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구·울주선원 수행법문

사무량심 수행을 하는 방법과 이유_ 위빳사나와 사마타 병행(20150130.대구)

담마마-마까 2019. 12. 22. 23:22

https://youtu.be/3gIfh9k4P1c

* 사무량심 수행을 하는 방법과 이유 (20150130.대구)

: 위빳사나와 사마타를 병행하면서 수행하는 방법

 

이번에 아파보면서 뇌가 마비되고 하는 게 뇌경색이라고 그러죠? 그래가지고 혈관이 막히면서 터지는 것을 뇌출혈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거 오는 길을 내가 확실히 또 알았어요. 그래서 조금씩 늦출수도 있게 되고, 그럴 수 있었던 거는 뭐냐하면 그것을 대상으로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릴 때 그걸 압니다.

스님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게 참 진짜 좋은 역할들을 한다는 걸 새삼 자꾸 느끼거든.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게 참 힘들어. 대부분 보면 지금 스님 법문듣고 있을 때는 호흡 의식 안 하고 있잖습니까? 호흡은 자연스럽게 쓰고 있거든.

 

그런데 호흡을 관찰할려고 탁 마음을 먹으면 이놈의 호흡이 자연스럽게 안 돼.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이걸 알아차리면 되는데 이걸 못하는 거야. 이게 마음에 딱 가는 순간 뭔가에게 자꾸 홀리는 경우 내 맘대로 하게 되고 이렇게 되는 거고.

이게 참 어려운 거는 아는데,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뭐가 필요하냐면 「나」라고 하는 것들을 딱 배제시키고 나면 그게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스님, 나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배제시킵니까?” 하면 사실 나는 딱히 할 말은 없어. 그거는 경험으로 아는 거기 때문에. 그거는 그런 경험을 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은 못돼요.

 

그런데 나라고 하는 것을 배제시키는 훈련들을 평상시에 많이 해오면은 수행에서 그게 좀 수월합니다. 완전하게는 안 되도. 예를 들어봅시다. 만약에 이 사람을 내가 되게 싫어한다, 그러면 어느 스님이 싫은 사람한테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라 자애의 마음을 가져라 그랬으면 내가 저사람을 향해가지고 저사람을 떠올리면서 '저사람이 행복하기를, 저사람이 행복하기를' 이게 되겠어? 이게 참 안되거든. 그런데 '저사람이 행복하기를' 하는 것이 될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저사람이 나에게는 미운 사람이 아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다는 것만 딱 제거하고 나면 그냥 '행복하기를' 하는 것은 수월해진다는 거라. 그것만 딱 떼줘버리면 되는 거라.

 

자! 그러면 한번 얘기를 들어가보겠습니다.

저번 프린트물에 사무량심에 대한 걸 해줬습니다. 다 떼놓고 수행 부분만 얘기할게요. 자애수행 하는 방법 아는 사람? 보통 자애수행 어떻게 해요?

 

수행자 대답 : 처음에는 자기 자신에게 먼저 행복하기를 하고, 자기 자신한테 평온하고 행복하기를 하고, 그다음에 나와 인연지어진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멧따수행을 하고, 세 번째는 존재하는 모두가 행복하기를 이러고 포괄적으로 넓게 멧따를 보내고, 그다음에 네 번째는 내가 싫어하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멧따를 보내고, 그러면서 인제 사무량심, 화내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해치려는 마음이 없고, 그리고 다른 이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뻐해주고, 그러면서 자비희사(慈悲喜捨)-사(捨)니까 평정한 마음으로 집착 없이 그렇게 멧따를 보내고, 그렇게 자비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스님 : 예, 그래요. 그쪽 얘기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서 한정된 것으로부터 해서 점점점점 넓혀가는 것, 넓혀가는 방향의 부분에서 또 어느 순간 갑자기 대상을 한정해서 하거든. 전체로 넓히다가 그러다가 전체로 넓힌 상태에서 다시 또 싫어하는 사람을 한정을 해가지고 수행을 하고, 그러고 나서 싫어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 되고 나면은 자애수행 말고 까루나 수행으로 넘어가고, 그다음에 무디따로 넘어가고, 우뻭카로 넘어가고 이렇게 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수행자 대답 : 예

스님 : 이게 짬뽕되는 거라.

 

자애수행 할 때는 자애수행만 해야 되고, 까루나 수행 할 땐 까루나 수행만 해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자애수행을 하더라도 방향을 할 거 같으면 방향을 자애수행 대상으로 해야 되는 것이고, 그다음에 대상을 할 거 같으면 대상을 해야 되는 것이고, 아니면 인간뿐 아니라 육도중생들을 대상으로 할 거 같으면 육도중생들을 대상으로 해야 되는 것이고, 그걸 차차 넓혀가야 되는데, 그런 방법을 택해야 되는 것이고.

