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wqIDSMGAFWs?si=jA_HSLT9IjU5cmne
* 속세의 사람들을 위한 불교 dhamma4 (2003)
자, 오늘 52페이지 들어가겠습니다.
오늘은 52페이지 속세를 위한 「속세의 사람들을 위한 불교」 이 한 과만 하겠습니다 이. 한 과만.
이 제목이 그러면 속세의 사람들을 위한 불교면 뭐 속세 아니고 출가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는 아니라는 얘기인가? 제목을 왜 이래 놨을까? (수행자 대답...) 그래요?
자, 밑에는 보면 「불교는 속세를 떠나서도 속세에 있으면서도 수행할 수 있다」
이렇게는 해 놨습니다. 그러니까 속세를 떠나서도 속세에 있으면서도 수행할 수 있는데, 「속세의 사람들을 위한 불교다」 이렇게 타이틀이 그렇게 돼있습니다.
자, 편하게 좀 앉으십시오.
부처님 당시에 깨달음에 이르렀던 분이 경전에 나타나 있는 분이 몇 분인지 아십니까? (수행자 대답...) 500 나한? 그건 어디서 봤어요? 500 아라한? 500 아라한은 부처님이 가섭 존자 세 사람한테만 해도 그건 1250명이나 1200명이나 돼요. 그러면 500명이 넘는데? 500 나한도 틀렸네. 가섭 3형제 제도해가지고 그들이 다 불이 법문 설하고 나서 세 사람이 세 가섭이 거느리고 있던 제자들 1200명이 다 아라한에 이르렀다고 돼있죠. 그러면 500 나한이 이미 넘잖아. 음?
경전에 기록되어 있기로는 깨달음에 이르렀던, 한꺼번에 깨달음에 이르렀던 사람들을 빼고, 그러니까 이렇게 가섭 존자같이 한 무더기로 몇 명이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하는 사람들을 빼고 나서, 낱낱이 이름이 거론된 것만 해도 이미 8400명 정도 됩니다. 굉장히 많죠?
경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정확하게 옛날에 배울 때는 몇십몇 명까지 다 알았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 가지고 그것도 모르겠어요. 하여튼 8400명 넘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 제세 시에.
자, 그랬는데 그중에서 출가하지 않은 사람이 몇 명 되는지 아세요? 아라한과에 이르렀던 분이? 출가하지 않고 세속인으로서 아라한과에 이르렀던 사람? 대충 한 몇 프로나 될 것 같아요. 4분의 1 ? 그러면 한 2천명? 2천명 이름 그중에 한 명이라도 아는 사람 있어요? 음? 한 명도 모르면서 2천 명까지나 들먹여싸?
뭐예요? (수행자 대답...) 아라한과에 이르렀던 분은 아닙니다. (수행자 대답...)예. 10명입니다. 열 명! 너무 작죠?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8천 명이나 넘어 되는데 어떻게 재가인이 10명이라니!
그러면 뭐 이거는 뭐 출가자를 위한 불교지 어째서 속세를 위한 불교라? 근데 여기 타이틀에는 보면 "속세의 사람들을 위한 불교"라고 딱 붙여놨단 말이야.
와 이래 놓은 거라? 음, 속세에 있는 사람들이 그마만큼 수행하기 힘든 께, 마 이름이나 따라 속세를 위한 불교다 하고 붙여 놓은 거라? 그럴려고? 그렇다고 그 타이틀을 갖다 이렇게 적어 놓을 이유가 없잖아.
자, 그러면 또 하나 더 물어봅시다.
보통 "성인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할 것 같으면 보통 우리가 "사쌍팔배"라고 그러죠.
네 부류의 성인들이 있다. 네 부류의 성인들 중에서 또 '그 과위에 이르는 사람'이 있고, '그 나아가는 길에 있는 사람'이 있고 해서 그걸 갖다가 사쌍팔배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예류과, 그 다음에 일래과, 불환과, 아라한과 그러죠! 그리고 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사쌍팔배라고 그럽니다. 4쌍, 예류에 이르러 가는 사람, 그리고 예류과에 도달한 사람 그렇게 해서 1쌍으로 이루어졌을 때, 4쌍이 되는 거죠? 그래서 4쌍팔배라고 그럽니다.
예류과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예류과? 세 가지가 떨어져 나가는 상태죠!
