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정진/불교 입문. 경전

Ⅳ. 상좌부불교 체험기

담마마-마까 2019. 4. 4. 21:16


Ⅳ. 상좌부불교 체험기

 

♧ 가난하지만 청청한 수행불교  (출처 :  불교평론 2호)
송 위 지


- 목 차 -
1. 스리랑카와의 첫 만남
2. 첫번째 놀라움 학생 법회
3. 가정은 불성 계발을 위한 곳
4. 아무나 스님이 되나요?
5. 히랄루워
6. 보시:적선 그리고 공덕
7. 상좌부 불교 속의 타력, 피릿
8. 포야(Poya) 축제
9. 위빠사나
10. 종단은 셋, 배는 하나
11. 스리랑카의 내전, 그리고 불교가 하는 일

 

 

1. 스리랑카와의 첫 만남 

80년대 중반 5공 정권이 종착역을 향해 질주하고 있던 봄날, 나는 마치 이 땅이 싫은 사람처럼 서울을 빠져나가 그 시절의 전철 성북역보다 더 초라한(당시의 성북역은 지금의 어느 시골의 기차역과 다름이 없었다.) 카투나야케 국제공항에 내렸다.

현지 시간으로 새벽 1시, 도쿄로부터 9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스리랑카.

새벽1시라 해도 열대는 열대이다. 후덥지근한 열대 바람과 함께 나의 새로운 삶은 시작되었다. 인도양 위에 인도아(印度亞) 대륙의 엉덩이 부분에 마치 감자 덩어리처럼 널부러져 있는 섬나라인 스리랑카에 대해서는 우리 역사서에도 충분한 자료가 있다.

《삼국유사》에 완하국(琓夏國)·용성국(龍城國)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를 미루어보아 적어도 삼국 시대부터 한반도와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동고승전》에도 두 지역간의 교류에 관한 많은 양의 자료가 있는데 특히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능가도(楞伽島) 또는 석란도(錫蘭島), 동상도(銅常島)로 잘 알려져 있다.

가무 잡잡한 피부를 가진 운전기사가 모는 택시를 타고 공항에서 묵기로 약속된 숙소를 향해 가고 있는데, 얼마쯤 달렸을까? 공항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큰 길 한 모퉁이에서 발견되는 우람한 모습의 불상. 그리고 한밤중인데도 그 불상을 비추고 있는 조명이 스리랑카의 특징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주었다.

뭇 중생들이 무명을 깨치고 광명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듯이, 언제 걷힐지 모르는 어둠을 뚫고 스리랑카에서 부처님 말씀에 대해 수학할 ‘스리 나가 비하라야(聖龍寺)’에 도착하니, 스님들이 나와 반갑게 맞아 주며 목욕하고 휴식을 취하라 한다. 집에 두고 온 식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그들이 베풀어주는 친절로 대신하며 나는 랑카에서의 첫 밤을 맞았다.  
 

2. 첫번째 놀라움 학생 법회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스님인 스리 나가 비하라야의 마두루와웨 소비타 스님은 스리랑카에서도 몇 안 되는 훌륭한 설법가이다. 소비타 스님은 법문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법문 대상이 누구인지를 가리지 않는다. 스리랑카에 온 지 한 3일 정도 지났을까. 스님께서 차에 타라고 하신다.
스님과 나는 울창한 열대의 숲을 지나 두 시간 정도의 여행 끝에 시골의 조그만 사찰에 도착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낡은 건물들이 오래된 사찰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게는 했으나 규모가 큰 절은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러 여기까지 데리고 왔을까?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사방이 탁 트이고 규모가 비교적 큰 강당에서 그 전 해의 어린이 학생 법회 이것을 스리랑카 말로 다함 빠살라(眞理의 학교, 法의 학교, 佛法의 학교의 뜻)라고 한다. 의 성적 우수자를 표창하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참석한 어린이와 학생이 줄잡아 500명은 넘어 보였다. 아니, 이런 시골 마을에 있는 절의 다함 빠살라 참석 인원이 이리 많다니! 한국에 있을 때 기껏 70∼80명의 어린이들과 함께 법회를 하면서 알량한 자부심을 가졌던 나로서는 부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다함 빠살라는 사원의 신도에 대한 평생 보장 시스템의 기초가 되는 제도이다. 뭐 거창하게 사원의 신도에 대한 평생 보장 시스템이라고 이야기 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스리랑카 인들은 진정 부처님의 가피에서 태어나 부처님의 가피를 입으며 생을 마감한다.

우리가 흔히 스리랑카를 불교 국가라고 지칭하는 것은 스리랑카에 종교가 불교만 있기 때문이 아니다. 스리랑카 인 중 불교 신자는 70% 정도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힌두교·회교·개신교·천주교 등의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헌법으로도 다른 모든 종교의 활발한 포교 활동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태국의 경우 헌법에 불교 국가로 못박아 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전세계에 인식되기는 스리랑카가 불교, 그것도 상좌부 불교(Therava-da Buddhism)를 신행하는 대표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 그 이유는 스리랑카가 상좌부 불교의 종주국이어서가 아니라 불교가 개개인의 평생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곳에서는 잉태부터 사망까지 아니 윤회까지 불교가 관여하지 않는 부분이 없다. 임신을 하면 임신을 했다고 부처님께 고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태어났다고 고하며, 아이가 말을 시작하면 말을 시작한다고, 글씨를 배우면 또 그렇다고 고하는 이런 일들이 생활화되어 있는 나라가 스리랑카다. 스리랑카 인은 대개 5세 때부터 불교를 교리적으로 접한다. 일요일이 되면 대부분의 절은 하얀 꽃이 넘실거리는 강으로 변한다.

다함 빠살라에 참석하기 위해 깨끗하게 세탁한 하얀색 전통 의상을 입고 꽃을 따서 바구니에 담고 절로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란 상상만 해도 눈이 부시다. 절에서는 참석하는 아이들을 1학년부터 10학년으로 나누어 수준에 맞추어 만들어진 《붓다》라는 교재를 가지고 불교를 가르치고 수행한다. 이 교재는 저명한 스님들과 불교학자에 의해 편찬되며 지속적으로 보완되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무척 알차다.

어린이 법회를 등한시해서 마땅한 교재 찾기도 쉽지 않은 우리의 입장으로 볼 때 한편으로는 부러움이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어린이나 학생은 미래를 책임질 바로 그 당사자가 아닌가. 절마다 학생들이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르니 걱정거리가 있을 법도 하다. 물론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학생들을 가르칠 교사의 문제이다. 그런데 그 문제 역시 자급 자족이 가능하다.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고 있다. 삼귀의나 오계, 발원문 같은 공통의식은 스님의 인도하에 모든 학생들이 같이 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교리 공부는 선배들이 주축이 되어 가르친다. 어려서부터 다함 빠살라에서 배우고 수행했기 때문에 완벽하지는 않으나 후배를 가르칠 충분한 소양을 이미 갖추고 있다.

불교 교리 뿐만 아니라 참선이나 부모님을 위한 효도법회 등을 자신들의 수행과 곁들여서 십수 년 공부하므로 불교에 대한 맛을 보며 확신 속에 살 수 있게 된다. 1990년대 초에 내가 머물렀던 절은 당시로서는 조그만 절에 불과했다. 주변 역시 이교도가 많았고 특히 영국 교회를 등에 엎고 엄청난 물량 공세를 퍼붓던 교회도 있었다.

그 절에서 몇 달 머무르는 동안 가끔 일요일마다 보이던 아이들이 서너 명씩 안 보이곤 했다. 스님에게 그 아이들이 어디 아프냐고 여쭈어 보았다. 스님은 아픈 것은 아니고 근처의 교회로 갔다고 했다. 걱정이 안 되느냐고 물었더니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물론 그 아이는 돌아왔다. 진리에 토대를 둔 경우에는 금전이나 학용품으로 마음을 살 수 없음을 느낄 수 있는 사건이었다.
 
