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구·울주선원 수행법문

쌩초보 수행법문2. 「수행의 3원칙」(20141107.대구)

담마마-마까 2019. 12. 15. 19:55

https://youtu.be/O4eKxA04Ugs

* 쌩초보 수행법문2. 「수행의 3원칙」 (20141107.대구)

 

자! 시작합시다.

저번에 프린트 물에서 모르는 부분 물어보십시요. 저번 시간에는 아마 경행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말았던 것 같은데 없어요? 다 이해하죠!

 

수행자1 질문 : 경행을 할 때 손은 어떻게 합니까?

스님 답변 : 저번 시간에 경행의 원칙 중에 옷자락이 흩날리지 말도록 하라고 하는 얘기 했죠? 마찬가지로 손도 자유롭게 출렁거려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 붙이든지 앞에 손을 모으든지 붙이든지 뒤로 모으든지, 그렇지 않으면 옆에다 붙이든지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거는 자기 체형에 따라서 보통 보면 좀 뚱뚱한 사람들은 손을 뒤로 많이 하더라고. 그리고 좀 날씬한 사람들은 앞에 하기가 좀 편하고.

 

그런데 앞에 하더라도 이번 타임에 앞에 했다 할 거 같으면, 다음 타임에는 뒤로 하는것이 좋습니다. 왜 그러냐면 계속 앞으로만 이렇게 하면 몸의 발란스가 깨지게 되거든요. 장기적으로 계속적으로 수행을 할 때는 한번은 앞으로 한번은 뒤로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좋고. 옆으로 붙이는 것들도 무방한데 문제가 뭐냐면 어깨에 긴장이 돼요. 딱 붙어 있을려고 하다 보면. 그래서 긴장이 되면 알아차릴 대상을 완전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걸어갈 때 그냥 일반적으로 집중수행 하는 경행 말고, 보행을 할 때 알아차리고 할 때는 되도록이면 옆에 축 늘어뜨린 상태에서 거의 붙도록 해서 걸어가는 것이 좋고, 그렇지 않고 집중수행 할 때는 앞이나 뒤로 해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자2 질문 : 손은 이렇게 잡습니까?

스님 답변 : 요런 식으로 살며시, 떨어지지만 않을 정도도 되어야지, 이걸 꽉 잡을 필요는 없습니다.

 

좌선을 하든 경행을 하든 한번 포지션을 딱 취하고 나서 한번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한번 전체적으로 싹 훑어봐요.

긴장 돼있는 부분이 없는가?

그래서 맨 처음에 눈을 딱 감고 오른쪽 눈이 긴장돼있는가 보고, 왼쪽 눈이 긴장돼있는가? 그다음에 입술이 긴장돼있는가, 그다음에 어깨 오른쪽 어깨 왼쪽 어깨, 그다음에 맞잡은 손, 그다음에 무릎, 그다음에 발바닥,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보라고.

만약에 긴장이 돼있으면, 어깨가 긴장돼있다 싶으면 어깨를 다시 펴고 편하게 해주고,

 

수행자3 질문 : 합장을 하면 안 됩니까?

경행을 할 때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합장을 하면 중력은 밑으로 내리기 때문에 이걸 유지할려면 힘이 들어가야 됩니다. 그렇겠죠? 쓸데없는 데다 힘을 뺏을 필요는 없겠죠.

 

수행자3 : 그냥 중심이 안 잡혀가지고 이렇게 할 때도 있거든요.

스님 : 단전에다가 손을 놓을려고 하면 안 됩니다. 손을 축 내린 상태에서 두 개가 이렇게 모인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대부분 보면 이 뒤에 손가락 두개만 약간 걸리고 이쪽 부분만 한두개 요렇게 걸린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걸 다 잡을라고 하지 말고. 이렇게 해야만이 이게 긴장이 안 돼. 요렇게 살큼하게 잡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합장을 하면 안 되는건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수행자3 : 저는 이렇게 하는 것이 중심이 잘 잡히는거 같아요.

스님 : 눈 감고 경행을 합니까?

수행자3 : 눈감고 할 때도 있고, 눈감으면 전혀 중심이 안 잡히고요 뜨면은 잘 잡히고예.

스님 : 그렇다고 해가지고 경행하는 목적이 중심잡기 위한 것은 아니잖아.

수행자3 : 눈감고 하면 이러ᄃᆞᆨ 기우뚱

스님 : 그리해도 그렇게 해서 길을 들여놓으면 안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몸에 긴장이 안 되어있는 상태내에서, 수행의 대상은 이 몸의 형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좌선할 때 어떤 식으로 앉아있고 하는 그게 중요한 부분이 전혀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알아차릴 대상은 걸어갈 때는 발바닥인 것이고, 앉아서 좌선하고 있을 때는 코면 코끝, 배면 배 한점, 여기가 수행의 대상이고 수행의 한 포인트가 되어야 되는 것이지, 거기에 온데 마음을 다 쏟아야 되지, 다른 데다가 괜히 폼 잡는다 데다 거기에 마음을 뺏겨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형태를 가지고 하면 안 됩니다. 되도록이면 합장하지 말고 편안하게 긴장되지 않게 하고.

