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HDhRH3DY-c8?si=Y3i7ItfBSaGK0iLv
*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 칠처선정. dhamma31 (2003)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는 과정 - 「원력 · 발심」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 「범천 권청」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49일동안 - 「7처 선정」
저번 주에 한 거 기억하는 사람? 이게 또 안 뜨는데요? 되면 되는 기고 난 모르겠어 이. 저번 주 내용 기억하는 사람? 저번 주 내용, 한번 대충 얘기해 봐요. 보지 말고, 보지 말고 머릿속에 있는 기억. (수행자 ...)
음? 그럼 부처님 출가에 대한 얘기했을까요? 아니면 부처님 열반에 대한 얘기 했나? 중요한 부분이 뭐냐 하는 거라. 저번 시간에 한 내용 중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 (수행자 대답 ...) 그거 얘기하라는 거지. 누가 뭐 출가한 줄 모르나?
비단 그중의 하나의 신자들은 뭐냐면 또 행주치마 같은 치마에다가 구슬을 담기는 잘 담아. 잘 담는데 일어설 때 그 치마를 잡고 일어서야 되는데 치마를 놓고 일어서 버리거든. 그러니 뭐 그 구슬이 담겨 있겠어? 다 흘러버리지. 그 여러분들이 꼭 그와 같은 꼴이라이. 들을 때는 잘 듣지, 듣고 나서 하나도 모른다 할 것 같으면 무슨 소용이 있어? 그러면 이거 뭐 한 세 달 네 달 하고 나서는 1주 전의 것도 다 까먹는데 남아있겠어 머릿속에?
항상 이번 주에 중요한 포인트가 뭔가 하는 걸 갖다 기억을 하고 다음 주를 대비하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예습 복습이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이.
자, 이번 주에 할 내용을 합시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는 과정까지를 설명을 쭉 했습니다.
부처님이 출가를 결심하게 되고 또 출가를 하게 된 근본적인 목적은 뭐라요? 생로병사를 뛰어넘기 위해서 출가를 했습니까?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 그걸 이제 '원력'이란 말로 스님이 얘기를 했습니다.
저번 주에 가장 큰 것이 바로 그 「원력 · 발심」이라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 것들은 잘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런 발심 · 원력의 차이 때문에 조그마한 이익들 조그마한 신통들도 다 뛰어넘어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 라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마왕 파순이나 악마 라다 같은 형태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곧 중생을 죽이는 길이라 하는 거라 그것은. 부처님은 중생을 살리는 길을 택하셨고 그런 조그마한 이익들에 집착하고 거기에 매달리다 보면 중생을 곧 죽이는 일에 빠져들게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인제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인제 「범천 권청」이라는 부분으로 넘어가집니다. 인도인들의 대다수들이 그 부처님의 사상을 목말라하고 그러한 것들이 범천 권청 형태로 나타났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자,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왜 녹야원으로 갔을까?
녹야원으로 간 이유가 뭡니까? 하고 많은 중생들 중에 왜 녹야원으로 갔어요? (수행자 대답 ...) 그거는 경에 나와 있어. 다섯 명의 수행자들한테 법을 설하기 위해 왔다는 거지. 그것 물어보려고 내가 물어봐? 그거 얘기한 건 아니잖아. 그건 누구든지 알아. 다섯 명한테 법을 설했다고, 최초로 법을 설했다고 그러죠. 난해해서 그 사람들은 내 법을 받아들일 만한 근기가 된다 해서 그리 간 거라? 그것도 경에 나와 있어.
근데 간 진짜 목적은 뭐냐는 거라 부처님이? 하고 많은 사람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 다 물리치고 왜 그 길로 갔느냐는 거라. 그 길이 작은 길이 아닙니다. 장장 요즘 길, 잘난 길로 가도 쉽게 말하면 붓다가야 깨달음을 이룬 그 가야 지방에서 바라나시까지 몇 킬로인지 아세요? 240킬로예요. 240km. 요즘 말로 240키로면 가까웁지만 옛날 같으면 그 240키로는 굉장히 먼 거리입니다. 죽을 생각이 아닐 것 같으면 그 240키로를 갈 수가 없습니다 한 번에. 부처님이 신통부려 가지고 하룻밤낮 사이에 푹 그까지 갔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4월 보름날 깨달음을 이루었단 말이라. 장장 2달간이란 기간을 갖다가 그 가는 데 투자를 한 겁니다. 도착이 거의 6월 보름에 도착한 거라. 여러분들 생각하기에는 그럴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왜 거기 갔느냐는 거라.
