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정진/불교 입문. 경전

Ⅱ. 남방 상좌부불교의 이해

담마마-마까 2019. 4. 4. 20:16


Ⅱ. 남방 상좌부불교의 이해

 

 상좌부 불교의 역사와 전통 / 송위지 
 남방 상좌부 불교의 수행체계 / 김재성
 상좌부 불교의 현황 / 난다라타나 
 상좌부 불교의 주요 수행처와 스승들 / 김열권

 

상좌부 불교의 역사와 전통 (출처 :  불교평론 13호)
송위지(songwc@hanmir.com)
  

::::: 목 차 :::::

1. 용어의 정리
2. 남방 상좌부 불교의 성립과 역사
3. 남방 상좌부 불교의 기복 의식, 피릿
4. 나오는 말

 

1. 용어의 정리
 
한국 불교 1600년의 역사에서 상좌부 불교의 가르침과 수행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지극히 일천하다 할 수 있다.

상좌부 불교와 관련이 있는 언어인 빠알리어에 대한 연구와 또 차자(借字)를 통하여 파알리 발음으로 기록된 경전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최근이라 할 수 있다.

논자는 작금의 한국 불교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몇몇 테마들에 관한 연구물들을 접할 때 그 테마들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들에서 심한 혼돈을 느낀다. 각자 나름대로 충분히 연구 검토하고 스스로 타당하다는 확신을 가진 후에 그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면이 있어 ‘불교’라는 말로 끝나는 복합어들 중에 혼돈을 줄 수 있는 몇몇 용어들에 대해 일차적으로 간단히 정리를 하고자 한다.

한국어에서 복합어의 생성 과정을 보면 서술 방법의 특징 중의 하나는 a b의 형태가 주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a b의 형태란 우리(a) 나라(b), 백두(a) 산(b), 고등(a) 학교(b)처럼 수식어가 앞으로 가고 수식을 당하는 말이 뒤로 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근거로 할 때 ‘불교’라는 말로 끝나는 복합어들 중에 혼돈을 주는 단어들로는 ‘원시 불교’ ‘근본 불교’ ‘초기 불교’ ‘상좌부 불교’ ‘대승 불교’ ‘소승 불교’ 등을 들 수 있다. 중국 불교, 한국 불교처럼 각국의 이름이나 지명이 앞으로 가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앞의 경우처럼 심각한 문제를 수반하지는 않는다.


1) 원시 불교와 근본 불교
일반적으로 원시 불교란 초기 인도 불교를 가리킨다. 시기적으로는 석가모니 붓다가 정각을 득하고 전도생활을 하다가 열반에 든 후부터 처음으로 부파가 분열한 때까지의 약 200년 내지 300년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붓다의 시기부터 아쇼카 왕의 시절까지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일본의 우이 하쿠쥬(宇井伯壽)는 석가모니 붓다에게 직접 출가하였던 스님들의 시절까지를 포함하여 이를 근본 불교라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원시 불교이건 근본 불교이건 그 시절을 바로 알려줄 수 있는 원천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원시 불교가 지녔을 내용을 가능한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원시 불교 시대 이후에 전개된 각 부파들의 공통된 내용들을 가지고 원시 불교 시대의 가르침을 추론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내용에 있어 엄밀함을 요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초기 불교를 포함하여, 원시 불교와 근본 불교에 대해 크게 차이를 둘 필요는 없다.

 

2) 상좌부 불교,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
상좌부 불교(Theravada Buddhism)는 장로(長老) 또는 상좌(上座)들의 불교라는 뜻이기 때문에 장로 불교라고도 한다. 상좌부 불교는 불교의 온전한 한 부파(部派)로 스리랑카를 위시한 몇몇 국가에서 수행하고 있는 불교라 할 수 있으나,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는 지역적으로 어느 특정 국가에서 수행하고 있는 불교라 할 수 없으며 나아가 불교의 한 부파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상좌부 불교의 경우처럼 불교의 한 부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부파의 승단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조문(條文)인 바라제목차(Patimokkha)가 있어야 하지만, 소승 불교나 대승 불교는 별도의 특정한 바라제목차를 갖추고 있지 않다. 이는 소승 불교나 대승 불교라는 용어가 어떤 불교적 흐름을 나타내는 어휘로는 사용될 수 있으나 특정 부파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증거이다.

특히 소승, 즉 작은 수레(Small Vahicle)을 나타내는 어휘인 히나야나(H nay na)나 대승, 즉 큰 수레(Great Vehicle)을 나타내는 어휘인 마하야나(Mah y na)는 상좌부 불교의 파알리 문헌은 물론 그 주석서 또는 《도사(島史, D pava sa)》나 《대사(大史, Mah y na)》 같은 불교 역사서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단어들이다. 이는 대승이나 소승이란 말이 적어도 파알리 불전 이후에 시작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며, 소승 불교와 상좌부 불교를 혼용하는 것은 잘못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어의 복합어 생성 과정에서 볼 때 소승 불교라는 말이 소승(a) 불교(b)라는 형태, 즉 어떠한 경우에라도 불교의 한 부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동안 소승 불교를 폄하한 이들에게는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그 동안 비수행자적인 행동을 마구 일삼았던 일부 대승 지상주의자들은 승속을 막론하고 비법적인 행위를 하면서도 대승이므로 괜찮다는 식으로 합리화하였다.

그리고 소승 불교가 확실히 불교의 한 부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행위에 동조해 주지 않는 것을 소승이라는 말로 폄하하고 홀대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즉 소승 불교가 지극히 잘못된 것처럼 비논리적 방법으로 해석한 흔적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특히 그들의 이러한 몰이해는 대승 불교만이 진정한 불교이며 소승 불교는 불교가 아닌 것처럼 인식하게 하였다.

 

소승 불교 역시 붓다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불교임에도 불구하고 소승 불교를 폄하하는 태도를 취하도록 했던 것이 사실이며, 나아가서 이것이 붓다와 그의 가르침을 모독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별 저항 없이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설사 소승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궁극적인 뜻에서 나쁘게 표현되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2. 남방 상좌부 불교의 성립과 역사

1)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
붓다 입멸 이후 인도에서는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되풀이했다. 기원전 4세기 중엽에는 마가다 왕국이 가장 강력했고, 하란캬·싸이슈나가·난다의 뒤를 이어 나타난 마우리야 왕조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해 나갔다. 기원전 4세기경 페르시아를 멸하고 인도에 침입해 펀잡 지방을 점령했던 알렉산더가 죽자 인도에서는 이민족의 침입과 정복에 자극 받아 국민의 자주 의식이 높아져 있었다. 이때 찬드라굽타는 그리스 군대를 내몰고 펀잡 지방의 통치자가 되었다.

 

마우리야 왕조의 시조 찬드라굽타 마우리야(B.C.324∼297)는 난다 왕조의 계보에 속했었으나 그의 어머니 무라 데위의 이름에서 공작(孔雀)이라는 뜻을 지닌 마우리야(Mauriya)를 국호로 택했다. 찬드라굽타는 난다 왕국도 정복했으며 기원전 322년에 스스로 왕위에 올라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했다. 찬드라굽타는 인도의 마키야벨리라는 신하 까우띨리야의 보필에 힘입어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마우리야 왕조가 인도 대륙을 통일한 것은 아리안의 도래 이후 선주민이었던 드라비다인들과 아리안들의 갈등에서 아리안들의 완전한 승리와 외세에 대한 인도인의 독립을 뜻하고, 이를 계기로 아리안들이 완전히 인도 대륙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아쇼카 왕(B.C.273∼232)은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아쇼카 왕은 남부 타밀 지역을 제외하고는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동부, 북쪽으로는 카시미르·네팔, 동쪽으로는 칼링가까지 정복하는 등 마우리야 왕조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아쇼카 왕은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했으며 주변의 국가들을 병합하기 위한 전쟁을 했다. 기원전 261년 칼링가 국을 무력으로 정벌하면서 전쟁의 잔인함을 직접 경험하게 되어 정복전쟁 포기 선언을 했다. 이로서 아쇼카 왕은 이민족이나 다른 국가를 공격할 만한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포기하고 평화롭게 지낼 것을 자발적으로 선언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왕이 되었다.

 

집권 초기에 자이나교 신자였던 왕은 불교에 귀의해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으며 인도 역사상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최초의 왕이 되었다. 왕은 자신이 신앙하는 진리를 국민들이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해 법칙을 발표해 암벽이나 석주에 새겨 놓았다.

 

법칙의 내용은 깊은 사상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살생 금지, 수렵 폐지 같은 국민에 대한 도덕적 훈계들이었으며, 특히 법대관(法大官)을 설치해 종교적으로 평등정책을 펼쳐서 불교뿐만 아니라 브라만교·자이나교·아지비카 등 다른 종교들도 동시에 보호하였다.

 

아쇼카 왕의 불교와 관련한 중요한 치적으로는 불전의 제3차 결집과 전도사의 파견을 들 수 있다. 제3차 결집의 내용에 대해서는 파알리어로 기록된 남전의 자료들과 한문으로 기록된 북전의 자료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 남전으로 전하는 불전의 제3차 결집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쇼카 왕으로부터 후원을 받은 승가에 6만의 외도가 들어와 7년씩이나 포살을 하지 않는 등 불교 교단이 크게 타락하자, 아쇼카 왕이 이런 혼란을 막고자 아호강가에서 목갈리풋타티사를 초청해 분별설 이외의 비정통들을 모두 교단에서 추방하고 천 명의 아라한을 모아 《논사(論事, Kath vatthu)》를 지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북전에는 근본분열을 대천(大天, Mahadeva)과 관련된 승가의 논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쇼카 왕의 불교와 관련된 업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 세계화의 초석을 다지는 계기가 된 전도사의 파견이다. 아쇼카 왕은 외국으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작업을 한 최초의 왕이었다.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은 남방 상좌부 불교의 성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해당 지역의 전설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역사적 기록에 의한 것이든 남방 상좌부 불교가 성립되는 최초의 사건들은 이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과 관련이 있다. 전도사의 파견은 아홉 차례에 걸쳐 있었다. 여덟번째는 미얀마, 아홉번째는 스리랑카와 관련이 있다.

 

여덟번째로 파견된 소나 스님은 웃따라 스님과 함께 ‘황금의 땅’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저지 미얀마인 수완나부미에 갔다. 당시 미얀마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궁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기만 하면 바다에 있는 공포의 여신이 죽였다. 그들이 저지 미얀마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저들은 공포의 여신의 친구들 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는 그들을 죽이기 위해 무장을 하고 왔다.

 

“무슨 일입니까? 우리는 그 여신의 친구가 아니고 불법을 열심히 수행하는 수행자입니다.” 소나 스님과 웃따라 스님이 함께 말했다. 그때 바다에서 공포의 여신이 부하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들을 본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스님은 그 여신과 부하들의 두 배가 되는 수의 신을 만들었다. 그녀는 ‘이 나라는 필시 이 사람들의 소유구나.’라고 생각하고는 하늘로 날라 갔다. 스님들은 그 자리에 성을 만들고 《범망경(梵網經, Brahmaj la sutta)》을 설했다. 많은 사람들이 귀의하고 오계를 수지하였다. 육만 명이 불법을 믿기 시작했고 삼천오백 명에 달하는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야의 아들과 천오백 명의 딸들이 출가하였다.

 

2) 스리랑카 상좌부 불교의 역사
아쇼카 왕이 아홉 번째로 전도사를 파견한 곳이 스리랑카이다.
스리랑카의 불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주로 전설에 기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접근하는 것이다. 전설에 기초하는 스리랑카의 불교는 그 섬의 주인으로서 싱할라(Sinhala, 사자의 후예라는 뜻)족들이 가지고 있는 불교 지향적인 생각이다. 이에 대한 내용이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나, 《소사(小史)》나 《대사(大史)》 같은 역사서들에서 전하는 스리랑카의 개국설화에 잘 나타나 있다.

 

탐바파니(Tambapa  i, 銅常島라 번역되며 항상 보물이 있다는 뜻)라고 불리던 곳에 싱할라들이 나라를 세운 것은 기원전 543년이다. 이 기원전 543년이 전설이든 역사적 사실이든 그 연도를 남방 불교국가에서 주장하는 석가모니 붓다의 입멸 연대와 같은 해로 함으로써 싱할라 자신들이 붓다의 후예라는 사실을 내외적으로 확인하려는 것이다. 즉 스리랑카의 조상이라고 여기고 있는 스리위자야가 일단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인도로부터 스리랑카 섬으로 건너감으로써 시작되는 스리랑카의 역사가 석가모니 붓다가 열반한 해와 일치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스리랑카 인들에게 아주 강하게 각인되어 정신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고 정체성을 찾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불교와 관련된 또 다른 전설은 석가모니 붓다가 재세시 스리랑카를 세 번 방문했다는 것이다. 그 지역은 마히앙가나·켈레니아·스리파다라고 하지만, 석가모니 붓다의 일생을 볼 때 스리랑카를 방문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하지만 이 주장을 통하여 싱할라들은 석가모니 붓다가 특별히 자신들에 대해 친근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다음은 역사서에 입각한 정통 불교 교리 발달 및 불교 전래의 입장이다. 아쇼카 왕이 스리랑카에 파송한 전도사는 마힌다 장로이다. 그는 아쇼카 왕의 아들로서 왕자의 신분을 포기하고 스님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4명의 비구·우바새와 함께 스리랑카의 최초의 수도이고 2600년 고도인 아누라다푸라에서 약 13Km 떨어진 산정상의 조그만 석굴에서 수행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후에 마힌다 장로를 받아들인 곳이라는 의미의 미힌탈레(Mihintale)라고 이름지어졌다.

 

당시 축제기를 맞이해 그곳으로 사냥을 나왔던 스리랑카의 왕 데와남피야 티싸는 숲속에서 수행하는 이들을 보고는 사냥을 포기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불교에 귀의하게 되니, 이 날이 포손 포야(Poson Poya)인 양력 유월의 만월일(滿月日), 즉 음력 5월 15일이다. 마힌다 장로 일행을 맞아들인 데와남피야 티싸는 아누라다푸라에 마하위하라(Mah vihara, 大寺)를 지어 수행 장소로 제공하고 포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으며 동시에 많은 이들을 귀의시키니, 이것이 스리랑카 불교의 시작이다.

 

이듬해 마힌다 장로의 누이인 상가미타 비구니가 인도의 붓다가야에서 보리수 나무를 가지고 와서 아누라다푸라에 심으니 그 보리수 나무는 살아있는 붓다로서 지금까지도 스리랑카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마힌다 스님의 도래에서 비구 승단이 시작되었으며 상가미타 비구니의 도래에서 비구니 승단이 시작되니 명실공히 제 모습을 갖춘 승단의 활동이 스리랑카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순조롭게 시작된 스리랑카 불교는 토착화에도 성공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1세기에 건립된 아바야기리위하라(Abhayagirivihara, 無畏山寺)의 스님들이 왕이 자신들을 총애하는 것을 기회로 그 동안의 스리랑카 불교를 이끌어 왔던 대사파(大寺派)와 다른 방법의 수행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정법이 아닌 비법적인 행위를 공공연히 자행하게 되었다.

 

이렇듯 별도의 부파가 발생하자 이런 상황을 염려했던 대사파의 스님들이 기원전 1세기에 구전되던 불전의 문자화를 통하여 교의의 왜곡을 방지하고자 스리랑카 중부에 있는 알루위하라(Aluvih ra, 새 절이라는 뜻)에서 종려나무 잎에 파알리 경·율·논 삼장을 문자로 새겼다. 이것이 현존 상좌부 불교의 소의 경전인 파알리 삼장의 완성이다. 이는 당시의 왕이었던 왓타가마니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승단의 의지와 일부 재가자들의 보시의 힘으로 이룩된 것이다.

 

이 시기에 인도로부터 넘어온 독자부(犢子部) 계통의 담마루치 장로는 무외산사에서 불법을 폈으며 이들에 대해 대사파는 상좌부의 분별설부(分別說部)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스리랑카 불교의 정통 맥을 이어왔다. 서기 3세기 인도에서 건너온 또 다른 계파인 대승계통의 방광파(方廣派)의 스님들이 다시 무외산으로 들어와서 머물다가 일부가 그곳을 떠나 다른 파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기타림사파라고 한다. 기타림사파가 완성된 것은 4세기 초이며, 이로써 스리랑카의 불교는 대사파·무외산사파·기타림사파의 세 개의 파로 나뉘어진다.

 

그 후 지속적으로 대사파와 무외산사파가 대립하는 가운데 8세기 전반 인도로부터 대승 불교 특히 밀교가 전래되기도 하였으나 그 세력은 미약하였다. 굽타 왕조가 쇠퇴하면서 다시 세력을 구축한 드라비다인의 촐라 왕조는 지속적으로 스리랑카를 침입하였고, 이 침입으로 고도 아누라다푸라는 폐허가 되고 수도를 폴론나루와로 옮겼다. 이때는 스리랑카 내부가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해 불교의 발전 역시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이런 혼란 때문에 승단 역시 쇠퇴하였다.

