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구·울주선원 수행법문

느낌을 바르게 알아차리는 법 (20150313.대구)

담마마-마까 2021. 10. 25. 09:10

https://youtu.be/1-44K25NweU

* 느낌을 바르게 알아차리는 법 (20150313.대구)

 

프린트물 나간 것 중에 못 한 것은 한 것으로 간주를 합니다. 그것 가지고 계속 뒤로 늦출 수가 없으니까 다 이해를 한 것으로 진행을 하고, 다음에 또 필요하면 그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질문이 있으면 설명을 하고 이렇게 합니다. 프린트물 나간 것 중에 또 시간관계상 다 못한 경우도 그것도 다 한 것으로 간주를 합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프린트물은 가져가서 반복해서 자꾸 읽어야 됩니다.

 

오늘은 느낌에 대한 것들입니다.

여러분은 느낌이 있죠? 느낌이 없는 때는 언제입니까? (수행자 : 잘 때) 잘 때? 잘 때 느낌이 없다? 잘 때 그럼 없다고 칩시다.

또 언제 느낌이 없어요? (수행자 : 망상할 때) 망상할 때 느낌은 있습니다. 망상할 때 가슴을 딱 보면 가슴에서는 느낌이 굉장히 강합니다. 오히려 무언가 봤을 때의 느낌보다도 오히려 훨씬 강합니다. 그래서 망상할 때 느낌이 없다는 것은 사실은 가슴으로 관찰하지 못했기 때문에 느낌이 없다고 아는 것뿐이고, 망상할 때는 느낌이 있습니다.

잘 때는 사실 느낌이 없습니다. 그건 맞습니다.

 

또 언제 느낌이 없을까? (수행자 : 생각없이 멍때리고 있을 때) 멍때리고 있을 때?

게으를 때 하고 생각이 없을 때 하고는 좀 다릅니다. 게으를 때는 틀림없이 느낌이 있습니다. 굉장히 답답한 느낌들도 있고 하기 때문에.

그런데 생각이 없을 때는 게으른 것이 아니다 라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사실은 무덤덤한 느낌입니다.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닌데 관찰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게으른 것은 아닌데 그냥 멍-하게 있는 상태일 것 같으면 느낌 관찰은 그거는 못합니다. 그건 안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느낌을 관찰할 때는 두 가지만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그러니까 무덤덤한 느낌은 요 관찰대상에서 쏙 빠져버리죠.

그런데 무덤덤한 느낌이 관찰 대상에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아까 잠잘 때 느낌이 없다는 거와 마찬가지로, 잠잘 때 또 그다음에 무덤덤할 때.

또 언제 느낌이 없을까? 죽었을 때! 느낌이 당연히 없겠죠? 마음이 떠나버렸으니까. 느낌은 육체적인 부분이 아니죠? 정신적인 부분이죠! 정신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마음이 떠나버린 육체에는 그 느낌이 없습니다.

또 언제일까? 도와 과에 들었을 때! 안 들어봤으니까 모르겠죠? 도와 과에 들었을 때 느낌이 없습니다. 또 열반의 상태일 때 느낌이 없습니다. 이럴 때는 느낌이 완전히 없습니다.

 

그런데 느낌이 있는 게 좋을까, 느낌이 없는 게 좋을까?

열반하고 도와 과만 얘기 안 했으면 느낌이 있는 게 더 좋았을 건데, 딱 요거 들어버리니까 아리송해져 버리지? 어떤 게 좋아요? 느낌이 있는 게 좋아요? 느낌이 없는 게 좋아요? 얼른 답해봐?

(수행자 : 있을 때가 공부를 할 수가 있으니까 좋지 않겠습니까?)

느낌이 있을 때? 한번 물어보자. 느낌이 있을 때 손들어 봐봐요. 느낌이 없을 때 손들어 봐봐요. 손 안든 사람은 뭔데? 대부분 사람들은 아마 느낌이 있을 때가 좋다고 얘기할 겁니다. 그마만큼 인간들은 감각적인 것들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런데 느낌이 없을 때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보면 고요한 걸 즐기는 사람들 같은 경우는 느낌이 없는 것이 좋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아까 잠잘 때 느낌이 없다고 그랬는데 잠 진짜 잘 자고 나면 탁 깨어나서는 뭐라고 그래요? 아! 잘잤다! 개운하다! 이럽니다. 탁 깨어났을 때 그 느낌이 그렇다는 거라. 어찌 보면 느낌이 없는 것이 느낌이 있는 것보다도 훨씬 좋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잠잘 때도 사실은 느낌이 있을 때보다도 더 좋습니다.

