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생활에서의 알아차림 (20150904.대구)
오늘 제목이 뭐에요? (수행자 대답 :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알아차림)
수행자들이 일상생활에서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크게 나눠가지고 이렇게 세 종류로 되는데 여기 지금 적어놓은 게,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들을 알아차리는 것, 그 하나.
그다음에 또 하나 해야 되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십바라밀을 해야 되는 수행하는 것, 십바라밀을 실천하는 것.
그다음에 또 하나는 일상생활에서 자애를 실천하는 것.
크게 나누면 그렇게 세 가지입니다.
자애를 실천하는 것도 크게 나누면 두 가지로 그렇게 합니다.
까라니야멧따숫따에서 나오는 것처럼 자애가 생기기 위해서 일상적으로 해야 될 일들, 하지 말아야 될 일들 거기에 따라서 인제 자애를 형성하는 방법들이 있고,
그다음에 또 하나는 멧따바와나 같이 자애 수행을 할 때 '내가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하면서 하는 그 방법으로 하는 거, 그렇게 자애수행도 그렇게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려면 일상생활에서 할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좌선하면 간단합니다. 배 관찰하다가 뭔가 대상이 나타나면 즉시 알아차리고, 앉아서 할 일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경행할 때도 마찬가지고. 걸어가면서 일어나는 거 움직임이든 느낌이든 그것들을 쭉 따라가면서 알아차리면 됩니다. 어찌 보면 좌선하고 경행하는 것이 일상생활보다 훨씬 수월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일상생활은 이렇게 해야 될 일들이 많을까?
안 그래도 바쁜데, 일상생활이. 왜 그래놨을까?
수행은 수행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이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팍 뛰어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갖추어야 될 것은 반드시 갖추어져야만이 진행이 돼나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갖출 수 있는 것들, 쉽게 말하면 바라밀을 갖추고 일상생활에서 항상 알아차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법을 알아가고 하는 것들, 그다음 일상생활에서 자애를 자꾸 지니려고 노력을 하는 것들은, 다른 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좌선하고 경행 할 때 그걸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일상생활의 수행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 하고, 좌선하고 경행하는 것이 수행이 전부다 하고 생각할 것 같으면 그거 수행 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은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잘 해나가야 되는 그런 겁니다.
오늘은 「일상생활에서의 알아차림」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수행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그랬죠? 사마타와 위빳사나라고 그랬습니다. 일상생활은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사마타 수행하기는 힘들죠?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을 해나가야 됩니다.
'완짜까 담마'라고 합니다. '마음에 자신이 스스로 속아버린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일상에서 움직임들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자신을 속여버리게 됩니다. 번뇌가 일어나더라도 번뇌라고 생각을 못하는 경우들입니다.
고속도로에서 차가 사고가 났어요. 그럼 이게 왜 사고가 났을까? 왜 차가 사고가 나요? 가다가 조불던지, 아니면 운전하는 게 미숙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지켜야 될 것들을 지키지 않고 안 지키다가 사고들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중에 가장 많은 것 중에 하나가 고속도로 같은 경우에는 주의가 산만하다 못해가지고 주의를 전방을 주시하지 못해가지고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부주의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죠.
여러분들은 번뇌가 일어났으면 왜 번뇌가 일어나는지는 알아요? 그래도 운전하는 사람들은 지가 조불어가지고 사고가 일어나는 건지 아니면 앞을 못보고 그냥 딴데 보다가 사고가 일어나는 건지는 안단 말이라.
여러분은 번뇌가 일어났으면 왜 일어난 거라?
