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37조도품 법문

다섯 가지 장애와 칠각지 (2010.03.26) (삼보회상, 청법게송, 청오계문 독송 포함)

담마마-마까 2019. 8. 16. 21:50

https://youtu.be/AHv4Q095eEQ

* 다섯 가지 장애와 칠각지 (2010.03월)

 

오늘은 다섯 가지 장애와 칠각지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상응부 경전에 「싱갈라와 숫따」라고 하는게 있는데, '싱갈라와'에게 부처님이 법을 설한 그런 경전입니다.

'싱갈라와'라고 하는 분이 있었는데 상당한 지식인이었습니다. 인도의 지식인과 현대의 지식인 하고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현대의 지식인들은 많은 책을 읽고 그것을 적재적소에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인도 당시의 지식인들은 책을 읽는 게 아니고 책을 외워야 됩니다. 많은 것들을 전부 머릿속에 다 외우고 있다가 거기에 대해서 물어보면 풀어서 다 설명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질문한다, 그러면 "하나"에 관계된걸 불교경전 곳곳에서 다 추려서 뽑아서 그것을 엮어가지고 설명할 수가 있어야 되는 거라. 그런 것들을 부처님 당시 때는 지식인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지식인이라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그걸 외울 수 있을까, 없을까? 대부분 많은 것들을 까먹어버립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젊었을 때 수학공식 다 외우고 했지만 나이가 들면 다 까먹어버립니다.

 

'싱갈라와'가 이것이 의심스러운 거라. “거 왜 자꾸 까먹어버리게 될까?”하고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한테 가서 항상 머리가 명쾌하게,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고 왜 머리가 이렇게 둔하게 돼버리나 하고 물어봅니다.

거기에 대한 부처님이 대답이 이 「싱갈라와 숫따」라고 하는 경전입니다.

 

부처님이 답을 하는 형식은 보통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째 방식은 그 사람이,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써 다양하게 대답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근기에 맞게끔 그렇게 설명을 해주는 방식이 하나가 있고,

또 하나는 뭐냐면 어떤 경우든지 그 사람이 해탈에 이르도록,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대답을 해준다는 두 가지의 형식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사람의 상황에 맞게끔 답을 해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마음을 열지 않을 것이고, 또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이 그냥 알음알이로써 지식으로만 접해진다 할 거 같으면 그 지식은 거기서 끝나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두 번째 방식인 깨달음에 이르도록 만들어 주는 것.

이 두 가지가 항상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 형식입니다.

 

부처님이 이 '싱갈라와'의 질문에 대해서 그렇게 대답을 합니다.

"왜 그러면 기억을 못하는가?" 딱 하나 답을 얘기합니다.

"마음에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장애라고 하는 것은 세균과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감기가 들면 감기바이러스가 내 몸에 들어옵니다. 그런 세균이 들어오기 때문에 머리가 아파오고 열이 나고 또 신체도 약해지고, 그래서 머리는 뭔가 하기 싫어해지고 게으름 피우게 되고 이렇게 된다는 거라.

부처님이 말하는 세균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능력의 세균'을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 능력에 세균이 탁 들어가 버리니까 능력이 무디어져 버려서 그것이 발휘되지 않는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세균과 같은 장애가 다섯 가지가 일어났을 경우에는 명확하게 오래도록 기억하지 못한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머리가 세균에 감염되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머리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몸이 장애를 입으면 어떻게 될까? 만약에 다리가 장애를 입으면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다든지 글을 쓰지 못한다든지 이런 여러 가지 일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능력들을 맘대로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머리를 쓰는 영역들은. 오히려 몸의 장애를 가진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장애를 가진다고 하는 것은 좀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사람을 금방 봤는데 돌아서고 나면 까먹어버립니다. '저 사람이 누구지?' 하고 기억을 못 한다는 거라. 그걸 보통 '인지증'이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돌아서버리면 그걸 기억을 하지 못하고, ‘어! 조금 전에 내가 뭘 했지?’ 하고 기억을 못해버린다는 거라. 그게 심해지면 자신의 아이들이나 자신의 친척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건 아주 심각한 경우에 그런 건데, 그렇지 않더라도 대부분 사람들은 잘 기억을 못 합니다. 그것도 세월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조금 심각해지면 금방 한 것도 조금 전에 한 것도 잊어버리는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걸 '인지증'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인지증에 걸려버릴 거 같으면 신체에 장애를 입는 것보다도 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회성이 떨어져 버린다는 거죠. 어쩔 수 없이 사회에서 살아가야 되는데 그런 것들이 결여되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더욱더 자기 속으로 숨어버리게 되고 그런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게 마음의 장애를 입은 것들이다 하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부처님이 마음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다섯 가지를 얘기합니다.

'까마라가'라고 하는 것을 첫 번째로 얘기합니다. 보통 '애욕'이라고 그러죠.

부처님은 애욕을 설명하면서 "애욕에 이기면 이 세상에서도 승리하게 되고 다음 세상에서도 승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 승리를 얻는 길이 애욕에 이기는 길이다 하고 다른 경전에 설명하기도 합니다.

내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내 맘대로 나쁜 일 해도 된다, 아니면 나는 윤회를 믿지 않으니까, 죽고 나면 끝이니까 그냥 일생 살아있을 때 내가 하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 누리면서 살면 된다, 이렇게 얘기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든지 자기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힐 권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를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분명한 것은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겁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나는 분명하게 지금 내가 해야 될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면서 어떤 불평불만도 없다 하고 마음을 먹게 되고 그렇게 행동하게 될 때가 오히려 바른길입니다.

