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행할 때의 마음가짐 (20160401.대구)
오늘은 「수행할 때의 마음가짐」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수행할 때 여러분들이 경험하는 것들이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했을 때 마음은 동요하기 쉽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싫은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굉장히 관계가 안 좋아서 또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서 그 사람이 싫어! 그래서 그 사람만 내 앞에 탁 나타나면 마음은 성이 먼저 확 올라오게 되는 거라. 분노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럴 때 그 분노를 관찰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잘 안되죠? 왜 안될까? 성이 났을 때, 왜 밖에 있는 대상이라는 사람이 아니고 성이 난 마음을 관찰해야 되는데, 성이 난 마음을 관찰할 때 왜 잘 안될까? (수행자 대답 : 나라는 것이 있어서) 물론 '나'라는 것이 있어서 그렇죠.
항상 생각해야 되는 것은 밖에 있는 대상들은 그걸 내가 알아차릴 대상인 것일 뿐인 것이지 그것이 나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아닌데, 자꾸 마음이 밖으로 쏠리게 되는 겁니다. 대상은 실제로는 나에게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입니다. 그런데 그 현상들도 실제적으로는 그것도 지 성품대로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것뿐인데 그걸 뼈저리게 체험하지 못해서 그러는 거라.
손바닥을 이렇게 탁 대어가지고 붙였다가 떼면 느낌들이 있습니다. 그건 나에게서 일어나는 느낌이죠? 그래서 그게 따뜻한 느낌이든 그렇지 않으면 가벼운 느낌이든 어떤 느낌이든 각자가 느끼는 걸 겁니다.
그런데 그 느낌은 내가 안다고 해가지고 그 느낌이 사라지고, 아니면 내가 모른다 해가지고 느낌이 안 일어나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느낌은 당연히 손바닥이 서로 부딪쳤으면 일어나지게 되는 겁니다. 내가 알든 모르든 항상 일어나고 또 손바닥이 떨어지면 사라지게 돼있는 겁니다. 단지 그것을 내가 마음으로 손바닥이 부딪쳤을 때는 이런 느낌이 있고, 손바닥이 떨어졌을 때는 이런 느낌이 있다 하고 아는 것뿐입니다.
밖에 있는 대상도 마찬가집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화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화를 알아차리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화가 사라지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화가 그렇게 스르르르 사라지는 모습을 봤다, 화가 일어난 것들은 그것도 마음입니다. 마음으로 안 겁니다. 화가 사라지는 것도 마음으로 안 겁니다. 그럼 화가 일어난 것 화라고 하는 것 자체는 '이것도 마음일뿐이다' 하고 이해해버릴 것 같으면 크게 문제가 안됩니다.
그전에 일차적으로는 밖에 있는 대상, 그 사람이 나에게 원수 같은 사람이고 화를 일으키는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걸 대상화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관찰하는데도 불구하고 관찰이 잘 안 되는 것은, 그 화의 자연적인 성품들을 모르기 때문에 자꾸 그렇게 되는 거라.
그래서 실제로 수행을 할 때는 본인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해서 그것을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그래서 본인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지가 일어날 상황이면 일어나게 되는 거고, 사라질 상황이 되면 사라질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여러 가지 궁리를 한다, 그것도 그 조건들이 맞아지면 일어났다가 그 조건이 사라지면 사라지는 겁니다. 특별하게 대단한 것은 없습니다, 실제로는. 그런데 그걸 자꾸 대단하다고 생각을 하니까 '어, 내가 모르던 것들을 알았다' 하고 괜히 기뻐하는 것뿐입니다. 수행이 안 될 때 그럴 때 수행의 힘들이 깨져버리게 됩니다.
밖에 것이 아니고 안에 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해서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대상 자체도 저절로 왔다가 저절로 지 성품대로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자꾸 이해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지가 걸어왔다가 지가 걸어갈 상황이 되면 지가 걸어가버리게 되는 거고, 마찬가집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대상들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도 그와 같다고 자꾸 이해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힘도 생겨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대상 자체도 자꾸 삐뚤어지게 알게 되는 겁니다.
