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각지의 실천 3)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관계 (20080501)
계속 해나가겠습니다. 수행하는 방법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여기서 좀 착각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코끝의 한 부분, 입술 위의 한 점을 알아차림의 지점으로 두고 호흡을 관찰하라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 한 점을 관찰을 하다 보니까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숨이 차갑거나 뜨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는 변화되기도 하고 하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될 경우에는 사마타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됩니다.
차갑고 또 변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위빳사나 수행에서 사념처에 대한 수행이나 삼법인에 대한 수행들입니다.
지금은 사마타 수행이기 때문에 절대 이런 것들을 알아차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단순하게 호흡이 와서 가는 것들, 그래서 그 호흡이 긴지 짧은지, 아니면 호흡 전체를 알아차리는지 호흡의 그중 일부를 알아차리는지, 아니면 호흡이 미세한지 거친지 이것만 알도록 해야 됩니다.
의도적으로라도 그렇게 했을 때 마음이 그 호흡이라는 것 하나에 고정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느낌이나 변화되는 것들을 관찰을 하다 보면 마음이 거기에 끄달려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꾸 마음이 배에 가 있기도 하고, 아니면 호흡을 따라서 코끝에서 배까지 쭉 이동하기도 하고, 아니면 마음이 방황을 한다든지, 아니면 생각이 일어난다든지 이렇게 자꾸 바뀌게 됩니다.
지금은 집중하는 법을 배우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호흡이 길고 짧은 것들 또 미세하고 거칠고 하는 것만 알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쏘나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바이올린을 켤 때 하나의 현에 한 점이 된다고 생각을 하고 거기에다가 마음을 집중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하나의 현, 한 줄에 바이올린 키가 와서 부딪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쭉 왔다 갔다 하는 걸 알아차리는 것하고 꼭 마찬가집니다.
아나빠나 사띠는 사마타 수행에서는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할려다 보면 참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를 동원을 하기도 합니다.
먼저 호흡을 알아차리겠다, 호흡을 고요하게 하겠다 하는 생각으로 호흡에 사띠를 기울이도록 해야 됩니다. 관심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내가 숨 쉬고 하는 것에다가 알아차릴려고 마음을 돌리겠다 하고 관심을 두는 것이 맨 첫 번째입니다.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나서는 계속해서 그 호흡에다가 마음을 유지시켜 나가겠다 하고 관심가지는 것에 대해서 반응을 하려고 해야 됩니다. 그 호흡이 거칠고 안 거칠고 하는 것을, 미세하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그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 내가 거기에다가 또 마음을 일치시키고, 그것을 하고 날 거 같으면 그다음은 물질적인 것을 아는 단계에서 마음이 깨어있도록 해야 됩니다. 주의력을 가져야 되는 겁니다.
결심하는 것, 대상을 향해서 마음을 기울이는 것 그것은 마음의 하나의 종류들입니다.
보통 '제따시카(cetasika)'라고 하는 마음부수(心所) 입니다.
대상을 향해서 마음을 기울이는 이 마음부수를 지속시키겠다, 마음이 그 호흡이라고 하는 대상을 알아차리도록 하겠다, 주의력을 자꾸 가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 보면 분명하게 일치를 시켜나가고 있구나 하는 걸 아는 상태가 됩니다. 그걸 대부분 '반조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 네 단계가 항상 하나의 사이클이 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대상을 대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주의력을 기울이고, 반응을 하고, 다시 또 마음을 거기 일치시키고, 이게 숨을 쉬고 있는 것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다시 되생각해 보고, 이것이 끊임없이 계속되도록 해야 됩니다.
한 곳에다가 지속적으로 집중을 하도록 그렇게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숨은 고요해지게 됩니다.
숨이 고요해져야만이 니밋따가 일어나게 됩니다.
보통 니밋따가 나타나기 전에는 대부분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느낍니다.