3. 가정은 불성 계발을 위한 곳

가정에서의 신앙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그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우리 한국불교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열심히 절에 와서 자식의 합격을 기원하는 보살님도 막상 자식들이 출가를 하겠노라 하면 대경실색을 한다.

스님들에게는 도덕적으로 맑은 생활을 요구하면서 스스로는 자신의 복을 위해서 스님들에게 분에 넘치는 보시를 하려 한다. 스님들이 신도들을 바로 가르치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한국불교를 황폐하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집집마다 불상을 모셔 놓고 예불을 한다.

어느 스님의 말씀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집안에 불상을 모셔 놓으면 큰일 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스리랑카에서는 그렇지 않다. 누구나 부처님과 같이 지내는 것이다. 물론 모셔 놓고 여법하게 예불을 하지 않으면 안 모시는 것보다 못한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무당만도 못한 생각을 가진 이들의 혹세무민에 불교인들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경전의 어디에도 집안에 불상을 모셔 놓으면 일이 잘 안 된다는 구절은 없다. 다함 빠살라 등에서 불교를 온전하게 접한 이들은 출근길에 부처님께 간단하나마 예불하고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예불을 한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보리수 나무를 향해 예를 올리는 운전 기사나 자리에서 일어나 보리수 나무나 길가에 조성된 불상을 향해 예를 올리는 이들을 너무 많이 그리고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가정에서부터 몸에 배서 생활화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태국처럼 남자는 일생에 한 번 승려가 되어야 하는 것을 법으로 정해 놓은 것이 아닌데도 스리랑카의 불교가 의연한 것은 바로 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수행 때문이다.


4. 아무나 스님이 되나요?
 
스리랑카의 불교가 궁핍함 속에서도 여유롭게 부처님의 정법을 유지할 수 있는 요인 중의 하나는 ‘맑은 승단’이라고 생각한다. 지구상의 승단 중 맑지 않은 승단이 어디 있겠는가만은 지금껏 폭력으로 얼룩지거나 아니면 취처를 하거나 은처를 하는 등 승려답지 못한 승려가 목청을 돋우면서 마치 자신들이 정법을 호지(護持)하고 있는 듯이 떠드는 스님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한국불교 속에서 살아온 나에게 스리랑카의 승단은 신선함을 넘어 충격이었다.

한국의 출가와 스리랑카의 출가를 비교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는 것은 물론 도저히 뭐가 뭔지 모르게 되는 마음을 가눌 길 없게 된다. 구족계단이 설치되면 스님이 되려는 자식을 만류하려는 부모의 모습이 심심치 않게 보이는 한국과 철저하게 가족의 축하를 전제로 하는 스리랑카에서의 출가는 시작부터 다르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출가를 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본인의 의사도 중요하지만 가족들의 의사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아들이 8, 9세가 되었을 때 그것도 비교적 총명한 아들에게 수행자로서 지켜야 할 사항과 수행자가 되었을 때의 공덕을 소상히 일러주면서 아버지나 어머니는 출가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본다.

아들은 이미 다함 빠살라를 통해 불교를 접하고 승려의 생활이 어떠한지를 알기 때문에 출가 여부에 대해 자신의 명확한 의사를 표명한다. 가정의 합의와 본인의 동의에 의해 출가가 결정되면 소년의 부모는 원하는 사원의 스님을 찾아가 자식의 출가 문제를 상의하고 허락을 받아낸다. 스님의 허락이 없으면 출가할 수 없다.

출가를 허락받은 소년은 적당한 날을 택해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서 사미계를 받는다. 그 동안 길렀던 머리를 깎아주고 하얀 고깔을 씌우는 절차를 거친 후 승복을 입힌다. 물론 처음의 승복은 부모나 은사 스님이 보시한다. 눈물겨운 정경이 아닐 수 없다. 출가 수행자가 되는 아들을 위해 부모가 승복을 보시하다니. 그리고 부모는 아들에게 큰절을 한다.

이제 예토의 속인과 정토로 나아가는 수행자가 구별되는 것이다. 비록 10여 살밖에는 안 되었지만 출가한 스님에게 사회는 수행자로서의 대접을 다해 준다. 사미 스님은 ‘피리웨나’라고 하는 승려 전문 교육기관에서 팔리 어 등 불교 언어와 경전은 물론 영어 그리고 경제 등 내외전의 학습을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편으로는 속해 있는 절에서 행해지는 신도들을 위한 각종 의식에도 참석하며 스님으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간다.

이런 과정을 거쳐 스무 살이 되면 구족계를 받게 된다. 구족계단은 종단별로 전국의 큰 사찰 몇 군데를 정해 설치된다.

구족계를 받는 스님들의 출신 마을에서는 스님이 구족계를 받는 것을 경사로 여기고 부모는 물론 친척, 마을 사람들이 축하를 해주기 위해서 구족계단이 설치된 절로 구름같이 몰려든다. 구족계를 받는 스님은 마지막 계를 받기 직전에 왕의 복장을 한다. 속인으로서 마지막 치장을 해보는 것이다.

스님이 되면 찰 수 없는 시계도 차고 각종 보물로 치장을 한다. 구족계를 받은 스님의 법명에는 그 스님의 출신 마을 이름이 붙는다. 위에서 소개했던 마두루와웨 소비타 스님의 경우 마두루와웨는 출신 마을의 이름이고 소비타는 법명이다. 출신지인 마두루와웨 마을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수행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런 제도는 중복되는 법명으로 인하여 스님에 대한 혼돈에 빠질 염려가 없어 더욱 좋다.

여기서 소년의 경우만 소개하는 이유는 스리랑카에 여승이 없어서가 아니다. 스리랑카의 여승은 비구 승단에서 구족계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근래까지만 해도 사미니만 있었다. 최근에 비구니계를 받고자 하는 여승들이 늘어나면서 네팔 등 외국에서 한국이나 일본 등 외국 스님을 모셔 놓고 비구니계를 받은 적이 있다.

여승의 사회적 역할 역시 비구 승단의 사회적 역할 못지 않게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스리랑카 사회에서 가장 큰 이슈의 하나인 종족 갈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평화 대행진이나 빈곤 퇴치 운동, 노약자 보호 운동 등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이들이 바로 여승들이다.


5. 히랄루워
 
스리랑카 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단어 가운데 ‘히랄루워(Hiralluwa)’라는 말이 있다. 이 단어는 아주 상스러운 욕보다 더 치욕적인 말로 인식되고 있다.

히랄루워란 승복(僧服)의 스리랑카 말인 ‘씨우라(siura)를 버린 이’라는 말로 ‘아라한의 경지를 약속받은 영광스럽고 고귀한 승복을 벗고 중생들의 천박한 세상으로 되돌아온 이’라는 뜻이다.

위에서 소개했듯이 구족계를 받을 때 온마을이 떠들썩하게 잔치를 베풀어 주지만 막상 여법하게 수행을 하지 못하고 환속하게 되면 당분간은 자신이 태어나고 살던 마을에조차 들어가지 못하고 먼 지역으로 가서 살아야만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환속한 이들을 천박하고 불명예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특수한 경우에는 은사 스님이 제자를 결혼시키면서 환속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환속하더라도 불교계에 몸담으면서 사원과 불교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저명한 몇몇 불교 학자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살아있는 부처님, 보리수 나무 스리랑카 불교인들에게 보리수 나무는 살아 있는 부처님이다. 보리수 나무가 스리랑카에 처음 소개된 것은 불교가 처음 소개된 다음 해 아쇼카 황제의 딸이자 마힌다 장로의 누이인 비구니 상가미타에 의해서이다.

이후 보리수 나무는 스리랑카 인들에게 법당, 탑과 더불어 중요한 신앙대상이 되었다. 사찰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보리수 나무는 일반인들의 예배 대상이다. 아침에 집에서 예불을 마치고 출근하더라도 길에서 보리수 나무를 보면 다시 예배를 한다.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마하보디나 갈루따라의 보리수 나무는 전국적인 참배객들로 유명한데, 이 보리수를 참배하면서 신도들이 함에 넣은 돈을 관리하는 별도의 기금이 있을 정도이다. 사찰에서는 보리수 나무를 중심으로 ‘보디푸자’라는 공양 의식을 한다. 보디푸자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 있는 제단에 꽃과 향, 등을 밝히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 기도는 주로 해가 질 무렵에 시작하여 약 12시간 정도 진행된다.