 

어쨌든 간에 세상을 살아가는데 잘 살아갈려고 할 거 같으면 선한 행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종교하고는 관계없이. 누구든지 태어났으면 바르게 살지 않으면 안 되게 됩니다. 그리해야만이 자기 인생도 순조롭고 다른 사람에게도 신뢰받게 되고, 그래서 이생에 살아갈 때도 행복하게 되고, 만약에 윤회가 있다고 할 거 같으면 당연히 지옥이나 나쁜 세상으로 떨어지지 않고 행복한 세상으로 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걸 부처님은 "이 세상에도 승리를 얻는 길이고 다음 세상에도 승리를 얻는 길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소중한 것은 뭘 믿느냐 하는 것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바른 일을 하면서 살 것인가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바른 행위, 선한 행위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능력과 지혜와 연관이 돼있습니다. 이성에 근거해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바른 행위를 하는 것이고, 판단력이 없이 우유부단하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나쁜 선택이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선과 악이라고 하는 판단기준은 자신의 능력으로써 정해진다" 하고 얘기합니다.

 

다섯 가지 장애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자신의 능력을 빼앗는 장애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그중에 첫 번째가 '애욕에 대한 바이러스다'하고 얘기합니다. '까마라가(kāma rāga)' 라고 합니다.

경전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바라문이여, 마음은 가끔 애욕에 억제당해 애욕에 지배되는 일이 있다. 이때 애욕으로부터 해방되는 구체적인 방법을 모른다. 자신이 행복하게 되는 것을 구체적으로 모르고,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게 되는 일도 구체적으로 모른다. 자신과 다른 사람 양쪽 모두 행복하게 되는 일도 구체적으로 모른다. 오랫동안 익숙하게 알아 온 가르침도 애욕에 물들면 생각해 낼 수가 없다. 하물며 익숙하게 익히지 않은 것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느니라"하고 얘기를 합니다.

 

감각적인 욕망, 탐욕 이런 것들은 우리 생활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애욕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없애는 방법을 모르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만약에 감기가 들면 감기를 낫게 하는 방법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감기약을 먹든지 목을 따뜻하게 하든지 아니면 의사에게 가서 주사를 맞든지 그 감기를 낫게 하는 방법은 알고 있습니다.

 

아니면 스님같이 예를 들면 감기에 들리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그래서 감기 바이러스를 몰아내도록 하라, 그러기 위해서 마른 수건을 코 위에다 올려 놔놓고 누워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관찰하다 보면, 수건이 그 호흡으로 인해서 젖을 정도가 될 때가 되면 바이러스의 성품을 관찰하기가 수월해집니다. 그래서 몸은 자생력이 생기기 때문에 콧물들이 계속 빠져나오게 됩니다. 바이러스가 같이 묻어가지고. 그래서 감기가 처음 들어올 때는 알아차려서 몰아내는 방법들을 쓰기도 합니다.

이렇게 수행으로 다스리든지 약품으로 다스리든지 방법을 알면 감기는 금방 낫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방법을 모르면 어떻게 될까? 절망적이게 됩니다. 원인을 모른다든지 아니면 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 없을 것 같으면 그건 보통 절망적으로 돼버린다는 겁니다.

 

애욕도 마찬가지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분명하게 마음의 능력을 빼앗는 바이러스라고 했습니다. 다섯 가지 바이러스!

애욕에 감염되면 문제가 뭐냐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내가 뭘 해야 될지를 모르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지금 내가 뭘 해야 될지를 모르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지금 무엇을 하면 좋은가 하는 것을 모르게 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도덕을 모르게 된다 하는 얘기입니다. 애욕이 들어간 순간에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도 나쁜 행위를 하게끔 된다 하는 얘깁니다.

 

가끔씩 뉴스에서 그런 부분들이 나옵니다. 아주 훌륭한 사람들, 교수라든지 성직자라든지 이런 분들이 성적인 문제를 일으키든지 아니면 치한으로 돌변한다든지 이런 뉴스를 접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훌륭한 사람들도 마음에 애욕이 들어가면 그 바이러스로 인해서 감염되기 때문에 내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뭘 해야 될지를 모르는 거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뭘 해야 될지 모르니까 나쁜 행위들을 저지르게 되는 거라.

 

그래서 "애욕에 감염되면 빨리 해독제를 먹도록 하라"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그것이 자기의 마음을 지키는 길이다 하는 거라. 마음으로부터 해독제를 먹는 방법은 부처님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애욕은 위험한 것이다 라고 잘 이해해 두도록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해독제를 먹는 방법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애욕이 생겨났을 때 그것을 바로 알아차리고 '아, 이것은 위험하다. 나는 심한 병에 감염됐다. 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어떤 짐승과도 같은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하고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하라 하는 거라. 이렇게 이해하는 것으로써 어리석은 행위를 피할 수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또 하나 효과적인 방법은 환경조건을 바꿔라.

애욕이 일어나면 그것으로부터 떠나버리라는 거라. 만약에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났다, 이 감각적인 욕망은 내가 감염돼서 내가 나쁜 행위를 할지도 모른다 하고 바르게 이해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난 생각으로부터 떠나도록 하라.

경행을 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일을 한다든지 이렇게 해가지고 그것과는 다른 일들을 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다 하는 거라.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방법은 이렇게 두 가지가 있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이렇게 애욕이 생겨날 때마다 그것을 자꾸 퇴치하는 것들로 인해서 지혜는 일어난다. 감기에 걸려도 감기를 이겨내고 나면 면역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똑같은 감기가 들어오면 잘 안 걸린다는 거라. 마찬가지라는 거라. 애욕에 감염되는 상황들을 퇴치를 자꾸 해나가면 면역력이 생겨나버린다는 거라. 면역력이 생김으로 인해서 애욕에 좀처럼 잘 걸리지 않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점점 더 애욕에 감염되는 횟수가 적어진다는 거라.

