부처님의 제자가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계기를 가졌는데, 니간타들이 대부분 얘기하는 교리들은 어떤 것이냐 하면 "악업을 짓는 것에는 몸의 형벌 · 말의 형벌 · 마음의 형벌을 다스려야 된다. 또 악업을 지은 원인은 이러한 몸의 형벌 · 마음의 형벌 · 말의 형벌로 인해서 짓는 것이다" 하는 것들입니다.
그중에서 "이 악업을 멈추고 없앨려고 할 것 같으면 이 3가지 몸·말·마음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몸이다" 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몸을 잘 다스릴 것 같으면 악업을 멈출 수가 있고 악업을 짓지 않게 된다" 하는 그런 사상이 기본 모태로 되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악업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몸을 수행의 도구로 삼게 돼있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 몸을 수행의 도구로 삼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출가수행자니까 당연히 고행할 수밖에 없는 거라. 부처님 당시 때도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고행을 했다는 거라. 꼭 마찬가지라. 그래서 몸을 다스리기 위해서 갖가지 고행들을 해나갑니다.
그때 이제 어느 날 우빨리라고 하는 니간타의 제자가 우연하게 길을 가다가 앗사지 존자를 만나게 됩니다. 부처님으로 인해서 처음으로 수계를 받았던 제자 5명의 제자 중에 하나죠. 앗사지 존자. 그 앗사지 존자를 만났을 때 앗사지 존자에게 물어봅니다.
“앗사지 존자께서는 어떤 분을 스승으로 모십니까?”
“저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 스승이 가리키는 교리가 어떤 겁니까?” 앗사지 존자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몸에 의해서나 느낌에 의해서나 생각에 인해서나 생각의 구성에 인해서나 인식에 의해서나 이런 오온, 오온은 무상한 것이다. 그러한 오온에는 나라고 하는 자아라고 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얘기를 합니다.
‘옳다구나’ 우빨리가 우리 존자가 얘기하는 거 하고는 아주 틀리거든. 자기 존자들은 그렇게 얘기를 하지 않는단 말이라. "나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이 나를 잘 다스려야만이 악업을 빼어버릴 수 있다" 하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 부처님은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고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 나라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걸 갖다 가르친다고 그러는 거라. ‘옳다 좋다. 부처님한테 가서 한번 논쟁을 붙어봐야 되겠다’ 하고 인제 작정을 하고 부처님한테 갑니다.
이 앗사지 존자가 조금 전에 얘기했던 것은, 사리뿟따 존자가 부처님에게 출가하기 전에 앗사지를 먼저 만납니다. 그때 앗사지가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근데 사리불 존자는 그 얘기를 듣고 ‘아, 그렇구나 이렇게 조건에 인해서 형성된 것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조건에 인해서 사라지는 것이 분명하게 있다. 그러니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있다고 하여도 그건 항상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해서 법의 눈을 얻게 된 계기가 된 게송입니다.
근데 또 다른 한편에 이 우빨리라고 하는 그 수행자는 그 게송을 듣고 오히려 ‘따지러 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됐다 하는 겁니다.
인제 부처님한테 왔거든. 부처님한테 와서 부처님한테 얘기합니다.
“우리 스승께서는 몸의 형벌이나 마음의 형벌이나 말의 형벌을 잘 다스려야 나라고 하는 것을 갖다가 근본적인 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뭐라고 가르치십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럽니다.
“그래 그러면 자네들은 그렇게 몸과 말과 마음의 형벌을 다스리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가?”
“저희들은 그렇게 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이 몸의 형벌이기 때문에 몸을 잘 다스림으로 해서 악업을 갖다가 없애는 방편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거든.
“그래요. 마음이나 말이나 몸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몸에 의한 형벌입니까?” 하고 얘기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제가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길을 가다가 나도 모르게 벌레를 밟아 죽였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것은 악업이 됩니까? 안됩니까?” 우빨리가 그럽니다.
“당연히 내가 모르고 밟았으니까 몸으로 지었지만은 그것은 악업이 되지 않죠” 내가 모르고 지었는데 어떻게 악업이 되느냐는 거라.