 

그리고 경행을 할 때 조금 더 경행하는 힘을 좀 더 높일려고 할 것 같으면 걸리는 부분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이쪽에서 저쪽까지 왔다갔다 하면서 걸으면서 눈을 감고 해봐요. 그러면은 자기가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경우도 있고 아마 그럴 거라. 그러면은 내가 몸이 어느 쪽에 이상이 있다는 것들도 알고, 또 힘이 생겨나가면 대부분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걸어갑니다. 똑바로 걸어가고 나서 마지막에 벽에 부딪칠 때도 의식하지 않고 저절로 벽에 탁 부딪치면 '아, 내가 부딪쳤다'고 알고 멈추는 줄 알고, 그렇게 훈련을 해나가면 나중에 집중수행 할 때 경행할 때도 마찬가지로 경행하고 나서 마지막 '멈추고 서고' 하는 부분을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명칭을 붙이는 목적은 대상에 마음을 붙잡아두기 위한 겁니다. 그러면 명칭을 붙이는 것과 실제 내가 알아차릴 것은 다르다는 걸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걸 모르고 명칭 자체에 함몰돼버리면 안 됩니다. 그리고 수행을 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들을 알아차리기 위한 것이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알아차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내가 의도해가지고 먼저 멈추고 하는 것들은 되도록이면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의도가 일어나가지고 멈추는 것은 분명하게 내가 알아야 되겠지만, 내가 일부러 의도를 만들어내가지고 멈추고 하는 것들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자3 : 발을 들기 전에 의도하는 마음을 내야 됩니까?

스님 :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닙니다. 그럴 단계가 됐으면 그렇게 하면 되는데, 그 의도를 알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현재 발을 들어올리는 전체 과정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됩니다. 알고 있다는 것은 뭐냐면, 발을 들어올릴 때 들어올리는 중간중간에 계속적으로 멈추고, 알아차릴려고 해도 알아차릴 부분이 없는 상태를 아는 상태가 됐을 때만이, 의도가 먼저 일어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내가 의도를 먼저 내가지고 그럴려고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거는 그냥 그런 형태를 갖추어져 있다는 것뿐인 것이지 내가 그걸 일부러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현재는 뭐 '걷고자함' 하고 마음을 내고 나서 걷고 이렇게 하지 말고, 그냥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이런 식으로 걷는 것이 오히려 훨씬 더 이익입니다. 먼저 갈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현재 내 수준에서 해당되는 것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하다가 조금 더 그게 잘 된다 싶으면 인제는 거꾸로 한번 해봐요. 뒤로 가는 걸 말하는 겁니다. 뒤로 한번 쭉 걸어보고, 다시 또 돌아서서 뒤로 한번 걸어보고.

그러면 집중력이 어느 순간 확 커져있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집중력이 커지는 상태에서는 왠만해선 알아차림은 그 집중하는 대상에 붙어있게 됩니다. 그래서 집중력 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렇게 경행을 해보면 될 겁니다.

 

그래서 몸의 자세, 나중에 좌선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좌선 때 다리가 어떻게 돼있고, 저렇게 의자에 앉아 있고, 허리가 구부러져 있고, 눈을 뜨니 감으니, 전혀 신경쓰지 마십시요. 그거 신경 쓸 대상이 아닙니다.

눈을 떠있어도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보이지 않게 될 거고, 그리고 허리가 약간 구부정해서 호흡이 지나치게 원활하게 되는 상태가 아닌 이상에는 대부분은 보면 호흡이 자연스럽게 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조금 더 자연스럽게 되기 위해서 허리를 약간 펴지는 경우도 있고, 또 호흡이 자연스럽게 되기 위해서 배를 아래로 축 아래로 내리까는 경우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세는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대신에 나중에 일어날 현상들을 피할려고 할 것 같으면 손의 부분, 대부분 보면 손을 이렇게 합니다. 이거(손가락 끝) 붙이지 마. 이거 붙여버리면 나중에 맥박 뛰는 소리와 동일하게 딱깍딱깍 들립니다.

코끝이든 배든 호흡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나중에 이 호흡이 그냥 딱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하는 정도에 이르르게 됩니다. 나중에 호흡을 알아차리다 보면. 그런데 그럴 때 딱 장애가 되는 것이 뭐냐면 이게 붙어있어서 맥박뛰는 소리, 맥박 뛰는 소리가 딱 그거하고 비슷하거든. 그러니까 헷갈려요. 헷갈릴뿐아니라, 호흡 단계에서 삼매쪽으로 딱 넘어가야 되는데 이것 때문에 못 넘어가요. 헷갈리고 그리고 신경쓰여가지고.

 

그래서 경험상으로 봐가지고 되도록이면 이거(손끝)는 붙이지 마라. 붙이지 말고 요거는 반드시 떼라. 요렇게 붙일 필요도 없고, 이렇게 할 필요도 없고, 이 부분이 지나치게 추울 때가 아니면, 지나치게 추울 때는 몸의 온도를 유지시켜주기 위해서 이렇게 꽉 잡습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면 이정도 날씨나 이런 때는 크게 지장이 없습니다. 이걸 떼더라도. 그래서 이거는 붙이지 말고 떼도록 그렇게 하십시요.

 

그리고 좌선할 때도 입에 혀를 천장에 마니,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니, 그거 신경쓰지마요. 자연스럽게 나중에 되면 입천장에 안 붙여도 침샘에서 나오는 침들은 자연스럽게 내려갑니다. 넘어가지고 또 솟아나고, 그래서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좋습니다.

긴장돼 있을 때는 침을 꼴깍 삼키기도 하겠지. 그러면 '아, 내가 긴장돼있구나' 하는 것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정도로 하고 나머지 부분은 어떤 경우든 혀를 입천장에 말아올려 붙여버릴 것 같으면 이쪽 위에 가 많이 긴장돼버립니다.

 

우 조띠까 스님의 책을 보면 사람의 몸의 긴장도를 가지고 표현을 하니까 역삼각형으로 됩니다. 그러니까 머리 위에 하고 어깨 부분에 긴장하는 것이 훨씬 많다는 거라. 아래쪽 보다는. 그래서 일부러 내가 또 또다른 긴장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안 그래도 긴장이 많은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거는 수행을 해나가면서 중간중간에 자꾸 자기가 풀어줘야 됩니다.