6. 보시:적선 그리고 공덕
 
다나(da-na)는 불자들에게는 보편화되어 있는 의식으로 보시(布施)를 뜻하며, 스리랑카에서는 스님들에게 음식물과 필수품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준다는 의미만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사업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나는 주고 또 공덕을 받고 그리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좋은 제도이다. 태국이나 미얀마에서는 스님들이 재가자들에게 가서 탁발을 해오나 스리랑카에서는 신도들이 음식을 마련하여 사원으로 가져가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집으로 스님들을 모셔와서 공양 즉 식사를 대접한다.

신도들은 관혼 상제는 물론 생일, 출산, 입학, 사업의 시작 등 일이 있을 때마다 스님들에게 집에서건 사찰로 찾아가서건 공양을 대접한다. 공양물로는 밥과 카레가 주를 이루며 육류도 포함되어 있다. 스님들은 음식의 내용으로 신도의 신심을 평가하지 않는다. 음식물 이외의 공양물은 스님들이 평소에 사용해야 하는 필수품들이다.

승단이 출산에서 사망까지의 인생을 책임져 준다면 재가자들은 스님들이 출가해서 입적할 때까지 여법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보좌해 준다. 출가하여 스님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면 승복·책·우산은 물론 교통비·의약품 등 출가자에게도 필요한 것이 많다. 이 모든 것을 검소한 범위 내에서 신도들이 책임져 준다.

그러므로 초상을 치루면서 스님에게 얼마를 드려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일이나 불사를 추진하면서 불미스러운 소문이 떠도는 일은 스리랑카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스님을 보좌한다는 것 이외에 보시의 또 다른 기능은 스님의 수행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다.

계율을 어기고 수행을 게을리하는 스님이 있는 사찰은 보시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식생활에 곤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어느 사찰은 다나가 많이 들어와 다른 절 스님을 모셔가기까지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찰은 실로 난감해지는 것이다. 바른 스님에 바른 신도이다. 그러므로 다나는 재가자가 승단의 청정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제도이기도 하다.


7. 상좌부 불교 속의 타력, 피릿
 
자력으로 아라한의 경지에 오르도록 노력한다는 상좌부 불교권에도 타력적인 의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소위 호주(護呪)라고 하는 피릿(pirit) 의식이 그것이다.

피릿 의식은 파릿타(paritta)라고도 하는 염송 기도의 일종으로 특별한 경전을 암송함으로써 각종 위험이나 재난 질병 또는 액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다고 믿는 의식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도 행한다. 피릿 의식 때는 《라타나》 《망갈라》 《카르니야 멧타》 등의 경전을 암송한다.

특히 12명의 스님이 참석하는 마하 피릿은 저녁 9시경에 시작하여 다음날 아침에 끝난다. 이를 위해 ‘피릿 만다파야’라는 건물을 세워 의식에 이용하는데 이 건물의 재료로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나뭇잎 등을 이용하기 때문에 경비나 낭비의 문제가 별로 없다.

피릿 의식에 참여하는 모든 재가자들은 피릿 눌이라는 실(絲)을 잡고 의식에 참여했다가 의식이 끝난 후 짧게 잘라서 왼팔에 감고 다니는데 그러면 몸도 보호가 되고 하고자 하는 일도 잘된다고 한다.


8. 포야(Poya) 축제
 
포야는 달이 꽉 찬 날(滿月日) 즉 보름을 의미한다. 평소에는 양력을 사용하면서도 유독 불교적인 의식에서는 음력을 기준으로 한다. 달은 매월 한 번씩 꽈악 차서 보름달이 되고 보름달이 주는 풍만함은 스리랑카 인들에게 사랑으로 넘치는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스리랑카 인들에게 보름 즉 포야는 부처님이고 삶이고 생활이다. 포야는 일 년에 열두 번 윤달이 끼면 열세 번 있다. 그 중 중요한 포야는 웨삭(양력 5월), 뽀송(6월), 에살라(7월)를 들 수 있다. 특히 웨삭 포야는 부처님의 탄신, 성도, 열반일을 의미한다.

4월 초파일, 납월 팔일, 음력 2월의 팔일과 보름을 여래 4성일로 지내는 우리와는 날짜에 있어 차이가 있다. 웨삭 포야가 되면 전국 각지의 절들은 최대의 명절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한다. 법회는 물론 길 가는 행인을 위한 보시의 집 운영, 연극이나 찬불가 공연 등 각종 문화행사로 전국이 축제의 장으로 변한다.

각 가정에서도 가족의 서원이 담긴 등을 직접 만들어 건다. 또한 포야가 되면 일반음식점은 물론 특급호텔에서조차 술을 팔지 않는다. 수년 전 어느 포야 때의 일이다. 찬드리까 구마라뚱가 대통령이 국정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콜롬보 시내에 있는 특급 호텔을 찾았다.

피로를 풀기 위해 대통령은 호텔의 웨이터에게 맥주를 주문하였다. 하지만 웨이터는 포야이기 때문에 맥주를 줄 수 없다고 했다. 대통령은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러느냐고 이야기했고 그 웨이터는 포야 때 술을 마시는 것은 불손하기 때문에 줄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 믿기지 않겠지만 결국 대통령은 그 호텔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9. 위빠사나
 
굳이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를 말한다면 자기를 돌아보는 수행법이 얼마나 발전해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수행법이 없는 종교가 있겠는가만은 불교의 선(禪)수행 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 선수행 중에 스리랑카·미얀마·태국 등 상좌부 불교국가들에서 전통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수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사마타(samatha, 止)이고 다른 하나는 위빠사나(vipassana-, 觀)이다. 특히 위빠사나는 팔리 어 경전 맛지마 니카야의 《사티파타나숫타》나 디가 니카야의 《마하 사티파타나숫타나 숫타》(이 경에 상응하는 한문 경전은 아함부 중아함의 《念處經》이 있다.)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방법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실 때 직접 수행했던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위빠사나는 바른 관찰을 통해 자신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하며 이 인식을 통해 집착할 것과 집착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방법으로, 이 깨달음은 스스로를 최고의 평온 상태로 이끈다. 이 경에는 “존재의 정화를 위해,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고통을 없애며 올바른 도를 얻기 위해, 그리고 열반의 깨달음을 위한 한 길(eka-yano maggo : the only way)이 있다. 그것을 사념처(四念處)라 한다.”고 되어 있다.

염처 즉 사띠(sati)란 ‘있는 그대로 보는 것 (bare attention)’을 의미하며 몸·느낌·마음·법의 염처 네 가지가 있다. 사념처를 포함한 모든 수행의 단계를 37조도품(助道品)이라 하여 37가지로 나타낸다. 이에는 사념처·사정근(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가 있다. 이 수행을 하는 스님들은 마을의 사찰이 아닌 숲속의 사찰에서 별도로 수행을 한다.

이들은 새벽 4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거의 대부분을 수행으로 보낸다. 이들은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을 지니기 때문에 재산이라곤 4자구(資具) 즉 의복·음식·침구·의약품과 물주전자, 약간의 책 등 만을 지니고 있으며 무소유의 승단 정신을 실천하여 시중의 스님들처럼 피릿이나 공양 등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스리랑카 남부의 ‘섬의 암자 (The Island Hermitage)’나 중부 불치사(佛齒寺)가 있는 옛 도시인 켄디 주변의 ‘숲속의 암자 (Forest Hermitage)’와 ‘간두보다 선센터’ 등이 유명하나 웬만한 사원은 거의 대부분 위빠사나를 수행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필자는 스리랑카 남부 엘피디에 마을 근처의 사원에서 수행했는데 이 사원은 마을에서 수 킬로 떨어진 정글 속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사원은 1958년 수행하던 스님이 표범에 물려 죽는 사고가 났을 정도로 정글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금도 하루 한끼만 공양하는 일종식을 철저히 지킨다. 더욱 특기할 만한 것은 신도들이 준비한 공양을 가지고 스님들의 수행처까지 오는 것이 아니라 일주문 옆의 공양소가 따로 있는 것이었다.