그래서 맹신! 아, 이것만으로 내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아 이렇게 해야 깨달음에 이르른다 하고 고집 부리는 것! 그런 고집부리는 게 떨어져 나갑니다. 그 내 것이 최고다, 에이 저거는 뭐 쓸데없는 거, 저거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하고 고집부리는 걸 얘기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의심하는 거! 야, 이거 이래 가지고 내가 바른 깨달음에 이를까? 아니지, 내가 저걸 해볼까? 어쩌고 하는 그런 의심들.
그다음에 아, 이건 내거고 이건 나라고 하는 것, '나'라고 하는 관념이 떨어져나가는 것! 이 3가지가 확립된, 떨어져 나가고 확립된 자들을 갖다가 예류과라고 얘기를 합니다.
한마디로 얘기해 가지고 뭐라 그럽니까? 이제 내가 나아가는 길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을 하지 않는다는 거라. 내가 이 길로 갈 것 같으면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부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의심을 일으키지 않아서 이 길대로만 쭉 따라간다는 것이라.
그 따라가는 데에 아, 이거는 나의 사상이고 내 것이 최고라는 어떤 거라든지, 이거 이 길로 가가지고 내가 혹시 죽음에 이르를 것 아닌가 뭐 어떨까 하는 그런 의심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아예 떨어져 나가버리는 상태라. 그냥 따라가는 거라.
그것도 인제 맹목적으로 쭉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그런 확신을 가지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내가 어느 정도 마음속에서 체계가 서야 되겠지. 체계가 서지 않고선 확신이 들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을 갖다가 예류과라고 그렇게 얘기한단 말이라. 그러니까 사쌍팔배 맨 처음이 이 예류과라. 거기서부터 시작해가지고 아라한과에 이르게 되는 사람들을 갖다가 보통 「성인」이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아까는 내가 아라한에 이르렀던 분이 출가자하고 재가인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하고 물어봤습니다. 그러면 예류과에 이르렀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출가자하고 재가자하고 비율이 어떻게 되겠어요? 아까는 뭐 비율을 따질 필요도 없었지. 한 8천 명에 10명이니까. 한 0.1프로나 되나? 그렇게 됐단 말이라.
예류과는? 뭐 숫자 많다 해가지고 그 과위에 많이 올랐다고는 누구도 보장 못하는 거라요. 어떻게 되겠어요? 스님 얘기하는 걸로 봐가지고는 아무래도 속세인이 많겠지? 예. 속가에 살고 있는 사람이 거의 64프로를 차지을 합니다. 굉장히 많죠? 예류과에.
그럼 예류에 이르렀던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놈 아라한과에 이르렀던 사람은 작단 말이라. 왜 그랬을까요? 왜 그랬을까? (수행자 대답...)
그래서 ‘진짜 공부를 하려면 출가해갖고 본격적인 공부를 해야 된다. 유리할 것이다’ 그런 생각들 때문에 이 장이 있는 거라. 그런 생각들 때문에!
근데 사실은 불교는 누구에게든지 평등하다고 우리는 알고 있단 말입니다. "누구든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고 안단 말이라. 알면서도 이런 소리를 한단 말이라. 이런 소리를! 그리고 또 경전에도 보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예류과에 이르렀던 사람하고 또 아라환과에 이르렀던 사람들이 이렇게 차이가 나버린단 말이라.
어차피 경이 써진 것도 사람의 손으로 써진 거란 말이라.
그러면 경을 쓸 때 아무리 아라한이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속가인이니 기록을 안 해버리면 그만일 거라. 그리고 아라한과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 아라한에 이르르고 나서 출가를 해버리는 경우에는 출가인으로서 기록을 하지 속가가인으로서 기록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되겠어요?
아라한과에 이르렀을 때는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그때 다 벗어나 버립니다. 이미 번뇌가 다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출가 ... 그러니 출가인으로서 기록을 한단 말이라. 마찬가지라.
바히야라고 하는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번에 그런 얘기 했죠.
배가 난파돼가지고 괜히 아라한이라고 자처하고 행세를 하다가 부처님한테 된통 맞는다는 얘기를 한 적 있죠. 귀옥이 너는 기억이 안 나지? 그 사람이 속가인일 때 아라한과에 이르릅니다. 아라한이 됩니다. 그때 들었던 법문이 뭡니까? 얘기 안 했구나. 아무도 대답 안 하는 거 보니. 다른 거 없었습니다.
부처님이 "볼 때 보기만 하고 잠잘 때 잠자기만 해라" 그 얘기 한 거라
"볼 때는 보는 데 집중을 하고 들을 때는 듣는데 집중을 하라.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다 보면 깨달음에 이르르게 되느니라."
