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구·울주선원 수행법문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의 차이점 (20150206.대구)

담마마-마까 2019. 12. 24. 11:20

https://youtu.be/RWlh1NHDvAE

*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의 차이점 (20150206.대구)

 

교재를 보면 쭉 계속 사마타 수행만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사마타 수행 한번 하고 나면 그다음에 이게 7번에 해당이 되는 거죠. 8번째에 이르면 위빳사나 수행을 항상 하고 이런 식으로 번갈아 가면서 수행을 하라 합니다. 어떨 때는 그리 하다 보면 좀 헷갈릴 수도 있는데, 또는 스님이 사마타를 해도 사마타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사마타 수행방법이라도 위빳사로 전환하는 것들도 얘기를 할 것이고, 또 위빳사나 수행법이라고 하더라도 사마타 수행하는 법에 대한 것들을 할 테니까 많이 헷갈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같이 병행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교재 첫 시간입니다.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차이점」

뭔 차이가 날까? 읽어봤죠?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수행에서 수행대상이 다릅니까?

예를 들어봅시다. 아나빠나 사띠, 호흡,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을 가지고 사마타 수행도 할 수 있고 위빳사나 수행도 할 수 있죠? 그건 알죠? (네)

 

그런데 사마타 수행을 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수행자 : 집중합니다.)

당연히 집중하죠. 집중하는 것은 위빳사나도 집중해야 됩니다. 집중 없이 될 수는 없는 거고, 어떻게 해요?.

코로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거만 알죠? 들이쉴 땐 들이쉰다고 알고, 내쉴 때는 내쉰다고 알고. 실제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과 동일하게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하는 개념을 주고, 내쉬면 내쉰다고 하는 개념을 주고, 그리고 명칭이라고 하는 개념, 명칭이라는 개념을 써서 수행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수행대상은 뭡니까?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붙이는 '명칭', 명칭이 수행대상입니다. 맞습니까? 맞다고 치죠?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은 어떻게 해요?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그 명칭이 대상이 아니고, 물론 집중이 안 될 때는 명칭을 쓰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사마타 수행법에 가까운 것이지 위빳사나 수행법은 아니죠!

실제로 위빳사나 수행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 명칭이 아니고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의 '움직임'이라든지 아니면 그때 일어나는 '느낌'들을 보는 겁니다.

움직임이나 느낌은 실재하는 겁니다.

 

똑같은 호흡을 관찰하는데도 어떤 경우에는 사마타 수행방법으로 개념을 가지고 수행대상이 되는 거고, 어떤 경우에는 실재하는 것을 가지고 수행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은 수행대상이 다르죠? 그걸 구분하라는 거라 그걸 구분 못하면 짬뽕 돼버립니다.

 

그런데 사마타 수행은 왜 개념을 가지고 해야 될까?

실제 나오는 것을 가지고 하면 되지. 수행은 실재를 가지고 해야 되지 개념을 가지고 하면 어쩌노? 왜 개념이 되어야 되는 거라? 아는 사람? 없어요?

아나빠나 해봤죠? 위빳사나 방법으로 호흡 알아차리기가 수월해요? 사마타 방법으로 관찰하기가 수월해요? (수행자 : 사마타) 사마타가 수월해요? 거짓말하는 겁니다. 위빳사나가 수월합니다. 사마타 방법으로 호흡을 관찰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

 

처음에 수행을 할 때 마음은 찰나 간에 굉장히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럼 그렇게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이 마음을 요 하나! 하나에 탁 몰아가지고 넣어야 되는데 이게 쉬운 거라? 굉장히 어려운 거라.

그런데 이게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이라 하더라도 이걸 여기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로 분산을 이렇게 시켜놔 놓으면 오히려 수월하거든. 처음에 접근할 때는 사마타 수행법으로 호흡을 관찰하는 게 훨씬 어렵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한 곳에 가만히 집중해있지 못하고 개념이라고 하는 데에 집중해있지 못하고, 이런 호흡을 따라가버린다든지 아니면 개념이 아니고 움직임을 본다든지, 아니면 느낌을 본다든지, 마음이 가만히 있지 못하니까, 집중해가지고 그걸 딱 붙잡아있지를 못하니까 그렇게 바뀌거든.

그런데도 지는 그걸 사마타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하고 있는 거라. 실제로는 엉뚱한 거를 하고 있으면서. 그걸 여러분들이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수행대상은 사마타수행 대상과 위빳사나 수행대상은 반드시 다르다!

 

그러면 집중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개를 집중하는 게 수월해요? 이 하나를 집중하는 게 수월해요? 하나의 대상!

그래서 사마타 수행을 할 때 되도록이면 하나의 대상 아니면 간단한 대상!

두 개의 대상 들이쉬고 내쉬고! 안 그러면 아예 하나의 대상에 '붓도'이면 '붓도' 하나의 대상! 이런 식으로 대상을 단순화시켜버립니다.