하루에 한 번 하는 공양이지만 공양 때가 되어서 신도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왼손에 발우를 받쳐들고 오는 스님들의 행렬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스님들은 법랍순으로 수행처에서 내려와 공양소로 걸어오는데 그 순간 무시무시한 정글은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로 바뀌고 마치 아라한들이 천상을 거니는 것 같다.


10. 종단은 셋, 배는 하나
 
스리랑카 승단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과거 끊겼던 법맥을 태국으로부터 다시 이어와 현재 스리랑카의 최대 종단이 된 씨암종, 미얀마에서 받아들인 아마라푸라종과 라만야종이 그들이다.

이들 종단은 출가를 허용할 때의 신분의 문제나 승복의 착의법, 구족계단의 설립 등 소소한 몇 가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별 차이가 없다. 출가할 때의 신분의 문제는 카스트와 관련이 깊은데 씨암종의 경우는 아직도 고위가마라는 농부 이상의 카스트에 속한 이들만 승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고 스리랑카에 카스트가 만연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스리랑카에도 인도 문화의 특성의 하나인 카스트가 있었지만 평등을 내세운 불교가 전래되면서 아주 오래 전부터 카스트는 무너졌으며 지금은 교통의 발달과 도시화의 진행 등으로 거의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들 세 종단으로 이루어진 스리랑카 불교의 특징은 화합이다. 팔리 경전을 소의 경전으로 하고 수행법이나 다비식 등 각종 의식이 같아서 스리랑카에서 의식을 하고자 하는 신도들은 아무런 혼돈 없이 동일한 내용의 의식을 치룰 수 있다.

승려들 사이에서도 종단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씨암종의 승려가 아마라푸라나 또 다른 종단의 사찰에 기거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으며 다른 종단의 승려들 또한 마찬 가지이다. 이 또한 종단간의 위의의 문제로 보이지 않는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불교의 입장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다.

스리랑카 종단에는 총무원이라는 상설기구가 없다. 교구에서도 그렇고 지역별로도 그렇다. 평소에는 진정한 정신적인 지주이신 종정 스님만 계시다가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중진 스님들이 모여서 상의를 하고 필요한 경비는 각 사원에서 갹출하여 행사를 치른다. 본인이 기억하는 중진 스님들의 회의로는 1988년 당시 스리랑카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였던 JVP라는 반정부 단체의 문제였던 것 같다.

이후에도 정부 정책에 대해 조언을 할 필요가 있을 때 이런 회의가 열린다. 이를 보고 비효율적이지 않느냐는 질문에 어느 나라의 불교는 효율성 찾다가 수행도 제대로 못하고 4년에 한 번씩 큰 싸움을 하느냐고 반문하면 우리는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스리랑카의 승단을 보면 화합할 수 없는 승단은 출발점에서부터 승단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11. 스리랑카의 내전, 그리고 불교가 하는 일
 
스리랑카 내전은 종족 분쟁인가 아니면 종교 분쟁인가?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하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우리 나라의 한 일간 신문은 다른 신문들과는 달리 유독 스리랑카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스리랑카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무척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보이고 있는 깊은 관심은 스리랑카를 불교국가로 몰아세우면서 불교도들 역시 그들이 신앙하는 종교처럼 잔인한 전쟁을 일삼는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들의 기사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어처구니없게도 불교도들이 행하는 선행은 쏙 빼고 그 지역의 안 좋은 부분을 강조하면서 불교도들 역시 전쟁을 좋아하는 것처럼 편집해서 기사로 내보낸다.

인류 역사에서 불교를 믿는 정치 집단이 공격적인 전쟁을 한 적은 결코 없다. 많은 이들은 지금의 스리랑카의 내전을 불교도와 힌두교도의 싸움으로 몰고 가려 한다. 스리랑카의 주요 종족인 싱할라 족과 분리 독립을 원하는 타밀 족의 대부분이 믿고 있는 종교가 불교와 힌두교이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는 것 같다.

하기는 여기에 힘을 보태주려는 듯 과거 김영삼 대통령 시절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정권의 종교 편향을 꾸짖고 공정한 정책 수행을 촉구하면서 신문에 게재한 광고에서조차 스리랑카의 내전을 종교 분쟁으로 서술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교인들 스스로 누워서 침뱉는 일을 한 것이다. 스리랑카의 내전은 종교 분쟁이 아니라 종족 분쟁이다.

산업혁명을 통해 막강한 힘을 구축한 영국인들의 탐욕은 스리랑카라는 조그만 섬나라를 온전하게 버려둘 수 없었다. 무력으로 스리랑카를 지배하던 영국에게 스리랑카는 단지 원료 공급국이자 자신들의 생산품 소비 시장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은 스리랑카의 정신인 불교를 우습게 보았다.

스리랑카 인들이 스리랑카의 정신을 회복하고자 영국의 식민 정권에 대해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자 영국인들은 그때부터 인도 남부의 타밀족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와서 대체 노동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강제 이주를 당했던 타밀 인들의 후손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신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의 자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종족 갈등의 뿌리이다.

이런 뿌리를 단지 스리랑카에서 싸운다고 불교와 힌두교의 종교 갈등으로 보다니? 이런 종족 갈등의 와중에 스님들이 보여주는 행위는 보살행 그 자체이다. 수시로 타밀 분리주의자와 정부군의 대표를 만나 평화를 호소하는 스님, 전장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부상 군인이나 전쟁터와 가까워 폐허가 된 마을의 주민들을 위로하는 스님, 마을의 어린이를 위하여 각종 사업을 전개하는 스님 등 이들은 모두 목숨을 내맡긴 채 살아가는 이들이다.

이들 스님들의 공통된 의견은 마치 간디가 인도가 나뉘는 것을 반대했던 것처럼 나라가 나뉘게 되면 평화는 영원히 요원하다는 것이다. 전쟁과 테러,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수행자로서의 길을 가고 있는 그곳 스님들을 보면서 진정으로 숙연해진다. 아무것도 없는 듯하나 필요한 것을 다 갖추고 있는 나라 스리랑카에는 무엇이 있는가? 불교를 공부하러 온 이들 중에 어떤 이는 배울 것이 없는 나라라고 이야기하고 어떤 이는 할 것이 많은 나라라고 이야기 하니 참으로 종잡기 어려운 나라인데, 내가 보기에도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것 같은 나라임은 틀림없다. 지저분해 보이기도 하고 또 느려서 화끈(?)하지도 못하고.

일반 사회뿐 아니라 불교조차도 그러하다. 일반 기업이나 학교에 서류 하나 제출하면 그 결과를 받는 데 얼마를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심지어는 한국에서는 하루면 될 일을 해결하는 데 6개월이 걸린 적도 있다. 그런데 후일 생각해 보니 그 과정이 나에게는 수행이었다. 일체유심조라고나 할까. 서둘러 결과를 보려 하고 또 그 결과를 바탕으로 다른 일을 도모하는 데 이력이 나 있던 나에게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는 수행이었다.

스리랑카! 벅찬 이름은 벅찬 상태로 남아 있어야 더욱 가슴이 뿌듯한 것이리라. 그곳에서의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의 체험에서 비록 그곳이 혼돈의 와중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곳의 생활이 나에게는 삼세(三世)를 확인하는 도량이었다.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가난하고 더러운 곳이라 하더라도 부처로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곳, 스리랑카에서 태어나 여법하게 수행하고 아라한이 되었으면 하는 자그만 바람을 심연에 새겨본다.

 

송 위 지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영학과 및 스리랑카 국립 케레니야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교육 연구소 진(眞) 소장. 논문으로 〈팔리 사티파타나 숫타와 한문 염처경에 대한 비교 연구〉 〈장아함 세기경과 팔리경전 비교 연구〉 〈존재의 분석으로서의 염처〉 등이 있다. 





