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37조도품 법문

칠각지의 실천 4) 칠각지의 방식(사마타와 위빠사사나 방법으로) (20080515)

담마마-마까 2019. 8. 14. 21:23

https://youtu.be/D38T1LgI3Cg

* 칠각지의 실천 4) 칠각지의 방식 (20080515)

 

여섯 가지에 집중을 하면 적어도 악의 구렁텅이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어린애 꼬맹이가 둘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불교를 안 믿고 한 사람은 불교를 믿었거든. 무슨 급하게 일이 생길 때 아니면 위험이 닥친다든지 아니면 뭐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다든지 이럴 경우에 한 아이는 어디 뭐 의지할 대상이 없으니까 그런 거를 안 하는데, 한 아이는 불교를 믿고 있는 애는 뭐라 하느냐면 “아이고 부처님! 아이고 부처님!” 합니다.

이걸 빨리어로 하면 "나모 붓닷사(namo buddhassa)" 그럽니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하는 얘기거든.

 

이게 인도 당시에 있었던 얘기니까. 한 아이는 어쨌든 "나모 붓닷사" 하면서 부처님한테 딱 집중을 먼저 해버리는 거라. 그러면 위험한 것도 피해가지고, 마음이 급격하게 바뀌어도 다시 또 잘 조절을 하고 이리하거든. 그러니까 애들끼리니까 구슬치기도 할 거 아니라. 구슬치기를 하면 다른 애들은 그냥 이렇게 탁 던지는데 그 아이는 뭐라고 하느냐면 "나모 붓닷사" 하고 나서 구슬을 딱 던지거든. 그런데 신통하게 "나모 붓닷사"만 하고 나면 이게 잘 맞는단 말이라.

 

그래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이 부처님한테 가서 물어봅니다. "나모 붓닷사만 하면 다 되느냐? 마음을 지키고 또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 있느냐?"

그때 부처님이 여섯 가지를 얘기합니다.

"여섯 가지에 대해서 집중만 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 "나모 붓닷사" 말고도 '부처님한테 귀의합니다.' 하는 거 말고도, '담마에 귀의합니다.' 해도 되고, 그다음에 '상가에 귀의합니다.' 그렇게 해도 되고.

그다음에 귀의한다는 게 아니고 '내 몸에 대한 관찰' 이 몸이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관찰하는 것으로도 되고.

또 하나는 뭐냐면 자비의 마음을 가지는 것. 쉽게 말하면 멧따를 방출한다고 그러죠. 자비를 방출하는 것. 멧따(mettā), 까루나(karuṇā), 무디따(muditā), 우뻭카(upekkhā)를 사무량심이라 그러죠! '사무량심에 대해서 집중'하는 것으로도 되고,

그다음에 마지막 여섯 번째가 뭐냐면 '마음에 대해서 관찰'하는 것.

 

이 여섯 가지에 대해서 집중만 하면 적어도 급작스러운 일은 안 당한다는 거라.

가다가 뭐 교통사고를 당해가지고 급작스럽게 돌아가신다든지 아니면 천재지변으로 인해서 나도 모르게 죽는다든지 이런 급격하게 되는 것들은 피해나갈 수 있다 하는 거라. 뭔 말인 줄 알겠어요? 연세 드신 분들 있으니까 아, 이거 골치 아픈 거 이거 다 따라 할라면 마, 되도 안 하고...

뭔가 정신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든지, 아니면 뭐 급격하게 마음이 바뀌었다든지, 아니면 위험하든지 할 거 같으면 무조건 그거에 휩쓸리지 말고, 먼저 "부처님!" 하든지 아니면 '부처님 진리'에 대해서 하든지 아니면 '상가'를 하든지 뭐를 하든지 조금 전에 말한 여섯 가지를 먼저 딱 집중을 하라고. 집중을 딱 하고 나서 그 사물을 대해보라고. 확연하게 180도로 바뀌어져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 여섯 가지에 대해서 어떤 것에 대해서든 집중을 하든지, 집중을 할 거 같으면 적어도, 적어도 급격하게는 안 바뀐다는 거라. 뭔 말인 줄 알겠어요? 나이 드신 분들은 오늘 왔으니까 그거라도 얻어가야지 뭐.