 

그리하더라도 그 대상은 실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개념입니다. 명칭! '붓도'를 내가 아무리 한다고 해도 부처님이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죠? '사과' 한다고 해서 '사과'가 실제 있는 것이 아니죠? 개념입니다. 명칭입니다.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갖다가 '일어남' '사라짐' 명칭 붙인다고 해가지고 실제 호흡하고는 관계가 없는 겁니다. 명칭입니다. 명칭을 반드시 써야 됩니다. 사마타 수행에서는.

 

그런데 그리할 거 같으면 집중하는데 처음에 집중하는 게 힘들다고 하더라도 집중이 되고 나면 어떻게 돼요? 마음이 거기에 딱 붙어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게 하나의 대상에만 마음이 딱 붙어있으니까 갖가지 신기한 조화들이 보입니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니밋따라든지 아니면 깔라빠를 본다든지, 갖가지 현상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현상에다가 마음이 탁 가버리면 어떻게 돼요? 그 순간 탁 깨어져버리죠. 왜? 변하는 것을 대상으로 사마타 수행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든지 하나에 붙잡혀있어야 되는데, 마음이 변하는 거라든지 움직이는 것으로 봐버리면 깨어져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아무리 조화를 부린다고 하더라도 내비둬버려야 돼. 내비둬버리고 나는 그냥 요기 개념에만 딱 마음을 붙이고 있어야 됩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요놈 변하는 것들이 서서히 바뀌어가지고 요 개념하고 딱 동일시 돼버립니다.

그럴 것 같으면 인제는 명칭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에 딱 고정돼있는 그것 하나만 관찰을 해버리면 됩니다.

사마타 수행은 그런 식으로 쭉 진행이 돼나갑니다.

 

그러니까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이익들은 뭐냐 하면, 마음이 일단은 하나에 딱 집중돼버립니다. 집중이 돼버리니까 마음이 산란하고 하는 것들, 들뜨고 하는 그런 것들이 없어져버립니다. 쉽게 말하면 수행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장애들 들뜸이라든지 후회한다든지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난다든지 이런 것들을 싹 옆으로 치워버리고, 그거하고는 관계없이 거기 대상에 머무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마타 수행을 하면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한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마타 수행을 잘하면 얻어지는 게 뭐가 있습니까? 어떤 이익이 있기 때문에, 뭘 바라보고 하는 거라? 선정(禪定)이죠! 참선(參禪)할 때 선(禪)자, 안 그러면 자-나(jhāna) 빨리어 용어로. 선(禪)에 들어가는 것, 1선정, 2선정 이런 식으로 쭉 진행이 돼나갑니다.

 

그럼 선정에 그렇게 든다고 칩시다. 선정에 들었을 때는 그러면 대상은 뭐로 해요? 뭐로 해야 돼요?

1선정에 들었을 때의 대상은 뭐고, 2선정에 들었을 때의 대상은 뭐라? 똑같이 이 개념을 가지고 선정수행을 합니까? 그건 아니죠. 그건 틀리죠! 1선정에서는 그것이 아니고 기쁨이 일어나면 기쁨이 대상이 됩니다. 기쁨이라고 하더라도 기쁨은 개념으로써, 하나의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개념으로써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집중하고 있을 거 같으면 그 선정에 계속 들어있게 됩니다.

 

그래서 쭉 계속 들어있기도 하고 어떨 때는 그 선정에서 깨어나기도 해야 됩니다. 또 아니면 내가 원하는 시간만큼 선정에 들어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어떤 조건에 따라서 내가 깨어난다라고 마음을 먹으면 그 조건일 거 같으면 깨어나고, 다른 조건에서는 깨어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선정에 아주 자유롭게 돼야 됩니다. 내가 원할 때 하고 안 하고 하는 것들이,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것들이 자유롭게 돼야 됩니다.

 

이게 자유롭게 돼야만이 그다음 선정으로 넘어가집니다. 2선정으로. 여러분들이 생각하듯이 1선정으로 올라갔으니까 또 한번 호흡 더 알아차리면 2선정으로 탁 올라가고, 3선정으로 탁 올라가고,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선정이 자유롭게 됐을 때 그다음 선정으로 올라가집니다. 그다음 단계로 올라갔다가도 그게 안 되면 다시 1선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을 조금 더 익혀야 또 그다음 단계로 올라가집니다.

이런 식으로 그렇게 해가지고 쭉 했다고 칩시다.

 

그럼 언제 위빳사나를 할까? 선정수행을. 사마타를 해서 사마디라고 하는 삼매의 상태에 쭉 들어있다, 1선정 삼매상태, 2선정 삼매상태, 3선정 삼매상태에 들어있다, 삼매에 들어있을 때에는 대상이 변하지 않으니까 위빳사나 수행하는 건 아니죠? 그럼 그 속에서는 고요하게 마음은 머물고 있기는 한데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아니라. 실재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게 아니라. 실재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러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이를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그 선정에서 깨어나고 나서 위빳사나로 전환해가지고 통찰을 통해서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분명하게 자기가 아는 것! 그렇게 해가지고 위빳사나 수행과 사마타 수행을 적절하게 조화롭게 같이 하면서 수행을 익혀와가지고 내가 수행의 단계가 불환과 이상에 탁 이르는 상태에서는 선정삼매에 들면은 멸진정에 들 수가 있습니다.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 겁니다.