만약에 화가 일어났다, 왜 화가 일어났어요? 너 때문에 화가 일어났어요? 그건 참 어리석은 사람이지! 운전하는 사람들은 그렇게는 안 해. 아무리 앞 차가 천천히 간다고 하더라도 천천히 가다가 자기가 받았다고 하더라도 운전 과실 퍼센테이지를 매길 때는 앞 차하고 거리를 안 두어가지고 자기가 사고가 났다고 그러지, 앞 차가 천천히 가가지고 사고가 났다고 해가지고 거기에 점수를 많이 주는 것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운전하는 사람이 잘못한 것을 가지고 사고가 났다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화가 일어났는데 니 때문에 화가 일어났다고 하면 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남이 내 화를 일으켰다는 얘기밖에 더 되겠어? 남이 어떻게 내 화를 일으킬 거야? 그렇게 될 수 있는 법은 없다는 거라. 그럼 화가 일어났으면 화가 왜 일어났는지를 그건 알아야 될 거 아니라?
화가 일어났다면 아니면 욕망이 일어나든 아니면 게으름이 일어나든 그 일어나는 것들은 모르기 때문에 그것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일어나는 걸 왜 일어나는지만 분명히 알 것 같으면 왜 그걸 못 잡아내겠어? 번뇌가 일어나면.
번뇌가 일어나면 금방 자신이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번뇌가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리기에는 참 좋은 시간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일어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것보다도 훨씬 빠릅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굉장히 빠르게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릴려면 그마만큼 빨리 알아차림이 있지 않으면은 그 번뇌가 일어나는 것들을 모릅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화가 일어났으면 '화가 일어났다' 하고는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됩니다. 뭔가 나에게 욕심이 일어났으면 '아, 욕심이 일어났다' 하는 것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만이 이것을 따라잡아나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는 굉장히 빨리 변하기 때문에, 그 일어난 것들을 모르면은 대부분은 그게 한참 진행되고 나서 알든지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 그것으로 인해서 행동하고 뭘 하고 하더라도 그걸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리게 됩니다.
모른다고 해가지고 그게 업이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것들, 행위하는 것들은 전부다 그것들이 일어나는 즉시 알아차린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특히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들은 일어나는 즉시 그것을 알아차린다고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일상생활을 할 때는 일상생활을 따라가기가 바쁩니다.
팔을 뻗으면 팔을 뻗는다고 알고 팔을 오므리면 팔을 오므린다고 알고 그거 알기도 바쁘기 때문에 그러는 동안에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번뇌들은 따라잡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번뇌는 여러분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대신에 예를 들어봅시다. 화가 확 일어났다, 그러면 화가 일어났다 하고 알고 있다, 그럴 거 같으면 이걸 어떻게 콘트롤 하면 될까?
사마타 수행의 힘이 강한 사람들은 화가 일어난 것을 꽉 붙잡고 있어야 됩니다. 요놈 화가 일어나지 못하게끔! 어떻게 해야 돼요? 숨을 꽉 참고 있든지, 숫자를 하나둘셋넷 하고 세고 있든지, 그렇게 해가지고 이 화가 일어난 것들을 알아차렸으면 그것을 꽉 붙잡고 있어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이 화가 사라지든지 아니면 화가 가라앉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하게 된다는 거라.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은 화가 일어났으면 '화가 일어났다' 하고 알아차리고, 화를 관찰을 해야 됩니다. 그럼 화가 일어나더라도 관찰의 힘이 강할 것 같으면 그 화는 사라질 것이고, 그런데 관찰하는 힘이 약할 거 같으면 화가 일어나는 것이 빨리 사라지지 않고 아주 느리게 힘들게 사라지게 되는 거라.
어쨌든 사마타 수행을 하든지 위빳사나 수행을 하든지 번뇌가 일어났으면 일어난 것들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게 일상생활에서의 맨처음 포인트입니다.
그걸 모르면 다음 것들을 할 방법이 없습니다. 일어났는지를 모르는데 뭘 어떻게 할 거라? 교통사고가 일어나더라도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잘잘못을 가릴 수 있듯이, 번뇌가 일어나더라도 그게 화가 일어났는지 아니면 욕심이 일어났는지 뭐가 일어났는지는 분명하게 알아야만이 그걸 대처를 할 수가 있는 거라.
그래서 일어난 것들은 무엇이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라.
그다음에 그것이 일어난 것들이 일어났으면 그것을 알았을 거 같으면,
그다음에 「마음의 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다음 것들로써 바뀌기 전에 분명하게 잡아야 됩니다.