 

왜? 느낌이 있을 때는 대부분 그 느낌들은 그 느낌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으라고 할 것 같으면 아마 다들 5분도 못가서 그 느낌들이 괴로운 느낌으로 바뀌어버릴 거라. 아무리 맛있는 것이든 아무리 좋은 소리든 계속 들을 것 같으면 그렇게 돼버리는 거라. 그런데 느낌이 없을 때의 행복은 떠올릴 때마다 그것은 행복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잠자고 나서 아무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도‘아, 좋다’ 하고 하는데, 도와 과에 들었을 때는 어떨까? 아무 느낌이 없는데도, 훨씬 크겠죠? 그 행복은.

 

그래서 감각적인 것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행복보다도 천신들이 누리는 행복이 더 클 거고, 천신들이 누리는 행복보다도 선정에 들었을 때의 행복이 훨씬 더 클 거고, 그것보다도 도와 과에 들었을 때의 행복이 훨씬 더 클 거고, 그것보다도 열반에 들었을 때의 행복이 훨씬 더 큰 것이다. 그래서 가장 큰 행복은 열반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행복이 가장 최상의 행복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좋은 것들은 보니까 느낌이 없는 것은 언제부터 입니까? 선정에 들었을 때도 느낌은 있습니다. 착각하면 안됩니다 이!

도와 과, 그리고 열반!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성인의 경지에 들었을 때 탁 그것을 증명해주는 과정에 딱 들었을 때 일어나는 마음들은 느낌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 행복은 참 누리기 힘든 것들이고, 그리고 그것은 찰나 간에 지나가지만 그것은 떠오를 때마다 크나큰 행복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그 상태를 계속적으로 즐길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수다원에 이르르고 나면 그 이하의 상태로 떨어지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그걸 맛봤는데 어느 누가 그 밑에 떨어질려고 할 거야? 그게 떨어질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안돼! 이미 물살을 탔기 때문에 거스를 수 있는 조건이 안돼. 의심하는 것들도 없어지고, '나'라고 하는 견해들도 없어지고,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그 물살을 타고나면 물살을 거스를 수 있는 조건이 안 되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잠시 멈춰설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물살을 타고 계속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거라. 물살을 비유하지 않더라도 그 행복을 뛰어넘는 더 좋은 행복을 바라는 것이지, 그 아래 것들의 행복은 그것에 비하면 형편없기 때문에 안 하려고 한다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런 행복은 저기 하늘에 떠있는 구름 같고 지금 현재는 조그만한 행복이라도 얻을려들 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조그마한 행복을 얻을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조그마한 행복이라도. 사람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느낌이 있다는 겁니다. 느낌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느낌이 왜 수행대상이 되느냐?

 

참 단순한 질문인데, 이렇게 보면 됩니다.

느낌이 먼저입니까? 그 느낌을 아는 마음이 먼저입니까? 느낌이 먼저죠!

그러면 느낌이 있으면 느낌이 있다고만 알아차릴 것 같으면 딱 좋아. 느낌이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그 아는 마음은 느낌에 대해서 좋은 것은 집착할려고 하고, 싫은 것은 던져버릴려고 한다는 거라. 이때가 될 것 같으면 그 느낌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가 힘이 드는 거라.

 

그러니까 느낌을 아는 마음은 느낌 이후에 일어나게 돼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후에 일어나는 마음을 관찰하는 것도 관찰하고 나면 사그라지는데 이거는 이미 증폭된 상태이기 때문에 힘이 드는 거라. 그런데 이 느낌은 대상하고 접촉만 있을 거 같으면 바로 일어나는 게, 그다음 일어나는 게 느낌이라는 거라.

이게 느낌이기 때문에 이것만 관찰할 거 같으면 증폭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이게 관찰 대상으로써 굉장히 용이한 조건을 타고났다는 거라. 왜곡되기 전의 단계들을 관찰하는 것들입니다.

 

수행은 어떻게 한다고요?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겁니다. 그걸 내가 왜곡시킬려고도 하지 않고 변형시키지도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있는 그대로 되지 않고 붙잡고 있든지 뭘 하고 있을 거 같으면 그거 떨어뜨려내고 나서 관찰을 해야 되는 거라. 그게 수행의 기본인데, 이 느낌이라는 놈은 이미 그 자체가 딱 있는 그대로라. 그래서 요걸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수행자 질문 : 그럼 그게 맨느낌이라는 그런 겁니까?

