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구·울주선원 수행법문

좌선수행 방법과 수행문답 (20150814.대구)

담마마-마까 2021. 10. 29. 09:00

https://youtu.be/-SYkNxnKbK4

* 좌선수행 방법과 수행문답 (20150814.대구)

 

저번에는 경행에 대한 거 프린트물 나눠줬고, 오늘은 좌선입니다. 앉아서 하는 수행에 대한 것입니다.

자! 좌선수행 방법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좌선수행할 때 수행대상은 어떤 겁니까? (수행자 : 호흡) 호흡입니까? 땡! 틀렸습니다.

뭐가 수행대상입니까? (수행자 : 자신의 신수심법, 사념처) 사념처? 땡!

어떤 게 수행대상이라? (수행자 : 느낌) 느낌? 그것도 땡! (수행자 :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

내가 그냥 답을 가르쳐줄게. 지금 일어나는 것!

그걸 자꾸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하다가 대상이 뭔가 일어나는데 그걸 알아차릴려고 안 하고 자꾸 호흡을 할려고 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좌선수행에서 수행의 대상은 지금 현재 일어난 것, 그것을 내가 알아차리고 있을 경우에 그것이 수행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호흡을 이미 관찰하고 있다, 그런데 뭔가 생각이 일어났다, 그럼 생각이 수행대상이 되어야 되는 거죠? 그렇지 않고 또 뭔가 보이고 있다, 그러면 보는 게 수행이 대상이 되는 거라.

지금 현재 일어난 게 수행대상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배의 호흡이 일차적인 수행대상이 아니다!

그걸 사마타 수행하는 분들한테 얘기하면 사마타 수행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밖으로 나가는 마음을 가져와가지고 딱 하나에만 묶어두어야 됩니다. 그래서 호흡에다가 딱 묶어두기 위해서 빠져나가면, 나가면 데려다가 여기다 다시 붙여주고 붙여주고 이렇게 하는데, 그런데 위빳사나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이 수행의 대상이다' 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마라!

 

그러면은 지금 현재 일어나는 걸 수행의 대상으로 알아차리려면 이걸 어떻게 알아차려야 될까? 평상시 하는 대로 얘기해봐. 수행 안 해봤어? 어떻게 알아차려야 돼요?

위빳사나 수행의 특성 세 가지는 뭐라? (수행자 : 무상·고·무아) 그렇지! 무상·고·무아 라고 하는 특성들이 있습니다. 무상··무아의 성품으로써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면 불러오는 것이 무상한 성품으로써 알아차려야 되는 것들이고, 꺼지는 것도 무상한 성품으로써 알아차리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망상이 일어났으면 망상도 무상하기 때문에 계속 일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무상한 성품으로 알려고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이 위빳사나 수행대상을 알아차려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처음 수행하는 사람이 그걸 보고 무상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느냐 하는 거라.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안 되죠!

안되는 게 문제가 아니고 마음이 그 대상에 가 있지도 못합니다.

마음이 호흡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면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데 가만히 그 호흡을 지켜보고만 있어요? 못합니다. 꼭 물고기가 냇가에서 요렇게 돌아다니고 있을 거 같으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 물고기를 보고 그걸 이렇게 따라갈려고 그럽니다. 물고기를 따라가서. 그래서 그냥 그대로 따라가서 볼 거 같으면 물고기가 좀 있다가 돌에 숨으면 돌에 숨는다는 것을 알고 나오면 탁 나온다는 것을 압니다. 편안하게 그걸 지켜보면.

 

그런데 그걸 잡아먹어야겠다 하는 생각이 탁 들어놔놓으면 요 물고기를 따라나가는 걸 제대로 못따라 갑니다. 마음이 잡아먹어야 되겠다 하는 데에 탁 묶어져있을 거 같으면. 돌다리에 숨는 것은 알지만 요게 숨어있다가 나오는 순간은 몰라. 요걸 잡아먹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탁 드니까.

그래서 대상을 바라볼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을 탁 붙잡을려고 하고, 그것을 알아차릴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대신에 그렇게 할려다 보니까 처음 수행하는 사람은 대상을 못 따라갑니다.

거의 대부분이. 대상은 대부분 보면 대상이 일어나고 나서 대상이 일어났다고 알게 되고, 대상이 사라지고 나서 대상이 사라졌구나 하고 뒤에 알게 됩니다.

그거는 어떤 면에서는 불선심소에 해당이 됩니다. 뭔가를 잘못된 일을 하고 나서 후회하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수행은 그렇게 해가지고는 안될 뿐 아니라 마음도 고요하게 안정돼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일어나는 걸 무상·고·무아의 성품 중에 어떤 것으로든 알기는 알아야 되겠는데, 이게 안 되니까 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어요? 어떻게 하면 될까?

 

단계를 이렇게 해줍니다.

알아차리는 정도와 깊이에 따라서 단계를 항상 나누어줍니다.

 

맨 첫 번째 움직임만 알려고 해라.

일어났으면 일어났다고 알고, 사라졌으면 사라졌다고 알고, 망상이 일어났으면 망상이 일어났다고 알고 망상이 사라졌으면 망상이 사라졌다고 알고, 어쨌든 호흡을 하고 있다가도 뭔가가 일어나면은 그거 일어났다는 것은 분명하게 알려고 하라는 거라.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났네'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생각이 사라지면 '생각이 사라졌네'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 움직임만 먼저 알려고 먼저 해야 되는 것이지 그 이상을 알려고 할 거 같으면 못 따라가버립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물고기 가는 방향을 따라서 그냥 그게 움직이는 대로 마음을 따라가주도록 하면 됩니다.