“그래요. 그럼 만약에 알고 나서 지었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쉽게 예를 봅시다 바퀴벌레가 기어가니까 ‘아이, 저놈은 바퀴벌레, 우리에게 나쁜 균만 옮겨주고 해로운 동물이다’ 탁 잡아 죽여버리는 거라. “자, 그렇게 잡아 죽였을 때는 그것은 악업이 됩니까? 안 됩니까?” 내가 의도해가지고 죽였으니까 살생이라.
“악업이 되지요”
“그래요. 그 악업이 되는데 그것은 몸으로 인해서 지은 악업입니까? 마음으로 인해서 지은 악업입니까?” 이렇게 부처님이 물어봅니다.
어떤 거로 지은 악업이라요? 몸으로 지은 거라? 마음으로 지은 거라? 여러분들이 니간타 수행자라고 할 것 같으면 뭐라고 하게 되겠습니까? 몸으로 지은 거라.
부처님이 그럽니다. “죽이겠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것 같으면 몸으로 지을 수가 있습니까?” 짓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떤 것이 먼저이냐는 거라. 마음으로 짓는 게 먼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몸으로 짓는 것이 더 클 수가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몸으로 짓는 것이 더 크고 앞서기 때문에 몸을 잘 다스릴 거 같으면 악업을 소멸한다는 논리였잖아. 말이 맞지 않지 않느냐는 거라.
쉽게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과거 전생부터 지은 업이 하도 많아 가지고 100일 기도 해가지고 악업을 홀라당 다 소멸해버리겠다, 매일 와서 3천 배 1만 배씩 절을 합니다. 100일 동안. 몸으로 그 악업을 소멸한다는 거하고 꼭 마찬가지라. 근데 그 악업이라는 것은 그렇게 해서 소멸되느냐는 거라. 그래서 또 인제 부처님이 물어봅니다.
“당신들은 그렇게 몸으로 인해서 악업을 소멸한다고 할 것 같으면 당신들은 과거 전생에 당신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들 과거전생이 있었다는 걸 갖다가 확인하여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과거 전생에 뭐였는지 알고 있습니까?”
믿고 있었을 뿐이라. 과거에 나도 어떤 무리의 중생으로 있다는 것이지, 내가 무엇으로 있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거라. 당연히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요. 그럼 과거 전생에 뭐였는지, 어떻게 악업을 지었는지도 모르네요.”
“모릅니다.”
“그 악업 지은 것이 얼마나 됩니까?”
여러분들 악업 지은 게 얼마나 되는 거라? 산더미만큼 지어놓은 거라, 아니면 어 여기 법당만큼 지어놓은 거라? 얼마만큼 지어놓은 거라? 알 수 있습니까?
“그럼 또 하나 더 물어봅시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고행을 해가지고 몸을 다스리고 악업을 소멸한다고 그러면 지금 그렇게 고행하는 상태에서 악업이 얼마만큼 소멸됐고 또 남아있는 악업이 얼마나 됩니까? 그걸 알 수 있습니까?”
언제 소멸되는지 얼마만큼 남아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고행만 해가 되느냐 하는 거라. 쉽게 얘기해서 봉사가 연못에 거북이 하나 마치려고 돌멩이 던져가지고,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도 모르고 어디 던졌는지도 모르고 던진 거하고 뭐가 틀리는 게 있느냐는 거라.
여러분들 과거 전생도 모르고 과거에 얼마만큼 악업을 지어놨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또 지금 현재 닦아 나가는 것이 얼마만큼 닦았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고 있느냐는 거라.
'내가 지금 이 몸을 받고 태어난 것은 악업의 결과다. 그러므로, 그 악업을 소멸하기 위해서 이 몸을 갖다가 다스려 나가야 된다.' - 드러난 결과를 가지고 수행하는 방법이라.
부처님은 그게 어떻게 되느냐는 거라. 과거에 당신이 어떤 몸을 가지고 있었던 또 과거의 악업을 얼마만큼 지어놨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어놓은 악업 그것이 있든 없든 그것이 지금 너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라.
지금 현재 열심히 수행을 해 나가면 원인되는 것을 없앨 것 같으면 결과를 짓지 않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원인되는 걸 갖다가 아예 없애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악업을 어떻게 짓느냐는 거라.