하나 더 예를 들어볼까요? 동남아시아 같은 경우에는 따로 스님들의 샤워장이 따로 돼있습니다. 그럼 거기서 비누를 가지고 머리부터 해가지고 온몸을 씻습니다. 그럼 당연히 비누 냄새가 납니다. 여러분도 꼭 마찬가질 겁니다. 그 비누 냄새를 맡았어요.
냄새는 왜 코로만 맡을까? 왜 코로만 맡아요? 다른데 눈으로도 맡고 귀로도 맡고 하면 좋을 건데, 귀로나 눈으로는 도저히 그 냄새를 맡을 수가 없어요. 자기 역할이 다르죠? 역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코는 코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내가 그걸 맡고 싶다고 해가지고 맡아지고 맡기 싫다고 해가지고 그게 냄새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밖에 있는 냄새는 그대로 있는 거고, 코는 당연히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냄새를 맡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때 알았어요. 아, 이것은 육근을 통해서 수행하는 것은 실제로는 내가 하는것 같아도, 실제로 그렇지가 않더라는 거라. 그냥 자기 역할들을 하고 있는 것인데, 단지 나는 그것을 아는 것뿐이라는 거라. 모른다 해가지고 그게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럼 냄새는 코로만 맡는다고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아는, 코로만 냄새 맡는다고 할 때의 아는 것은 그전에 아는 것하고는 아는 것이 달라져 버렸습니다. 그전에는 내가 일부러 그 냄새를 맡을려고 해야만이 그 냄새가 맡아지는데, 인제는 그런 게 아니고 마음만 거기에 두면 냄새를 저절로 맡아지게 되는 거라. 그러다가 그것이 마음으로 돌아가버리는 것 같으면 냄새를 맡다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으로, 마음을 또 다른 데로 돌릴 것 같으면 그 냄새가 반드시 사라지는데, 실제로는 냄새가 여기는 존재를 하고 있는 거라. 마음이 그렇게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뿐인 거라. 그거 외에는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한테 얘기를 할 때 코로는 냄새만 맡을 수가 있습니다. 냄새는 코로만 맡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해는 그냥 이해해서 아는 것이지 실제로 그걸 체험한 것은 아닙니다. 체험한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할 때는 그 강도가 다르다는 거라. 냄새는 실제로 코로만 맡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 마음의 힘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마음의 힘하고, 스님이 알고 있는 마음의 힘은 분명히 달라져 있다는 거라.
마음의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알아차리는 양도 많아질 뿐 아니라 알아차리고 변해가는 현상들도 더 많이 알 수 있게 되는 거라. 단지 그것 뿐 인거라.
그것뿐인데 자꾸 우리는 수행하면서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것들 아니면 특별한 어떤 것들을 기대를 하게 되는 거라. 기대를 하면 할수록 마음은 꺼풀을 씌워버리기 때문에 더이상 나아가지를 못하게 되는 거라.
수행이 참 잘 안될 때 태국에 있는 스승님이 저쪽에서 쭉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어요. 쭉 걸어올 때 걸어오는 모습은 그냥 눈으로만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와지는데 나중에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그 소리만 들리고 있는 거라. 실제로 눈은 보고 있는데. 마음이 어디 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소리가 강하게 들리는 상태가 되니까 그 소리만 듣고 있게 되는 거라. 그러면서 저쪽으로 가는 모습이 보일 때는 그 소리는 들리지 않고 가는 모습만 보이게 되는 거라.
실제로는 눈은 저 저쪽부터 해가지고 또는 귀는 저쪽부터 해가지고 자기 역할들을 하고 있던 거라. 그런데 자기 영역에 올 거 같으면 그 영역만 내가 알고 있는 것뿐 인거라. 그거뿐인데 실제로 우리가 알 때는 그냥 보고 듣고 하는 것처럼 되는 거라. 그거뿐 이라는 거라. 그것을 보고 내가 그랬어요. 아, 신통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개념화된 것 뿐이다.