 

자! 교재 한 번 보도록 합시다. 지금 칠각지에 대한 얘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무리를 하기 전에 하나 더 얘기를 해야 될 거! 지금 '아나빠나 사마타'를 얼마 전까지 쭉 공부를 해왔단 말입니다. 그런데 스님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이 점,'이 점을 포인트로 삼아라.'그랬죠!'여기에서 마음이 벗어나지 말아라.' 그렇게 했습니다. 그랬죠!

 

그럼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하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아도 나는 뭐 숨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여기 하라는지 이해하십니까? 여기에 집중하고 있으라는 것을?

(수행자 질문)

못 하겠어요? 이거는 왜 그러느냐면 숨은 바뀌어나가는 겁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은. 숨은 움직이는 거라. 마음도 움직이는 것에 따라서 같이 움직여져 버린다는 거라. 움직여져 버릴 거 같으면 산란해진다는 거라.

그러면 당연히 집중도 안 되고, 집중이 안 되면 사띠를 계발하기도 힘들어질 뿐 아니라, 선정에 들기도 힘들어진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일단은 숨이 지가 이리 내쉬고 들이쉬고 간에, 짧든 길든 간에 내 마음을 여기에다 탁 두라는 거라.

이걸 수행하는데 관찰을 해야 되는 '배팅포인트'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기 포인트에다 마음을 똑 두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없을 것 같으면 자꾸 바뀝니다. 이렇게 붙잡아놔도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뛰다니고 도망칠라고 하는데 그리하면 그래도 자꾸 또 데려와야 되는 거거든. 이게 없으면 안 됩니다.

어쨌든 바람 따라서 숨이 움직이기 때문에 마음도 같이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집중하는 포인트를 잡아서 해야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여기 (코)든지 배라든지 하나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 포인트를 먼저 잡고 해야 됩니다. 포인트를 잡지 않으면 마음이 자꾸 움직입니다.

 

그 포인트를 잡고 나서, 그다음에 관찰하는 것들이 사마타하고 위빳사나 하고는 차이가 납니다.

사마타는 집중해서 어떤 것이 나타나더라도 냅둬버리고 나서 그 포인트에만 마음을 고정시켜줘야 되는데,

위빳사나는 나타나는 대상들을 관찰해나가는 거라. 나타나는 대상은 즉각 즉각 관찰해나가고, 그렇게 관찰해나가므로 해서 어떻게 됩니까? 그 대상들이 변해가고, 그다음에 만족하지 못하고,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속에서 알아차리고 있는 거고.

그런데 사마타는 그게 아니거든. 마음을 집중해서 집중력을 키워주고 그것으로 인해서 선정력을 기르기 위한 거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여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간혹 그럽니다. "여기 안 하고 여기 하면 안 됩니까?"

챠크라라고 그러는 곳들, 여기 코 위쪽, 명치, 단전 뭐 이런 곳들, 티벳이나 밀교에서 말하는 챠크라, 거기다 집중을 그렇게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숨은 여기로 쉬는 거 아니죠? 여기도 마찬가지고 여기도 마찬가지고 숨은 여기로 쉬는 게 아닙니다.

 

그럼 여기 집중하면 집중은 가능합니다. 거기다 집중을 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뭐 흰 색깔도 보이고 변하는 것도 보이고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것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집중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현상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당연히 현상에 끄달려들어가버립니다. 현상에 끄달려들어가 버릴 거 같으면 집중해야 될 마음이 움직여져 버린다는 거라. 움직여져 버리기 때문에 빗나가버립니다.

 

특히나 여기 이런 부분들 같은 경우에는 다른 명상하는 분들은 여기에 집중하라 그럽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빛이 확 나고 그러거든. 문제가 뭐냐면 마음이 거기에 집중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빛으로 인해서 굉장히 밝은 느낌들, 그래서 밝으면 눈이 깜빡거려지게 됩니다. 눈을 뜨고 있으면 깜빡거려지게 되고 마음은 그 밝은 것에 확 놀래버리게 됩니다. 그럼 집중력은 깨져버린다는 거라. 깨져버리면 삼매 쪽으로 빠져들어 가지 못하는 거라.

절대 이런 챠크라 부분에다가 집중을 하면 안 됩니다.

그게 두 번째 주의해야 될 거고.