멸진정에 탁 들고나면은 그다음부터는 일반적으로 위빳사나로 전환을 안 해도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불환과 이상에 들었을 때 가능한 겁니다.

 

그렇지 않고 불환과에 이르지 않았을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사마타 수행을 하다가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해야만이 가능한 겁니다. 전환을 해야만이 무상··무아의 성품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사마타 수행으로서는 한계를 지닌다는 겁니다.

성인의 단계로 나아가는 데는 사마타 수행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럼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삼매를 체험했다든지, 아니면 어떤 선정에 들었다든지, 아니면 선정으로 인해서 개발되는 신통력이 있다든지, 이것은 깨달음의 단계하고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삼매에 들어가지고 무슨 뭐 뭘 봤다든지, 아니면 무슨 신통력이 열렸다든지, 깨달음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이걸 착각을 해버립니다.

그것은 깨달음하고 관계가 없지만 선정수행을 닦는데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 중에 하나라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삼매를 개발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삼매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거라. 수행에서는!

삼매가 목적이 되다 보면 자꾸 마음은 그 대상에만 머무를려고 합니다. 실제로 수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아니면 호흡이 코끝에서 들이쉼 내쉼 하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계속 여기 머무려고만 하는 거라, 머물려고만 하다 보니까 여기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지를 못해.

빨리 머무르는 데서 빠져나와가지고 이 현상들을 알아차려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 거라. 편안하고 고요하기는 한데. 그래서 피로가 확 가셔지고 하는데 그것뿐이야. 그것뿐이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내가 무슨 경계를 만나면 그 경계들 하고는 관계없이 마음은 고요한 상태가 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를 뭐라 하면 나도 그냥 금방 반응 팩 해! 오히려 더.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걸 분명하게 기억을 해야 됩니다.

 

사마타 수행만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지만, 사마타 없이 위빳사나 수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물론 이의를 다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위빳사나 수행만으로도 가능하다. 경전에도 그렇게 쓰여져 있고. 그런데 실제로 수행하는 스님들 같은 경우에는 그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거의.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반드시 병행하도록 그렇게 얘기합니다. 안 그러면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수행대상이 다르다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사마타 수행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태들, 삼매라든지 아니면 선정이라든지 아니면 신통력이라든지 이런 것은 깨달음하고는 관계가 없다!

 

그다음에 또 하나는 차제적으로 이것이 완성돼야만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다!

1선정이 완전하게 자유롭게 돼야만이 2선정으로 넘어가지고, 그다음 선정으로 넘어갈 수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1선정이 없이 3선정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1선정에서 한번에 쭉 4선정까지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정이 다섯 가지 자재로 자재롭게 할 수 있는 상태가 됐을 때,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걸 분명하게 알고, 수행들을 하고 하시기 바랍니다.

 

교재를 보겠습니다.

처음에 「수행은 사마타와 위빳사나 두 개로 나눈다. 불교의 수행 사마타, 불교의 수행 위빳사나」 그렇게 얘기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것이 위빳사나는 불교만의 고유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다들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사마타 수행은 불교만의 수행이 아니고 다른 데서도 하는 수행이다." 이러는 거라. 맞습니까? (수행자 : 네) 틀렸습니다!

사마타라고 하는 용어는 같습니다. 그런데 사마타의 대상이 불교의 사마타 대상과 다른 수행(전통)의 사마타의 대상은 다릅니다. 불교에서의 사마타의 대상은 40가지뿐입니다.

이거 외에는 대상이 되지를 않습니다. 분명한 겁니다. 그런데 다른 데서는 아무거나 대상이 됩니다. 하나에 집중하는 것은. 춤을 추면서 춤에 집중하든지 무얼 하든지 다 대상입니다. 그런데 왜 똑같다고 그래요? 다릅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느냐면, 사마타의 대상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뭐냐 하면 불교에서 하나의 대상을 잡을 때는 마음을 고요하고 맑고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주어가지고 그거로 인해서 선정을 개발해서 위빳사나로 뛰어들기 위한 전제작업으로써 사마타 수행을 권장하는 겁니다. 이게 아니면 그건 사마타 수행의 대상이 될 수가 없어.

 

호흡을 통해서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데 사마타 수행으로 명칭을 주어가지고 집중하고 있다가 마음이 고요해지고 편안해질 거 같으면, 명칭을 떼내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그걸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관찰하라고 합니다. 위빳사나로 전환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다른 수행은 그거 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집중할 수 있는 거면 돼. 그것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든 아니면 몽롱하게 취하게 하는 것이든 아니면 악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든 어떤 것이든 집중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걸 자꾸 사람들은 동일시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불교적인 것이 아니고 그냥 누구든지 하는 평범한 수행법이다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마타 수행법은 딱 한정돼있습니다. 40가지 이외에는 없습니다.