예를 들어봅시다. 누군가가 저기서 요리를 만들고 있다. 그런데 만약에 여기서 짜장면을 만들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실제로는 냄새가 안 맡아지는데 여기서, 짜장면 냄새를 맡을려고 할 것 같으면 짜장면 냄새를 맡을 수가 있습니다. 내가 짜장면 냄새를 알기 때문에! 그러면 여기서 짜장면 냄새를 맡아. 그런데 본인은 그게 실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가짜로 지어내는 것인지 분간을 못하는 거라, 그러면서 본인은 아, 내가 저 멀리 떨어져있는 짜장면 냄새를 맡는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되는 거라. 실제 맡은 건 아니죠? 그런데 그걸 알고 있는 것뿐입니다.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은 그런 겁니다.
그렇다고 내가 신통이 있다고 해가지고 저멀리 있는 짜장면 만드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실재하는 것이든 아니든 간에,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본인은 거기에 쏙 빠져버리게 되는 거라. 그래서 그런 쪽으로 계속 개발되게 되는 거라.
그런 적이 있었어요. 태국에서 숲에서 아마 발정기가 난 거겠죠. 뱀들이 싸우는 적이 있어요. 나는 그것을 보지를 않았는데, 테레비에 뱀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뱀이 싸우는 소리가 진짜 천둥소리 같이 팡팡팡팡 하면서, 수만 마리가 나와서 서로 떼를 지어서 싸우는 거니까, 그런데 그 소리를 들었어. 그랬는데 앉아가지고 그 한참 뒤에 앉아서 뱀이 싸우는 모습을 상상을 하니까 그 상상하는 모습으로 인해서 그 소리가 들리는 거라. 실제로 내 옆에서 뱀이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거라. 그리고 그 소리가 그대로 들리고. 그럼 난 착각을 하는 거라. 아, 내가 뱀이 싸우는 소리를 저 멀리에 있는 것들을 듣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되는 거라.
스승님이 한번 왔다가 저리 가는 모습 하나를 보고도 마음이 실재하는 것들을 아는 것과 실재하지 않은 것을 아는 것은 차이가 나는구나 하는 것들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수행할 때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서 수행의 진척은 굉장히 좌우를 많이 하게 됩니다. 그냥 가만히 놔주면 됩니다. 놔주면 되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걸 가만히 놔주질 못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 「수행할 때의 마음가짐」이라는 것들을 얘기를 하겠습니다.
깨달음을 이룰려면 열심히 수행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대상들을 끊임없이 알아차려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코를 관찰하고 있다. 코에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관찰했다, 그러면 코의 숨이 여러분들 수행의 대상이 될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관찰하다 보니까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그것이 변하고 있는 것들을 본다든지, 아니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을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고 숨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물질적인 현상이 있고, 그래서 그것이 분리돼서 보인다든지 이런 식으로 조금씩 지혜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 물어볼게요. 지혜는 대상으로 인해서 일어난 겁니까? 아니면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겁니까? (수행자 : 마음으로...)
물론 대상이 있어야만이 지혜는 일어나지게는 됩니다. 그런데 대상일 때는 그것으로 인해서 지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상인 줄 단지 아는 것뿐입니다.
언제 일어나집니까? 내가 마음으로 '아, 이게 육체적인 현상이다. 이게 정신적인 현상이다' 알게 될 때 지혜가 일어나게 됩니다. 마음으로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이 다르다고 알 때 지혜는 일어나지는 거라. 대상으로 인해서 지혜가 일어나진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큰 오산이라는 거라.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나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대상은 내둬버리고 마음은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서 수행은 훨씬 진척이 빨리 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항상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먼저 고요하고 편안하고 가볍게 만들어라" 하고 그러면 그 마음은 당연히 대상을 알아차리게 되고, 그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알아차리는 상태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전에는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 알아차려졌는데, 마음의 힘이 강하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변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마음의 힘이 더 강해지면은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에서 자기 마음이 그냥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이지 거기에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상태로 바뀌게 되고.