 

호흡이 잘 되고 수행이 잘 되는데도 어떨 때는 빨리 다음 단계로 못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가만히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그래서 마음이 아주 편안하고 고요하고 깃털같이 가볍다 하는 상태가 되고 나서는, 그다음에 알아차려야 되는 게 몸의 상태라 몸의 긴장도를. 대부분 보면 위의 두가지 중에 하나는 뭔가가 문제가 있어가지고 그다음 단계로 못 넘어가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미리 처음부터 훈련을 그렇게 해놓는 것이 좋습니다. 됐습니까?

그럼 이건 다한 겁니다.

 

일상생활 할 때하고 집중수행할 때하고는 분명하게 구분을 해서 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오늘 내준 프린트물이 있습니다.

맨 첫 번째 보겠습니다. 되도록이면 나가는 프린트물들은 파일철에다가 넣어놔놓고 그때그때 마다 다시 또 꺼내보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알아차림 수행은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관찰하는 것입니다. 단지 알아차림 할 뿐 대상에 대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지도 않고 일어나는 그대로 평정심으로 주시하여 알아차림 해야 합니다. 인위적으로 조정하여 도망치듯이 없앨려고도 하지 말고, 붙잡아 반응하고 휘말려서 들뜨지도 말고, 그것들에 치우침 없이 그대로 놓아둔채 단지 알아차림 할 뿐입니다. 또한 나와 나의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지 않고 모든 일어난 현상을 그대로 알아차림 합니다. 몸과 마음속에서 지금 일어나고 사라지는 대상을 주시하며 계속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알아차림이 연속하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얘기해서 그냥 알아차림을 하라는 얘깁니다. 사띠하라는 겁니다.

사띠를 하는데, 사띠는 사띠의 대상에 사띠를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사띠의 대상이 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구분지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게 사띠의 대상이 안 되겠습니까?

 

··치가 일어나는 상태, 일어나는 상태 그 자체는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진행이 되는 상태에서는 사띠의 대상으로 하지 마십시요. 알아차릴 대상으로 하지 마십시요.

화가 나있는 상태다, 그럼 화가 일어날 때 '아, 화가 일어난다' 하고 알아차리면 이게 화가 사라지는데, 화가 한참 일어난 상태인데 '화가 일어남' 하고 알아차리면 그거 화를 다스리기 힘듭니다. 안 가라앉습니다. 그럴 때는 그게 알아차릴 대상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정도에는 내가 알아차릴 힘이 없다는 거라. 힘이 없는데 그걸 알아차릴거라고 '화가 일어남' '화가 일어남' '화가 일어남' 하면 화가 일어난다고 하면서, 자기가 화를 더 일으키는 형태가 돼버리는 거라.

 

예를 들어서 애들 그런 거 있잖아. 뭐 먹고 싶다 하는 거 있잖아. 그러면 '나 저거 먹고 싶다' 이럴 거 같으면 '먹고싶다' 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요놈이 더 먹고 싶어. 애들은 더더구나 통제를 못하기 때문에. 어른이라 해서 애들 마음과 틀린 게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을 개발하지 않았으면 그와 똑같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아예 먹고 싶다는 것이 있으면 '먹고 싶다' 하고 나서 먹어버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먹고 싶다'는 것이 아예 없도록 만들어버리든지, 그래야만이 이것으로 인해서 먹고싶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거라. 그럴 때는, 내가 아직 알아차리는 힘이 부족할 때는 그것을 대상으로 하지 말아라는 거라. 이미 진행된 상황에서는.

그래서 탐·진·치의 부분에서 그것이 많이 진행되었을 경우에는 그것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하지 말아라는 겁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는 뭐냐면, 과거의 일이나 미래의 일들은, 그것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하지 말아야됩니다.

옛날 일들 생각하면서 알아차림 한다? 아니면 계획 세우면서 알아차림 한다? 그걸 되도록이면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걸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해야 될 때는 짧게, 짧게 딱 떠올리고 탁 그만두어버리고, 계획 세울 때도 탁 계획 세우고 탁 그만두어버려야지 그걸 몇시간씩 끌고 있으면 참 바보 같은 짓이라. 그런다고 해서 바르게 판단하고 그런 것도 아닌데.

그거는 과거나 미래의 일들은 힘이 약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알아차리는 대상으로 하지 말아라. 되도록이면 그것들은 다들 피해버려야 할 대상들입니다.

 

수행할 때 수행자들에게 가르치는 방법에서 그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라고 하는 경우는 있고, 그것을 피하라고 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일정 부분에서 그것이 진행이 돼서 그것을 콘트롤 할 수 없는 상태일 때는 그것을 피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화가 일어나면 '화가 일어난다' 하고 알아차리는데 화가 안 가라앉고 계속 일어난다, 그럴 것 같으면 마음에서 화가 일어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행복하기를' 하면서 자애수행으로 대상을 돌려버리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화가 일어나는 거하고 자애수행하고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그러면 자애수행으로 인해서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괴로움이 없기를' 이런 식으로 계속적으로 하다 보면, 화가 일어나는 것은 이미 나하고는 관계없는 것이 돼버립니다.