또 수행하는 방법이 자애수행을 사마타 수행으로 할 것인지 위빳사나 수행방법으로 할 것인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집니다.

 

먼저 위빳사나 방법으로 자애수행 하는 방법에 대한 얘기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그거 하기 전에 자애수행 하기 전에 먼저 기본적으로 갖춰야 되는 것, 뭐부터 갖춰야 될까? 자애수행은 뭐가 기본이라요? '행복하기를' 하는 게 기본이죠!

그러니까 원한심이나 증오 성냄이 있는 상태를 물리치기 위해서 자애수행을 하는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성냄이 있는 상태에서는 자애수행이 안됩니다. 그건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될 것은 성냄이 있는 상태에서는 자애수행을 하면 안된다. 내가 지금 성이 나있는 상태에서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행복하기를...' 이렇게 해가지고는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방법은 되도록 하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성냄뿐 아니라 집착하고 하는 것들로서 해지기 때문에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자애수행을 되도록이면 하는 거라. 그게 자애수행 할 때 기본적으로 갖춰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게 됐다고 칩시다! 대부분 그거는 잘 되잖아!

 

• 그러면 위빳사나 방법으로 자애수행을 하는 경우들입니다.

 

위빳사나 방법으로 자애수행을 할 경우에는 어떤 경우든지 이렇게 하면 됩니다.

여기 지금 수행하러 와있죠? 사람들. 그러면 '여기 수행하러 와있는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여기 붓다야나선원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전체가 다 괴로움이 없기를, 원한심이 없기를'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집니다.

 

그게 첫 번째 사마타 방법으로 먼저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먼저 되는 게 아니고 '내가...' 이런 건 없습니다. 위빳사나 수행할 때는. '여기에 있는 한정된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고통 없고 원한심이 없기를...' 마음을 가지고.

그러고 나면은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이 붓다야나 선원에 있는 천신들, 여러분들 눈엔 안 보이죠? 그 '여기 붓다야나 선원에 있는 천신들이 행복하고 괴로움이 없고 원한심이 없기를...'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 딱 두 구절만 하면 됩니다.

이 두 구절만 반복적으로 이렇게 쭉 해주면 돼요.

 

그러면은 예를 들어봅시다. 이 속에는 나하고 친한 이도 있고 나하고 좀 불편한 사람도 있을 거라. 그런데 어떤 특정한 사람을 한정하지 않고 이 속에 있는 모든 이들을 지칭하기 때문에 불편하든 아니면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든 이것은 나에게 크게 영향을 안 미칩니다. 그러면 그냥 나를 포함한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행복하기를 하는 그런 마음만 낼 수가 있어요.

자애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면 뻬마(pema)라고 하는 집착하고 사랑하고 하는 감정들, 남을 질투하고 미워하는 감정들, 이런 것들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의 마음을 자애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자애수행을 할려고 할 것 같으면 먼저 자애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하는 것들을 먼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이 속에는 몇 년이 있다가 봐도 참 기분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 봐도 그 사람 떠올려도 기분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특정하게 이익을 나한테 준다든지 뭘 해서가 아니라 그냥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나 같은 경우에는 태국에 있었던 내 스승님, 떠올리기만 해도 너무 좋아 나는! 그 스님한테 내가 뭐 애착을 갖든가 이런 것도 없고, 물론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많은 가르침을 주고 좋은 거지만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좋은 거야. 그 스님의 덕성이나 성품들이나 이런 것들이 떠올려지기도 하고 어떨 때는 그 스님이 나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려지기도 하고 하거든. 그런데 이미지 자체는 그 스님을 떠올리면 그냥 아주 가까운, 혈육보다도 가까운, 그런데 이해관계는 전혀 없는 그런 관계로서 탁 떠올려지거든. 그게 자애의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자애의 마음을 분명하게 먼저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있을 때는 그것을 기준으로 해야 되는 것이지 그냥 '행복하기를' 한다 해가지고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자애를 할 때는 항상 대상을 자신보다도 조금 위쪽에, 그리고 바로 내 앞에, 2~3m 앞에 요렇게 딱 있다 생각하고, 여기서 부처님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을 하면 됩니다. 이 정도(위치)에 자애를 맺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기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한다, 그럼 이 '붓다야나 선원에 모인 식구들 전부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을 자애를 그쪽을 향해 내는 거라. 그 자애의 마음을! 그걸 반복적으로 쭉 그렇게 해줍니다.