그게 애욕에 대한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방법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 애욕은 '애욕에 감염되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하게 인식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많은 사회적인 문제들은 애욕에 감염되어서 문제들을 일으킨다는 거라. '아, 이것은 위험하다'하고 분명하게 항상 자주 인식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은 그것이 일어날 때 거기서부터 피해버리라는 거라. 내가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퇴치할 능력이 안 되면 피해버리라는 거라. 그런 조건들을 만들지 말도록 하라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브야빠다(vyāpāda)'라고 하는 '분노'입니다.

'적의를 가지고,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이유도 없이 화내는 것' 이런 것을 '브야빠다'라고 합니다. 그냥 울컥한다는 거라. 또 초조해하고. 그렇게 화가 났을 때 어쩌지를 못하게 되는 것들을 '브야빠다'라고 얘기합니다.

특히 미국 같은 경우에 그런 경우들 많죠? 그냥 길거리에 가는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여버립니다. 왜 이 사람들을 죽였냐 하면 자기는 그 이유도 몰라. 그 사람하고 무슨 원한진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화가 났으니까 그냥 쏴 죽여버리는 거라. 이거는 보통 사람들이 생길 수 있는 병입니다. 약간의 계기로 인해서도 분노는 일어나게 됩니다. 자동 점화장치와 마찬가지로 항상 저장돼 있습니다.

 

분노라고 하는 것의 해독제는 '분노가 생기는 순간 그것을 찾아내서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분명하게 분노가 일어나면 분노가 일어났다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하라. 분노는 명확하게 이해하면 분노는 사그라집니다. 그런데 자기가 분노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분노는 더욱더 기승을 부리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아까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환경조건을 바꾸어라.

조절할 능력이 안 되면 환경조건을 바꿔라는 거라. 그것으로부터 떠나라는 거라. 분노의 감정을 더 이상 부풀리지 않도록 하라 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게으름을 피울려고 하는 마음들이 있기 때문에 참 이게 잘 안됩니다. 잘 못 해나갑니다. 차라리 애욕은 다스리기가 쉬운데 분노는 다스리지를 못합니다.

 

테라와다에서는 그 스님이 얼마만큼 수행했느냐 하는 척도로, 맨 첫 번째 삼는 것이 얼마만큼 화를 안 내는가?

애욕의 조건은 스님들은 이미 처음부터 잘 가지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애욕은 잘 일어나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분노는 자동점화장치라서 조금만 계기가 돼도 퍽 퍽 일어난다는 거라. 이유도 없이, 괜히 싫증이 나고,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그래서 그 스님이 얼마만큼 공부를 했느냐 하는 척도로써 화내는 것으로 압니다. 일단 스님들이 화를 벌컥벌컥 내면 아예 다른 스님들이 쳐다도 안 봅니다. 공부가 안된 스님이라는 거라.

 

일반인들도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누가 화를 자꾸 내쌌는데 그 사람을 바르게 볼 거라? 무시해버리지.

그래서 '그것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맹독이다' 하고 분명하게 이해하라.

화를 내면 독이 자꾸 퍼지는 거라. 화를 내면. 화를 한번 낼 때 그 찰나 동안에 악세포가 몇 개 생기는지 아세요? 한 찰나 동안에 악세포가 열 개가 생긴다고 그럽니다. 그러면 화를 내는 것이 만약에 1분간 지속됐다 그러면 1분간은 몇 개의 찰나가 있습니까? 적어도 몇백 개의 악세포가 생겨난다는 거라.

1초에 보통 17개의 찰나가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럼 그게 1분이면 몇 개입니까? 수백 개가 되는 거죠. 거기다가 60을 곱해야 되니까. 그러니까 1분 동안 화가 지속되면 내 몸을 파괴하고 내 마음을 파괴하는 악세포가 무수하게 생겨난다는 거라. 악세포는 뭡니까? 좋은 세포를 파괴하는 거라. 내 몸을 죽이는 일이라는 거라.

그걸 부처님은 "화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맹독이다. 자신을 파괴하는 맹독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독을 자꾸 스스로 만든다는 거라. 빨리 죽을라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그 화내는 것을 피하고 그것을 해독하도록 하라.

 

보통 보면 이 화를 내는 습관들이 길러지는 것이 어떠냐 하면 경쟁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 내가 지고 싶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이리하는데 내가 그마만큼 따라가고 싶다. 또 그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 사회적인 풍토도 문제가 되지만, 그것 때문에 자꾸 일어난다는 거라. 누군가에게 지고 싶지 않고 이기고 싶다는 것들을 가지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을 목표로 가져라 하고 그래서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거라. 이기면 뭐 할 건데? 또 다른 경쟁상대가 나타나는데, 계속 욕심의 바이러스만 키워주는 역할 밖에 안 된다는 거라.

차라리 그것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하라.

그마만큼 '브야빠다' 분노라고 하는 것은 파괴력을 지닌다 하는 사실을 알아라는 거라. 화내는 것에 감염되면 마음의 능력은 쇠퇴해 버린다는 거라. 그마만큼 분노가 더 일어날 가능성이 커진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이기도록 자꾸 노력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분노에 장애된 것들을 물에다가 비유를 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용기에 담긴 물에다가 자신의 얼굴을 보도록 하라.'

