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구·울주선원 수행법문

일상생활에서 자애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 (20151009.대구)

담마마-마까 2021. 11. 12. 09:00

https://youtu.be/jVhYRIj7M3o

* 일상생활에서 자애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 (20151009.대구)

 

저번에 그런 얘기했죠? 자애수행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일상생활에서 하는 자애수행 방법, 그다음에 하나는 집중해서 자애수행 하는 방법.

그걸 보통 빨리어로 하면 '멧딴짜 위하리(mettāñca vihārī)' 그렇게 얘기합니다. 자애에 머물러서 산다. 항상 자애에 머물러서 뭔가를 하게 된다는 거라.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말을 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하는 것들, 그게 인제 '멧딴짜 위하리' 그렇게 합니다. 그게 '일상생활에서 자애수행 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또 하나는 여러분들이 보통 잘 알고 있는 '멧따 바와나 (mettā bhāvanā)'라고 해서 '자애수행을 해서 선정에 이르도록 하는 것'. 마음을 굳건하게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훈련들을 하는 것, 그걸 '멧따 바와나'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수행처에 가면 멧따 바와나를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자애수행을 하는가 하는 그런 것들을 가르칩니다.

 

오늘 할 거는 멧따 바와나 보다는 '멧딴짜 위하리', '일상생활에서 자애수행' 하는 방법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 얘기할려고 그럽니다. 다음에는 '멧따 바와나' 방법도 얘기할 겁니다. 멧따 바와나 방법도 여러가집니다.

 

자! 어찌하면 될꼬? 일상생활에서. 어찌하면 여러분들이 자애 속에서 머물러서 뭔가를 하게 되고, 뭔가를 또 생각하고, 그렇게 될까?

경전에 보면 그런 게 나옵니다. 데와닷따가 부처님을 그렇게 해꼬지를 하고 나서, 마지막에 데와닷따가 부처님한테 참회하러 가다가 지옥에 떨어져 죽는 게 나올 경우.

그때 부처님이 한 얘기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같으면 '잘 죽었다' 생각하든지 뭐 그냥 아무 얘기도 안 할 건데 부처님은 그때 한 얘기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부처님한테 "데와닷따가 저렇게 나쁜 짓을 했는데 저 사람은 다음생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얘기하니까 뭐라고 그랬어요? 부처님이 '잘죽었다' 그렇게 얘기 안 했죠. "앞으로 다음에는 독각불이 될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어서 완전하게 열반에 들것이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참, 저 불쌍한 놈 저렇게 해가지고 죽었는데, 그래도 데와닷따에 대해서 측은한 마음이 들고 자애의 마음이 들지 않을 거 같으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는 거라. 자기에게 해꼬지 하는 사람한테 그래도 '네가 그래도 행복하길 네가 잘살길 바란다' 그런 마음을 가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경전 곳곳에 그런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 면에서 일상에서 그런 자애의 마음을 품고 살지 않으면은 갑작스럽게 나오는 말이나 행동들에서 그런 자애의 말이나 행동들이 나오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부지런히 자애의 행위들을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그게 익혀지지 않는 상태에서, 멧따바와나 집중수행에서 그냥 문구만 떠올려가지고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괴로움이 없기를' 이거 해가지고는 자애가 형성되기가 참 힘이 든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 글을 쓴 거는 「까라니야멧따 숫따」 라고 하는 경을 중심으로 해서 쓴 겁니다.

이 경은 어떻게 쓰여졌느냐 하면 제자들이 마땅한 수행처를 찾아가서 거기서 수행을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천신들도 아, 스님들이 와서 머물르고 하니까 참 좋다. 그래서 스님들이 머물 수 있게끔 자신들이 숲에 있는 나무에서 내려와서 있었거든. 왜냐 하면 스님들이 수행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아무리 목신이라 하더라도 그 위에서 머물러 있기가 좀 미안하니까 내려오게 되는 거라.