 

그렇게 해나가면서 자애수행을 지속해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사마타 수행 쪽으로 계속 흘러들게 됩니다.

그러면 '행복하기를' 하는 것을 하면서 자애라고 하는 이미지화 된 것들, 그리고 의미들을 분명히 아는 것들로 인해서 마음은 거기에 오롯하게 맺혀지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평온해지면서 또 마음은 기쁨으로 쭉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기쁨의 여러 가지 현상들이 또 일어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그걸 대상으로 해서 쭉 수행을 해나가면 됩니다.

그래서 기쁨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그리해도 변화되는 것들은 그냥 놔주고,

나는 오로지 '내가 지금 할 것은 그냥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하기를 하고 마음 내는 것뿐이다' 생각하고 그냥 계속 그거만 해주면 됩니다.

 

그래서 완전히 깨끗하게 될 때까지, 마음이 그냥 '이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하는데 가만히 맺혀져 있을 때까지 계속 그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할 거 같으면 적어도 초선정까지는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초선정에 가고 나면 그 자애의 이미지를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고, 그 행복하다고 하는 그 속에서 이미지화 된 마음들 그것을 대상으로 쭉 해나가야 됩니다. 그러면 이선정 삼선정까지는 쭉 가지게 됩니다. 오롯이 그때는 그 하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쭉 해나가면 수행 잘하는 사람은 괜찮은데, 수행을 잘 못하는 사람은 하다가 반드시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미지는 분명하게 했는데 하다 보면 이게 자꾸 행복하기를 하는 것들이 자꾸 엷어지는 거라.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하는 것을 가지고 해야 되는데, 자애의 마음만 가지고 해야 되는데, 뭐가 행복한 건지 밥 많이 먹는 게 행복한 건지 아니면 수행 잘하는 것이 행복한 건지 이런 식으로 자꾸 마음이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행복하기를' 하는 것을 쭉 하다 보면 마음이 자꾸 거기에만 머물러 있게 됩니다. 실제로는 자애의 마음을 내지도 않으면서! 게을러지게 돼버리는 거라! 사마타 방법으로만 쭉 하다 보면 그런 한계들은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오래 안 합니다.

한 5분 정도, 길면 5분 정도 아니면 2, 3분 아니면 1, 2분 이 정도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을 쭉 내고나서,

그다음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행복하기를 했을 때 그 '자애의 마음으로 해서 생기는 마음의 느낌', '느낌들을 관찰'하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따뜻해진다든지 아니면 뭔가 살며시 기어가는 느낌이 든다든지 이런 느낌이 틀림없이 듭니다. 그럼 그걸 관찰하는 거라.

 

(수행자 질문 : 그 환희심 같은 것이 일어나면 그것을 관찰합니까?)

그것도 마찬가지 환희심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환희심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느낌들, 일어나는 마음들, 자기의 마음, 그걸 관찰하는 거라. 그러면은 그것은 환희심도 바뀌어나가고 그 느낌들도 바뀌어 나갑니다. 그냥 그대로 따라가면서 관찰해버리는 거라.

그럼 자애수행으로 인해가지고 위빳사나로 전환을 해버리는 거라.

그럼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바뀌어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면 어느 순간에 자애수행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무디따 수행까지 쭉 다 하고 있는 거라. 마음이 평온한 상태가 딱 돼버리는 거라.

 

그게 첫 번째 자애수행을 하는 방법입니다.

위빳사나와 사마타를 병행하면서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특히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여기 모여 있을 경우에는 그 방법으로 하는 것이 첫 번째 방법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방법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아까 저쪽 보살님이 설명한 앞부분, 가장 자기 자신부터 자애의 대상이 된다는 것. 그거는 지금 여러분들이 다 잘 알 겁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부터 자애수행의 대상으로 삼고, 그다음에 가까운 사람, 가까운 사람이라 해서 이성을 말하는 게 아니고 쉽게 말하면 자기의 부모나 아니면 자기의 스승이나 아니면 막연한 친구, 같이 있는 친구라든지 이런 친구들을 대상으로 하고, 그러고 나서 그다음에 가족으로 넘어가고, 이렇게 점점 넓혀가는 방법을 쓰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내 자신에게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괴로움이 없기를, 내가 원한심이 없기를' 하는 것까지 쭉 하는데 내한테는 잘돼. 그런데 가까운 친구한테 할 거 같으면 그 마음이 내가 자애를 방사했던 마음하고 똑같이 가는 거라.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리석게 그걸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런 자애의 마음이 아닌데도 누구 이름을 들먹여서 '누구가 행복하기를' 뭐 어쩌고 저쩌고 하고 있다는 거라.

