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구·울주선원 수행법문

왜 위빳사나여야만 하는가? (20150213.대구)

담마마-마까 2019. 12. 25. 15:15

https://youtu.be/UjGqMpcjtSA

* 왜 위빳사나여야만 하는가? (20150213.대구)

 

옛날에 스님들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위빳사나를 하고 있다 할 것 같으면 외도수행을 하고 있다 하고. 그런 적이 있었어요.

요즘은 그렇게 그 수행을 외도수행이라고 하는 스님은 아마 거의 없지 싶은데, 지금은 위빳사나 수행이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었던 방법이라는 거는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다들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게 왜 위빳사나여야 할까? 그 인도의 전통에서도 위빳사나 수행법이 없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수행법들을 다 통틀어봐도 전부 사마타 수행법들입니다.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몰입하는 거지, 이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수행을 하는 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춤 수행법, 무슨 수행법, 하물며 애들 공부하는 집중하는 데도 하나의 대상이지 대상을 바꿔가면서 하는 것은 거의 없거든요.

 

그런데 왜 부처님은 위빳사나여야 할까? 사마타 해가지고 안됐던가? 안 됐었어요? 어떤 게 안됐는데? 옛날 스승들은 그 방법으로 다들 "내가 한 소식 했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한국에 있는 스승들도 마찬가지고, 그렇잖아. 대부분 깨쳤다고 하시는 분들은 사마타의 방법으로 깨친 것이지 위빳사나의 방법으로 깨친 것은 아닙니다. 꼭 한국만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인도의 여러 가지 스승들, 지금 얘기하는 스승도.,

스님도 대학을 다닐 때 참 좋아했던 인도의 스승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명상 서적하면 대부분이 읽고 있는 책들, 나도 굉장히 좋아해가지고 거기에 관한 책을 굉장히 읽었었어요. 그때는 그게 맞는 줄 알고, 그리고 그 이상은 없는 줄 알았었어요. 전혀 의심조차도 안 해봤으니까. 그런데 실제로 스님이 수행을 해보니까 부처님이 이해가 돼. 왜 위빳사나로 전환했을까?

 

사마타 수행 아무리 들고나고 하더라도 대상이 없을 때는 전혀 문제가 안됩니다. 특히 수행 잘하고 하는 분들 대부분 세속에서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지금도 보면 수행처에 들어가서 수행한다든지 아니면 출가한 스님들은 숲속에서 한다든지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크게 대상을 만날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는 그지없이 좋아. 내가 진짜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른 것 같이 느껴져.

그런데 대상과 딱 만나면 그 대상을 알아차린다는 것 자체가 두렵고 그걸 피하고 싶은 거라. 그러니까 시간 나면 또 수행처에 들어가고, 그래서 진짜 좋아하고 하는 상태에서 삼매에서 놀다가도 뭐 이렇게 공부한다고 나와있으면 아, 또 여기 있기 싫은 거라. 그럼 또 가고, 또 가고 이러는 거라.

 

경전에 그런 게 있습니다. 50년을 넘어 수행한 스님이 자기는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렀다 하고 얘기를 하니까 부처님이 봤을 때는 쟤가 아직 깨달음에 이른 것은 아닌 것 같이 보이거든. 그런데 이 스님이 부처님을 찾아서 옵니다. 보통 옛날에 스님들은 안거가 끝나고 나면 반드시 부처님한테 가서 인사드리는 게 관습화돼있습니다. 그래서 안거 끝나고 부처님을 찾아오는데, 미리 아난다 존자를 보냅니다. "어느 스님이 오거든 그 스님을 이런 방향으로 인도해 오시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인도를 해오는데 바로 부처님한테 오도록 하는 게 아니고 공동묘지를 지나서 오도록 합니다.