거기서 부처님이 사람들과의 인연의 고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여실하게 드러납니다. 경에는 분명히 그렇게 나와 있죠.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맨 처음 살펴본 것이 자기의 옛날 스승들 스승들을 갖다가 살펴봤다고 그럽니다. 물론 스승들이 이미 죽고 없으니까, 그다음으로 살펴본 것이 다섯 명의 수행자들이라는 거라.
그마만큼 깨달음을 이루기 전과 깨달음을 이루신 후도 꼭 마찬가지로 중생들에 대한 생각들이 지극했다고 봐야 됩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나하고 먼저 인연 맺은 사람들을 가장 먼저 법의 울타리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하는 거라.
그런 의미에서는 참 우리 한국불교가 개선해야 될 점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출가하고 나면 절대 집 있는 쪽으로 가지 말라고 그러지? 부모하고 인연을 다 끊으라고 그런단 말이라. 이게 참 어떤 면에서 참 생각을 많이 해봐야 될 문제입니다.
인연이 더 지중한데, 그 인연이 더 지중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내가 배운 만큼 내가 아는 거 체험한 만큼 부처님 법을 전할 수 없게 만드는 것 자체는 상당히 모순이라고 봐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일단 출가했다고 하는 것은 출가인들에게는 후원자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율장에는 다섯 명의 후견인을 두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그 5명의 후견인들은 나하고 인연 있는 사람들이 후견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당연히 가족이나 부모가 될 수밖에 없는 거라. 그 5명의 후견인들이 쉽게 말하면 한 스님이 공부를 해나가고 깨달음에 이르도록 뒷받침을 해주는 역할을 하는 거라.
그래서 그 스님에게는 더욱더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게끔 하고 또 후견인들은 그런 스님이 커가는 모습을 보고 더욱더 신심을 내게끔 만들어주고 하는 것이 이 후견인 제도라는 거라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지금 사라져 버렸다시피 하는데 돈으로 다 해결하려고 하니까.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출가를 하는 것하고, 재가인들이 담당해야 되는 몫들은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는 거라. 그마만큼 출가와 재가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출가한 스님들, 출가한 스님들만 가지고 살 수 있습니까? 재가인들이 보시 안 하고 재가인들이 절을 짓지 않고 그다음에 부처님 법을 들으러 오지 않을 것 같으면 출가인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은 알고 있단 말이라.
어쨌든 출가인과 재가인의 관계는 그렇게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데, 어쩌면은 그런 재가인 중에서 인연이 더 지중한 사람들이 이 부모들이고 가족 친지인데, 그러한 것들을 금해라 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지 않느냐 하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깊이는 얘기를 안 하고 여기서 대충 넘어갑시다 이.
그렇게 해서 어쨌든 240km를 갔다는 것은 그만큼 부처님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을 때의 마음 자세가 굳건하게 지켜지고 있다 하는 살아있는 반증입니다.
어쨌든 거기 가서 이제 법을 설해서 「불교가 성립」 하게까지 됐습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 6과까지가 저번에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불교신앙이 성립됐다'는 것까지 했습니다.
오늘은 「7과. 보살편」으로 들어갑니다.
자, 여기서 인제 저번에 숙제를 내줬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중도와 삼법인, 사성제'에 대한 것들을 갖다가 얘기할 수 있도록 하라. 그다음에 또 하나 숙제가 뭐였어요?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7처 선정」 '일곱 군데 머무르면서 깨달음의 법열을 즐겼던 부분' 그 부분에 대한 걸 갖다가 한번 생각해 봐라 알아보라 그랬습니다.