 

사실은 자기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지는 않거든. 그러면 자기 자신만큼 그렇게 자애를 방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 대상에게 자애수행 하다가도 빨리 거둬야 됩니다. 그걸 어리석게 계속하고 있어야 되는 게 아니고, 거두고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와야 됩니다. 그러고 자기에게 '내가 행복하기를' 하고 계속해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그 대상을 떠올려서 그 마음을 다시 그 대상에게 보내야 되는 것이고.

 

다행히 그 대상을 향해서 나와 동일한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있으면 그 대상에게 향해서 계속해도 됩니다.

그러다 안되면 다시 또 돌아와야 돼.

그런데 이게 또 넓혀가면 넓혀갈수록 돌아오는 횟수가 점점 더 많아지는 거라. 나부터 해서 친구, 우리 가족, 그다음에 어느 구역 방위를 넓히든 아니면 구역을 넓히든 그렇게 넓혀간다고 치자. 안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야 돼. 안되면 처음으로 돌아오고 처음에서 두 번째로 갔다가 두 번째로 갔는데도 안되면 다시 또 처음으로 돌아와야 되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에서 세 번째로 갔다가 안되면 다시 또 처음으로 와야 돼. 이렇게 돼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만이 나와 동일한 자애의 마음이 점점 더 방사되는 형태를 띠게 되는 거라.

그게 항상 주의해야 되는 것 두 번째.

 

그다음에 자애의 문구 부분입니다. 게송에 보면

 

'행복하기를,

증오로부터 자유롭기를,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번민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스스로를 보호하여 행복을 누리기를'

이렇게 적어놨습니다. 이게 자애수행의 기본적인 문구입니다.

 

그런데 맨 위에 해놓은 게 있습니다. '행복하기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이거는 고통이 없기를 하는 얘깁니다! 그다음에 '증오로부터 자유롭기를,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번민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스스로를 보호하여 행복을 누리기를' 하는 이부분입니다. 이게 멧따바와나(mettā bhāvanā)와 동일한 겁니다. 이거는 공통적으로 쓸 수 있는 문구입니다.

그러니까 멧따 (mettā)수행으로 가지고 까루나(karuṇā), 무디따(muditā), 우뻭카(upekkhā) 까지 다 연결을 해서 할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항상 이것은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다음에 하나가 뭐냐 하면 순차적으로 넓혀가는 대상뿐 아니라, 해서는 안 되는 대상들은 분명하게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하는 것이 되고 나서 '싫어하는 사람들도 행복하기를' 하는 것으로 하라고 얘기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싫어하는 사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나 동일한 겁니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하고 나서 그다음에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하는 것을 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것이 맞습니까?

(수행자 대답 : 후자가 맞는 거 같네요.)

사실 이거는 답은 없습니다. 가르치는 스승에 따라서 달라지기는 합니다.

 

스님은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하고 나서 '싫어하는 사람..'으로 넘어가는 것이 순조롭다 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방위를 대상으로 할 때나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해서 한정적이지 않을 때는 자애를 방출하기가 수월합니다. 그래서 자애가 순수하게 될 수가 있는데, 싫어하는 사람이나 이런 것들이 한정이 돼버리면, 아니면 싫어하는 사람이나 아니면 돌아가신 이나 이런 것으로 한정이 돼버린다 할 거 같으면 어떤 경우든지 거기에는 나의 관념적인 것들이 탁 끼어들게 됩니다.

 

사실은 불환과에 이르고 나서도 안 없어지는 게 자아(māna)라고 하는 의식입니다. 자심해탈(慈心解脫) 한 상태라고 하더라도 싫은 사람을 하더라도 잘 안됩니다. 그래서 모든 이들에게 행복하기를 하는 것이 원만하게 잘 되고 나서 그다음에 싫어하는 대상에게 하는 것이 순차적으로 맞다는 거라. 순서를 항상 그런 식으로 써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으로 돌려야 되는 것이 싫어하는 사람, 그다음에 내가 아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그다음에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 그다음에 죽은 이들에 대한 것, 이 네 부류들은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하는 수행을 하고 나서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하는 앞에다 넣어도 관계가 없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이성! 남자면 여자에게 하는 것, 부모일 거 같으면 자기 자식에게 하는 것, 이런 부류들은 모든 이들 앞에 넣어도 관계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경전에도 그런 부분이 나옵니다.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는 암소가 저쪽에서 누군가가 화살을 쏘니까 자기 송아지가 해꼬지 당하는 걸 싫어해가지고 '아, 아이에게 괴로움이 없기를, 해꼬지 당하지 않기를' 하는 마음을 강하게 내다보니까 그 화살이 가다가 갑자기 툭 떨어졌다는 것이 자타까 경전에 나옵니다.