그러면은 그때 다시 화가 일어난 상태들을 알아차리면 이미 사라졌든지, 안 그러면 화가 일어나더라도 내가 콘트롤 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고, 힘이 강할 때는 화가 일어난다는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합니다. 그래서 화의 속성들을 분명하게 알 때, 화가 지 혼자서 화가 일어날 거 같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어떤 경우든지 대상이 없이 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하든지, 나한테 화가 나있든지 아니면 밖에 것에 화가 나있든지, 어떤 대상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나'라고 하는 것이 화라고 하는 감정하고 결합돼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럴 것 같으면 '나'라고 하는 것들을 화가 일어난 데서 떨어뜨려주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나라고 하는 것을 떨어뜨릴 수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냥 화가 일어난다는 그 자체만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화가 일어나는 속성들을, 화도 틀림없이 동일하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하는 형태로써 일어나게 됩니다. 어떨 때는 강도가 강했다가 어떨 때는 약했다가, 그것도 강도가 강할 때도 화가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고 끊어지면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 속성들을 분명하게 알 것 같으면 크게 문제가 안 되게 됩니다. 그 화가 일어난다는 속성만 분명하게 알아도 화는 나에게 영향을 못 미치게 됩니다. 그럼 나중에는 개념만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 개념조차도 떨어뜨려버리면 화하고 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이 돼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단순히 화가 일어난다 하는 하나의 대상이라 하더라도 두 가지 방법으로 스승들은 가르치기도 됩니다.

 

여러분들 한테는 아무래도 처음 초짜인 경우들은 이 두 번째 방법은 해당사항이 없어. 그렇게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면 일단은 탐·진·치라고 하는 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대상 이것은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지 말아라. 다른 대상으로 삼아버려라. 자애수행이든 아니면 마라나눗사띠이든, 아니면 정 안되면 '어머니' 하든지 뭘 하든지 다른 대상으로 바꿔주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탐··치는 처음에는 대상으로 하지 말아라.

그다음에 과거나 미래는 대상으로 하지 말아라.

 

그럴 것 같으면 알아차릴 대상이 뭐가 남아?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데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은 되게 많습니다. 내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도 되게 많고, 밖에 일어나는 것도 되게 많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내가 보살님 보고 있다. 보살님이 보이는 것도 하나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내가 보는 것도 내가 보는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과 내 몸도 하나의 대상입니다. 어떤 걸 대상으로 할까? 요기 걸 대상으로 할까? 저기 걸 대상으로 할까? 어떠한 경우든지 밖에 거는 대상으로 하지 말아라. 보이더라도 안 보이는 것처럼.

 

그래서 수행처에 가면 눈막고 귀막고 코막고 있는 원숭이 혹시 봤어요? 밖에 걸 대상으로 하지 말아라는 겁니다. 자기 몸과 마음만이 대상인 것이지, 밖에 건 일차적으로 수행 대상이 아니라. 그러면 이게 보이든, 이게 냄새가 맡아지든, 이게 맛있는 것이 있든 뭐 어떻든 간에 이거는 내 수행대상이 아니라. 그러면 그걸 수행대상으로 하지 말아라는 거라. 괜히 그걸 대상으로 해가지고 탐심이나 진심 같은 거 일으킬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걸 안 일으킬 상태가 될 거 같으면 그걸 대상으로 해도 되는데, 지금은 그걸 일으킬테니까 밖에 걸 대상으로 하지 말아라.

 

그러면 내 몸과 마음이 수행대상인데, 몸과 마음의 대상은 뭐 안 많을 거 같애요?

내 몸에서도 느낌 하나만 보더라도 입술에서 달짝거리면서 하는 느낌도 있고, 엉덩이가 닿아있는 느낌도 있고, 발바닥의 느낌도 있고, 각각의 느낌들도 많습니다. 그럼 어떤 걸 대상으로 해야 돼? 그것도 찰나 간에 일어나는 느낌들도 많은데 어떤 걸 대상으로 해야 돼? 가장 강한 대상.

그게 대상입니다. 나머지는 그게 일어나든 말든 냅둬버리라는 거라. 냅둬버리면 저절로 사라지고 나하고 영향받을 일이 전혀 없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강한 대상만 수행 대상으로 하라.

 

쉽게 말하면 호흡을 '일어남' '사라짐'이라고 하는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을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소리가 탁 들렸다, 그러면 지금 현재 호흡도 있고, 소리도 있었단 말이라. 그럼 어떤 걸 대상으로 해야 돼? (수행자 : 호흡을) 이게 강했으면 소리가 안 들렸을 거라. 그런데 이게 안 강하니까 소리가 들린 거라. 그러면 이걸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소리를 대상으로 해야 돼.

그럼 '소리들림'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나서,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든지 해야 돼. 강한 것을 대상으로 해야 돼.

 

호흡 한다 해가지고 이것만 한 시간 동안 내내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경행한다고 해가지고 발바닥에 있는 느낌만 내내 한시간 동안 하라는 게 아니라. 강한 대상이 있으면 '강한 대상이 일차적인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 일차적인 강한 대상도 대상의 가짓수를 부처님은 딱 정해놨습니다.

몇 가지로 정해놨어요? (수행자 : 4가지) 4가지? 맞습니까? (수행자 : 신수심법)

··· 경전은 봐서 다들 알고 있네. 맞습니다. 4가지로 딱 정해놨습니다.

처음 하는 사람은 그거 외에는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알아차릴 대상이 뭔지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면 알아차림의 방법에 대한 것들을 얘기하겠습니다.

수행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습니다. 어떤 수행을 하든지 이 원칙을 벗어나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원칙> 첫 번째, 천천히, 천천히 하라.

 

경전에 보면 그런 게 있습니다. 어느 스님이 귀가 가려워서 길을 걸어가면서 손을 이렇게 올렸어요. 그런데 이렇게 올리고 나서 다시 손을 내리는 거라. 그러면서 다시 천천히 올리는 거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저 스님이 왜 저러지? 왜 아까 처음에 올렸을 때 그냥 긁어버리지 왜 다시 또 내려갖고 다시 또 천천히 하느냐는 거라.