왜그러냐 하면 숨이 너무 미세하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집니다. 분명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반드시 알아야 되는 것은 숨이 끊어지는 경우는 몇 가지 외에는 없습니다. 사람의 경우 선정삼매에 들어, 사선정 이상의 깊은 선 정삼매에 들었을 때에만이 숨이 끊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자일 때 숨이 끊어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내가 사선정 이상 가지 않을 경우엔 절대 숨은 끊어진 상태가 아닙니다. 숨이 끊어졌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그렇게 할 때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없을 때에는 다시 반조를 해가지고, 마지막 숨에 마음을 기울이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언제 때 걸 알아차렸는가 하는 걸 반조를 해서, 거기에다가 집중을 해서 유지를 하고 있으면서 기다리면 숨이 보입니다.
그렇게 해야 만이 마지막 숨이 미세한 것까지를 다 알아차릴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이 집중되어 있다 해가지고 누구든지 다 니밋따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집중된 마음이 니밋따를 일으키게는 하는데 콧구멍에서 멀리 떨어져서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니밋따가 아닙니다. 콧구멍 끝에서 일어날 때만이 그것이 니밋따입니다.
몸 전체에 퍼진다든지, 아니면 빛으로 나타난다든지 이런 것은 집중된 상태이지만 니밋따는 아닙니다.
니밋따가 선정을 가져오지만, '아나빠나 니밋따'가 아니면 그것은 대상으로 여기지 말도록 해야 됩니다.
또한 니밋따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집중하는 것을 호흡에서 니밋따로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그럴 거 같으면 집중력도 깨져버리고 니밋따도 사라져버립니다.
집중이 잘 될 때 일어나는 게 그런 니밋따의 종류들인데, 코끝 전면에서 멀리 떨어져서 나타나면 전부 무시하십시오. 그리하면 사라져 버립니다. 무시해도 다시 또 나타나고 무시해도 다시 나타나고 할 거 같으면, 그리하더라도 호흡을 코끝에다가 집중을 하고 있으면 니밋따가 다시 나타납니다.
나타날 때 접촉하는 이 점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때야만이 이 니밋따가 안정되게 됩니다.
호흡 그 자체처럼 나타나게 될 때, 호흡도 니밋따 처럼 나타나게 될 때, 그때야만이 니밋따에 집중을 해도 괜찮습니다.
마음이 호흡의 한 점에서 니밋따로 옮겨가게 되면 수행은 한층 더 진일보하게 됩니다.
그 니밋따에다가 계속 마음을 유지해가지고 하다가 보면 니밋따가 변해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 변해가는 게 목화솜처럼 쭈욱 되기도 하고, 하얗게 되기도 하고, 투명해지고 이렇게 바뀌어나갑니다. 그렇게 그 니밋따에 마음을 고정할 수 있을 때야 만이 한 시간, 두 시간 계속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호흡에 고정해서 한 시간, 두 시간 있으려면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닙니다.
어쨌든 그렇게 니밋따에 마음을 유지하게 되면 아나빠나 수행은 성공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만이 삼매가 일어나고, 삼매에 도달하게 됩니다.
보통 여러분들이 선정이라고 하는 것들은 이 근접 삼매나 그다음에 깊은 삼매에 든 경우들을 얘기합니다. 그리하더라도 이 삼매는 어디까지나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하고 있는 니밋따라고 하는 것을 대상으로 갖게 돼 있습니다.
근접 삼매에서는 선정의 다섯 가지 요소가 완전하게 계발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나 정진, 알아차림, 삼매, 지혜 이런 것들이 완전하게 계발 돼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쑥불쑥 잠재되어있는 것들, 바왕가라든지 이런 것들이 여전히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바왕가에 마음이 떨어질 수도 있고 한데, 이 깊은 삼매에서는 선정의 다섯 가지 요소가 완전하게 계발되기 때문에 바왕가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그 기능들을 조절할 수 있는 상태까지 됩니다.