♧ 100일 동안 경험한 미얀마 불교 (출처 :  불교평론 3호)
 찬매 예이타 명상 센터 단기출가기 
 강은애

  
- 목 차 -
1. 이슬람에서 불교학으로
2. 미얀마에 옷깃을 스치게 된 경위
3. 미얀마 인의 불교 체험, 신퓨(shinpyu)
4. 단기출가 감행
5. 우안거 중 에피소드들
6. 수행의 나날들
7. 양곤 시내 불교 유적지
8. 미얀마의 불교 유적지
9. 만달레이에서의 추억들 



1. 이슬람에서 불교학으로

미얀마라는 미지의 나라와 인연을 맺게 되어 이렇게 미얀마 불교 체험기까지 쓰게 될 줄은, 그리고 논문으로까지 관심이 넓혀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던 일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줄곧 한국에서 자란 나에게 불교는 익숙한 문화체계로 나의 생활에 스며들어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불교에 대해 공부를 한 적도 없었고, 절과 인연이 깊었던 것도 아니었다.

석사 논문으로 수피즘(Sufism:이슬람 신비주의)에 대해 쓴 나는 박사 과정에 입학해서야 비로소 불교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상 관심 주제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에서 내적인 수행의 경향이 강한 수피즘이 나의 호기심을 끌었듯, 지금 역시 불교 수행론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이슬람이 인도나 중국으로 전파될 때 정통 신학(순니파)보다는 수피즘이 그 관용적인 성향으로 인해 현지인들에게 더욱 환영을 받고, 이슬람 선교의 전도사 역할을 하였는데, 이 와중에 수피즘 역시 불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양자가 내세우는 교리나 사상(세계관, 우주관)은 다를지라도 궁극적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과정상에 드러나는 인간의 내적인 체험이나 수행의 방법은 서로 유사하거나 또는 서로 유용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상호간의 교류가 용이하였던 것 같다. 이 주제는 좀 더 심도 있게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라 생각된다.


2. 미얀마에 옷깃을 스치게 된 경위

95년 박사과정에 입학한 나는 두 달 정도 학교를 다니다 결국 휴학을 하고 정처없는 여행(방황?)을 떠나게 되었다. 학문과 수행을 현실 속에서 병행하고 싶었던 나는 그 당시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나 자신의 문제가 더 컸음을 지금은 인정하지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외부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던 터라, 환경을 바꿔서라도 나를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현 상황이 보다 더 만족스럽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변화의 주체가 나임을 자각한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여행 일정에 처음부터 미얀마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얀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떠남 자체가 어떤 계획하에 진행되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무계획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미얀마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단기출가후 미얀마 재가 여신도(오른쪽)와 함께. 여신도가 입고 있는 복장은 여신도들이 수행할때 입는 틸라신복이다.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삶에서 벗어나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보다 근원적으로는 이 세상에 툭 던져진 것만 같은 이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혼자서 진통을 앓고 있을 때였다. 여행중 우연히 알게 된 한국인으로부터 미얀마의 명상 프로그램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어떻게 미얀마로 들어갈 수 있으며, 어디를 찾아가야 하는지에 관해 정신없이 들었다. 무슨 계시라도 받은 듯 조금은 흥분하며 인도로 향하려던 계획을 바꿔 미얀마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 한국인으로부터 얻은 정보에 의존하여 양곤으로 향하였다. 일러준 대로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찬매 예이타 명상센터(Chanmyay Yeiktha Meditation center)로 갔다.

미얀마 상황에 대해 전무한 상태였으므로 무조건 기사 아저씨에게 맡겨 놓는 수밖에 없었다. 운좋게도 무사히 센터에 도착하였다. 그 곳에는 이미 몇 분의 한국인 수행자들이 있었다. 도착한 그때가 마침 우안거(雨安居:waso, 미얀마력 3월, 양력 6∼7월) 기간이라 센터의 원장격인 우 자나카비왐사 사야도(U Janakabhivamsa Sayadaw)4)께서 센터에 상주하고 계셨다.

우안거(雨安居)가 아닌 때는 주로 외국으로 설법 여행(Dhamma tour)를 떠나신다고 하였다. 센터에 도착한 지 몇 일이 지나자 한국에서 몇 사람이 더 우안거(雨安居)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 우안거의 첫째날에는 정성스레 공양물을 준비한 많은 사람들이 센터로 모여들고 아침부터 성대한 행사가 펼쳐진다.

그리고 우안거가 끝나는 날에는 신에게 올리는 등불로 온 마을을 밝히는데 이것은 붓다가 천상에 다시 태어나 그의 어머니에게 아비달마를 설하고 지상에 강림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파고다나 불상 앞에 등불이 켜지고 가정집에서도 불단에 양촛불에서부터 비싼 종류의 등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불을 밝히며, 곳곳에서 폭죽이 터지고 관공서 건물을 화려한 등불로 장식하기도 한다. 특히 이 축제를 전후해서 부모님이나 주위의 연장자, 그리고 스승에게 과일이나 케이크, 롱지(longyi)5) 등을 선물하며 경배한다.


3. 미얀마 인의 불교 체험, 신퓨(shinpyu)

미얀마 풍습에 따르면 남자 아이들은 9∼13세에 신퓨(Shinpyu) 의식을 치르게 된다.

신퓨는 며칠 또는 몇 주간 사원에서 수련을 쌓으며 승려생활을 체험하는 것이다. 아이는 왕자처럼 비단옷을 입고 포좌(砲座)에 실려 사원으로 간다. 머리를 깎고 나면 머리카락은 흰보자기에 싸서 인근 파고다 아래에 묻는다.

고승이 건네는 바리를 받는 것으로 의식은 끝이 나고 아이는 승려생활에 들어간다. 여자 아이들은 이 시기에 귀를 뚫는 ‘나트윈(Nathwin)’을 치르고 아이의 단계를 벗어나게 된다. 신퓨 의식을 치른 이후에도 미얀마인들은 머리를 깎고 승려생활을 반복함으로써 불자로서의 자세와 예절을 익힌다.

이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승려가 되어 살기도 한다. 이 의식을 거치고 승원 생활을 한 후에야 비로소 독립된 젊은이로 인정되어 결혼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하는 것에서 신퓨 의식이 원래 성년식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미얀마 불교도의 대다수가 승려가 되어 승원에서 일정 기간 생활을 하는데 이는 신퓨라는 일종의 성인식을 치르는 것이다.

이 행사의 정점에 가서 두발 같은 온갖 장식품이 벗겨지고 가사가 입혀진다. 붓다가 한 것처럼 모든 세속적 욕망과 쾌락적 삶을 포기하고 열반의 경지를 구득(求得)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모가 기증한 8가지 승원생활의 필수품  하의 가사(thinbain)·상의 가사(eikathi)·망토 가사(dugou)·탁발 그릇(dhabei)·면도칼(thindounda)·바느질 도구(a)·허리끈(gabangjou)·물여과기(jeisi)  을 받아 가지고 승원에 들어간다. 승원에서 수련승으로서 10계를 준수할 것을 서약하면 모든 식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승원에 머무는 동안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승려로서 탁발 구걸의 생활을 해야 한다. 미얀마의 남성들은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승원 생활을 하기를 희망하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실행하고 있다. 이 시기에 불교의 교리나 세계관을 배우는 것 이상으로 계율에 따라 불교도로서의 행동 양식을 몸에 익힌다. 이것은 환속 후의 생활에 있어서도 그들의 행동을 규율하는 배경이 된다.


4. 단기출가 감행

처음 며칠은 다른 미얀마 여자 수행자들처럼 밤색 롱지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어깨에는 밤색의 스카프 모양의 천을 두르고 생활하였다. 그런데 미얀마에서는 단기 출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이왕 할 것이면 제대로 형식도 갖추어 수행하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가사(袈裟)나 수녀(정녀)복을 입고 지나가는 성직자들을 보면 웬지 모르게 한참을 쳐다보곤 하던 그 미분화된 감정의 덩어리, 항상 마음 한편에 있던 출가에 대한 동경 또는 미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단기 출가를 감행하게 하였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너무나 해보고 싶었던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기조차 하였다.