하지만 남인도의 촐라인들을 격퇴한 위자야바후 1세(1059∼1113)는 11세기 말 버마(지금의 미얀마)의 스님을 초빙하여 스리랑카의 승단을 부흥시켰다. 12세기 중엽(1153∼1186)에 쁘락크라마바후 1세는 대사파·무외산사파·기타림사파의 타락한 스님들을 강제로 환속시키고 대사파를 정통으로 삼았으며 승단이 대사파의 계율을 따르게 했다. 이로 인해 무외산사파와 기타림사파는 부정되고 그 세력을 잃었으며, 10세기에 걸쳐 진행되었던 계파간의 갈등은 완전히 끝이 나고 현재의 정통 상좌부 불교로의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말하고 있는 상좌부 불교는 아쇼카 왕의 아들 마힌다 장로에 의해 전해졌던 모습 그대로라고 하기에는 다소간의 무리가 있다. 중간에 무외산사파나 기타림사파 스님들에 의해 비법이 자행된 경우가 많으며 그런 것들을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방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12세기 중엽(1153∼1186)에 쁘락크라마바후 1세에 의해 대사파 중심으로 정리된 스리랑카의 승단은 정통 상좌부 불교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노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3) 미얀마 상좌부 불교의 역사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된 역사도 그렇지만 미얀마에 불교가 전래된 것 역시 실증적인 면과 전설에 의지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9세기에 석가모니 붓다의 종족인 석가족의 아비라자가 석가족의 근거지였던 카필라바스투에서 미얀마로 건너와 미얀마 최초의 국가인 타가웅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 후 고타마 싯다르타가 득도하여 석가모니 붓다가 된 후 미얀마의 레가인, 슈세트, 프롬 등의 지역을 돌며 설법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석가모니 붓다가 재세시에 인도 이외의 나라를 방문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이런 전설은 스리랑카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얀마인들에게도 석가모니 붓다의 후예라는 자긍심을 심어 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불교가 전승되어 올 수 있는 것은 물론, 인도에서 굽타 왕조 이후 힌두교의 부흥으로 인하여 불교와 사원이 곤란을 겪고 있을 때 아주 긴 기간 동안 미얀마의 왕실이 인도에 있는 사원과 승단을 위하여 각종 물질적인 것들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미얀마의 상좌부 불교는 버마족의 영웅 아노라타 왕(1044∼1077)이 미얀마 최초의 통일 왕조를 세우면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의 미얀마는 스리랑카와 유사하게 대승 불교는 물론 밀교까지 들어와 퍼져 있었다. 하지만 아노라타 왕은 통일을 이룬 후 불교 혁신 운동을 펼쳤다. 1057년 아노라타 왕은 몬의 수도 타톤을 공격하는 데 타톤을 공격한 이유 중 하나는 바른 승단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타톤을 정복하여 몬의 왕이었던 마누하까지 포로로 삼았던 아노라타 왕은 몬의 고승이자 아라한과를 증득했던 싱의 협력을 받아 파알리어 삼장은 물론 주석서들을 파간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아라한 싱을 따르던 500여 스님들도 파간으로 받아들여 빠알리어 삼장을 중심으로 불교를 연구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미얀마 상좌부 불교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파간 왕조 시대에 뿌리를 내린 미얀마 상좌부 불교는 그 주변 특히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와 빈번한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힌두 중심의 촐라인들을 내몰고 불교를 부흥시켜 상좌부 불교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위자야바후 1세(1059∼1113)의 스리랑카와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때 미얀마에서는 빠알리 삼장은 물론 흰 코끼리 1마리를 기증하였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스리랑카로부터 붓다의 전골사리(全骨舍利)를 받았다. 1180년 웃다라지와 스님은 직접 스리랑카로 가서 정통 상좌부를 수학하고 미얀마로 돌아왔으며 그는 파간 북부 냐옹유에 스리랑카 양식의 사원을 건립하고 새로운 승단을 설립하였다.

1287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파간 왕조가 멸망한 후 약 2세기 가량 군웅할거 시대가 지속되었다. 이 군웅할거의 시대는 산 족이 중심이 되어 페구와 아바를 각기 수도로 하는 두 개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이때 페구를 수도로 하였던 라만야데사의 담마체띠 왕(1472∼1492)은 출가 경력을 지닌 왕으로 ‘붓다라자(Buddharaja, 불교왕)’라 불리웠다. 1475년 담마체띠 왕은 차트라두타와 라마두타 2인의 정부 각료와 목갈라하나, 마하시발리 등 22명의 장로로 구성된 대규모의 파견단을 스리랑카로 파견하였다.

이 당시의 파견단은 불치(佛齒)에 공양할 선물과 미얀마의 왕이 스리랑카의 장로들에게 올리는 선물들을 가지고 갔다. 이들은 스리랑카의 켈레니야 강의 선상에서 스리랑카의 망갈라 장로를 전계사로 하여 구족계를 받았으며, 스리랑카에서 제공하는 불치의 모조품, 보리수 나무의 가지·잎·종자, 스리랑카 불교 정화의 역사를 기록한 서적, 스리랑카 장로들의 편지, 게송 등 많은 선물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특히 쁘락크라마바후 1세에 의해 대사파 중심으로 정리된 스리랑카의 승단의 율법을 가져왔다.

이들이 귀국하자 담마체띠 왕은 도성의 근교에 여법한 도량을 갖추고 미얀마 내의 많은 젊은이들을 득도시켰다. 이 도량의 이름을 ‘켈레니야 도량’이라 하였고, 그 수계작법을 라마냐데사 수계작법이라 하였는데 그 수계작법을 이용하였던 파를 ‘라마냐파(Rama  a Nik ya)’라 하였다. 라마냐파는 남방 상좌부 불교의 한 종파로서 지금까지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의 스리랑카에도 라마냐파가 존속하고 있다.


4) 타이(태국) 상좌부 불교의 역사
그 기원이 뚜렷치는 않으나 타이의 역사는 수코타이 왕조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초기에는 대승 불교와 힌두교 등 여러 종류의 종교가 혼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스코타이 왕조는 미얀마의 아노라타 왕이 채택했던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여 상좌부 불교 중심의 수행을 하기 시작하였지만, 상좌부 불교가 타이에서 뿌리내린 것은 14세기 후반 라마디파티 1세를 시조로 하여 기존의 수코타이 왕조를 병합한 아유타야 왕조 시절이라 할 수 있다.

미얀마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기까지 4백여 년을 유지했던 아유타야 왕조의 시리스리야반살마 왕은 1361년 스리랑카로 사신을 파견해 스리랑카 대사파의 가르침을 이어 받았다. 이때 스리랑카로부터 장로가 될 만한 스님은 물론 빠알리어 불전과 스리랑카 불교의 각종 의식 및 예법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국교로 삼았다. 이것이 타이의 상좌부 불교의 진정한 효시라 할 수 있다.

특히 1750년 스리랑카에서 내부적으로는 왕권의 비불교화로 인한 승단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과 외부적으로는 스리랑카의 일부를 지배했던 네덜란드와 가톨릭 세력에 의한 탄압으로 승단의 법맥이 끊기자 타이의 상좌부 불교 교단의 스님들이 스리랑카로 가서 스리랑카의 법맥을 부활시켰는데, 그 승단의 이름이 당시 타이의 국명이었던 씨얌파(Siyam Nik ya)이었으며 현재 스리랑카 최대의 승단이다.


3. 남방 상좌부 불교의 기복 의식, 피릿

최근 기복 불교를 논하는 과정에서 일부 논자들은 스리랑카를 위시한 남방 상좌부의 불교는 기복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기복적이라 함은 어느 절대적인 것에 의해 신행이 좌우되지 않으며 또 그 신행의 결과 또한 철저히 자주적이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할까? 사전적 의미로 본다면 기복(祈福)은 ‘복을 빔’ 또는 ‘복을 내려 주기를 기원하는 일’이며 기복과 상대가 되는 말이라 할 수 있는 작복(作福)은 ‘스스로 복을 만든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면 상좌부 불교에는 기복적인 요소가 없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남방 상좌부 불교에도 분명 기복적인 요소와 의식이 있다. 일부의 주장대로 상좌부 불교가 기복적이지 않다고 한다면 상좌부 불교를 수행하는 이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이미 붓다의 경지를 증득했거나, 그 경지에 가까이 가 있는 이들이 되어 있거나,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법이나 윤리 도덕이 필요없는 지역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일부에서는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 세속적인 문제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남방 상좌부 불교권의 국가에도 살인과 도둑질, 간음 등 도덕적 해이는 있으며 여느 일반 사회와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사회 일반적인 요소 말고 빠알리 경전 내부에도 역시 기복적인 요소가 설해지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피릿(pirit) 의식이다. 피릿은 ‘보호’ ‘안전’ ‘수호’ ‘주문’ ‘부적’ ‘호주(護呪)’ ‘호경(護經)’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빠알리어 빠릿따(paritt )나 싼스크리트어 파리뜨라(paritra) 또는 파리뜨라아나(paritr na)가 변한 말이다. 이 의식은 브라만교의 락샤나 만트라(Raksha a Mantra)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하나 빠알리 경전에서 유일하게 타력적인 방법을 통하여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석가모니 붓다가 인정한 의식으로 붓다 역시 이 의식을 행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붓다 생존시 인도의 리차비(Licchavi) 족이 살고 있던 베살리 지방에서 질병과 기근이 성하고 많은 사람들이 악령에 시달리고 있을 때, 붓다가 이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피릿 의식의 경전들을 암송하여 이 지역의 사람들을 재난으로부터 보호하였다고 한다. 태국에서는 미얀마나 스리랑카에 비하여 덜 성행하는 의식이지만 스리랑카에서는 제사 대신으로 이 의식을 시행하기도 하고 각종 사업을 시작할 때나 먼 여행을 할 때에도 이 의식을 행하고 있다.

피릿에 대한 경전적인 근거는 파알리 불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으나 다른 의식들에 비해 많이 소개되는 편은 아니다. 그 이유는 상좌부 불교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자력을 통한 궁극적인 삶에 도달하는 것이 우선이어서 이 의식에 관해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과, 스리랑카나 미얀마의 경우 설사 재가 신도라 하더라도 구과에 이르기 위한 수행을 열심히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피릿 의식은 빠알리 율장(律藏, Vinaya Pi aka) 《소품(小品, Culla Vagga)》에 ‘개인적인 보호(personal protection)’라는 구절과 율장 《경분별(經分別, Suttavibha a)》에 ‘만일 수행자가 보호를 위한 주문을 배운다면’이라는 구절로 소개되어 있다. 경장(經藏, Sutta Pi aka)에서는 《앙굿따라 니까아야(Anguttara Nik ya)》에 ‘보호하는 주문’과 ‘쌓임, 즉 온(蘊, Khandha)을 보호하는 주문’, 즉 ‘온호주(蘊護呪)’라는 뜻의 ‘칸드하파릿따(khandhaparitta)’가 나오며 《쿠타카 니까아야(Khuttaka Nik ya)》의 《자타카》에는 ‘주문에 의한 보호’와 ‘벽지불을 통하여 그들을 보호하게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빠알리어로 쓰여졌으면서도 5부(五部) 니까아야에는 속하지 않는 《밀린다팡하(Milinda-panha)》에 의하면 ‘사마(死魔)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피릿 의식이 필요하다고 설해져 있다.
이외에도 피릿에 관한 기록은 《위수디막가(Vissudhimagga)》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4. 나오는 말

지금까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의 남방 상좌부 불교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까지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스리랑카나 미얀마의 불교 전통은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에서 기원한다. 그만큼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스리랑카를 포함한 남방 상좌부 불교가 부처님 당시의 불교와 다르지 않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스리랑카나 미얀마의 상좌부 불교 또한 수많은 역사적 질곡을 거쳐서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때로는 그들 국가나 불교의 내적인 문제 때문에, 때로는 이슬람이나 서구 제국의 침입같은 외적인 원인 때문에 그 원형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고, 그 원형의 복구를 위해서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남방 상좌부 불교 또한 변형과 왜곡 그리고 전통의 재건을 위한 노력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형화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남방 상좌부 불교가 아쇼카 왕의 전도사 파견을 기원해서 성립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강점이다. 한자문화권의 북방 대승 불교보다는 훨씬 부처님 시대의 원형에 가까운 불교를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처음 수용한 원형의 보존을 위해서 꾸준히 노력해왔다. 이러한 점에서 북방 대승 불교보다 훨씬 더 부처님 시대의 원형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은 인정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남방 상좌부 불교에 기복은 없고 작복만이 있다는 식의 현실을 도외시한 일부 연구자들의 일방적인 옹호론은 수정되어야만 한다. 동시에 단순히 대승 불교가 아니기 때문에 소승이라는 식으로 폄하했던 일방적인 단견도 수정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들이 가진 장점과 단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진정한 대승적 관점을 통해서만이 현대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불교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송위지 
한국 외국어 대학교 경영학과 및 스리랑카 국립 케레니야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현재 서울 보건대 교수. 논문으로 <팔리 사티파타나 숫타와 한문 염처경에 대한 비교 연구><존재의 분석으로서의 염처>등이 있다. 




남방 상좌부 불교의 수행체계 (출처 :  불교평론 13호)
김재성(metta@sutra.re.kr)
  

::::: 목 차 :::::

1. 머리말
2. 현대 스리랑카의 수행 전통
3. 태국불교의 수행 전통
4. 미얀마 불교의 수행 전통
5. 맺는 말

 

1. 머리말
현재 우리 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명상 수행법들을 다양한 목적으로 행하고 있다. 요가, 아봐타, 마음수행법, 단전호흡 등이 자주 들리는 명상법이다.

그리고 불교 수행법으로 대표적인 것은 고려시대에 정착된,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간화선 수행법과 간화선에서 파생되어 나온 염불선 그리고 10여 년 전부터 남방 상좌부 불교의 수행법으로 전해진 위빠사나 수행법이 있다. 이처럼 다양한 명상법 가운데에서 본 고에서는 우리에게 알려진 위빠사나 수행법을 중심으로 현재 남방 불교에서 행해지는 수행법에 대해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를 중심으로 한 대표적인 상좌부 불교권의 수행 전통에 대해서 1997년도에 열린 ‘열린 세계에 있어서 세계승가공동체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학술회의를 통해서 정리 발표된 적이 있다. 당시 스리랑카에서 유학 중이던 일중 스님이 스리랑카 불교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필자는 태국과 미얀마불교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두 논문을 바탕으로 하여 상좌부 불교의 수행 전통에 대하여 정리해보며, 특히 현재 수행 전통이 가장 활발하게 전해지고 있는 미얀마의 수행 전통을 자세히 고찰해본다.

 

2. 현대 스리랑카의 수행 전통

스리랑카는 20세기가 되면서 승가와 재가 사이에서 승가 개혁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48년에 오랜 식민 통치로부터 독립을 하고, 2500년 붓다 자얀티 기념 행사(1956)를 전후로 하여 싱할리 민족은 전통 문화와 불교 부흥에 대한 관심이 최고로 고조되었다. 이때 스리랑카 불교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숲속 수행 전통(아란냐와시) 부흥 운동과 위빠사나 명상 운동이 미얀마 불교의 영향으로 승가와 재가 속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숲속 수행 전통 부흥 운동은 마을 거주(가마와시) 승려들에 대한 반대 입장을 띠고, 승가를 초기 불교의 이념에 맞도록 개혁하고자 했으며, 숲속에 거주하면서 수행에 전념, 수행 전통을 부흥하자고 했던 운동이다. 이 운동의 주요 인물들은 빤냐난다(Pa   nda), 지나왕사(Jinavamsa), 냐나난다(N nanda), 냐나라마(  nar ma), 따빠사 히미(T pasa Himi) 등의 여러 스님들인데, 일부는 재가인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승가 조직을 재구성했으나 오래 지속시키지 못하고 실패했으며, 일부는 초기 불교의 근본 정신에 입각한 체계적인 승가를 구성하여 재가인들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서 새로운 아란냐와시 수행 전통을 만들어 가고 있다.

위빠사나 운동은 1950년대 재가 불자 지식층이 중심이 되어 시작했다. 처음으로 ‘랑카 위빠사나 수행회’라는 모임을 조직하여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에게 수행 지도자를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마하시 사야도의 제자 우 수자타(U Suj ta) 스님 외 3명이 파견되었고, 이어서 콜롬보에 수행 센터가 설립되었다. 이 위빠사나 수행의 근거는 초기경전인 《대념처경》에 두고 있었다.

1950년대 전후로 일어났던 스리랑카 승단의 승가 개혁(아란냐와시 부흥 운동) 운동과 위빠사나 수행 운동의 결과로 새로운 숲속 수행처(아란냐)와 명상 센터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몇 개의 아란냐 지파들이 형성되었다. 아란냐와시 부흥 운동을 추진하여 성공했던 승려들의 수행법을 살펴본다.