괜히 쓸데없이 이 40가지 외에 다른 것으로 인해서 사마타 수행을 하겠다, 그거는 외도라. 쉽게 말하면 화두, 40가지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화두 참구하고 있을 거 같으면 외도라. 불교의 사마타 수행법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대상, 개념을 뜻하는 것은 똑같지만은 그거는 불교 외적인 사마타라.

 

염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한다. 그러면은 그걸 하더라도 불교적인 방법으로 석가모니불을 부르는 것이 있고, 불교 외적인 방법으로 석가모니불을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뭔가 원하는 것이 있어가지고 석가모니불을 부르는 경우에는 이것은 마음을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주지 못하고 위빳사나로 전환하지 못합니다. 불교라고만 덧칠해놓은 겁니다. 그럼 이거는 외도라.

 

단지 마음을 집중하기 위한 대상으로써 그래서 선한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석가모니불을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거는 불교적인 수행법이라. 사마타 수행법이라. 그러면 집중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돼? 석가모니불을 부를 때는 그냥 '석가모니불'만 부르고 있어야지 기도, 절할 수도 없는 거고 염불로 돌릴 수도 없는 거라. 집중하는데 그걸 관찰하면 어떻게 집중이 돼?

그러니까 불교적인 수행법으로써는 석가모니불을 할 때는 가만히 앉아서 마음속으로 석가모니불 염송만 해야 돼. 선한 마음을 계속적으로 일으키면서.

 

불교적인 사마타를 분명하게 알도록 하라는 거라는 거라. 그 외에 거는 외도라 하고, 그거는 차차 다음에 불교적인 거 공부 다하고 나면 그것이 이해가 되기 때문에 그거는 공부에 넣지 않는 거라. 그런데 이거는 외적인 것을 내 것인 것처럼 착각을 하다 보면 실제를 파악을 못합니다. 알겠죠?

 

자! 그래서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법이 있다.」 1페이지 거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법은 우선 사마타 수행으로 집중력을 극한까지 높인 후에 '위빳사나' 수행으로 들어간다.」

여기서는 '사마타'라고 되어 있죠? 오타입니다.

집중력이 높아지면 위빳사나로 전환하기가 굉장히 수월하겠죠? 왜 그럴까?

 

왜 집중력이 높아지면 위빳사나로 전환하기가 수월할까?

예를 들어봅시다. 책상, 만약에 이걸 사마타 수행으로 한다. 그럼 '책상'하고만 알아차리는 수행법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마음은 그냥 '책상'라는 명칭에만 가만히 달라붙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실재하는 책상은 뭐로 이루어졌어요? 나무, 이 속에는 본드도 있을 거고, 못도 있을 거고,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사실은 나무를 책상을 분해해보면 그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고. 집중력이 높으면 요 여러 가지들로 되어있는 게 보여. 그런데 집중력이 없으면 이게 안 보여. 이 여러 가지들이.

 

예를 들어서 또 다른 예로 호흡을 통해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사마타 수행으로 했다, 그럼 집중력이 되게 강해졌다, 그러면 위빳사나로 전환을 하면 들이쉬고 할 때 들이쉬는 느낌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아. 어떨 때는 시원하고, 어떨 때는 조금 갑갑하고, 어떨 때는 차갑고, 각각의 느낌이 지·수·화·풍으로 구분해서 볼 수가 있는 거라.

 

똑같이 들이쉬는데 지·수·화·풍 각각의 요소로써 볼 뿐 아니라 딱딱한 느낌이 있어도 그 느낌이 변하고 있다고 알게 되는 거라. 그 하나의 요소도 무상한 성품으로써 본다는 거라. 집중력이 없으면 이게 가능해요? 절대 안 가능합니다. 알 재간이 없습니다. 집중력이 없으면.

그래서 경전에도 "위빳사나를 이를려고 할 것 같으면 사마타 수행에서 사마디가 형성된 상태, 제1선정 이후라야 가능하다." 어떤 경전에는 3선정 이후라야 가능하다 하는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그건 경전 상의 이야기이고, 어쨌든 내가 집중력이 있지 않으면 이것은 요소 요소로써 지·수·화·풍 시원하고 딱딱하고 부드럽고 차갑고 하는 요소 요소로써 알아차릴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요소 요소도 변하는 현상으로써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알아차리질 못합니다. 위빳사나를 그렇게 하면 어떻게 위빳사나 수행을 해? 그래서 대부분의 옛날 수행자들은 사마타 수행에서 진짜 집중력이 강해졌을 때 즉각적으로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하는 방법들을 거의 대부분 그 방법으로 수행한다는 거라.