화가 일어났는데 그걸 잡지 못하면 말을 험하게 한다든지 아니면 행동을 나쁜 행동들을 하게끔 되는 거라. 말하고 행동하기 전에 마음에서 일어났을 때 그것을 알아차려서 그것을 빨리 가라앉혀 주어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가라앉히고 나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할 때는 선한 것들로 할 수가 있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냥 마음에서 일어난 것들이 그대로 표출돼버립니다. 그걸 「마음의 업」이라고 합니다.
마음에서 업을 짓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이게 계속 진행이 되면 그게 습관화됩니다. 조그만한 것에도 똑같은 그런 화가 폭폭 일어납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것은 그것조차도 사실은 빨리 바꾸어주고 변화시켜나가야 되는데 지금은 그것까지 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는 일어난 것들은 분명하게 알아라. 그리고 그것들이 말과 행동으로 바뀌기 전에 그것을 잡아라. 일상생활에서 그것만 해도 됩니다.
보통 일상생활에서 알아차림하라고 할 것 같으면 일상생활에서 하는 동작들만 자꾸 알려고 그럽니다.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알고, 밥을 먹으면 밥을 먹는다고 알고, 일상 행위들만 자꾸 알려고 합니다.
일상 행위는 당연히 해야 되는 것이고, 그런데 실제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들은 그냥 놓아둬버리는 경우들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들을 분명하게 알고, 말과 행위로 바뀌기 전에 그것을 잡아라.
망상하고 번뇌하는 것들이 많겠어요? 일상 행위하는 것들이 많겠어요? 아마 천배는 번뇌들이 일어나는 것이 더 많을 거라. 무수하게 우리 머릿속에는 뭔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큰 것들이 아닐 것 같으면 그것들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다는 것뿐인 것이지 끊임없이 망상들을 하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망상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일상생활에서 행위 자체를 알아차리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끊어지지를 않는 거라. 망상이.
그래서 망상을 끊는 연습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수행은 간단합니다. 망상하지 않으면 수행은 성공합니다.
망상하지 않으면 뭔가 마음에서 망상하는 대신에 뭔가를 하는 것들을 알아차립니다. 망상만 안 해버리면 됩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특히 탐·진·치가 일어나는 것들, 그리고 불탐·불진·불치 그것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것들이라.
악한 것들만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 아니고, 선한 것들도 일어났으면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이런 번뇌들이 일어날 때는 분명하게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이 말과 마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반드시 그것을 다스려라. 사마타 방법을 쓰든지, 위빳사나 방법을 쓰든지 분명하게 다스려라. 다스리고 나서, 그다음에 말을 하고 행동을 하도록 하라.
그것이 두 번째 「마음의 업」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스릴려고 할 것 같으면, 말과 행동이 업이 되지 않게끔 할려면, 여러분들 반드시 두 가지는 갖추어야 됩니다.
첫 번째가 계율.
두 번째가 집중력.
계와 집중력이 없으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들을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옮길 때 잡을 힘이 없어져버립니다.
일어난 것들에 대해서 집중하는 힘, 그것이 일어난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과 집중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것을 알아차렸다 하더라도 집중하는 힘이 없을 것 같으면, 이 마음에서 일어난 것들이 집중력이 없는 구석쪽으로 빠져나오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과 행동으로 그냥 나와버리게 됩니다.
그걸 또 억제해줄 수 있는 것이 계가 방어막 역할을 하게 됩니다. 튀어나온다고 하더라도 계율을 지키고 있으면 그것을 탁 잡을 수 있는 방어막 역할을 해준다는 겁니다. 말과 행동을 하기 전에.