해 왔습니까? '7처 선정' 누구 해 온 사람 손 들어봐요? 그거는 해 올 수가 없지. 우리나라 어느 경전을 찾아보든 책을 찾아보아도 칠처 선정 나와 있는 것은 없어. 그마만큼 아직은 체계가 안 잡혀있는 상태입니다. 어쨌든 제가 대충적으로라도 얘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이 처음에 깨달음을 이르렀을 때 초경, 2경, 3경에 따라서 깨달음의 정도가 더욱더 원숙해진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초경 부분에서는 숙명통을 갖다가 얻게 되고, 이경에서는 천이통 천안통을 얻게 되고 그다음에 삼경에서는 마지막 누진통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초경 무렵에는 자기의 과거 전생, 원인 결과에 의해서 과거 전생이 쭉 이어진 것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게 되고 또 내가 이런 원인을 지은 것으로 인해서 결과를 받아서 이런 몸으로 태어났고 또 다음 결과를 받고 하는 원인·결과를 여실하게 살펴볼 수가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걸 갖다 「연기순관」이라고 보통 이야기합니다. 그걸 인제 보통 숙명통이라고 그럽니다. 자기 스스로의 과거부터 내려왔던 그런 윤회 전생을 갖다가 알아 가는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이경 때는 천안통을 얻었다, 천이통을 얻었다 하는 부분은 뭐냐면 「연기의 역관」을 얘기합니다. 자기뿐 아니라 못 중생들이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끊임없이 윤회하고 있다 하는 걸 갖다가 여실하게 아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세계뿐 아니라 여러 부류의 중생들이 끊임없이 윤회를 거듭하는 원인 결과를 갖다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무명에 인해서 명색이 있게 되고 명색에 인해서 육입이 있고 하는 그런 순차적인 것들을 갖다가 거꾸로 다시 관찰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는 연기 순관과 역관을 갖다 삼경 때 더욱더 순일하게 해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완전하게 ‘아하, 이것이 바로 중생들이 고통받는 원인이구나. 이것이 바로 중생들의 고통이고 고통의 원인이다’ 라는 걸 갖다가 여실히 알고 그것을 소멸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걸 갖다가 정립을 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초경과 이경은 바로 사성제에서 말할 것 같으면 고·집(苦集)에 해당이 된다고 봐야 됩니다. 이런 고통으로 인해서 이런 고통이 오는 원인이 이렇구나 하는 걸 갖다가 여실하게 보게 되고,
삼경 때 '아 이것을 없앨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야 될 것인가?' 그래서 그렇게 사라졌을 때 오는 법열을 갖다가 확연하게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걸 인제 쉽게 말하면 새벽에 해가 찬란하게 떴을 때 완전하게 이제 깨달음에 이르렀다 하고 경전으로 표현을 한 겁니다. 그마만큼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그러한 상태를 체험했다는 얘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1주째 될 때는 그런 법열의 기쁨에 젖어 있었다 하고 그럽니다.
일주일 동안 안 잡쉈어요 아무것도. 그러니까 경에는 그렇게 표현돼 있습니다.
6주가 될 때까지,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수자타가 유미죽을 공양으로 올리죠. 그래서 그 유미죽만 잡숫고 안 잡수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조금 과장된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어쨌든 첫 주, 첫째 주에는 1주일 동안 선정삼매에 들어 있었다고 봐야 됩니다. 그래서 보통 일반적으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들이 법열에 젖어서 있는 기간이 언제까지냐 하면 1주일 간이라고 그럽니다.
1주일 동안 모든 의식이나 호흡조차도 정지돼서 사라져버리는 상태 - 멸진정까지 들었을 때, 그다음으로 깨어나기 위해서는 1주일 최대한 1주일이 필요하다고 그럽니다. 물론 하루 동안 할 수도 있고 1시간 동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보통 부처님이 처음 깨달음을 이루었던 때였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멸진정에 들어있는 단계라고 봐야 됩니다. 그래서 그 기쁨을 스스로 만끽하고 또 나름대로의 그 깨달음을 이루어 나갔던 과정들을 되돌아보는 시기였다고 봐야 됩니다.
그다음에 2주째 될 때 2주째 될 때는 자, 그렇게 소중한 시간을 마련해 준 보리수나무 얼마나 참 고맙겠습니까? 그 보리수나무를 갖다가 지긋이 응시하면서 일주일을 보냈다 하고 경에는 표현이 돼 있습니다.