마음의 힘의 강도에 따라서 지혜가 일어나지는 것이지 그 실재하는 대상으로 인해서 일어나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수행할 때 자꾸 대상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배면 배, 마음이면 마음, 느낌이면 느낌, 그렇지 않으면 뭔가 화가 일어났으면 화! 그 대상 가지고 구워 삶아먹을 거라? 대상은 저절로 왔다가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대상으로 인해서 지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닌데도 자꾸 우리는 대상을 붙잡을려고 합니다.
수행이 제대로 될려면 대상은 그냥 대상일 뿐이라고 알아야 됩니다. 대상은 단지 내가 알아차리는 도구일 뿐이라는 거라. 도구일 뿐 인 것이고 내가 지혜가 일어나고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마음의 여러 가지 현상 마음의 힘에 인해서 좌우된다고 자꾸 생각을 해야 됩니다.
「수행할 때 바른 마음가짐!」
처음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수행하다 보면 여러 가지들이 일어나집니다. 기쁜 것들도 일어나지는 거고, 여러 가지 빛이 보이기도 할 거고, 마음이 고요하게 평온한 상태가 되어있는 것들을 알기도 할 거고, 그리고 또 어떤 경우에는 아, 내가 이렇게 가는 것들이 맞구나 하는 그런 확신들이 들기도 할 거고, 그럴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대상입니다. 대상일뿐 입니다! 확신이 들었다고 하는 마음도 그것도 하나의 대상입니다. 그것도 변하는 현상일 뿐인 거고, 빛도 마찬가지로 변하는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면 빛을 대상으로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빛으로 해가지고 일어나는 마음을 대상으로 했을 때 지혜가 일어나게 되는 거라. 지혜가 열리게 되는 거라.
그런데 자꾸 사람들은 거기에 함몰돼버립니다. 대상쪽으로 가버립니다. 새로운 대상을 만날 것 같으면 그 대상쪽으로 마음이 가버리게 되는 거라. 꼭 어린 아이들이 새로운 물건을 보면은 그것에 마음이 혹 쏠렸다가 그것이 시들어지면 또 다른 장난감으로 마음이 혹 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수행할 때 그런 식으로 자꾸 해나가게 된다는 거라.
그냥 대상은 내둬버리면 됩니다. 대상으로 인해서 알아차리는 것들 그것만 지속해나가면 됩니다.
그래서 처음이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라 하는 거라. 수행할 때 기대하지 말고 그냥 꾸준하게 해나가면 됩니다. "대상은 대상일 뿐이다" 하고 생각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싫어하는 사람도 대상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난 것들 그 마음을 대상으로 해서 알아차려야 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해서 알아차리는데, 그것도 대상으로 봐야되는 것이지 이것도 대상으로 보지 않고, 꼭 마찬가지로 싫어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냥 그것을 붙잡을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당연히 여러분들은 기대를 하게 됩니다.
싫어하는 마음이 변해서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거 왜 그러고 있어? 안 없어지면 우짤 건데? 안 없어지면 안 없어지는 대로 그냥 놔주면 돼. 그러면 싫어하는 사람이 왔던 것처럼 지가 가고 싶으면 가는 것처럼, 그러한 마음도 싫어하는 마음도 저절로 사라지게 돼있는데, 지가 그 마음을 또 다르게 대상으로써 붙잡아버리는 거라.
기대 안 해버릴 것 같으면 싫어하는 마음은 당연히 자기 갈길 대로 그대로 사라져버립니다. 변해가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들을, 이미 기대를 가지고 '그 마음을 관찰을 해야지',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났다는 걸 관찰해야지'
관찰을 뭘 할려고 그러는 거라? 싫어하는 마음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걸 기대하면서 그걸 하는 거라. 그렇게 하면 없어질 방법이 없습니다. 지가 붙잡고 있는데 어떻게 없어질 거라.