그럴려면 맨 첫 번째 움직임을 분명하게 알려고 하라.

 

자! 호흡의 예를 들어봅시다. 움직임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코든 배든 똑같습니다. 배의 예를 들어봅시다. 배가 불러오면 불러온다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배가 꺼지면 꺼진다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어떻게 하면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갈 수 있을까?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그 현상에 마음이 그대로 따라가야 된다는 겁니다. 움직임이 요만큼 이루어졌으면 마음도 요마만큼까지 같이 따라가줘야 됩니다. 요마만큼 움직였으면 마음도 똑같이 요마만큼 움직여줘야 되는 것이지, 마음 따로 그 움직임 따로 해라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이 초심자들은 배가 불러올 거 같으면 '불러온다'고 이름을 붙이면서 따라가야 됩니다. 이름 붙이는 것은 누가 이름 붙입니까? 마음이 붙이는 겁니다. 마음이 쉽게 말하면 그 현상의 고요한 특성들을 갖다가 그대로 이름 붙여주면서 같이 따라간다는 거라.

1번 물고기가 있고 2번 물고기가 있다, 그러면 여러 물고기가 있을 거 같으면 1번 물고기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1번' 하면서 쭉 그놈을 따라가야 되는 것이지 그냥 물고기를 따라올 거 같으면 이 마음이 이리갔다 저리갔다 헷갈리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고 배가 불러올 때는 불러온다고 명칭을 붙이면서 쭉 같이 따라가주라는 거라.

 

그런데 명칭을 붙인다 하더라도 명칭은 정확해야 됩니다.

한 번 더 얘기하면 지금 현재는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움직임은 위빳사나 수행입니까, 아닙니까? 엄밀하게 얘기하면 아닙니다! 지금 대상에 마음을 딱 붙여주기 위한 것들입니다. 사마타 수행에 해당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명칭에서 위빳사나의 특성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호흡은 물질적인 현상입니다. 물질적인 현상은 지·수·화·풍입니다. 지·수·화·풍 4개의 요소로써 이루어져 있습니다.

바람의 요소는 움직임의 요소이고, 팽창되고 수축하고 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다음에 땅의 요소는 딱딱하고 부드럽고 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물의 요소는 움직이고 있는 것, 움직임으로써 압니다.

불의 요소는 뜨겁고 차갑고 하는 것으로 압니다. 대표적으로 그렇다는 거라.

 

그러면 그 요소를 내가 나의 호흡이 움직인다는 생각을 안 알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분해해서 명칭을 붙여주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라고 하는 것이 관여되지 않는 명칭들을 사용을 해야 됩니다. 그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알아차리는 목적은 그 어디에도 나라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한 겁니다.

그런데 명칭 자체에서 이미 '나'라고 하는 것이 포함이 돼버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더욱 더 견고하게 해버립니다. 그래서 배가 불러올 때 '불러옴'이라고 알아차리도록, 배가 불러올 때는 일어나니까 일어나는 것으로 알아차리도록, 배가 꺼질 때는 꺼진다고 알아차려도 되는 거고, 아니면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으로 명칭을 붙여주어도 되고 그건 여러분들 마음입니다.

 

스님이 선호하는 명칭은 '일어남' '사라짐' 입니다.

왜 그걸 선호하느냐 하면 어떤 경우든지 모든 현상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여러분들 생명도 태어났으면 반드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일어남'이라고 명칭을 붙일 때는 조금 더 그 마음에 '아! 내가 이거 못 알아차리면 끝난다'는 마음이 더 강하게 듭니다. 그래서 사라진다고 알아차릴 때도 '아, 나는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기 때문에 '사라짐'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대신에 '일어남' '사라짐'이라는 명칭을 붙이든 아니면 배가 불러올 때 '팽창한'다고 아니면 배가 꺼질 때 '수축한다'고 그런 명칭을 붙이든 그건 똑같습니다. 그래서 '팽창', '수축'이라든지 '일어남' '사라짐'이라고 하든지 명칭을 붙여서 그 대상의 움직임을 분명하게 파악을 하라 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그럼 어디에다 둘 것이냐?

실제 배가 불러오는 것이 있고, 불러온다고 명칭을 '일어남'이라고 명칭을 붙이는 것이 있습니다. 명칭을 붙이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럼 마음은 명칭에다 가 있어야 되는 겁니까? 아니면 실재 불러오는 이 현상에 가 있어야 되는 겁니까? 현상에 가 있어야 됩니다!

어떠한 경우가 되더라도 배가 불러올 때 '일어남'이라고 하면서 '일어남'에 마음이 가있으면 틀려져버립니다. 일치가 안 돼. 그래서 불러올 때 '일어남' 이라고 명칭을 붙여주지만 거기에는 마음이 10프로 20프로를 넘어가면 안 돼. 마음은 거기에만 약간 가 있고 나머지는 실재 불러오는 현상에 마음이 가 있어야 되는 거라.

그게 수행할 때 처음 주의해야 될 것들입니다.

그래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명칭을 붙여주면 됩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거 처음 수행하는 법은 알겠죠?

 

그대신에 그렇게만 계속 해나가면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다른 데로 벗어나게 돼있습니다. 오래 못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벗어났을 때는 벗어나 있는 그것을 명칭을 붙여주도록 해야 됩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남' 하고 분명하게 명칭을 붙이면서 그 생각에 마음이 가 있어야 되는 것이지 '생각이 일어남' 이라는 명칭에 가 있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그 대상 또는 통증이 있으면 '통증'이라는 명칭을 붙이면서 실재하는 통증에다가 마음이 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실재하는 대상에 마음이 가 있는지 아니면 명칭에 가 있는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어요? 어떻게 구분하게 될까?