 

태국에 있을 때도 1년에 한차례씩은 반드시 공동묘지에 가서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옛날하고 틀려가지고 공동묘지에 가도공동 묘지가 파헤쳐지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아무도 없는 진짜 두려움이 일어나는 곳이라. 공동묘지는. 그래도 거기 가서 수행을 하기는 하는데, 옛날에 부처님 당시 때는 그대로 묘사한 걸 보면 공동묘지의 묘지들이 좀 파헤쳐지고 그랬거든.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는 아주 보기 싫은 모습들이 있고, 어떤 경우에는 좀 덜한 것들도 있고, 또 어떤 경우는 인제 막 죽은 사람들을 갖다 놓은 경우도 있고 그렇습니다.

 

혹시 인도 바라나시나 이런데 가서 '가트'라고 해가지고 사람 태우는 모습 본 적이 있어요? 돈이 적은 사람은 나무를 적게 사기 때문에 손이 툭 아니면 발이 툭툭 밑에 떨어집니다. 그러면 개가 잽싸게 와서 그거 물고 갑니다. 그게 타는 냄새도 매케할 뿐 아니라 그 모습을 이렇게 보고 있으면 섬뜩하거든. 죽은 것 가지고 타는 모습, 그것도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트가 이쪽 편에 있으면 보통 강 건너 요쪽 편에서, 그런데 강이 그리 넓지는 않은데 이쪽 편에서 구경들을 하고 있거든. 그래 봐도 그런 느낌이 드는데 실제로 공동묘지에 그냥 시체 무더기를 보면 굉장히 싫은 느낌이 듭니다.

 

이 스님도 아니나 다를까 그 공동묘지를 지나가는데 공동묘지에 오래된 해골들 막 뒹굴고 있고 뼈마디 뒹굴고 있고 하는 걸 보니까 그쪽으로 못가겠으니까 요렇게 돌아서 가고, 또 이쪽으로 오다 보니까 아주 아리따운 여인이 인제 막 죽은 모습을 보니까 그건 또 유심히 봐지게 되는 거라.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가지고 부처님한테 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내가 깨달았다는 건 순 거짓말이다' 하면서. 밖에 대상을 내가 단지 그 속에 숲에 있으면서 만나지 못해가지고 마음이 항상 고요한 것뿐이었지 대상을 만나니까 이거는 그냥 물결치듯 요동을 치는 거라.

 

그러고 나서 부처님한테 다시 "부처님 내가 상태가 이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호흡해라. 호흡의 느낌, 느낌의 변화되는 모습들을 보라" 해가지고 거기서 그 수행법으로 그자리에서 부처님 뵈러 와가지고 그 짧은 동안에, 물론 그동안 닦은 것이 있으니까 그랬겠지만 거기서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릅니다.

부처님도 위빳사나 수행한 게 6년 고행하면서 얼마만큼 했어요? 6년 동안 전혀 안 했습니다. 마지막 날 밤에 시작해가지고 새벽에 끝납니다. 그러니까 하룻밤밖에는 없어. 그래서 경전에도 이 수행을 진짜 열심히 하면은 몇시간 만에 깨달음에 이른다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실인 거라.

 

우리도 수행을 이렇게 하다가 보면 어느 순간에 한 단계 탁 뛸 때들이 있습니다. 그건 진짜 시간이 지체가 안 됩니다. 내내 진척이 없이 쭉 되다가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탁 어떤 계기를 만나면 한 단계 툭 뛰어오릅니다.

평온한 상태가 지속되는 지혜가 있다가도, 그다음 단계 그다음 단계로 탁 뛰어오를 때는 그게 한참 동안 갑니다. 어떨 때는 1년 2년 이렇게 갑니다. 그래서 아, 이거는 도저히 여기 밖에는 내가 못 올라가는 모양이다, 한계에 부딪쳤구나 하고 있는데 뭔가 하나가 딱 부족한 게 있었던 거라. 그걸 못 찾아내서 그게 문제인 거지 그것만 탁 채워주면 탁 뛰어오르는 거라. 찰나 순간적으로.

그래서 부처님의 수행법은 '아깔리꼬(akāliko)'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사마타 수행은 참 좋은 수행법입니다. 그리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힘들을 키워주는데는 굉장히 유익한 수행입니다. 그런데 「한계를 지닌다」 그거는 분명한 사실이라.