그것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도 하나의 대상일 뿐이라고 자꾸 마음을 먹고, 그래서 대상은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의 상태에 따라서 스스로 변해가게 돼있다는 거라. 코는 코의 역할을 하게 돼있는 것이고, 귀는 귀의 역할을 자기 스스로 자기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있는 상태 내에서는. 멀면 안 들리게 돼있는 거고, 가까이 오면 들리게 돼있는 겁니다. 그것을 내가 아는 것 뿐인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귀가 듣는 작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자기 작용들을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들리면 그냥 들린다고만 알아차리면 되는 거고, 냄새 맡아지면 냄새 맡아진다고 알기만 하면 됩니다.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는 거라. 그거 더 이상 거기다가 뭘 바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할 때 조심해야 되는 것이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냥 습관적으로 그것들을 기대해버리면 안됩니다. 당연히 숨을 들이쉬었으면 내쉬게 돼있습니다. 그럼 들이쉬고 나서는 내쉬는 걸 기대해버릴 것 같으면 자기 스스로 내쉬는 걸 조절하게 되는 거라.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관념화되고 그리고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자꾸 변형되고 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할 때 어떤 것들이 나타나든 아니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기대하지 말고, 그냥 내가 하는 것은 그냥 그때 당시 대상을 알아차리기만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거 이상은 할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설혹 내가 몰랐으면 어떻게 할 건데? 냄새가 옆에 있어도 냄새를 못 맡았으면 어떻게 할 건데? 그냥 그대로 그것뿐 이라. 냄새도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예리해지게 되면 그 냄새는 또 맡게 되는 거라. 그렇게 마음을 먹고 수행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것!
수행하라그럴 것 같으면 용을 좀 쓰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용을 쓰는 것들.
한시간 좌선하고 한시간 경행한다 마음을 먹었으면 그냥 그렇게 한시간 좌선하고 한시간 경행하고 하면 될 건,데 좌선 한시간 하다가 보니까 뭐 좀 알려고 하는 것 같거든. 그러면은 조금 더 합니다. 조금 더 하게 되는 거라.
조금 더 알아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알아지는 것들도 조금 전에 알았던 범위내에 있는 것이지 그 이상 확 바뀌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 더 할려고 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인 거라! 욕심을 가지게 될 것 같으면 그 욕심으로 인해가지고 대상을 알아차리고 하기 때문에 그 이상 가지를 못하는 거라.
남을 자애의 마음으로 볼려고 할 것 같으면 자애수행을 열심히 해도 자애로써 남을 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마음을 지속적으로 가지면 그 사람을 자애롭게 대하게 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자애롭게 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이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마음을 계속적으로 가지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나쁜 상태에 빠지지 않는 것들을 상정하고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내 마음에 자애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떠한 분노도 일으키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해서 해꼬지 하려는 마음들을 일으키지 않겠다 하고 마음을 먹으면 그 사람을 자애롭게 대합니다.
이렇게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분노를 일으키지 않으면 나는 항상 그 사람에 대해서 자애롭게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걸 자꾸 사람들은 까먹어버립니다. 까먹어버리고 어떻게 하느냐면 그 사람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만 자꾸 가질려고 합니다.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만 계속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수행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좀 더 바람직한 방향은, 나에게 화가 일어났으면 화가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화가 사라진 자리는 반드시 자애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일어나는 화를 다스려버리면 그 사람을 대할 때 자애롭게 대하게 되는 거라. 그것이 우선인 것이지,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하는 마음이 우선이 돼서는 안 된다는 거라.
수행하면서 대상을 자세히 알려고 하면 안 됩니다.