예를 들어봅시다. 손을 이렇게 누르면서 한 손을 가지고 요렇게 다른 한 손을 눌러버렸다. 통증이 있습니까? 그러면 '통증' 하면서 관찰을 해봐.

'통증' 하는 명칭에 마음이 가 있으면 이 통증을 알아차려지는가 물어봐봐. 실재하는 통증 알아차리는가 못 알아차리는가? (수행자 : 못 알아차립니다.) 못 알아차리죠!

'통증' 하면서 알아차리지만 실재하는 통증에 마음이 거의 대부분이 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 통증을 알아차립니다.

 

통증을 어떻게 알아요? (수행자 : 느낌으로)

실제 느낌으로 아는 거라. 이 통증이 이렇게 누르는 것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실재하는 것에 마음이 가 있을 때는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을 분명하게 자신이 압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 아니면 망상이 일어나는 것, 아니면 통증이 일어나는 것이든 모든 것은 꼭 마찬가집니다. 그 느낌이라는 것은!

 

망상이 일어나면 정신적인 현상이니까 느낌이 없을 거 같죠?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에 따라서 느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망상을 했을 때 가슴을 딱 보면은 망상한다고 하면서 망상을 할 때 어디로 마음을 둘 거라? 눈이 있다고 하면 눈을 어디다 갖다 둘 거라? 어디다 갖다둬요? (수행자 : 머리에다가) 요기 저기에다가 '망상' 이리 할 거야? 그거는 아닙니다.

망상할 때는 나중에 수행 오래도록 하려면 망상할 때는 가슴에다 감각기관을 둔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망상할 때는 가슴에서 느낌이 망상의 종류에 따라서 아니면 생각의 깊이에 따라서 느낌이 각각 다 틀립니다. 그래서 '망상' 하면서 가슴의 느낌이 일어나는 것들을 파악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주의해야 될 것들입니다.

그래서 명칭에 가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실재하는 대상에 가 있는지 분명하게 파악을 해라! 이제 조금 이해가 되죠? 수행하는데.

 

그럼 그렇게 하고 나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데, 실재하는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데 마음이 가 있어야 되고, 그게 실재하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떻게 보여요?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본다, 어떻게 보입니까?

(수행자 : 느낌으로 보입니다) 당연히 느낌으로 지금 알아차리고 있지. 어떻게 느끼는 걸 아느냐는 거라.

 

맨 첫 번째, 마음이 그 느낌들을 따라가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걸 몰라버리면 마음은 이미 벗어나버립니다. 마음이 배가 불러온다는 현상을 따라갈 것 같으면 불러오는 것이, 이렇게 손을 배에 한번 대봐봐요. 배를 한번 쑤욱 불러봐봐요. 또 배가 쑤욱 꺼져봐봐요. 이 느낌을 분명하게 알겠습니까? 불러오는 게 쭉 다 보입니까?

눈이 거기에 가 있지 않아도 거기에 마음이 가 있으면 불러오는 것이 그대로 다 보여야 됩니다. 그래야 시작하는 거하고 끝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지 그걸 따라가지 못하면 아, 내가 마음이 느낌을 일시적으로 알았을지는 몰라도 벗어나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럼 다시 또 돌아와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배가 불러오고 꺼질 때 '일어남' 하고 알아차리고, '사라짐' 하고 알아차릴 때 일어나는 현상들이 그대로 다 보여야 됩니다. 또 배가 꺼질 때 사라지면서 배가 꺼지는 게 그대로 다 보여야 됩니다.

 

그래서 맨 첫 번째 움직임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라.

움직임이 있는지 아닌지조차도 모를 것 같으면 그거는 이미 수행 안 한 거고, 만날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는데도 이게 배가 불러오는 건지 꺼지는 건지도 움직이는 것을 모른다고 할 거 같으면 아예 명칭에다가 가 있는 거지 그거는 수행 안 하고 있는 거라. 그래서 움직임을 안다는 것은 처음에는 움직이고 있는 현상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그 움직임이 시작돼서 진행되고 끝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움직임의 시작과 끝을 쭉 그대로 따라가면서 알아라.

요까지만 우선 먼저 하라는 거라. 그건 할 수 있죠? (네)

그대신에 명심해야 되는 것은 뭘 내가 반드시 알려고 하는 거라든지 아니면 하기 싫어한다 든지 할 거 같으면 안됩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움직임의 전체적인 것을 분명하게 내가 이해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데, 이게 배가 불러오는 게 육체적인 현상에 따라서 마음이 자꾸 일어나고, 또 불러오는 게 꺼지고 나서는, 마음이 탁 멈추어 있는 걸 알게 됩니다.

 

그게 첫 번째, 여러분들이 초보수행에서 반드시 해야 될 것들입니다.

그게 인제 됐다 칩시다. 안 돼도 할 수 없어. 됐다 치고 해야지.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 움직임을 분명하게 알고, 움직임이 시작하는 것과 끝나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나면 그다음에 자신이 분명하게 아는 것이 있습니다. 뭘 알게 될까? 뭘 알게 돼요?

(수행자 : 무상한 거) 예? 뭔 무상을 또 알아? 그런 현상을 지금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실재하는 것을 얘기해야 되는 것이지 마음으로 무상한 것을 아는 그거는 의미가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손을 이렇게 바닥에 딱 붙여놨다. 그래가지고 손을 싹 든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런데 들려고 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봐봐. 손을 들 수 있어, 없어? (수행자 : 없습니다) 없어요. 그럼 들려고 한다는 마음을 내고 나면, 그래서 '손을 들고자함' 하고 나서 손을 이렇게 딱 들어올리고, 그러고 나서 딱 멈추었다, 그러면 멈추었다고 분명하게 '멈춤' 하고 알고, 그다음에 또 내릴 때 어떻게 해야 되겠어? 내리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안 내려와집니다. 그래서 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나서 내리는 현상이 있습니다.