지금 붓다가야를 가보면 동서로 문이 있습니다. 동서로만 문이 있고 남북으로는 문이 없는데, 그 동쪽 문의 왼쪽편 지금 그 자리가, 거기가 제2주째 머물렀던 곳이다 하고 표시를 해놨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앉아서 보리수나무를 지긋이 응시를 하고 있었다고 그렇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또 보리수나무를 보면서 일주일간 법열 희열에 젖어 있었다. 쉽게 말하면 1주일 지나고 나서 다시 깨어났다가 다시 또 일주일간 멸진정에 들었던 상태라고 봐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제3주째 됐을 때는 그 탑의 북쪽에서 행선을 했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대탑으로 봤을 때는 북쪽에서 열아홉 발자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행선을 했다고 그럽니다. 지금도 가보면, 그 열아홉 발자국을 걸을 동안에 경에는 연꽃이 밑에서 피어났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형상으로 해가지고 19개의 연꽃을 갖다 이렇게 표시를 해 놨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가서 한번 재어봤습니다. 그 19발자국 걸은 길이가 얼마나 되는가 하고 한번 재보니까 거의 이쪽에서 저쪽이 한 20미터 정도 돼요. 태국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행선의 거리가 몇 미터냐 하면 20미터입니다. 그래서 ‘아, 이래서 이거 20미터가 나왔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됐습니다.
왜 그러냐면 "방해물 없이 경행 수행을 해나갈 수 있는 거리, 20미터가 가장 적당한 거리"라고 그럽니다. 너무 길어도 오히려 더 지루해지고, 짧아도 또 번잡해집니다. 그래서 "20m 정도의 거리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아마 부처님 3주째 될 때 행선 거리하고 거의 일치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때 그러니까 행선을 하게 된 이유는 좌선만으로 이렇게 쭉, 쉽게 말하면 이때까지 2주를 지내왔단 말이라요. 그렇다면 몸에서 행선을 해줘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사실은 행선의 중요성이 나타나집니다. 아무리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지만은 ‘조금 더 그 법열에 젖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방지해 주는 것이 바로 이 행선이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좌선수행을 하고 있으면 1시간 해본 사람은 2시간 하고 싶고, 또 2시간 하고 재미를 붙일 거 같으면 더 하고 싶거든.
어떤 면에서는 그것도 하나의 욕망이라. 그런 욕망을 전환시켜 주는 게 이 바로 행선이라. 그렇게 행선으로 인해서 쉽게 말하면 수행의 점진적인 발전을 가져오게끔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수행이 뒷받침이 돼 나가주려고 할 것은 반드시 행선을 하라" 하고, 그래서 "보통 1대1 비율로 하라"고 하는 것이 그런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런 행선의 이로운 점들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쨌든 부처님의 경우에는 다른 이유들보다는 몸의 작용, 앉아만 있었을 때 일어나는 몸의 작용들을 갖다가 커버하기 위해서 행선을 했지 않느냐 하고 판단들을 합니다.
보통 인제 우리 태국 같은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스님들이 멸진정에 들어가 가지고 있다가 깨어나는 부분들을 많이 봅니다. 깨어나면 천천히 물론 깨어나지만 깨어나고 나면 반드시 뭐 하느냐면 우리 같으면 주장자 들고 큰소리를 치는 게 아니고, 아무 소리 없이 조용하게 아주 천천히 일어나 가지고 행선을 합니다. 그래서 몸의 장기나 몸 활동들을 갖다 원활하게 유지를 시켜나가주는 역할들을 했습니다. 그렇게 인제 해나갔고.
그다음에 제4주째 될 때는 북서 쪽에서 좌선을 했다고 그럽니다.
좌선을 하면서 이때 인제 쉽게 말하면 부처님 자신의 교리적인 체계를 세울 수 있는 기간이었다고 그럽니다. 이때는 인제 멸진정에 들었던 게 이 때는 아닙니다.
멸진정에 들었던 때는 아니고, '앉아서 어떻게 해서 내가 이 법을 갖다가 설할 수 있을까?' 하는 걸 갖다가 체계를 세울 수 있는 그런 단계입니다.
그래서 경에는 "아비담마를 이때 체계화시켰다" 하고 남방상좌부 불교에선 얘기를 합니다. 스님은 그렇게 믿지는 않습니다. 아비달마를 그때 체계화시켰다고는 보기는 힘들고, 아비달마는 나중에 사실은 그 제2차 결집이 끝나고 나서 제3차 결집 때 아비담마가 경으로써 포함이 됩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어쨌든 중심적인 부분을 갖다가 체계화시킨 것이 이때였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좌선을 하고 그 체계를 세울 동안에 부처님이 광명을 발했다 하고 그렇게 나와있습니다. 그때 이제 오색 광명이 발했다고 그렇게 돼있습니다. 지금도 불교기가 오색기로 돼 있죠. 요렇게 줄 5개, 요쪽으로도 줄 5개 그어져있고, 이렇게 5가지 색깔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5가지 색이 사실은 이때 나온 겁니다. 부처님의 몸에서 일어났던 빛 5가지 색깔을 갖다가 불교기로서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다음에 이제 5주째가 됐을 때 동문과 대탑 사이에 있는 반얀 나무, 반얀 나무 아래에서 지내게 됐는데 이때부터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때 사실은 맨 처음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한 아주 오만한 바라문이죠. 오만한 바라문이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데, 반얀 나무 아래에 앉아있는 걸 보고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어떤 것이 바라문인가? 바라문의 특성이 무언가?" 하고 물어봅니다. 쉽게 말하면 어떻게 해야만이 바라문이 되는가 하는 얘기입니다. 어떻게 함으로써.