대상을 자세히 알려고 하다가 보면 욕심이 생깁니다. '스님이 분명히 대상은 변한다고 했는데', 그럼 앉아서 자기가 대상이 변하는 걸 자꾸 볼려고 욕심을 부린다는 거라. 그래서 들이쉬는 호흡도 대상이 안 변하니까 들이쉴 때 지가 일부러 대상을 변하게 만드는 거라. 숨을 들이쉬었다가 끊었다가 들이쉬었다가 끊었다가 이럽니다.
변하기는 변하죠. 그런데 그거는 욕심의 마음이 강하게 있는 상태에서 그 상태를 보기 때문에 그거는 인위적이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스스로 자기가 만드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을 좌선을 두시간 한다고 해가지고 더 훨씬 많은 것들을 아는 것이 아니고, 내가 좌선 한시간 경행 한시간 한다 해가지고 적에 아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대상을 바라볼 때 그것들을 붙잡을려고 하지 않고 그냥 욕심부리지 않고 그냥 대상인 것만 알고 알아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지면 훨씬 많이 알아집니다.
그러면 수행은 자연스럽게 해야 되는 것이지, 일부러 그것을 만들어가지고 할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좀 더 많은 것을 알려고? 좀 더 긴 시간 좌선을 한다? 그래서 경행을 빼먹어버린다? 발란스가 깨져버리는데! 수행은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은 균형을 잘 맞춰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대상을 자세히 알려고 하는 것보다는,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려고 하는 마음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지금 지속적으로 아는 것이 그냥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알고 있다, 그럼 지금 현재 알아차리는 힘이 그것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냥 그것만 하면 됩니다.
한시간 동안 좌선을 하겠다 그러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한시간 동안 하고 나서 다시 경행하면 돼.
그게 지금 맞는 것이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변하는 것을 알려고 좌선시간을 한시간 더 늘렸다, 변하는 것을 알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몸은 이미 수행에서 발란스가 깨져버리는 거라.
게으른 마음들이 어느 순간에 거기에 딱 들어와버립니다. 경행을 해가지고 노력하는 힘들을 키워줘야 되는데 그걸 안 했으니까 게으른 마음들이 딱 들어와버립니다. 그럼 변하는 것을 보다가도 어느 순간에 다시 또 마음이 고요해지면 대상을 놓쳐버리는 거라. 그냥 고요함에서 빠져버리고 있다든지. 아니면 다시 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알면서 나머지 한 시간을 또 지내게 돼버리는 거라.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지금 아는 것만큼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걸 욕심내가지고 더 많은 것을 알려고 하고 그 이상의 것들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무리를 하면 안 됩니다. 몸의 균형도 맞춰야 되고 마음의 균형도 맞춰야 되는 것이지, 그 발란스를 깨면서까지 해서는 안된다는 거라.
반드시 수행은 좌선과 경행같은 거는 균형을 맞추도록 하라. 지속적으로 하면서 마음이 항상 고요해져 있어야 되는 거고, 몸도 긴장상태가 완전히 풀어져 있는 상태에서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마음이 그 정도에 있다면 그 정도만 알면 됩니다.
마음의 힘은 발란스가 잘 맞춰져 있고 고요해져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의 힘은 훅 커져나가게 됩니다. 그걸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무리하지 말아라.
그래서 과도하게 뭔가 대상을 알려고 하고 그리고 그 상태들을 알려고 하는 마음들은 일단 버리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서두르지 말아라. 서두르지 않는 것입니다.
가끔씩 보면 경행하고 나서 좌선으로 들어갈 때 그냥 서둘러가지고 경행 끝내고 자리에 탁 앉아버립니다. 알아차림이 그사이에 싹 달아나버리는 거라.
그럼 다시 좌선해가지고 '요시! 알아차려야지!' 이미 발란스가 깨져버렸는데! 한참 동안 또 애를 먹게 되는 거라.