조건이 맞아가지고 대상에 탁 부딪쳤을 때 어떤 경우에는 마음이 참 고요한데 어떤 경우에는 굉장히 요동을 칩니다. 특히나 내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삿된 마음이 있을 때는 굉장히 요동을 칩니다. 삼매의 상태에 있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있다가도 조금 나쁜 마음을 먹은 상태, 그것도 뭐 달리 나쁜 마음을 먹는 게 아니고 아, 그때는 자기는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심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이 분이 어디 아프다, 그러면 저 분이 뭣 때문에 저렇게 아플까? 하는 것을 삼매 속에서 쭉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거 하면 안 되거든.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면 그것은 아는데 내가 병에 걸리는 거라.

조그만한 외부적인 충격이 오더라도 그냥 일반적으로 이렇게 하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나에게는 천둥치는 소리로 들려. 뭔가를 하나 볼 때도 그냥 똑같은 조도 밝기로써 보는데 그렇게 보이다가 어느 순간에 아주 집중력이 강해지기 때문에 이게 굉장한 불빛으로 팍 다가오게 되는 거라. 그래서 눈이 탁 멀어져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마음에 항상 선한 마음이 있고 그래서 그 선한 마음을 유지시켜 주면 사마디는 아주 좋은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삼매에 들었을 때조차도 힘들어.

 

그러니까 일상생활을 할 때는 선한 마음만 지속적으로 일어나도록 한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으로만 살아가겠다? 남들보다 큰 능력은 얻을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아, 내가 해탈하겠다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거라.

대상을 만났을 때 그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없어요. 위빳사나 수행밖에.

그래서 여러분들도 사마타 수행을 하면서 어느 정도의 집중력과 또 어느 정도의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라고 할 것 같으면 빨리 위빳사나로 전환할 줄 알아야 됩니다.

 

가끔씩 수행지도를 하다 보면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코끝에 호흡을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 그럼 일부러 나는 배를 하라고 안 합니다. 그냥 코끝으로 지도를 합니다. 그럼 코끝으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라고 그럽니다. 그럼 어떨 때 이 수행자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명칭을 처음에는 붙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들이쉼' '내쉼'하고 명칭을 붙입니다. 그러면 들이쉼 내쉼 하는데 “마음은 스님 어디에 가 있어야 됩니까?”

사마타 수행 할 때는 마음이 어디에 가 있어야 돼요? (수행자 : 들이쉼 내쉼하는 명칭에...)

그 명칭에 가 있어야 됩니까? (수행자 : 코끝에...)

어디에 가 있어야 돼, 마음이? (수행자 : 코끝에 있어야 됩니다.)

코끝에 있어야지 왜 들이쉼 내쉼이라는 명칭에 가 있어? 이거부터 헷갈리는 거라 사람들이. 명칭 붙이라고 할 거 같으면 마음이 들이쉼 내쉼 하는 명칭에 가 있으려고 하는 거라. 그럼 아무리 해봐야 사마타 수행을 못 해.

 

코끝에 대상에 가 있어야 되는 거라. 대상에 붙여놓기 위해서 명칭을 쓰라는 것이지, 명칭이 주가 아닌데 그것에 자꾸 마음을 두고 있는 거라. 그럼 코끝에 마음이 가 있으면서 '들이쉼' '내쉼' 하면서 명칭을 붙여주는데, 명칭에는 마음이 20%도 가있으면 안돼.

숨이 완전히 들이쉴 때 들이쉼하고 명칭을 붙이는 것뿐이라. 붙이는 정도만 되면 돼. 그정도 힘만 가 있으면 돼.

나머지는 전부 코끝에서 숨이 들이쉬어지는 그 움직임만 보면 되는 거라. 그래서 들이쉬는 움직임, 내쉬는 움직임,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숨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움직임만 보면 되는 거라, 사마타 수행은.

그런데 그걸 안 하고 명칭에 '들이쉼' '내쉼' 숨이 왔다갔다 하는 거 하고는 관계없이 지는 마음은 이 명칭에 '들이쉼' '내쉼'하고 있는 거라. 그러니까 아무리 사마타 수행을 해도 이게 효과가 없는 거라.