육근을 가지고 그렇게 부처님이 얘기를 했습니다. 그 얘기 듣고 그냥 단박에 그냥 깨달음에 이르렀단 말이라. 경전에 그런 부분 많죠?
육근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렀던 거, 뽀틸라, 뽀틸라 존자 이야기 아시죠?
“골빈 뽀틸라야 이리 오너라. 골빈 뽀틸라야 저리 가거라.”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고 부처님이 자꾸 얘기를 하니까 뽀틸라가 부처님이 왜 저럴까? 나는 적어도 500명이나 되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사인데 강사인 나에게 왜 골비었다고 그럴까? 이상하다 해 가지고 그날 밤에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진짜 내가 골비어 있거든. 부처님한테 들은 것은 많아. 실제적인 체험은 하나도 안 해봤으니까, 체험이 없는 상태에서 가르치니까 내용도 없을 뿐 아니라 지도 뭔 얘기하는지도 몰라. 그러니 골비었다고 그러는 거라. 부처님이 그걸 경책하기 위해서 골빈 뽀틸라야 이리 오너라 저리 가거라 그랬거든.
그래서 그날 밤에 보따리를 싸가지고 수행하러 갑니다. 우리 여기 지사님 같이 속세에 있으면 수행이 잘 안 되니까. 저기 깊은 숲속에 들어가 가지고 수행한답시고 떡 들어갔다. 그 숲속엔 7명이 아라한들이 있었거든. 그중에 7살짜리 사미 아라한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한테 가서 “스승님 스승님 나에게 공부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위빳사나 수행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니까 누구든지 뽀틸라에 대해서는 알거든.
“아이고, 대강백님한테 우리가 가르침을 받아야지, 왜 우리가 그런 걸 얘기할 수 있습니까? 저기 큰 스님한테 가서 여쭤보십시오.”
뽀틸라는 가서 큰 스님한테 “큰 스님 내 좀 가르쳐 주십시오. 공부하는 법을. 나도 열반의 맛을 맛보고 싶습니다.”
“뽀틸라 장로님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나는 잘 모릅니다. 나는 그냥 나이만 먹고 있다는 것뿐이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요 밑에 있는 스님한테 가십시오. 그 스님이 잘아니까 거기 가십시오. 그럼 잘 일러줄 것입니다.”
또 거기 가서 뽀틸라가 얘기하니까 “아이고, 아닙니다. 난 모릅니다. 요 밑에 가십시오.” 또 “요 밑에 가시오.” 하니까, 맨 마지막까지 간 게 7살짜리 사미승한테 갔거든.
사미승한테 무릎 꿇고 삼배 드리고 “위빳사나 수행하는 법 좀 가르쳐 주십시오.” 하니까 사미승이 가르쳐줄 수 있겠어요?
근데 이 7명들은 다 아라한들이라. 누가 가르치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는 사람들이라. 근데 그렇게 사미승까지 7명을 차례차례 내려오도록 만든 거는 이 뽀틸라의 아만심을 꺾기 위한 거라 사실은. ‘대강백인데’ 하는 생각이 아무리 그 7살짜리 사미승한테 가더라도 절을 했지만은 속으로는 ‘내가 강백인데’ 하는 생각을 버릴 수는 없었던 거라. 그걸 알고 사미승이 그럽니다.
“뽀틸라 장로님, 우리는 이렇게 숲속에 있으니까 빨래도 잘 못하고 먹는 것도 부실합니다. 얼굴이 요렇게 핏기가 없어가지고 그런데 참 뽀틸라 장로는 혈색도 좋고 옷도 보니까 삐까번쩍하니 빛이 납니다.”
이 가사 색도 보면 이런 색이 있고 좀 더 밝은 톤들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보통 도심에 사는 스님들 옷 색깔을 보면 좀 삐까뻔쩍합니다. 또 저기 촌에 있는 스님들은 요렇게 거무튀튀하게 좀 이래. 인제 뭐 그런 것도 이유가 됐겠지. 그리고 또 뭐 도심에 사니까 잘 사니까 아무래도 좋은 옷 지어 올려줄 거 아니라. 그러니깐 뭐 잘 먹고 잘 입으니까 얼마나 좋을 끼라. 그래서 다 도심에 살라고 하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뽀틸라도 그랬거든.