 

자식에 대해서는 자애수행이 사실은 잘 안됩니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애정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런데 애정 관계가 강해지면 바뀔 수 있는 게 자애로 바뀌는 거라. 애정 관계라 하더라도 그렇게 자애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이성 간의 관계들 그리고 자식과 부모간의 관계들은 항상 모든 이들에 앞서서 하더라도 문제가 없다 하는 거라.

 

그렇게 보면 대충 순서가 이렇게 나옵니다.

그 순서에 따라서 수행을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리하더라도 그 순서라고 하는 것은 하다가 안 되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된다는 거라. 그 원칙은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내가 행복하기를 하는 것에서 부터 해가지고 네가 행복하기를, 뭐가 행복하기를... 이렇게 나가다가도 안 되면 다시 돌아오라는 거라.

그리고 자애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게 잡히지 않으면 아예 처음부터 하지 마라는 거라. 자애수행을. 그건 안 하느니만 못해. 그래서 개념을 분명하게 다시 잡고 그 개념에 맞게끔 그것을 떠올리면서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을 분명히 가지라는 거라.

 

이렇게 보면 됩니다. 경전에 사마왓디라고 하는 왕비의 예를 들어놓은 게 있습니다. 평소에 자애수행을 많이 했던 왕비인데 다른 왕비의 음모에 의해가지고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처형되기 직전까지도 그 왕비와 같이 있던 시종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버려라. 내가 모함으로 인해서 죽는 거지만 그 모함을 했던 사람이든 아니면 나를 죽이는 사람이든 그것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그 사람에 대해서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마음을 가져라"하는 거라.

실제 그렇게 하다 보니까 죽일려고 했던 사람도 감히 죽일 마음이 안 생기는 거라. 그리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실제 모함하려 했던 사실도 나중에는 문제가 밝혀지게 되는 거라.

 

자애수행을 하는 사람은 가져야 되는 것이 그겁니다. 자기가 지금 죽고 하는 것은 크게 문제 삼아서는 안 돼. 내가 지금 손해를 입고 하는 것도 문제 삼아서는 안 돼. 그것을 대상으로 했으면 그 대상이 어떠한 경우든지 괴로움이 없고 그것으로 인해서 슬픔에 빠지는 것도 없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항상 가져야 되는 거라.

그런 마음이 될 때 그것을 대상으로 해야 돼.

그런데 그렇게 안 될 때는 그것은 대상이 안 돼.

그럼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야 되는 거라.

자기 자신에게 만큼은 분명하게 할 줄 알면 대상을 넓혀나갈 수가 있고 또는 좁혀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될 때는 대상을 넓히지 말아라는 거라.

 

그리고 마찬가지로 아까 저 보살님은 멧따수행을 하다가 멧따, 까루나, 무디따, 우뻭카로 이렇게 바뀌어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건 분명하게 다릅니다.

멧따수행을 할 때는 멧따수행만 하고, 멧따수행이 다되고 나면 까루나 수행을 하도록 하고, 그다음에 무디따 수행을 하고, 우뻭카 수행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하는 방법은 다릅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다르게 적용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왜 위빳사나 수행 하면서 자애수행을 하라고 그럴까?

지금 얘기하는 건 자애수행만 예를 드는 것이 아니라 사무량심 수행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중에 하나를 특정하게 해가지고 수행을 하라고 그럴까? 왜 그래요?

아까 처음에 얘기했듯이 자애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사마타 수행 방법으로도 할 수 있지만은 위빳사나 수행 방법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같은 대상을 가지고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을 왔다갔다 할 수 없으면 삼매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또한 삼매에서 그다음 삼매로 넘어갈 수도 없습니다.

이선정에서 삼선정으로 넘어갈 때 어떻게 해야 돼요? 이선정에서 빠져나와야 삼선정으로 넘어가집니다. 빠져나올 때 어떻게 빠져나올 건데? 위빳사나로 전환할려면 어떻게 빠져나올 거라? 또는 사선정에서 삼선정으로 내려간다. 어떻게 전환할 건데?

 

그걸 모르면 사마타 수행에서 위빳사나 수행으로, 위빳사나 수행을 하다가 다시 사마타 수행으로 전환을 하는 것을 자주자주 해봐야 만이, 이것들이 삼매에서도 자유롭게 자재하게 됩니다.

다섯 가지 자재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대로 들어갔다가 마음대로 빠져나오고, 아니면 자기가 지정한 시간만큼 있을 수가 있고, 그다음에 지정한 특정한 소리에는 내가 삼매에서 깨어 나올 수가 있고, 하는 그런 자재할 수 있는 방법들을 터득을 하게 됩니다.