그거는 어떤 면에서 보면은 누군가가 내 집에 와가지고 좀 사용을 하겠다 해서, ‘그래 그러은 며칠이면 가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거기서 주인 노릇하는 바람에 마음속에서 ‘'아이고 저놈 언제 가노’ 하는 마음하고 꼭 마찬가지였을 거라, 그 목신도. 그러다 보니까 하루 이틀 지나도 안 가고 언제 갈지 모르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여러 가지 잡귀나 이런 것들로 화해가지고 스님들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부처님한테 가서 도저히 거기서 수행 못하겠다 하니까, 부처님이 다시 그곳으로 보내면서 "이 자애경을 독송하라" 하고 얘기 합니다.

 

그래서 이 자애경을 독송하니까 그 목신들도 이 스님들이 머물 기간을 분명하게 알거든. 우리는 전안거를 지내다가 왔으니까 여기서 후안거 세 달 동안만 머물 것이다. 하니까 '세 달 동안이야 뭐' 하면서 그냥 스님들 편안하게 머물고 수행할 수 있게끔 하겠다는 생각에서 그 자리를 피해 주고 또 조용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역할들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스님들이 이 자애경을 항상 매일 독송해주게 됩니다. 경전 곳곳에 그런 게 나옵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경제적인 활동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도 출가자로서 자기 할 일을 다 한다고 하는 경우는 뭔가를 공양을 받을 때, 아니면 공양받지 않더라도 하루에 꼭 한 차례씩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출가자는 "자기 할 일을 다 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까 여러분들이 탁발 올릴 때도 마찬가지로 탁발 올릴 때 스님이 뭔가 마음속으로 중얼중얼하는 게 아마 아는 사람들은 알 거라.

공양 올릴 때마다 한사람 한사람한테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당 메 다낭 수키 혼뚜(Idaṃ me dānaṃ sukhi hontu)" 하든지

"이당 메 다낭 닙바낫사 빳짜요 호뚜(Idaṃ me dānaṃ nibbānassa paccayo hotu)" 이렇게 합니다.

"이와 같이 공양 올린 공덕으로 행복해지기를" 그렇지 않으면 "그런 공덕으로 인해서 열심히 수행해서 깨달음에 이르기를"하는 그런 마음을 갖습니다.

 

그건 스님들이 당연히 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거고, 그리고 내 밥값 하기 위해서 그러는 거라. 그거 한 차례만 하더라도 자기 할 일은 다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니까. 그래서 어딜 가든지 테라와다 불교권에서 스님들이 탁발 나갈 때 그냥 탁발 받는 법이 없습니다. 그냥 받고 가는 법이 없습니다. 거기서 잠깐이라도 머물러서 마음속에서 그렇게 자애게송을 간단하게 하고 나서, 그런데 자애게송 할 때 길게 하는 법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축원하듯이 뭐 어쩌고저쩌고 길게 이렇게 축원을 하는 법이 없습니다. 간단하게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이 공덕으로 인해서 항상 이로움이 있기를' 이런 마음으로 축원을 해줍니다.

 

그러니까 자애 게송을 할 때 왜 그렇게 짧게 할까?

자애 게송을 할 때 누가 자애 게송을 하는 겁니까? '내가' 하는 겁니다. 그럼 '내가' 자애가 맺히지 않으면은 그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내 마음에서 자애가 맺히는 단어들을 선택하면 되는 거라. 자신이 잘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행복하기를' 하고 생각했을 때 아, 내가 진짜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이 진짜 강하게 일어났을 때는 '행복하기를' 해야 되는 거고,

'아, 내가 괴로움이 없기를' 하고 바라는 마음을 내면 진짜 몸의 고통이나 정신적인 번민 같은 이런 것이 없이 아, 진짜 내가 괴로움이 다 사라지고 깨끗해지고 하는 하는 그런 마음이 일어날 거 같으면, '괴로움이 없기를' 해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자기에게 맞는 게송들이 있는데 그걸 모르면, 스님이 빨리어를 시켰다고 해가지고 '삽베 삿따 수키 혼뚜' 그렇게 하면, 의미를 모를 거 같으면 그건 그 게송이 하나의 문구로만 지나쳐버리는 거라. 그 문구를 아무리 한다 해가지고 자애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걸 일상생활을 할 때도 여러분들이 명심을 해야 됩니다. 나중에 차차 얘기를 할게요.