“뽀틸라 장로님, 저 앞에 웅덩이가 있는데 웅덩이를 지나서 이쪽으로 다시 돌아와 보십시오.” 그 삐까뻔쩍하는 옷이라고 해도 그 웅덩이 지나가면 어떻게 돼? 흙탕물 안 튈 수 있나? 다 튀어 갖고 오거든. 그때 이제 7살짜리 사미가 그럽니다.
“뽀틸라 장로님 조금 전까지 그렇게 깨끗했고 빛이 났던 그 가사도 웅덩이 한번 지나고 오니까 참 보잘 것 없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그렇게 보잘 것 없어졌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그때 이제 뽀띨라가 뉘우칩니다. ‘아, 내가 차례차례 스님들한테 인사를 드리고 공부를 하려고 해도 마음까지 내가 구부릴 줄은 몰랐다’ 하는 걸 갖다가 그때야 느낍니다.
그때 인제 다시 사미승에게 절을 하면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는 골빈 뽀띨라입니다. 그러니 제발 부처님 수행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 사미승이 뽀틸라를 데리고 산이니까, 굴이 이리 있단 말이라요.
굴이 있는데, 혹시 여러분들 그 오소리굴을 봤는지 모르겠는데, 오소리굴에 들어가는 문이 있을 것 같으면 나오는 문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거 없이 들어가는 문만 만들어 놓는 법은 없습니다. 근데 뱀 같은 경우에는 들어가는 문이 하나일 것 같으면 나오는 문은 보통 하나 아니면 2개밖에 없습니다. 보통 그 들고 나오고 하는 문을 다른 데다 통로를 잘 안 만들어 놓습니다. 들어가는 문이 바로 나오는 문으로 이렇게 만들어놨지.
근데 오소리라는 놈은 좀 영리해 가지고 들어가는 문이 있으면 나오는 문을 여러 개를 만들어둡니다. 그게 똑 어떻게 보면 우리의 육근(六根)하고 똑 마찬가지라. 6개의 문(門)하고. 눈이라고 하는 문, 코라고 하는 문, 입이라고 하는 문, 귀라고 하는 문, 그다음에 이 몸이라고 하는 문, 마음이라고 하는 문, 이런 6개의 문하고 꼭 마찬가지로 여러 개를 만들었거든.
오소리 잡을 때 어떻게 합니까? 그렇죠. 불태우고 잡는 거라. 그 연기를 갖다가 굴에다가 집어넣어가지고. 근데 5개의 문을 못 찾을 것 같으면 어떻게 돼? 오소리가 그쪽으로 빠져나가 버려요. 못 잡아 오소리. 5개의 문은 전부 다 진흙으로 해가 막아버리고 한 문에다가 불을 피워야 되는 거라. 그리고 한 문 거기서 딱 지키고 서 있어야 되는 거라. 그래야 오소리가 자기가 갈 데가 없으니까 그쪽으로 튀어나오지. 그래 잡는 거라.
“뽀틸라 장로님! 수행은 꼭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6개의 문이 있습니다. 수행을 할 때는 하나의 문만 열어놓도록 하십시오. 볼 때는 보는 데만 집중을 하고, 들을 때는 듣는 데만 집중을 하고, 수행할 때는 수행하는 데만 집중하도록 하라. 하나 하나씩 할 것 같으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릅니다.”
이렇게 육근에 대해서 얘기를 했단 말이라. 그래서 이 뽀틸라 장로가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됐습니다.
꼭 이와 마찬가지로 바히야도 부처님의 법문이 꼭 이와 마찬가지였거든.
“볼 때는 보기만 하라. 들을 때는 듣기만 하라. 이렇게 할 것 같으면 깨달음에 이른다.” 꼭 마찬가지라. 이 7살짜리 사미가 하는 얘기나 부처님하는 얘기나 틀린 바가 하나도 없는 거라. 진리에 대해서 얘기하기 때문에 마찬가지인 거라.
그렇게 해서 이제 깨달음에 이르렀는데 부처님이 뭐라고 그러냐면, "나의 제자들과 출가자들 중에서 가장 빨리 담마를 듣고 이해하는 데는 바히야가 최고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했단 말이라.
어떻게 부처님의 담마를 갖다가 듣고 이해하는데 재가인이 최고다 하고 얘기할 수 있느냐는 거라. 그런 거 보면 또 속세의 사람들을 위한 불교라. 그렇지 않습니까?
네. 사실은 속세를 위한 불교도 아니고 출가자들을 위한 불교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 이 불교입니다. 종교를 떠난 것입니다.
자, 맨 처음에 해봅시다.