 

그런데 "나는 스님, 그 방법으로 안 하고 그냥 내 방법으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그것을 거기에 맞게끔 개발해놓은 것이 뭐냐면 마하시 센터! 마하시 센터 가면 맨 처음 뭐라고 해요? 숨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들이쉼' '내쉼' 명칭 붙이라고 합니다. 무조건! 지가 무슨 상태에 있던 간에 무조건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리고 나서 마음이 거기에 대상에 딱 가 있거든, 가고 나면은 자연스럽게 명칭이 떨어지면 그때 명칭을 떼든지 해라. 그러면은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쉴 때 들이쉬는 호흡의 변화를 보게 되고, 내쉴 때 내쉬는 호흡이 변화를 보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사마타 방법으로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거라.

하다가 나중에 사마타에서 위빳사나로 전환을 하는 거라. 순수 위빳사나를 한다는 곳 자체도 그렇게 한다는 거라. 그런데 무슨 순수 위빳사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거라? 집중력이 없이? 재간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집중하는 힘들이 없는 상태에서는 이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안 그래도 마음은 자꾸 지 좋고 싫고 하는 쪽으로 끄달려 들어가기 바쁘고, 딱 망상 피워가지고 자기 견해대로 자기 좋을 때로 알아차리고 있는 판에 그걸 있는 그대로 통찰해서 안다? 그건 아니라는 거라.

그냥 내 말을 들으십시오.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병행해야 됩니다.

 

전통적인 방법은 사마타 수행으로 어느 정도 집중력이 생기거나 삼매를 개발하고 나서 위빳사나 수행을 골고루 해야됩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사리뿟따 존자도 꼭 마찬가지였습니다. 지혜제일이라는 분도 순수 위빳사나를 했던 것이 아니고 사마타로 인해서 선정을 개발하고 나서 그다음에 위빳사나로 수행을 했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그러면 사마타 수행을 해도 되는가? 맞아요?

처음에 태국에서 5년 지나고 나서 처음으로 외국인들을 지도를 해보라고 하는 거라. 나도 개뿔도 모르는데. 그래서 지도를 하는데 보니까 이분이 정신이 좀 산만해.

대부분 정신이 어느 정도 산만한 사람들은 집중하는 수행법을 자꾸 하라고 그럽니다. 손을 이렇게 들었다 내렸다 한다든지, 아니면 발을 이렇게 들었다 내렸다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단순한 것을 가지고 집중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정신이 산만하면 그게 가능하고 좋은 방법이 되는데, 정신이 많이 산만한 사람은 그걸 못해. 이게 안 돼. 쉽게 말하면 눈감고 가만히 선 상태에서 발을 들어올리고 내리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자빠질 정도는 안됩니다. 까딱까딱 할 수는 있지만. 이 사람은 눈 감고 가만히 선 상태에서 한쪽 발만 들었다 내렸다 하라고 그러면 난리를 쳐요. 이걸 못하는 거라. 그 정도로 산만한데 그걸 모르고 그냥 경전대로 그리고 그냥 배운 대로 그냥 집중하는 것만 계속 시켰어요.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안 나아져요. 그때 탁 안 게 있어요.

 

! 이거 마음이 아주 산란한 사람은 바로 사마타 수행을 시켜가지고는 절대 안된다.

여러분도 한번 해봐. 눈감고 서가지고 발을 들어올렸다가 내렸다가. 안 자빠질 정도가 되면 사마타 수행해도 돼. 그런데 자빠진다! 그러면 사마타는 수행하면 안 돼! 그거는 그냥 바로 편안하게 마음을 쉬는 게 좋아. 그런 경우가 있고.

그다음에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 안됩니다. 사마타 수행.

그다음에 또 뭐가 있느냐면 감정이 일어났을 때 감정을 주체를 못합니다. 한두번 주체를 못하는 건 괜찮은데 이건 뭐만 하면 그냥 바로 반응들을 해갖고 그걸 주체를 못하는 거라. 이런 사람들도 사마타 수행법으로 바로 시작하면 안됩니다.

그런 사람이 아닐 경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마타 수행으로 먼저 접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수행도 못하고 만날 그냥 살아야 되나? 아니죠!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이런 사람들에게는 선근공덕을 짓는 것들을 자꾸 시킵니다. "오늘 하루는 계를 지키십시오." 계를 지킵니다. "오늘 하루는 마음을 베푸는 봉사를 하십시오." 아니면 마음을 갖다가 몇가지 쭉 예를 들면서 "선한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십시오."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어느 정도 훈련이 된 상태에서 산만함이 조금 잠재워지고 지나치게 반응하는 것도 잠재워지고 이렇게 되고 나면 그다음에는 사마타 수행의 방법을 지도를 하게 됩니다. 바로 그렇게 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대신에 사마타 수행을 지도할 때는 사람마다 근기에 따라서 대상을 다르게 합니다. 너는 자애수행, 너는 수식관, 너는 뭐, 이걸 맞게 해주지 않으면은 그사람은 만날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안 늘어. 그래서 수행지도 잘하는 사람은 그걸 잘 해. 대상만 잘 지도해주면 잘 포착을 해주면 됩니다. 그걸 위해서 사람들의 성향을 분석해가지고 그에 맞게끔 수행대상을 정해줍니다.