 

빠져나오면은 그것을 즉시 위빳사나로 전환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삼매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사띠가 딱 사라져버립니다. 알아차림이 사라져버리고 깜짝 놀라게 되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러면은 삼매는 아예 깨져버립니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됩니다. 그럼 이선정에서 빠져나올 때 위빳사나로 전환할 줄 알아야만이 그다음에 바로 삼선정으로 넘어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멧따 수행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위빳사나 수행 방법으로도 분명하게 해봐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또 사마타 수행 방법으로 돌려가지고 하나의 대상, 행복하기를 하는 대상으로 집중하는 법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집중력을 키우면 사띠가 저절로 같이 키워지는구나. 집중력이 커지면 당연히 내가 지혜롭게 전환하는 법들도 아는구나 하는 걸 스스로 터득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게 인제 첫 번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방법, 두 번째 방법은 '자애수행'뿐 아니라 '붓다눗사띠'라 해서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방법도 있고, 그다음에 '아수바바와나'라고 하는 청정하지 못하다 하는, 이 몸이 깨끗하지 못하다 하는 것에 대해서 수행하는 법도 있고, 그다음에 '마라나눗사띠'라 해가지고 죽음에 대한 것, 나에겐 언제든지 죽음이 다가온다 하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는 수행 방법, 이 네 가지를 위빳사나 수행을 하든 사마타 수행을 하든 예비적인 수행법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에서 사실 이것이 필요 없을 거 같죠? 이게 다 사마타 수행 방법이기 때문에! 그런데 하는 이유가 그것들을 위한 것들이라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왜 자애수행들을 하라고 그러느냐?

자애수행은 뭐를 가지고 합니까?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벗어난 상태에서 하는 겁니까? 아니죠! 여섯 가지 감각기관 내에 있습니다. '의관'이라고 하는 것!

그럼 '의관'을 가지고 수행을 한다고 치자. 그럼 눈을 가지고 뭔가 보인다. 그러면 나는 의관에서 빨리 마음을 보는 감각기관으로 돌려야 됩니다. 전환시켜줘야 됩니다. 아니면 소리가 들린다고 할 거 같으면 소리가 들리는 감각기관으로 전환시켜줘야 합니다.

내가 자애수행이 잘 될 거 같으면, 그것만 하고 있으면 소리도 안 들리고 보이지도 않게 되겠지마는 대부분 그렇게는 안 된단 말이라. 보고 들리고 냄새 맡고 한단 말이라. 그럼 이거를 어떻게 전환시켜 줄 거라?

 

자애 수행하는 걸 딱 멈추고, 보는 것을 감각기관으로 알아차림을 돌릴 거라? 아니면 자애 수행을 하는 것은 계속하면서 보는 감각기관으로 알아차림을 유지할 거라? 어떤 게 맞아요? 어떤 게 맞아요?

멈추고 있을 때에는 병존해야 됩니다.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알아차림을 '보는 알아차림'을 유지해줄 거 같으면 '보는 알아차림'이 오히려 더 뚜렷해집니다.

그런데 움직이면서 자애수행을 하고 있다 그럴 것 같으면 그 자애수행을 멈추고 그 대상을 향해야 합니다.

 

가끔 이런 얘기들을 합니다.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대상을 관찰할 거 같으면 대상을 보기가 수월해진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데 자애의 마음을 딱 지닌 채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걸 그대로 관찰하는 겁니다.

왜 쉬워질까? 자애의 마음을 가지는 것은 선한 마음입니다. 선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상태에서 여기에 완전히 다 쏟아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 정도를 한 20% 정도 마음을 둔 상태에서 80%를 알아차림 하니까, 마음이 쉽게 말하면 선한 마음에서 악한 마음으로 바뀌어나가지를 않는 거라.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니까 그 알아차림이 80%지만 오히려 100% 알아차리는 것보다도 더 쉬워진다는 거라. 가만히 있을 때는 그게 효율적이라는 거라.

 

그래서 사범주를 뭐라 그래요? 사무량심이라 그럽니다. 한량없이 개발하라는 거라. 항상 마음에 두고 있으라는 거라. 마음에 두고 있으면 여러 가지 보호도 받고, 이런 방호벽을 치는 것처럼 보호도 받고 있을뿐 아니라 그것뿐 아니라 수행을 하는데도 수월해진다는 거라. 대상을 붙잡지 않고 밀쳐내질 않기 때문에 대상을 보기가 수월해진다는 거라. 그게 두 번째 이유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실제적으로 대상을 가지고 수행을 하더라도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과 가지지 않고 하는 것은 그렇게 차이가 난다는 거라.