 

그다음에 집중을 하는데 하나 또 주의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코끝 여기에다 두고 관찰 한번 해보십시오. 맨 처음 느껴지는 게 뭡니까? 열기입니다. 열기! 열기 같은 걸 반드시 느끼게 됩니다. 그럼 그 열기를 인식해야 되느냐? 안 그러면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움직임들을 인식해야 되느냐?

사마타 수행에서는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열기나 움직임 같은 걸 반드시 인식을 해가지고 따라가야 되는데, 사마타 수행에서는 어떤 경우가 있든지 그것이 있다는 사실 말고, 호흡! 여기 코끝에만 응시를 하도록 하십시요. 집중을 하도록.

 

요 세 가지 부분만 주의를 할 거 같으면 틀림없이 집중력을 키워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 칠각지 부분은 오늘 끝내고, 끝내고 나면 교재에는 팔정성도라고 되어있는데, 팔정도는 여러분들이 대부분 많이 아는 것이기 때문에 팔정도는 간단하게 하고 나서, 그다음에 주력해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오력입니다. 오력!

 

오력이 뭐 뭡니까?

보통 믿음이라고 하는 것, 확신이라고도 하고, 노력이라고 하는 것,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 집중이라고 하는 것, 지혜라고 하는 것 요 다섯 가지거든.

그중에서 통상적인 것보다 다른 것은 대부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집중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공부할 때 집중력을 키우는 방법에 대한 얘기를 또 할 겁니다. 하더라도 이 부분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한 번 그렇게 해보십시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부처님!' 하면서 '부처님' 하는데 집중하라고 했을 때 그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다 떨쳐버리고 일단 그거 먼저 딱 집중하고 나서 그러고 나서 다른 대상들을 보라는 거라. 급할 때 그리 하십시요. 알겠습니까?

수행하시던 분들이니까 수행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되겠죠.

여기다 집중을 하든지 아니면 위빳사나 수행 하는 분들은 현상들에 대해서, 변해가는 현상들에 대해서 집중을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것도 여러분들이 공부를 해나가다 보면 그런 응용을 할 수 있게끔 됩니다.

 

세속적인 칠각지와 출세간적인 칠각지의 부분에 대한 얘기입니다.

완전하게 진리를 체험했다, 열반을 증득했다 할 거 같으면 출세간적인 거겠죠! 그렇지 않으면 세간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이든 위빳사나 수행이든 지금 내가 도와 과에 이르지 않은 상태에서, 공부를 해나가는 상태에서 칠각지를 경험하는 것들은 세간적인 칠각지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부처님도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열반을 체험하고 나서도 수행을 하셨다고 그러죠!? 누가 물어보거든. “가부좌 틀고 앉아서 일어남 사라짐 하고 있다고 얘기해라”하고. 그때 부처님이 경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칠각지라도 출세간적인 칠각지.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 거기 때문에.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다음 '봇장가 숫따(bojjhaṅga sutta)'라는 경이 있습니다.

이 경에 칠각지가 나오는 경이 세 개가 있는데 마하 목갈라나-목련 존자 하고, 마하 깟사빠-가섭 존자 하고, 마하 쭌다, 춘다 장로 세 사람에게 했던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경이 따로따로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동소이 합니다. 그 경에서 칠각지에 대한 부분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쭌다에게 한 것은 부처님 자신이 아플 때 쭌다에게 이 경을 독송하라 해가지고 한 겁니다. 목련존자나 가섭존자 같은 경우에는 그분들이 아플 때 부처님이 직접 이 칠각지에 대해서 얘기를 하셨던 게 경으로써 기록된 겁니다.

 

어쨌든 목련 존자 같은 경우입니다. 아파 누워있으니까 부처님이 가서 물어봅니다. "아픔이 어떻느냐?" 우리말로 하면 "많이 아프냐?" "예, 많이 아픕니다." "아픈 게 좀 덜하냐? 아니면 더 심해지냐?" "아이고, 부처님 이게 좀 덜 아파야 되는데 덜 아파지는 게 아니고 시간이 갈수록 더 아파집니다. 더 죽겠습니다."

"그래, 그럴 거 같으면 내 말을 잘 들어라" 하면서 이 일곱 가지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칠각지에 대한 것을.