악업은 그냥 말로 가지고 짓는 건가? 악업 내가 짓겠다 해서 짓는 건가? 그렇지 않다는 거라.
니간타 수행자들은 그런 악업을 소멸하기 위한 도구로서 뭘 하느냐 하면 "남의 생명 죽이지 말고 또 남의 물건 훔치지 말고 또 거짓말하지 말고 또 깜마 오욕락, 오욕락에 빠지지 마라" 그렇게 가르킵니다. 그러니 당연히 어떻게 됩니까? 몸을 가지고 도구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부처님도 이 4가지는 얘기했습니다. 여러분들 조금 전에 받았던 오계, 오계 중에 4가지가 이것이라. 그럼 부처님 얘기한 거하고 틀린 게 없다는 거라. 뭐가 틀리느냐는 거라.
과거에 무엇을 지어놨던 얼마만큼 해 놨던 그것은 문제 삼지 마라. 지금 현재 그러한 지은 것들을 갖다가 없앨려고 노력하지 말고, 앞으로 짓지 말도록 해라.
어떻게 짓지 말도록 해야 되느냐?
"현재 현재에서 대상 대상에 마음을 일치시켜 줌으로 해서 번뇌를 없애버렸고 그러한 번뇌가 소멸되도록 해나가는 데서 출발을 해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니간타 수행자와 부처님의 가르침과의 차이점이라는 거라. 똑
같은 걸 하고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거라.
원인을 가지고 다스려 나갈 것인가? 아니면 결과를 가지고 다스려 나갈 것인가? 하는 것 가지고 수행의 방법에도 이마만큼 차이가 난다는 거라.
가끔씩 그런 얘기를 합니다.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어떻게 깨달을 거라? 어떻게 깨달아 나갈 겁니까? 조주선사는 나는 이렇게 해서 깨달았다, 육조해능선사는 이렇게 해서 깨달았다, 무자 화두를 가지고 깨달았든 공을 가지고 깨달았든 뜰 앞의 잣나무를 가지고 깨달았든 여러분들한테 그걸 가지고 깨달았다고 그것가지고 공부해라 할 것 같으면 공부가 됩니까?
쉽게 말하면 그 사람들이 깨달은 결과, 결과를 가지고 수행해 나가는 거 하고 마찬가지 아니냐는 거라.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부처님이 만약에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만 탐구를 했다고 할 거 같으면 깨달은 뒤에는 그렇게 걸식하고 또 노지에서 자고 법을 설할 이유가 없는 거라. 뭐 하러 그렇게 하느냐는 거라. 부처님이 뭐라고 했어요? 중생들의 이익과 복락을 위해서 중생들을 연민히 여겨서 법을 설한다고 그랬거든.
어떻게 깨달아야 되는가? 하는 걸 탐구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수행해야 될 것인가? 하는 걸 갖다가 탐구를 해야 되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내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서 행복하게 또 평안하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젭니다.
수행이라는 게 바로 그건 거라.
다른 것이 아니라는 거라.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만 생각할 거 같으면 다 머리 깎고 절에 들어와서 가부좌 틀고 좌선하고 앉아야 되는 거라. 좌선해가지고 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할 것 같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근데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는 거라.
자, 그래서 그런 얘기가 있고 나서 인제 부처님한테 이분들이 얘기를 듣고 돌아갑니다. 다른 무리들에게 그 법을 부처님이 설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다 찬탄을 했습니다. 근데 이 우빨리를 비롯한 이 외도들은 그런 말에는 콧방귀도 안 끼거든.
자, 그렇게 해가 또 지나갔다. 어느 날 다시 또 이 니간타 수행자들이 부처님한테 와서 법을 물어봅니다.
“자, 우리는 그렇게 고행을 해가지고 악업을 다 소멸하고 나면 행복해지기 위해서 합니다.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제자들에게 수행을 하라 그럽니까?”
“아, 그야 내 제자들도 행복해지기 위해서 수행을 하죠.”