스리랑카 승가의 수행법
스리랑카 승단에서는 그들 나름대로 수행 방법들을 모색하여 실천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대략 네 가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첫째, 경전과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에 의거한 수행 방법
둘째, 전적으로 경전에만 의거한 수행 방법
셋째, 미얀마의 마하시 수행 전통을 따르는 방법
넷째, 위의 세 가지를 적절하게 수용하는 방법


남방 상좌부 불교의 수행법은 크게 사마타(Samatha; 止)와 위빠사나(Vipassan  觀)의 두 가지로 대표된다. 사마타(Samatha)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시키는 수행이다. 사마타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위한 준비이며, 전제 조건이다. 《청정도론(Visuddhimg-ga)》에서는 사마타 수행 주제(Kamma  h na)로 40가지가 열거되어 있으며, 수행자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수행 주제들이 제시된다.
위빠사나 수행은 장부 22경인 《대념처경》에 설해져 있는 수행법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 경전에서는 네 가지의 마음챙김, 즉 사념처를 제시하고 있으며, 마음챙김(sati)의 대상으로 몸·느낌·마음·법(身受心法) 네 가지를 반복해서 관찰하는 방법을 설하고 있다. 사념처 수행을 바탕으로 해서 위빠사나 수행이 행해지므로 사념처 수행자체가 위빠사나 수행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사마타와 위빠사나(止觀)에 의거하여 스리랑카에서 실천되고 있는 수행 방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상좌부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수행법이자 가장 보편적인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나빠나사띠( n p nasati; 入出息念)와 사띠빳타나(Satipa  tth na; 四念處) 수행법, 그리고 붓다누싸띠(Buddh ussati; 佛隨念), 멧따 바와나(Metta Bh an  慈觀), 아수바 바와나(Asubha bh an  不淨觀), 마라나사띠(Mara asati; 死隨念) 등을 수행하고, 드물긴 하지만 둥근 원판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법인 까시나 바와나(Kasi a bh an  遍觀)도 실천하고 있다. 이 방법들은 수행승 개개인의 근기에 따라서, 또는 장소와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바꾸면서 실천하고 있다.

아란냐 수행승들이 수행의 근거로 하고 있는 소의경전은 위에서 언급했던 장부의 《대념처경(大念處經, Mah atipa  h a Sutta)》, 중부의 《염처경(念處經, Satipa  h a Sutta)》, 《입출식념경(入出息念經,   nasati Sutta)》가 있고, 그 밖에도 초기경전에 산재해 있는 수행과 관련된 경전들이 있다. 또한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과 위에 열거했던 경전들의 주석서들, 그리고 미얀마의 유명한 선지식 가운데 한 분이셨던 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과 태국의 아잔 차 스님의 가르침도 수행의 지침서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수행의 전통이 부활되어 스리랑카에서도 전통적인 수행법이 행해지고 있지만, 미얀마나 태국의 수행 전통과 비교해보면 수행 전통이 약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잭 콘필드가 저술한 12명의 상좌부 불교 수행지도자의 가르침을 소개한 책(Living Dharma) 가운데 스리랑카 출신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이 이 사실을 반증하는 자료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두 차례 직접 스리랑카의 아랸야 수행처를 조사하고 느낀 것도, 소수의 승려들이 숲속에서 수행하고 있고, 몇몇 수행처에서 마하시 전통의 위빠사나가 행해지고 있었는데, 태국이나 미얀마에 비하면 그 규모가 작고 일반 신자들이 수행처에서 수행하는 경우도 그다지 많지 았았다. 하지만, 초기경전을 바탕으로 한 수행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은 스리랑카 불교의 하나의 원동력이 되고 있음도 사실일 것이다.

 

3. 태국불교의 수행 전통

1) 지역별 수행 전통
태국은 크게 네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동북부 지역·북부 지역·남부 지역·방콕을 포함한 중부 지역의 네 지역이다. 각 지역에 따라서 수행의 전통에도 각각의 특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Weir도 지역별로 수행 도량을 분류하고 있고 태국에서는 위의 네 지역을 중심으로 수행 전통을 살펴본다.

(1) 동부 지역
태국의 동부 지역은 아찬 먼(Ajahn Mun, 1870∼1949)8)에 의해서 부활된 숲속의 수행 전통(Forest Practice Tradition, dhuta a)이 지금도 강하게 남아 있는 지역이다. 동북부 지역에서는 아찬 차(1918∼1992)의 주요 활동 지역이었던 동북 지역의 중심 도시인 우본 라차타니를 중심으로 조사했다.

미얀마의 수행 전통인 마하시 수행법을 가르치는 수행 도량을 제외한 태국의 다른 대부분의 수행 도량과 같이, 아찬 차의 가르침이 전해지는 동북부 지역의 대부분의 사원에서는 정해진 수행 기간이나 수행 시간이 따로 없으며, 따라서 수행만을 위한 전문 수행 센터라기보다는 승원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승려 생활을 익히면서 수행을 하는 수행 도량이라 할 수 있다. 수행은 개인의 문제로 자유로이 수행의 방법이나 수행 시간을 자신이 정해서 수행한다. 보통은 하루 8시간의 수행을 하며, 좌선이 4시간 행선(行禪, 걷는 수행)이 4시간 정도이다. 수행법은 주로 호흡을 관찰하는 입출식념이 행해진다.

(2) 북부 지역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한 태국 북부 지역은 동북부 지역과는 달리, 마하시 사야도의 위빠사나 수행법(修行法)을 위시한 미얀마의 수행법이 많은 사원과 수행 센터에서 행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수행처로는 왓 람 뻥(쁭) 북부 위빠사나 수행 센터(Wat Ram Poeng Northern Vipassana Meditation Center)를 들 수 있다. 왓 우 몽(Wat U Mong)과 같이 태국 남부의 수안 목(Suan Mokkh)의 아찬 붓다다사(Ajahn Buddhad a)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하는 사원도 있다.

(3) 남부 지역
태국 남부 지역에는 수행 센터가 그리 많지 않다. Weir의 책(1991)에도 세 곳만이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태국 남부에서의 대표적인 사원이며 수행 센터로서는 아찬 붓다다사(Ajahn Buddhada?a, 1906∼1993)가 창설한 수안 목(Suan Mokkh)이 유명하다.

아찬 붓다다사는 《입출식념경(入出息念經)》(中部 118經 MN III, pp.78∼88)에 따라 수행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입출식념경(入出息念經)》에는 호흡에 대한 마음 챙김(出入息念)에서 네 가지 마음 챙김(四念處)으로 수행이 향상되며, 다시 네 가지 마음 챙김 수행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로 이어지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에 의해서 지혜(明, vijja)에 의한 자유(解脫)를 이루게 된다는 구체적인 수행의 단계가 조리 있게 설해져 있다. 아찬 붓다다사는 수행의 단계를 16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이 경전이야말로 실제적인 수행법이 제시된 유일한 경전이라고 한다. 입출식념에 근거한 수행법은 여러 수행의 전통에서 볼 수 있지만 아찬 붓다다사의 설명처럼 구체적인 수행의 단계가 제시되지는 않는다.

(4) 방콕 및 중부 지역
방콕에서는 두 곳의 사원을 방문하였고, 중부 지역에서는 네 곳의 수행 도량을 방문하였다.
방콕 시내에 있는 왓 마하 타트는 18세기에 창설된 이래, 태국불교의 중요한 센터로서 기능해 온 사원이다. 이 사원에서 수행을 지도하고 있는 곳은 Section 5이다. 이곳에서 지도하는 수행법은 미얀마의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법이다.

방콕 교외에 위치한 왓 팍 남(Wat Pak Nam)에서는 이 곳의 원장이었던 프라 몽콜 텦무니(Phra Mongkol Thepmuni, 1884∼1959)가 창안한 이른바 담마카야 수행법이 행해진다. 담마카야 수행법은 수정을 사용한 광명편(光明遍, loka-kasina)을 수행하면서 ‘삼마 아라한(Samma Arahan)’을 마음 속으로 염하는 불수념(佛隨念, Buddh nussati) 수행을 보조적인 방법으로 행하는 수행법이다. 광명편으로는 무색 투명한 수정을 정신 집중의 대상(nimitta)으로 사용하는 것에 특색이 있다. 이 수행법은 담마카야 사원(Dhammaka?a Foundation)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태국에서 마하시 위빠사나가 본격적으로 지도된 곳은 위웨크 아좀 위빠사나 수행 센터(Wiwek Asom Vipassana Meditation Center)이다. 방콕에서 남쪽으로 약 60km 떨어진 촌부리(Chonburi)라는 도시에 위치한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 센터의 태국 지부의 하나이다. 원장인 아찬 아사바(Ajahn Asabha)는 미얀마 스님으로 1953년, 태국 정부가 미얀마 정부에 공식적으로 위빠사나를 지도할 스승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파견된 마하시 사야도의 직제자이다.

왓 사이 감은 방콕에서 북서 방면으로 110km 떨어진 논으로 둘러 쌓여 있는 수행 센터이다. 1970년대에 현재의 원장 아찬 담마다로(Ajahn Dhammadharo, 1914∼ )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아찬 담마다로의 수행법은 위빠사나이지만 그의 수행법은 손바닥을 편 채로 손을 상하로 움직이면서 손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관찰하는 점에 특색이 있다. 1954년 이래 아찬 담마다로는 자신이 결과를 얻은 수행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찬 담마다로의 수행법은 《대념처경(大念處經)》의 신념처에 설해져 있는 정지(正知, sampajan??)11)를 중시한다고 한다. 특히 (팔·다리를) 구부리는 동작과 펴는 동작을 할 때 분명한 앎(正知)을 지닌다는 구절에서 아찬 담마다로의 수행법의 경전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자신의 경험에 의한 수행법이라도 경전에 근거하고 있지 않은 수행법은 상좌부 불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을 이곳의 수행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 수행 전통의 분류
태국불교의 수행 전통을 분류하면, 동북부 지역의 아찬 먼에 의한 부활된 숲속의 수행 전통과 남부 지역의 아찬 붓다다사에 의해 제시되는 수행법이 기본적으로 입출식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마하시 수행법에 의한 위빠사나와 왓 사이 감의 아찬 담마다로의 정지(正知)에 중점을 둔 위빠사나 수행법이 《대념처경》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으며, 선정 수행을 전제로 하지 않는 순수 위빠사나라고 하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태국의 수행법 가운데 가장 독특한 수행법은 담마카야 수행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응용된 광명편(光明遍, loka-kasina) 수행과 사념처 수행 등이 어울려져 새롭게 창안된 수행법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재 태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수행법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입출식념에 기초를 둔 수행법으로 동북 지역의 숲속의 수행 전통과 아찬 붓다다사의 수행법이 여기에 분류될 수 있다.
② 사념처에 바탕을 둔 순수 위빠사나 수행 전통으로 마하시 수행법과 아찬 담마다로의 수행법이 여기에 분류된다.
③ 담마카야 수행법으로 기본적으로 선정과 지혜를 닦는 과정을 거치지만, 수정을 사용한 광명편 수행과 18 단계의 신체설 등은 다른 수행법에서는 예를 볼 수 없는 독특한 수행법임을 알 수 있다.

 

4. 미얀마 불교의 수행 전통

1) 두 가지 수행 전통
현재 남방 상좌부 불교국에서 승려는 물론 일반 재가자에게 수행의 전통이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는 나라는 미얀마이다. 미얀마의 전국 각지의 수많은 수행 센터에서 다양한 수행법이 사부대중(四部大衆)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다. 위빠사나로 통칭되는 수행 전통이 대중화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시작되었고, 활발하게 일반인들이 수행을 접하게 된 것은 불과 50여 년 전부터이다.

미얀마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수행법은 크게 나누어 레디 사야도 계통의 수행 전통과 마하시 사야도 계통의 수행 전통의 두 갈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1)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 전통
먼저 마하시 수행법의 연원과 수행법에 대해서 정리를 해본다. 마하시 사야도의 수행의 스승은 밍군 제타완 우 나라다(Mingun Jetavan U Narada, 1868∼1954) 사야도(이하 밍군 사야도)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하시 수행법의 창시자는 마하시 사야도의 스승인 밍군 사야도이지만, 이 수행법을 미얀마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분이 마하시 사야도이기 때문에 마하시 수행법 또는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법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20대 후반에 교학만으로는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부족하다고 느낀 후, 스스로 수행의 지침을 삼을 경전으로서 《대념처경(大念處經)》을 자세히 연구하면서 실제 수행을 지도할 스승을 찾는다.

그러던 중에 과정(果定)을 얻었다고 전해지는 티 론 사야도(Thee Lon Sayadaw, U Sandimar)의 수행법을 계승하고 있는 밍군 사야도가 《대념처경》에 의거해서 개인적으로 위빠사나를 지도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4개월간 용맹 정진을 한다(1932년, 28세). 이후 다시 자신의 본사로 돌아온 마하시 사야도는 위빠사나 수행보다는 교학을 지도하기 시작한다. 마하시 사야도가 위빠사나를 본격적으로 지도하기 시작한 때는 1938년 고향인 세익쿤(Seikkhun)으로 돌아와서 부터이다. 위빠사나를 지도하면서 1941년에 실시된 법사 과정 시험을 통과하여 교학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1944년에 858쪽에 이르는 위빠사나 수행법에 대한 책을 미얀마어로 저술한다. 1949년 우 누 수상과 붓다 사사나 눅가하 협회의 요청에 의해서 양곤의 마하시 수행 센터에 오게 되면서 마하시 수행법은 미얀마 국내는 물론 아시아의 다른 상좌부 국가를 포함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현재 위빠사나 수행하면 미얀마의 마하시 수행법을 연상하게 될 정도로 위빠사나 수행법의 대명사가 되었다.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법의 특징은 첫째, 좌선할 때에 호흡에 동반되어 생겨나는 복부의 움직임을 일차적인 마음챙김(念)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1950년대 후반에는 스리랑카에서 이 수행법은 경전에 근거한 전통적인 수행법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마하시 수행법은 《대념처경(大念處經)》과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 제시된 수행법 가운데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요소인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 요소를 분명하게 관찰하는 사계차별(四界差別, catudh uvavatth a)에 중점을 둔 수행법이라고 하면서 결코 경전의 가르침이나 《청정도론》에 어긋나지 않는 수행법임을 밝힌다.

마하시 수행법의 두 번째의 특징은 좌선과 행선(行禪)에 동일한 비중을 두고 있는 점이다. 행선은 걷는 동작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을 말하나, 넓게 보면 여기에는 몸의 모든 동작이 포함되고 있다. 즉 좌선이 중요시되는 만큼 좌선 이외의 모든 몸의 동작에 대한 관찰도 강조되는 점이 마하시 수행법의 특징의 하나이다. 마치 중병에 걸린 환자처럼 천천히 몸을 움직이면서 몸의 모든 동작을 알아차리라는 수행법은 다른 수행법에서는 그렇게 강조하지 않는 점이다.

좌선 시간이 1시간이면 행선 시간도 같은 1시간으로 배정해서 몸의 동작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집중력을 높이게 한다. 4∼6시간의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깨어 있는 시간 전체가 수행 시간이라고 함은 일상 생활에서의 동작에 대한 관찰이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의 특징으로는 지도법에 있다. 수행자의 매일 매일의 수행의 상태를 지도 법사에게 정확하게 보고하여 수행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점검받는 것이 마하시 수행법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지도법은 수행자에게 강한 수행의 동기를 제공하는데 때로는 수행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늘 보고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도법에 의한 집중적인 수행은 결과적으로 수행자 자신의 빠른 수행의 진전을 가져오게 하기 위한 것으로 효과를 보고 있다. 수행의 체험을 매일 보고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수행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마하시 수행법에서 기본적인 소의경론(所依經論)으로 삼고 있는 경론은 장부(長部) 경전의 《대념처경(大念處經, Mah atipat.t.h a-sutta)》과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 그리고 《무애해도(無碍解道, Pati-sambhidamagga)》 등이다.

수행을 위한 기초적인 경전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아니며, 기본적인 수행법에 따라 수행을 해나가면서 매일 매일의 법문과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수행법에 대한 이론적 이해와 실천적인 이해가 만나게 되도록 지도를 한다.

대부분의 마하시 수행 센터에서는 정해진 수행 기간 없이 일년 내내 수행을 지도하고 있으며, 최소한 1개월에서 6개월 정도의 집중적인 수행이 권장되고 있다.