이 물은 밑에서 불이 가열되어서 끓고 있어. 그래서 거품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거품으로 인해서 자기 얼굴이 그 물에 비치지를 못하는 것과 같다는 거라. 그냥 한순간 거품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밑에서는 계속 불을 지피기 때문에 거품이 계속적으로 올라온다는 거라. 물은 어떻게 됩니까? 계속 가열하면 나중에는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방치해버리면 우리의 능력은 점점 더 없어져 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나중에는 진짜 마음의 능력을 발휘할려고 하더라도 이미 발휘하지 못하게 돼버린다는 거라.

 

애욕이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밑에서 끓지는 않는다는 거라. 일순간 일어났다가 그때는 물을 봤을 때는 내가 얼굴을 볼 수 없을지 몰라도 끓이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고요하게 잠잠해지면 그걸 볼 수는 있다는 거라. 그런데 분노는 그렇지 않다는 거라. 계속적으로 끓여주기 때문에. 그래서 '분노라고 하는 것은 더욱더 큰 장애다'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그다음 세 번째가 뭐냐 하면 '티나 밋다(thīna-middha)'라고 하는 겁니다.

'티나 밋다' 보통 '혼침·잠' 그렇게 얘기하죠!

'티나(thīna)'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무디고 약하게 하는 것. 그래서 뭐 '행위 하고 싶지 않다'는 것,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는 거라. 그런 걸 '티나'라고 그럽니다.

'밋다(middha)'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그냥 '졸린 상태'입니다. 그래서 '티나밋다'를 '혼침'이라고 보통 그렇게 표현합니다.

동물에 비유하면 나무늘보입니다.

뭐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아, 그냥 내일 하면 되지' 오늘 일이 있으니까 수행처에 안 가고 '다음에 가지 뭐' '나중에 하지 뭐' 그러면서 자기는 뭔가를 또 합니다. 텔레비를 보든지 아니면 친구들하고 수다를 떨든지 아니면 과자라도 먹든지. 왜?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이게 되니까 방황을 하게 돼 있는 거라. 그런데 수행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뭔가를 지금 해야 될 일을 해야 되는 것들에 대해선 티나·밋다가 돼버리는 거라. 나무늘보가 되고 하기 싫어해져버린다는 거라.

 

마음은 끊임없이 나쁜 쪽으로 움직일려고 합니다. 그걸 제어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라. 그게 이 '티나·밋다'의 영향 때문에 그렇다 하고 얘기합니다.

경전에는 그걸 뭐라고 비유를 해 놓았느냐 하면 '물 항아리에 얼굴을 비출려고 하는데 그 물에 이끼와 수초가 많이 있는 것들'에 비유를 합니다. 이끼와 수초가 있으면 얼굴이 물에 비치지 않는다 하는 거라.

 

아침에 일어나면 눈에 눈꼽재기가 끼여있는 거하고 마찬가지라는 거라. 눈꼽재기가 끼어있을 거 같으면 보기 싫어. 얼른 일어나서 눈꼽을 떼야 되는 거라. 그런데 아침에 어떻게 해요? 일어나기 싫은 거라. 그러니까 이 눈꼽 붙은 채로 그냥 더 있고 싶어 한다는 거라. 그럴 때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 알아차림을 유지하라' 라고 얘기합니다.

'아, 지금 내 마음이 뭘 하고 있는가? 게으름 피우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아차려라는 거라. '아, 지금 내가 쉬고 싶어 한다. 아니면 내가 뭘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는 거라. 자기 자신의 마음에 알아차림을 유지하도록 하라 하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한테 전에 그런 얘기했었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맨 먼저 해야 되는 것이 뭐라고 했어요?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가?' '내 마음이 지금 뭘 하고 있는가?' '아, 내가 좀 더 자고 싶어 하는가? 아니면 내가 다르게 마음이 방황을 하는가?' 자기 마음을 먼저 분명하게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래서 마음이 깨어나야 만이 몸이 일어나게끔 된다는 거라. 마음이 깨어나지 못하니까 자꾸 게으름 피우는 거라. 이부자리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면서. 게으름을 피운다고 하는 것은 마음을 자꾸 알아차리도록 해야 만이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 네 번째가 '웃닷짜 꾹꿋짜(uddhacca-kukkucca)'라고 하는 겁니다. '들뜸과 후회'.

'웃닷짜(uddhacca)' '마음이 들떠있는 상태', 부풀어 오른다는 겁니다.

부풀어 오르니까 어떻게 돼요? 집중력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혼란하고 흥분 돼 있는 상태 이런 것을 '웃닷짜'라고 얘기합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흐른다는 얘깁니다. '웃닷짜'라는 것이. 그래서 감정적으로 흐르다 보니까 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는 거라. 아, 이걸 지금 내가 해야 되는 건지 안 해야 되는 건지를 판단을 못한다는 거라.

 

그다음 '꾹꿋짜(kukkucca)'라고 하는 것은 '후회하는 것'. 아, 내가 왜 이런 일을 했지? 아, 내가 잘못했다. 내가 왜 이랬지?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후회하는 마음을 가지는 거라. 그걸 '꾹꿋짜'라고 그럽니다.

(수행자 질문 : 후회하고 들뜸은...) 틀립니다. 그거는.

성냄의 일종이라고 봐야 되는 거죠. 후회하는 것은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후회하지 말고 뭐 하라고 그럽니까? 참회하라 그럽니다. '아, 내가 잘못했다 하는 걸 분명하게 반성하고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하고 마음을 먹는 것이 참회에 대한 건데, 후회라고 하는 것은 '내가 왜 이랬을까'하고 자기 자책에 빠져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는 후회하지 말고 참회하라고 합니다.