“그래요. 그러면 일국의 왕인 빠세나디 왕이 더 행복합니까? 부처님이 더 행복합니까? 내가 보기에는 훨씬 재산도 많고 권력도 가지고 있는 빠세나디 왕이 더 훨씬 행복한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하나 물어봅시다. 그 빠세나디 왕이 그렇게 행복하다고 그럽니다. 그러면 그 빠세나디 왕은 먹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일주일 동안 행복해 있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도 그리 할 수 있습니까? 나는 먹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일주일 동안 있어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 더 행복합니까?”
당연히 부처님이 더 행복한 거라. 오욕락에 젖어가지고 행복을 누리는 것이 더 나은가 아니면 진짜 깨달음의 기쁨에 젖어가지고 행복을 누리는 것이 더 나은가?
자, 그러면 그 사람들 말도 틀리거든. 빠세나디 왕이 더 행복할 수도 없는 거라.
“그럼, 부처님 한 가지 물어봅시다. 당신의 제자들이나 당신은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고 가르치는데 왜 '나'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까? 나무도 뿌리가 내려야, 내려 있어야 거기에 가지도 자라고 또 꽃도 피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뿌리가 없이 어떻게 꽃이 피고 나무의 줄기가 자랄 수 있습니까? '나'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 몸이 있고 또 느낌도 있고 생각도 있고 생각의 구성도 있고 인식하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고 얘기를 하십니까?”
거기서 인제 부처님이 그럽니다.
자, 그러면 한 가지 물어봅시다. 당신은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만약에 조금 전에 예를 들어서 빠세나디 왕, 빠세나디 왕은 세속적으로 권력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 재산을 갖다가 뺏어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뺏어 가지고 내 것으로 만드는 거라. 이 사람이 잘못 안 해도 이 사람 죽이라 할 것 같으면 죽이는 거라. 왕이란 게 그런 거거든. 무소불위라. 못하는 게 없는 거라.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는 거라.
“자, 그러면 여러분들도 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내가 젊어지고 싶다고 해서 젊어질 수 있습니까? 내가 항상 건강해지고 싶다 해가지고 건강해질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는 사람들 한번 손 들어봐봐. 내가 항상 즐거운 느낌만 있고 싶다 해가지고 즐거워질 수가 있느냐는 거라. 어느 누가 즐겁고 행복하지 않길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거라.
왜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영양분으로 인해서 자라는 이 몸이나 느낌이나 생각의 구성 등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느냐는 거라. 왜 그러느냐는 거라. 내가 내 것이라 하면서 내 마음대로 못하는 이것이 어떻게 내 것이냐는 거라. 내 것이라 할 거 같으면 변하지 말아야 될 거 아니냐는 거라.
좋은 생각 일으킨다 해가지고 그걸 변하지 않고 있고 싶다 해가지고 그대로 있을 수 있느냐는 거라. 내가 생각을 이렇게 해가 천상에 갔다 왔는데 그 느낌이 너무나 좋다 해가지고 수행할 때 그 느낌 그대로 1시간 동안 있을 수 있습니까? 못 있는 거라. 로보트가 아닌 다음에는 못 있어. 근데 어떻게 그것을 '나'라고 하느냐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거라. 이렇게 항상 하지 않고 변해 나가는 이것에서 어떻게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거라. 이렇게 변해 나가는 것을 누구든지 만족하진 않는다는 거라. 만족할 것 같으면 변해 나가는 것에 좋아 가지고 그대로 머물러야 된다는 거라. 근데 우리는 그렇게 합니까?
변해 나가면 또 만족하지 못해 가지고 좋은 상황으로 만들려고 노력을 하게 되는 거고, 언짢은 생각이 들 것 같으면 언짢은 생각을 갖다가 변화시켜 가지고 좋은 생각이 일어나도록 만들려고 그러고, 만족할 것 같으면 가만히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안 되지 않느냐는 거라. 항상 불만족하기 때문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변하는 속성 자체를 갖다가 싫어한다는 거라. 이렇게 항상 하지 않는 것에 불만족하고 있으면서 불만족하고 있는 이 상태를 갖다가 어떻게 '나'라고 할 수 있느냐는 거라.