자신의 계는 말과 행동으로 하는 것들을 지켜주는 무리입니다. 말과 행동으로 하는 것들이 바르게 돼있을 거 같으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말과 행동으로 넘어가는 것들을 지켜주는 계율과 집중력은 반드시 키워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마음의 업이 말의 업과 행동의 업으로 넘어가는 것들을 방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상생활에서 수행하는 것들은 그렇게만 해주면 대부분은 일상생활에서 알아차림을 유지를 해나가게 됩니다. 그거 하기에도 바쁩니다. 그런데 그거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적은 6개의 문으로부터 들어온다.」
적은 이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온 데서 다 일어나는 겁니다. 여섯 개의 문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의근으로만 들어오는 게 아니고 눈으로도 통해서 들어오고 귀로도 들어오고 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다 들어옵니다.
부처님이 사리뿟따 존자에게 물어봅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잘 지키고 수행하면 닙바나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물어봅니다.
사리뿟따존자는 "예! 부처님! 여섯 개의 감각기관을 잘 지키면 닙바나에 이릅니다. 그런데 나는 부처님이 한 그 말은 믿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하는 말 어느 누구의 말도 믿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되게 건방진 소리라.
그런데 부처님은 그걸 얘기합니다. "그래 맞다."
여섯 개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번뇌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잘 지켜서 그것을 대상으로 수행을 하면 닙바나에 이르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걸 자신이 부처님이 그렇게 말했다 해가지고 그걸 믿어가지고 닙바나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구의 말로 인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해야 되는 거라?
자기 자신이 감각기관을 지키고 있어야만이 닙바나에 이를 수 있다는 거라.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번뇌가 일어나고 대상들이 일어납니다. 그럼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나아갈 거 같으면 살아있는 모든 동안에 알아차림을 유지할 수가 있는 거라. 그렇게 할 거 같으면 깨달음으로 나아갑니다.
깨달은 자들은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을 분명하게 그것을 알아차려서 그것들이 말과 행동으로 일어나기 전에 다스려버립니다. 일어나는 족족 그대로 그냥 다스려가지고 주저앉혀버립니다. 그러니 업이 될 일들이 없어져버립니다.
수행자도 꼭 마찬가집니다. 인제 수행을 시작했든 십년 수행을 했든 수행하는 방법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여섯 개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걸 분명하게 알려고 해야 됩니다.
눈이면 눈을 통해 들어올 때, 눈은 뭐 하는 기관입니까? 보는 기관이죠! 그럼 여러분들은 어떤 대상이 보이든 '보인다'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눈이 하는 일은 그겁니다. 감각기관 외에 것을 왜 할려고 그래? 눈이 지가 누구 잘생겼다 못생겼다 아는 것이 아니잖아.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걸 하고 있다는 거라.
귀는 듣는 기능입니다. 소리 듣는 기능입니다. 그럼 귀가 할 일들만 하면 돼. 귀를 통해서 뭔가가 들릴 것 같으면 소리가 들린다고 알아차리면 되는 거라. 맛을 보면 맛을 본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맵고 짜다고 알아차려서는 안 되는 거라.
각각의 문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각각의 고유의 기능을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은 무조건 다 알아차릴려고 해야 된다는 겁니다. 물론 놓치는 것들이 훨씬 많을 겁니다. 그리하더라도 알아차리려고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두 개가 동시에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보고 듣고 두 개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든 찰나에는 거 하나밖에 모릅니다. 볼 때는 본다는 마음이 기능을 하는 거고, 들을 때는 듣는다는 마음이 기능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보고 듣고 하는 것들, 그리고 동시에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생각부터 버려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알아차려야 됩니다! 보면 본다고 알아차리고 들리면 들린다고 알아차리고. 그래서 하나씩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물론 처음에는그 속도가 상당히 느릴 겁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속도가 굉장히 빨라져버립니다. 빨라지더라도 마음이 불안하고 마음이 들뜨는 법이 없습니다.