그 스님은 손을 빨리 움직여서, 빨리 움직이는 것을 그대로 알아차리면서 따라가지 못한 거라. 그러니까 손을 위로 올렸는데 올리는 전 과정들을 내가 알지 못하고 올리게 된 거라. 그때사 앗차! 한 거라.

 

알아차림은 한번 알아차린다 해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알아차림은 연속돼야만이 그게 알아차림의 힘이 생기는 것이지 연속되지 않는 알아차림은 의미가 없어지는 거라. 한번 퍼뜩 알았다? 그거 어따 쓸 거라? 그거는 의미가 없는 거라.

그러니까 손이 이렇게 올라올 거 같으면 올라오는 처음부터 해서 올라오는 끝까지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데, 그걸 못했으니까 다시 또 한번 더 천천히 하는 거라. 내 수준에서는 이렇게 천천히 해야만이 마음이 요걸 따라갈 수 있다 할 것 같으면 천천히, 그게 여러분들에게 맞는 속도입니다.

 

걸어갈 때 걸어가는 전과정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그러면은 그 속도로 하면 되는 거라. 빠르게 이쪽에서 저쪽까지 씩 왔다갔다 한번 해보면 이걸 분명하게 알고, 알고있는 동안 안 아는 것은 뭐냐면, 이것을 알고 있을 동안에 다른 것들 어떤 것들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거라. 그렇게 왔다갔다 했으면 아, 이게 내한테 맞는 경행속도라. 그렇게 걸어도 돼.

그렇지 못하고 여기서 저까지 걸어가는데 보이는건 오만 거 다 보이고 들리는 건 오만거 다 들리고 발을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할 때 망상은 망상대로 다 생기고 할 거 같으면 이것은 내 경행속도가 아니라.

그러면 뭐 어떻게 해야 돼요? 천천히 해야 돼! 어차피 이 과정 전체를 다 모를 바에야, 더 천천히 해야만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알게 되는 거라.

 

발을 '들어올림' '내려놓음' 할 때보다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할 동안에는 적어도 세 번은 알 거 아니라.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두 번 하는 것보다는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면 세 번은 알잖아.

그러면 더 나아가지고 '뒷발들고,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나아가고, 내리고, 닿고, 디디고' 할 거 같으면 여섯 번 일곱 번을 알게 되는 거라.

그럼 천천히 하면 할수록 내가 알아차리는 것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을 시작할 때는 천천히 천천히 해야 돼. 빠르게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경행을 하든 좌선을 하든 아니면 일상생활을 하든 모든 것들은 천천히 하십시요.

 

그대신에 천천히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뭐를 천천히 할 수 없을까?

말하는 것도 내가 천천히 하면 되고, 행동하는 것도 천천히 하고, 밥 먹는 것도 천천히 하면 되는데, 숨 쉬는 것은 내가 내맘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

그럼 숨 하나만은 자연스럽게 쉬도록 하면 돼.

그러면은 내가 알아차림을 못 따라가잖아. 그런데 문제가 좋은 게 뭐냐면 다른 것들은 내가 따라가면서 많이 따라가지게 되는데, 호흡은 내가 따라갈 필요없이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거라.

 

코끝이면 코끝, 배면 배, 하나를 지키고 있는 건데 그거 지키는 것도 못해? 되게 수월한 거잖아. 가만히 지켜보고 있기만 하면 되는 건데. 그럼 지켜보고 있으면 지가 거기를 설치면서 왔다갔다 하고 있는데, 그게 호흡이 빠르면 빠르다고 알게 되는 거고, 길면 길다고 알게 되는 거고, 짧으면 짧다고 알게 되는 거고, 그거 지켜만 보고 있으면 그걸 알게 되는 거라.

이해하겠어요? 그렇게 하면 됩니다.

 

<원칙> 두 번째, 실황중계.

 

그다음에 두번째는 지금 하고 있는 것,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뜻입니다.

경전에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대상이 생긴 순간 생긴 채로 반드시 안다.

동작, 장소, 위의, 시간을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린다.

 

대상이 생긴 순간에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러면 걷는 걸 한번 봅시다. 걷는 걸 처음에 '오른발' 이라고 칩시다.

오른발을 걸을려고 한다, 그럼 '오른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지금 생긴 순간 알아차려라. 맨 먼저 뭐부터 알아차려야 되겠어요?

신·수·심·법 4개 중에서 뭐 먼저 알아차리는 거라? 지금 현재 일어난 게 뭐라? (수행자 : 마음) 마음이잖아. 그럼 '마음'을 먼저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그럼 지금 현재 일어난 것은 마음이라는 거라.

 

그런데 지금 그걸 알 방법이 없죠? 사실은 의도가 먼저 일어나는 걸 알아야 만이 이 심념처를 할 수 있는데 그걸 못해. 그럼 일단 있다고 치자. 그럼 지금 현재 일어난 것은 마음이라. '아, 내가 걷고자 하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그게 지금 현재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는 거라.

그런데 그걸 못했다, 그러면 일단 그거는 못한거는 넘어간다 치자.

 

그러고 나면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그럼 들어올리면 들어올린다고 알고, 나아가면 나아간다고 알고, 내려놓으면 내려놓는다고 알고, ''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럼 지금 몸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을 하고 있는 거라. 지금 현재 하고 있는 거는.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움직이면 그걸 멍청하게 움직이면서 심념처 한다는 사람들은 미친 놈들이고, 움직이고 있으면서 무슨 법념처 한다고 하는 그것도 미친 놈들인 거라. 움직이면서는 어떤 경우든지 ''에 대해서, '몸의 동작'에 대해서, '움직임'에 대해서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그게 지금 현재 방금 일어난 것들을 아는 것들이라.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발을 들어올릴 때 '들어올린다'고 아는 사람들이 있고, 발을 들어올리면서 '가볍다'고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죠? 그럼 어떤 게 맞는 거라? 어떤 걸 해야 돼?