 

그리고 일상에서 하는 자애수행이 참 좋은 게 뭐냐면, 이건 경전에 나와 있는 건 아니고 스리랑카 역사서에 나와 있는 겁니다.

어느 스님이 숲에 가서 수행할려고 머물르고 있는데 그 숲에 머물고 있는 여러 가지 존재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라. 그 스님은 해치려는 마음도 없고 전혀 남들에게 해를 끼치고 피해줄려는 마음이 없이 그냥 조화롭게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들을 항상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숲에 사는 존재들은 항상 다툼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우리 세계로 치면 먹을 것이 하나 있다 하더라도 이걸 부족하더라도 잘 나눠가지고 기분 좋게 먹을려고 안 하고 그걸 서로 차지할라고 했었으니까 항상 다툼이 있었는데, 이 스님은 항상 마음에서 그런 마음을 내지 않고 여기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항상 다툼이 없이 평화롭기를 하는 그런 마음을 자꾸 가지니까 그것이 자기도 모르게 그런 존재들이 마음에 물이 드는 거라. 그래서 이 스님이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한 번도 다툼이 없이 뭐 부족하면 부족한 데로 그냥 만족하면서 잘 지내게 되는 거라.

 

그러다가 이 스님이 떠날 때가 되어서 떠날려고 하니까 그 숲이 대성통곡을 하는 거라. 인제 저 스님이 가고 나면 이 숲은 다시 또 전과 같이 아귀다툼 하듯이 다툼이 있고 막 시끄러워진다는 거라.

그래서 "스님, 가지 마십시오. 가고 나면 우리는 평화롭게 살기가 힘듭니다."

이 스님은 자기의 수행도 물론 중요한데 마음에서 여기에 있는 존재들이 그래도 평화롭게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으니까, 그럼 그냥 머물겠다 하고 그럽니다. 하다가 거기서 열반에 들때까지 거기서 쭉 있게 되는 거라.

그게 스리랑카의 역사서에 기록이 돼있습니다. 그 스님 이름하고 같이.

 

곳곳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출가한 스님이 어느 곳 한곳에 머무르게 되면은 적어도 그 머무른 자리에서는 다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은 출가한 스님이 자애의 마음을 내지 않는다든지 그리고 그 자애의 마음들을 다른 대중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자애의 마음들을 그 대중들이 같이 해나가지 못할 때 항상 다툼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그 스님이 머무르고 있는 데서 항상 다툼이 있고 어쩌고 할 거 같으면 출가한 스님들끼리 그 스님을 쫓아내 버립니다. 쟤가 있으니까 항상 분쟁이 있고 다툼이 있고 뭔가 자꾸 싸움들만 일어난다고 할 거 같으면 내보내버립니다. 자애수행을 더 하고 오라고. 사실 그게 맞는 겁니다.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마만큼 자애수행은 중요합니다.

 

자애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얘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자애의 빨리어는 '멧따(mettā)'라고 그럽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밋뜨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멧따'라는 의미는 어떤 의미가 강하냐면 '태양'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태양이 여기 떴으면 태양이 지가 비추고 싶은 데는 비추고 안 비추고 싶은데는 안 비추는 것은 아니잖아. 태양은 골고루 비춰주는 겁니다. 골고루.

 

쉽게 얘기하면 자애의 마음을 가질 때 그 자애의 마음은 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골고루 영향을 미친다는 거라. 그런데 그 태양이 잘 비치는 곳이 있고 잘 비치치 않는 곳이 있습니다. 그늘진 곳은 잘 안 비치겠죠?