 

그럼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수행대상을 여러 가지 해도 괜찮습니까?" 안됩니다. 사마타 수행 대상은 자기에게 맞는 것을 하나 받고 나면 그거 하나만 하십시오.

무엇 때문에 사마타 수행하는지를 자꾸 잊어버립니다.

사마타는 뭣 때문에 해요? 집중력을 키워가지고 내가 위빳사나 수행으로 뛰어들기 위한 단계라. 하나만 해도 충분해. 뭐하러 이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사마타가 40가지가 있다, 40가지 다 할라고 그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전혀.

 

단지 그렇게 하다 보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 40가지 사마타 수행 주제가 있는데, 실제로는 40가지 사마타 수행주제를 안 합니다. 지금 현재 사람들에게 대상으로 하는게 40가지가 되는 것이 아니고 10가지가 채 안됩니다.

대표적인 게 아수바바와나. 이 몸은 부정한 것들이다. 그걸 제대로 알고 있는 스승이 없어 인제. 그걸 안 했으니까. 그래서 특정한 사람에게만 합니다. 그런 식으로 40가지 수행주제를 이론상으로는 아는데 이론하고 실제하고는 틀립니다. 실제적으로 그걸 수행주제를 주고 수행지도를 하고 하는 것은 거의 없어요. 그런데 없어져도 관계는 없어요.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가 있으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은 사마타 수행에 대해서 쭉 설명을 하겠지만 그거 다 알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모르면 오늘 공양하고 오늘 참회하고 나서 스님한테 물어봐서 수행주제를 받는 것이 가장 빠르다는 거라.

 

그다음에 밑에 2페이지에 보면 「종교적 체험」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의 기본적인 포인트는 거친 파도를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억제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종교적 체험이라고 하면 뭘까? '하나님 아버지' 하면서 하는 것들, 쉽게 말하면 종교적인 체험입니다. 또 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면 그거 다 종교적인 체험입니다. 아니면 성철스님이 잘했던 '아비라'. 나모라 다나다라 뭐 어쩌고 하는 아비라, 능엄주. 하여튼 그런 여러 가지 종류들이 있습니다. 그게 종교적 체험입니다.

 

그런데 사마타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거친 파도를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억제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나와있는데, 그 종교적인 체험은 거친 파도를 억제하는 것은 하는데 온화한 마음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홀라당 넘어가버렸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어떤 데 가면 그렇게 수행지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뭔가를 떠올리고, 천상의 세계를 떠올리고, 천상의 세계가 탁 떠올랐다 그러면 천상의 세계로 가라. 어디로 갑니까? 어디로 어디로 가서 극락세계 어디로 어디로 다니고 있다. 이렇게 합니다. 자기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극락이 각각 다 조금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개념을 가지고 그렇게 자꾸 만들어내고 있다는 거라.

 

그래가지고 자기는 체험했다고 그럽니다. 극락을 봤다고, 하느님 아버지를 봤다, 부처님을 만났다, 제정신의 상태에서 그걸 볼 수 있는 거라? 절대로 없습니다. 이성적인 상태에서는 그렇게 안됩니다.

거친 파도를 잠재워가지고 온화한 상태로 평정한 마음으로 만들어주어야 되는 것이 사마타 수행인데 그렇게 되지 않고 자기의 세계에 갇혀가지고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빠져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성불봤다, 엉뚱한 소리라는 거라.

 

그런 사람이 여기 와서 문답한다고 할 거 같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얘기해줘봐야 자기는 그게 맞다는데 어떡할 거야? 답이 없어. 어떻게 해? "예.."

그냥 얼버무릴 수밖에 없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틀린 걸 갖다가 맞다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니라. 그게 종교적인 체험이라.

종교적인 체험은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경을 독송한다고 하더라도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들은 전혀 사마타의 대상이 되지를 않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그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을 했을 때 사마타에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갓난 아기가 있다, 그러면 그 갓난 아기한테 "식사하셨어요?" 할 것 같으면 식사라는 단어를 모르면 애가 알아듣겠어? 못 알아들어. 어른한테 "식사하셨어요?" 할 것 같으면 알아듣는다는 거라.

그거하고 마찬가지라. 내가 아무리 모르는 소리를 한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못 알아듣는데 뭘 어떻게 이루어질 거라? 내 맘하고 똑같이 그러면 부처님 마음이 내맘하고 똑같은 마음으로 돼 있어? 이미 부처님 마음하고 내 마음하고는 다른데? 나는 속세의 마음이고 거기는 부처님의 마음인데?

어떻게 속세의 마음을 내가지고 부처님의 마음을 동일하게 만들 수가 있어? 동일하게 만들어야 부처님이 볼 거 아니라? 그거는 현실 가능성이 없는 것들이라. "진지 잡수세요" 해갖고 이게 말이 돼? "밥 먹어라"하고 해야 될 것이지.