「불교는 속세를 떠나서도 속세에 있으면서도 수행할 수 있다.」
자, 수행만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얘기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수행만 하면 깨달음에 이르른다" 물론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따라서 이제 틀려지겠지.
그러면 "수행 안 하면 깨달음을 이를 수 없다" 그렇게 됩니까?
수행 안 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없습니까? 그럴 것 같죠.
근데 그거는 천만의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한 것 중에 이 바히야도 마찬가지고 바히야가 언제 수행해 봤습니까? 근데 부처님 말 딱 듣고 나서 그냥 단박에 깨달음에 이르렀단 말이라. 그 사람이 수행해 봤습니까? 곡예사 욱가세나, 줄 위에서 물구나무 서고 한바퀴 돌고 하는 욱가세나, 욱가세나도 부처님 말 한마디에 깨달음에 바로 이르렀어요. 그런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있습니다.
근데 여기는 보면 "속세를 떠나서도 속세에 있으면서 수행할 수 있다."
그럼 수행 안 해도 깨달음에 이르는데 뭐하러 이렇게 적어놨어요? 그러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근데 일반적으로 지금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 다 끄떡끄떡합니다. 왜 그리 끄떡끄떡 하겠어요?
수행한다 할 것 같으면 보통 어떻게 합니까?
딱 앉아가 조금 전 같이 1시간 넘어 이렇게 탁 참선하고 이렇게 앉아 있어야만이 다들 수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일상생활은 수행이 아니라고 생각들을 하기 때문에 다 이렇게 고개를 끄덕끄덕 한단 말이라.
실제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죠?
우리가 사념처 배워 봤잖습니까? 신·수·심·법이라.
그리고 4가지 포지션을 가지고 수행을 한단 말이라.
앉아서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서서도 하고 걸어가면서도 하고 누워서도 한단 말이라. 그걸 다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고개들 다 끄떡끄떡하느냐는 거라. 이게 그러니까 자꾸 생활하고 수행하고 자꾸 더 떨어져 버리는 거라.
실제적으론 생활 자체가 수행인데!
좌선하고 수행하고는 그럼 어떤 관계라는 거라?
"꼭 좌선을 해야만이 수행한다고 얘기를 할 수는 없다. 수행한다는 것은 얼마만큼 오래 앉아 있느냐에 따라서 깨달음에 가까이 간다 안 가까이 간다 이렇게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니들이 출가한 지 오래됐다 해가지고 장로라고 이름 붙일 수 없다. 내 법을 갖다가 체험하고 얼마만큼 깨달음에 가까이 이르느냐를 가지고 장로다 장로가 아니다 하고 얘기하는 것이지. 니가 부처님 법 많이 듣고 오래 전에 먼저 출가했다 해가지고 장로라고 얘기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
그와 꼭 마찬가지라. 오래 좌선했다 해가지고 그 사람이 결코 깨달음에 먼저 가 있다고 얘기를 못하는 거라. 또 좌선만 한다 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 조주 스님도 그랬잖아. 좌선하는 사람 옆에 가가지고 벽돌을 가지고 기왓장 가지고 쓱쓱쓱쓱 갈고 그랬잖아. 기왓장 갈아가지고 거울 만드는 것이나, 앉아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나 뭐가 틀릴 게 있느냐는 거라.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게 바로 이 부분인 거라.
앉아서 수행해야만이 수행했다고 얘기를 하는 것이고, 또 수행을 앉아서 그렇게 수행하는 그 모습을 봐야만이 부처님 법을 갖다가 바르게 믿고 따라가는 자라고 착각을 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
부처님 믿으려고, 깨달음에 이르려고 할 것 같으면 출가하려고 그러는 거라.
왜? 속가에서는 그렇게 앉아 있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가 않으니까 출가하려고 그러는 거라.
그런데 여기서 잘 생각들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야사를 비롯한 61명이 아라한이 되었을 때 그분들에게 전도의 선언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세상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법을 설하려 길을 떠나라." 그부분 다 알죠?
왜 그랬겠느냐라는 거라 부처님이.
"법을 설하러 길을 떠나라" 하고 자기 제자들에게 얘기를 합니다. 법을 설할려면 어디로 가야 됩니까? 민중들 사이로 들어가야 되는 거라. 사람이 없는 데서 어떻게 법을 설할 거라? 민중들 사이로 유행하라는 거라.
불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유행하는 거라.