수행의 목적은 다른 모든 수행의 전통과 같이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의 성취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으며, 지금 이 생에서 열반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
마하시 수행법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데에는 외국인에 대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마하시 수행 센터에는 통역을 도와주는 이들이 있어서 외국인들도 언어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수행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준 점은 마하시 수행법의 국제화에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레디 사야도의 수행 전통
미얀마의 수행의 체계를 크게 마하시 사야도 계통의 수행법과 레디 사야도 계통의 수행법의 두 부류로 분류하여 보았을 때, 마하시 계통의 수행법은 스승에 따라서 지도 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마하시 사야도의 직제자들에 의해서 현재 지도되고 있으므로 동일한 수행법으로 볼 수 있으나, 레디 사야도 계통의 수행법은 직접적으로 레디 사야도의 지도를 받은 제자에 의해서 계승되었다기보다는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 레디 사야도의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에 살펴볼 수행체계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레디 사야도(Ledi Sayadaw, 1846∼1923)는 수행보다는 교학의 측면에 더 공헌한 근·현대의 미얀마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에 살펴볼 수행의 전통들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레디 사야도의 가르침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특히 우 바 킨과 그 제자인 고엔카의 수행법은 레디 사야도의 가르침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레디 사야도 전통의 수행법의 기본적인 특징은 호흡에 대한 관찰을 근거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아나빠나 사띠(入出息念)를 근거로 한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

① 순룬 사야도:그 가운데 순룬 사야도(Sunlun Sayadaw, 1878∼1952)의 수행법은 강한 호흡으로 유명하며, 이러한 독특한 호흡법 때문에 전신에서 강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측면은 마치 고행주의를 연상하게도 되는데, 순룬 사야도가 이렇게 빠른 호흡을 하게 된 것은 잡념과 졸음을 막고 호흡에의 관찰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순룬 사야도의 위빠사나 수행은 좌선이 위주가 되어 있으며, 좌선 시간 이외에 특별히 행선을 하지는 않는다. 좌선은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되며, 처음의 40분간은 코로 거칠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코 끝의 감각을 관찰한 후(출입식념), 이어지는 50분 동안은 거친 호흡을 멈추고 전신의 감각을 관찰한다(위빠사나). 이처럼 한번의 좌선에 출입식념과 위빠사나를 같이 하는 것이 순룬 수행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수행법은 순룬 사야도가 출가하기 전에 출입식념이라는 수행법이 있음을 듣고 난 후, 혼자서 수행을 시작하여 창안한 수행법이다. 출입식념을 중심으로 하여 위빠사나 수행으로 진행되는 점에서 넓게 레디 사야도 계통의 수행법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 레디 사야도의 가르침을 듣거나 수행의 지도를 받은 점이 없기 때문에 미얀마의 수행 전통 가운데 순룬 사야도의 수행법은 가장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다.


② 우 바 킨 수행 전통:레디 사야도의 수행 전통을 잇는 우 바 킨(U Ba Khin, 1899∼1971)은 재가자이며, 고엔카의 스승으로 유명하다. 우 바 킨이 지도했던 수행법은 입출식념(入出息念)을 기초로 한 위빠사나이다. 우 바 킨은 재가자들에게 적당한 수행 기간으로 10일간의 코스를 개설해서 수행을 지도했다. 10일간의 기간 중에 3일은 입출식념(定)을 나머지 7일간은 위빠사나(慧)를 닦는다. 호흡은 자연스럽게 하며,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여 마음을 안정시킨 후에 전신의 감각을 관찰하는 위빠사나를 닦는 것이다.

수행은 하루 8시간의 좌선 시간 위주로 진행되며, 초보자는 1시간의 좌선과 30분의 휴식 시간이 있으며, 경험이 많은 수행자는 2∼3시간 좌선을 한다. 우 바 킨의 수행법은 그의 제자인 고엔카에 의해 널리 알려졌으며,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과 함께 현재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위빠사나 수행법으로 유명하다.

③ 모곡 사야도의 수행 전통:레디 사야도의 전통을 잇는 또 한 가지 수행법은 모곡 사야도(Mogok Sayadaw, 1899∼1962)에 의해 전해졌다. 모곡 사야도는 북부 미얀마의 아마라푸라(Amarapura)에서 활동하다가 그곳에서 입적했다. 모곡 사야도는 레디 사야도의 가르침의 전통을 이어받아, 특히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중심으로 한 아비담마적인 교리 해석에 힘을 쏟았다. 수행법은 출입식념과 위빠사나 수행을 위주로 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십이연기를 중심으로 한 아비담마적인 교리가 중요시되어, 수행을 하는 데 어느 정도의 교리적인 이해가 전제 조건으로 요구된다는 점이다.

좌선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항상 모곡 사야도의 아비담마적인 교리에 대한 설법을 1시간 정도 듣는 것도 특징이다. 모곡 사야도의 수행법은 출입식념(身念處)을 기본으로 하여,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의 순서로 사념처를 바탕으로 하여 심신(名色)의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관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이다. 수행의 이론적인 근거는 12연기설이다.


2) 수행체계의 분류
미얀마 불교의 수행체계를 마하시 수행 계통과 레디 사야도 수행 계통의 두 계통으로 나누어, 마하시 계통의 수행 센터 네 곳과 레디 사야도 계통의 수행 센터 다섯 곳을 방문하여 조사한 결과를 정리해 보았다.
마하시 계통의 수행 센터는 동일한 방식으로 사념처(四念處)를 바탕으로 한 순수 위빠사나를 지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레디 사야도 계통의 수행 센터들은 기본적으로는 출입식념을 행하며, 출입식념에 의해서 마음의 집중을 얻은 후에는 위빠사나 수행을 닦는다는 공통점이 확인되었고, 아울러 순룬 사야도의 독특한 호흡법과 모곡 사야도의 아비담마에 대한 이해의 강조 등에서는 수행법들간의 개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 수행체계를 분류해 보면, 마하시 수행법은 선정 수행을 전제 조건으로 하지 않는 순수 위빠사나 수행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레디 사야도 계통의 수행법은 사마타(선정)를 먼저 닦은 후에 위빠사나(지혜)를 닦는 수행으로 분류할 수 있다.


5. 맺는 말

이상에서 개략적으로나마 남방 상좌부 불교의 수행 전통을 살펴보았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현재 남방 상좌부 불교에서 실천되고 있는 수행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초기경전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청정도론》을 위시로 한 초기경전에 대한 주석 문헌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리고 어떠한 수행법이라도 수행의 목적은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의 획득에 있다는 점에서 초기 불교의 가르침을 가장 보수적으로 전하고 있는 상좌부 불교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김재성 
서울대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동양철학 전공).일본 동경대학 인문사회계 인도철학 불교학 석-박사 과정 수료. 현재 고려대장경 연구소 상임연구원. 사단법인 위빠사나 수행처 호두마을 지도법사. 논문으로 <일본의 초기불교 및 남방 상좌부 불교 연구의 역사와 현황><청정도론의 찰나정 근행정>역서로 <지금 이 순간 누가 깨어 있는가-우빤디다 스님의 가르침><위빠사나 수행>등이 있다. 



상좌부 불교의 현황 (출처 :  불교평론 13호)  
난다라타나(nadara65@hanmail.net


::::: 목 차 :::::

남방 상좌부 불교의 배경
비구의 생활과 교육과정
재가자의 종교 생활
사찰과 사회
불교 행사
맺는 말

 

1. 남방 상좌부 불교의 배경
 
상좌부 불교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 등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남방에서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상좌부 불교의 대표적인 나라로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를 손꼽을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상좌부 불교라도 각 나라의 전통과 생활방식, 사고의 차이에 따라 수행방식에 있어서 그 각각의 특징과 차별성이 있다. 예를 들면 스리랑카는 승려의 교육(敎育), 태국은 지계(持戒), 미얀마는 수행(修行) 등이 각각 두드러지며 그것이 그 나라 불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초기 불교의 근본사상인 계정혜(戒定慧, s沖la·sama?hi·prajn??라는 삼학(三學, thri-s쳃ks.a?의 세 주춧돌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이들 세 나라의 역사적 배경을 간단하게 알아봄으로써 각각의 분야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좌부 불교의 현황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스리랑카
스리랑카(Sri Lanka)의 면적은 62,337㎢이고, 인구는 약 1천 9백만 명 가량이다. 종족 분포도로 볼 때 싱할라(Sinhalese) 74%, 타밀(Tamil) 18.1%, 무슬림(Muslim) 7.1%, 기타 0.8% 이며, 종교 분포도로 볼 때는 불교가 69.3%, 힌두교 15.5%, 이슬람교 7.5%, 기독교와 천주교 7.5%, 기타 0.1% 이다.

현재 스리랑카에는 ‘교육중심주의(학문생활, ga?a-va?沖n)’와 ‘수행중심주의(수행생활, a?an.ya-va?沖n/vana-va?沖n)’의 커다란 두 흐름에 따라 수행하는 비구들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전통의 역사는 기원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불교의 근본이 학문인가, 수행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벌어진 논쟁의 결과, ‘교육중심주의’와 ‘수행중심주의’라는 비구들의 두 가지 생활방식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 이후로 계속 각각 다른 두 가지 수행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이 두 가지 비구들의 생활형태는 현재의 스리랑카 불교의 현황에 이르기까지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상좌부 불교의 기본이었던 ‘자기 중심적인 수행주의’ 뿐만 아니라 포교가 곧 자기 수행이라는 교화적 불교(他利利他)가 민중화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일반 재가 학생들이 학습하는 교재나 승려들의 교육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국어·시·문화·문헌 등은 모두 그 두 계통의 장로들이 남겼던 다양한 문헌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 교육 과정에도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1) 수행중심주의
현재 스리랑카에는 수행생활만 하는 비구의 거주지가 여러 곳에 있는데 대다수가 동굴이며, 숲속의 거주지는 대부분 현대에 들어와서 생긴 것이다.

수행자들이 머무는 토지의 관리와 운영은 재가 신자들로 구성된 후원 단체가 맡아서 하는데 이 신자들로 구성된 후원 단체 또한 비구들과 함께 수행하는 단체들이다. 먼 곳 어디에도 다니지 않는 이 비구들은 경제적인 일에는 관계하지 않는다. 이른 아침에 탁발 나가 얻은 음식에서 얼마 정도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나머지는 함께 수행하는 비구들과 식당에서 같이 식사하기도 하고 각자 자기 동굴 속에서 식사하기도 한다.
오전에는 수행도 하고 가사 빨래나 목욕을 하는데 빨래나 목욕은 오전에만 한다. 주된 수행은 자기 동굴이나 나무 밑에서 하는 좌선명상(vipassana?bha?ana?이며, 심신이 많이 지쳐 있을 때는 조용히 걸으면서 하는 경행(can?amana)을 하는데 경행을 위한 장소도 있다. 오전 10시경에는 마을에 내려가 탁발을 한다. 오후에는 명상을 하는데 ‘오후 불식(不食)’이므로 탁발은 하지 않는다.

현재는 인근지역의 신도들이 음식을 준비해서 승려들의 수행지로 가져오면 승려들은 시간을 맞추어 자기 거주지에서 바루를 가지고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한다. 그리고 나서 승려들은 신자들에게 오계를 전수하고 보시 공덕에 관한 법회(bhukta?umodana?를 하고 다시 자기 수행지로 되돌아간다.

(2) 교육중심주의
이 사찰들은 대부분 마을의 중심에, 혹은 도시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현재에는 비구들이 탁발 나가는 일은 거의 볼 수 없고 대신 마을 신도들이 하루에 두 차례 걸쳐서 아침과 점심공양을 순서대로 사찰로 가지고 온다. 승려들의 하루 일과는 교육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아울러 중생을 교화하고 포교와 관련하여 사회 여러 문제에 부딪치며 중생들과 함께 살아간다.

‘교육중심주의’ 비구들의 교단에는 크게 세 개의 종파가 있다. 이 종파가 생긴 것은 지난 450여 년 동안 서양 열강의 지배를 받은 이후에 불교가 피폐해진 부산물이다. 포르투갈 인들의 침략(1505∼1658)에 이어 홀랜드(1658∼1796) 그리고 영국(1796∼1948)이 차례로 스리랑카를 식민지화했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 하에서 불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와의 대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들은 불탑과 가람을 파괴하고 사원 소유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불교인들에게 강제로 개종을 요구하는 등 여러 가지 박해를 가했다. 이때에 박해를 당한 종파는 대부분 도시나 마을의 중심에 있던 학문중심주의 승가와 사찰 그리고 불자들이었다. 그리하여 절멸된 비구 교단을 재건하기 위해 미얀마와 태국에서 불교의 법통을 이어와 부활을 꾀했다. 스리랑카 불교와 이들 나라의 상좌부 불교와는 친선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자연스런 일이기도 했다.

현재 스리랑카 불교의 법통을 잇고 있는 씨얌파(siyam-nika?a)·아마라푸라파(amarapura-nika?a)·라마냐파(ra?an??-nika?a)는 이전까지는 출가자와 일반 사회 계급과의 사이에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었지만 이후로부터 출가자와 사회 계급과 밀접한 관계가 생기게 된 것이 한 특징이기도 하다.

이 세 종파 가운데 스리랑카 비구들의 주요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종파는 씨얌파이며, 1753년 태국의 우팔리(Upali) 장로가 비구 25명과 스리랑카에 와서 구족계(upasampada?를 전해주면서 시작되었다. 아마라푸라파는 씨얌파가 창종된 지 55년 후인 1808년에, 라마냐파는 그 후 56년 뒤인 1864년에 일단의 스리랑카에 스님들이 미얀마에 가서 구족계를 받아 돌아와서 창종한 종파이다. 스리랑카 행정부의 불교부(Ministry of Buddhasa?ana) 2001년 10월 통계에 의하면 3개 종파에 속하는 사찰의 총 숫자는 8,204개이고, 비구들의 총 숫자는 29,877명이며, 그 숫자의 절반 정도는 사미승려들이다.

큰 세력을 가진 시얌파는 캔디(Kandy)의 아스기리야(Asgiriya) 사(寺)와 말왓타(Malwatta) 사(寺)로 구성되어 두 명의 종정(宗正)이 존재하며, 토지와 재산을 소유한 대사원 또는 불치사(佛齒寺, Dalada?ma?iga?a)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해 가고 있다. 이 종파의 승려는 대부분 사회의 상류계층 출신자들로 이러한 점이 출가 불교로서의 비구의 순수성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것은 승가 집단이 자연스럽게 상류계층과 자족적인 유대 속에서 번영을 누렸기 때문이다.

라마냐파와 아마라푸라파의 출현은 이러한 경향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아마라푸라파는 하층 계급 출신자를 많이 받아들이는 서민적 성향의 승가집단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3파는 그 근본이 모두 스리랑카에서 다른 나라로 전파되었다가 다시 법통을 이어온 것이며, 교의상으로는 서로 크게 다른 점은 없다.


2) 태국
태국 불교 또한 종파가 있기는 하나 기본 교의를 달리 하지는 않는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똑같은 경전을 암송하고 같은 계율을 지키며, 같은 교의를 숭상하고 똑같은 황의(黃衣)를 걸친 승려들이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태국 불교의 대표적인 종파는 ‘마하니카이(Maha?ikai)’파와 ‘담마유트(Dharmayut)’파이다. 마하니카이파가 다수파이고 소수파인 담마유트파가 특히 계율의 엄수를 강조할 뿐 교의상의 차이는 전혀 없다. 굳이 차이를 논한다면 가사의 착용법이나 독경의 억양과 발음법 정도이다.

오늘의 담마유트파를 있게 한 이는 몽쿠트(Mongkut, 1804∼1868) 왕이다. 그는 즉위하기 전 27년간 승려로서 지내면서 복고적인 불교 부흥 운동을 일으켰는데 그 결과가 담마유트파이다. 그래서 담마유트파는 소수파이지만 왕실의 지원을 받고 있다.

태국 불교의 한 특질은 승려의 출입이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이다. 출가란 본래 개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르는 것으로 아무런 외부적 제약을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스리랑카나 미얀마에서는 출가나 환속이 어느 정도 엄격한 편이다. 스리랑카나 미얀마에서는 상가에 들어가려면 상가의 일원으로서 오래도록 사원에 머물며 수행에 전념할 것을 요구받는다. 따라서 그만큼의 각오와 자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태국에서는 그런 각오와 자각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가에 오랫동안 머물며 수행하는 것도 애초부터 그다지 기대하고 있지 않다. 자기의 자유의사로 상가로 들어가는 것처럼 세속생활로 돌아가는 일도 자유이다.

또한 태국 불교의 특징은 승려가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국은 ‘상가통치법’에 의해 승단이 관리되는데, 이 법에 승려가 정치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도록 규정되어 있다. 스리랑카와 미얀마에서는 승려들이 정치적인 일에 깊이 관여하고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점에서는 태국과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태국 왕실이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왕실이 불교의 열렬한 신봉자라는 관계는 유지하고 있다.

태국 불교의 현황을 살펴보면 인구의 95%가 상좌부 불교도인이며 3만에 가까운 사원에서 비구와 사미승려를 합쳐 40만 명에 이르는 승려 구성원이 있다. 1994년 태국 정부의 교육부 통계에 의하면 종교 인구율, 사원의 수, 종파별 비구 및 사미승려, 출가 여성의 수는 다음과 같다.

종교 분포도로 볼 때는 불교가 94.8%, 이슬람교 4.05%, 기독교 0.55%, 힌두교 0.01%, 기타 종교 0.12%, 무종교 0.47%의 비율이다. 사원의 숫자는 마하니카이파의 사원이 56,694개이며 담마유트파의 사원이 2,902개에 이른다. 비구와 사미승려들의 수행자는 전체 합계가 378,260명이며, 출가 여성들은 전체 16,033명에 이른다.