"나, 나의 것, 나의 영혼"이라는 것을 어디서 찾느냐 하는 거라. 꼭 예를 들어서 '나'라고 하는 걸 찾는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우리 절에도 여기 앞에 가면 바나나 나무가 있습니다. 바나나 나무 이놈이 어떻게 해서 크기에 요렇게 예쁘게 크는가? 그 원초적인 거 한번 어떤 놈이 과연 들어있기 때문에 이 바나나 나무가 크는가? 한번 밑둥을 싹둑 잘라봤다는 거라. 껍질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봅니다. 뭐가 남습니까? 바나나 나무껍질 아무리 한겹 한겹 벗겨봐야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속에 무슨 바나나의 근본적인 게 있느냐는 거라. 한 겹 한 겹도 조건 따라서 만들어진 거라. 더우면 많이 자라고 추우면 작게 자라는 원인으로 인해서 그렇게 나이테가 둘러진 것이지. 항상 더울 것 같으면 그렇게 나이테도 바뀌어지지도 않애.
그런 원인·결과에 인해서 생겨나는 것이고, 원인·결과가 소멸함으로써 죽음을, 그 나무가 죽게 되는 것이지, 그 무엇이 있어가지고 그렇게 만드는 게 아니라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해가지고 이 몸이 있고, 느낌이 있고, 생각이 있고, 생각의 구성이 있고, 인식이 있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인식하는 것도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조건이고, 느낌도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조건이라는 거라. 그런 조건·조건이라는 거라.
여기까지 얘기를 하니까 니간타 수행자들은 더 이상 할 얘기 없어집니다.
내가 과거 전생에 어떤 몸의 상태로 있었는지, 또 내가 과거 전생에 얼마만큼 악업을 쌓아놨는지, 내가 지금 닦아 놓은 것이 얼마만큼 악업을 갖다가 소멸하게 되어있는 상태인지, 그런 것을 따질려고 하진 안 한다는 거라.
‘에이, 내가 과거부터 뭐 잘해온 거 없는데, 내가 뭐 좋은 상태로 될 것인가?’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거라. 그것은 수행에서는 도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지금 현재 내 수행에서 도움 되는 것이 뭔가 하는 거라.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는 거라.
항상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욕망이 일어나면 욕망이 일어난다는 걸 알아차리고, 화가 일어나면 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알아차려 나가면서 그것을 다스려 나가야 되는 거라.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이라.
토요일마다 수행한답시고 이 자리에 와 가지고 지긋이 앉아가지고 수행합니다. 다른 때는 수행 안 해. 회사에 있든 가정에 있든 그건 수행하고는 관계없어. 그래 놔놓고 여기만 오면 수행한다고 앉아서 있는 거라. 다른 사람 수행하는데 방해될 것 같으면 괜히 화만 내쌌고. 그건 수행하는 자세가 아니라.
수행자일 것 같으면 현상 현상에 자꾸 알아차리려고 노력해야 되는 거라.
그것이 바로 부처님 말씀이잖아. 누가 결과 보고 수행하라고 그랬어요? 결과 보고 수행할 것 같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 그러니까 항상 원인자가 되는 것들을 자꾸 수행의 도구로서 삼아 나가야 됩니다.
조금 더 곁들여 가지고 하겠습니다.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때는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한테 가서 좋은 법을 듣습니다. 여러분들도 만약에 좋은 스승이 있을 것 같으면 가서 법을 들으려고 그럽니다. 부처님 말씀을. 이번 주에 스님이 법문 안 해 준다 그러면 괜히 오기 싫어, 절에. 또 와가지고 수행한답시고 앉아있어도 수행도 또 제대로 되지도 안 해.
그럼 부처님 당시 때나 지금이나 꼭 마찬가지라. 특히나 부처님 같이 위대하신 분이 내 주변에 있는데, 그 얼마나 환희심이 나겠어. 바리바리 그냥 먹을 거 싸가지고 가가지고 부처님한테 공양 올리고 옷하고 향 같은 거 가져가 가지고 부처님한테 바치고 얼마나 신심 나는 일이라.
근데 만약에 그 부처님이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거라. 내가 공양물을 탁발할 거리들 준비하고 향이나 꽃을 이렇게 준비해도 어디 갖다 줄 거라?