들어올린다고 분명하게 아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들어올릴 때 일어나는 느낌들을 압니다. 느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발이 가벼워지는 것을 압니다. 이게 바른 순서입니다.

그러면 그게 훈련이 잘 된 사람은 발을 들어올릴 때 '들어올린다'고 아는 것이 아니고, '가볍다'고 안다는 거라. 느낌에 대해서 알아차릴 때는. 그래서 느낌에 대해서 관찰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들어올릴 때 가볍다고 알아차리는 거라.

 

그런데 발을 들어올릴 때 가볍다고 알아차리고 있는 중간에 뭔가 생각이 탁 떠올랐으면 발을 들어올리다가 탁 멈춥니다. '생각' 하면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알아차리고 나서 발을 그대로 올립니다. 법념처를 하고 있는 겁니다.

 

조금 전에 대상이 생긴 순간에 알아차리라는 것은 그와 같이 해야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발을 하나 들어올린다고 해가지고 무조건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이것만, 그러니까 몸에 대한 알아차림 이것만 계속 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마다 대상은 분명히 다르다는 거라. 그 다른 것을 알고 그것을 알아차리라는 거라. 대상이 생긴 순간에 바로 알아차리라는 거라.

 

이해하겠습니까? 쉬운 건 아니죠? 수행이.

그런데 쉬운거 아닌거 같애도 사실은 쉽습니다.

이게 일정한 수준에서 딱 따라가는 힘만 생겨버리면 자동적으로 내가 일부러 다가가서 그걸 알려고 안 해도 자동적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수행이 아주 쉬워져버립니다.

그래서 생겨난 순간에 알아차리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라는 거라.

그래서 대상이 생긴 순간 생긴대로 반드시 알아차려라.

 

그런데 뭘 가리지 말아라고 그랬어요? 동작, 장소, 위의, 시간! 그걸 선택하지 말아라고 했습니다.

(수행자 : 동작은 뭔데요?)

···. 동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그걸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요리하고 있으면 요리하고 있는 대로, 밥을 먹고 있으면 밥을 먹고 있는 대로, 걷고 있으면 걷고 있는 대로, 앉아서 좌선하고 있으면 좌선하고 있는 대로, 그 어떤 동작이든 항상 알아차릴 대상은 일어나는 대로 즉시 알아차리도록 하라. 그래서 그 동작을 가리지 말아라는 겁니다.

 

그다음에 장소, 아까도 얘기했지만 여기든, 집이든, 기찻간 안이든, 어디든지, 장소는 수행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거라. 그것은 선택할 부분이 아니고, 내가 있는 곳이 수행처로 하라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그 장소도 마찬가지로 선택하지 않는다. 심지어 경전에서는 똥눌 때 똥싸는 것까지 알아차리라고 경전에는 기록을 해놔놨습니다.

 

그다음에 위의, 위의라고 하는 것은 좌선 수행, 경행 수행, 그다음에 입선 수행, 와선 수행 이거 가리지 말아라는 거라.

기본적인 포맷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와선수행을 한다, 와선 수행을 자칫 잘못 이해하면 잠자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건 전혀 아니죠!

와선 수행하는 걸 어떻게 합니까? 누워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일어남' '사라짐' 하고 '일어남' '사라짐' 한번 하고 나서 머리부터 닿아있는 것들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일어남' '사라짐' 하고 나서 '누워있음' 하면서 누워있는 전체적인 모습을 알아차리고,

그다음에는 닿아있는 곳이 머리가 닿아있으면 '머리가 닿아있음'

그래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불러옴' '꺼짐' '누워있음' '닿음'

그러니까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 두 타임을 '누워있고', '닿아있고' 해야 돼.

 

그렇게 닿아있는 곳들은 한군데가 아니죠? 그러면 처음에 '머리'가 닿아있으면 그다음에는 '등'이 닿아있고, '엉덩이'가 닿아있고, 그다음에 발이 '오른쪽 뒤꿈치' '왼쪽 뒷꿈치'가 닿아있습니다. 만약에 자기가 닿아있는 곳을 다섯 군데로 나눴다 그러면 다섯 군대로 해서 수행해야 됩니다.

그래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고 알아차리고, 그다음에 누워있다고 알아차리고 닿아있는 1번 알아차리고, 그다음에 불러오고 꺼지고 하고 알아차리고, 누워있다고 알아차리고 닿아있는 2번째를 알아차리고, 이런 식으로 진행을 해나가면 됩니다.

 

그러니까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2개를 알아차리는 것 보다도 훨씬 내가 알아차리는 힘을 바짝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대상이 더 많은데 지가 더 바삐 움직이고 해야 알아차릴 거 아니라? 그런데 언제 잠잘 시간 있어? 잠잘 때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저번 시간에 다 적어놓았죠? 잠잘 때는 다른 방법으로 해야 됩니다.

일반적으로 와선 수행할 때는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게 하라 그러니까 이렇게 하다 보니까, 어떤 사람은 되게 마음이 산만합니다. 이걸 못 따라가는 거라. 어떤 사람은 잘 따라가는 사람도 있고. 잘 따라가는 사람은 그냥 그대로 하면 돼. 그런데 못 따라가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돼?

와선 수행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냥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그거 두 개만 해야 되는 거라.

 

앉아서 배를 관찰하는 거하고 누워서 배를 관찰하는 것은 다릅니다. 누워서 관찰할 때가 훨씬 관찰하기가 수월합니다. 자기가 배에다 손을 올려놔 봐봐. 앉아서 배를 관찰했을 때 배를 알아차리는 것이 쉬워? 누웠을 때가 알아차리는 것이 쉬워? 누워서 했을 때가 훨씬 알아차리기가 쉬워요.