 

"내가 사띠를 분명하게 얘기했지 않느냐? 이 사띠만 할 거 같으면 그 사띠로 인해서 틀림없이 깨달음에 이르고, 또 너는 그렇게 깨달음에 이르렀고, 그 사띠가 있을 거 같으면 그 병은 영향을 못 미치는 것이다. 또 택법각지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조목조목 일곱 가지에 대해서 얘기를 하시는 거라. 부처님이 와서 이렇게 자상하게 조목조목 얘기할 것 같으면 여러분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굉장히 환희심이 일어납니다. 그 환희심으로 인해서 병으로부터 회복된다 하는 그런 얘깁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 마음이 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여러분도 가끔씩 경험해 보았습니까? 마음먹기에 따라서 굉장히 몸이 영향을 받습니다. 기뻐갖고 '헤~' 하고 있다가도 누가 뭐 죽일 놈 살릴 놈 할 것 같으면 금방 고마 마음이 바뀝니다. 마음이 바뀌면 팍 고마 몸도 짜부라듭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생해서 막 팔팔거리다가도 고만 몸져 누워버립니다. 몸으로 인해서 마음이 영향을 받는 것은 덜 하지만 마음으로 인해서 몸이 영향을 받는 것은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현대의학에서도 급격하게 일어난다고 그럽니다. 급격하게. 그렇게 영향을 받는 것이.

 

당연히 부처님이 그런 말씀을 하니까 어떻게 돼요? 마음에는 당연히 환희심이 일어납니다. 환희심이 일어나니까 그것이 몸으로 바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거라. 그래서 병으로부터 바로 벗어나 버리게 되는 거라. 목련존자도 마찬가지였고 가섭존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처님이 당신 자신이 병이 들었을 때도 쭌다에게 이 경을 독송하라 해서 그 구절을 그냥 듣고만 있으면서 그대로 병으로부터 벗어나버리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혹시 누가 아프다 그러면, 가서 이 칠각지에 대한 얘기들을 한 번 해보십시오. 아마 칠각지를 잘 모르고 할 것 같으면 잘못하면 따귀 맞습니다.

어쨌든 그래도 여러분들은 칠각지가 뭐다 하는 정도는 이해를 했을 거고, 사띠가 안되면 택법각지라도 해가지고 사띠를 계발시키겠다 하는 그런 것들도 이해가 됐을 겁니다.

 

교재에 칠각지의 방식에 대한 것들을 사마타 수행에서와 위빳사나 수행에서의 경우로써 나눠가지고 얘기를 해놨습니다.

 

선정, 사마타 수행 속에서 칠각지가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사마타 수행에서는 염각지(念覺支)는 어떤 겁니까?

마음이 바뀌지 않고 대상에 탁 몰입해 있는 거. 그렇게 대상에 집중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 니밋따라는 거라. 선명하게 떠오르는 영상.

우리 노보살님들 잘하는 거. '석가모니불' 하고 있으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확 떠올랐다. 그것도 하나의 니밋따의 종류입니다. 그게 선명하지 않는데 거기에 집중하다 보니까 깨져버리는 것이지. 그게 선명하지 않을 때는 그냥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그 정근에다 그냥 집중을 하고 있어야 되는데.

대부분 보면 어떻게 하냐면 뭐가 좀 나타난다 하면 고마 고거에만 쏙 쏠려버리는 거라. 그걸 성불 봤다고 그러고, 그러다 보니까 이게 탁 깨져버리는 거라. 그 부처님이 오래도록 가지 못하고 금방 사그라져버리고 변해버리고, 안 그러면 부처님이 가만히 있는데 내 머리 쓱 쓰다듬어 준다든지, 이렇게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 나가버리고, 절대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선명하게 영상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석가모니불을 하고 있을 거 같으면 석가모니불에다가 마음을 고정해 있어야 되는 거라.

그리해도 석가모니 부처님이란 분이 딱 나타나 가지고 이게 5분 10분이 돼도 안 바뀌고 그냥 선명하게 있다 할 거 같으면 그때는 석가모니 부처님 정근하던 걸 딱 멈추고 그 선명한 영상에다가 마음을 집중해야 되는 거라.