가끔씩 그럴 때가 있습니다. 인제 스님도 어쩔 수 없이 인제 공양청을 받으러 갈 때가 있습니다. 특히나 저번에 스님 생일 때 공양을 받으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마침 우리 절에 인제 기도 기간 중이라서 기도를 하면 이제 꼭 스님들한테 탁발을 하도록 해서 신도님들이 공양물을 가져옵니다. 가져와서 스님들 바리때에 넣어가지고 그 스님들이 그걸 가지고 공양을 하는데, 나는 예사로 인제 큰 스님 계시고, 또 좋은 스님도 있고 하니까 내가 인제 다른 데 가서 그 공양청을 받으러 가도 별 문제 없겠지 하고 빠져 나갔다, 갔다 오니까 보살들이 막 시부렁시부렁 중얼거려 쌌는 거라. 가져 왔더만은 뭐 스님도 없고 그렇다고. 일반 신도들도 그러는데, 하물며 부처님이 없을 것 같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거라.
빠세나디 왕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빠세나디의 왕이 있던 제따와나 정사에서 일입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계실 때는 그 부처님이 계신 곳에다가 그렇게 사람들이 찾아가는데, 부처님 없을 때는 어떻게 돼? 부처님이 항상 한곳에 있은 게 아니거든. 여러 곳에 다녔단 말이라.
근데 부처님이 갔을 때는 1250명이든 아니면 500명이든 아니면 단 몇 명이든 모조리 부처님 따라가는 거라. 그러니까 그 절은 텅텅 비어. 아무도 없게 되는 거라. 근데 간 줄을 모를 것 같으면 신도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거라. 가져와가지고, 부처님이 계시던 방에다가 놔두고 가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도 마음이 개운할 리가 없는 거라.
빠세나디 왕이 그리했거든. 부처님 안 계신지도 모르고 바리바리 싸가지고 왔다가 와보니까 부처님이 없었거든. 그래서 아난다 존자에게 얘기합니다.
“아이고, 스님, 스님! 부처님 없으니까 기운도 안 나고 공물을 가져와가지고 탁발을 가져와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참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부처님한테 여쭤 주십시오.”
아난다가 가서 인제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부처님! 부처님! 이 세상에 부처님을 대신해서 공경 예배할 만한 대상이 있습니까?”
“아난다야 있느니라. 세 가지가 있느니라.”
“무엇입니까? 부처님!”
“첫 번째는 부처님 사리를 모시는 것,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이니라.
두 번째는 부처님이 즐겨 쓰던 물건들, 쉽게 말하면 바리때나 가사나 또 부처님이 즐겨 앉으시던 보리수나무 이런 것들이 두 번째 그런 대상이 되느니라.
세 번째는 부처님을 대신한 형상, 불상이 되느니라.”
“예 부처님! 그렇습니까?”
“그렇지만 아난다야, 지금 여래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첫 번째와 세 번째는 대상물이 될 수가 없느니라.”
“왜 대상물이 될 수 없습니까?”
부처님 사리는 부처님이 완전한 열반을 이룬 후에 나올 수 있는 것이라. 요즘은 스님들이 수행 잘하면 쌩 사리도 나온다면서? ‘위에서 말하다 보니까 뭐가 툭 튀어나와 가지고 보니까 사리더라’ 하는 얘기들도 있긴 있습디다. 부처님은 그런 생 사리가 있었다는 경은 없습니다. 이건 여담이고, 어쨌든 부처님 열반하고 나서 다비하고 나서 나오는 게 사리라는 말이라.
그러니까 부처님 살아 계실 때는 그게 경배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부처님이 즐겨 쓰시던 물건 뭐입니까? 부처님이 입으시는 이 가사 그리고 바리때 또 보리수나무. 부처님 가사가 경배의 대상이니까 부처님 옷 벗어놓고 가십시오. 할 수 있습니까? 그럼 부처님 뭐 입고 다니라고? 부처님 바리때 놓고 가라 할 수 있습니까? 밥그릇 놔란 얘기하고 마찬가지잖아.
보리수밖에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거라.