그러면 사람에 따라서 자애를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라. 또 자애수행을 할 때 쉽게 자애수행이 영글어지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그거는 개인적인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일상생활에서 자애수행 할 때 이렇게 얘기하십시오 하고 얘기하더라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애라고 하는 것은 항상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항상 태양과 같은 것이다. 내가 태양과 같은 빛을 내지 않으면은 어떤 곳에도 태양빛이 미칠 방법이 없습니다. 저 사람한테 '저 사람이 행복하기를' 백날 해봐야 그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이 나한테 가득 차서 그것이 흘러넘치지 않으면 저기에 미칠 방법이 없어.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오해를 하는 거라. 저 사람이 불행하면 자기 자신의 자애를 영글게 할 생각을 안 하고 저걸 자꾸 이미지화만 시킵니다. '저 사람이 행복하기를' 그렇게.

 

그런데 자애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렇게 이미지화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미지화해서 한다고 할 거 같으면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모든 존재들을 하기 전에, 여기 우리 선원에 있는 사람들이 다 행복하기를, 그러면 여러분들이 눈감고 있으면 요사람 요사람 요사람 다 이미지화 할 수 있습니까? 못한다는 거라. 안 떠오르는데 어떻게 이미지화 해?

그런데 어떻게 이 선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할 수가 있어? 그건 그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할 것 같으면 내가 그마만한 힘을 지녀가지고 이 사람들이 다 행복하기를 하고 요 위에서 그냥 무작위적으로 '행복하기를' 하고 쏘아 보내야 만이 이게 다 미칠 수가 있는 거라.

 

'돌아가신 분이 행복하기를' 지금 돌아가신 분이 어디 있는지 아나? '천신들이 행복하기를' 천신이 어디 있고 뭘 하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게 미칠 거라? 방법이 없는데도 자꾸 그렇게 할려고 그럽니다.

'우리 가족이 행복하기를' 아니면 뭐 '우리 선원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괜히 공염불들만 하고 있다는 거라. 자애수행은 절대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자애수행 하는 걸 잘 배우도록 그렇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자! 한번 스님 따라서 해보십시오.

자애는--- 자애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모든 존재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모든 존재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모든 존재들이 이롭기를 바라는 마음--- 모든 존재들이 이롭기를 바라는 마음

 

그거 딱 세 가집니다. 자애는!

우선 자신한테 하면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자신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자기 자신이 이롭기를 바라고, 그거 딱 세 가지를 명심을 해야 됩니다.

자애는 어떤 경우든지 자기 자신이 하는 겁니다.

모든 존재를 향해서 자애를 낸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해야 되는 것이지 그 밖의 존재를 향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단지 이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사람을 생각을 하면서 수행은 누가 해야 돼? 내가 해야 되는 거라. 내가!

저 사람을 향해서 마음을 내면서도 이 사람이 이미지화 되든 안 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자꾸 이미지화를 시킬려고 그러는 거라. 이 사람이 떠올라야만 자애가 거기에 미칠 거라고 생각하니까 이미지화 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자애형성을 하는 걸 못하는 거라.

 

이 사람을 생각을 했으면 생각한 대상을 향해서 그게 내 머릿속에 떠오르든 안 떠오르든 그건 놔둬버리라는 거라. 단지 마음을 거기에만 향하도록 하면 돼.

그러고 나서 마음에서 자애를 자꾸 형성시키도록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아, 저 사람이 진짜 행복하기를' '저 사람이 진짜 괴로움이 없기를' '이로움이 있기를' 하는 마음을 계속적으로 가지면 자기 자신이 그 자애로 인해가지고 마음이 굉장히 깨끗해지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기쁨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되는 거라.

그러면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안마치고 하는 것은 그 차후의 문제라. 단지 나는 그 사람을 향해서 자애의 마음을 내기만 하면 되는 거라.

그게 자애의 기본입니다.

항상 그걸 명심을 해두어야 됩니다. 자애는 어떠한 경우든지 다른 대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자애수행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란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자애의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쁜 말 할 수 있을까?