그걸 뭐라 그럽니까? '사띠가 확립됐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호흡에 집중할 때도 마찬가지고. 호흡에 집중하다 보면 요놈의 호흡이 볼록볼록하기도 하고, 색깔이 바뀌기도 하고, 여러 가지들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나타나더라도, 나타나도 어떻게 하라 그랬어요? 그거 관찰하지 말아라 그랬죠!

아까도 얘기했지만 숨이 뭐 열기들도 있고, 움직이는 것들도 있고 그리해도 하지말아라는 거라. 그거 관찰하지 말고 그냥 한 포인트에다 마음을 집중하고,

그리하다 보면 이 대상이 선명하게 나타난다는 거라. 선명하게! 호흡이 선명하게 알아진다는 거라.

그것을 사띠각지, '사마타 수행에서의 사띠각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 택법각지(擇法覺支).

니밋따를 제대로 보는 것으로 인해서 택법각지는 존재합니다. 왜? 내가 집중해야 될 것과 안 해야 될 것을 분명하게 가리거든. 집중해야 될 것은 만약에 니밋따가 선명하게 될 것 같으면 니밋따라고 알고, 니밋따가 선명하지 않을 것 같으면 호흡이라는 걸 아는 거라. 그러니까 사띠가 확립이 되게 되면 자연스럽게 택법각지는 따라오게 돼 있는 거라.

 

그다음에 정진각지(精進覺支)라고 하는 것은,

그런 선명한 영상으로 마음이 집중할려고 더욱더 노력하게 되는 것. 이걸 정진각지라고 그럽니다. 선명한 영상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됩니까? 마음은 그걸 좇을려고 하죠? 그렇게 합니다. 그러한데 당연히 선명한 영상이 되어있을 거 같으면 이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급격하게 일어납니다. 오히려 너무 과하게 일어나서 나중에 집중하는 거하고 충돌할 정도가 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게 따라와지게 된다는 얘깁니다.

 

그다음에 일어나는 게 희각지(喜覺支).

그것으로 인해서 어떻게 됩니까? 좋아 죽는 거지 뭐. 기쁨이 일어나는 게 점점 강해지게 됩니다. 그런 희각지도 일어나게 되는 거고.

 

그리하더라도 만약에 대상이 안 바뀌고 오롯이 있다, 니밋따가 안 바뀌고 있다, 그럴 거 같으면 인제는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그렇게 좋은 것도 가라앉게 되고, 또 대상에 대해서 막 그냥 집중할려고 노력하는 힘들도 평등하게 이렇게 돼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이걸 대상으로 해야 될까, 저걸 대상으로 해야 될까 할 것도 없어져 버립니다. 이미 대상이 정해져 있으니까. 그냥 사띠만 오롯이 있게 되는데 마음은 전에의 사띠하고 지금 경안각지에 이르렀을 때의 사띠하고는 다릅니다. 아주 순조롭게 사띠가 됩니다, 경안각지에서는. 그래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버리게 되는거고, 그게 경안각지(輕安覺支)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당연히 일어나는 게 선정(禪定覺支)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음이 들떠버리고 고요해지지 않으면 선정삼매에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사띠라도 아까는 급격하게 바뀌었던 것이, 경안각지에 이르게 되면서 똑같은 사띠라도 마음은 고요해지고 물에 가라앉는 것처럼 됩니다. 그런 상태가 쭉 지속이 되면서 대상을 놓치지 않게 되니까 당연히 삼매 속으로, 그 삼매에 들어가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일곱 번째가 사각지(捨覺支, 平等覺支).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그게 니밋따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현상 그 자체로써 집중을 하게 되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이 선정, 사마타 수행 속에서 칠각지가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대부분은 여러분들이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 정근하면서 조금씩들은 경험해 봤던 것들이죠? 그런데 경험을 해봤을 건데 잘못해가지고, 쉽게 말하면 정각지나 사각지 경안각지 쪽으로는 빠지지 못하고, 좋아 죽을 정도까지는 되는 상태가 어떤 경우는 되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라. 그게 뭐냐면 집중해야 될 대상을 잘못 잡아버렸을 경우에. 집중해야 되는 거는 이쪽, 석가모니불이라는 정근을 한다면 그 정근이었는데 고마 현상이 나타남으로 인해서 그게 완전해지지도 않았는데, 무르익지도 않았는데 그쪽으로 마음이 쏠려버리는 경우 때문에 더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다음에 위빳사나 수행에서 호흡을 관찰하는 것에 대한 얘기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의 핵심은 뭡니까?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오온(五蘊).