세 번째 불상도 마찬가지라. 부처님 살아 계실 때 누구든지 부처님을 안다는 거라. 부처님을 조성하는 것은 부처님과 같이 비슷하게라도 만들어야 거기에 경배의 대상이 되고 떠올릴 수가 있는데, 부처님이라고 조성해 놓은 것이 진용 스님같이 만들어놨다, 도성 스님같이 만들어놨다 할 것 같으면 누가 그걸 갖다가 그 형상을 보고 부처님이라고 합니까? 안 한다는 거라. 부처님 살아 있을 때는 불상 자체가 그래서 안 만들어진 거라.
그러니 당연히 보리수나무가 경배 존경의 부처님을 대신하는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거라. 그래서 아난다가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부처님! 부처님! 그러면 부처님이 이 제따와나 정사에 없을 때는 그 보리수나무가 부처님을 대신해서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 아난다야! 그건 될 수 있느니라.”
'옳다 그렇구나'. 빠세나디 대왕한테 그럽니다.
“우리 보리수를 심읍시다. 여기 제따와나 정사에. 부처님이 존경했던 나무고 또 부처님을 깨달음에 이르게 했던 이 위대한 나무를 옮겨와서 부처님이 없을 때는 대신하도록 합시다.” 이래 가지고 붓다가야에 있는 보리수나무를 옮겨옵니다.
보리수나무를 옮겨올 때는 그래도 성스러운 보리수나무이기 때문에 부처님 제자 중에서 으뜸가는 제자 목련존자가 보리수나무를 가지러 갑니다.
그렇다고 뭐 붓다가야에 있는 보리수나무를 뚝 빼와가지고 거기 심을 수는 없는 거 아니라. 그렇다고 가지 하나 툭 꺽어가지고 올 수도 없는 거 아니라. 그래서 이제 목련존자가 가서, 목련존자는 신통이 있는 분이라. 그러니까 이 보리수나무 열매가 언제 떨어질 것인가? 하는 걸 아는 분이라. 그래서 날짜를 미루고 미루다가 열매가 떨어질 때 가서 이 보리수 열매를 갖다가 부처님 가사에 싸가지고 그렇게 옵니다. 와가지고 심을려고 합니다.
보리수나무를 보면 우리 태종사에 보면 지금은 잎이 질 때입니다. 그러다가 음력 3월 4월 되면 잎이 활짝 만개를 합니다. 사실은 그때가 보리수를 심는 적기라.
인도 같은 때는 또 그때가 언제냐면 농경제라 해서 파종하는 시기라. 새로 씨앗을 심는 그런 때라. 보리수 심기 아주 좋은 때거든.
자, 그런 때를 택해가지고 빠세나디 왕을 비롯해서 급고독 장자 아나타삔디까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운집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아난다 존자가 목련존자한테서 보리수 씨앗을 받아가지고 빠세나디 왕에게 줍니다. 왕에게 주면서 “보리수 나무를 심으시오.” 그럽니다.
왜 스님들이 직접 하지 않느냐 하면 스님들은 그런 일에는 떠나라고 그럽니다.
탑을 관리하는 것, 이런 것들도 스님들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부처님을 조성하고 부처님을 조성하는데 내가 공덕을 쌓기 위해가지고 보시는 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관리하라곤 얘기해 놓은 적이 없다는 거라. 보리수나무도 꼭 마찬가지라. 모셔 오기는 스님들이 모셔 오더라도 심고 관리하는 것은 신도들이 해야 된다는 거라.
스님들은 뭘 담당해야 되느냐 하면 그런 여러 가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조건만 만들어주라는 거라. 보리수나무도 가져와 주고 부처님 법도 설해 주고 또 수행을 같이 해주고 이런 조건을 심어주라는 것이지, 그걸 심어놔 놓고 관리하고, 신도들에게 깨달음에 이르도록 끌고 가서 물에다가 집어넣고, 이러지를 마라 라는 거라. 이런 것은 할 수가 없다는 거라. 부처님도 못하시는 거라. 그런 거는.