즉 이 다섯 가지 선정의 요소들이 마음을 니밋따에 완전하게 고정시키는 역할들을 해주게 됩니다.
여기서 보통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길로 나누게 됩니다.
보통 처음에는 집중하는 힘에 인해서 삼매라고 하는 것과 지혜가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그때 사실은 위빳사나가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이걸 '세간에서의 선정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출세간에서는 이 삼매와 지혜뿐 아니라 정진과 믿음이라고 하는 것들도 균형을 맞추게 됩니다. 그래서 네 가지가 서로 보합관계가 되게 됩니다.
마지막 그 사띠라고 하는 알아차림은 항상 필요한 경우입니다.
이 사띠를 제외하고 네 가지 부분이 선정의 요소입니다.
그래서 삼매와 지혜가 먼저 균형을 맞춰지고 나면, 그러고 나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위빳사나 수행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출세간으로 나아가는 길로 가게 되는데, 여기서 믿음과 정진이 또 균형을 맞춰서 이 네 개가 서로 균형을 맞추게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 칠각지가 균형을 맞추게 됩니다.
사띠라는 것은 니밋따를 계속 기억하고 식별하는 기능을 합니다.
담마위짜야라고 하는 것은 니밋따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위리야라고 하는 것은 니밋따가 계속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다섯 가지 기능들, 깨달음의 요인들을 균형을 맞춰주는 그런 역할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조사하는 기능들을 강화시켜 주는 양태들을 띠게 됩니다.
삐띠라고 하는 것은 니밋따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 니밋따를 경험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기쁨입니다.
빳삿디라고 하는 경안각지는 니밋따를 대상으로 하게 됐을 때,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니밋따를 대상으로 하게 됐을 때 거기서 일어나는 고요함입니다.
그다음에 사마디라고 하는 것은 니밋따에 마음이 일념 된 상태.
그다음에 우뻭카라는 것은 니밋따에 들뜨거나 가라앉거나 하지도 않는, 어떤 경우에도 평등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
이게 칠각지 입니다.
하나의 니밋따에도 이런 칠각지의 요소가 균형을 맞추게 됩니다.
어떤 경우든 칠각지의 요소를 계발해서 균형을 잡아야 됩니다.
만약에 위리야가 부족할 경우에는 삼매나 경안각지 그다음에 우뻭카라고 하는 평안, 그런 요소들을 계발하면 안 됩니다. 왜? 위리야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거보다는 담마위짜야-현상에 대한 관찰이나, 그다음에 정진-위리야 라든지, 그다음에 삐띠라고 하는 그런 마음을 움직이는 요소들을 계발해야 됩니다.
또 대상에서 마음이 흐트러질 때, 니밋따든 아니면 호흡이든 그런 대상에서 마음이 흐트러질 때, 그럴 때는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그렇습니다. 그럴 때는 마찬가지로 담마위짜야라든지 마음을 움직이는 요소들, 그다음에 위리야라든지 삐띠라든지 이런 요소들을 계발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되도록이면 잠재우고 사마디나 빳삿디, 그다음에 우뻭카라고 하는 이런 것들,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요소들을 계발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동요하고 산란한 마음을 억제하고 고요하게 됩니다.
이게 균형을 서로 맞춰줄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들떠가지고 대상을 알아차릴 수 없는 지경이냐, 아니면 너무 대상에 가라앉아가지고 그걸 지속시켜주는 힘이 부족하냐를 가지고 이렇게 자꾸 바꾸어나가기도 합니다.
오늘은 여기 밑에 있는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지속해나가겠습니다. 처음에 한 번 보십시오.
[아나빠나 수행을 해나가면 선정에 들어가고 그 마음속에는 칠각지가 포함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위빳사나 수행을 해나갈 때 물질과 정신 그리고 그것들의 인과관계를 알아서 무상·고·무아를 알아차리고 그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데는 또 칠각지가 드러난다] 하고 얘기를 했습니다.