없습니다! 괴로움 받기를 바라지 않고 해칠려고 하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말들, 남에게 나쁜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애가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자애가 없기 때문이라.

자애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그럽니다.

몸으로써 하는 자애, 말로 하는 자애, 마음으로 하는 자애. 몸이나 말이나 생각이 자애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들이 아니면 나는 자애가 없는 상태라. 그러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리 자애를 방출한다 하더라도 그거는 오히려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자신에게 먼저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것들이 자애에 의해서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자꾸 돌아봐야 되는 거라.

 

수행을 할 때도 그런 자애의 마음을 지닌 채 수행을 할 거 같으면 빨리 진척이 있게 됩니다. 또 다른 것들 일상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자애의 마음을 지닌 채 일상생활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그 목표가 달성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되게 기분이 좋습니다.

자원봉사 하는 사람들을 한번 봐봐요. 거기 가서 어떨 때는 힘든 일을 하고 어떨 때는 설거지 하고 그 더러운 것들을 다 치워주고 하는데도, 그 사람들이 좋아하고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으니까 기쁘게 하는 거라. 몸은 힘들어 죽겠는데 지는 기분이 좋아가지고 '헤' 한다는 거라. 자애를 지닌 채 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

그런데 의무적으로 그걸 할려고 해봐. 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은 자애의 행위지만 너무 힘들어. 하기도 싫을 뿐 아니라. 그래서 항상 어떤 것을 하든지 행위를 하든지 말을 하든지 마음에 품는 거라든지 자애를 지닌 채 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게 일상생활에서 여러분들이 반드시 해야 되는 그런 것들입니다.

 

자! 그러면은 한번 봅시다.

이 '까라니야 멧따 숫따(자애경)'를 줄여갖고 보통 '멧따 숫따(자애경)'라고 그렇게 합니다. 그 내용들을 한번 쭉 보면서 아, 일상생활에서 적어도 이런 것들을 조심하고, 이런 것들을 행해나가면 자애가 자신도 모르게 형성되는구나 하는 것들을 여러분들이 알게 될 겁니다.

 

처음에 '장소',

'까라니야 맛타 꾸살레나 얀땅 산땅 빠당 아비사멧짜~~' 이렇게 진행이 됩니다.

그런데 이거는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자애수행 하는데 장소가 여러분에게 그렇게 필요합니까? 장소는 사실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이, 조용하고 한적한 곳만 자꾸 자애의 장소로써 잡을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언제 한적하고 조용한 장소가 되기를 바랄 거라? 그건 안 되는 거라. 그거는 출가한 스님들이나 하는 일이지 여러분들이 할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명심해야 되는 것은 그러한 '마음의 장소'들을 반드시 만들어야 됩니다.

뭐가 있겠어요? 그걸 열 가지로 보통 얘기합니다. 마음에 감각적인 욕망이 있으면 자애수행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수행자들 : 없습니다.)