참 하잘 것 없이 보일지 모릅니다 여러분들. 스님들 결제 끝나고 나면 해제하면 막 돌아다니죠. 지금은 그냥 돈 뜯으러 돌아만 다니는 분들이 많아서 그렇지, 사실은 이게 불교의 하나의 특징입니다.
인도의 어느 종교도 유행을 허락하질 않았습니다. 지금의 어느 종교들도 한 곳에 정주해가지고 자기들 교리들을 설하고 하지 유행하면서 법을 설하고 한 적이 없습니다.
왜 불교는 유행을 해라 했을까?
유행을 하라고 한 것은 내가 얻은 부처님의 가르침, 체험한 것들을 갖다가 민중들에게 나누라는 얘기라. 민중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해서!
그런 면에서 스님들이 처박혀 앉아가지고 자기 수행한다고 앉아만 있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큰 오산이라는 거라.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앉아서 좌선수행 많이 할라고 출가를 하려느냐는 거라. 이 뭔가 앞뒤가 안 맞는 얘기인 거라. 그마만큼 지금 왜곡돼 있다는 얘기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유행하도록 하는 것은 부처님이 자기 제자들에게 붙인 이름에서도 드러나집니다. "비구, 비구니" 그럽니다. 그건 무슨 뜻이라요?
걸사(乞士)라는 뜻이라. 빌어먹고 살아라는 얘기라. 빌어 먹을라면 사람들이 있는 데 가서 빌어 먹지, 사람들 없는 데서 빌어 먹을 수 있습니까? 바로 유행하라는 얘기라. 농작물이 자라고 생물들이 자라고 또 새로 만물이 태동하려고 하고 비가 많이 오고 할 때는 정주를 해야 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나머지 9개월 동안은 유행을 하라 하는 겁니다.
어쨌든 그런 것 때문에 부처님이 자기 제자들을 유행하도록 만들었다는 거라.
"중생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해서 법을 설하라" 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당당한 얘기라! 그것도 "한 길로 두 사람이 가지 말고, 한 길로 한 사람이 가라" 그랬어요. 다른 데는 누구한테 맞아 죽을까 봐가지고 꼭 같이 가라고 그러지, 떨어져가지고 니 혼자 가라고 얘기한 적이 없어. 왜 그러냐는 거라.
그마만큼 부처님은 당당한 거라. 또 부처님 법을 체험해서 아라한에 이르렀던 사람도 그마만큼 당당한 거라.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거라. 바른 법을 위해서 그 법을 설하다 죽더라도 그것은 하등의 하자가 없다고 생각들을 하는 거라.
그래서 뭐라고 그럽니까?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선 나는 승리했다고 그러는 거라. "나는 세상의 지자다, 세상의 승리자다, 어느 누가 내보다 더 위대할 수 있겠느냐!" 당당하게 선언하는 거라. 내보다 더 지혜가 높고 내보다 더 공덕이 수승하고 내보다 더 높은 깨달음에 이르는 놈은 아무도 못 보겠다. 아무도 없다. 하고 당당하게 선언하잖아. 그러니까 "이것이 나의 마지막 생이다"라고 하는 거라.
"집을 받치고 있는 대들보하고 서까래는 전부 다 부서지고 무너져 내려앉았다" 그러는 거라. "나의 번뇌 그리고 윤회를 하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집착들은 전부 다 사라지고 없어져 버렸다" 하는 얘기라. 그렇게 당당했던 분이라.
어떻게 보면 그거는 승리한다는 승리의 의식이라. 제자들도 꼭 마찬가지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 깨달음에 이르고 나면 깨달았다 해가지고 오도송을 하는 거라. 요즘도 우리 많이 하죠. 역대 큰 스님들 깨달음에 이르고 나면 누구든지 오도송 다 했어요. 다른 종교 어디 찾아봐? 어디서 오도송 하는 데가 있어? 오도송한다는 것은 감흥이라. 내 마음속에서 아, 이런 기쁨 이런 희열이 차올랐던 걸 갖다가 말로 표현한 것뿐이라. 그런 승리 의식들을 다 가지고 있었다는 거라.
그런데 출가한 사람들이 은둔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다? 이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얘기라. 그걸 갖다가 빳쩨까(pacceka) 의식이라고 그래요. 여기에도 보면
「수도원이나 어떤 고요한 곳으로 은둔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은둔적인 삶을 사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 출가를 한 것이다. 조용하고 방해받지 않는 곳에서 수행하고 싶다.」
어쨌든 출가자들이 그런 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그런 빳쩨까 의식이라는 것은 상당히 경계를 해야 될 부분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지 않는 거하고 꼭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나라에서 10년 묵언(默言) 하고 10년 동안 뭐 저기 뭐 창문 하나 내놔놓고 밥만 넣어주고 하는 무문관 있죠. 무문관이라든지 이런 것은 어떻게 보면 참 위험한 발상이라. 그 부처님 말씀하고 정면적으로 위배되는 그런 식이거든.