스님 대답 : 일부에서는 맨느낌, 육체적인 느낌, 정신적인 느낌 그렇게 얘기들을 합니다. 그런데 육체적인 느낌도 맨느낌으로 바뀌는 것이고, 정신적인 느낌도 맨느낌으로 바뀌어지는 겁니다. 관찰을 할 동안에는. 그렇기 때문에 그걸 굳이 맨느낌, 육체적인 느낌, 정신적인 느낌 그렇게 구분할 필요는 없이, 대상을 떨어뜨려서 있는 그대로 보면 그 느낌 자체로 보게 됩니다. 그 느낌 자체로!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편합니다.

 

그러니까 용어상으로는 맨느낌, 육체적인 느낌, 정신적인 느낌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수행대상으로는 동일한 느낌입니다. 아무리 그게 정신적인 느낌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것 같으면 그냥 느낌일 뿐입니다. 그 느낌은 단지 좋은 느낌, 싫은 느낌이라는 것뿐인 것이지, 그냥 느낌일 뿐입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면 되겠습니까? (예)

 

자! 그럼 느낌을 관찰하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느낌은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감각기관을 통해서 뭔가가 탁 접촉이 있을 때 느낌은 일어나죠!

여기 바리때가 있다, 바리때라고 하는 대상, 바리때를 보는 것은 귀로 보죠? 아니죠? 눈으로 보죠! 귀는 귀 자기의 역할만 하는 것뿐이지 절대 이걸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바리때를 보는 것은 눈입니다. 눈과 이 바리때가 탁 만나는 순간에 느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럴 동안에는 귀는 어떤 경우든지 이걸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럼 이걸 볼 때는 귀를 신경 쓸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귀는 그 기능을 할 수 없는 거기 때문에. 냄새 맡을려고 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볼 때는 그래서 그냥 보기만 해야 됩니다. 보기만 해야 되는 것이지, 이걸 열어둔 상태에서 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걸 100프로 여기다 갖다 넣어도 이걸 지금 알아차릴동 말동 하는 판에 이거 괜히 신경 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수행을 할 때 경행을 하고 있는데 보고 듣고 하는 것들은 신경을 쓰지 말아야 된다는 거라. 의도적으로라도 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경행을 이렇게 쭉 하다가 저 벽에 부딪친다. 틀림없이 자기는 저기에 부딪치는지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마음은 어디에 두어야 됩니까? 발바닥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냥 발이 부딪치면 부딪친다고만 알아야 되는 것이지, 본다고 자꾸 생각할 필요 없이 미리 자기가 거절해서 탁 멈출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거라.

 

왜? 이 기능은 이 기능밖에는 하지 못해. 이 기능은 이 기능밖에는 또 못하는 거고. 그럴 것 같으면 볼 때는 반드시 볼려고만 해야 됩니다. 그걸 자꾸 훈련을 해야됩니다.

이렇게 듣고 있으면서 눈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떨 때는 내가 듣는데 마음을 완전하게 몰입하고 있으면은 앞에 대상이 아예 없습니다. 없어져버립니다. 순식간에!

보는 의식-마음이 아예 없기 때문에 들리는 데만 마음이 가 있으면 온전하게 들리기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내 얼굴을 보고 있어도 저사람이 나를 진짜 보고 있는지 안 보고 있는지가 표가 나게 되는 겁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보면 손이 이리 가면 손을 따라갑니다. 소리 듣고 있으면서. 그러니까 '보면서 듣고' 하고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수행을 할 때 어떤 경우든지 하나만 해야 됩니다. 하나만! 왜? 그거 외에는 다른 것들은 역할을 못하기 때문에.

 

자! 그렇게 해가지고 봤다, 그럼 이게 보입니다. 그러면 느낌이 탁 일어난단 말입니다. 느낌이 일어나는데 그냥 '보인다'고만 알아차릴 것 같으면 보이는 대상만을 아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게 '보인다' 하고 아는 상태에서 '좋고 싫은 마음'이 거기에 탁 들어가버릴 것 같으면 '어! 이것을 내가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기 전에 '아! 이것은 무슨 색깔의 발우다, 바리때다' 하고 알게 된다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이미 나는 알아차릴 때 '붉은 색깔의 바리때'라고 알게 되든지, 아니면 이 바리때를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났든지 이렇게 돼버립니다.

 

그럼 내가 알아차릴 때는 어떤 것이 쉬워요? '보인다'고 알아차리는 것이 훨씬 쉽다는 거라. '붉은 색깔의 바리때'라고 할 때는 이미 내가 사사분별을 하게 돼있습니다.

나는 이걸 붉은색으로 봤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붉은색이 아니고 푸른색으로 보일 수도 있는 거고, 각자의 견해가 다 다른데 나는 붉은색이라고 봤다는 거라.