아나빠나 수행에서 사마타 수행을 할 경우에도 칠각지가 계발되고 드러나지게 되고, 위빳사나 수행을 할 경우에도 칠각지가 계발되고 드러나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은 대상 자체가 다릅니다.
사마타는 뭡니까? 대상에 몰입하는 거고, 위빳사나는 대상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고 대상 자체에서 무상·고·무아를 알아차리는 겁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은 집중을 통해서 평온함이나 고요함을 계발해서 선정을 성취하는 겁니다. 여러 가지 번뇌라든지 생각이라든지 하는 그런 장애들을 제거해버리고 선정을 성취하는 건데,
위빳사나 수행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지혜를 얻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인 열반을 목표로 해서 나아가는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타의 집중하는 장점을 활용해서 위빳사나를 행하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법구경」에도 그런 구절들이 있습니다. "지혜가 없으면 선정도 없고, 선정을 행하지 않으면 지혜도 없다. 선정과 지혜가 함께 있게 될 때 그 사람은 닙바나에 가까이 가게 된다."하고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조화가 열반으로 이끈다." 하는 설명들이 「법구경」뿐 아니라 「상윳따니까야」에도 있고 여러 군데에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사선정의 도달에 가능한 수행주제들입니다.
그런 수행주제들을 잡다 보니까 아나빠나 사띠라고 하는 호흡, 아니면 자비희사, 사무량심 이런 것들이 수행주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마타 수행을 해서 혹시 선정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위빳사나 수행을 도우는 역할들을 해줍니다. 일정하게 마음을 집중하게 하고, 대상에 대해서. 그다음에 마음이 고요해지고 청정해지는 역할들을 합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이 위빳사나 수행을 도와주는 역할들을 분명하게 합니다.
그런데 왜 사마타 수행에서 다시 위빳사나로 전환을 해야 되는가 하면 사마타는 선정을 계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정상태에서는 위빳사나를 닦을 수가 없습니다.
선정상태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상카라'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조건 지워지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 변하는 것들이 없다는 거라. 상카라라고 하는 조건 지워지는 것을 경험하고 관찰해야 만이 사물의 현상인 무상·고·무아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타 수행에서는 절대 위빳사나를 닦을 수가 없습니다. 사마타의 선정에 들었다 하더라도 선정에서 나오고 난 다음에 위빳사나를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본질적으로 다른 부분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선 잘 이해를 해야 됩니다.
단지 사마타 수행에서 닦는 것이 보통은 보면 깊은 삼매입니다.
깊은 삼매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비 삼매가 있고 근접 삼매가 있습니다.
예비 삼매나 근접 삼매는 위빳사나 수행을 위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이 계발되기 때문에 꼭 내가 깊은 삼매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집중력으로 인해서 위빳사나에 도움을 준다 하고 얘기들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간혹 사람들이 삼매, 사마타 수행이 없어도, 위빳사나 하나만으로써 깨달음에 이른다 하고 얘기를 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보통 순수 위빳사나를 하는 사람이 있고, 사마타 수행을 곁들여서 위빳사나를 하는 경우도 있고, 동시에 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사마타 수행을 했다가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위빳사나 수행을 했다가 사마타 수행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있고, 이렇게 보통 크게 네 부류로 나눠지기도 합니다.
그리하더라도 어쨌든 이 사마디라고 하는 세 가지 종류들은 사마타 수행을 완성하게도 하고 도와주기도 하고, 또 위빳사나 수행을 이끌어 나가고 지속해 나가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게 됩니다.
사마타와 위빳사나와의 관계는 사마타라고 하는 선정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깊은 선정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근접선정 아니면 예비선정 이런 것들이 계발됨으로 인해서 위빳사나에 도움을 주게 돼있고, 깊은 선정에 들었을 거 같으면 더욱더 집중력은 커지고 사선정을 계발하게 돼서 더 이로움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위빳사나의 수행에 들어가서 근본적인 물질과 정신을 관찰해나가게 됩니다.