 

그럼 인제 그걸 바로 잡았다, 그래서 실재하는 움직임에다가 마음을 갖다 붙여가지고 수행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반드시 무슨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그럼 생각이 일어나든지 아니면 통증이 있든지 이렇게 합니다.

그럼 사마타 수행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그걸 자꾸 무시할려고 그럽니다. 실제로는 그게 맞습니다. 사마타 수행하는 데는. 그리고 마음이 이 대상에 머물러 있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 그 대상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걸 무시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은 그렇게 하지는 않거든. 일어나는 즉시 그 대상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되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네가 알아차리는 힘이 10분간 가만히 있으면서 그것만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가 될 때까지 그것만 먼저 하라. 그러면 그게 되고 나면 즉시 수행을 위빳사나로 전환하라고 그럽니다.

 

10분 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도? 어려운 거 아닙니다. 자꾸 이 포인트를 못 찾아서 그런 거라. 명칭에 가 있든지 아니면 대상이 나타나는 것에 자꾸 신경쓰고 마음이 자꾸 분산되게끔만 그럽니다. 분산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마음은 사마타 수행은 이렇다고 자꾸 생각해야 됩니다. 사마타 수행은 하나의 대상뿐이다. 그 대상외에는 없다 하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대상에 딱 마음이 가 있으면 됩니다.

가 있기 위해서 명칭도 붙이는 거고 별난 것들을 다 하는 겁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 숨을 1분에 몇번 쉬는지 측정도 하는 거고,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해서 평온한 상태에서 호흡을 하게끔 하고, 그리고 그 호흡에 마음이 딱 호흡하는 한 지점에 마음이 딱 가 있도록만 해주면 되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10분 유지하는 거 그렇게 어려운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포인트를 잘 찾아야 됩니다.

 

보통 10분 정도 하고 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10분 하고 나면 반드시 니밋따들이 생겨납니다. 10분을 하면. 그때가 되면 스님 같은 경우에는 즉시 사마타 수행에서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하라고 그럽니다.

니밋따가 생기면 참 좋은데, 또 언젠가는 사마타 수행만 하루종일 그것만 해야 될 때도 있어요. 그때는 또 그것만 따라가면 됩니다. 그 방법으로.

그런데 그렇지 않고 위빳사나 수행을 전환을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어쨌든 수행을 사마타 수행으로써는 이 생사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거든. 그럼 위빳사나로 전환해야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자꾸 해가지고 그것이 무르익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럼 10분 정도 하다가 바로 위빳사나로 전환을 해야 됩니다.

 

그럼 그때도 명칭을 붙여가지고 합니다. 명칭을 붙여서 하면서 '들이쉼' '내쉼' 하는데 그때는 마음은 사마타 수행과 마찬가지로 한 점에 있기는 있습니다. 그 대신에 그 한 점이 다릅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움직임을 보는 것이 아니고 느낌만 봅니다. 들이쉴 때 일어나는 느낌, 내쉴 때 일어나는 느낌 이것만 보라고 그럽니다.

그럼 들이쉴 때 느낌은, 쭉 들이쉴 때 손을 이렇게 대고 숨을 한번 들이쉬어봐라. 그리고 숨을 내쉬어봐봐라. 그 느낌이 있습니까? 코끝에서는 그 느낌이 틀림없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느낌을 볼려고 해서는 안 돼.

이 느낌이 같은 느낌이 아닌 것을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들이쉴 때의 느낌이 변하고 있다고 알아야 됩니다. 내쉴 때의 느낌도 변하고 있다고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10분 정도 사마타 수행을 하고 나서 집중력과 사띠의 힘이 어느 정도 형성이 되고 나면, 그다음에 나머지 50분은 위빳사나 수행을 하라. 그렇게 합니다.