그리고 이것이 '내 것이다' '넘의 것이다' 판단이 서고 나면 이걸 집착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까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느낌은 갈애를 일으키고, 갈애는 집착을 낳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발전해나갑니다. 갈애가 일어났을 때도 갈애를 끊고 나서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집착이 일어나더라도 집착을 버리고 나서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붉은 색의 바리때다 하고 알아차리지 말아라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것을 갖고 싶다 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말아라는 것도 아닙니다. 알아차릴 때는 동일합니다.

 

'보인다'고 알아차릴 때의 마음은 고요한 상태로써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붉은 색깔의 바리때다' 하고 알아차릴 때는 사사분별이 이미 들어가버렸기 때문에 '붉은 색깔의 바리때로써만' 알게 됩니다.

또는 '갖고 싶다는 마음'으로써 이미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될 때는 '그것을 갖고 싶다는 집착에 대한 것으로써'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럼 이걸 버려버려야 됩니다.

 

그러면은 그것을 버려버린 상태에서 갖고 싶다는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들을 갖다가 내려버리고 그냥 '보인다 하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갖고 싶다고 할 때도 '갖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났구나' 하고 알고, '보인다' 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붉은 색깔의 바리때로 보이더라도 '붉은 색깔의 바리때로써 알아차렸구나' 하고 알고 나서, 다시 '보인다' 하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두번 아니면 세 번의 단계를 거쳐가지고 '보인다' 하고 알게 되는 거라.

그마만큼 진행이 되면 될수록 어려워지는 거라.

 

자! 그런데 있는 그대로 느낌을 알려고 할 거 같으면 그 느낌을 알아차릴 때 바로 알아차리기는 참 힘이 듭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집착하고, 갈애가 일어나고, 집착하는 것들이 일어나는 것이 기본적인 패턴입니다.

 

그럼 그걸 끊기 위해서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 이 느낌에 대한 관찰의 기본 포인트입니다.

 

이렇게 해보십시오. 수행을 시작할 때 먼저 고요하게 탁 앉아 있을 거 같으면 앉아 있을 때 '지금 내가 몸이 긴장된 것이 없는가' 하는 것을 먼저 분명하게 쭉 알아차려 보십시오.

그러고 나서 몸이 접촉하고 있는 부위를 알아차려 보십시오.

'오른쪽 눈꺼풀' 하면서 오른쪽 눈꺼풀을 알아차려 보십시오. 오른쪽 눈꺼풀에 떨림이 있든지, 아니면 딱딱함이 있든지, 아니면 뜨거움이 있든지. 그런 여러 가지가 일어날 겁니다. 그중에 가장 강하게 일어나는 것! 만약에 떨림이 있으면 '떨림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그러고 나면 그 떨림은 조용하게 가라앉습니다.

그러고 나면 다시 '왼쪽 눈꺼풀' 하고 오른쪽 눈꺼풀 하는 거하고 마찬가지로 똑같이 그렇게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입술', 입술이 닿아있을 때 부드럽게 느껴지든지, 아니면 팽창하듯이 느껴지든지, 떨림이 있든지, 무른 느낌이 있든지 여러 가지 느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강한 거 하나만! 팽창하는 느낌이 있다, 그러면 '아! 입술이 팽창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긴장되어있으면 '긴장되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그럼 금방 마음은 고요하게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손이 닿아있는 것', 왼손 오른손이 부딪쳐서 이쪽 허벅지 위(안쪽)에 있을 겁니다. 허벅지 안쪽에 신경쓰지 말고 허벅지 안쪽과 닿아있는 손, 그게 오른손이면 오른손 하고 그 위에 있는 왼손하고의 접촉 부분만 관찰을 해보십시오. 뜨거움이 있든지, 아니면 따뜻함이 있든지, 쏘는 느낌이 있든지 여러 가지 느낌들이 일어날 겁니다. 그럼 그것들 중에 가장 강한 것! 그것이 뜨거움이면 '뜨거움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마찬가지로 '엉덩이'도 마찬가집니다. 누르는 느낌이 있는지, 딱딱한 느낌이 있는지, 그중에 가장 강한 것! 그것이 딱딱한 느낌이면 '딱딱한 느낌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있구나' 하는 사실만 알고 놓아버려야 됩니다.

그러한 느낌이 있다는 사실만 먼저 알아야 됩니다. 느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배를 아무리 관찰해도 느낌을 관찰 안됩니다.

 

그리할려면 먼저 몸이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가 돼있어야 되고, 마음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순차적으로 쭉 관찰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마음도 고요하게 가라앉습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준비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딱 하고 나면은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마음을 착 돌려버립니다.