 

테라와다의 스님들은 아침예불이 끝나고 나서, 저녁예불이 끝나고 나서 반드시 하는 것이 참회입니다.

아침예불이 딱 끝나고 나면 스님들끼리 둘이서 딱 마주 보고 내가 저지른 행위들, 말한 것들, 그다음에 생각한 것들, 잘못한 것이 있으면 나를 용서하고 그리고 그 용서를 받아주시오. 그러면 내가 다시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참회하는 거라.

 

여러분들도 결제 때 해봤죠? 그거는 테라와다 스님들 일상이라. 그거는, 결제가 되든 해제가 되든 관계없이 아침 저녁 항상 두 차례씩 하는 거라, 참회를. 왜? 깨달음에 이르지 않는 인간일 경우에는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잘못은 항상 범하게끔 돼있다는 거라. 잘못을 범하면 대부분 범하기 쉬운 게 후회라는 거라. 그래서 후회하지 말고 그것을 참회하도록 해서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 하고 스스로 저지른 것에 대해서 바르게 결심하도록 하라'하고 얘기합니다.

 

후회하고 하는 것을 경전에는 뭐라고 비유를 해 놓았냐면 '바람이 일어서 파도가 치고 소용돌이가 치는 형국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바람이 계속 부니까 어떻게 돼요? 바람이 부니까 물이 일렁거린다는 거라. 일렁거리고 거기 소용돌이치면 그 얼굴이 찌그러지든지 정확하게 볼 수가 없다는 거라. 후회한다는 것은 그와 마찬가지로 바람이 일도록 만드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다음 다섯 번째는 '위찌낏차(vicikicchā)'라고 얘기합니다.

'의심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의심한다는 것은 '예스(Yes)'도 안 하고 '노(No)'도 안 한다는 얘깁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하는 거라. 쉽게 얘기하면 부정적인 성격을 얘기합니다. 들어온 정보, 데이터에 대해서 조사·확인하려고 하지 않고 머리는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나가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자기 자신은 불안정해져버린다는 거라. 불안정하면 지혜는 성숙하지 않는다는 거라. 심지어는 선행도 의심을 한다는 거라. 선한 행위를 하는 것, 스님에게 탁발하는 것, 아니면 보시하는 것, 아니면 계율을 지키는 것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확인할 생각은 안 하고 머릿속에서만 자꾸 생각을 하게 된다는 거라. 이런 걸 의심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불교에서는 '예스'도 아니고 '노'도 아니고 하는 것은 좋은 성격은 아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어중간한 태도는 없다는 거라. 바른 것은 바른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인 것이지 바르지도 않고 틀리지도 않고 어중간한 입장은 그건 불교에서는 용납을 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의심을 가지는 것들은 피하도록 해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걸 경전에는 뭐라고 했냐 하면 '탁해져 있는 물' 진흙이 들어가 있어가지고 물이 탁해져서 맑고 깨끗하고 밝은 게 아니고 어둡다는 거라. 컴컴한데 그게 얼굴이 보이겠어요?

그래서 '다섯 가지 중에서 의심은 최악이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다른 것은 그래도 조금이라도 얼굴이 보이고 안 그러면 찌그러지더라도 보이기는 하는데 이렇게 탁해져 있으면, 쉽게 말해서 어둠 속에 있으면 한 치 앞도 분간을 못하는 거라. 아무것도 인식을 못하는 거라. 이걸 부처님은 '의심을 가지는 것은 최악이다'하고 얘기를 합니다. 왜? 마음은 항상 어수선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든지 욕심을 가지고, 분노를 가지기도 하고, 또 의심을 가지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장애들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렇지만 그 장애도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의 조건 따라 일어났다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겁니다. 항상 그 사실은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내가 그 장애에 대해서 '아, 내가 이건 어쩌지 못한다, 내가 의심하는 성격인데 이거 못 고친다, 내가 화를 잘 내는 성격인데 이거 못 고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라.

 

부처님이 설하는 방식은 아까 뭐라 그랬어요? 적재적소에 맞게끔 그 사람의 근기에 맞게끔 법을 설하는 것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뭐라 그랬어요? 그 설한 것으로 인해서 반드시 해탈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라는 거라. 이런 다섯 가지 장애가 있으면 그 장애를 돌파할 길도 분명하게 부처님이 얘기해준다는 거라.

그게 뭐냐면 '칠각지'입니다.

 

'삼봇장가라고 하는 일곱 가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이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는 길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첫 번째, '사띠 삼봇장가(sati-sambojjhaṅgā)'

지금 현재 순간에 사띠하라. 알아차림을 유지하라. 과거에도 미래에도 가지 말고 오직 현재에만 머물러서 알아차림을 하라. 그것이 다섯 가지 장애를 물리치는 첫 번째 길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생각을 하면 항상 과거나 미래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수행의 첫 번째 조건은 뭐라 그래요? 머릿속에 있는 잡동사니를 다 없애버려라. 생각하지 마라. 판단하지 말고 생각하지 말고 앞서가지도 말고 그냥 현재에 머물러서 알아차려라.

그래서 망상하는 걸 끝내기 위해서는 딱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지금 현재를 알아차리는 방법밖에 없다는 거라. 아무리 다른 얘기들을 듣고 불편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생각해버리면 현재에 머물지 못한다는 거라. 오로지 지금 현재를 알아차림하는 것. 이것이 '사띠 삼봇장가'라고 얘길 합니다.