이 오온은 무상한 것이고 불만족스러운 것이고 무아다. '나'라고 집착할 만한 것이 없다 라는 것에 대해서 완전하게 깨닫는 것! 그것과 그것으로 인해서 위빳사나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위빳사나 수행할 때는 무상을 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변화를 봐야 되겠죠! 현상의 변화를. 그래서 집중하는 것이 하나의 대상에만 오롯이 집중해가지고는 안 되게 되죠! 사띠를 하더라도 대상이 변하는데 마다 사띠, 사띠를 해버려야 되는 겁니다.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염각지(sati-sambojjhaṅgā 사띠 삼봇장가)라고 하는 것은 호흡을 관찰하더라도 호흡의 변화를 관찰해야 됩니다.

그래서 호흡이 무상하다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거라. 무상하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그 변화를 멈출 수 없는데 그것은 어느 누가 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뿐이라는 거라. '나'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갖다가 호흡을 통해서 안다는 거라.

 

예를 들어봅시다.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숨은 들이쉴 때 시원하고 내쉴 때 텁텁하다. 사마타 수행에서는 절대 그렇게 관찰해서는 안 되죠?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그렇게 관찰한다 말입니다. 변한다는 거라. 호흡이 변한다는 거라.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변한다는 거라.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그 변하는 것들을 대부분 사람들은 시원하기만 바라지 텁텁하길 바라지 않는다는 거라. 내쉴 때도 시원해지기를 바라는데 그렇게 안 되거든.

그러니까 숨을 쉬면서도 내가 만족할 수가 없는 거라. 불만족스러운 거라.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고통스러운 거라.

그래서 이렇게 변하고 불만족스러운 여기에서, 내 것이라고 할 거 같으면, 차라리 그럴 거 같으면 내가 멈춰버리면 되지, 숨을. 그런데 멈춰가지고는 못산다는 거라. 그 어떤 것에서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된다는 걸 먼저 아는 거라. 그걸 호흡에서 더욱더 세밀하게 알아나가게 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사띠라고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택법각지(dhammavicaya-sambojjhaṅgā 담마위짜야 삼봇장가).

당연히 대상에 대해서 관찰을 해보니까 어떤 것이든 집착하고 있으면 괴롭습니다. 생각에 집착해 있든지, 아니면 내 의견에 집착해 있든지, 일단은 집착해 있으면 괴롭다는 거라.

왜? 생각이나 의견이나 이런 것들은 뭡니까? '상카라(saṅkhāra)'라고 하는 조건지워진 거거든. 이런이런이런 것들로 인해서 요런 생각을 하게 되고, 이런이런 견해를 가지게 되는 것.

조건지워진 것들은 어떻게 됩니까? 변하게 돼 있는 건데 집착한다는 건 변하지 못하게 딱 붙잡아두는 거거든. 당연히 갈려고 하는 놈 못가게 잡고 있으면 어떻게 돼요? 힘이 들게 되고 괴로운 거라. 상카라 때문에! 생각이나 견해나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이런 것들은 다 상카라입니다. 상카라에 집착해 있을 때는 괴로운 거라. 이런 모든 것들은 변한다는 거라.

그렇게 변하기 때문에 나는 괴롭다, 이 괴로운 현상을 보면서 뭐가 일어납니까? 택법각지가 일어나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이것이 바른 것이구나!' '내가 지금 내 것이라고 붙잡아두는 거, 아니면 변하지 않기를 영원하기를 바라는 거, 그리고 즐겁다고 생각하는 거 요거는 아니었구나! 요건 틀렸구나!' 하고 선택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아! 이게 부처님이 말한 게 진짜 맞구나" 하는 걸 알게 되니까 택법각지가 일어나면서 더불어 가지고 "아! 내가 더욱더 노력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수행하겠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는 거라.

그러니까 정진각지(viriya-sambojjhaṅgā 위리야 삼봇장가)가 더불어서 일어나게 됩니다.