없습니다! 그럼 내 마음에 감각적인 욕망이 없도록 만들고, 감각적인 욕망이 있으면 아, 그거 내려놔 버리고 나서 자애의 마음을 지니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남들을 생각하면서 악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 악의를 일으킨다고 그럽니다. 뭔가를 이미지화할 때 악한 마음을 품어서는 어떤 경우든 안 됩니다. 그래서 아, 내가 지금 남을 싫어하고 짜증나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가?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은 여러 가지 해야 될 일을 마치지 못한 것들, 그런 것들이 없는가? 왜냐하면 자애수행을 하다가 그런 것들로 방해를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을 안 껐다고 생각이 들 것 같으면 불끈다고 마음이 가버리면 자애가 깨져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의 장소들을 자꾸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내가 자애수행을 할 때는 어떤 경우든지 말을 할 때든 행동을 할 때든 그러한 것들이 없는 상태에서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아, 내가 남에게 나쁜 말을 할려는 마음이 없는지, 아니면 내가 욕심 부릴려고 하는 것이 없는지, 아니면 내가 허둥대면서 뭔가를 할려고 하는 것들이 없는지, 그런 것들을 자꾸 체크해가지고 그런 것들이 없는 상태에서 자애스러운 행위들을 할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장소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자애를 행하기 위한 마음의 상태를 가지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가끔씩 그럴 때도 있습니다. 스님들이 법문을 하는 것, 아니면 누군가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말하다가 자기가 그 속에 흥분이 돼가지고 그 속에서 막 하는 것들을 봅니다. 그럴 때는 아, 저 사람이 조금만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 금방 알건데, 그러면 중간에 가라앉히고 다시 얘기할 수 있을 건데 왜 저렇게 계속 저 감정에 쌓여가지고 그렇게 말을 할까 하는 그런 걸 가끔씩 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자애수행을 하면서 자꾸 자신을 돌아보아야 됩니다. 그런 마음의 장소들을 분명하게 내가 깨끗하게 닦아놨느냐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자애를 하다가도 계속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자애를 하면서 사랑의 마음이 생기는 거고, 자애를 하면서 자꾸 좋고 싫은 마음들이 생겨나고 이렇게 바뀌어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마음을 닦는 것들, 마음의 자리를 자애로 행하는 것들, 어쨌든 자애는 마음으로 하는 건데 마음이 항상 깨끗하게 잘 돼있는 상태에서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로 되어있는 것을 스스로 자꾸 확인을 해야 돼.

그렇게 됐다 칩시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이 자리를 좋은데 잡는 거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그렇게 마음의 자리를 닦았다 칩시다.

 

그러고 나서, 평상시 일상생활에서 습관들이려고 해야 되고,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들을 쭉 열거를 해놓았습니다.

 

그 첫 번째가 '삭꼬(sakko)' 무슨 일에도 뛰어나다, 유능하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 얘기는 무슨 얘기냐면 뭔가를 할 때 하는 걸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만이 잘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자애의 마음을 지닌 채 뭔가를 자꾸 행하라는 거라. 자애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 뭔가를 하고, 또 자애와 이 사띠-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이 같이 병존해서 뭔가를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건 유능한 것이 아닙니다. 지가 뭐 했는지도 모르게 되는 거고, 뭔 말하는지도 모르게 되는 거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어떤 것들을 행할 때든지 항상 고요하고 침착하게,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하는 습관들을 들이는 것들, 빨리빨리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그 일을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정확하게 하는 것은 속도는 느린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속에는 자기 자신의 만족감들이 있습니다. 항상 그렇게 행해나가도록 모든 일들을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는 '우주(ujū)' 올바르게 하라. 행해지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말을 하더라도 항상 자애의 마음을 지닌 채 뭔가를 말을 하게 될 때 그 사람이 도움이 되는 것이지, 이걸 할까 말까 해서 안 해버릴 거 같으면 그건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는 거라.

일상생활에서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행하지 않고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왜 그렇게 쓸데없이 시간들을 보내느냐는 거라. 그러지 말아라는 거라. 마음에서 뭔가 내가 이걸 해야 되겠다 할 거 같으면 그걸 하라는 거라.

가끔 그럽니다. 부산에서도 "스님, 오늘 내가 청소를 하고 싶었는데 그냥 좀 있으니까 누가 청소를 해가 청소를 못했습니다." 그럼 뭐라 할까 스님이. "하고 싶을 때 하지 그럼 니가 했을 거 아이가." 자기는 하고 싶은데 못한 것이 아쉬워서 그 얘기를 했는데 스님한테 찐빠 먹게 되는 거라. 그런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좋은 줄 알 때 해야 되는 거라. 하지도 못하고 '해야 되는데, 해야 되는데', 하면서도 끝끝내 못하고 그냥 끝나버리는 거라.