그때 인제 부처님 얘기한 것이 "악이 모두 사라진 자, 자만하지 않는 자, 마음이 깨끗하고 자제할 줄 아는 자, 명확한 앎으로 성스러운 삶을 사는 자, 그런 사람이 바라문이니라" 하고 이제 최초로 법을 설하게 됩니다.
이때 이 바라문은 부처님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근기만 됐을 것 같으면 아마 깨달음에 이르렀겠죠. 그렇지만은 부처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를 못 한 경우가 됩니다. '악이 모두 사라지고, 자만하지 않는 자' 하는 것은 사실은 이 바라문을 대고 얘기한 겁니다. 거만하게 와서 서 가지고 얘기했을 때는 절대 부처님이 법을 설하지 않습니다. 경에는 분명하게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법을 설할 수 있는 조건은
누가 서서 법을 청했을 때는 법을 설하지 마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또한 법을 설하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앉아서 법을 설하라 그렇게 돼 있습니다.
간단한 경을 외운다고 하더라도 서서 못하게끔 돼 있습니다.
근데 우리는 지금 예불을 하거나 이럴 것 같으면 서가지고 반야심경하고 막 이러죠? 어떤 면에서는 부처님 말씀하고 어긋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앉아서 법을 설하도록 돼 있습니다.
근데 이 바라문은 사실은 일어서가지고 물어본 거거든.
근데 부처님이 그 바라문에게 정확하게 법에 대해서 얘기를 할 수 있는 부분이 못돼. 어떻게 이렇게 보고 법을 설할 수 있느냐는 거라. 그렇게 할 수가 없거든. 그래서 맨 처음 대문에 '악이 모두 사라진 자, 자만하지 않는 자가 바라문이다' 하는 얘기는 이 사람을 비유해서 한 얘기라.
그래서 '마음이 깨끗하고 자제할 줄 아는 자' 자만하지 않고 악행 짓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깨끗해진다는 거라. 도덕적인 행위가 정립이 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마음의 안정과 고요라. 그래서 마음이 깨끗해진다는 거라.
그렇게 마음이 깨끗해지는 자들은 스스로 자제할 줄 아는 거라. ‘아, 이것은 내 마음을 더럽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하는 걸 갖다가 알기 때문에, 또 ‘이러한 행위는 나에게 좋은 공덕을 가져오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반면에 이것은 나쁜 결과나 나쁜 행위로서 이어진다’ 하는 걸 갖다가 스스로 알게 되기 때문에 자제할 줄 안다는 거라.
마음이 깨끗해지고 자제할 줄 아는 자가 바라문이 되고, 명확한 앎으로 성스러운 삶을 사는 자가 바로 바라문이다 하는 거라. 그러한 자들은 틀림없이 선과 악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압니다.
그래서 마음이 깨끗해지고, 안정이 되어지면 자연스럽게 이런 지혜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런 지혜들이 더욱더 일어날 것 같으면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바르게 살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명확하게 아는 것이 생겨나진다는 거라. 그래서 '지혜의 눈이 생겨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성스럽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성인의 경지로 넘어가지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자들을 바로 바라문이라고 얘기한다 하고 인제 부처님이 얘기하는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6주째가 될 때, 6주째는 남쪽에 보면 그 무짤린다(mucalinda) 연못이라는 데가 있습니다. 무짤린다 연못에서 좌선삼매 멸진정에 들었습니다 일주일간.
6주째 되는 것은 경에 표현이 많이 돼 있습니다. 우리 여기도 보면 저기 용이 이 부처님을 이렇게 몸을 감싸고, 머리 7개가 이렇게 부처님을 보호하고 있는 그런 형상이 있죠. 저거, 바로 저겁니다. 나가(nāgā) 용, 용신이죠 그러니까. 이 용신이 부처님이 멸진정에 들어있는데, 마침 비바람이 불고 굉장히 날이 추웠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 비바람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 멸진정에 들어있기 때문에.