그럼 얼마 안 해도 알아차리는 것은 금방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그걸 알아차렸을 경우에는.

문제가 뭐냐면 힘을 들이지 않아도 알아차리기가 수월하다 보니까 알아차리는 힘은 강하게 생기지 않는 거라. 그러니까 잠잘 때 그러다가 잠에 폭 떨어져버리는 거라.

 

위의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워서 와선수행을 할 때도 와선수행의 형태대로 그대로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기본 포맷이지만 나는 이 방법이 안 맞다 할 것 같으면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있고, 또 다른 상태에서 내가 잠을 자기 위해서는 또 다른 형태로도 할 수 있고.

좌선 수행을 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 아니면 코끝에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 이것만 관찰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걸 하다가 내가 알아차리는 힘이 떨어진다 할 것 같으면 '앉고' '닿고' 하는 것들을 계속 첨가해가지고 수행을 하는 거라.

 

그리해도 안 될 거 같으면 나중에 정 안되면 앉아서 수행하면서 눈 떠가지고 이대상 알아차리고 저대상 알아차리고 하면서 대상을 자꾸 바꿔주는 수행들을 하는 거라. 앉아서 수행하는데도 그렇게 하는 거라.

위의는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놓은 것뿐인 것이지, 그방법으로 그대로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상태에 맞게끔 그것을 선택해서 하면 됩니다.

 

단, 어떠한 경우든지 알아차림을 연속할 수 있는 상태를 찾아서 그것을 해야 되지, 자기가 게으름 부리기 위해서라든지 망상부리기 위해서 그 형태들을 찾으면 안 된다는 거라. 아까도 얘기했죠? 알아차림은 한번 알아차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알아차림이 연속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연속하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알아차리는 힘은 생겨나지 않고 집중하는 힘들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시간을 선택하지 않고, 하는 것은 마찬가집니다. 시간은 선택해서 하는 것이 아니죠? 눈 떠서 잘 때까지 잠자리에 들 때까지 어떠한 경우든지 모든 시간이 알아차려야 되는 시간입니다.

단, 수행의 시간이 아닐 때는 잠잘 때. 몽중일여는 없습니다.

 

그게 실황생중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대상이 생긴 순간에 생긴 그대로 반드시 알아차려라. 생긴 그대로 안다는 것은 뭐라? 왜곡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왜곡하니까 문제입니다.

 

왜곡 안 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우리가 대상에 대해서 마음을 붙이기 위해서 명칭을 붙이죠? 안 그러면 대상에 마음이 다가가야 붙어있질 않으니까. 그래서 명칭붙이는 겁니다. 명칭은 실제로는 위빳사나 수행하고는 관계 없는 겁니다이. 어쩔 수 없이 안 붙어있으니까, 붙여놓기 위해서 명칭을 붙여주는 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대상을 왜곡하지 않으려면 명칭을 붙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보지말고 '보임' 하면서 명칭을 붙이면서 봐버리는 거라. 그러면은 1차적으로 왜곡이 됐다고 하더라도 2차적으로 왜곡되지는 않는 거라. 그냥 그다음에 1차적인 것에서 다시 원래 보이는 것만 보인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거라. 훈련이 된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보면 보이는 게 아니고 보여져버립니다. 들리는 게 아니고 들려져 버리게 됩니다.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될 때는 훈련이 안 되어 있을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명칭을 붙여서 할려고 자꾸 해보십시요. 그러면은 왜곡을 안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어난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원칙> 세 번째, 감각의 변화를 알아차려라. 느낌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해봅시다. 발이 변화됩니까? 들어올려지지만은 않죠? 들어올려 졌으면 반드시 내려놓게 돼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되죠? 숨도 들이쉬었으면 내쉬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거는 항상하는게 아니고 변화되고 있는 겁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어떠한 경우든지 그렇게 모든 것들은 변화되게 돼있습니다.

그럼 변화된 걸 여러분들은 알아야 될 거 아니라.

그래서 발을 들어올릴 때는 들어올린다고 분명하게 알고, 내려놓을 때는 내려놓는다고 분명하게 알아야됩니다. 숨을 들이쉬었으면 들이쉬었다고 분명하게 알고, 내쉬었으면 내쉬었다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들이쉬고 있으면서 '내쉼' 하고 알아차리면 발란스가 안 맞아지겠죠? 안 그러면 자기가 인위적으로 조절을 해버립니다. 그러면 거기서 딱 멈춰져버리고 수행은 안 넘어가버리게 됩니다.

발을 들어올릴 때는 들어올린다고 분명하게 알고, 내릴 때는 내려놓는다고 분명하게 알고, 그래서 들어올리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유지해서 딱 알면 됩니다.

 

만약에 알았다고 치자. 어떤 현상을 알게 될까? 내려놓기 전에.

뭘 알게 되겠어요? 멈춘다는 걸 알게 됩니다. 멈춘다는 걸.

숨을 들이쉬고 하면 만약에 들이쉬는 처음부터 해서 들이쉬는 마지막 까지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이어나갔다, 그러면 내쉬기 전에 뭘 알까? 멈춘다는 걸 알아.

수행 해보십시요. 멈춘다는 걸 압니다.

멈춘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거기서 알아차리려고 해도 알아차릴 게 없어. 그냥 멈춰있는 것뿐이라. 그렇게 압니다. 비어있다고 분명하게 압니다. 아, 알아차리는 대상이 사라졌다는 걸 압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또 내쉬고, 발도 내려놓고 이렇게 합니다.