 

그러면 배가 불러올 때 배가 팽창하는 느낌이라든지, 배가 불러올 때 딱딱한 느낌이라든지, 그렇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느낌으로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가 불러올 때 그냥 불러온다고 알게 되든지. 둘 중에 하나는 적어도 알게 된다는 거라. 실재적인 것들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을 거 같으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갖다가 계속적으로 관찰할 때는 그냥 형식적이 돼버립니다. 느낌으로 관찰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움직임으로 관찰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오토매틱화 돼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느낌은 실재하는 느낌들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러면 실재하는 느낌들이 있다고 알려고 할 거 같으면 몸과 마음이 평온한 상태가 돼야만이 그 실재하는 것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것은 고요하게, 몸도 고요하게 하고 마음도 고요하게 한 상태에서 그 느낌들을 순차적으로 보면서 '아! 이 느낌들이 있구나' 하고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거 말고도 접촉하는 부위 말고도 몸에서 여러 가지 부위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틀림없이 느낌들이 있습니다. 그럼 그 느낌만 알면 됩니다.

 

그것을 느낌을 따라갈려고 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지금은 그거 할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느낌에다 마음을 갖다 붙여주기 위한 훈련들입니다. 그럼 느낌이 있다는 것만 알고 다시 또 돌아와버려야 됩니다. 그거는 가능하겠죠?

자! 그렇게 됐다고 칩시다 이!

 

그러면 그 느낌 알면 뭐할 건데? 느낌 알면 뭐할 거라? 그런 느낌이 있다고 알면 무슨 의미를 가지는데?

(수행자 : 그 느낌을 알고나면 그 느낌이 사라져가는 거를 변화되가는 과정이나 현상들을 알 수 있게 될 거 아닙니까)

느낌이 있다고 알면 느낌이 변화되는 것을 안다? 한참 시간이 걸립니다.

느낌이 있다고 알고 나서 느낌이 변화되는 사실을 알려고 할 거 같으면 적어도 여러분들 수준일 거 같으면 1~2년 정도 그렇게 수행을 쭉 지속적으로 해야만이 변화되는 과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거짓말 같죠? "나는 금방 아는데" 그럽니다.

그것은 느리게 진행되는 것은 금방 압니다. 병의 속도가 느릴 것 같으면 아, 이게 곪았으면 곪았다고 알게 되고, 그다음에 진물이 나면 진물이 난다고 알게 되고, 이렇게 천천히 진행되면 알게 되는데 빠르게 확 진행이 될 때는 이걸 잘 모릅니다.

 

그런데 느낌은, 실제적인 느낌은 쏜살같이 일어났다가 쏜살같이 사라집니다.

느낌이 느리게 진행이 되는 것 같지만 그 진행되는 느낌에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왔다갔다 합니다. 실제가 그렇습니다. 그걸 알아야 되는데, 느낌이 느리게 진행되는 걸 사람들은 '변화'라고 압니다. 곪는 걸 알고 썩는 걸 알고 이런 것들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건 아닙니다. 그건 변화를 아는 것이 아니고.

 

느낌의 변화를 알려고 할 것 같으면 느낌이 있다는 사실을 실재하는 것을 알고 나서 끊임없이 수행을 하고 나서, 어느 순간에 느낌이 빨리 변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상태가 될 때까지 쭉 계속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느낌의 변화를 알려고 먼저 해서는 안됩니다.

실재하는 느낌에다가 마음을 갖다 붙여주는 훈련들을 먼저 지속적으로 해야 됩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은 그겁니다. '변화' 이런 건 전혀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그 느낌을 보는 것은 무엇 때문에 하는 거라?

느낌을 보든지 느낌의 변화를 보든지 간에 뭐 때문에 하는 건데? 깨달음을 위해서? 저 멀리 가 있는데? (수행자 : 집착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지!

그 느낌에 대해서 붙잡히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위한 겁니다.

변화하는 것이 아닌데 변화로 알 거 같으면 그거는 집착하게 되는 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지금 하는 목적은, 그것에 붙잡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만 알아차릴려고 하기 위한 겁니다. 그걸 놓쳐버리는 순간에 나는 내 수준보다 다른 수준으로 나가버리게 됩니다. 그걸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냥 지금은 내가 아는 만큼 그냥 안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게 딱 정답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죽은 상태가 아닐 것 같으면 느낌은 있다! 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중에 일부분이라도 느낌은 알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입술의 느낌을 본다든지. 이건 참 쉽잖아. 그대신에 입술의 느낌이 변화되는 걸 보라는 게 아닙니다!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착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냥 그 입술이 닿아있으면서 일어나는 느낌, 그중에 딱 하나만 '아, 이런 느낌이 있네' 하고만 알고 그냥 놓아버려야 됩니다.

놓아버리는 순간에 입술에 긴장되는 것들이 싹 풀려버립니다.