천천히 하십시오. 어떠한 경우든지 하나의 포지션에서 다음 포지션으로 바뀔 때도 천천히 그 상태를 그대로 이어갈려고 해야 되지, 바뀌었다 해가지고 그 상태는 딱 끊어버리고 다음 상태로 넘어갈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천천히! 몸도 천천히 움직여야 되고, 마음에서 생각하는 것도 천천히 해야 되는 거고, 알아차리는 것도 천천히 하면 할수록 알아차리는 것들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먹고 천천히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말을 할 때도 천천히 할려고 해야 되는 거고, 뭐든지 천천히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서두르는 버릇들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서두르다 보면 대부분은 보면 하나의 현상에서 다음의 현상으로 넘어갈 때 딱 알아차림이 끊어져버립니다.
뭔가 대상이 일어났다, 망상이 일어났다, '망상' 하고 알아차려가지고 망상이 사라지는데, 서두르면은 그다음에는 바로 인위적으로 호흡으로 돌아와버린다는 거라.
뭐하러 그렇게 서두르는 거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호흡이 알아차리는 걸 못하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호흡이 사라져버린다든지 호흡이 끊어져버려? 그거 아니라는 거라. 호흡은 자기 역할을 지금 하고 있는 거라. 내가 다른 걸 알아차리고 있을 동안에.
단지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완전히 보고 나서, 가만히 두라는 거라.
천천히, 마음이 다음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놔줘버리면 되는데 지가 왜 스스로 자꾸 뭘 만들어내느냐는 거라.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거라.
그래서 하나의 현상에서 다음 현상으로 넘어갈 때는 반드시 유념해야 되는 것, 천천히 하라! 그리고 인내하라!
인내하고 기다리면은 다음의 현상은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걸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가 자꾸 뭔가를 찾을려고 해서는 호흡이 균형 잡힌 것들이 딱 깨져버린다는 거라.
그 부분은 수행할 때 조심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집착하지 않고, 거절하지 않는 것.
좋고 싫고 무덤덤한 느낌이 일어나고 했을 때를 얘기합니다.
좋은 느낌이 있으면 좋은 느낌인 줄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런데 좋은 느낌이라는 것에 딱 집착을 하게 되면 그 좋은 느낌이 자꾸 새끼를 치게 됩니다. 싫은 느낌에 집착을 하게 되면 그것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하게 된다는 거라.
대상일 뿐입니다. 대상은 자기 스스로 조건에 인해서 생겨났다가 조건에 인해서 사라지게 됩니다. 내가 할 일은 그걸 집착하지도 않고 거절하지도 않고 그냥 그 대상인 것으로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런데 이게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는 잘 안 하는데, 느낌을 알아차릴 때는 대부분 걸리는 것이 집착하거나 거절할려고, 배척할려고, 붙잡거나 아니면 밀쳐낼려고 한다는 거라.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는 그리 안 하는데, 왜 느낌일 때는 그리 하는데? 느낌으로 알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느낌으로. 느낌도 단지 조건 따라 일어나는 것뿐입니다. 그럼 그냥 그대로 관찰하면 됩니다.
'어, 좋은 느낌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릴려고 해야 되는 것이지, '좋은 느낌이 어떻게 변하는가' 하고 생각한다든지, 아니면 좋은 느낌이 더 강해지길 바란다든지 할 것 같으면 딱 거기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좋은 느낌이 사라지는 걸 봐야지' 그것도 집착하게 되는 거라.
그 느낌이 여러분들을 해탈에 이르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 느낌 자체를 놓아버릴 줄 알아야만이 ,그리고 느낌 자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할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만이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들 집착하고 밀쳐낼려고 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거라. 똑같이 느낌도 대상일 뿐입니다.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몸의 포지션이 발을 들어올리고 들어올리는 게 끝나고 나면 나아가게 돼있습니다. 나아가는 게 끝나면 내려놓게 돼있습니다.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할 때는 그 움직임을 볼 때 물질적인 현상을 볼 때는 그냥 그런 줄 알고 있는데, 이걸 느낌으로 볼 것 같으면 이상하게 자꾸 발을 드는 것도 천천히 들어지게 되는 거고, 발을 들어올릴 때 느낌들을 세세하게 자꾸 볼려고 합니다.