멸진정에 들어있으면 죽은 사람하고 차이점이 뭐냐 하면 크게 대별해가지고 몸의 체온이 죽은 사람은 급격하게 식어버립니다. 멸진정에 들어있는 사람들은 서서히 식어 내려가집니다. 그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몸의 체온이 4도 ,5도 이상 떨어지거나 올라가면 그 사람은 목숨이 위태롭다고 그럽니다. 쉽게 말하면 멸진정의 상태가 일주일간 갈 동안에 4도, 5도의 폭으로서 떨어지게끔 돼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날이 많이 더울 때는 4도, 5도 폭으로 올라가겠지. 주변적인 기후의 환경 조건을 타게 돼 있습니다.
보통 이렇게 몸의 체온이 4도, 5도로 쭉 천천히 일주일간 떨어진다는 거라. 근데 주변적인 환경이 더욱더 비바람이 불고 추워질 것 같으면 어떻게 돼? 그 체온이 떨어지는 폭은 더욱 길어진다는 거라. 멸진정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일주일 후에 내가 깨어날 것이다' 하는 걸 갖다가 예측을 하고 멸진정에 든단 말이라. 그러면 주변적 상황이 어떻게 되든 일주일 후에 깨어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체온이 그렇게 더욱더 많이 떨어질 것 같으면 어떻게 돼? 깨어나지 못하고 열반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그걸 보고 이 무짤린다 용왕이 부처님의 몸을 보호하겠지. 머리 위에 지금 7개 돼 있죠 머리가. 쉽게 말하면 부처님 몸을 일곱 겹으로 쌌다는 얘기입니다. 그걸 표현해 놓은 겁니다.
몸을 일곱 겹으로 싸서, 여러분들 코브라 보면 이렇게 옆으로 쭉 퍼지죠. 그래서 그걸 위로 머리 위로 이렇게 씌웠다고 그럽니다. 그렇게 인제 해 놓은 거고.
그래서 태국 같은 경우에는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모습은 보통 이렇게 나가(nāgā)를 갖다 7마리 머리로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인제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른 게 아니고 부처님이 처음 탄생하는 모습을 할 때도 나가로 표현했는데 그때는 5마리로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하고 인제 그런 재미있는 게 있는데, 어쨌든 그렇게 무짤린다 연못에 있는 용신이 부처님 몸을 보호했던 곳이 이 6주째입니다.
이때 맨 처음 불교사에선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오리사 지방에서 2명의 상인이 그 부처님이 앉아 계신 곳의 주변을 지나다가 부처님한테 귀의하고 부처님한테 공양물을 올렸다고 이렇게 기록이 돼 있습니다.
땁뿟사(Tappussa) 하고 발리까(Bhallika)죠 2명이. 그래서 그 2명이 징표로써 부처님의 머리카락 7개를 받아 가서 지금의 버마 쉐다곤 사원에다 모셔서, 지금은 쉐다곤 사원 주변 5키로 이내는 5층 이상 못 짓게끔 법제화돼 있습니다. 저기 파리 에펠탑도 지금 그런 형태거든. 에펠탑 주변으로는 에펠탑보다 높게 건물을 못 지어요. 실력이 없어서 못 짓겠어요? 그마만큼 그런 성소라는 그런 것입니다.
어쨌든 땁뿟사 하고 발리까가 인제 부처님에게 귀의를 해서 그때 처음으로 법을 듣고 부처님한테 이귀의(二歸依)죠,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해서 나가겠습니다."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하는 부분을 갖다가 낭송했다고 그럽니다. 그 내용이 뭐냐면
「홀로 수행하며 사는 삶에 만족하고 진리를 듣고 이해하는 자에게 행복이 온다.
행복은 세상에 적의를 품지 않고 모든 것에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을 때 다가온다.
세상에 행복이 있다면 그것은 집착과 감각적 욕망을 벗어남에 의해서 온다.
나라고 하는 자만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진정한 행복이 온다」
그렇게 이제 얘기를 합니다.
이 6주째 될 때 이 2명의 상인이 부처님한테 공양물을 올렸다고 그럽니다.
그때 부처님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과거의 부처님들도 공양을 어떻게 받았을까? 생각해보니까 바리때로 받았거든.