 

'멈춤'을 아는 것은 그와 똑같습니다. 배가 불러오고 나서 불러오는 전 과정을 딱 알고 나면 그 현상이 항상 계속될 순 없잖아. 어떤 것이든 변하게 돼있는 것이고, 변하려고 할 것 같으면 멈춰야 변해집니다. 그럼 딱 멈추는 걸 알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멈춤을 알게 되면 그다음에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뭐냐하면

, 마음이 앞서야만이 물질적인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압니다.

 

지금까지 그전에는 어떻게 따라갔느냐면 물질적인 현상이 어떤 형태로든 마음의 현상보다도 먼저 앞섰었습니다. 그러니까 배가 요만큼 불러왔으면 마음도 요렇게 따라가지고, 요렇게 물질적인 게 배가 불러왔으면 마음도 요렇게 따라가지게 되고, 지금까지는 마음이 이 물질적인 현상을 뒤따라갔는데, 그렇게 되다 보니까 이게 마음이 앞서는 줄을 전혀 몰라.

그런데 인제부터는 이게 역전이 되는 거라.

 

멈추는 것을 분명히 알면 마음이 먼저 앞서야만이 물질적인 현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의도가 있어야만이 물질적으로 불러오는 현상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때부터는 이 역전이 있게 되는 거라.

 

쉬운 거 같지만 이게 수행에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상태를 분명하게 알아야만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뭐로 넘어갈 수 있을까?

그렇게 됐다 치자. 그거는 할 수 있죠? 해보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수행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그냥 말하는 대로만 따라가겠다 생각하고 따라만 해봐. 그러면 금방 따라갑니다. 그런데 괜히 자기 식대로 하다 보면 안 돼. 그냥 따라해요.

 

그래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불러오는 현상을 전부 따라갔다가 '어, 멈추는 게 있네' 하고 나서 마음이 탁 일어남과 동시에 다시 물질적인 현상이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탁 되고 나면 그다음에 인제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배가 불러올 때는 불러온다는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다음부터는! 불러올 때의 각각의 '느낌'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때,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무상한 성품들을 알게 되고, 괴로운 성품들을 알게 되고, 무아의 성품들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배가 불러올 때 물질적인 현상이 마음이 앞서기 때문에, 마음은 얼마나 빨라요?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이렇게 꼭 전구의 필라멘트와 같습니다. 이 필라멘트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생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생멸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 눈에는 계속 들어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 단단한 대리석 아니면 돌들도 그 안에서 미립자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계속 충동이 있습니다. 그 충동이 없으면 그게 유지가 안됩니다. 물질 자체가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는 거라.

정신은 그거보다도 훨씬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 배가 불러오는 현상을 볼 때는 이 불러오는 것이 그냥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질 않습니다.

그걸 경전에서 비유를 해놓기를 "멀리서 보면 새끼줄 같은데 좀 더 가까이 가서 보니까 개미가 줄을 지어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게 새끼줄이 아니고 개미가 이동하고 있는 겁니다. 개미는 한마리 한마리가 이렇게 쭉 이어져서 이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각각이 틀립니다. 개미 한마리 그다음에 한마리 그다음에 한마리 이런 식으로 갑니다. 쉽게 말하면 배가 불러오는 현상이 그와 같이 보이게 됩니다.

 

물질적 정신적인 현상이 일어나면 배의 일어남도 한순간 일어나지고, 정신적인 관찰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물질적인 현상도 반드시 사라지고, 또 정신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나면 또 다른 물질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그래서 앞의 개미와 그다음의 개미가 다르듯이 물질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앞에 일어나는 것과 뒤에 일어나는 것이 다르게 됩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처음에는 일어나는 것이 몇 개로 구분돼서 보입니다. 이게 점점더 시간이 지나면 계속 쪼개집니다.

 

배가 불러올 때, 혹시 여러분들 바닷가에 가보면 파도치는 거 본 적 있을 겁니다. 파도가 한번 탁 치는 게 보입니다. 그런데 파도를 한번 가만히 보십시오. 똑같은 파도는 하나도 없습니다. 배가 불러오는 것이 파도 한번 탁 치고, 그다음 또 한번 탁 치고 세 번 보였다. 그다음 또 한번 파도가 탁 치는 것 같이 배가 불러오는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이게 세 번으로 보였다, 이게 각각 다 다르다는 사실로써 알게 됩니다. 그렇게 보여야 됩니다. 배가 불러오는 하나의 현상이!

배가 사라지는 것도, 배가 꺼질 때 사라지는 현상도 그와 같이 보여야 됩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이 현상들이 쭉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으로 분명하게 구분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구분이 되면 정신적인 현상도 조건 따라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이고, 물질적인 현상도 조건 따라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이라는 거라. 배의 하나의 불러오는 것이 세 가지로 구분이 됐을 때는 한 가지는 조건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거고, 또 하나도 다른 조건으로 인해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또 하나도 다른 조건으로 인해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것까지는 적어도 가야 돼.

요 상태가 됐을 때가 실제적으로 위빳사나 수행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배가 불러올 때 배가 일어나는 느낌이 동일하게 안 보입니다.

배를 한번 쭉 불러오는 느낌을 한번 보십시오. 똑같은가? 배가 쭉 불러오는 것이 내내내 똑같은 느낌으로 와요? 팽창하는 느낌으로? 그렇진 않습니다.