 

다섯 가지 장애를 몰아내는 첫 번째로써 '사띠 삼봇장가'를 얘기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것이 실천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칠각지는 각각이 깨달음의 길에 이르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칠각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지만 사띠 삼봇장가가 안 되는 상태에서는 그다음 각지가 일어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를 자꾸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걷고 있으면 걷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밥을 먹고 있으면 밥을 먹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내가 지금 앉아서 좌선하고 있으면 좌선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 배가 일어나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항상 현재 하고 있는 것들을 알아차려야 된다는 거라.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거고, 아픈 느낌이 있으면 아픈 느낌을 알아차리는 거고, 마음이 방황하고 있으면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거고, 이렇게 지금 현재의 것을 자꾸 알아차리는 것들, 이것이 수행의 시작이자 수행이 끝나도 계속 돼야 될 부분이라는 거라. 찰나 찰나 일어나는 것들, 그것을 과거나 미래로 가지 말고 찰나 찰나 현재에서 자꾸 일어나는 것들만 그냥 알아차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보통 '택법각지'라고 하는

'담마윗짜야 삼봇장가(dhammavicaya-sambojjhaṅgā)'라고 얘기합니다.

'담마 - 현상을' '윗짜야 - 조사한다' 그래서 '데이터를 조사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담마 윗짜야'가. 지금 현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있을 것 같으면, 사띠하고 있으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우리는 데이터로써 인식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밥을 먹고 있다, 지금 말을 하고 있다, 지금 듣고 있다,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데이터를 그 현상을 조사·확인한다는 거라. 그게 택법각지라는 거라.

 

사띠가 없으면 이게 가능하겠습니까? 의식적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사띠없이,그냥 내가 조사 분석하고. 그리하지마는 사띠가 없이 조사·분석하는 것은 오래도록 가지 못합니다. 금방 잊어버립니다. 사띠가 결합 돼서 조사·분석·확인하는 것이 오래도록 가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는 50년 전에 읽었던 경전들도 50년 후에 그대로 다시 내가 암송해 내는 것은 사띠와 담마위짜야가 결합 돼 있을 때 그게 가능하다고 얘기합니다. 항상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당연히 지금의 현상·데이터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됩니다. 이런 분석능력들은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일부러 그것을 분석할 필요는 없다는 거라.

 

수행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자꾸 분석하려다 보면 사띠가 빠진 상태에서 분석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건 오래 못가. 그리고 그것은 사띠가 빠져버리면 어떤 경우든지 현재에 머물지를 못하는 거라.

스스로 자꾸 분석하고, 해석할려고, 그리고 그것을 그렇게 이해할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예를 들어봅시다. 누가 소리를 얘기 했는데 내가 지금 다른 것을 사띠하고 있었다,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럼 그 소리가 안 들립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사띠하는 것들이 없든지 아니면 사띠하는 것이 자꾸 방황을 하게 되면 그 소리가 들립니다. 들린다는 현상 그 하나만 두고 봐도 꼭 마찬가집니다. 내가 보다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있으면 스스로 택할 수가 있다는 거라. 소리 들리고 안 들리고 하는 것을 택할 수가 있다는 거라. 소리는 끊임없이 있는데 내가 이쪽에 사띠를 하고 있으면 내가 선택해가지고 그 소리를 안 듣게 할 수가 있는 거라. 그런데 마음을 소리쪽으로 이동할 거 같으면 그 소리가 들리는 거라. 이게 택법각지인 것이지, 내가 스스로 분석해가지고 조사한다? 이것은 택법이 아니라는 거라.

 

일부러 법에 대해서 분석할려고 하면 안 됩니다. 사띠가, 알아차림이 충분하게 되면 택법각지는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인과관계를 이해하게 됩니다. 아, 이것으로 인해서 저것이 있게 되고, 저것으로 인해서 이것이 소멸됐다 하는 인과관계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건 자동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각지가 일곱 가지가 있지만 여러분들이 마음 써야 하는 것은 딱 두 가지뿐입니다. '사띠와 위리야'입니다. 다른 것들은 이것이 되면 자동적으로 일어나지게 됩니다. 어쨌든 택법각지도 분석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여러분들이 선택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하는 겁니다. 저절로 따라와지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위리야 삼봇장가(viriya-sambojjhaṅgā)'라고 하는 '노력하려는 마음' 입니다.

사띠 알아차림을 해보니까 현상에 대한 원인·결과를 분명하게 알게 되면 더욱더 내가 노력하려는 마음이 생긴다는 거라. 흥미가 일어난다는 거라. '어, 이게 뭐지?' 왜? 새로운 것들이 알아지니까! 새로운 것들이 알아지면 더욱더 노력할려고 하게 되는 거라. 이것이 '위리야 삼봇장가'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마음은 항상 게으를려고 합니다. 나쁜 쪽으로 흐를려고 자꾸 합니다. 그래서 노력은 강제적으로라도 끄집어가지고 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라. 애들은 공부하기 싫어한다는 거라. 그럼 어떻게 해요? 억지로라도 끄잡고 와가지고 자기가 하도록 만드는 거라. 마찬가지라는 거라. 사띠가 계속 이어지고 하면 좋은데 언제든지 사띠는 도망간다는 거라.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우리는 억지로라도 끄잡고 와서 노력해서 하도록 만들어야 되는 거라.

 

'사띠와 위리야'라고 하는 것은 자꾸 내도록 만들어야 되는 거라.

내가 신경써야 되는 것은 '사띠와 위리야'라는 거라.