이걸 못 놓으면 입술이 자꾸 앙다물어지고 거기에서 자기가 느낌들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할 거 같으면 마음의 긴장이 풀어지지도 않고 몸이 긴장도 풀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걸음걸이를 보면 이렇게 거꾸로 삼각형 같이 되는 거라. 긴장도를 볼 거 같으면 밑으로는 긴장하는 것이 없고 위로 가면 갈수록 긴장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거라. 앉아 있을 때 요 위에 있는 것들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몸과 마음의 긴장을 탁 풀어줍니다.

 

그래서 느낌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라!

배가 불어오면 불러올 때의 느낌만 알려고 하고, 느낌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지 마십시오. 배가 꺼질 때 꺼질 때의 느낌만 알려고 해야 되고, 그거만 하면 됩니다.

지금 끊임없이 그렇게 하다가, 어느 순간에 여기에서 느낌들이 다른 느낌이 2개 아니면 3개가 배가 불러올 때 일어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배가 불러올 때 딱딱한 느낌이 있는 반면에 한쪽에서는 뭔가 툭툭 치는 느낌도 있고, 또 어느 순간에 한쪽에서는 뭔가 막 잡아당기는 느낌도 있고 이런 게 동시에, 동시는 아닙니다. 순차적으로 보이는데, 거의 동시에 보이듯이 여기가 쭉 배가 불러오는 동안에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정도로 마음이 지금 예리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은 여러 개를 보게 됩니다.

그럴 때가 되면은 그때는 이 배가 불러오는 것에서 딱 멈춰버리고 가슴의 느낌을 보도록 해보십시오. 가슴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이 굉장히 많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가슴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이 평온하게 될 때 다시 배로 돌아가십시오.

배로 돌아가면 그때는 배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거의 하나로 보입니다. 하나로 보이는데 계속적으로 마음이 거기에 따라가집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상태로 그대로 그냥 따라가집니다. 실재하는 느낌만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겁니다. 당분간 그 상태를 쭉 계속 진행하면 됩니다.

그건 할 수 있겠죠? (예) 쉽잖아?

 

수행자 질문 : 그러면 배에서 여러 가지 느낌이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느껴지면 그때는 더 이상 배를 보지 말고 가슴을 보란 말입니까?

 

스님 : 예. 왜 그러냐면 대부분 그런 상태일 거 같으면 그것을 대부분 붙잡을려고 하든지 뭔가 더 자세히 볼려고 하다 보면 이게 진짜 현상들을 자기가 조작을 하게끔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현재 쭉 자연스러운 상태로써 보고 있던 것들이 갑자기 변화돼버리게 됩니다.

그럴 것 같으면 그럴 때는 배를 관찰하는 것보다 오히려 가슴의 느낌을 관찰해주는 것이 오히려 훨씬 용이합니다. 그래서 고요하게 된 상태에서 딱 놓아버리게 될 때 다시 배로 돌아가버리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전에 관찰했을 때보다도 훨씬 잘 느낌들을 관찰하게 됩니다.

 

앉아서 좌선할 때는 우선 그렇게 하도록 하고, 경행을 할 때는 어떻게 할까?

자! 인제 지금 대부분 3단계 하고 있죠? '발을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이렇게 할겁니다.

발을 들어올릴 때 어떤 느낌이 있습니까? (수행자 : 들어올릴 때는 가볍다는 느낌)

음, 가벼운 느낌? (예)

내릴 때는? (수행자 : 내릴 때는 좀 무거운 느낌) 무거운 느낌? (예)

나아갈 때는? (수행자 : 나아갈 때는 뭐가 움직이는 느낌) 움직이는 느낌? (예)

대부분 그렇게 얘기합니다. 가벼운 느낌, 움직이는 느낌, 무거운 느낌.

그럼 그것만 알려고 해야 됩니다.

발을 드는 것을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가벼운 느낌만 알려고 해야 됩니다.

그리고 나아가면 움직이는 느낌이 있으면 움직이는 느낌만 알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나아가는 걸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내려놓을 때는 무거운 느낌을 알려고 해야 되지 내려놓는 느낌을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내려놓고 들고 나아가고 하는 것은 명칭일 뿐입니다.

느낌을 관찰할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명칭을 알아차려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들어올릴 때 가벼운 느낌이 있으면 가볍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이게 가벼운 건지도 모르고 지 혼자서 '가볍다'고 한다는 거라. 실제로는 가벼운지 뭔지도 모르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돼?

그럼 움직임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거라. 발을 들어올리는 움직임을 알아야 돼.

그래서 '들어올린다'고 알고, '나아간다'고 알고, '내려놓는다'고 알아야 돼.