가끔씩 수행하다 보면 배가 불러오는 순간에 어떨 때는 요쪽 오른쪽 옆구리 쪽에서 뜨끔 하는 느낌이 있고, 또 요쪽 옆에서 움찔 하는 느낌이 있고, 하나의 불러오는 것도 느낌이 각각 다릅니다. 그거는 그 조건에 따라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그런 느낌들이 끊임없이 쭉 일어나는 게 보여야 돼.

 

그렇게 되면 적어도 이 현상이 아!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은 조건따라 일어났다가 조건따라 사라진다는 걸 알게 되고,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은 똑같은 게 아니다 하고 알게 됩니다.

왜? 배가 불러온다고 알다가도 뭔가 탁 소리가 들리면 마음은 이미 벌써 거기에 탁 가버립니다. 다른 조건으로 인해서 마음은 그 새로운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럼 그 원리를 알 거 같으면 그다음부터는 크게 육체적인 현상들이나 정신적인 현상들에 대해서 마음이 안 끌려갑니다.

 

졸음이 온다든지 아니면 통증이 온다든지 망상이 일어난다든지 크게 영향을 안 받는 거라. 왜? 그것도 다 조건따라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인 줄로 알고 있는 거라. 하나의 현상만 봐도 그게 다 알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그게 크게 나한테 영향을 안 미치쳐. 영향을 안 미치면 어떤 것이든 지 스스로 딱 사라지게 되는 거라.

대상은 영양분을 받을 것이 없으면 그대로 죽어버리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딱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망상이 일어나면 '망상'이라고 알아만차리더라도 망상이 확 사라져버립니다. 통증이 있다, '통증' 하고 알아만 차려도 통증은 확 사라져버립니다.

이 실재하는 통증에 영양분을 더 이상 주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그렇게 됐을 때 인제는 수행이 아주 재밌어집니다.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집니다.

그것이 당분간 계속적으로 지속 돼야 됩니다. 만약에 이 패턴대로 가다가 또 안된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또 돌아올 수도 있고 아니면 중간부터 다시 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이 과정들을 지속적으로 계속해야 됩니다.

 

그대신에 그렇게 하다가 수행이 잘 계속 그렇게 해나가면 좋은데 여러분 같은 경우에는 계속 그렇게 수행만 하고 있을 순 없잖아. 앉아만 있을 수는 없잖아. 뭔가를 해야 되기 때문에. 그리하더라도 그 경험을 하고 나면은 다른 일을 하더라도 그것들로 인해서 크게 영향을 안 받습니다. 평온한 마음 그대로 유지를 해나갑니다.

왜? 그 어떤 것에도 실제 존재하는 것, 실재하는 것, 뭔가 변하지 않는 실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 하든 아니면 내가 뭔가를 하고 있을 때 실수를 저지르든 크게 대범하게 이게 영향을 안 미칩니다. 마음은 계속 고요하고 잔잔한 상태를 유지를 해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다가 수행에서 실재하는 그 성품들이 보이지 않으면은 그 즉시 그 수행은 중단을 하라는 거라.

만약에 예를 들어서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데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한시간 내내 이것밖에 모른다, 바보같은 짓 계속하지 말아라는 거라. 딱 멈춰라는 거라. 멈추고 나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라.

그럴 때 몸 그리고 마음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보통 잘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일어남' '사라짐' 하다가 그게 지속적으로 계속 오토매틱화가 되고 있다. 그럼 딱 중단하고 실재하는 것이 뭐가 있어요? 앉아있을 때? 호흡 말고 손이면 손이 닿아있는 거고, 엉덩이가 닿아있으면 엉덩이가 닿아있는 거고, 눈이면 눈꺼풀이 닿아있는 거고, 실제 닿아있는 걸 봐야 되는 거라.

 

그럼 마음을 어디다 두어야 돼? 거기에다 두어야 되는 거라. ', 눈꺼풀이 닿아있네' 닿아있는 걸 그냥 아는 거라. 닿아있는 느낌.

'입술 닿아있네' 입술 닿아있는 느낌을 아는 거라, '손이 닿아있네' 손이 닿아있는 느낌을 아는 거고.

 

그냥 차례대로 하나씩 그것만 관찰하고 있어도 마음은 대상을 붙잡지도 않고 밀어내지도 않고 그냥 대상을 따라가버리고 있는 거라. 그러고 나서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는 거라.

그러면 호흡이 다시 정상적으로 일어날 때 일어나는 성품들을 분명하게 알고, 사라지면 사라지는 성품들을 분명하게 알고, 그렇게 자꾸 해야 됩니다.

 

하다가 보면 만약에 삼십분 한다 아니면 한 시간 한다 그 시간 동안에 무수하게 반복돼야 됩니다.

 

다시 또 제자리로 돌아와가지고 몸이 고요하게 되도록 하고 마음이 고요하게 되도록 하고, 몸이 고요하게 되지 않으면 '어, 긴장된 곳이 없는가' 하는 걸 알아차리고. 그리고 마음에서 닿아있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그래서 '일어남' '사라짐' 대신에 앉아있으면서 몸이 긴장돼있는 걸 분명하게 관찰하고, '닿음'하면서 닿아있는 것들을 관찰하도록 하고. 그래서 '앉음' '닿음' '앉음' '닿음' 하면서 지속적으로 해나갑니다.

 

앉아있으면서 몸의 긴장을 풀고 '닿음' 하면서 닿아있는 실재적인 성품을 보고, 그다음에 또 앉아있는 걸 보고, '닿음' 할 때는 두 번째 다른 닿아있는 부분을 보고.

이런 식으로 '앉음' '닿음1', '앉음' '닿음2', '앉음' '닿음3', 이런 식으로 지속적으로 자꾸 해나갑니다.