승려들의 전통적인 교육기관으로는 ‘팔리학교’와 ‘교리학교’가 있다. 팔리학교는 비구와 사미승려만을 위한 교육기관이며, 교리학교는 비구와 사미승려들의 불교교리시험을 위한 학교이다. 팔리학교와 교리학교가 국가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교육기관이라고 한다면, 스리랑카와 마찬가지로 일반인들을 위한 일요일 불교학교(Sunday School-Dhamma School)가 있다. 그 외에 두 개의 불교대학이 있다. 마하니카이파의 ‘마하출라 롱콘’ 불교대학교담마유트파의 ‘마하마쿠트’ 불교대학이다. 이 두 대학을 방콕 시내에 설립하고 비구의 양성에 주력하고 있고 불교학 외에 일반대학의 교과목도 채택해서 비구의 교양과 자질향상에 주력하고 있다.

대다수의 태국 승려들은 거의 새벽에 절을 나와 탁발을 한다. 탁발 나온 승려들에게 공양 보시를 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것은 큰 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수행자의 탁발은 재가자가 공덕을 쌓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신자들은 승려를 집으로 초청해 점심식사를 공양하기도 한다. 이 공양보시는 상좌부 불교 나라들이 거의 비슷하다. 식사뿐만 아니라 옷을 물들이는 물감, 수건, 비누, 보온병, 칫솔, 치약 등 승려들의 일용품도 공양한다. 또 책이나 기타의 생활용품도 공양한다.


3) 미얀마
미얀마 상좌부 불교의 교의는 스리랑카의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크게 다른 점은 없다. 그러나 행사 의식과 출가자의 일상생활 등 세부적인 것에는 미얀마의 독자적 특색이 나타나며 문화의 차이가 있다.

미얀마의 종교 인구의 분포를 보면 인구의 89.4%가 상좌부 불교도이며, 이슬람교가 3.9%, 힌두교도가 0.5%, 기독교도가 4.9%, 나트(Nat) 신앙이 1.2%, 기타가 0.1%가 된다. 미얀마에는 전체의 약 87%를 차지하는 수담마파를 포함해서 9개의 공인된 종파가 있다. 사미승려를 포함한 전체 비구승려는 총 396,760명이다. 여성 출가자의 수는 3만 정도에 이른다.

1980년에 미얀마 전 종파 합동회의가 개최되어 종교적·정치적·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미얀마의 9종파를 통괄하는 조직의 설치, 종교적 분규의 해결, 출가 등록제와 신분의 규정의 확립이라는 세 가지 사항을 입법화하였다.

미얀마 불교의 교학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팔리 경전 시험이 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팔리 국가 시험과 사설 시험이다. 팔리 사설 시험은 승려와 재가자가 중심이 된 감독 단체가 진행을 감독한다. 미얀마의 승려 교육 기관은 크게 사설 교육 기관인 전문 강원(Mahagandayong)과 국립 불교대학(State Pariyatti Sa?ana University)으로 대표된다. 사설 전문 강원이 전국의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설치되어 있고, 국립 불교대학은 양곤(Yangon)과 만달레이(Mandalai)의 두 도시에 설치되어 있다.

미얀마에서는 ‘불사리탑’ 숭배가 널리 펴져 있다. 가정에서 생기는 모든 일들은 부처님을 대신하는 불사리탑 앞에 가서 고한다. 이 사리탑과 사찰의 관리는 재가 신자들이 맡고 있다. 현재 상좌부 불교국에서 승려는 물론 일반 재가자에게까지 수행의 전통이 가장 널리 보급된 나라는 미얀마이다. 전국 각지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수많은 명상 수행 센터(Meditation Center)가 있고, 이곳에서 다양한 수행법이 행해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상좌부 불교국보다 두드러진 현상이며, 미얀마 불교의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얀마는 ‘수행중심주의 불교’라 할 수 있다.


4) 단기출가
태국 승가의 출입은 비교적 자유롭다. 그러나 스리랑카나 미얀마에서는 그것이 약간 다르다. 환속하는 것보다는 상가에 오래 머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만큼 환속하는 것은 타락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상좌부 불교인들은 자신이 출가한 공덕이 부모를 비롯한 이미 별세한 조상들에게까지 영향을 준다고 믿는다. 임시출가 제도가 정착되어 의무는 아니더라도 남자들은 일생에 한 번은 단기 승려 생활을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국가 공무원인 경우 3개월을 단기출가를 위한 유급휴가를 준다. 임시출가를 했다는 것 자체가 결혼하기 위한 자격이 되기도 한다.

태국·미얀마의 경우, 임시출가를 해서 승원 생활을 하는 것을 인생에 있어서 좋은 경험이며, 인격형성에 유익하고, 그 기간을 거쳐 사회인으로서의 생활하는 것이 남자의 의무라고 여긴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경우는 다르다. 스리랑카에는 단기출가라는 개념조차 없다. 출가해서 환속한 사람을 보고 스리랑카 사람들은 아라한의 경지를 약속 받은 영광스럽고 고귀한 승복을 벗고 중생들의 천박한 세상으로 되돌아온 어리석은 이라고 한다.

 

2. 비구의 생활과 교육과정

출가의 과정이나 출가자의 교육과정은 상좌부 불교가 행해지고 있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라오스·캄보디아 등 나라에 따라 약간의 문화 차이는 있지만 거의 비슷하다. 이하에서는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1) 출가 행사
출가하고자 하는 자는 이미 ‘일요 불법학교’에서 승려의 생활이 어떠한지를 알기 때문에 출가에 대해 자신이 명확한 입장을 밝힐 수가 있다. 출가자들은 대부분 어린이들인데 본인의 의사도 중요하지만 부모와 가족들의 의사도 매우 중요하다. 아이가 8∼9세가 되면, 또는 총명한 이에게 출가자가 되면 얻게 되는 공덕 등을 자세히 알려주며 부모가 출가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 본인의 동의에 의해, 부모가 원하는 사원의 주지 스님의 허락을 받아 사원으로 데리고 가 주지 스님에게 맡긴다.

약 1년 동안은 주지 스님과 사원의 다른 스님들의 인도를 받으며 수행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간단한 기본 교리를 배운다. 그리고 나서 적당한 날을 택해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서 사미계를 받아 출가하게 되는데, 이 날은 그 사원의 큰 축제가 되며 아이에게 입힐 가사와 그 행사에 모이는 스님들의 공양, 보시 등 모든 경제적 부담은 그의 부모와 사찰 신도들이 모여서 해결한다. 10살이 되지 않아도 출가하면 비구 대접을 받게 되며 이 비구에게는 자기 부모 등 가족 친지들이 모두 큰절을 한다. 출가자는 절을 하는 이들에게 합장을 하지 않으며 ‘소원을 이루라’ ‘건강하라’ 등의 내용을 포함한 팔리어 게송을 들려준다.

2) 출가자의 교육과정
출가한 스님은 승려 전문교육기관인 승가학교(pirivena)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는다. 사미 스님은 동참 스님들과 승가학교에 거주하며 특별한 일이 없으면 4월, 8월, 12월 방학 때만 자신이 출가한 사찰에 다녀올 수 있다. 새벽 5시에 일어나고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게 되며, 아침에는 각자 공부하고 점심 공양 후 오후 1시에 학교가 시작되어 오후 5시 30분에 끝난다.

일반 학생들과는 다르게 경전은 물론이고 팔리어와 범어를 배우며 국어, 영어, 수학 등 일반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도 학습한다. 그 외에는 승가학교에서 매일 불교언어와 경전을 외우는 것이 특별한 과정이다. 또는 ‘위빠사나’ 수행법도 배우고 설법하는 능력도 키우며 독경하는 것도 학습한다.

이와 같은 교육을 5년 이수하여 승가학교 기본 교육과정을 마치고 ‘승가학교 기본 교육시험(mu?ika piriven avasa?a)’이라는 교육부에서 진행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그 다음 고등 승가학교에 올라가 2년마다 교육부에서 진행하는 시험을 3번 보면 6년간의 ‘판디타(Pand.it)’를 획득하여 졸업하게 되고, 이로써 출가자의 승가학교의 교육과정을 모두 마치게 된다.

3) 구족계 행사
출가자가 20세가 되면 구족계를 받게 된다. 구족계단은 종단별로 각 종정 스님을 비롯한 ‘종단의 행정승(ka?aka sam.gha-sabha?’으로 구성되어 설치되어 있다. 구족계는 5월부터 6월 보름 사이에만 받을 수 있다. 그 한 달 사이에 적당한 날을 택해 구족계를 받는다. 행사 당일 구족계 받는 일을 축하하기 위해 수계자의 부모, 친척과 이웃 사람들 그리고 출가한 사원 주변 사람들이 구족계단으로 모인다.

아침에는 종정 스님과 종단의 스님들이 계시는 여러 사원들을 은사 스님과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다니며 보시하고 인사를 드린다. 아침 10시쯤에는 수계법당(uposata?gha?a)에 모인 종정 스님, 부종정 스님 등이 묻는 불교 언어와 경전에 관한 질문에 직접 대답하여 합격해야만 구족계를 받을 수 있다. 이 구두 시험에 합격하게 되면 모여 있던 부모, 친척들이 ‘사두(sa?hu)’라고 3번을 외친다. 그 말은 ‘좋다, 좋다, 좋아’라는 뜻이다. 모인 스님들에게 공양을 보시하고 모인 사람들과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계를 받는다. 이때 계를 받기 바로 직전에 인생의 마지막 기회로 속인처럼 옷을 입고 각종 보물로 장식한 왕관도 쓰고 목걸이를 걸거나 반지도 끼는 왕의 복장을 한다.

계를 받은 다음에는 비구가 되었음을 축하하는 전통 음악과 춤을 공연하며, 다시 출가한 사원으로 돌아와서 오후에는 구족계를 받은 승려에게 첫 설법(mam.gala-dharma-des.ana?을 듣는 것으로 구족계 행사가 끝이 난다.


3. 재가자의 종교 생활 : 포살(pohoya, 布薩)을 중심으로

보름은 달이 꽉 찬 날이다. 이 날은 ‘포허야(布薩)’ 날이라 하는데 상좌부 불교에 있어서는 가장 성스러운 중요한 날이다. 이 날은 불교 역사 속에서 훌륭하고 성스러운 일을 기념하여 불자들이 그 의미를 생각하며 선한 일을 하고 수행을 하기 위해 사찰에서 하루를 보낸다. 모든 상좌부 불교국가는 보름날이 국가에서 정한 휴일이기 때문에 모두 한가히 선행을 하며 공덕을 쌓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보름날은 술집조차 문을 열지 않아 술을 마신다거나 노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보름에는 이른 아침부터 온 마을 신도들이, 노인들은 물론 손자 손녀들까지 데리고, 성스러움과 깨끗함을 상징하는 하얀 옷을 입고 절을 찾아 모여든다. 절에 모인 신도들이 스님을 모시고 6시쯤에 불당에 들어와 부처님께 아침 공양을 올리고 나서 스님으로부터 8계(as.t.ha-s沖la) 혹은 10계(das첺-s沖la)를 받아 하루종일 계를 지키며, 마음을 밝혀 삼매에 들어가 지혜를 얻는 수행의 일정을 지낸다. 이러한 수행 행위는 붓다고사(Buddhaghosa, 佛音)의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에 근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침 공양을 끝내고 나서 법당, 불당, 수행장, 경행토(經行土), 동굴 등 어디서든지 조용히 수행에 든다. 아침 9시가 되면 모두 법당에 모여 스님을 모시고 설법을 듣는다. 스님은 1시간 또는 1시간 30분 동안 설법하며 각각의 보름날에 연관된 불교 역사 가운데 있던 성스러운 이야기를 해주고 위빠사나 수행법과 수행할 때 일어나는 형상 등에 대해 설명해 주기도 한다.

법회가 끝날 때가 되면 점심 시간이 되므로 계를 받아 수행하는 신도들의 자녀들이 점심 공양을 가지고 모인다. 그들과 함께 불당에 스님을 모시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다음 절에 계시는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고 나서 자신의 부모에게 공양을 올린다. 이것은 보통 집에서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를 떠나 수행자, 즉 우바새(upa?aka) 우바이(upa?ika?라는 생각으로 행하는 것이다. 대신 공양을 받은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공양보시에 관하여 좋은 말을 해준다.

오후 2시쯤 스님을 모시고 좌선수행에 든다. 법회를 열어 스님의 권고를 받아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시간이며, 오후 5시쯤에는 스님을 모시고 《본생경(Ja?aka)》을 암송하는 시간이다. 이때는 스님이 《본생경》 중 한 가지 이야기를 선택하여 억양을 맞추어 암송한다. 신도들은 합장한 채로 듣는다. 《본생경》은 팔리(pa?i)어가 아니라 각 나라마다 그 나라말로 암송한다.

오후 6시쯤에는 모두 다시 불당에 모여 부처님께 차, 꽃, 향 등 공양을 올리고 나서 차 한잔으로 저녁 공양을 하며 밤새도록 스님들 모시고 소위 호주(護呪) 혹은 빠릿따(paritta)라고 하는 염송 기도에 들어간다. 만약 호주를 진행하지 않게 되면 각자 경전을 암송하며 밤을 새운다.

보름날, 정해진 행사 이외의 시간에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념처경(四念處經, Catta?o-satipat.t.ha?a-sutta)》을 암송하며 시간을 보낸다. 불자들은 누구나 《사념처경》 한 권씩은 다 가지고 있으며, 아침에 절에 올 때 가지고 오는 것을 잊지 않는다.


4. 사찰과 사회

대부분의 사원은 각 마을 또는 동네나 시내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어서 자기 동네의 사원이 가족 사원이 된다. 가정의 일상사는 물론 모든 종교적 행위가 사찰과의 관계 속에서 행해진다. 예를 들면 결혼식이 있으면 그 전날 스님으로부터 경전을 듣고 보호를 받고, 임신을 하면 임신했다고 부처님께 고하고 스님으로부터 《앙굴마라경(央堀摩羅經, An?ulima?a-sutta)》을 듣고 보호를 받는다. 아이가 태어나면 태어났음을 고하고, 아이가 말을 시작하면 말을 시작한다고, 글씨를 배울 때가 되면 글씨를 배운다고 부처님께 고하고 큰스님에게 첫 글을 배운다. 이처럼 모든 일들이 사찰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1) 불법학교(Daham-pa?ala)
사찰마다 교리학교가 있다. 일요일만 교리를 배우는 학교라 ‘일요 불법학교’22)라고도 한다. 일요일이면 온 마을의 학생들이 흰색 전통 의상을 입고 꽃을 따서 바구니에 담고 불교 교리를 배우기 위해 사원으로 모인다. 불당 앞에서 스님으로부터 오계를 받아 부처님께 꽃 공양을 올리고 나서 불법공부를 시작한다.

불법학교에 참석하는 아이들을 1학년부터 10학년으로 나누어 수준에 맞추어 행정부의 불교부(佛敎部, Ministry of Buddha-sa?ana)에서 만들어진 교재를 가지고 불교를 배운다. 이 교재는 저명한 스님들과 불교학자에 의해 불교부에서 편찬된 것이라 그 내용도 재가 학생들이 공부하기에 적절하도록 짜여져 있다.
절마다 학생들이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몇 천 명에 이르는데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그 사찰의 스님들 또는 그 마을의 교사들이다.

교사들은 그 학생들의 학교나 마을 선배들이 대부분이며 이러한 교육은 후배들을 위한 사회복지 차원의 자원봉사이기도 하다. 교사로서의 월급 등과 같은 어떤 보상도 받지 않는다. 불교 공통의식은 스님의 지도하에 모든 학생들이 따라하며 같이 하고 배우지만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교리 공부는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가르친다. 불교교리뿐만 아니라 부모님을 위한 효도법, 이웃들과 함께 사는 것, 사회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의 극복 방법들도 가르치기 때문에 현실생활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불법학교의 졸업장은 취직할 때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므로 사회 생활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도 의미가 있다. 매년 지방마다 학생들의 실력을 알 수 있게 지방 불법학교 시험을 본다. 우수한 성적의 합격자들은 전국적인 불법학교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국가로부터 장학금 및 증명서를 받는다. 이러한 일들은 전적으로 불교부에서 전담한다. 또한 일반학교에도 스님들이 최소한 한 명씩 교사로 있기 때문에 불교교리를 쉽게 배울 수 있으며, 대학교에도 불교학과가 있어서 불교과정인 수능시험을 보아서 불교를 계속 배울 수 있다.

2) 대각회(大覺會, Maha?odhi society)
450년 동안에 식민지화되어 흥망과 성쇠를 되풀이 한 스리랑카 불교를 되살리기 위한 운동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스리랑카의 불교도들은 법난 극복의 경험을 살려 인도 불교의 부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지금의 인도 불교를 다시 회생시킨 일등 공신은 스리랑카 출신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a?ika Dharmapa?a)이다. 그가 1890년도에 창립한 대각회(大覺會, Maha?odhi society)는 지금도 스리랑카 스님들에 의해 계속 유지되고 있다.