여러분들도 통상적으로 수행을 할 때 그렇게 해보면은 조금 더 빨리 수행에 진척이 있게 됩니다. 호흡만 그런 거는 아니죠? 사대요소에 대해서 알아차릴 때도 사마타의 방법으로 했다가 그다음에 위빳사나의 방법으로 전환을 하고. 몸의 움직임 걸어가면서 경행을 하면서 하는 것도 움직임을 알아차렸다가, 움직임에서 일어나는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사마타에서 위빳사나로 자꾸 전환하도록 하고.

그렇게 하면은 그래도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수행이 재미없어가지고 도망갈려고 하는 그런 생각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게 처음 부분에 들어가기 부분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반드시 한계를 지닙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만 할 분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위빳사나로 전환을 하라.

물론 어떨 때는 사마타 수행만 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아까 얘기했듯이. 그때는 쭉 계속 따라가야 됩니다. 그래서 그럴 때는 그 방법대로 지도를 하도록 하고, 평상시 때는 항상 사마타 수행에서 위빳사나 수행으로!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수행의 포인트는

첫 번째 마음이 고요하고 맑고 가벼워지도록 만들어라.

그리고 마음이 그렇게 맑고 고요하고 가벼워지면 대상을 마음이 찾게 됩니다.

그럴 때는 하나의 대상을 포인트로 해서 수행을 하라. 여러 가지들을 옮길려고 하지 말고, 마음이 가벼워져 있으면 하나의 대상을 하더라도 충분히 그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 하나의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을 동안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라든지 번뇌라든지 이런 것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 것들이 일어나면 그냥 무시하고 그냥 그 대상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안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 잘 안 일어납니다. 가벼워져만 있으면.

 

그런데 마음이 항상 선한 방향으로 그리고 가볍고 평온하고 한 방향으로 만들어져 있지 못하면 대부분은 보면 하나의 대상에 머물지를 못합니다.

그럼 다시 처음부터! 처음부터 다시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고 가볍게 만들고, 그다음에 다시 또 하나의 대상으로 마음을 주고. 그러고 나서 하나의 대상이 어느 정도 되고 나면 그래서 번뇌라든지 잡념들이 잘 안 일어나고 잘 알아차리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때는 바로 그 대상 자체에서 변하는 것으로 볼려고 해야 됩니다.

이렇게 진행을 하는 것이 수행에서는 용이한 방법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가 「고요함에서 관찰 깨달음으로」 그렇게 돼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에서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을 하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사마타 수행에서는 절대로 이것들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을 해야만이 이것들을 해결할 수 있다. 그 여섯 가지는 뭐냐하면

 

첫 번째가 번뇌를 없애고 청정하게 하는 것,

번뇌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사마타에서는. 잠재하는 것뿐입니다. 마음이 아무리 선한 마음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깨끗한 마음을 항상 유지해서 그 대상에 머물러 있어야 되는데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먹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아야 되는 건데,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그게 가능한데 그렇게만은 할 수가 없습니다. 살 수가 없어.

그럼 근본적인 번뇌들은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번뇌 제거할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냥 대상을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여러분들 잘하는 거. 그냥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번뇌는 자동적으로 제거돼나갑니다. 변하고 있는 대상이면 변하고 있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거고, 움직이고 있는 대상이면 움직이고 있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거고, 고정돼있는 대상이면 고정돼있는 대상을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그냥 그 사실을 '음, 일어났네' 하고 아는데, 그렇게 아는 것들이 '변하는 모습으로' 알아야만이 번뇌가 달라붙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깨끗하게 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거는 위빳사나 방법밖에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는 근심과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이렇게 돼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스트레스 없애려고 하는 겁니다. 스트레스는 보통 극단적인 경우가 되면 자살로까지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우울하고 슬픔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일어났다가 그것들에 대해서 좀 더 도가 지나치면 그냥 조그만한 자극에도 금방 울음이 나와버립니다. 그래서 나는 뭔가를 할 수도 없는 사람이다 하는 마음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냥 자살을 하게 됩니다. 스트레스는 그렇게 바뀌어나가게 됩니다. 정신적인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더 큰 겁니다. 그런데 정신적인 고통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사마타로써는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쪽에서 지금은 대부분 정신과 병원에서는 위빳사나 수행을 병행하는 곳이 많습니다.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사마타 수행을 병행하는 것이 아니고 위빳사나 수행을 병행합니다.