 

계속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잘되면 다시 또 호흡으로 돌아오라는 거라. 그렇게 해야만이 수행할 때 시간을 허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위빳사나 수행하기 때문에

성품은 '움직임'을 분명하게 알든지,

'그 움직임의 시작하고 끝나는 것'을 분명하게 따라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움직임들이 끝나는 멈춤'을 분명하게 알든지,

그리고 '그 움직이는 것에서 일어나는 각각의 성품들 느낌들'을 분명하게 알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느낌들이 변하는 것'들을 알든지,

이 다섯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그외에 알고 있는 것들은 전부 개념이고 명칭을 가지고 자꾸 실재하지 않는 것들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할 수 있죠? (예)

 

수행자 질문 : 호흡을 할 적에 의도가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그게...

스님 : 의도가 없으면, 호흡에서 의도를 안 하면 호흡을 할 수가 있습니까?

수행자 질문 : 호흡을 하다 보면 의도가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스님 : 그런데 중요한 부분은 그겁니다. 생명이 있는 한은 호흡은 내가 의도를 하든 안 하든 호흡을 하게끔 돼있습니다. 오토매틱화 돼있습니다. 그렇지만 엄밀하게 따져볼 것 같으면 그 오토매틱화 되어있는 것도 내가 쉬고자 하는 잠재되어있는 의도가 없을 거 같으면 그걸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얘기할 것 같으면 의도가 있어야만이 호흡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단지 우리가 처음에 수행을 할 때 배를 관찰하라 하는 이유는 뭐냐면 다른 것들은 내가 의도를 내야만이 그것들이 일어나지는데 이 호흡은 자동적으로, 호흡은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하게 돼있기 때문에 그래서 가장 수행하기 용이하기 때문에 이걸 일차적인 것으로 잡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수행을 열심히 하다 보면 이 호흡을 하는 것도 의도가 없으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왜? 삼매에 들어갈 것 같으면 그 호흡이 딱 정지를 합니다. 호흡하는 의도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은 10분이고 20분이고 호흡 안 하고 있어?

 

수행자 질문 : 그런데 호흡이 잘 될 때는 의도 없이 저절로 되는 것 같은데, 마음이 좀 허하고 할 때는 의도가 좀 들어가는 것 같더라고요.

스님 : 정확하게 얘기하면 의도가 있어야만이 호흡을 합니다. 그리고 수행이 무르익고 잘 되면은 그 삼매의 상태에 들어서 호흡이 정지하는 상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호흡은 가늘어지고 느려집니다. 그래서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 1분에 호흡을 하는 것이 보통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한번으로 쳤을 때 16번 17번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이게 더 느리게 됩니다. 더 느리게 쉬는 거라. 그마만큼 가늘어지고 느려집니다.

그거는 왜 그러느냐 하면 호흡은 내가 자동적으로 오매틱화만 돼있다고 할 것 같으면 내 마음대로 그렇게 조정이 되는 게 아닙니다. 항상 그렇게 하게끔 돼있습니다. 정상적일 때는. 그런데 의도가 있기 때문에 항상 그것은 조절이 가능해진다는 거라.

 

수행자 질문 : 스님, 의도가 있는데 왜 무아(無我)라고 그럽니까?

스님 : 그 의도도 조건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의도도 그 의도 지 혼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상이 있어야만이 의도가 일어나집니다. 만약에 이 대상이 있어야만이 볼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 이 대상이 없는데 볼려고 하는 마음이 생깁니까? (수행자 : 그렇게 못합니다.)

그것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경우든지 조건이 형성됐을 때 의도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멈추는 현상이라는 조건이 있기 때문에, 멈추어 있을 경우에는 그다음에는 다시 뭔가가 일어나야 되기 때문에 의도가 일어나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의도도 쉽게 말하면 내가 있어가지고 그 의도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조건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지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약에 여러분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으면 소리를 아무리 들을려고 아무리 의도를 내더라도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소리가 없기 때문에. 그 조건이 없기 때문에 의도를 내더라도 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의도가 '나'라고 할 것 같으면 내가 목소리 듣고 싶은데 왜 못듣겠어요? 환청이라도 만들어 들어야지. 그런데 안 들리는 거라. 그거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나 일 거 같으면 반드시 내 마음대로 뭔가를 할 수가 있어야 되는데 그렇게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그래서 의도는 내가 아닙니다. 의도는 단지 정신적인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수행자 질문 : 스님, 저는 배를 볼려고 하면 배가 부르고 꺼지는 게 잘 안 보여지더라고요. 그래서 그것을 볼려고 의도적으로 배를 불렸다가 ...

스님 : 안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호흡은 자연스러워야 됩니다.

수행자 : 그래서 불러올 때는 볼 수 있는데 꺼질 때는 도저히 보이지 않아서...

스님 : 보지 말아요 그럼. 안 보이는 걸 억지로 볼려고 해요?

수행자 : 그래서 차라리 여기 보는 게 나아요. 코하고...

스님 : 그 대신에 그걸 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걸 자주 바꿔서는 안되고

수행자 : 하나로만 정해서 봐야 됩니까?

스님 : 예. 한 포지션에서 만약에 삼십분 동안 좌선수행을 한다, 그럼 호흡, 코를 봤으면 코를 계속적으로 봐야 됩니다. 그다음 시간에 만약에 내가 배를 보겠다 할 것 같으면 배를 봐야 되는 거고, 그래서 한 포지션에서는 하나씩 보도록 하고, 그것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로써 고정이 됩니다. 좀 더 잘 보이는 쪽으로.