3) 불교청년회(YMBA)
올코트(Olcott) 대령이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불교 신문과 잡지도 발행하기도 하여 1880년에는 〈YMBA〉라는 월간지도 발행했다. 그 다음 불교를 되살리기 위해 세워진 단체도 또한 불교청년회이다. 바론 자야틸라카(Baron Jayatilaka)는 1898년도에 스리랑카 수도인 콜롬보(Colombo)를 비롯한 각 지역마다 불교청년회를 창립하여 1944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46년간 봉직을 하며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다.
불교청년회의 본사는 콜롬보(Colombo)에 있지만 각 지역마다 지부가 있어 불교운동에 앞장서서 불교발전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본사에서는 불교학교를 유지하고 졸업증서(diploma)를 발행하며, 포살 법회는 물론 자주 국내와 국제 불교학자들을 초빙하여 토론을 마련하기도 한다.

4) 비구니 교단의 재설립
11세기 초엽 남인도의 촐라(Chola) 인들이 스리랑카를 침입함으로써 사찰은 폐허가 되었다. 이때 비구니 교단은 절멸되고 만다. 그리고는 그 이후로 스리랑카에서는 비구니 교단을 계속해서 복구하지 못했다.
비구 교단이 절멸될 때는 이웃 상좌부 불교국에서 이어 받아 교단을 다시 세웠지만 절멸 이후 비구니 교단이 없는 것은 태국·미얀마·캄보디아 등 다른 남방 불교국도 상황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에서 비구니 교단이 단절될 무렵 다른 상좌부 불교국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 비구니 교단의 맥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비구니 교단의 맥을 다시 잇는 것에 관하여 스리랑카의 불교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의가 계속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96년도에 대각회의 노력에 의해 인도에서 비구니 교단을 다시 세웠다. 이는 스리랑카 불교에 있어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996년 12월 8일, 당시 대각회의 회장이었던 스리랑카의 위풀라사라(M. Vipulasa?a) 스님의 노력 끝에 인도 사라나트(Sa?a?a?h) 사원에서 비구니의 구족계를 줄 수 있게 되었다. 스리랑카를 비롯한 해외 여러 많은 비구들 가운데 선택한 사미니(dasa s沖la ma?ha?들 11명은 한국 비구니들과 상좌부 비구들로부터 구족계를 받아 스리랑카의 비구니 교단을 다시 세우게 되었다. 그 비구니들은 1998년 3월 12일, 1년 2개월만에 스리랑카에서 또 달리 선택된 23명의 사미니들에게 구족계를 내렸다. 그 일은 스리랑카의 불교 역사 가운데 980년 만에 일어난 뜻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5. 불교 행사(pu?a?)

1) 호주(Maha Paritta)
상좌부 불교에서도 타력신앙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호주(護呪) 또는 호경(護經)이라고 하는 피릿(paritta) 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정토종에서 말하는 타력신앙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점이 있다.

염송 기도의 일종으로 특별한 경전을 암송하는 피릿 의식은 해탈하고자 하는 이유보다는 각종 위험이나 재난, 질병과 횡액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3개월 후의 제사, 1년 후의 제사 또는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도 진행되는 피릿 의식은 12명 이상의 스님들을 각 집으로 모시고 전날 밤 9시경부터 시작하여 다음날 아침 6시쯤에 끝난다.

피릿 의식을 행하는 집은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나뭇잎 등을 이용하여 집안에 의식을 진행할 새로운 장소를 만든다. 의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초대받아 온 친척이나 이웃 사람들이 참석한다. 암송하는 의식을 진행할 때 스님과 재가자들은 함께 긴 실을 잡고 있는데 의식이 끝난 후에 스님들이 그 실을 잘라서 목이나 오른팔에 매어 준다. 이 실은 삼보를 상징하여 세 줄로 되어 있는데 몸에 감고 있으면 육신을 보호하여 건강해지며 아울러 하고자 하는 일도 잘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태국, 미얀마 등 상좌부 불교국에서도 같은 의미로 피릿 의식을 행한다.

2) 보리수 신앙(Bodhi-pu?a?)
타력신앙적인 의식 가운데 또 한 가지는 보리수 신앙이다. 보리수를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부처님이 정각(正覺)을 이루실 때 앉아 있던 성스러운 사물로 여기기 때문이다.27)

보리수 행사는 정해진 날이 없이 개개인이 원하는 때에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의식인데 보름날에는 모든 곳에서 보리수 신앙을 행한다. 이러한 보리수 행사도 각종 위험이나 재난 질병과 액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서, 또는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 축하하기 위해서도 보리수에 물을 붓는 의식을 행한다.

보리수로 부처님을 대신하기 때문에 보리수 앞에 차, 과일, 꽃, 향, 초 등 공양을 올리고 스님을 모시고 스님이 읽어주는 게송과 시 등을 따라하면서 1시간 또는 1시간 반 동안 기도를 올린다.

스님을 모시지 않고도 개개인이 시간 나는 대로 보리수에 와서 물을 부으며 게송을 읽는데 자녀들의 시험, 승진 등 일상에서의 여러 소원들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보리수 주변에 신도들이 없는 시간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3) 패라해라(Perahera)
이 ‘패라해라’라는 행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중심으로 하여 수백 년전부터 시작하여 내려오는 행사이기도 하고 문화재이기도 하다. 백 마리가 넘는 코끼리들에게 옷을 입혀 코끼리 등에 사리를 모시고 많은 악단과 전통 무용수들이 사람들과 함께 시내를 도는 것이다.

현재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안치되어 있는 불치사(佛齒寺)가 중부 지방 한가운데 캔디(Kandy) 시내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에서 매년 7월 초에 시작하여 7월 보름날까지 15일에 걸쳐 행사가 진행되는데 이 행사는 가장 큰 국가적인 축제이기도 하다.

매일 밤 8시쯤에 시작하여 시내에 정해 놓은 길들을 다니며 밤 12시경에 되돌아와 끝나게 되는데 종교의 차별이 없이 온 국민들이 즐기는 한 달 동안의 국가문화재의 행사이다. 마지막 날 밤은 대통령도 나와 구경을 하는데 불치사의 사찰 관리를 맡고 있는 관료들과 지방장관, 시청장들이 그 다음날 캔디의 대통령 관저로 찾아가 이번 해에도 패라해라 축제가 잘 끝났노라고 신고해야 한다. 이것은 옛 왕조 때부터의 전통이다.
패라해라 행사를 진행했던 이유는 부처님을 존경하는 데에도 있지만, 스리랑카는 열대 지방이고 농경사회이므로 ‘비를 내려 달라’는 염원을 담고 있기도 하다. 먼 옛날부터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의식(패라해라)을 행하면 비를 내려준다는 믿음과 국가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는 믿음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불교 예술은 불치사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되어 왔는데 전통 불교 음악, 춤 등 불교 예술을 살리는 행사로서도 큰 의미가 있다. 불치사의 패라해라의 형식을 빌어 수도인 콜롬보의 캘라니야(Kalaniya) 사원에서는 불교 역사상 여러 이야기를 기념하기 위해서 1월 보름에 패라해라를 연다. 또한 2월 보름에 비구 승가사회를 기념하기 위해서 콜롬보(Colombo, Ganga?a?a) 시내에서, 삼장 사경 결집을 기념하기 위해 9월 보름에 알루위하라(Aluvihara) 사찰에서 열리는 패라해라들이 유명하다.

4) 까티나(迦?那, Kat.hina-pu?a?)
7월 보름날에 비구들은 모두 우안거(雨安居: vassa)에 들어간다. 이 날 낮에 비구들이 모두 포살당(布薩堂: uposatha?a?a)에 모여 포살의 의례를 행한다.
저녁에는 마을 신도들이 사찰에 모여 앞으로 3개월 동안 우안거에 들어감을 청하기 위해 가사를 만들 옷감을 보시하며 초대한다. 초대받은 비구들 중 한 명이 법회를 열어 안거에 대해서 설법하며 정진을 다짐하는 약속을 한다.

이 기간 동안에 신도들 중에는 계를 받고 같이 수행을 하기도 한다. 또한 아침·점심으로 스님들에게 공양을 가져다 주며 저녁에는 차 공양을 한다. 안거 3개월 동안에는 비구들은 외국은 물론 타지역을 방문할 수 없다.

10월 보름이면 안거가 끝나는데 10월 보름부터 11월 보름까지 안거에 든 스님들에게 특별한 ‘까티나(kat.hina)’라는 가사를 보시하도록 한다. 이 한 달 동안의 기간을 ‘까티나 치와라 마사(kat.hina-c沖vara-ma?a)’라 한다.

이 특별한 가사는 사찰 주변 지역의 모든 신도들이 돈을 조금씩 거두어 모으고 마을의 모든 사람이 한 땀씩 바느질을 해서 단 한 벌의 가사를 만들어 단 한 명의 스님에게 보시하므로 그 의미가 깊다. 적당한 날을 선택하여 15명 정도의 외부 스님들도 초대하여 이 가사를 보시하는 의식을 진행하게 된다. 이 날 신도들이 가사를 모시고 새벽 4시부터 마을 안의 모든 길을 빠짐없이 다니면서 전통 불교 음악을 연주한다. 그때에 신도들은 자신의 집 앞에 기다리고 있다가 보시를 하기도 한다. 이 가사를 마을에 돌리면 마을의 나쁜 질병들이 사라지고 큰 공덕을 얻는다고 믿는다.

가사를 마을에 돌리고 나서 사찰 안으로 모시고는 스님들에게 점심 공양을 보시하고 ‘까티나’ 가사와 여러 가지 보시물들을 스님들께 올린다. 신도들로부터 보시 받은 ‘까티나’ 가사는 주지 스님과 큰스님들이 안거에 임했던 한 스님을 선택하여 주는데 가장 입을 것이 없거나 모자라는 스님에게 돌아가게 된다. 가사를 받은 스님은 그 가사를 3개월 동안 입고 있거나 항상 함께 해야 한다. 까티나 가사와 떨어져 생활하면 안 되기 때문에 잠잘 때도 머리 옆에 두고 잔다. 그것은 온 동네 사람들의 정성으로 직접 만들어 준 깊은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5) 웨사크와 포선
웨사크(Vesak)는 5월 보름을 말하고 포선(Poson)은 6월 보름을 말한다. 상좌부 불교에 있어서 5월 보름은 부처님의 탄신·성도·열반을 기념하는 날이며, 스리랑카 불교에 있어서 6월 보름은 기원전 3세기에 아쇼카(As쳂oka) 왕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 스님이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 그 두 보름날 사이의 한 달 동안에 스리랑카 곳곳에서 축제가 벌어진다.

웨사크 날이 되면 전국 각 절들은 스리랑카 최대의 명절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한다. 한 달이나 진행되는 행사에는 법회는 물론 길가는 행인을 위한 보시의 집, 불교 연극이나 찬불가 공연을 한다. 또는 부처님의 《본생경》 등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회화나 전구로 등을 장식하여 아치형의 문(thoran.a)을 만들기도 한다. 가정에서도 가족의 소원이 담긴 등을 직접 만들어 걸기도 한다. 친구, 친척, 부모에게 웨사크를 축하하는 ‘웨사크 카드(Vesak Card)’를 만들어 서로 보내기도 한다.

광장에서는 큰 등을 만들어 등 경연대회도 벌이는데 이러한 행사는 각 지역의 청년불교협회에서 주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구경을 하면서 축제를 즐긴다. 그래서 ‘웨사크를 구경간다’고 말한다. 아울러 이 한 달 동안에는 헌혈을 하기도 하고 축제의 제물로 쓰여질 소를 사서 방생하는 의식도 있다.


6. 맺는 말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하여 태국, 미얀마 등 상좌부 불교 나라들의 현황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본문에서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한 것도 스리랑카에 행하고 있는 정통 불교 의식 중 몇가지만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세 나라는 불교를 국교로 삼고, 대다수 국민들은 상좌부 불교를 신앙하며 항상 사찰과 연관하여 살아간다. 스리랑카 불교의 특성은 교학 전통, 학문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고, 태국 불교의 특성은 계율중심주의라는 점이며, 미얀마 불교의 특징은 수행중심주의가 강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상좌부 불교의 수행법은 모두 팔리 삼장과 그 주석서들이라는 전통의 교학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빨리어 경전, 위빠사나 수행 방법, 보시와 공덕, 호주경, 포살, 까티나 행사, 웨사크 기념 행사 등은 상좌부 불교의 전통과 아울러 공통점을 보여준다. 북방의 불교학자들이나 또 다른 국제적인 학자들이 남방 상좌부 불교를 ‘지구상에 살아 있는 불교’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상좌부 불교에서 승단이라는 교단의 강한 힘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난다라타나 
스리랑카 씨얌종파(Siam Nikaya)승려. 스리랑카 승가불교대학교 졸업.현재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상좌부 불교의 주요 수행처와 스승들 (출처 :  불교평론 13호)
 김열권(vipasana@hanmail.net
  
::::: 목 차 :::::

1. 들어가는 말
2. 태국 불교의 수행처와 스승들
3. 스리랑카 불교의 수행처와 스승들
4. 미얀마 불교의 수행처와 스승들
5. 맺는 말

 

1. 들어가는 말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지 1600여 년이 되지만 부처님의 깨달음과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한국불교는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왔고 지금도 선방 수행 체계의 주류나 강원의 교과 과정이 중국 영향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20세기 말부터 교통의 발달과 국제 교류가 불교 쪽에서도 이루어지면서 동남아, 티베트 등으로 유학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 불교의 정체성과 장·단점을 재조명하여 부처님 당시의 근본 불교 쪽으로 수행과 교학을 실천,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흔히 불교를 소승불교, 대승불교 혹은 남방, 북방 불교로 분류하고 있으나, 불교 역사상 소승불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승불교의 일방적인 폄하에서 비롯된 오류였다. 필자 역시 남방에서 승려 생활을 해 보았으나 남방에서는 북방 불교가 힌두교화되었다고 하면서 북방 불교 승려들의 신분조차도 승려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직접 보았다. 양쪽 다 편견 속에서 자신들의 입장만 고수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깨달음은 부처님의 정확한 가르침과 수행법을 이해하고 실천할 때 가능하다. 필자 역시 교학 공부의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화두 수행을 10년 정도 하고 부처님 당시 불교의 원형에 비교적 가깝다고 여겨지는 수행법을 찾고자 1989년 미얀마로 출가했다. 그 후 계속 위빠사나 수행을 해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느낀 것은 남방, 북방 불교의 차이점은 빨리어 경전인 니까야와 산스끄리트인 아함경, 대승 경전을 보는 아비담마 논서에 있는 것이다. 남·북방 불교의 상호간의 오해를 불식하고 좀더 깊이 이해하여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여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아비담마 교학의 비교 연구와 근본 경전인 니끼야와 아함경에 바탕을 둔 수행 실천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완전히 깨달은 아라한들의 체험에서는 남·북방이 없고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지만 편견에 사로잡힌 일방적인 시작과 중간 단계의 수행 체험에서 오는 섣부른 결론은 근본 불법에서 멀어져 집단적 편견과 집착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수행법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방 불교를 보다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남방의 주요 불교 국가인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불교의 알려진 수행처와 그 수행처의 스승들 및 가르침과 수행의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겠다. 참고로 남방 불교의 자료는 가산불교재단에서 발간된 《남방 상좌 불교 승가공동체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 중 일중 스님과 정원 스님의 논문, 스리랑카에서 교학과 수행을 수년간 공부한 아눌라 스님의 자료와 필자가 번역한 《위빠사나 열두 선사》에서 주로 발췌했다.


2. 태국 불교의 수행처와 스승들

필자가 태국에서 수행한 것은 1989년과 1990년 사이 촌부리에서였다. 처음 태국에 갔을 때 통역을 해준, 태국에서 수년 동안 머문 구로담모라는 인도 승려가 계율의 중요성을 얘기해 주었다. “미국에서 온 흑인 한 명이 태국에서 비구가 되었는데 어느 날 옛날 여자 친구가 찾아왔다. 그 여자 친구와 파타야 해변을 거닐고 있었는데 그때 태국 시민 한 분이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일간 신문에 공개했다. 과연 스님이 이렇게 행동을 해도 되는가? 결국 그 흑인 스님은 비구 옷을 벗고 일반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스님이 정오가 넘어서 시내에서 식사를 하면 일반인이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이 그 스님을 절로 돌려보낸다. 계율을 파하려면 일반인으로 돌아가서 파하고 승복을 입고 있는 한 부처님의 계율과 수행을 엄수해야 한다는 것이 태국 승려들과 시민들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남방 불교의 모든 수행은 빨리어 경전, 아비담마, 《청정도론》이 중심이다. 주로 호흡 관찰법인 아나빠아나 삿띠를 중심으로 하면서 이를 응용한 수행과 사마타 수행이 가미된 수행법으로 나눌 수 있다. 이를 지역 별로 살펴보겠다.


왓 파 반타트(Wat Pah Ban Thad)
태국어로 왓은 사원이라는 뜻이다. 아짠문(1870∼1950)의 제자인 아짠 마하부와(1914∼ )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아짠문은 두타행이라고 할 수 있는 숲속 수행을 부활한 전설적인 20세기 최고의 선사이다. 그는 숲속 수행을 통하여 아라한과를 성취하여 숙명통과 천안통까지 겸하여 인간 세계는 물론 천인들까지 제도하였다. 그의 수행의 특징은 아나빠아나 삿띠를 중심으로 수행하는 것인데 초보자가 삼매에 들기 어려울 때는 “붓도(Buddaho)”라는 염불을 겸해서 관찰하도록 한다. 이것은 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수행법 중 하나이다. 향후 우리 나라 염불선에 이 수행법이 도입되면 많은 재가 신도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본다.