그 대신에 움직일 때는 안 됩니다. 움직일 때는 어떤 경우든지 빠르게 전환을 해줘야하기 때문에 자애의 마음을 20%라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그 움직이는 대상을 관찰할 거 같으면은 깨져버립니다. 그래서 그럴 때는 하나는 반드시 중단을 해야 됩니다.

 

자! 그렇게 봤을 때 자애수행이 이거 말고 또 없을까? 지금 제시한 것 말고?

일상생활에서 자애수행 할 수 있겠죠!

그래서 크게 자애경이 「멧따숫따」라고 하는 게 있고, 「멧따바와나」라고 하는 게 있고, 「까라니야멧따숫따」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멧따숫따'와 '멧따바와나'는 가만히 앉아서 수행하는 방법들입니다.

그런데 '까라니야멧따숫따'는 거기 한번 보아보십시오. 자애수행법에 대한 거는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수행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도 없습니다. '니가 부지런히 뭘 해라, 정직해라, 뭐 어찌해라', 이런 애깁니다. 까라니야멧따숫따는! 그거는 뭐라? 일상생활에서 자애를 닦는 방법이란 뜻입니다.

까라니야멧따숫따 같은 경우에는 일상적인 자애수행법에 대한 것들을 설명해 놓은 겁니다. 그렇게 보니까 자애수행하는 법은 참 많이 있죠? 자기에게 맞는 거를 해야 됩니다. 자기에게 맞는 거를!

 

그런데 스님이 꼭 추천하고 싶은 것은 뭐냐면 "까라니야멧따숫따는 반드시 외워라." 그 내용을 분명히 외워라. 그래서 거기서 하라는 건 하고 하지 마라는 건 하지 마라. 그게 자애의 마음을 기르는데는 굉장히 큰 효과를 가져온다는 겁니다. 평상시에 자애의 마음을 훈련하고 자애의 마음을 키워두지 않으면, 실제 집중수행 할 때 자애수행 할려면 자애의 마음이 잘 안 일어나집니다.

 

그래서 까라니야멧따숫따는 반드시 외워라. 외우고 그 내용들을 반드시 숙지하라.

그다음에 두 번째는 앉아서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원한심이 없기를' 하는 것을 하는 수행을 하라.

 

그러면서 사마타 수행을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을 하고, 위빳사나 수행을 했다가 사마타 수행으로 전환을 하고 하는 것들을 줄기차게 계속하라.

적어도 그 두 가지는 해야 됩니다. 그 두 가지는 해야 만이 그래도 자애가 버릇처럼 내 몸에 달라붙게 됩니다. 이해하겠죠?

 

수행자 질문 : 스님, 저는 가끔 여래십호명을 가지고 조용히 해보는 데 어떤 책에는 보면 십호명이라고도 되어있고, 또 아홉 가지라고도 되어있고 어떤 게 맞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스님 : ()으로 칠 때는 구덕(九德)이라 그러고, 명호(名號) 칠 때는 열 가지입니다.

무상사, 조어장부 이 두 가지를 합해 놨을 경우는 구덕이 되고, 이걸 분리해 놨을 때는 열 가지 명호가 됩니다.

 

수행자 질문 : 그럼 명호를 할 때는 열 가지로 해야 됩니까?

스님 : 예, 그리하는데 중요한 거는 나중에 붓나눗사띠 하는 법을 얘기하겠지만, 명호 그거 아무리 외워봐야 별 의미 없습니다. 명호의 의미를 파악하고 숙지해야 됩니다!

 

수행자 : 아라한이라면 모든 번뇌를 제거하신 분, 삼마삼붓다 스스로 올바르게 깨달으신 분, 저는 그중에서도 윗자짜라나 삼빤노 그부분을 할 때는 참 마음이 부처님이 더 위대하고 숭고하게 느껴지고, 지혜와 덕행을 함께 겸비하셨다 싶은게 아, 우리도 자꾸 아는거 이것도 소중하지만 실제적으로 마음을 내서 자애를 보낸다든지 아니면 실제로 보시를 한다든지 이런게 우리들한테 덕행으로 많이 쌓여야겠다는 이런 생각이 더 굳어지거든요.