사띠로써 대상을 보게 되고 그 사띠로 인해서 무상·고·무아의 현상을 보게 되면서 택법하게 되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보더라도 나는 이제는 피곤하지가 않습니다. 흐르는 대로 그냥 따라가니까.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내가 더욱더 노력하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희각지(pīti-sambojjhaṅgā 삐띠 삼봇장가).

당연히 그렇게 되니까 호흡 자체는 고요해지고 또 순일해지게 됩니다.

그 밑에 적어놨죠? 코끝에 감지되는 느낌이, 점차로 이런 느낌들이 퍼져나갑니다.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가 얼굴 중에서도 코끝에서부터 시작해서 코로 해서 눈으로 해서 이마로 해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시원한 느낌들이 전체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얼굴 전체에 퍼졌다가 목과 어깨 가슴 부위까지 그리고 상체 전체에까지 쭈욱 퍼지게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미세한 떨림으로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대상에 이렇게 집중하고 있으면 이 떨리는 게 여기부터 해가지고 점차적으로 퍼져나갑니다. 그래서 몸 전체로 퍼져나갑니다. 이게 떨림이 강해지면 어떻게 돼요? 주체를 못할 정도로 막 움직이게 되고 이리됩니다. 아까 사마타 수행에서의 희각지 하고는 경우가 다르죠!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반드시 이런 것들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희각지가 일어나게 됐을 때 대부분이 무상에 대해서 생생하게 경험을 하게 됩니다. 변하는 것들 때문에!

몸이나 느낌이나 인식이나 생각이나 의식이라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 자체는

', 내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구나'하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압니다. 그래서 점점 더 마음은 대상에 몰입되게 되고 그 대상을 알아차려나가고, 그래서 더욱더 무상에 대해서 확연하게 알게 됩니다.

 

호흡을 이렇게 하다가도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잖아. 그러면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동안에 마음도 같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거든. 아, 그게 기쁜 거라. 정확하게 일치되는데.

그런데 이게 기쁨이 그렇게 몸 전체로 번지고 나면 어떻게 되냐면 내 주위 옆에 누가 앉아있다 그러면, 이 사람도 내하고 똑같이 내가 들이쉴 때 이 사람도 들이쉬고, 내가 내쉴 때 이 사람도 내쉬는 것으로 이해하는 거라. 똑같이 그렇게.

이게 점점 더 퍼져나가는 거라. 내 들이쉬는 호흡에 맞춰서 다른 미물들도 다 들이쉬고, 내가 내쉬는 것에 맞춰서 다른 미물들도 다 내쉬는 거라. 심지어 여기 이 개미도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데 내하고 호흡을 똑 맞추는 거라. 똑같이. 그래서 전체가 하나 된 것처럼 이렇게 느껴버립니다.

 

사실은 이때 희각지가 생겼을 때 뭘 해야 되느냐면

사무량심(四無量心 brahmāvihāra 브라흐마위하라) 수행을 해야 됩니다.

자비희사(慈悲喜捨)라고 하는 것들. 그때 자비를 방출하고 그 대상에게, 아니면 전체에게 방출을 하고. 자비희사 수행을 사실은 이때 합니다.

여러분들도 사무량심 수행을 할 때에는 그냥 앉아가지고 행복하기를... 괴로움 없기를... 이렇게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이렇게 몸과 마음이 일치된 상태에서 몸에서 잔잔하게 이런 기쁨들이 일어날 때, 그리고 그 기쁨들이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때 사실은 이 자비를 방출하고 이렇게 해야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경안각지(passaddhi-sambojjhaṅgā 빳삿디 삼봇장가) 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느 순간에 불덩이 같은 것들이 비에 맞아서 확 꺼지듯이 시원한 느낌이 듭니다. 뒤통수를 통해서 바람이 확 불어오듯이. 그래서 모든 것들이 확 가라앉아 버린 상태, 이걸 경안각지라고 그럽니다.

대부분 착각을 여기서 합니다. '아! 이게 깨달음이 아닌가?' 깨달음이 아닌가 하고 착각을 해버립니다. 사실은 그건 깨달음이 아니고 경안각지입니다. 확연하게 대상을 알게 되더라도 몸과 마음이 평안하게 도달해 있는 상태. 그래도 완전한 목표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그다음에 정각지(samādhi-sambojjhaṅgā 사마디 삼봇장가).