아짠 마하부와는 염불식 아나빠아나 삿띠와 염불식 경행(Walking meditation) 외에 부정관, 시체관도 예비 수행으로 다루고 있다. 계·정·혜를 강조하고, 지혜 수행은 전통적인 오온에 대한 관찰을 중심으로 한다. 아짠 마하부와는 사마타 선정과 위빠사나 수행에 정통하고 있으며 그의 가풍은 엄격하고 맹렬하다. 현재는 연세가 많아 외국인도 친견하기가 어렵다.


왓 농파퐁 (Wat Nong Pah Pong)
1954년 아짠 차에 의해 숲속에 설립된 사원이다. 30개 이상의 말사가 있다. 아짠 차는 태국의 여러 선지식과 아짠문의 지도를 받았으며 1992년 입멸하였다. 그는 자연스러운 수행을 강조하며 1일 1식을 공양하게 했다. 망상이 있으면 ‘붓도’, ‘담모’, ‘상고’나 혹은 ‘붓도’를 염송하면서 관찰하게 한다.

일단 심신이 고요해지면 호흡, 몸, 마음의 흐름을 관찰하게 한다. 매일 매일 수행 점검은 하지 않고 법문을 통하여 수행을 지시하고 질문이 있으면 언제든지 상담에 응한다. 특별한 테크닉은 강조하지 않고 “모든 수행은 단지 마음의 균형과 무집착 그리고 비이기성을 계발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강조한다. 보통 때 20∼30명 정도가 수행하며 우안거 중에는 100여 명 정도의 승려가 수행한다.


왓 파나나차(Wat Pah Nanacha, International Forest Monastery)
아짠 차에 의해 1975년 설립된 외국인을 위한 선원이다. 비구 6명, 사미 6명, 10여명 정도의 재가 신도가 머문다. 아짠 차의 가르침 중심으로 아나빠아나 삿띠(호흡 관찰법)를 수행한다. 하루에 일식만 공양하고 매일 아침 태국어로 1시간 정도 설법한다.


왓 람뻥(Wat Ram Poeng, Northern Vipassana Center)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의 위빠사나 수행을 실천한다. 아짠 통(1924∼)에 의해 1975년에 설립되었다. 말사가 20여 개 된다. 그는 마하시로부터 직접 2년간 지도를 받았다. 매일 매일 수행자들은 몇몇 지도 법사들에게 점검을 받는다. 처음에 온 수행자는 26일간 기본 코스를 거쳐야 한다. 마지막 3일은 주야로 용맹 정진한다. 우안거 때는 150명 정도의 승려가 있으며 보통 때는 승려 70명, 외국인 20명, 여성 출가 수행자(매치) 20∼30명 정도이다.


수완 목(Suan Mokkh)
이 사원은 1932년 아짠 붓다다사(1906∼1993)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박학다식한 위대한 학자였다. 그는 의식 중심의 태국 불교를 교리와 수행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는 수많은 담마에 관한 저술과 훌륭하면서도 소박한 법문을 통하여, 태국의 불교 수준을 단순한 의식(儀式) 수준에서 어떻게 평화가 무집착으로부터 오는가 하는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해왔다.

아짠 붓다다사는 자연스러운 선정과 지혜의 길을 강조한다. 그는 “자연스러운 선정과 지혜의 길을 요약하면, 아무것도 가질 만하고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는 진리를 매일 그리고 온종일 생활 가운데서 실증해 나감으로써 열반과 자유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자유를 체험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정화하고 모범적인 인격을 계발하기 위해 분투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정화로부터 그 자신 내부의 정신적 기쁨을 일하면서 여가를 즐기는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내관으로부터 참으로 가질 만한 것은 없고 될 만한 것은 없다는 지혜가 일어나고, 마음은 지금까지 붙잡아 왔고 매달려 왔던 대상에 대한 모든 욕망을 버린다. 이미 어디에도 머무를 곳이 없어 고통은 줄어들고 고통을 제거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이것이 그 보답이다. 그것은 우리들 중 누구에 의해서도 자연스럽게 얻어질 수 있다. 집착을 초월하고 어떠한 경험이나 대상을 ‘나’ 혹은 ‘나의 것’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초월한 내적 평화가 최고의 청정심이고, 이것이 진정한 붓다의 자유이다.”라고 말한다.

특히 호흡 출입관인 아나빠아나 삿띠의 교재(현재에 필자에 의해 편역 중임)은 이 분야의 책 중 가장 상세하고 광범위하게 다루어져 있다. 특히 그는 남방 불교의 교과서격인 《청정도론》도 비판적으로 보고 삼세양중인과의 12연기설도 아트만 사상이 깔린 것으로 비판하면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했다.

수완 목에서 1.5Km 떨어진 국제 수행림(International Dhamma Hermi-Tage)이 있는데 이곳에는 10일간의 집중 코스가 있다. 수행법은 아나빠아나 삿띠가 중심이다. 평소에는 50여 명의 승려, 10여 명의 외국인 수행자들이 있다. 수안 목의 말사격인 왓 우몽(Wat U Mong)에서는 아짠 붓다다사의 아나빠아나 삿띠를 기본으로 수행하지만 마하시 방법의 위빠사나나 다른 수행법도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왓 마하타트(Wat Maha That)
방콕 시내에 있는 이 사원은 18세기에 창설된 사원으로 불교의 중요한 센터로서 기능해 온 사원이다. 수행법은 마하시 위빠사나 방법으로 위빠사나 지혜의 16단계에 대해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곳에 한 달 머물면서 수행할 수도 있고 출퇴근하면서 지도받을 수도 있다.


왓 팍남(Wat Pak Nam)
이곳에는 200여 명의 승려가 거주하고 외국인도 10여 명 살면서 빨리어를 공부하기도 한다. 이곳의 수행법은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결합된 것이다. 프라 몽콜 剃무니(1884∼1959) 원장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삼마 아라한(Samma Arahan)’이라는 만트라를 마음속으로 염하면서 ①수정을 사용한 광명편(Aloka-kasina)을 집중 대상으로 사용한다. ②그 다음은 북부 중심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③다음에는 18단계의 법신관이다. 이 수행법이 사념처와 결합되어 수행이 향상됨에 따라 법신으로 형상화된다는 독특한 수행법이다. 광명편이 몸 중심에서 둥근 빛이 폭발하듯이 생겨나면 비로소 담마카야 본 수행에 들어선다. 이것이 1단계이고 1단계가 사라진 후 몸의 중심에서 18단계의 신체가 순서대로 나타난다. 18단계의 신체를 관찰하면서 아라한이 된다.


위潽아좀(Viwea Asom Vipassana Metitation Center)
방콕에서 60Km 떨어진 촌부리라는 작은 도시에 위치한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 센터의 태국 지부이다. 필자는 이곳에서 7개월간 원장인 아짠 아삽하(Ajahan Asabha, 1910∼ )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1953년 미얀마 정부에 태국 정부의 요청으로 파견된 두 사람의 마하시 제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이곳에서 40여 년간 10만 명의 수행자를 지도했다. 한국 승려들도 이 곳에서 몇 분 수행하였다. 치앙마이의 아짠 통, 왓 마하타트의 아짠타르싯디무디도 그의 수행지도를 받았다. 특히 아짠 아삽하는 마하시의 수행법을 원형 그대로 전수한다. 다른 마하시 제자들은 조금씩 변형해서 가르친다고 지적했다. 이곳에는 3∼4명의 지도 법사가 상주하고 승려는 보통 60여 명, 재가자는 100명 정도, 외국인은 10∼20명 정도 수행하고 있다.


왓 사이감(Wat Sai Ngam)
방콕에서 북서 방면으로 떨어진 수행 센터로 1970년대 아짠 담마다로(1914∼ )에 의해 창설되었다.
아짠 담마다로는 그의 명상에서 감각(혹은 감정)에 대한 마음집중을 강조한다. 변화하고 있는 감각에 대해 끊임없이 마음집중함으로써 우리들의 모든 체험이 순간순간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그는 말한다. 왜냐하면 형상(色)과 감각은 모든 오온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아짠 담마다로는 몸과 느낌에 심지어는 내적 진리를 체험하는 직접적인 수단으로서 미묘한 마음의 변화에서 인식되어지는 감각에 대한 순간순간의 알아차림을 유지하도록 한다.

명상의 계발을 설명하는 데 있어 그는 감각에 대한 마음집중이 어떻게 해서 심장 근저에 있는 모든 감각을 바로 경험하게끔 하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모든 경험 심지어 마음까지도, 심장 근저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감각으로서 명백하게 인식될 때, 우리들은 무상·고·무아를 본다. 이것으로 해서 우리들은 가장 심오한 진리, 고의 멸, 열반의 체험에 도달한다3)고 아짠 담마다로는 가르친다.

아짠 담마다로가 가르치는 수행법은 다음과 같다.
손바닥 중앙에 마음을 집중하여 움직이면서 가슴으로 관찰한다. 경행도 역시 발바닥의 느낌을 가슴으로 관찰한다. 남방에서는 마음이 가슴속에 머문다고 보고 있으므로 모든 6근, 6식의 느낌을 가슴의 마음과 동시에 관찰한다. 특히 손바닥, 발바닥을 관찰할 때에는 온몸에 기(氣)가 돌아가므로 기 수련을 많이 하는 우리 나라에 이 수행법이 각광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아짠 담마다로의 제자 15명이 이 수행 센터에서 지도하고 있으며 승려가 120명, 여성출가자인 매치가 120명, 일반 신도가 50명 정도 수행하고 있다.


왓 스라케트
아짠 나에브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방콕에 위치하고 있다. 그녀는 35세 때 출가하여 불교 심리학과 위빠사나를 수행한 후 12년 후에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아짠 나에브는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행동에서 고통의 원인과 결과를 보게 하는 단순한 접근법을 사용한다. 특히 자세의 움직임, 몸의 동작에서 고통의 원인을 보게 한다. 모든 움직이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부터 관찰하게 한다. 이 과정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고통을 종식시키고 붓다의 행복으로 바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아짠 나에브는 담마에 관한 중요한 사항들을 체계적으로 언급하였는데, 수행하기 전에 올바른 개념적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그녀는 지혜 명상과 선정 명상의 구분을 강조한다. 선정과 특별한 수행에 대한 어떠한 집착이라도 지혜 계발에 방해가 되고, 지혜는 현재 순간의 마음과 몸을 직시함으로써 온다고 가르친다. 지혜 수련에 있어서 지혜가 일어나는 것은 몸과 마음을 직시하는 것을 통해서만 일어난다고 그녀는 강조한다.아짠 나에브가 설명하는 위빠사나는 《청정도론》의 16단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왓 수콩타와즈
아짠 줌니엔이 원장이다. 그는 6세 때부터 수행을 시작하여 갖가지 여러 수행법들을 편력했다. 특히 사람들의 개성에 따라 다르게 수행법을 지도하여 결국엔 무상·고·무아의 삼법인을 보게 하여 해탈로 나아가게 한다. 아짠 줌니엔은 많은 수행법을 근기에 맞추어 가르치는 완전히 개방적인 스승이다.

그는 여러 다양한 수행법을 익혔으며, 한 방법만 고수하기보다는 제자들의 필요성이나 개성 혹은 특별히 선호하는 것에 따라 다양한 수행법을 제시한다는 것이 그의 지도의 특징이다. 그러나 어떤 테크닉을 계발하더라도, 결국은 제자들에게 몸과 마음의 본성을 무상·고·무아로 보게 하는 지혜 수련으로 귀일하도록 이끈다.

“수행자가 법에 향상하고 못하고는 자신에 책임이 있다. 우리들은 비록 특별한 명상 테크닉을 당분간 이용하지만 수행은 우리들 모두에게 전 인생의 과정이며, 수행은 모든 고통을 종식시키고 궁극의 평화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

아짠 줌니엔은 자비관을 예비 수행으로 하면서 무집착을 강조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아짠 담마다로의 수행법을 이용한다. 보통 100∼200명 정도의 승려와 10여 명 정도의 서구인들이 있다


이상에서 태국의 주요 수행처와 스승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태국에서의 불교 수행은 ① 아짠 붓다다사와 같은 아나빠아나 삿띠 중심의 전통 수행법과 ② 아짠 문의 염불식 위빠사나, 담마카야 수행의 광명편, 아짠 담마다로의 기 수행과 관련된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결합된 수행 ③ 미얀마에서 들어온 마하시 위빠사나 등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3. 스리랑카 불교의 수행처와 스승들

스리랑카는 필자가 가보지 않아 일중 스님의 연구서와 아눌라 비구니 스님의 자료에 의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스리랑카 불교가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경위와 수행처의 구분 등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한 다음 수행처와 스승들에 대해서 소개하기로 한다.

1) 스리랑카 불교에서의 수행의 일반 양상

수행 부흥 운동
2,300여 년의 불교사를 가진 스리랑카에서 면면히 내려오는 수행 전통의 맥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원래 선교(禪敎) 일치였으나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하여 교학 전통 위주로 내려왔다. 마지막 아라한으로 전해오는 말리야데와 스님은 기원전 2세기경 사람이다. 그 이후 대석학이라고 불리우는 학승들은 역사 속에 여러 번 등장하지만 아라한은 찾아보기 힘들다. 교학이 삼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수행은 계·정·혜 삼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스리랑카 승가는 400여 년 동안 서양의 식민지 세력 아래에서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위빠사나 운동은 1950년에 불자 지식층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랑카 위빠사나 수행회’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마하시 사야도에게 지도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마하시 사야도의 제자 4명이 콜롬보에 파견되면서 현대적인 수행 체계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마하시 사야도의 수행법이 소개되면서 초기 경전에 근거를 둔, 전통을 주장하는 신전통주의자와 개혁주의자들의 두 그룹으로 갈라졌다.

개혁주의자의 5가지 견해는 ①현 시대에도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다. ②일반 신도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 ③교학에 대한 이론을 공부하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다. ④아라한이 되기 위해 반드시 승려가 될 필요는 없다. ⑤사마타 수행을 무시하고 위빠사나만 강조하면서 코끝이 아닌 배의 일어남, 사라짐의 현상을 관찰하라는 마하시 수행법은 대승이나 탄트라 수행법이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아니다.

그러나 이 수행법으로도 궁극의 목표에 도달할 수는 있다(마얀마에서의 마하시 방법이 전통이 아니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마하시 선사는 직접 경전에 근거하여 책까지 저술하여 논박하였다). 개혁주의자와 신전통주의자 간의 논쟁 결과로 스리랑카에는 새로운 아란냐와 명상 센터가 생겨났다.


승가의 수행법
승가에서는 수행 방법의 근거를 다음 네 가지에 두고 있다

① 경전과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에 의한 방법
② 전적으로 경전에만 의존한 방법
③ 미얀마의 마하시 전통을 따르는 방법
④ 위의 세 가지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방법

숲속에 거주하는 아란냐 수행승들은 근본 불교의 가장 전통적인 아나빠아나 삿띠(호흡관)와 삿띠빠타나(사념처), 붓다의 공덕을 기리는 염불 수행법인 붓다누삿띠, 자비관, 부정관, 시체관, 까시나관 등을 실천 수행한다.


아란냐 (숲속 수행처)와 수행 센터
아란냐 수행승들은 숲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수행으로 보낸다. 계율에 철저하며 하루 한끼만 먹고 돈을 만지거나 소유하지 않는다. 일상 생활에도 침대, 방석, 가사, 바루, 물주전자, 책 몇 권이 전부이며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산다. 수행의 기준은 경·율·논에 두고 있다.

아란냐 명상 센터는 30여 군데 있다. 사원이 8천여 개가 되는데 그 중 170여 곳이 아란냐이다. 3만여 명의 승려 중 1000여 명이 아란냐 수행승이다.


2) 주요 수행처와 스승들

삼스타아란냐(Sri Kalyani Yogasrama Samsthava)
지나왕사 스님이 1950년에 설립했다. 18세 이상 소년들에 한하여 승려가 되며 1년 동안 흰색을 입고 수행한 후 희망자에 한하여 아란냐 수행승으로 적격자라고 판단될 때 계를 수여한다. 지부가 96개가 된다. 그 중 니말라와 아란냐는 남부 해안에 바위 동굴이나 바위에 의지하여 꾸띠를 갖추고 있다.

16개의 꾸띠(원두막같은 방)가 있으며 외국 승려가 이 곳에 머물고자 한다면 일정 기간 테스트를 받은 후 가능하다. 또한 무문관과 같은 미트리갈라 아란냐도 있다. 이곳은 ‘열반 아니면 죽음’만 있을 뿐, 한 번 이곳에 들어오면 죽기 전까지 수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한 번 이 아란냐에 들어오면 과위를 성취하기 전에는 아란냐를 떠나지 않는다.
② 재가든 승려든 아란냐 밖의 사람들과 말하지 않는다.
③ 불교의 제반 문제에 대해 기사나 편지를 쓰지 않는다.
④ 숨이 다할 때까지 수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⑤ 해탈을 하기 전에는 법을 설하지 않는다.