집착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라.
느낌도 마찬가지로 색·수·상·행·식 똑 마찬가집니다. 그와 같습니다. 또는 내가 뭔가를 분명하게 알았다, 기억하고 있다, 뭔가인 것을 알았다, 상(想)에 또 집착을 하게 됩니다. 변하는 성질입니다. 그러한 것들 오온은 동시에 다 일어나지만 그 오온들도 제각각의 역할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내가 분명히 뭔가 발을 들어올릴 때 가벼운 느낌이 있었다, '가벼운 느낌이 있었다는 상'에다가 딱 집착을 하는 거라. 가벼운 느낌이 있는 것을 안 것에 집착을 하게 되면 발은 계속 들어올려지고 있고, 느낌들은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것은 아예 무시를 해버리고 '가벼운 느낌'이란 것에 딱 매여버리게 됩니다. 그것에 집착을 하고 있는 거라.
그런데 그 가벼운 느낌은 그렇게 알았다고 해서 그것은 안 변하고 있는 건가? 변하고 있는데도 나는 내 마음만 그걸 붙잡고 있는 것뿐인 거라. 그래서 오온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것들도 붙잡거나 밀쳐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냥 그대로 알아야 됩니다.
설혹 그중에 빠뜨리고 모르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게 '상'인지 아닌지 모르면 어때서? 또는 '느낌'으로 알지 못하고 내가 '움직임'으로 알았으면 어때서?
왜 그걸 자꾸 다시 또 '움직임으로' 볼려고 하고, 또 '느낌으로' 볼려고 하고, 또 '분명하게 알았다는 것으로' 알려고 하느냐는 거라.
제각각의 역할들이 있습니다. 제각각 대로 그대로 놔버리고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볼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 가만히 두십시오.
가만히 둘 줄만 알면 변하는 게 보입니다. 가만히 두면.
시냇가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것을 그대로 가만히 두면 그냥 지가 흘러가집니다. 그런데 나는 그걸 가만히 두지를 못하니까 위에서 그 물을 보니까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거라. 실제로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나는 다리 위에서 그 물을 봐야 되는 것이지, 내 마음이 그 물에 가 있을 거 같으면 변하는 게 안 보입니다. 다리 위에서 항상 그 물을 볼려고 해야 됩니다. 그리해야 그 물이 흘러가는 게 보여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가만히 두면 그냥 물이 저절로 흘러가듯이 변하는 것들이 그대로 보입니다, 수행 대상에서는. 색·수·상행·식은 끊임없이 변해가고 끊임없이 흘러가게 돼있는 겁니다. 그냥 그대로 가만히 둬버리면 됩니다. 시간이 다됐는데
그다음에 여섯 번째 받아들이는 것
일곱 번째 평온한 것
여덟 번째 조사·확인하는 것
아홉 번째 모든 문제를 기회로 보는 것
열 번째 골똘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열한 번째 비교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입니다. 수행할 때 이런 마음들을 자꾸 가지고 있어야만이 수행할 때 단계들이 푹푹 뛰어오를 수가 있습니다.
"이 열한 가지는 수행할 때 여러분들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될 마음의 상태" 입니다.
이 상태가 안 되면 항상 대상을 왜곡하게 돼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명심을 하고 자꾸 이것을 들여다보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에서 '아, 내가 이 부분을 잘못했구나' 하는 것들을 이걸 들여다 보면서 자꾸 교정해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외부적인 밖에 있는 대상은 수행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몸과 마음이 대상일 뿐입니다. 그 몸과 마음도 어떠한 경우도 외부적인 것이 대상이 아니듯이, 그냥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도 대상일 뿐이라고 자꾸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그 대상일 뿐일 때는 마음은 항상 이 11가지 작용들 하에 있어야 되는 거라.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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