수행을 이렇게 해나가다 보면 삼매를 계발해나가는 것들에 치중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물론 치중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너무 그렇게 신경을 안 써도 관계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삼매를 성취하려면 먼저 말부터 끊어야됩니다.
대부분 보면 수행을 하려다보면 한참 떠들고 나서 바로 수행을 하려고 합니다. 되도록이면 그거는 피해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선정의 단계에서도 수행을 해보면 1선정에서는 말이 끊어져 버립니다. 모든 사고가 끊어져 버립니다. 생각하고 하는 언어적인 사고가 끊어져 버립니다. 수행에서.
그럴 거 같으면 먼저 수행을, 1선정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수행을 하려고 한다 할 거 같으면 그 예비단계로써는 마음도 편안해야 되겠지만 육체적으로도 먼저 끊어야 되는 것이 말을 먼저 끊어놔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만이 몸이 고요하게 가라앉게 됩니다.
그걸 '니룻다(niruddha)'라고 얘기를 합니다. 말을 고요하게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수행을 시작해서 대상에 일치시켜나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대상과 일치가 돼 나가면 대상과 내가 둘이 아닌 상태로써 완전하게 일치시켜나가게 됩니다.
수행해 나갈 때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대상을 알아차려 나갈 때, 그 대상을 알려고 하는 마음이 있고, 그 대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분리가 됩니다. 분리가 되더라도 지속적으로 자꾸 알려고 노력을 하다 보면 그 두 개가 일치가 되고 나면, 대상 자체와 대상을 알려고 하는 마음조차도 하나가 돼버릴 거 같으면, 이 두 개가 다 떨어져 나가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하나로 일치됐다 하는 느낌들을 꼭 송곳이 두 개가 톡톡 부딪치듯이 이렇게 느껴지는 거라.
선정에서도 꼭 마찬가집니다.
선정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처음에는 그런 언어적인 사고 자체가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수행에서. 니밋따가 계발되고 나서 선정으로 들어갈 때 전부 그런 것들이 떨어져나가고 나서,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들이 뭐냐면 위딱가와 위짜라라고 하는 것이 떨어져나갑니다.
그게 뭐냐면 추론적인 것과 그것을 지속해 주는 것 두 가집니다.
어떤 경우든 대상입니다. 대상과 대상을 향하는 마음입니다.
이 두 가지가 떨어져 나가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똑 그 대상에 마음이 고정되어 있다 하는 기쁨들만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다 하는 상태가 되게 됩니다. 그럴 때야 만이 몸에서는 기쁨의 현상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한 점 틀림없이 그 대상과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꼭 하나가 됐다 하는 그런 것들. 그럴 때는 보면 '위딱까, 위짜라'는 전혀 없습니다. 이미 떨어져 나가버리고 없습니다.
여러분들 수행에서도 꼭 마찬가지 입장이 됩니다.
그다음에 하다가 보면 '기쁨'마저도 끊어져 나갑니다.
일상적으로는 수행해나갈 때 대상과 그 대상을 관찰하는 마음이 꼭 일치가 돼나갔을 때 몸에서 기쁨이 일어나지만, 그 기쁨의 현상도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하나의 대상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그 대상자체가 변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기쁨이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사마타 수행에서도 꼭 마찬가집니다.
대상과 마음이 일치가 된 것으로 일어나는 기쁨들도 있지만, 그 기쁨들도 그 기쁨 자체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쁨은 떨어져 나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상자체를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니밋따면 니밋따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기쁨이 일어나더라도 기쁨이 얼마 후에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그러면 그 대상 자체에서 행복감만 일어나게 됩니다.
이럴 때를 보통 3선정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3선정에서는 기쁨이 떨어져 나간다 하고 얘기들을 하는 겁니다.