그렇게 몸과 마음이 평안해지고 나면 당연히 선정 삼매에 이르게 됩니다.

사띠는 집중력이 강해질 때, 강한 집중력과 사띠가 만났을 때 더욱더 강해집니다. 그 두 힘이 구비가 될 때 더 깊이 무상을 꿰뚫어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사띠와 사마디·집중력을 더욱더 계발하라.하고 얘기합니다. 한쪽에서는 사띠를 계발할 거 같으면 한쪽에서는 사마디를 계발하도록 해야 되는 거라.

두 개가 동시 작용을 할 때는 모든 것들에게 대한 것을 이해를 할 정도가 된다 하는 거라. 무상한 것을 알고, 무상한 것은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는 걸 알고. 즐거운 느낌이든 괴로운 느낌이든 그것이 미쳐 마음에서 느끼기도 전에 변해버린다는 사실을 아는 거라. 마음이 거기 머물기도 전에 변해버린다는 거라.

 

그걸 관찰하려다 보면 좀 지칩니다. 수행하는 것도 지치고 마음도 지칩니다.

그래서 처음에 일어났던 그 노력의 힘이나 열의나 이런 것들이 식어집니다. 당연히 그러면 사띠도 식어져버립니다. 사띠가 식어지니까 수행하기 싫어지는 권태가 와버립니다.

이럴 때, 권태감이 올 때 붓다·담마·상가에 대한 것들로써 다시 일으켜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수행 안 했을 때 일어났던 붓다·담마·상가 하고는 또 경우가 확연하게 다릅니다. 이미 경안각지까지 이르른 상태에서는. 경안각지에서도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집니다. 그리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아는 거라. 권태감도 무상한 것이고, 또 현상 자체도 무상한 것이고, 또 사띠 자체도 무상하다는 사실을 아는 거라. 그러니까 금방 다시 또 돌아오게 되는 거라.

 

특성을 본 후에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니까 다시 확고하게 신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일어나야 만이 이게 안 바뀌는 거라.

그전에는 수시로 바뀌거든. 그래서 조그마한 말에 따라서 요리 홱, 조리 홱, 저가 좋다면 저 갔다가 요가 좋다면 요 갔다가 이렇게 확확 바뀌는데, 이 칠각지들이 계발되고 나서는 안 바뀌는 거라.

 

그래서 이 방법만이 내가 윤회고를 끊을 수 있다 하는 사실을 압니다.

더욱더 노력하면 거짓말 아니게 과거생, 그 훨씬 과거생들도 눈에 보이고 알아지거든. 이게 얼마나 위험하다는 사실을 안다는 거라. 내가 다시는 윤회고에 들지 않도록, 윤회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그것이 이 여섯 번째 각지에서 일어나지는 것들입니다.

 

그러고 나면 이제 일곱 번째 평등각지(upekkhā-sambojjhaṅgā 우뻭카 삼봇장가).

이젠 그것조차도 다 놔버리게 됩니다. 놓아버리게 되면서 1선정에 듭니다.

초선정에 드는 거는 사마타 수행에서도 가능하고 위빳사나 수행에서도 가능하죠.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1선정에서 그치느냐 아니면 더 가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1선정에서부터 다시 위빳사나로 전환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4선정까지 갔다가 다시 또 그걸 반복해서 사마타 수행해서 힘을 기르고 집중력을 기르고 나서 다시 1선정에서 위빳사나로 전환하는 사람들도 있고,

여기서 두 갈래로 보통 나뉘어집니다.

어쨌든 초선정까지 가는 것은 갈래는 비슷하게는 가집니다.

그것들을 여러분들이 이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요게 칠각지 부분입니다. 대충 칠각지에 대한 걸 사마타와 위빳사나로 나누어서 설명을 했으니까 어느 정도는 이해했으리라 보고, 다음 시간에 「아리야 앗탕기까 막가(Ariya aṭṭaṅgika magga)」라고 하는 팔지성도(八支聖道), 팔정도(八正道)에 대한 걸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팔정도는 여러분들 많이 들어봤죠? 많이 들어봤을 거기 때문에 극히 중요한 부분들만 하고, 그거는 넘어가서 오력에 대한 부분을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