어쨌든 부처님은 장로라고 하는 것은 출가했다 해서 장로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마만큼 부처님 법을 따라 실천하는 사람을 장로라고 했다는 거라.
그런 사람들을 성스러운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것이지, 먼저 출가했다는 것, 그리고 먼저 불교를 접했다 해가지고 그 사람들을 성스럽다고 하지 않는다 하는 거라.
아리야 상가(Ariya-saṅgha), 성스러운 부처님 제자들!
그 아리야 상가는 어떻게 됩니까? 출가인뿐 아니라 재가인도 해당이 되는 겁니다. 아리야 상가라고 하는 것은. 성스러운 부처님 제자들이라. 성스럽다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예류과의 전자부터 해서 아라한과에 이르는 자들 이런 분들을 통칭해서 다 아리야 상가라고 그런단 말이라.
우리가 처음에 "상강 사라낭 갓차미" 하잖아.
"부처님 제자들을 의지해서 나가겠습니다."
그 부처님 제자들은 어떤 제자들이라?
삼무띠 상가(Sammuti-saṅgha)가 아닙니다.
아리야 상가(Ariya-saṅgha)라. 성스러운 상가들이라.
삼무띠 상가라고 하는 것은 출가한 부처님 제자들을 얘기하지만은, 아리야 상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삼무띠 상가가 꼭 아리야 상가가 될 수는 없는 거고, 단지 통칭적으로 우리가 승가라고 하는 것을 갖다가 출가해야만이 성스러운 사람이 보통 되어 왔기 때문에 동일하게 쓰는 것뿐이라.
엄격하게 얘기할 것 같으면 아리야 상가하고 삼무띠 상가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이런 삼무띠 상가가 아니고, 아리야 상가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런 자들이 되도록 하는 데에는 출가·재가의 구분은 전혀 없다 하는 거라.
그래서 "불교는 누구에게든지 평등하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 밑에 보도록 하십시오.
「팔정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불교적 삶의 방식이다. 이것은 어떠한 차별도 없이 온 인류를 대상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두 번째 단락에 있는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 나가는 것을 8가지 성스러운 길이다 해가지고 「팔정성도」라고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 담마, 부처님의 진리는 한마디로 얘기하면 뭐겠습니까? 한마디로 얘기하면? 자비! 우리 조금 전에 했죠. 뭡니까?
"스왁카또 바가와따 담모, 담망 나맛사미."
"부처님에 의해 잘 쓰여진 위없는 진리, 그 가르침에 머리숙여 예배드립니다. "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위없는 진리! 그 위 없는 진리가 뭐라? 뭐라요?
"에히빳시꼬 오빠나이꼬 빳짯당 윈뉴히띠."
"부처님은 우리들 보고 이리오라고 초청하시었고, 누구든지 체험해서 아는 것이고, 그리할 것 같으면 세상 사람들이 또 바른 길로 가는 사람들이 참 잘 간다고 칭찬하는 것이라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담마라네."
부처님이 가르치는 진리는 그겁니다.
바로 "에히빳시까" 라고 하는 한마디에 다 드러나 있습니다.
"이리 오너라 와서 봐라.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 "와서, 보고, 알고, 이해하는 것"
이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이 4가지 패턴이 얼마만큼 잘 이루어져 나가는가?
그걸 가지고 우리는 이 세상을 그 사람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고 판단을 하는 겁니다.
"여시여시" 그렇게 얘기하죠. "있는 그대로, 야타부따(yathābhūta)" 라는 것입니다.
만날 빨리어 해도 잘 몰라 이. 조금만 어려운 얘기들을 쓰면 막 헷갈리지? 여시여시가 바로 "야타부따(yathābhūta) 있는 그대로"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고 알고 이해하여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하는 거라. 깨달음은 그래서 보통 우리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깨달음이기 때문에 꼭 좌선 수행으로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오, 또 출가해야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하는 얘기입니다.
자, 그다음 한번 봅시다.
「진정한 의미의 포기는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것을 전부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포기!
그럼 진정한 의미의 포기는 뭘 얘기하는 거라?