 

그러면 게송을 외운다고 하더라도 의미가 있는 말을 해야만이 나도 그 의미를 이해를 하게 되는 거고,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나게 되어서 삼매에 빠지게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걸 의미를 다 이해를 하고 똑같은 삼매의 체험에 들어가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못할 경우 그거는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경을 독송한다고 하더라도 신비적인 그런 거 하려고 하지 마. 남들이 안 하는 것들 그거 의미 없어요. 아무 의미 없어요.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한 상태, 단어 하나라도 한 글자라도 그것을 분명하게 이해했을 때 그것을 독송하면 그것에 따른 힘들은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주문문화와 사마타 수행」 마찬가지입니다.

5페이지에 보면 「희망을 이루게 하는 주문, 병을 낫게 하는 주문, 횡재하게 하는 주문, 비를 내리게 하거나 그치게 하는 주문, 전쟁에 승리하는 주문, 장사를 번성하게 하는 주문, 신들이 돕게 만드는 주문 등 많은 주문이 있지만 주문에 힘이 있다고 믿고 있으나 실제로는 아무 힘이 없다.」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수능 잘 보게 해달라고 수능축원했다, 수능축원한다 해가지고 그 수능 합격되는 게 아니라는 거라. 그리할 거 같으면 우리나라 절이 몇 개인데 그 절에서 만날 아침 저녁마다 남북통일 만날 발원하는데 왜 통일도 못 시키고 있어? 그 많은 스님들이 아침 저녁마다 하는데.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을 기도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거라. 자신의 이익과 남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을 기도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어느 누가 그걸 들어줄 거라? 나라도 안 들어주겠는데. 그것들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주문이라고 하는 것들도 그것에 힘이 있어서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주문할 때의 마음, 그것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나에게 기쁨이 일어나고, 그 기쁨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것으로 인해서 일이 잘될 수는 있습니다.

 

그다음에 「그래서 불교에서는 주문은 엄격하게 금지가 되어 있다.」 하는 겁니다.

주문을 외우든 주문을 대상으로 하든 아니면 어떤 기도를 할 때 명호를 외우는 대상이 되든 어떤 것이든 그 속에는 탐·진·치가 들어있습니다. 탐·진·치가 있는 상태일 때는 그것은 불교적인 집중하는 대상이 되지 못하고 불교적인 기도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개개인에게 축원하는 법이 없습니다. 스님들이 축복게송을 하더라도 전체 모두에게 합니다. 기도비를 냈든 안 냈든 그거하고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그냥 여기 축원하는 사람은 "모든 이들이 다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하고 축원하는 겁니다. 개인에게 건강하고 행복하라 하는 법이 없습니다. 기복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기도나 주문하는 것들 하지 마라.

 

불교 외적인 탐·진·치를 일으키는 수행대상, 이것이 설혹 명칭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교적인 사마타 수행대상이 되지 못한다 하고 분명하게 알고, 그리고 불교의 사마타 수행대상은 딱 40가지 뿐이라. 그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이해하겠죠?

 

자! 그러면 다음 시간부터는 하나하나 40가지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위빳사나 하고 전환하는 것들을 얘기들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불교적인 수행이나 문답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질문할 사람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수행자 질문 : 스님,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요, 저 같은 경우는 처음에 눈을 감고 아나빠나 사띠처럼 코끝에 호흡이 들어가고 나오는 거를 관찰을 하면서 시작을 합니다. 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보는 거보다는 여기다 하는 것이 더 민감하게 잘 돼가지고요.

여기를 관찰해서 한 10분에서 20분쯤 되면은 집중이 일어나가지고 그다음은 코끝에서 니밋따는 아닌데 어떤 중간의 모양인데 이쪽으로 쭉 빨려들어가면은 그때서야 제가 마음으로 ‘아, 인제 집중이 충분하게 되었구나’ 느끼고는, 제 몸에서 다른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때 자꾸 ‘사실인가?’

그런데 찾았을 때 어떤 강력하게 나타난 어떤 현상이 있으면 다리든 배든 다른 곳에 주로 통증 관찰을 많이 하는 편인데요, 그게 주로 한 15분에서 20분 흐르고 난 다음에 다른 부위에 가서 집중적으로 관찰을 하는 편이거든요. 그 방법도 맞습니까?

예전에 어디서 인터뷰를 할 때 이런 방법으로 한다고 계속 보고를 하고 했었는데, 어느 때 "왜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런 방법으로 하느냐"고 말을 한 번 들어서 제가 제 방법이 뭔가 틀렸는가 싶어서요.

 

스님 대답 : 완전히 맞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닙니다. 제가 다시 설명을 해드릴게요.

위빳사나 수행에서 필요한 것은 카니카 사마디라. 순간적인 집중하는 것! 순간적인 선정이 필요합니다. 그걸 보통 찰나삼매라고 합니다.