만약에 배가 안 보인다, 자기 배를 이렇게 볼 수는 없기 때문에 뭐를 대야 돼요? 손을 이렇게 대보면 분명 불러오고 꺼지는 게 보입니다. 그러면 그냥 배에다가 손을 대고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잘 보이는 쪽으로 자기 스스로가 만들면 되는 것이지, 이게 지금 하고 있는데 단지 내가 그걸 느낌으로만 알려고 하기 때문에 그걸 모르고 있는 것뿐입니다.

 

수행자 : 의도적으로 제가 불렀다가...

스님 : 안됩니다. 그거는 몸을 버립니다.

수행자 : 그러면 만약에 오늘 세 시간을 할 경우에 한시간 한시간으로 끊어가지고 한시간은 코와 코 사이를 보고 그다음 한시간은 배를 보고 이렇게 나눠가지고 보면...

스님 : 성품이 좀 빠른 성품이라? 성질을 잘 부리는 성품이라?

수행자 : 제가 예? 저는 그냥 좀 게으르죠. 잠도 많이 자고.

스님 : 그러면 한 시간은 요거하고 한 시간은 저거하고 해도 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 것도 되도록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대신에 한번 정했으면 사실은 똑같습니다. 코끝을 보든 배를 보든 동일한 겁니다. 그래서 그냥 하나 쭉 하면 됩니다. 코를 잡았으면 그것이 안 보일 것 같으면 여기다가 뭐 마스크를 쓰고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배를 할 것 같으면 배에다가 손을 올려놔놓고 당분간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 현상에 분명하게 마음을 갖다 놓을 수 있도록 먼저 만들어 놓아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지 그걸 일부러 볼라고 호흡을 크게 하고 하면, 그것은 쉽게 말하면 그 수식관이라 해가지고 천태지관법에서 쓰는 수행법입니다. 수를 센다든지 호흡을 길게 하고 짧게 하고 한다든지, 그것은 불교적인 수행에서 변형된 겁니다. 그래서 그건 전통적인 수행법은 아닌 거고, 그대신에 어느 정도 수행이 진행이 되고 나면 호흡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길게 쉴 때도 있고 짧게 쉴 때도 있고 그거는 자연적인 현상에서 길게 쉬어지고 짧게 쉬어지고, 그리고 나타나는 성품에 따라서 호흡이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기 때문에 길어지면 길어진다고 알고 짧아지면 짧아진다고 알게 되는 것이지 내가 인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라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 질문 : 잡념이 생길 경우에 예를 들면 호흡을 보다가 어제 만난 친구하고 대화의 내용이 생각나잖아요. 그럴 때 가슴의 느낌을 보라고 한 것 같은데...

스님 : 어제 만난 걸 지금 왜 떠올려?

수행자 : 갑자기 떠오른다니까요.

스님 : 생각이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자 : 가슴의 느낌을 많이...

스님 : 지금 그걸 볼 수가 있을 거 같으면 되는데, 지금 생각이 일어난다면 가슴의 느낌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여기에 둘 필요는 없고, 생각이 일어났으면 마음은 여기에 두어야 되는데, '생각이 일어남' 하면서 스스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수행자 : 알아차리고 다시 배로 돌아오고..

스님 : 예. 그렇게 해야 되는데, 명심해야 되는 거는, 가끔씩 운전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얘기가, 막 바쁘게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라고 하느냐면 “어제 출발하지, 왜 이제야 출발했어?” 그럽니다. 바쁠 이유가 없는데 괜히 바쁜 거라. 오늘 지금 차 몰면서 어제 거를 왜 또 들먹여.

 

수행자 : 그런데 스님 제가 옛날에 산책을 하면서 한번 한 적이 있었거든요.

세 시간을 앉아가지고 호흡을 바라봤는데 호흡보다는 잡념이 계속 생겨가지고...

스님 : 절대 처음 수행할 때는 세 시간이고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자기한테 맞는 시간을 정하십시오. 수행은 고행이 아닙니다. 큰일납니다. 그거는 사람을 잡을라고 하는 것이지, 그걸 '아나리요(anariyo)'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다. 그러니까 고행은 수행의 길이 아니다. 고행과 쾌락을 즐기는 것은 중도에 해당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건 양극단입니다. 그래서 그걸 갖다가 아나리요(anariyo)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리요(ariyo) 할 것 같으면 알죠? '아리요'의 반대말이 '아나리요' 입니다. 그래서 고행하라고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 질문 : 그럼 한 시간 좌선수행하고 한 시간 경행하고 그걸 지켜라는 말씀입니까?

스님 : 반드시 좌선과 경행은 동일한 비율로써 하는데 자기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도록 해야 됩니다.

물론 파욱 수행센터나 순륜 수행센터 같은 경우에는 억지로 두시간씩 세시간씩 시키기도 하고 호흡을 크게 하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스님은 그거 추천 안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대상에다가 마음을 갖다 붙이기 위한 처음의 훈련이지, 그걸 계속적으로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거기서도 처음에만 그렇게 시키고 나서 한달 지나고 나서는 정상적인 상태로 다시 돌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해도 대상에다가 마음을 갖다 붙일 수 있는 방법, 자연적인 방법이 많은데 뭐하러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절대 고행하지 마십시오.

그거는 남한테 내보이기 위한 것이지 그건 절대 수행이 아닙니다.

 

또 질문?

수행자 : 지금 질문하는 시간입니까? (하하하)

스님 : 그럼 뭐 하는 시간이라?

수행자 : 아니 저는 법문해야 되는 시간이지...

스님 : 질문하면 답하고 지금 법문하고 있잖아.