그럼 당연히 보리수를 심는 것은 일반 세속인들 해야 되는 거라. 그중에서 가장 권력이 있고 또 여러 면에서 적임자라고 생각이 되는 분이 빠세나디 왕이거든. 빠세나디 왕이 그 보리수 열매를 딱 받아서 생각을 합니다.
‘아, 내가 과연 심어야 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그걸 그냥 자기가 심지 않고 아나타삔디까 존자한테 툭 주거든. 아나타삔디까가 그걸 받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그 보리수 나무를 심습니다.
왜 아나타삔디까가 심었는지 알아요? 급고독 장자가?
보리수나무는 무엇 때문에 심었습니까? 부처님을 대신하기 위해서 심은 거라.
왜 부처님을 대신하기 위해서 그걸 심습니까? 부처님 법이 오래도록 가져가고 또 그러한 오래도록 가가지고 우리도 부처님 제자 된 도리로서 그러한 가르침 따라서 오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심는 거라. 부처님 말씀 좇아가지고 수행하기 위해서.
근데 빠세나디 왕은 어떻습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아무리 권력 있다 해도 5년 이상 못 가. 지금은 뭐 모든 것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은 5년 뒤면 그 자리 내놔야 돼. 안 내놓을 수 있습니까? 빠세나디 왕이라고 해가지고 그런 예외가 될 수가 없는 거라. 아들이 “아버지 왕위 주시오. 안 내놓으면 몰아내겠습니다.” 언제 그럴지 누가 알아? 또 왕이라고 하는 직책이 언제 암살을 당할지도 모르는 거라. 오래 갈 수가 없는 직위라.
이 성스러운 보리수나무가 잘 자라야 되는데, 내가 그렇게 오래 가지도 못하는 운명이 있는 사람이 심어서 되겠느냐는 거라. 나보다는 급고독 장자가 그래도 오래도록 부처님을 시봉할 수 있다는 거라.
쉽게 예를 들어가지고 아무리 김대중 대통령이 재물이 많고 권력이 세다고 해도 이건희 또 이건희 아들한테까지 물려주는 만큼 재물이 항상 많이 있을 수도 없고, 권력을 가질 수가 없어. 떨어지고 나면 그만이라.
급고독 장자가 그렇다는 거라. 부처님을 오래도록 시봉할 수 있고, 또 그러한 것들을 갖다 널리 이롭게 해줄 사람이 적임자다 하는 거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성스러운 물건들을 모시게 될 때는 여러분들도 그건 알아둬야 됩니다.
그래서 "어린 사람들에게 시키라" 하고 그럽니다.
괜히 고집 부린다고 또 내가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할 필요가 없다는 거라. 당신들보단 당신들 자녀들이 훨씬 오래 살게 돼 있다는 거라. 건강할 수 있다는 거라.
그렇게 해 가지고 인제 부처님이 즐겨 앉으셨고 깨달음을 이뤘던 보리수나무가 제따와나 동산에 심어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걸 갖다가 아난다로 인해서 심어졌다 해서 그 보리수를 "아난다 보리수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때부터 보리수가 각지로 퍼져나갑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태종사에도 그 보리수 나무가 오게 된 겁니다.
그 제따와나에 있는 아난다 보리수가 2대가 된단 말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스리랑카에 가있는 아누라다뿌라에 있는 보리수 나무가 2대째라.
마힌다 장로 또 상가미따 비구니, 이 분들에 의해서 보리수가 옮겨졌기 때문에.
이 2대째 있는 걸 갖다가 다시 여기에 모셔왔기 때문에 우리 태종사는 3대째가 되는 거라.
그런 성물을 모셔놓은 곳이라. 여러분들은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이 태종사에 와도 좋습니다. 여담 삼아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런 것들도 하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수행들 열심히 하고, 여러 가지 태종사 일, 태종사 일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닙니다. 태종사에서 만들고 있는 홈페이지 열심히 들락거리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해야 된다는 거라.
자료들도 받아가서 그것을 읽고, 읽지 않으면 그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얼마나 다운받기 좋게 만들어놨어? 그거 다운 받아가지고 자꾸 읽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스님이 시간 나는 대로 계속 자료들을 올려줄 테니까, 자료를 가지고 참고로 삼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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