찰나삼매는 니밋따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형성이 됩니다. 대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집중하고 있을 거 같으면 찰나적인 삼매는 어느 정도 형성이 됩니다. 그런데 사마타 수행을 계속할려고 할 거 같으면 그런 니밋따들, 조금 전에 얘기한 것이 니밋따의 일종입니다. 그런 니밋따들이 형성이 됐을 때 그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나중에 그 니밋따들이 여러 가지 변하는 것들이 다 없어지고 나서 딱 형체가 바뀌지 않게 고체화가 됐을 때 그걸 대상으로 합니다. 그렇게 할 거 같으면 이미 찰나 삼매를 넘어서 본삼매쪽으로 진입을 하게 되는 거라. 그럼 본삼매에서는 위빳사나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 필요한 것은 찰나 삼매의 힘들인 것이지 본삼매의 힘들이 아닙니다.

그럼 아까도 얘기했지만 찰나삼매의 힘은 집중하는 힘이 어느 정도만 생기면 찰나삼매의 힘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은 그때 이 앞에서 니밋따가 어느 정도 형성이 될 때 이미 그걸 대상으로 하지 않고 바로 두드러지게 일어나는 현상들을 관찰해야 됩니다. 그것을 관찰하면 수월해지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럼 그걸 관찰대상으로 해서 알아차리면 되는데 여기서 딱 하나 문제가 있습니다. 자꾸 그렇게 해나가다 보면 이걸 관찰은 돼나가는데 단지 관찰돼나가는 것뿐이라. 관찰되고 나서 관찰할 것 같으면 어떤 경우에는 금방 그것이 사라져버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것을 관찰할 것 같으면 또 다른 곳에서 뭔가 또 하나가 생겨나면서 금방 알아가지고 마음이 그쪽으로 바뀌어버리고, 요렇게 계속 진행이 됩니다.

 

그 대상 자체가 만약에 예를 들면 여기 통증이 있다, 그러면 마음을 여기 통증에다 탁 두니까 통증이 금방 생겨나는 것을 알고 통증이 사라지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것뿐이라. 통증이 변하고 있는 상태를 분명하게 보는 힘들은 없다는 거라.

이 통증이 일어났으면 일어나서 이것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반복돼고 있다는 사실을 갖다가 알기가 힘이 들어. 그런 단점이 있습니다. 그걸 봐야만이 이 통증에 대해서 분명하게 다음부터는 영향을 안 미치게 됩니다.

 

통증 이것을 완전하게 안다고 해가지고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왜? 또 다른 곳에서 수행을 하다 보면 이 통증들은 또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렇게 알고만 계속 있을 거냐? 이것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끔 해야 됩니다.

그럴 거 같으면 이 통증을 알아차릴 때는 이 통증이 일어났으면 '통증이 일어났다'라고 알고 그러고 나서, 이 통증이 변하고 있으면 변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통증이 있으면 '통증' '통증' '통증' 하면서 알아차리고, 그다음에 쑤심이 있으면 '쑤심' '쑤심' 하면서 알아차리고, 무거우면 '무거움' '무거움' 하면서 알아차리고, 아니면 그냥 찌르듯이 아플 거 같으면 '찌름' '찌름' 하면서 알아차리고, 둔탁한 무게감으로 해서 누르는 듯이 알 거 같으면 '누름' '누름' 하면서 알아차리고, 각각의 단계에 맞게끔 그것을 알아차려줘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누름' '누름' '누름' 하고 알아차리더라도 누르는 힘이 다르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라도 알게끔 됩니다. 그렇게 훈련하다 보면 누르는 것이 빨리 변한다는 것을 어느 순간 알게 되면 그 뒤부터는 이 통증이 순식간에 확 사라져버립니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인제 나에게 영향을 안 미친다는 거라. 그다음엔 다른 곳에 가서 앉아 있다가도 통증이 있으면 '통증'하고 알아차리는 순간에 통증은 확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게 전통적인 위빳사나 수행법으로 했을 때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사마타 수행을 해서 니밋따가 형성되는 상태에서 지금 현재 두드러진 현상을 탁 알아차리면, 전통적인 위빳사나 수행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전환하는데 어려웁게 돼버립니다. 그것들을 알기는 아는데 그것들이 현상들이 생멸하고 하는 것들은 분명하게 보지 못한다는 게 한계점입니다.

 

그래서 맞는 것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닙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힘들은 분명히 생겨났는데, 그 생겨난 것으로써만 만족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스님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것들을 했을 거 같으면 차라리 위빳사나로 전환을 하지 말아라. 그냥 그대로 사마타가 형성돼서 삼매에 드는데까지는 가봐라.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아예 니밋따가 형성되기 훨씬 이전부터 마음이 호흡에 집중하는 상태만 될 거 같으면 바로 움직임이나 느낌으로 전환을 해야 됩니다. 바로 처음부터 위빳사나로 어느 정도 집중되면 전환해가지고 위빳사나 수행을 하라는 거라.

그럼 위빳사나로 수행하다 보면 위빳사나의 방법으로 모든 것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상이 일어나면 바로 마음은 여기 대상에 가더라도 위빳사나의 방법으로 아까 같이 그런 식으로 하라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방법인 것이지 어중간하게 반쯤 가가지고 요렇게 전환하는 것은 큰 이익은 없다는 거라. 됐습니까?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