무의식 속에 항상 억압되어 있던 무언가가 해소되어지는 느낌조차 들었다. 먼저 미얀마 여자 출가승6)들이 입는 분홍색 비구니 옷을 마련하기 위해 미얀마 시장에 나가 옷감을 끊고, 센터 안에서 신을 하얀색 슬리퍼, 그리고 간단한 생활 필수품 등을 사서 센터로 돌아왔다. 남자(현지인이든 외국인이든)가 출가 할 때는 후원자가 정해져 그 사람이 수행하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준다.

이때 잠시 느낀 나의 단상은 수행의 세계에서조차 여성은 늘 소외되고 있는 존재이구나 하는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수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고, 그 순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림이 수행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항변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미얀마 여자 출가승인 틸라신 투담마사리와 미얀마에서 이미 몇 년의 수행 경력이 있는 한국 여자 출가승의 도움으로, 다른 한 명의 한국인 여자 수행자와 함께 우 자나카비왐사 사야도(U Janakabhivamsa Sayadaw)로부터 수계를 받아 출가하게 되었다. 몇 년 간 길렀던 긴 머리를 자르고 삭발한 머리를 감으려던 순간,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물컹하게 감촉되는 두피의 느낌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난생 처음 삭발한 민둥 머리를 느껴 보았던 것이다. 그와 함께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고등 학교 때부터 시작된 나의 긴 편력, 이렇게 먼 이국에까지 와서 삭발하며 내가 찾으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나를 이렇게 내몰고 있는 것일까? 순화되지 않은 채 날뛰는 그 원초적 에너지. 이렇게 떠돌 수밖에 없는 알 수 없는 답답함, 풀리지 않는 내적 갈증, 나를 옭아매어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무서운 그 무엇. 미얀마에서 3개월간의 위빠사나 명상은 나를 깊이 만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고, 혼돈스러웠던 많은 것이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명상 중에 있었던 구체적 체험이나 느낌은 이제 아련한 추억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다.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그 기억의 단편인 노트조차 나의 수중을 떠난 지 오래이다. 또한 명상 기간 중에는 일체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어차피 지금의 나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생생한 체험을 전하지 못해 미안하고 아쉽기만 하다.


5. 우안거 중 에피소드들

우안거 결제 후 한 열흘 정도 지나 센터에 큰 행사가 있었다. 우 자나타 사야도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여 재가 신도들이 푸짐한 선물을 마련한 것이다. 이 보시품들을 2층 법당에 진열해 놓고 제비 뽑기를 하여 비구 스님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대부분 가사나 양산, 생활 용품 등이었지만 그 중에는 꽤 비싼 물건이나 전기 제품도 있었다. 근처의 다른 절 스님들도 아침 일찍 찬매 예이타로 오셨다. 아침 공양을 드신 후 이 행사가 치루어졌는데, 센터 내 모든 사람들이 모여 스님들이 어떤 물건을 뽑는지 지켜보며 즐거워하였다. 늘 정적과 고요함 속에 쌓여 있던 센터가 한바탕 잔치 분위기로 바뀌었다. 다소 긴장되고 힘겨운 수행 기간 중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삭발과 관련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지금은 웃을 수 있지만 그 당시는 진땀나는 일이었다. 처음 삭발한 후 일주일에 한 번씩 틸라신 투담마사리의 도움으로 삭발을 하곤 하였다. 계속 신세를 지는 것이 미안하여 하루는 마음을 먹고 점심 공양 후 방에서 혼자 삭발을 시도하였다. 조금은 떨리고 할 수 있을까 두려움조차 들었다. 어설픈 손놀림, 면도기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라 한참을 쩔쩔매다 겨우 방향감을 잡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삭발해 나갔다.

머리를 반 정도는 밀었는데, 반 남은 머리가 멀고도 멀게만 느껴졌다. 이대로 나갈 수도 없고, 어슬프게 반만 삭발한 머리를 상상해 보라!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양인지. 그렇게 긴장되고 지루한 시간이 흘러 거의 마무리 될 무렵 ‘휴’ 이제 끝났다고 안심을 하려던 순간, ‘앗’ 붉은 피가 흘러 내렸다. 머리를 살짝 베이고 말았다. 이렇게 애숭이 중이 제 머리 깎으며 피를 보게 된 것이다.

이후 다른 스님들의 머리에 난 영광의 상처들이 새삼 눈에 띄여 피식 웃곤 하였다. 며칠 후 여행 비자를 명상 비자로 만드는 데 필요한 사진을 찍기 위해 미얀마 스님의 안내로 다른 외국 수행자들과 함께 센터 근처에 있는 사진관으로 갔다. 나무로 된 계단을 올라간 그곳은 우리 나라 60∼70년대 이발관 같은 음산한 분위기에 사진기 한 대만이 덜렁 놓여 있었다.

일단 안거에 들어가면 외부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나 특별히 사야도의 허락을 받아 사진을 찍으러 잠시 나갈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제서야 겨우 미얀마 거리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랑비가 내리는 흐린 날씨였다. 질퍽한 도로를 걸으며 센터로 돌아오는 길에 스치듯 외로움의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 장면을 회상하는 지금까지도 그때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리고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 걱정을 잠시 하였다. 나는 네덜란드에서 온 50대 정도의 여자 수행자와 방을 같이 사용하였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센터에 와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백발에 아주 맑은 분위기였다. 네달란드에 있는 수행 센터에서 이미 위빠사나 명상을 수행한 경력이 있다고 하였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기간에 단기 출가를 하였는데, 수행 기간 동안 나의 좋은 도반이 되었다.

그 당시 센터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많은 외국인 수행자들이 있었다. 호주·캐나다·미국·싱가포르·말레이시아·태국·네덜란드·베트남 등에서 온 사람들과 미얀마 남녀 재가 신도들이 참으로 열심히 수행에 정진 하였다. 그때 일상생활 속에서도 실천 가능한 위빠사나 수행이 한국의 일반 대중들을 위한 수행 프로그램으로 활용되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였는데, 현재 많이 대중화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좌선(Sitting Meditation)·경행(Walking Meditation)·일상 생활 관찰하기(Daily Life Meditation)가 주된 명상법으로, 그 중에서 일상 생활 관찰하기는 바쁜 사회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아주 유용한 수행 방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활 속에서 완벽하게 관(觀)할 수는 없겠지만,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삶과 수행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위빠사나 수행법이 한국에 점진적으로 소개되어 수행법에 목말라하는 많은 사람들의 갈증을 어느 정도 해갈시켜 주고 있는 것 같아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된다. 대승불교인 선불교의 수행법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한국의 현 시점에서 남방 불교의 수행법을 접할 수 있는 장들이 마련된 것은,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된다.


6. 수행의 나날들

하루 일과는 아침 3시 30분에 일어나 세면을 하고, 4시에서 6시에 사이에 경행 및 좌선, 6시부터 7시 사이에 아침 공양을 하는데, 간단한 죽 종류가 마련된다. 7시부터 10시 30분까지 경행 및 좌선 수행을 각자 법당에서 행한다.

10시 30분부터 12사이 점심 공양을 한다.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상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상이 구분되어 마련되는데, 아주 풍성한 상차림이었다. 이후는 오후불식(午後不食)으로 간단한 음료 이외에 일체 음식을 먹을 수 없다.

12시부터 5시까지 경행 및 좌선을 하고, 5시부터 6시 30분까지 법문 및 음료수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이 있다. 6시 30분부터 10시까지 경행 및 좌선을 하고, 10시 이후에는 자율 정진을 하게 된다. 점심 식사 후 외국인들이 각자 법당에서 좌선이나 경행 수행을 하는 동안, 미얀마 현지인들은 1층 법당에서 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는다. 이때 법당에서 들려오는 팔리 어 삼귀의 독송 소리와 대중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수행의 분위기는 장엄하고도 엄숙하였다.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ambuddhassa:존귀한 분, 공양받을 만한 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께 경배합니다.) 우안거 동안 외국인들은 일주일 두 번 사야도로부터 인터뷰를 받는다. 자신이 수행하면서 느꼈던 바를 점검받거나, 의심나는 것을 자유롭게 물을 수 있다.