 

처음에 부처님이 대념처경을 설했던 곳이 꾸루국입니다. 왜 꾸루국에서 법을 설했는지 알아요? 대념처경은 위빳사나 수행법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려면 두 가지는 먼저 갖추어져 있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먹고 살기 그렇게 어렵지 않아야 됩니다. 그게 어려우면 그거 해결하기 바쁩니다. 언제 수행해? 잠깐 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들을 알아차리고 해야 되는데, 언제 그거 해? 그거 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 크게 욕심을 안 가졌든지 아니면 어느 정도 사는데, 먹는 데는 적어도 크게 불편이 없어야 됩니다. 요즘 한국 사람들은 다 그렇습니다. 요즘은 먹는 데 그렇게 못 먹어가지고 죽는 경우는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해당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욕심의 비중을 줄여야 되는 것이지.

그게 먼저 전제조건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경에서는 기후 그다음에 농작물, 이런 것들이 풍부하다 하고 기후도 온화하고 이렇게 하는데 실질적으로 보면 몸을 유지할 수 있는 영양분을 취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거라.

수행할 만한 체력들을 갖추어져 있도록 만들어주는 겁니다. 그게 갖추어져야 되고, 그

 

다음에 두 번째 갖추어져야 되는 게 뭐냐면 지적능력입니다.

정신과 계통은 이 두 번째가 잘 안됩니다. 내가 뭐라고뭐라고 해도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은 이걸 못 알아듣습니다. 그걸 있는 그대로 또 알아듣지 못하고. 그러니 어떻게 해요? 정신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약만으로 다스릴 수가 없으니까 지적능력, 그런 능력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자기의 마음의 힘을 키워가지고 병을 이겨내도록 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마타 가지고는 안된다는 거라. 위빳사나 수행방법을 써야되기 때문에 정신과에서는 대부분 위빳사나 수행을 합니다. 병행을 하는 데는.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정신적으로 굉장히 산만하다든지 아니면은 정신적으로 아주 나태하다든지 이럴 경우에는 위빳사나 수행을 잘 못합니다. 그럴 때는 산만한 것들부터 먼저 멈추고 나태한 것부터 정상적인 마음의 상태로 돌리고 나야만이 수행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 체력하고 지력을 갖춘 곳이 꾸루국이기 때문에 꾸루국에서 이 법을 설하게 됩니다. 다른데서 바라나시나 아니면 어디 다른 지역에서 꾸시나가라 이런 데서 법을 설한 것이 아니고.

마찬가집니다. 이 두 번째 근심과 슬픔 그러니까 스트레스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위빳사나 수행법으로 공부를 해야만이 가능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번뇌와 몸이 괴로움 마음의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그 고통이 빨리 변하고 있는 사실을 알 거 같으면 그것으로부터 손 떼게 됩니다. 고통은 빨리 변하게 되는 겁니다. 실제로는. 아주 빠른 속도로 고통은 변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면은 육체적인 고통도 나에게 영향을 못 미칩니다. 사마타 방법으로 할 방법이 없습니다. 대상 자체를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으로 아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다음 네 번째 성스러운 도의 지혜와, 다섯 번째 닙나나에 이르기 위한 겁니다.

도와 과, 그리고 닙바나! 부처님도 6년 고행하실 때 예류과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 8지 선정까지 다 완벽하게 하고 자유롭게 그 부분에서는 내가 이 지구상에서 최고다 하는 분이었는데도 안된다는 거라.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예류과까지는 이르렀다고 봐야 됩니다. 그런데 그 이상은 넘어갈 수가 없었다는 거죠. 어쩌면 도와 과와 닙바나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수행을 하면서 반드시 목표로 삼아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위빳사나 수행법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하는 거라.