 

그 상태를 아는 상태까지 여러분들은 뭘 해야 된다?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명칭붙여서 알아차려야 됩니다! 들어올리면 들어올린다고 알아차리고, 내려놓으면 내려놓는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알고 내쉬면 내쉰다고 알고,

 

그렇게 하다가 멈추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뭘 해야 된다? 감각, 느낌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전에는 발을 들어올리면 발을 들어올리는 전과정을 알았다는 것뿐이지, 발을 들어올릴 때 들어올리면서 '멈추고' 들어올리면서 '멈추고' 들어올리면서 '멈추고' 하는 것들을 전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짧은 순간 숨을 들이쉴 때도 이 짧은 순간에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의 반복이라는 걸 전혀 몰랐습니다.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느낌으로 밖에 모릅니다.

느낌으로 알아야만이 이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발을 들어올릴 때든 호흡 배가 불러올 때든 그걸 느낌으로 알아차려야 만이 그것들이 연속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의 연속이다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야만이 ', 이게 무상이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무상의 성품은 그렇게 알아지는 거라.

경전에 그런 비유들 많이 있죠? 저기 지푸라기 꼬아놓은 것을 저 멀리 갖다 놓았는데. 저멀리에서 보니까 한 줄 줄 같이 보이는 거라. 가까이 와서 보니까 이게 지푸라기가 아니고 이렇게 꼬아놓으니까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거라. 더 가까이 와서 보니까 지푸라기 마지막 까지 다 보이는 거라. 저 밖에서 봤을 때는 그냥 한 줄 줄이라는 거라.

 

발을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할 때는 그냥 한줄 줄밖에 안 보였어. 좀 더 가까이 와보니꺼 이게 한줄 줄이 아니고 뭔가 꿈틀대는 것처럼 변화하는 것들이 보이는 거라. 가까이 와보니까 진짜 그것은 변화하는 것이 한묶음 꼬여지고 꼬여지고 꼬여지고 하는 것이 연속이었다는 거라. 그러면 내가 알아차리는 것은 하나의 꼬이는 것이 보일 때 요거 하나에 꼬여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고, 그다음 그게 사라지고 나면 다시 꼬여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고, 어떤 것이 내 진짜 마음이고 어떤 것이 머물러 있는 것이라? 머물러 있으면 그다음 꼬여지는 것은 모르는데.

 

그래서 느낌으로 알아야만이 그 무상한 성품을 분명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무상의 성품을 볼 수 있어야만이 집착하고 번뇌가 일어나는 것들을 막을 수가 있는 거라.

그래서 수행의 원칙은 딱 이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순서대로 쭉 해나가지 않으면 무상·고·무아를 알 방법이 없습니다.

문제는 뭐냐면 항상 그랬으면 좋은데, 이 꼬여진 게 보였다가도 어떨 때는 안 보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그럼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해야 되는 거라.

마음이 항상 예리하게 깨어있으면 좋은데 수행하다 보면 항상 예리하게 깨어있지 못합니다. 어떨 때는 아주 예리한데, 어떨 때는 아주 둔하기도 합니다.

그럼 둔할 때는 다시 또 둔한 상태를 깨우기 위해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 돼.

이걸 끊임없이 수행시간에는 반복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가끔씩 발을 들어올릴 때 '들어올림' 하고 알아차리지 말고, 들어올리면서 들어올린다는 데에는 마음이 10% 정도 밖에 안 가고, 나머지 90%는 발을 들어올릴 때의 느낌들을 볼려고 한번 해보십시요.

또는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배가 불러오면 '일어남' 하고 알아차리는데 '일어남' 하고 명칭붙여서 알아차리는 데는 10% 밖에 마음을 두지 않고, 나머지 90%는 배가 불러올 때 일어나는 느낌들을, 뭔가 퉁퉁 치는 느낌인지, 어디서 뽈록 나오는 느낌인지, 무슨 느낌인지 그 느낌들이 이쪽에서도 나오고 저쪽에서도 나오고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그 느낌들을 볼려고 해보라는 거라. 꺼질 때도 마찬가지고, 발을 내려놓을 때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하다가 집중이 지금 잘 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아예 명칭붙이지 않고 발을 들어올릴 때 그 느낌만 계속적으로 알려고 해보십시요.

또 어떨 때는 또 집중이 잘 될 때는 느낌을 아예 무시하고 발을 들어올릴 때 들어올린다고만 분명하게 하나만 알도록 해보라는 거라.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 아니면 코끝에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 그것만, 지금은 느낌은 아예 알려고 하지 말고, 그것만 알려고 해보라는 거라.

이런 식으로 자꾸 변화를 줘보라는 거라. 그러다보면 집중력은 반드시 커집니다.

 

집중하는 힘은 그 대상을 분명하게 전체를 따라갔을 때 생기고,

또 집중하는 힘은 하나의 대상만 보여질 때 생겨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의 방법을 씁니다.

 

사마타의 방법으로 할 것 같으면 하나의 대상만 따라해야 됩니다. 그러면 집중력은 생겨납니다. 그래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느낌이고 뭐고 아무것도 필요없습니다. 그냥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내쉬면 내쉰다고 이것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런데 따라가면서 할 것 같으면 숨을 들이쉴 때 들이쉬는 느낌 전체를 다 알려고 하고, 내쉴 때는 내쉴 때의 느낌 전체를 다 알려고 하고, 이러면서 계속적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 변화되는 것을 알면서 집중하는 힘들도 커지게 됩니다.

 

사띠가 집중력을 키워주고, 집중력이 사띠의 힘을 키워줍니다. 이거는 보완적인 관계입니다. 서로 보완적인 관계이지 이걸 하나로 떼어놓고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해하겠죠?

수행의 세 가지 원칙 부분을 오늘은 했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