아침 8시 외국인 비구의 인터뷰가 있고, 오후 6시에 외국인 여자 수행자(nun)의 인터뷰가 있다. 미얀마 신도들이 스님들에게 갖는 존경심은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 같았다. 큰스님을 뵈면 바깥일지라도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미얀마 재가 신도들도 스님들께 정해진 시간에 인터뷰를 받는데, 그 진지한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엄숙해 보였다. 부처님 당시 녹야원이나 죽림정사 등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어울려 있는 풍경이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 점심 공양 후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물론 이 시간조차도 끊임없이 관하여야 하는데 시종일관 잘 관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주로 2층 법당에 가서 수행하였다.

1층 법당에서 미얀마인들을 위한 법문이 있을 때는, 외국인 여자 수행자들도 남자 수행자들이 주로 수행하는 2층으로 올라가 명상할 수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갈 때도 발걸음의 듬(lifting)과 밈(pushing) 그리고 내림(dropping)을 관하면서 천천히 장소를 이동하여야 한다.

2층 법당은 큰 홀로 되어 있어 경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법당 옆으로 난 발코니에서도 슬로우 모션으로 느릿 느릿 경행하는 수행자가 한두 명 있었다. 그 한가롭고 정적인 분위기, 물론 내면에서는 큰 전쟁이 치르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때는 우기(雨期)라 2층 법당에 올라가 좌선을 얼마쯤 하다 보면 거의 같은 시간, 거의 같은 자세로, 거의 같은 부위에 통증을 느끼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장대비가 쏟아 붓는다.

그 청량한 느낌. 몸은 피곤하고, 다리는 아파 자세는 바꾸고 싶고, 이런 저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 힘들어 할 때 구세주라도 되는 양 시원하게 쏟아지는 장대비는 나를 각성시켜 주는 신호탄 같았다. 미얀마 명상센터에서 위빠사나 명상을 하며 흘린 눈물이 아마도 한 양동이는 될 것 같다. 좌선을 하다보면 슬픔도 아니고, 그렇다고 후회나 비탄의 감정이 이는 것도 아닌데,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뚝뚝 떨어지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하였다.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위빠사나 명상을 하면서 고질적인 습관 하나를 지켜볼 수 있었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면 폭죽 터지듯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생각의 관성 작용 때문에, 이러다 정신 분열증에 걸리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던 그 습의 뿌리를 발견하여, 뚜렷이 관(觀)함으로써 긴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다시 이 질병이 도지려 함을 본다. 지켜보는 수밖에…….

 

7. 양곤 시내 불교 유적지

수행 중에는 묵언이 원칙인데, 센터 내에서 미얀마 현지인들과 몇 마디 주고 받던 중 알게 된 한 미얀마 아주머니께서 나의 후원자가 되고 싶다고 하셨다. 일견 당혹스러워 주저하고 있는데 그분이 나에게 절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튼 이렇게 그분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여자 수행자(nun)에게는 후원자가 없다. 그녀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분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잊을 수가 없다. 절에 오실 때면 언제나 비누나 기타 생활 필수품 한두 가지를 챙겨 주시던 그분의 따뜻한 마음과 딸의 해맑은 모습은 지금도 나의 마음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리고 내 방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기거하시던 한 아주머니 역시 새삼 기억에 떠오른다. 슬그머니 바나나 한 다발을 웃으며 건네주시고는 쑥스러운 듯 돌아가신던 그 뒷모습. 센터에서의 3개월은 나에게 결코 짧은 시간만은 아니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살던 내가 절의 규율에 맞춰 생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안거 동안의 수행은 많은 것을 투명하게 해주었고, 그후 미얀마를 떠나 17개월 정도 계속된 배낭 여행의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던 것 같다.

3개월의 안거가 끝나고 환계하기 직전 나의 후원자였던 분이 자기 집에 초대해 주셨다. 처음으로 명상 센터 밖의 불교 문화를 접한 날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의사로 그 당시 다른 나라에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라고 하였던 것 같다. 생활이 풍족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미얀마 중산층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가구도 그렇게 많지 않았으며 우리 나라 뒤주 같은 나무 궤짝에 옷들을 넣어 두었다. 집에는 고승들의 사진이 많이 놓여 있었다.

어떤 스님은 신통한 능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간다고 하였다. 아마 미얀마 인들도 스님들의 신통력이나 이적에 대해 꽤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친정 어머니, 그들 모녀와 함께 인도의 오토 릭샤 같은 자동차를 타고 쉐다곤 파고다로 갔다. 미얀마를 흔히 탑의 나라라고 하는데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가 그 중 가장 유명하다.

미얀마의 상징으로 높이 99m의 황금 첨탑의 위용을 갖춘 화려한 쉐다곤 파고다는 양곤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데, 2,500년 전에 조성되었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상인 형제가 부처님을 친견하고 머리카락을 받아 이곳에 모신 것이라고 한다. 이 탑에 사용된 금만도 60톤에 달하며, 수많은 다이아몬드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파고다로 올라가는 길도 어마어마하고 파고다 자체의 화려함과 웅대함에 그저 놀라기만 하였다. 무엇보다 파고다 이곳 저곳에 자리잡고 앉아 명상이나 기도에 전념하거나, 향이나 초를 피우고 참배하는 미얀마 인들의 모습에서 이곳은 불교가 바로 이들의 삶이며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고다 입구에 늘어선 가게에서 미얀마 염주를 몇 개 샀다. 3개월 간의 안거를 무사히 마치고, 미얀마 승복을 입은 채, 미얀마 인들 속에서 쉐다곤 파고다를 참배하는 기분이 묘하였다. 낯설면서도 포근한 느낌이었다. 인종이나 국적을 초월하여 불교 아니, 인간의 원초적 종교 심성이 우리를 하나로 이어준 것 같다.


8. 미얀마의 불교유적지

안거가 끝나고, 한국인 몇 분과 함께 미얀마 현지인의 안내로 양곤 시내에 있는 박물관, 기념품상, 술레 파고다 등을 돌아 보았다.

술레 파고다(Sule Pagoda) 역시 시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다른 파고다들과 마찬가지로 2,00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여러 차례 보수, 증축되었다고 한다. 현재 주위는 상가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 안에 부처님의 머리카락이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잠시 참배하고 나왔다.

우자나카 스님의 배려로 외국인 수행자들은 양곤 근처의 불교 유적지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때 나는 이미 환계(還戒)를 한 뒤라 분홍색 수행자(Nun) 옷을 벗고 일반 재가 여신도들이 입는 밤색 롱지로 갈아 입었다. 양곤에서 약 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바고는 남부 미얀마의 수도이자 거대한 도시로 몬 왕조 시대인 573년에 건설되었다. 칼야니시마(Kalyani Sima) 근처에 위치한 셰터랴융(Shwethalyaung)의 불상은 길이가 55m, 높이 16m나 되는 거대한 와불(臥佛)이다.

994년에 조성되어 여러 번의 수난과 이에 따른 보수 과정을 겪었으며, 125년 동안 가려져 있다가 1881년 영국인들이 양곤-바고 간 철도 건설 사업을 하는 도중에 발견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바고로 불교 유적지를 보러 가던 중 길가에 여러 신들을 모셔 놓은 사당 같은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아마 민간 신앙인 ‘낫(nat)’을 섬기는 곳인 것 같다. 현지인의 점심 공양이 있어 우리 일행은 그 집으로 향하였다. 길가에 늘어선 목재 건물들은 아주 낡아 있었고, 하수도 시설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하수 오물은 그대로 하천과 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이 물을 그대로 식수로 사용하여 말라리아·설사·이질·결핵·간염이 만연하다고 한다. 농촌 지역의 가옥은 주로 대나무집으로 바닥, 벽, 지붕 할 것 없이 모두 대나무가 주재료이다. 대나무 집은 대체로 두 칸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하나는 부엌이나 저장 창고로 쓰이고, 나머지 다른 공간은 침실과 거실로 사용하고 있다. 집안에 변변한 가구가 없는 것이 특징일 정도로 미얀마 인들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었다.