이것 먼저 해야 되지 가볍지도 않는데 지 혼자 '가벼움' 가볍다고 이렇게 알아버리면 그거는 틀려버립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명칭을 붙이든지 안 붙이든지 자기 수준에 맞게끔 움직임을 알려면 움직임만 알아도 됩니다.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이 있으면 느낌을 알면 됩니다. 그런데 느낌이 없을 때는 느낌을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움직이는 것만 알아도 됩니다.

 

몸에 대해서 관찰할 때 몸을 관찰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몸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몸이라고 하는 것은 변하게 돼있습니다.

그럼 법을 관찰하게 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몸만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아니면 움직임만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사념처를 다 하게 되는 겁니다. 어떤 걸 집중해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걸 움직임만 알면 되는데, 그걸 일부러 느낌 수념처만 한다고 그냥 그걸 가볍다고 자꾸 알려고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느낌이 일어나는 것들은 몸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니까 몸을 관찰하고도 있는 겁니다. 느낌을 알 것 같으면 수념처를 하고 있는 거고, 그것은 마음으로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념처도 되는 거고, 느낌의 변화를 알 것 같으면 법념처가 되는 겁니다. 어떤 경우든지 사념처를 다 하는 겁니다.

 

단지 중점을 두는 것이 몸에 대한 관찰이냐, 느낌에 대한 관찰이냐, 마음에 대한 관찰이냐, 법에 대한 관찰이냐 그 차이가 나는 것뿐이라.

그럴 것 같으면 움직임을 알 것 같으면 그냥 신념처 하면 됩니다. 그럼 움직임만 알아도 돼. 그것만 해도 충분해. 움직임만 알아도 움직임의 변화를 알게 되는 거고, 움직임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는 거고, 발의 움직임도 변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는 거고, 다 알게 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할 때 움직임을 아는 단계에서는움직임만 알도록 하십시오. , 움직이는데 마음을 100프로 두어야 됩니다. 움직이지 않는데 마음을 1프로도 두어서는 안됩니다. 볼 때 귀에 1프로도 두지 말라고 그랬죠? 보는데 100프로 두라고 했습니다. 움직일 때는 움직이는데다 100프로 둬야 됩니다.

발을 들어올릴 때는 발을 들어올리는데 발바닥에다가 100프로 두라는 거라.

나아갈 때도, 내려놓을 때도 꼭 마찬가지로 발바닥에다가 100프로 마음을 두고, 디디고 있는 발에는 전혀 신경쓰지 말아라는 거라. 처음에는 기우뚱하기도 하겠지만 여기에다 마음을 두면 둘수록 기우뚱하는 것은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전혀 신경 안 써도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움직임을 알 때는 움직임을 분명히 알아라. 그래서 발을 들어올릴 때는들어올린다고 알 거 같으면 그냥 들어올린다고 알면 됩니다.

들어올릴 때 느낌이 있으면 그 느낌을 그냥 알면 됩니다.

'느낌이 있네' 하고 알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들어올릴 때의 느낌, 이게 당겨지고 있으면 '어, 당겨지고 있네' 하고만 알면 됩니다. 그렇게만 알면 됩니다.

이게 느낌이 변하는 거라든지 아니면 움직임이 변하는 거라든지 이건 전혀 여러분들이 신경 쓸 요소들이 아닙니다. 그냥 움직임을 알려면 움직임만 알고, 느낌을 알려면 느낌만 알도록 하면 됩니다. 그래서 발을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할 동안에 그런 식으로 진행을 하면 됩니다.

 

자! 그렇게 하다 보면 좌선하고 경행은 느낌을 관찰하는 법을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할 겁니다.

 

그러면 일상생활은? 일상생활은 어떻게 할까?

 

일상생활은 이놈의 오감을 다 알아차려야 되는데 가능해요? 다 하기에는 처음에 굉장히 힘이 듭니다. 딱 두 가지만 해보십시오. 두 가지만! 보고 듣고 하는 것!

그거는 할 수 있겠죠? 거의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일상생활에 모르긴 해도 50프로 이상은 차지할 겁니다. 그러니까 반만 잡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볼 때 본다고 자꾸 알려고 해야 됩니다. 들을 때 듣는다고 알려고 해야 됩니다. 단, 볼 때 형태로 보이든지 아니면 곰보로 보이든지 그거 신경쓰지 말라는 거라. 그거 전혀 신경쓰지 말라는 거라. 곰보로 보이면 곰보로 보인다고 알면 됩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이면 아름답다고 알면 됩니다. 그렇게만 알아도 됩니다.