 

그렇게 봤을 때 이 위빳사나 수행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이것만으로써도 중요성이 있는데 이거 외에도 모든 것들에 위빳사나가 적용이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바라밀을 행할 때 위빳사나 수행과 함께 바라밀을 행하는 것, 그게 가장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라밀을 행할 때 어떤 경우든지 '나'라고 하는 개념을 가지고 바라밀을 행하게 되면 그것을 원만하게 성취하지 못합니다.

계를 지키는 것, 남에게 베푸는 것, 아니면 결정심을 내는 것, 자애수행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 위빳사나하고 결합이 안 되면 이것은 반쪽짜리가 되는 거라.

 

그래서 자애수행을 할 때도 사마타 수행으로 어느 정도 하고 나서는 반드시 위빳사나로 전환을 해야 되는 거고, 계를 지킬 때도 위빳사나 수행법으로써 계를 지키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억지로 지킬려고 하게 되는 거라. 보시를 하더라도 보시를 할 때의 마음, 그다음에 보시를 할 때의 행위들, 이것들을 전부다 위빳사나 수행으로써 알아차리면서 해야만이 바른 것이 되는 거라. 바라밀을 쌓을 때도 위빳사나 수행이 전부 적용이 돼야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두 가지, 바라밀을 쌓는 것과 또 도와 과에 이르게 되는 것, 이 두 가지 전부다 위빳사나하고 접목이 돼야 되는 거라.

그럼 수행을 안 한다고 치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위빳사나가 접목이 안 되는가? 접목을 안 시켜놔놓으면 그 사람은 항상 실수투성이인데 어떡할 거라? 그리고 항상 대상하고 만나가지고 그거하고 싸움하느라 바쁜 거라. 잘 살아가지 못하는데 어떻게 할 거라? 바르게 살기 위해서도 위빳사나 수행을 할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러니까 숨을 쉬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 내가 그래도 참 잘 살아야 되겠다는 잘살았다 하고 생각이 들려고 하더라도 위빳사나 수행을 평소에 훈련해가지고,

 

여기에는 안 나와있지만 위빳사나 수행의 이점 중에 하나가 뭐냐면 죽음의 두려움이 없다고 하는 거라.

평소에 수행해놓으면 마지막 죽을 때까지도 그렇게 안달복달하고 후회하고 하는 것이 없어요. 그냥 호흡 알아차리면서 죽어요. 또 지금 현재 뭔가 대상하고 만나더라도 그것들이 변하는 것들에 대해서 크게 안달복달 안 합니다. 그런 두려움들, 여러분이 아마 나는 언젠가 죽을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나는 죽을 때라도 편안하게 죽을 것이다 하는 확신만 들어도 아마 위빳사나 안 해도 될 거라. 그런데 편안하게 죽을 건지 어떨 건지 어떻게 알아? 모른다는 거라. 그래서 적어도 편안하게 죽을려고 할 거 같으면 위빳사나 수행을 하라는 거라.

 

몇년 전에 어느 스님의 부인이 암에 걸려가지고 굉장히 고통스러워한 적이 있었어요. 그 스님이 옛날에 출가하기 전에 인연이 있던 부인이기 때문에 "스님이 와서 마지막 임종 좀 지켜봐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더라고. 그래서 갔어요. 암이니까 얼마나 힘들어? 고통치고 몸부림치고, 그래서 내가 다른 말 뭐 한 것도 없어요. 딱 한마디만 했어요.