그리하더라도 그것이 해나가면 해나갈수록 더욱더 호흡은 미세해지고 니밋따는 고정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 행복감이라는 것 자체도 뛰어넘어버리게 됩니다. 그걸 보통 '수카'를 넘어선 4선정에서는 '에깍가따'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이 대상과 완전하게 일치돼버리는 상태. 그전에는 기쁨이라든지 행복이라든지 이런 것들에서 약간씩 방해를 받았는데, 그것조차도 없이 완전하게 몰입돼버리는 상태. 이걸 4선정이라고 보통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에깍가따'하고 '사마디'하고는 조금 차이가 나긴 납니다.
어쨌든 사선정에 들어가고 나면 숨이 정지를 해버립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나면 숨이 미세해지고 약해지다가 결국 사선정에서는 정지를 해버리게 됩니다. 정지를 해버리고 나면 뭐가 남습니까? '느낌, 지각하는 것' 이것만 남게 됩니다.
느낌과 지각하는 것들만 있기 때문에 마음은 대상 없이 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디로 향해야 됩니까? 마음은? 대상으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사선정에 들고나면 위빳사나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사마타 수행에서는 그런 패턴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순수 위빳사나를 할 경우에는 아까같이 그와 같이 처음부터 대상 자체를 바라보기 때문에 사선정까지 들 이유가 전혀 없어져 버리는 거라.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찰나 삼매나 근접 삼매만이 사마디에서 활용이 되는 거고, 이 사마타 수행에서는 깊은 선정까지가 활용이 되는 방향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하더라도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이런 서로 밀접한 관계들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경전 같은 데는 뭐라고 그러느냐면 '집중이 없으면 현상에 대해서 바르게 관찰할 수 없다.' 집중이 없으면. 그래서 현상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을 통찰해서 해탈로 이끌어주지 못한다 하는 거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 대상을 향해서 관찰했을 때 일어나는 지혜는 사마디에서 일어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 지혜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집중력입니다.
그래서 '사마디가 가장 가까운 원인이다' 하고 얘기를 하기도 하는 겁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이렇게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내적인 관찰을 만들어내는 과정입니다.
그 밑에는 하나의 예들입니다.
「육체는 깔라빠라고 하는 미세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깔라빠는 아주 작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식별하기 어렵습니다. 깊은 집중상태에 들어가지 않으면 깔라빠를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이 깔라빠를 볼 것이냐? 사대요소에 대한 관찰. 사대요소에 대한 관찰은 위빳사나 수행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이 깔라빠를 알아차려 나가게 됩니다.
보통 누구든지 살아있는 사람들은 영혼이라는 그런 관념들을 가지게 됩니다. 아주 견고한 관념입니다. 그런 정신적인 관념을 깨트리고, 또 물질적인 관념들이 있습니다. '나의 몸'이라고 하는 이 물질적인 것. 물질적인 것에 대한 견고한 관념을 깨트리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되는 게 뭐냐면 대부분 '깔라빠' 입니다.
이 미세한 미립자들을 알아야 만이 아, 정신적인 것이고 물질적인 것이고 그 속에서는 '나' '나의 것' '나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없구나 하는 것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깔라빠든지 깔라빠 속에 들어있는 것들이 뭡니까? 여덟 가지 요소입니다. 지·수·화·풍. 저번 시간에 했죠!
그 여덟 가지 요소 중에서 네 가지가 지·수·화·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수·화·풍에 대한 것들을 관찰하면서 깔라빠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식별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이 사대요소에 대한 관찰을 용이하게 해주고 깊게 해주는 것이 뭡니까? 집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서로 이런 보완관계에 있게 돼 있습니다.
전에 그런 얘기 한 번 했죠?
'연속(santāna)한다는 관념', 그다음에 '두께(ghana)', 그다음에 '기능하는 것'들, 이런 것들로 인해서 잘못된 관념들이 일어난다. 무상·고·무아를 알지 못한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 부분에 대한 것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물질적인 것에 대한 관념과 정신적인 것에 대한 관념, 실제 존재한다는 관념들을 어떻게 하면 빨리 부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수행의 관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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