또 안 될 때도 그런데 잘 될 때는 더 마찬가집니다. 어떻게 됩니까? '아, 수행 잘된다' 해서 마음이 들떠버린다는 거라. 들떠버리면 노력할려는 마음이 없어져버립니다. 그러니까 거기 그냥 머물러버리는 거라. 그것에 대해서 조사·확인하고 있든지 아니면 그 속에서 망상피우고 있는다는 거라. 왜? 위리야가 없어져 버리니까!

알아차림이 안 될 때도 위리야가 있어야 되고, 알아차림이 잘 될 때도 위리야는 항상 있어야 되는 거라.

 

가끔씩 사람들이 와서 질문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아, 이런이런 현상들이 있었습니다. 자랑하는 거라. 이런 체험들을 했다 하는 거라. 쉽게 말하면 그랬으니까 스님 나에게 요런 증명서를 주시오 하는 거라. 이미 위리야가 없어져 버린 상태라. 사띠도 더불어 없어져 버린거라. 무슨 졸업증명서를 줄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걸 바란다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어, 너는 현재 우뻭카냐나에 도달했다, 어쨌다 이런 증명서를 주면 좋다 합니다. 좋아하는 거는 좋은데 문제가 뭐냐면 거기서 그것에 딱 머물러버린다는 거라.

이게 문제인 거라.

그래서 스님들은 한국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는데, 테라와다 스님들은 절대 그 사람의 지금 현재 수행 정도를 판단을 해줄지는 몰라도 거기에 이르렀다 하고 선언을 해주지는 않습니다. 네가 수다원에 이르렀다. 네가 불환과에 이르렀다 그렇게 얘기해주면 그건 이미 틀려버렸다는 얘깁니다.

 

자! 그래서 노력은 항상 필요합니다.

설혹 우리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서 원인·결과를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써는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알아차리고 있어서 '아, 이것으로 인해서 들이쉼으로 인해서 그것이 조건이 돼서 내쉼이 일어난다' 이런 인과관계, 발을 듦으로 인해서 나아가지고 나아가진 것을 원인으로 해서 내려놓는다 하는 인과관계를 분명하게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곧바로 탐진치에 물든다는 거라. 어쩔 수 없다는 거라. 그래서 노력은 끊임없이 해야 된다는 거라.

 

그런 노력이 없을 거 같으면 인과관계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택법각지까지 이르렀다 하더라도 또 탐진치에 물들어버린다는 거라. 연속해지지를 못하는 거라. 그래서 억지로라도 우리는 노력을 해야 됩니다. 지금 수행하고 싶지 않고, 법문 듣고 싶지 않고 하더라도 법문들으려고 노력해야 되는 거고, 수행할려고 해야 되는 거고, 내가 지금 텔레비전 보고 싶고 내가 지금 공양하고 싶다 하더라도 그걸 억지로라도 짤라라는 거라. 짤라야만이, 텔레비전 스위치를 뽑아야만이 텔레비전을 안 보고 수행하게 되는 거라. 항상 게으름 피우고 탐심과 진심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끊임없이 노력하도록 자꾸 해야 된다 하는 것이 위리야 삼봇장가입니다.

 

그다음 네 번째가 '삐띠 삼봇장가(pīti-sambojjhaṅgā)' 입니다. '희각지'

그렇게 해서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확고하게 알아차림을 유지해 나갑니다.

그래서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어느 정도 극복해내고 탐·진·치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극복해나갑니다. 극복해나가면 당연히 마음이 기쁩니다. ‘아, 이게 이렇게 좋은 건데 수행이 이렇게 좋은 건데 왜 몰랐을까?’ 그것이 '삐띠 삼봇장가'입니다.

삐띠삼봇장가에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의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 삐띠에 함몰돼버린다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기쁠 때는 삐띠가 일어나는데 슬플 때는 삐띠가 안 일어난다는 거라. 우리의 현상은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좋을 때는 좋아하는데, 싫을 때는 싫어하게 돼버린다는 거라. 그게 인간의 마음이라는 거라.

 

수행에서도 꼭 마찬가집니다. 수행이 잘될 때는 삐띠가 일어나는데 수행이 안 될 때는 삐띠가 안 일어난다는 거라. 마음을 어떻게 먹어야 되느냐면 집이 불이 타서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아, 그건 낡은 거니까 새로 지으려고 했는데' 하면서 마음을 항상 밝고 긍정적으로 그리고 평온하게 만들어주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그게 삐띠삼봇장가라는 거라. 어떤 현상이, 기쁨의 현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야만이 그 삐띠삼봇장가는 가라앉습니다.

 

이 삐띠삼봇장가라는 것은 오토매틱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끊임없이 알아차림과 택법각지와 노력의 힘이 있을 것 같으면 삐띠삼봇장가는 반드시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걸 오토매틱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기쁠 때나 즐거울 때나 항상 무슨 일을 해도 기쁨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겁니다. 행해 나가는데 있어서 그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됩니다.

 

수행상에서 기쁨의 현상이 일어나서 거기서 탁 붙잡혀버리면 더 이상 안 넘어가집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쁨의 현상이 없이 지나가는 것보다도 못한 결과를 나타낸다는 겁니다. 절대 붙잡지 말도록 해야 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그것은 일어난 조건으로 인해서 사라진다는 사실만 이해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 다섯 번째가 '빳삿디 삼봇장가(passaddhi-sambojjhaṅgā)' '경안각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가벼워지는 겁니다. 붕붕붕붕 떠다니는 그런 느낌을 가진다는 겁니다. 그게 경안각집니다. 보통은 보면 우리는 굉장히 딱딱하고 무겁고 그럽니다. 마음도 그렇고 육체적으로도 그렇고. 그런데 경안각지에 이르르게 되면 몸도 마음도 아주 가볍고, 깃털처럼 아주 가볍습니다. 무게감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대상이 찰싹찰싹 그냥 달라붙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이때야만이 사실은 앞에서 얘기한 다섯 가지 장애가 일시적으로라도 그냥 다 소멸된 상태로써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는 상태가 됩니다.