그다음이 「마음의 평안과 알아차림」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은 어떤 경우든지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런데 그 알아차리는 것이 마음이 고요하지 않은 상태에서 알아차리면 안 되는 거라. 고요하지 않은 상태에서 알아차리면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알아차릴려고 하게 됩니다.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감각기관을 딱 닫아버리고 마음 하나만 알아차리면서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하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가 되고 나서 다른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 일상생활 할 때도 그걸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압니다. 마음이 들떠있고 뭔가 불안하고 할 거 같으면 다른 것들을 하더라도 제대로 잘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도 꼭 마찬가집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은 들떠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조급해서도 안 되고. 마음은 뭔가를 붙잡으려고 해서도 안 되고 밀쳐내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마음은 고요하게 가라앉아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항상 스님이 강조하듯이 마음은 가벼워야 됩니다. 마음은 고요해야 됩니다. 마음은 평온해야 됩니다. 그리해야만이 대상이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지 않으면 마음을 알아차리면 안 됩니다. 다른 어떤 것들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하고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서, 그마음을 고요하게 만들고 나서, 대상들을 알아차려나가도록 자꾸 그렇게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마음은 대상들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립니다.
수행의 대상이 되지 않을 때가 없고, 대상이 되지 않는 행위들이 없습니다. 전철을 탈 때든 밥을 먹을 때든 어떤 것이든 다 수행대상으로써 알아차려나갈 수가 있는 겁니다. 걸어갈 때도 고요하게 걸어가집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은 걸음걸이가 평온합니다.
그다음에 「마음을 어떻게 세탁할까?」
마음을 세탁하는 것은 습관되어진 것들을 세탁하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고 일어난 마음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세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습관되어진 것을 세탁하는 것은 전에 언젠가 「마음의 세탁」이라는 부분을 글을 쓴 게 있습니다. 그것을 참고를 하도록 하고.
일어난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을 체크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뭘 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체크를 해야 됩니다. '어, 마음이 지금 여기에 있네' 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거고, 마음이 좋고 싫어하는 것으로 알면 '어, 마음이 좋아하고 있네' '마음이 싫어하고 있네' 하는 걸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마음에 때가 끼는 것들을 방어할 수가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은 끊임없이 알아차려나갈 대상입니다.
잘 안되는 사람은 명칭을 붙여서 하십시오. 뭔가 가려움이 있다 그러면 '어, 마음이 가려움을 알고 있네' '마음이 싫어하고 있네' 이렇게 알려고 하지 말고,
'가려움' '가려움' '가려움' 하고 알아차리든지, '싫어함' '싫어함' '싫어함' 하고 알아차리든지 이렇게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리도록 해보십시오.
대상에다가 마음이 거기 가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고, 그 대상에 맞는 명칭들을 분명하게 부여해줘서 마음이 그것들을 다시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고 명칭을 부여해주지 않아도,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으면 그 알아차리고 있는 걸 분명하게 알면 됩니다. '어, 마음이 이걸 하고 있다' 하고 알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것이 좋다는 마음이 일어난 것이든 싫다는 마음이 일어난 것이든 그것을 하고 있는 것들을 알아차리면 마음은 고요해져버립니다. 좋다 싫다를 떠나버리게 됩니다.
그게 마음을 세탁하는 방법입니다.
그다음에 「자신의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자」
자신의 시간을 자신이 사용을 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남들에게 시간을 다 할애하고 뺏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그걸 쓰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시간을 어느 누구도 뺏어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수행할 시간이 없다고 그럽니다. 그건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시간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겁니다. 그 시간을 분명하게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게속 유지하면서 뭔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알아차리면서 그대로 하고 있을 거 같으면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것들도 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들도 됩니다.
시간은 어떠한 경우든지 남들이 소유하지 못하게 됩니다. 시간은 공평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은 자신이 쓸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시간을 유용하게 자꾸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유용한 시간은 지나가버리면 나하고는 관계가 없는 시간들이 돼버립니다. 그 시간만큼은 현재에 머물면서 선한 것들을 할려고 하고 선한 것들을 하는데 시간을 쓰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설혹 알아차림을 유지하지 못하더라도 선한 일을 하는데 쓸 수 있도록 그렇게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면은 적어도 두 가지 중에 하나는 하게 됩니다. 바라밀을 쌓든지 그렇지 않으면 수행하는 시간들이든지 두 가지 중에 하나는 자신의 것들을 분명하게 쓸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일상에서의 알아차림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일상생활에서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유지하면서 살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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