처음으로 미얀마 스님들이 신도 집에서 공양받는 모습을 보았는데, 먼저 발을 씻을 물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나서 가족들이 스님들께 예를 올린 후 공양을 올렸다. 우리 일행도 정성껏 마련해 주신 음식물을 대접받고 다시 유적지 여행에 올랐다. 바고에서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차이 푼(Kyaik Pun)은 신소푸 여왕에 의해 왕으로 지명된 담마제디 왕이 1476년에 건립한 것이다.

사각의 거대한 돌 기둥에 사방으로 불상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데 높이가 30m나 되었다. 서쪽 방향에 있는 불상은 1930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파손되어 있었다. 하루 일정의 여정을 마치고 센터로 돌아왔다. 며칠 센터에 머물면서 인도 비자도 발급받고, 파간과 만달레이 여행 계획을 세웠다. 미얀마에서 외국인이 개별적으로 여행을 하는 데는 상당한 제약과 애로 상황이 있었다.

우선 정부가 지정한 숙박 시설에 머물러야 하며, 또한 그 비용을 태환권이나 달러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기차 비용은 현지인의 몇 배가 되는 것 같았다. 결국 버스로 여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양곤 교외의 허름한 버스 터미널에서 겨우 표를 구해 파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정확하게 몇 시간 걸렸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거의 하루가 걸려서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다. 광활한 미얀마 대륙을 터덜거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달렸다. 때때로 물소들이 늪 속에서 허느적 거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중간 휴게소 같은 곳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저녁 무렵 파간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당혹스러웠던 일은 잠시 휴식 및 볼일을 볼 수 있게 버스가 서자, 미얀마 사람들은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제히 버스 주변에서 일을 보는 것이었다. 모두 롱지를 입고 있으니 그대로 앉기만 하면 만사가 해결되는 것이다. 바지를 입고 있던 나는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인도에서나 자연스러운 일인 줄 알았는데 미얀마의 화장실 문화도 역시 아주 간편하였다. 아주 늦은 시간에 파간에 도착하여 어렵게 지정된 숙소를 찾아 방을 구하였다. 다음 날 자전거를 빌려 타고 파간의 파고다 순례에 나섰다. 수많은 탑의 숲, 그 속에 조각된 어마어마한 불상들, 그리고 파고다 위에 올라가 내려다 본 파간의 전경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파고다 사이의 넓게 뚫힌 길을 자전거로 달리며 바라본 파간의 저녁 노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환희를 가슴에 안겨주었다. 지금도 때때로 그 하늘, 그 노을을 상상하며 마음 속 여행을 떠난다.


9. 만달레이에서의 추억들

파간에서 만달레이로 향하였다. 만달레이는 좀더 상업 도시의 냄새가 풍기며 번화해 보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주인이 근처에 축제가 있다고 알려주어 그곳으로 가보았다.

사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장통에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가설 무대 위에서 아마츄어 가수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사원 주변으로는 여러 가지 불교 용품과 불교 의례에 필요한 울긋 불긋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큰 모조 지폐로 부채 모양을 만들어 진열하고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음날 만달레이 시장에서 이것 저것 장 구경을 하다가 양곤의 명상 센터에서 나의 머리를 삭발해 주고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던 틸라신 투담마사리를 우연히 만났다. 양곤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만달레이 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니 너무나 반가웠다. 그녀는 만달레이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중이라고 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장을 보고 있던 투담마사리는 나에게 그녀의 친척집에 함께 가자고 하였다.

친척집은 상업을 하시는 집 같았는데 미얀마에서는 꽤 부유한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식사 대접을 융숭히 받았다. 온 식구들이 신기한듯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안주인 되는 분이 자신의 딸이 입던 미얀마 전통 의상을 내어 주며 입어 보라고 권하셨다. 여자 가족들이 아주 신나 하면서 옷 입는 것을 도와 주었다. 그리고는 멋지게 사진을 찍으라며 포즈까지 잡아주는 것이었다. 이방인에게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풀어준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분들의 마음에 항상 평화와 안정이 깃들고,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투담마사리와 남자 친척분이 마하무니 파고다로 안내해 주셨다. 만달레이 공항에서 북서쪽으로 1.5km 지점에 마하무니 파고다가 있었다. 이곳은 원래 1784년에 보도파야 왕에 의해 설립되어 왕국에서 이곳의 동쪽 문 입구까지 벽돌로 포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884년 화재로 파괴되고, 현재의 파고다는 비교적 최근에 완성된 것이다. 이 파고다는 라카잉(방글라데시와의 접경지역)에 있는 묘하웅(Myahaung)에서 만달레이로 가져온 마하무니(Maha?uni:Great Sage)상(像)으로 특히 유명한데, 마하무니 파고다는 이 오래된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11세기 파간 왕조의 아노라타 왕도 이를 파간에 가져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보도파야 왕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라카잉에 들어가 옮겨 온 것이라 한다.

3.8m 높이의 이 불상은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나, 오랜 시간에 걸쳐 무수한 불교 신자들에 의해 지금은 15cm 두께 이상의 금으로 완전히 씌워져 있다. 그러나 여성은 이 법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금을 기증하고 싶으면 남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매일 아침마다 불상의 얼굴이 의례적으로 씻겨지며, 매년 2월 초에는 이곳에서 마하무니 파고다 축제가 열려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 든다고 한다. 다음날 자전거를 빌려 타고 만달레이 언덕으로 향하였다.

미얀마의 건조 지대에 자리잡은 만달레이는 1856년 민돈 왕이 건설한 도시로 1860∼85년 콩바웅 왕조의 최후 도시가 되었다. 영국이 미얀마를 점령하기 전까지만 해도 만달레이는 미얀마의 수도였으므로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만달레이 시(市)의 북동쪽에 높이 236m의 만달레이 언덕과 기슭에 위치한 쉐 난도(Shwe Nandaw)승원, 쿠토도 파고다(Kuthodaw Pagoda), 마하무니 파고다 등에서 콩바웅 왕조 예술의 순수성을 볼 수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영국의 용병인 구루카 인과 일본 저항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만달레이 언덕에는 곳곳에 불교 유적이 산재해 있다.

이곳의 불교 유적들은 주로 은둔 승려였던 우 칸티(U Khanti)에 의해 조성된 것들이라 한다. 이곳 정상에 오르면 만달레이 시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정상 부근에 거대한 불상(Shweyattaw)이 왕궁을 향해 선채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붓다가 제자 아난다와 같이 이곳에 왔을 때 지금의 왕궁을 가리키며 지금으로부터 2,400년이 되는 해에 이곳에 위대한 도시가 건설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민돈 왕이 1857년에 아마라푸라(Amarapura)에서 만달레이로 수도를 옮기고 바로 그곳에 불상을 세웠다고 한다. 이렇게 며칠 간의 파간과 만달레이 여행을 마치고 양곤으로 돌아온 후, 미얀마를 떠나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우연한 기회에 미얀마에 100여 일 머무르면서 깊이 있는 위파사나 수행은 하지 못하였으나, 미얀마 불교의 살아 있는 모습을 조금이나마 스케치하듯 맛볼 수 있었다.

인도에서나 자연스러운 일인 줄 알았는데 미얀마의 화장실 문화도 역시 아주 간편하였다. 아주 늦은 시간에 파간에 도착하여 어렵게 지정된 숙소를 찾아 방을 구하였다. 다음 날 자전거를 빌려 타고 파간의 파고다 순례에 나섰다. 수많은 탑의 숲, 그 속에 조각된 어마어마한 불상들, 그리고 파고다 위에 올라가 내려다 본 파간의 전경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파고다 사이의 넓게 뚫힌 길을 자전거로 달리며 바라본 파간의 저녁 노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환희를 가슴에 안겨주었다. 지금도 때때로 그 하늘, 그 노을을 상상하며 마음 속 여행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