 

살아가면서 행해지지 않는 것들은 업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다 업이 됩니다. 마음속에 짓는 것들이기 때문에. 행하지 못한 것들은 대부분 보면 싫은 마음이나 안 좋은 마음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차라리 행했으면, 좋은 일을 행했으면 그것은 좋은 업이 됐을 건데, 행하지도 못하고 드러나지도, 결과도 없을 뿐 아니라 나쁜 업을 계속 짓게 되는 거라. 그래서 되도록 실천되지 않는 것들은 아예 생각조차도 안 할려고 해야 되는 거라. 실천할 수 있을 거 같으면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애매모호하게 뭔가를 계획하고, 뭐하고, 망상하고, 하는 것들은 그냥 끊어버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게 '우주'의 의미입니다.

 

그다음에 '수후주(suhujū)' 라고 하는 것, 행하기는 행하는데 자신을 속이지 않고 행해야 됩니다. 가식적으로 뭔가를 행할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자신이 행한 것들을 자꾸 남에게 감출려고 한다든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끔 그럽니다. “스님, 월말 결산을 하는데 금액은 공개를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왜 그러는데?” “많이 낸 사람은 기분 좋겠지만 적게 낸 사람은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안 생기겠습니까?” 그 말이 맞긴 맞습니다 일정 부분은.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큰 것이 있습니다. 감출려고 하는 것들! 뭐 누가 얼마내고 이런 것들을 모르면 전체 토탈을 결정하는 사람이, 그건 스님이 하는 게 아니니까, 재가자들이라고 하더라도 뭐 다르게 결정해가지고 누구누구 보시했다, 그러고 나서 그걸 백만 원 들어왔는데 오십만 원 들어왔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 어떻게, 감춰버리면 그걸 알 방법이 없어져버리는 거라. 또는 누군가가 뭔가를 행했을 때, 그 행한 것들이 드러나게 됐을 때 오는 나쁜 부분보다도 오히려 그것을 드러냄으로 인해서 감출려고 하는 것들을 방어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로운 점들이 많다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어느 나라에서든지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항상 금액 자체를 공개합니다. 그런데 그쪽에 있는 사람들은 그 금액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가타부타를 안 합니다. '저 사람이 많이 냈네, 저 사람이 적게 냈네.' 자기 것만 보면 되지 넘이 걸 볼 이유가 뭐 있어. 자신이 형편이 되면 많이 내는 거고, 형편이 되지 않으면 적게 내는 거고, 뭐 여기 선원에 온다고 해서 뭐 회비 안 냈다고 해가지고 오지 마라 하는 게 있어? 그런 게 없다는 거라.

법은 어떤 경우든지 차별 없이 하는 것이고, 그 대신에 자신이 공덕 짓는 것들은 십 원 냈으면 십 원 공덕이 되는 거고, 백 원 냈으면 백 원 공덕이 되는 것들이라.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행한 것들만 기억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일들에 대해서는 관여를 안합니다.

 

그런데 유독 한국은 남 눈치를, 남 어떻게 하는 것만 자꾸 생각을 하는 거라. 그러니 감출려고 하는 것들도 많아지는 거고, 아니면 자신을 갖다가 과대포장 해가지고 뭔가를 드러낼려고 하는 것들도 많아지고, 그건 굉장히 안 좋은 습관들입니다.

 

행한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감추어지고 드러나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나쁜 행위를 했을 거 같으면 나쁜 행위가 드러나지 않고 그것이 잠재해 있을 방법은 없습니다. 좋은 행위를 했으면 좋은 행위도 드러나지 않고 감추고 결과가 나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원인·결과에 의해서 드러나게 돼있다는 거라.

그럼 자신이 그걸 감추고 또는 그것을 나쁜 방향으로 이용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은 자기 자신에게 손해라는 거라. 해를 입히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건데 자기 자신은 오히려 해꼬지를 하고 자기 자신의 행복을 해치는 행위들을 하는 거라. 그런 것들을 습관화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반드시 그냥 그대로 드러내도록 해야 됩니다. 가식스럽게 뭔가를 할려고 하는 것들은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다음에 '수와쪼(suvaco)' 이건 습관들이는데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항상 스님이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말을 할려고 하는 것보다 말을 잘 들을려고 해야 됩니다. 말 잘 듣는 훈련들을 하라는 거라.