 

수행자 질문 : 저는 만약에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 호흡에다 두고, 바로 했을 때는 배관찰이 안될 때는 코 인중을 좀 보다가 보일 때는 어느 정도 한 10분에서 20분 정도 집중이 된다 싶으면, 그다음에 몸에서 가장 강하게 일어나는 현상이 있으면, 통증을 보고 그쪽으로 이동을 시켜서 그 통증을 깊이 보는 습관이 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거의 1시간 15분 정도까지 바로 안 사라질 때도 있는데,

요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보는 방법으로 지금 수행을 하고 있는데...

 

스님 : 올챙이가 올챙이 역할을 해야 되는데 개구리 역할을 할려고 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거는 어리석은 거라. 통증을 관찰해가지고 금방 사라지는 상태일 거 같으면 그 통증을 관찰해도 됩니다. 또 망상도 망상을 관찰해가지고 망상이 금방 사라진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을 관찰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두 개가 개입이 됩니다.

그 통증을 관찰하는데 '나'가 개입돼있든지, 그리고 통증이든 망상이든 그것을 관찰할 때 집착하고 싫어하는 마음 중에 둘 중에 하나가 개입돼있든지. 그래서 감정과 ''라고 하는 것 둘 중에 하나가 개입돼있든지 아니면 두 개가 다 개입돼있을 거 같으면 그 현상은 오래갑니다.

 

그러면은 그 현상을 관찰하는데 그 현상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오래가고 있다 그러면 그걸 대상으로 해야되는 것이 아니고, ''라고 하는 것이 거기에 있는가, 없는가? 그렇지 않으면 감정, 좋아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요걸 먼저 보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 먼저 떨어뜨리고 나서 다시 그 대상으로 다가가도 가야 되는 것이지, 어리석게 이 두 개나 아니면 두 개 중에 하나가 개입돼있는 상태에서 그걸 계속할 거 같으면 그건 한시간이 아니라 두시간 세시간을 해도 계속 그 현상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왜? 두 개 중에 하나가 개입돼있으면 그 현상은 계속되게 되고, 두 개가 다 개입돼있을 거 같으면 그 현상은 증폭되게 됩니다.

그럼 바보 같은 짓이지. 그거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통증이 있을 경우에는 '통증' 하면서 알아차릴 때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거 같으면 요것이 통증이 싫다는 마음 없이 그냥 통증을 대상으로써만 알아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그냥 통증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 통증이 소르륵 사라집니다. 그게 일반적인 겁니다.

 

그런데 통증 이게 '아 이 미운놈, 싫은놈' 하는 마음이 딱 일어났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 밀어낼려고 하는데 얼른 밀려나려고 하겠어? 지는 안 밀려날려고 하지. 버티게 되는 거라. 그러면 통증은 계속 남아있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돼.

그럴 때는 그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그럴 것 같으면 '어? 내가 지금 통증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걸 먼저 보라는 거라.

 

그래서 그럴 때 마음이 고요한가 아니면 심념처 수행하는 사람들은 '통증 이놈이 어디있지?' 하고 알아차리는 거라. 피부에 있나? 아니면 요쪽에 있나? 아니면 깊숙히 있나? 하고, 그거는 뭐냐면 싫어하고 좋아하는 마음들을 떨어뜨리기 위한 방편이라. 그렇게 해야만이 통증이 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거라. 반드시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감정,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나! 나라고 하는 것이 그것을 관찰하는데 있는지, 없는지? 또 이 두 개가 결합된 것인지 아닌지? 결합돼있으면 먼저 떼야 되는 거고, 하나만 있으면 하나 그거를 갖다가 제거를 하고 나서 대상을 관찰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리하면 그 대상은 빨리 사라집니다.

 

그런데 대상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남아있는 대상이 망상이나 이런 통증이 아닙니다. 졸음입니다. 탐·진·치 중에 어떤 게 뿌리가 강할까? 치 입니다.

탐심, 진심 이것은 통증과 망상의 형태로 나타나집니다. 치심은 졸음으로 나타나집니다. 그래서 졸음은 다른 거보다 그걸 관찰하는 게 조금 더 오래갑니다. 그래서 다른 것들은 통증이면 '통증'이라고 알아차리는데, 졸음은 '졸음' '졸음' '졸음' 해가지고 알아차리면 그거는 백발백중 다 실패합니다.

 

그래서 졸음이 올 때는 분해해서 알아차려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따가움' 그다음에 '무거움' 그다음에 '쑤심' 그다음에 '누름' 이런 식으로 분해하라는 거라. 통증의 길이 있기 때문에 그 통증을 따라서 무거우면 무겁다고 분명히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그리고 쑤시면 쑤신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따가우면 따갑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그렇게 알아차리라고 얘기합니다.

 

그거는 왜 그러느냐면 졸음이 다른 거보다도 더 오래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속되더라도 그렇게 분해해버리면 다른 거와 마찬가집니다.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에 따갑다고 알아차릴 때는 졸음이 안 몰아지고 있는데, 쑤신다고 알아차릴 때 그걸 분명하게 볼 거 같으면 '쑤신다'고 아는 순간에 확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통증이든 망상이든 졸음이든 그것이 사라질 때는 그냥, 뭐 깨끗해진다고 해야 하나? 어떨 때는 뒤통수에서 구멍이 뚫려가지고 바람이 확 지나가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이 몸에 있는 게 어떤 사람들은 업이 정화되는 느낌이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뭔가가 싹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라든지, 아니면 몸에 있는 뼈마디가 확 보이는 느낌이라든지, 이렇게 정화되고 깨끗해지고 하는 느낌으로 탁 와집니다.

그 느낌이 와지면 이것은 다 사라져버리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도 왔다가 가집니다. 이해가 됐습니까?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