아일랜드 헐미티지(Island Hermitage)
고요한 호수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15개의 꾸띠가 있다. 1911년 유명한 독일 비구승 나먀띨로까 스님이 설립했다. 그의 제자 냐냐몰리, 냐냐뽀니까 스님이 여기에서 공부했다. 이들은 빨리어 경전을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하여 세계 불교 포교에 커다란 위업을 남겼다. 이 수행 센터에서 수행하려면 법랍이 10년 이상 되거나 스승 밑에서 5년 이상 수행 지도를 받은 비구승이어야 한다.


와 투 루윌라 아란냐(Waturuyila Aranna)
1954년 와투루왈라라 스리 냐나난다 스님이 창건했다. 현재 50여 명의 스님이 수행하고 있으며 여러 개의 분원을 가지고 있다. 그 분원 중 살갈타 아란냐는 하루 일종식하며 자유롭게 수행한다.

칸두보다 명상 센터(Kanduboda Meditation Center)
1956년 마하시 사야도의 제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12개의 분원이 있다. 20여 명의 승려들과 사부 대중이 함께 수행한다. 60∼70명 정도가 상주한다.

닐람베 명상 센터(Nillambe Meditation Center)
1979년 재가 불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대승불교의 참선, 요가, 힌두 수행법도 근기에 따라 실천하도록 인정하고 있다. 외국인 수행승들이 보통 35명 정도 머물고 있으며 수행 시간과 수행법이 자유로운 것이 특징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국내에서 스리랑카 하면 교학만 발달된 불교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수행도 많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끝으로 현재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두 분의 스님을 소개하면서 개략적이나마 글을 맺고저 한다.

비구 보리 스님
1944년 뉴욕에서 태어나 클레어몬트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72년 스리랑카에 와서 비구가 되었다. 테라와다 불교책의 저자이며 경과 주석서를 포함한 많은 책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1984년 이래로 BPS(Buddhist Publication Society)의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수행법은 경전에 근거한 정통 위빠사나를 수행하고 있으며 어떤 수행법에 대해서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수행의 목적을 선정과 탐 진 치를 제거하는 데 두고 있다.


냐나난다 스님
스리랑카의 페타데니하 대학에서 빨리어를 가르치는 아주 명망 높은 교수였다. 교수직을 그만두고 아란냐로 돌아가 15년 이상 세상을 멀리하고 수행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마음의 마술쇼(The magic of the mind)》 《초기 불교사상의 개념과 실제》 등이 있다.

하루 일종식을 하며 동굴에서 머물렀다. 그의 수행법에서는 자비관, 죽음관, 부정관, 염불관(Buddahanussati)을 먼저 한 후에 위빠사나 본 수행에 들어간다. 위빠사나 수행은 마하시의 수행법처럼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두 번 정도 알아차리고는 1차 명상 주제인 일어남, 사라짐으로 돌아오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4. 미얀마 불교의 수행처와 스승들

필자가 미얀마에 간 것은 1989년 4월이었다. 도착 후 비구계를 받고 탁발을 나갔는데 3살 정도밖에 안 되는 아이들이 스님이 지나가면 합장을 한다. 그리고 부모님들과 함께 매일 아침 공양을 스님께 올린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자비 교육이 실시되고 방학이면 초등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머리를 깎고 사미가 되어 절에서 경전을 공부하고 수행을 시작한다. 승복을 입고 밖에 나가면 신도들이 땅바닥에 엎드려 그대로 삼배를 올린다. 스님들은 매일 아침 비구계 250계를 외우면서 일과를 시작하는 분도 있고 사소한 계율을 파하면 선배 스님에게 참회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들은 삶 자체가 하나의 불교 수행이다.

미얀마에는 다양한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수행법이 있다. 수행법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겠다. 미얀마의 대표적인 수행 체계는 데이리 사야도의 수행법, 마하시 사야도의 수행법 그리고 기타 수행 선원의 그것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마하시 위빠사나 선원(Mahasi Vipassana Yeiktha Meditation Center)
마하시 사야도는 1904년에 태어나 6세 때부터 불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비구가 된 후에는 교학에 한계점을 느껴 밍군 사야도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28세 때(1932년) 4개월간 용맹 정진을 했다. 1941년에는 법사과정 시험을 통과한 후 1949년 우누 수상의 부탁을 받고 지금의 마하시 선원으로 오게 되었다. 현재는 마하시 분원만 해도 미얀마에는 400개가 넘으며 이곳을 거쳐간 수행자만 해도 백만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의 방법은 전통적인 아나파아나 삿띠(호흡관)가 코끝을 관찰하는데 반해 좌선시에는 배의 움직임을 주로 관찰하고 걷는 수행인 경행을 병행한다는 특징이 있다.

기타 일반 생활 속에서 행동과 동작 속에서 지, 수, 화, 풍의 4대를 관찰하는 것을 위주로 수행한다. 특히 1주일에 한 번씩 큰스님이 설법하시고 매일 1∼2일에 한 번씩 수행 상태를 점검하는 면담은 단 시일내에 빠른 효과를 나타낸다. 필자도 그곳에서 통역도 해보고 수행을 해보았지만 한국에서 혼자서 수행할 때보다 휠씬 효과가 좋았다. 그곳에서 수년동안 통역을 한 분들의 공통적인 결론은 혼자서 10년 수행하는 것보다 이곳에서 지도를 받으면서 수행하는 1년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하시 선원에서는 노스님들이 어린 사미나 젊은 비구들을 직접 지도하고 1년에 한번씩 각 분원의 지도 스님들이 모여서 효과적인 가르침과 수행에 도움이 되는 방법들에 대해서 연구를 한다. 그 결과 본인이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고 그곳의 지도를 받는 대로 수행하는 한 매일 매일 수행의 진전을 확인할 수 있다.

《대념처경》에 의한 4념처를 대상으로 한 위빠사나로 하루 16시간 동안 좌선과 경행을 번갈아 하며 계속 수련한다. 마음집중에 대한 마하시의 접근법은 어느 한 가지 대상에만 몰두하는 사마타 계발은 없고 처음부터 지혜 수련인 위빠사나로 시작하여 심도있게 계발한다. 그리하여 몸과 마음의 순간순간 변화의 특성을 알아차리게 한다. 순간순간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단순히 보다 깊게 보다 명확하게, 있는 그대로 관찰하였을 때 수행은 깊어지고 지혜는 가장 깊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계발된다. 제일 먼저 마음을 배에 집중하여 배의 수축과 팽창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배가 팽창될 때 움직임이 일어남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배의 모양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으로 생긴 육체적 감각을 자각하는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현재에 머물지 않고 과거, 미래를 왔다갔다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순간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관찰해야 하며, 그럴 때 무상·고·무아의 진실을 보게 되며 정신과 육체의 자연적인 과정을 수행자 스스로 체험하도록 이끄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날마다 법문과 점검(인터뷰)을 통해 개인 개인의 수행력을 바르게 잡아 주는 것도 큰 특징이다.

여름 방학 때는 초등하교 학생들이 1,000여 명 이상씩 이곳에 와서 사미계를 받고 수행과 이론 공부를 배운다. 보통 때도 미얀마 승려가 150명 이상, 재가 신자가 250명, 외국인 수행자가 30여 명 정도이다. 이 선원은 3,000여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

철저히 오후 불식을 지키며, 하루에 3∼5시간의 수면 이외에는 하루 종일 수행만 해야 하고, 대화를 하다가 몇 번 지적당하면 퇴출당한다. 양곤에도 마하시 선사의 제자인 우빤디따 선사의 빤디따라마, 우자나카 선사의 참매이 선원, 쿤달라비왐사의 삿담마란시 수행 센터 등이 있다.
한 분의 위대한 선사가 출현함으로써 그 영향이 미얀마 전역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에 얼마나 거대하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를 마하시 선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쉐우민 위빠사나 센터(Shwe Oomin Dhamma Sukha Tawya)
양곤에 위치한 이 센터는 마음 관찰 위주로 수행한다. 마하시 제자라고도 전해지는 쉐우민은 연세가 93세나 된다.

모든 행동과 좌선할 때에도 가슴에서 느끼는 마음의 상태를 주로 관찰하므로 향후 우리 나라의 ‘이뭣고’ 화두와 상호 보완한다면 훌륭한 수행법이 되리라 본다. 특히 무엇을 하든 평등심을 유지하면서 욕망과 성냄을 제거하게 한다. 지금 현재 한국인 수행자가 30여 명이 넘고 지도는 쉐우민 사야도의 제자인 중국인 지도 스님이 맡고 있다. 새로운 건물을 증축하여 많은 사람들이 수행하고 있다. 한국의 청현 비구니 스님이 통역하므로 쉽게 수행할 수 있는 곳이다.


순룬 불교 수행 센터(Sunlungu Buddhist Meditation Center)
순룬 사야도(1878∼1952)는 미얀마 밍양 근처에 있는 순룬 마을의 동굴 사원 출신이다. 나이 30에 직장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업에 종사하다가 재산이 갑자기 증식되었다. 미얀마에는 갑자기 재산이 늘어나면 죽게 된다는 전설이 있어 그는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던 중 한 스님을 만나 아나빠아나 삿띠(호흡관)를 배워 농사를 지으면서 아나함과를 성취했다. 1920년 중반 그의 부인을 설득하여 스님이 되어 1개월 만에 아라한과를 성취했다. 모두 4개월 만에 아라한과를 실현한 것이다.

특히 그의 제자 냥룬 사야도는 7일 만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불교 이론에는 무지하지만 그가 얻은 체험은 어떠한 불교학자의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게 했다. 랭군에 4곳, 전국에 100개 이상의 지부가 있다. 특히 수행 전에 1시간 정도 격렬한 ‘들’, ‘토’ 호흡을 한 후에 3시간 이상 움직이지 않고 좌선하게 하는 특징이 있다. 좌선 시에는 주로 감각을 관찰하는데 몸을 움직이지 않고 계속 몸의 고통이나 호흡의 감각을 관찰한다.

순룬 사야도의 명상 지도자들은 다른 수련법들도 가능하다고 인정은 하지만 그들의 방법이 가장 명쾌하고 단도직입적인 길이라고 강조한다. 그들은 아짠 차와 아짠 붓다다사의 자연스러운 방법은 너무 느리고 간접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하시 사야도와 타웅푸루 사야도와 같은 기법은 직접적인 지혜 계발이 아닌 개념을 통한 집중 계발이라고 비판한다.

순룬 수련의 열쇠는 감각을 직시하는 데에 집중하는 강렬한 노력에 있다. 고통과 산만함을 극복하게 하기 위하여 전심전력하는 것이 순룬 사야도의 방법이다. 강한 호흡에 대한 집중력과 감각은 수행자들을 산만하게 하는 많은 장애들을 쉽게 극복하게 한다. 순룬 수행법은 혼침의 상태에 있는 마음을 맑게 깨우고 수행자를 맑고 집중된 상태로 이끌어 준다는 특징이 있다.

현재 중부 미양잔의 순룬 센터에는 순룬 사야도의 시신이 아무런 화학적 처리도 하지 않은 채 50여 년 동안 안치되어 있다. 이것은 아라한 과위와 관계없이 독특한 호흡법에 있다고 한다. 필자도 회원들에게 이 호흡을 수련한 후에 위빠사나를 수행하게 하니까 쉽게 망상과 졸음이 극복되어 집중이 잘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에 따라 위빠사나도 사마타의 예비 수행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우바킨 국제 수행 센터(International Meditation Center)
우바킨(1899∼1971)은 정부관직에 있던 40세에 수행을 시작하였다. 이곳은 재가자를 위한 수행 센터로 승려들은 이곳에서 수행을 할 수 없고 재가자만 수행한다. 그의 스승 역시 재가자인 사야 테토지(Saya Thet Gyi) 밑에서 피나는 수련을 하였다. 이론보다는 직접적인 체험을 강조한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몸 전체의 감각 위주로 관찰한다. 처음에는 아나빠아나 삿띠를 통해 호흡으로 몸과 마음을 안정시킨다. 그 다음에는 몸 전체의 감각 변화를 관찰하고 나중에는 몸의 미립자인 깔라빠를 관찰하여 몸과 마음에서 무상·고·무아를 느끼게 하는 수행법이다. 하루에 8시간 좌선을 기준으로 한 번의 좌선 시간은 초보자는 1시간, 고참자는 2∼3시간씩 수행한다. 10일 코스가 기본이다.

마얀마에는 지부가 없고 영국을 중심으로 15개의 지부가 있다. 인도에 있는 유명한 고엔카가 우바킨의 제자이다. 고엔카(1924∼ )는 1955년 우바킨을 만난 후 14년간 수행하였으며 1969년 인도 봄베이에서 위빠사나 센터를 설립하여 세계 각지에 많은 지부를 두고 있으며 지도자만 해도 250명에 이르고 있다.

모곡 수행 센터(Mogok Meditation Center)
모곡(1899∼1962)은 레디 사야도의 제자로 아미담마 교수로서 30년 이상의 세월을 보냈다. 어느 날 자신이 가축을 돌보지만 가축들이 만드는 우유는 맛볼 수 없는 목동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교수직을 버리고 수행에 맹렬히 몰두했다. 그가 주장하는 수행법의 특징은 우선 12연기와 오온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하게 한 다음 수행으로 그 과정을 체험하게 하는 데 있다.

모곡 수행 센터는 모곡 사야도가 입적한 후에 그의 제자에 의해 설립되었고 7명의 재가 신자에 의해 운영된다. 양곤에 10개, 전국에 228개의 지부가 있다. 정기적인 10일 코스가 있으며 매 코스에 100명 정도가 참석한다. 5시간의 법문과 8시간의 수행 시간으로 짜여져 있다.


기타 수행 센터
지면 관계상 수행 내용 위주로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타웅푸르 사야도 명상 센터는 부정관을 중심으로 몸의 32부분을 관찰한다. 몸에 대한 마음 챙김을 맛보지 못한 수행자는 죽음을 초월하지 못한다고 강조하면서 몸의 32개 부분을 6그룹으로 나누어 165일 코스를 수련한다.

짜우신 명상 센터(Kyauk Sin Tawya Forest Monastery)에서는 두타행을 수련한다. 탁발시에 여자 신도 손을 슬쩍 스치기만 해도 6일간 94가지 벌칙을 받으면서 제일 나쁜 곳에 있어야 한다. 외부 챵 센터에서는 하루종일 호흡만 관찰하게 한다. 파욱 명상 센터는 필자의 《보면 사라진다》에 소개한 수행법이다. 40여 가지의 사마타 수행이 있고 4선정 중심으로 몸에서 깔라빠를 관찰하여 16단계를 거치게 하는 수행법이다. 현재 서구인들이 많이 찾아간다. 이상 개략적으로 살펴 본 바와 같이 미얀마에는 전통적인 수행법인 레이디 사야도에 의한 아나빠아나 삿띠와 마하시 사야도의 동작 관찰로 대별될 수 있다. 기타 파욱 사야도 등 다양한 수행법이 있다.


5. 맺는 말

“중생의 정화(淨化, 心淸淨)를 위한 근심과 슬픔(苦)을 극복하기 위한, 진리의 길을 건너기 위한, 열반을 증득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념처(위빠사나)이니라.”라고 붓다는 《대념처경》에서 설파하고 있다.

경전상의 해석은 지역에 따라, 종파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수행법만큼은 남방이든 북방이든, 한결같이 사념처 위빠사나가 붓다가 발견한 유일한 수행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누구나 실제로 분별과 집착 없이 수행해 보면 똑같은 체험과 경지에 도달한다. 문제는 끝까지 도달하지 않고 중간 단계의 과정에 집착해 있는 것이라고 본다. 고해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에겐 뗏목과 나침반이 필요하다.

도달한 후의 일은 미래의 일이다. 교리의 논쟁이나 추론에 앞서 가장 절실한 것은 체험에서 얻은 해탈 지혜이다. 담마(達磨)도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법을 총섭한다고 했다. 우리가 정확한 수행법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전심전력으로 실천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탐·진·치의 화살을 뽑고, 마음을 정화하고, 모든 정신적 갈등과 생사의 고해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철견할 수 있는 지혜를 얻고 열반을 증득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원고에서 남방 불교 3개국의 주요 수행처와 스승들을 소개하였는데, 각 수행처에서 실천되고 스승들이 가르친 방법은 서로 다르게 보이거나 심지어는 상반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탐·진·치의 삼독을 제거하고 그대로 여실히 몸과 마음을 철견하는 것으로 이끈다는 점이다.

 
김열권 
고려대 경영대학원 졸업. 1990년 미얀마 마하시 명상 수도원으로 출가, 한국인 최초로 미얀마에서 비구계 받음. 태국, 미얀마, 말레이시아의 수도원에서 위빠사나 수행. 현재 위빠사나 선원,불교방송국 등에서 위빠사나 지도.편저로 <위빠사나 1,2>역저로 <고요한 숲속의 연못><위빠사나 열두선사>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