뭘 진정한 의미의 포기라고 하겠어? 물질적인 걸 여기서는 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그랬거든. 뭐겠어요? 물질적인 걸 버리는 게 아닐 것 같으면 정신적인 걸 버리는 거겠네? 그렇겠지? 그렇습니까? 물질적인 거와 정신적인 걸 다 버리는 것이 되게 되야 되겠지! 여기선 물질적인 걸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랬거든.
그럼 포기하라고 하는 건 뭐겠어요?
내가 집착하는 것, '집착하는 걸 버려버리는 것!' 또 뭘 얘기했어요?
'번뇌로부터 벗어나 버리는 것!' 이런 것이 진정한 포기인 거지.
부처님을 갖다가 뭐라고 그럽니까? 부처님 출가를 갖다가 뭐라고 그래요?
"크나큰 포기"라고 얘기를 합니다. 영어로 번역할 때.
그럼 부처님 출가를 왜 "크나큰 포기"라고 하겠어요?
이런 포기라고 하는 것은 집착을 버려버리고 여러 가지 생로병사에서 번뇌하고 하는 것들을 갖다가 벗어나서 출가를 했기 때문에 그걸 위대한 포기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탈의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이런 집착을 버려버린 재가인이나 또 번뇌를 여의어 버린 출가자들 사이에는 어떤 차별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재가인도 집착을 벗어던져버리고 여의어버릴 것 같으면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출가인도 번뇌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 같으면 결코 해탈에 이를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포기는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것을 전부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잘못 부처님 법을 이해할 것 같으면 돈도 벌지 말고 누구든지 머리 깎고 출가해야 돼. 근데 진정한 의미의 부처님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지 마라고 얘기한 적이 절대 없습니다.
돈 많이 벌어라고 그래. 많이 벌어야 그 돈 가지고 유용하게 쓰지.
단지 거기에 대해서 10원을 벌 것 같으면 5원은 재투자하는 데 쓰고, 또 2.5원은 생활하는 데 쓰고, 2.5원은 저축하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써라. 이랬단 말이라.
근데 물질적인 걸 버리라고 어느 누가 얘기를 했어요?
요즘은 큰 스님들 법문 들어보면 전부 그래. 전부 다 버리라고 그래. 욕망도 버려버리고. 실제적으로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들을 버려버리라는 게 아니고 "집착하는 것, 번뇌로부터 벗어나라"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렇게 됐을 때는 결코 재가인과 출가인의 구분이 없어지고 해탈이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구분이 없어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자, 그렇게 해서 이 불교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이들을 위한 불교일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속가인이라 해서 결코 불교를 접할 수 없다든지 아니면 출가인이라 해서 고위에 윗자리에만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어느 땐데 출가했다 해가지고 내가 에헴 하고 앉아만 있어? 그랬다간 요즘은 낙후되고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는 거라. 그렇다고 재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스님보다 항상 아래기 때문에 나는 그냥 듣고만 있어 라고 얘기하는 적은 또 없습니다.
불교가 출가인만을 위한 불교라 할 것 같으면 그 불교는 이미 죽은 불교가 되는 것이고, 그 출가인들이 머문다고 하는 절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수도의 장으로서만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절이라고 하는 개념은 그런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모든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고, 모든 사람들의 애환이 섞여 있는 곳이고, 모든 공동체의 문제들이 풀려나갈 수 있는 곳, 또 그런 기쁨들을 함께 할 수 있는 문화의 장이 바로 이 절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그 절은 어느 누구가 주인이다 하고 얘기를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거라.
누구든지 다 주인이기 때문에 또 부처님 말씀을 믿고 따르는 데도 그만큼 책임이 따르게 된다는 겁니다. 불교가 출가인들을 위한 불교가 아니듯이, 재가인들도 무조건 맹목적으로 따라가서는 절대 불교가 바로 설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바로 실천해 나가서 또 틀린 부분은 틀렸다고 얘기할 수 있게 됐을 때, 그때야만이 바른 불교가 설 수가 있다는 겁니다.
법륜을 한번 보십시오. 법륜 수레바퀴는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먼저인지가 구분이 안 갑니다. 모든 것이 ..돌아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불교를 상징하는 법륜이 그럴진데 출가·재가의 구분이라는 것은 사실은 무의미한 겁니다.
여러분들도 노력해가지고 반드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자, 오늘은 52페이지 「속세의 사람들을 위한 불교」 한 과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 나머지 부분들을 하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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