 

그대신에 볼 때는 100프로 볼려고만 하십시오. 들을 때는 100프로 들을려고만 하십시오. 들릴 때 그게 음절로 들리기도 할 거고, 의미로 들리기도 할 거고, 아름다운 소리로 들리기도 할 거고 여러 가지로 들릴 겁니다. 그냥 그렇게 알면 됩니다.

그걸 '음절로 들리네' 하면서 알면 되는 거고, 의미로 들리면 '음, 의미가 있구나' 하고 알면 되는 거고, 아름다운 소리로 들리면 '아, 아름답구나' 하고 알면 됩니다. 단, 붙잡지만 말아라는 거라. 그냥 놔둬버리라는 거라.

 

보고 듣고 하는 것만 제대로 할려고 노력을 해보십시오.

어떠한 경우든지 거기에는 느낌들이 일어납니다. 보고 듣고 하는 접촉하는 것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느낌들이 일어납니다. 단, 보고 듣고 할 때 그것을 봤을 때 '어, 봤다' 하고 알고 나서 좀 더 자세하게 알려면 '그때 가슴의 느낌을 보라'는 거라.

듣고 나서 중간중간에 '듣는 것들을 내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나?' 할 때는 듣는 동안에 들으면서 딱 마음을 가슴에다 관찰하라. 가슴에 일어나는 느낌들을 보라는 거라.

 

바로 연달아서 가슴의 느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가슴의 느낌들이 가볍고 고요하고 편안하다 할 것 같으면 정상적으로 내가 붙잡지 않고 그것들을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가슴을 고요하게 하고 나서 다시 듣고, 다시 또 보고, 그런 식으로 해줍니다. 그런 식으로 자꾸 가슴과 대상들을 갖다가 번갈아가면서 알도록 자꾸 해보라는 겁니다.

 

두 가지는 할 수 있겠죠? 쉽지? 앉아 있으면 앉아 있는 대로 배만 관찰하는 거고, 쉽잖아. 걸어갈 때는 걸어가는 것을 아까 가르쳐준 대로 관찰하면 되고, 일상생활 할 때는 내가 다 하라고 했나? 보고 듣는 것만 하라는 거라.

그러면은 적어도 '아, 느낌이 이리 소중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좋은 느낌이든 싫은 느낌이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느낌은 느낌일 뿐입니다. 그것이 육체적인 느낌이든 정신적인 느낌이든 그것은 여러분들이 알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단지 나는 그것 일어난 것들을 있는 그대로만 알려고만 하면 됩니다.

구분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학자들이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학자들이 실제로 수행을 하든 안 하든 그것은 그 사람 몫입니다. 여러분 몫은 그냥 그대로 알려고만 하면 됩니다. 이해하겠죠?

 

느낌에 대한 관찰들을 제대로 할 줄 알아야 만이 수행을 할 때 여러모로 굉장히 유익합니다.

느낌에 대한 것들에서 조금 더 해야 되겠다 싶으면, 그 느낌들을 가지고 법념처로 이동을 하면 됩니다.

느낌을 가지고 내가 한 대상에 머물러야 되겠다 할 것 같으면 그 느낌에 그냥 머물러버리면 됩니다. 행복한 느낌이 있으면 행복한 느낌에 머물러 있어버릴 거 같으면 2선정에 그냥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선정과 위빳사나 수행 중에서 여러 가지방법들을 고루 해보게 되는 것들입니다.

 

자기의 상태에 맞게끔 깊은 선정에서 있을려고 할 거 같으면 필요한 것들을 몰아낼 수가 있는 거고, 또 대상에 대해서 변하는 성품으로 볼려고 할 것 같으면 법념처로 넘어가버리면 됩니다. 그래서 느낌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윤회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느낌을 있는 그대로 봐서 그것을 딱 끊어버리면은 윤회의 고리는 끊어져버립니다. 다시는 태어나는 것들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마만큼 느낌에 대한 수행은 중요한 것들입니다. 오히려 몸에 대한 관찰이나 마음에 대한 관찰보다도 느낌에 대한 관찰이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일부러 다른 느낌에 대한 관찰을 하는 것같이 느낌을 일으킬려고 일부러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곳에 가면 일부러 두시간 세시간 동안 좌선을 하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고, 그리고 고통스러운 느낌들을 일으키도록 해서 그것들을 관찰할려고 하고 이렇게들 하는데 일부러 그럴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스님은 가르칠 때는, 나도 그렇게 해봤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실재하는 것, 실제 편안한 상태에서 좌선이든 경행이든 일상생활이든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그냥 그대로 알면 됩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렇게 수행을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느낌에 대한 관찰 얘기를 했습니다. 이거는 여러분들이 쭉 읽어보면 됩니다.

자! 수행들 하고 질문이 있는 분들은 질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