그래서 ‘나에겐 지금 바리때가 없는데 어떻게 할까’ 하고 생각을 하니까 천신들이 나타나서 사천왕이 나타나서 금바리때를 주니까 이런 수행자는 이런 귀한 거 가질 이유가 없다 해서 안 된다고 하니까, 은바리때를 갖다주고, 은바리때도 갖다 줘도 안된다 하니까 그다음에 인제 돌바리때를 갖다 줬다고 그렇게 기록에 나와 있죠.
그래서 사천왕이니깐 바리때 하나씩 가져와도 4개잖아. 그 4개를 누구는 받고 누구는 안 받을 거라. 그래서 4개를 다 받아가서 딱 포개가지고 하나로써 만들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스님들 바리때는 선이 3개가 딱 그어져 있습니다. 바리때 하나인데, 그거는 뭐냐면 4개의 바리때가 포개진 것이다 하는 걸 갖다 표현을 해 놓은 겁니다.
근데 우리나라는 사합발우 오합발우 해가지고 있죠? 바리때가 각각 떨어지죠, 각각 떨어져있습니다. 요거는 뭐 보시받아 넣어가지고 밥 먹는 바리때, 요거는 뭐 반찬 바리때, 요거는 청수물 바리때 ...
사실은 그런 의미로 봤을 때는 부처님의 근본적인 말씀하고 조금 틀린 부분입니다. 원래는 스님들은 한 바리때를 가지게끔 돼 있습니다. 단지 네 바리때라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 줄을 3개 그어 놓는 것뿐이라. 한 바리때를 가지고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담기도록 돼 있습니다.
그래서 출가한 승려들에게 바리때를 가져라 하는 이유가,
그때 당시에 바라문들 같은 경우에는 손바닥에 음식물을 받아서 먹었다고 그래요. 쉽게 말해서 손에 직접 주는 것이 아닐 거 같으면 먹지를 않았다고 그러거든. 그런데 이제 불교도들은 바리때에 받게끔 되어 있습니다. 단지 바리때에 넣어주는 것이 아니면 자기 것이 아니라고 해서 먹질 않습니다. 그래서 바리때 밖에 아무리 놓아놔도 스님들이 그거는 먹질 않습니다.
그 바리때 속에는 어떤 것이라도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맛있는 것이든 맛없는 것이든. 그렇지만 한 바리때에 들어올 거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섞여버린다는 거라. 그러면 음식에 대해서 탐착하고 하는 것이 애초부터 없어져 버려.
수행해나가는데 주의해야 될 게 이 음식이라. 맵고 짠 건 물론 피해야 되겠지마는, 음식물에 대해서 내가 좋고 나쁜 마음을 가져가서는 애초부터 수행을 해나갈 수가 없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바리때 속에 음식이 섞이도록 해서 그것을 먹도록 하는 거라. 그런 의미에서는 이 한 바리때에 넣어야 되는 거라. 각각의 바리때에 해가지고는 아무래도 깨달음을 이루기 전엔 좋은 것은 더 먹고 싶고 나쁜 것은 안 먹으려고 할 거 아니라. 그래서 음식에서부터 애초부터 부처님이 그렇게 수행자들은 한 바리때를 쓰게끔 만들어 놨던 겁니다. 그래서 이 4 바리때를 합해서 한 바리때를 한 것이 이때 인제 생겨납니다.
그다음에 7주째가 됐을 때, 아 스님이 잘못 얘기했습니다.
6주째 됐을 때는 2명의 상인이 아니고 천신들, 천신들이 내려와가지고 부처님한테 법을 청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천신들한테 한 얘기가 바로 "홀로 수행하며 사는 삶에 만족하고 진리를 듣고 이해하는 자에게 행복이 온다" 하는 그런 얘기들을 한 겁니다.
7주째 될 때는 라자야따나(Rajayatana) 나무에 머물렀다고 그럽니다.
대탑과 남쪽 연못 중간 지점에 있습니다. 라자야따나 나무. 그래서 이때 바리때를 가지고 2명의 상인 땁뿟사(Tappussa)와 발리까(Bhallika)의 공양을 받아들였다고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이게 인제 간단하게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49일 동안 지냈던 기록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이 이제 처음 법을 설하러 가게 됩니다.
※ dhamma31 법문 시간이 길어 dhamma31과 dhamma32 두 법문으로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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