 

스님 : 그래요. '윗자짜라나 삼빤노'는 내가 언젠가 책에 자세하게 풀이해놨던 것이 있는데, 그건 여래십호나 아니면 여러 부처님 아홉 가지 공덕 중에서 윗자짜라나 삼빤노만 내가 중점적으로 써놓은 게 있어요. 그런 식으로 그 의미들을 분명하게 파악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아라항(Arahaṁ)을 하더라도 아라항에 대해서 분명하게 의미들을 파악한 것을 가지고 먼저 숙지를 하고 나서, 그러고 나서 '아라항, 아라항, 아라항'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아라항이 어느 정도 되고 나야 '아라항' 하고 나서 '아라항 삼마삼붓도' 하고 넘어가지고 '아라항 삼마삼붓도' 그다음에 '아라항 삼마삼붓도 윗자짜라나삼빤노' 이런 식으로 그다음에,

'윗자짜라나삼빤노' 자꾸 그렇게 넘어가지 말고 하나씩 다 되고 나서 넘어가지고, 그다음에 그것이 다 되고 나면 '아라항' 다음에 '삼마삼붓도' 하고 나서 그다음에 '삼마삼붓도'를 떠올리고 다시 또 '아라항' 하고 아래위로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면서 분명하게 그 의미파악을 자꾸 해줘야만이, 그것이 부처님의 명호에 대해서 딱 맺히게 된다고. 그래야 니미따들이 생겨납니다. 그냥 명호만 쭉 외우고 해가지고만 되는 게 아니고!

 

수행자 : 수가또(Sugato)는 그 명호는 어떤 책에 보면 '아름답게 오셨다 아름답게 가신분' 그런 의미도 있고 어떤 데는 보면 '대열반에 드신 분' 이러고 해놨든데, 저는 '아름답게 오셨다 아름답게 가신분' 그 대목이 더 마음이 들고 그랬었어요.

스님 : 그건 문자 그대로 하는 거고, '수가따(sugata)' 해가지고 '가따'가 오다도 되고 가다도 되고, '수'는 아름답다는 거니까 '아름답게 왔다가 아름답게 갔다'는 그거는 문자적으로 하는 것이고, 무엇 때문에 왔다가 무엇 때문에 갔는데요?

수행자 : 아름답게 오시면 우리를 미혹에 빠져있는 중생들에게,

 

스님 : 그렇게 자꾸 하면 안돼요. 명호를 외울 때 그렇게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끄달려 들어가게 되기 때문에, 명호는 그렇게 해서는 안돼요.

그런 식으로 외울려고 하지 말고, 수가따라고 할 때는 '열반에 이르신 분, 열반에 잘 도달하신 분, 그리고 우리를 열반에 인도하시는 분'이란 뜻으로서 자꾸 이해를 해야만이 ‘나도 빨리 열반에 도달해야지’ 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지, 그걸 뭘 잘 왔다 잘 가? 그렇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열반에 이르신 분'입니다. 잘 갔다가 잘 왔다고 하는 것은. 그 '가따'라고 하는 것은 저 언덕, 그리고 저 언덕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하게 해탈에 이르러서 이 번뇌로부터 벗어나신 분이고 그다음에 이 윤회로부터도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열반에 이르신 분이고 이 윤회로부터 탈출했다는 그런 의미로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이 바른 겁니다.

 

자! 또 다른 수행에 대한 질문있으신 분? 없어요?

오늘 자애수행에 대한 얘기를 쭉 했으니까 다음부터라도 수행을 시작을 할 때 적어도 5분간은 자애수행을 먼저 하고 그다음에 위빳사나 수행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수행자 질문 : 스님, 돌아가신 분한테는 자애를 보내지 말라고 들었는데, 돌아가신 분한테도 보내야 됩니까?

스님 : 여러분들은 그런 능력 없습니다. 그 자애를 방출했을 때 자애를 받을 수 있는 영역에 있는 것은 아귀계 밖에 없습니다. 뻬따(peta), 뻬따천에 있는 사람들이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어느 정도 삼매에 든 상태에서 자애를 방출했을 때 아귀계에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사실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한다는 것은 그냥 여러분들 마음 좋차고 하는 겁니다. 그게 영향을 줄 수는 없습니다.

 

자!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붓다의 9덕 : Buddha guṇa 】

Iti pi so, Bhagavā, Arahaṁ, Sammā sambuddho,

Vijjā caraṇa 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 damma sārathi, Satthā deva manussānaṁ,

Buddho, Bhagavā ti.

그분, 존귀하신 분(세존),

모든 번뇌 떠나신 분(아라한),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정자각자),

지혜와 덕행 함께 갖추신 분(명행구족자),

진리의 길 보이신 분(선서),

세상일을 모두 훤히 아시는 분(세간해),

어리석은 이도 잘 이끄시는 위없는 분(무상사 조어장부),

모든 천상과 인간의 스승(천인사),

깨달으신 분(붓다),

존귀하신 분(세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