한번 해보십시오. 집안에 자식들이나 누가 말을 할 거 같으면 일체 말하지 않고 그 말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계속 듣기만 할려고 해보십시오. 듣기만 하는 데 귀를 닫고 들으면 안 되는 거고 귀는 열어놔 놓고! 참 어렵습니다 듣기만 하는 것은.

틀림없이 말하는 중간에 뭔가 말이 튀어나올려고 그럽니다. 마음속에서. 들을려고 안 하는 거라. 그런데 듣기만 해보라는 거라.

'새로운 말이다, 애가 처음 하는 말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냥 듣기만 해보라는 거라. 그럼 잘 들립니다. 새로운 말 하는데! 내가 한 번도 못들은 얘기하는데! 실제 그렇잖아요. 여러분들은 수시로 변해나가고 있는 거고, 마음도 그렇게 수시로 변해나가고 있는데 똑같은 마음들이 어디 있고 똑같은 것들이 어디 있어요? 계속 처음 말이라는 거라. 그러니까 처음 말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듣기만 해보라는 거라.

 

듣는 훈련들을 잘해야 만이 말하는데 익숙해집니다. 남의 말을 잘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독선적으로 흘러버립니다. 그리고 남의 말을 잘 듣지 못하면 자꾸 자신의 견해가 생겨나버립니다. 자신의 영역이 생겨나서 거기에 누군가 침투할 거 같으면 화가 일어나게 되는 거고,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 깰려고 하는 경우에는 그걸 투쟁하게 되는 거고, 끊임없이 싸움을 일으키는 말들과 행위들을 하게 된다는 거라. 듣지 못하기 때문에!

 

잘 들을 것 같으면 자신의 견해 또 자신의 것들을 파괴할려고 한다? 그냥 둬버리면 돼. 그런다고 해가지고 그게 파괴돼가지고 없어지는 거라?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계속 듣는 훈련들을 안 해놓으면 자기 할 말들만 자꾸 할려고 그럽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라. 말하는 것도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잘 말을 해야 되겠지만, 그래서 말을 할 때는 항상 내가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을 체크해서 자애의 마음이 있을 때 계속 뭔가를 갖다가 말을 할려고 해야 되겠지만,

듣는 훈련을 먼저 해야 됩니다.

잘 들을 수 있도록, 그것도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그 사람이 '아, 새로운 말을 하네', 익숙하게 들은 말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말을 하네 하고 그냥 저 사람 말을 그냥 그대로 들어주는 거라. 내가 들어주는 것만 하더라도 저 사람이 행복해지는데. 얼마나 그 사람은 말하고 싶었겠어. 말하고 싶으니까 말을 하는 거라. 그런데 그 소원도 못 들어줘? 그냥 들어주라는 거라. 그걸 자꾸 훈련들을 해보라는 거라.

 

아, 5번인데 아직 3페이지도 못 갔는데 14페이지는 언제 할 거라. 속도를 좀 빨리 올려가지고, 왜 그러냐면 이거는 평상시에 익혀놔야 하는 것들을 익혀놔야 만이 그다음에 자애수행을 할 때 좀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나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쨌든 오늘은 요까지만 하고 그냥 이거 쭉 보고 와. 보고 오고, 뒤에 부분 '어떤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 있는 이런 것들도 다 여러분들 해 오십시오.

8페이지 구체적인 명상 실천방법 거기부터 다음 시간에 얘기하겠습니다.

요거는 지금 얘기했지만 일상 생활에서 자애수행 하는 방법입니다. 요거 끝나고 나면 멧따바와나라 해서 집중적으로 자애수행 하는 방법에 대한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요까지는, 7페이지까지는 다했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