"죽음의 순간에 죽는 줄도 모르면 안 아까워요?" 그랬습니다. "살아가는 게 안 아까워요?" 했어. 자기는 열심히 발버둥치고 살아왔다고 했는데 지가 죽는 줄도 모르고 죽어버리면 그거 안 아까워요? 그러니까 정신이 퍼뜩 들었던 모양이라. 그렇게 고통치다 멈칫하면서 가만히 있더라고. "인제 당신은 죽습니다. 받아들이시오. 그렇지만은 내가 죽는 줄은 알고 죽읍시다." 그러면서 편안해질 때 호흡을 그냥 따라하도록 만들었어요.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 그렇게 1분 2분 정도 하더니 어느 순간 잠잠해지더라고. 별 수행도 몰랐던 사람인데도 그게 가능한 거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간단합니다. 지금 살아가는 게 아까우면 그래도 죽을 때 지 죽는 줄은 알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그거 하나만 탁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버립니다. 그러면서 분명히 알아차립니다. 지금 할 일이 그것밖에 없는데 어떡할 거라? 지금 여러분들 선택할 게 아무것도 없어. 발버둥치든 아니면 살려달라고 뭘 하든 정해진 이치라는 거라, 죽음은. 그렇다고 그걸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들이쉬고 나면 내쉬는 건 정해진 이치라. 그걸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럼 내가 할 일은 '아, 들이쉬었구나' 아는 거고, '내쉬었구나' 아는 것뿐이라. 그거 그냥 받아들여버리면 아주 수월해져.

 

살아갈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호흡을 일부러 할려고 하지 말고 이거는 자연스럽게 그냥 해지는 거라. 살아있기 때문에. 그럼 그냥 그거 받아들이고 나면 그거 그냥 알아차려진다는 거라.

처음에는 뭐 움직임으로 알아차려지고 어떨 때는 끊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음, 그래 뭐 그렇게 쉬는 거지' 하고 편안하게 대상을 떨어뜨려가지고 그냥 보는 거라. 그러다 보면 대상에 몰입하게 되는 거라.

 

죽음도 마찬가집니다. 자신이 탁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주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두려워하지를 않는 거라. 위빳사나 수행의 힘이 그마만큼 크다는 거라. 아무것도 위빳사나 수행을 모르는 데도 그 딱 5분 동안에 그걸 하고 죽는 거라. 스님이 그때 단언을 했어요. 저분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몰라. 그런데도 적어도 호흡하며 죽었기 때문에 나쁜 데는 안 태어난다.

여러분들도 누군가가 죽음에 이르르게 된다 할 것 같으면 죽고 나서 스님 부를려고 하지 말고 죽기 전에 부르라고. 가족이 할 수 있는 게 있고, 스님이 할 수 있는 게 틀림없이 있습니다. 가족은 어떤 경우든지 애착의 대상이고 미움의 대상이지만, 스님은 그거하고는 관계없는 대상이라는 거라. 그러면은 바르게 인도해주는 거라.

 

자! 그렇게 하다 보면 마음의 청정에 이르게 된다.

가끔씩 여기에 사람들이 오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마음의 청정? 순서를 건너뛰기도 한다? 아니면 순서를 바꿔서 청정의 상태가 되기도 한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걸 거스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물이 끓어야만이 안에 있는 고기가 익습니다. 고기가 익을려면 반드시 물이 있어야 되고, 물이 끓어야 됩니다. 그걸 익힐 수 있는 방법은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 순서에 따를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런데 그냥 익은 고기를 다시 물에다 집어넣는다? 그럼 무슨 의미가 있어?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순서를 거꾸로 간다든지 아니면 순서를 뛰어넘는다고 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반드시 그 순서를 밟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수행에서 계를 지키지 못할 거 같으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를 못합니다. 계로 인해서 마음이 청정하게 되기 전에는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방법이 없어. 그리고 계를 지키는 것이 자연스럽게 위빳사나 수행하고 연관이 돼가지고 그것이 '아, 이게 위빳사나 수행이구나' 하고 이해가 됐을 때야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는 거라. 그러니까 나는 계 안 지키고 나머지 청정만 하겠다? 백날 해봐. 안 돼. 그거는 안 되는 것들을 가지고 붙잡고 있지를 말아라는 거라.

 

마음의 청정 일곱 단계는 반드시 순차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순서를 반드시 밟아가게 됩니다.

나머지 지혜의 단계도 마찬가집니다. 반드시 밟게 되고 그리고 그 순서 그대로 가게 돼있습니다. 지 마음대로 나는 이게 먼저 일어나고 하는 법이 없다는 거라. 그걸 분명하게 인식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부터는 마음의 청정 일곱 단계부터 하면서 위빳사나 수행에 대한 걸 접목을 해서 같이 설명을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