내가 지금 욕심을 내고, 화내고, 그다음 게으름피우고, 혼란하고, 후회하고 하는 이런 것들이 디딤돌, 돌로써 꽉 눌러버린 상태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그게 없으니까 어떻게 돼요? 몸과 마음이 붕붕붕붕 떠다니는 깃털처럼 가벼워져버린다는 거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어떤 일이든지 가볍게 받아들이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렇게 습관을 들여야 됩니다. 그래서 기쁜 현상이든 아니면 싫은 현상이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볍게 받아들여야 됩니다. 받아들여야 만이 이 다섯 가지 장애를 덜 받게 된다는 겁니다. 크게 마음을 기울여서 거기에 함몰되지 않도록.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당황해 버립니다. 현상에 탁 부딪치면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거라. 애욕에 물들면 애욕에 그냥 빨려들어 가버리고, 화가 일어나면 그냥 화가 빨려들어 가버리지, 거기서 가볍게 대처하지 못한다는 거라.

 

실제로 스님도 그랬거든. 누가 큰 유리를 떨어뜨려가지고 이 다리가 살점하고 그냥 탁 도려져나가버렸어요. 그래서 44바늘을 꼬맸는데, 나는 그 현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거든. 그래서 그다음 내가 해야 될 것을 분명하게 알아. 당황하지 말고 휴지를 달라. 그래서 휴지를 가지고 닦고, 그리고 수건 달라 해가지고 싸매고, 그러고 나서 구급차 불러라 하고, 내가 다친 사람이 그냥 침착하게 얘기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뭐 해야 될지를 모르는 거라. 엄마야, 엄마야, 우짜지, 우짜지 이러고만 그냥 있는 거라.

그게 현상에 대해서 가볍게 보지 못해서 그런 거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그런 거라.

 

태국에서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간질병이라고 그럽니까? 거품 물면서 정신없어서 쓰러지는 거, 그런 애가 하나 있었거든. 스님이 직접 법문을 하고 있는데 그애가 간질병에 걸려서 발작을 했어. 그런데 엄마가 애를 안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 엄마야 하면서 애를 떨어뜨려버리는 거라. 그 모습이 법문하다가 탁 보이는 거라. 그래서 내가 법문을 그대로 중단하고 아이 엄마한테 그랬어요.

아이를 그대로 내려놓으시오. 하고 얘기했거든. 그런데도 엄마는 안절부절 해가지고 이걸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는 거라. 지금 뭘 해줘야 될지를 모르는 거라. 그래서 내가 가서 아이를 빼앗다시피 해가지고 아이를 내려놓고 입을 벌려가지고 거품을 게워놓게 하고 그리고 손과 발을 따뜻하게 주물러줬거든. 그러니까 한참 있다가 안정이 되는 거라. 그때까지도 옆에 사람들은 웅성웅성하고 엄마는 정신을 빼버리고 없는 거야.

 

경안각지라는 것은 그와 마찬가집니다. 가볍게, 대상에 대해서 일어나는 대상, 특히 장애 부분에 대해서는 가볍게 받아들이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기쁨이 일어나더라도 그걸 가볍게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다음에 '사마디 삼봇장가(samādhi-sambojjhaṅgā)'라고 하는 것은 선정으로 마음이 통일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경안각지가 일어나면 가볍기 때문에 집중하기가 수월합니다. 가벼우면 어떻게 돼요? 어느 곳에 가서라도 잘 달라붙게 되는 거라.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곳에 그대로 가서 달라붙는 거라. 그래서 '사마디 삼봇장가'라고 하는, '선정 삼매가 계발되는, 마음이 집중되고 통일되는 상태가 된다' 하는 겁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우뻭카 삼봇장가(upekkhā-sambojjhaṅgā)' '극한적으로 냉정해져있는 상태'

항상 똑같은 마음의 상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중되어있는 상태라고 하더라도 의식이 있기 때문에 집중된 것이 깨지기도 하고, 다시 더 깊은 데 들어가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극도로 냉정하게'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하게 될 때, 어떤 현상이 오더라도 똑같이 받아들이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게 '우뻭카 삼봇장가'라고 그럽니다.

이때야만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삼법인 무상·고·무아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 되고, 무상·고·무아를 있는 그대로 판단하고 알아차리게끔 됩니다. 그게 '우뻭카 삼봇장가' 라고 얘기합니다.

 

수행을 하는 사람은 최종적으로 무상·고·무아에 대해서 통찰을 하게 되는 것이 첫째 관문입니다.

그리하더라도 칠각지의 가장 중요한 것은 뭡니까? '사띠와 위리야'입니다. 그것은 내가 자꾸 해야 되는 건데 다른 것은 어떻게 돼요? 따라오게끔 됩니다.

따라오게끔 해야지 내가 지금 삼매에 들려고 노력한다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지금 아, 이게 어느 정도의 상태에 도달해 있는가 해가지고 택법을 할려해도 되는 것도 아니고, 그거 전혀 필요가 없다는 거라.

 

지금 해야 되는 것은 '사띠와 위리야' 그것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그리해야 만이 다섯 가지 장애를 물리칠 수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시간이 많이 됐습니다.

다섯 가지 장애는 우리의 능력, 마음의 능력, 마음을 쇠퇴시키는 것들이니까 반드시 물리쳐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칠각지를 자꾸 계발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