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구·울주선원 수행법문

집착을 버리는 법(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으로) (20161007.대구)

담마마-마까 2022. 4. 18. 16:31

https://youtu.be/bQCwOSgj25w

* 집착을 버리는 법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으로) (20161007.대구)

 

오늘은 「집착을 버리는 법」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이거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부분들입니다. 부처님 당시 때부터 해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제를 하고 나면 제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게 까티나 가사를 받고, 가사를 받고 나면 그다음에 스승한테 가서 인사를 드리는 것이 일상적인 것입니다. 그게 '짜리따 기간'이다 해가지고 그 사원 밖으로 나가서 스승에게 인사하고, 또 법을 청할 때는 법을 설해주고 하는 그런 기간을 짜리따 기간이다 해서, 유행기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당연히 부처님 제자들은 부처님한테 가서 인사드리게 됩니다.

부처님한테 인사드리러 갔을 때 설해진 경이 경전에 참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안거 때 설해진 것보다도 안거가 끝나고 나서 설해져서 지금 남아있는 것들이 더 많을 지경입니다. 그마만큼 안거가 끝나고 나서 부처님한테 인사드리고 수행점검 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때 수행이 안 된 사람은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법문을 통해서 수행을 시켜가지고 아라한과에 이르도록 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경 구절도 꼭 마찬가집니다. 부처님한테 인사드리러 30명이 오니까 사리뿟따 존자가 그모습을 보고 아직 저분들은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구나 하고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분들에게 지금 필요한 게 뭔가 하는 것을 유심히 관찰을 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얘기로 해볼게요. 불교학자들은 여러분보다도 훨씬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성제 삼법인 십이연기, 그 연기를 아는 것 아주 잘 압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불교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사리뿟따 존자가 봤을 때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거라.

안거 기간 동안에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해가지고 경전도 많이 외우고 한 것은 틀림없는데, 그렇게 해서 부처님 제자답게 살아가는 것이 몸에 익혀진 것은 틀림없는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이분들이 완전히 생사를 뛰어넘지는 못했다고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필요한 것이 뭘까? 많이 알고 있긴 한데. 공통적인 것이 뭐냐면 그런 분들은 형식에 많이 치우쳐지는 거라. 그 형식이 자기하고 안 맞으면 되게 성을 많이 냅니다. 학자들도 논문 발표하고 하는 것들을 보면 자기의 주장이 맞다고 하는데, 그 주장하고 반대되는 얘기를 할 것 같으면 되게 화를 많이 냅니다. 그래서 논쟁을 하고 그런 경우들도 있고, 자기 것에 대한 것들을 많이 주장하게 됩니다.

 

그게 뭐냐면 "나는 이거 알고 있다"고 그럽니다. 단정해버리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런데 내가 누굴 알고 있다 하고 생각할 것 같으면, 그 단정된 것으로 인해서 그 사람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실제로는 아닌데, 그사람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자신은 착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또 만약에 그사람이 자기가 생각한 것밖에 것들을 행하게 되면 ‘어? 그사람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고 생각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가 판단하고 단정 지은 것들이 틀린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됐을 것이다’ 하고 판단을 해버립니다.

 

그게 뭐냐면 「알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서 빠지는 함정입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그런 함정에 많이 빠질 거라고 봅니다. '테라와다 불교 알고 있다' 아니면 대승불교에서 한 3~40년 놀다 왔으니까 '대승불교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알고 있는 것이 여러분 범위내에서 알고 있는 것이지 그 전체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닌데 그렇게 착각을 하게 되는 거라. 그렇게 착각을 하다 보니까 실제로 행하는 것은 뒷전이 돼버리는 거라. 알고 있는데 뭐 행할 게 뭐 있어? 알고 있으면 끝나버리는 거지.

 

그러다 보니까 오히려 불교에 대해서 많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 불교에 대해서 우호적이기도 하고, 아니면 어떤 사회적인 문제가 있을 때 사회적인 문제에서 도움을 줄려고 하는 모습들을 보이게 되고, 정작 불교에 대해서는 만날 '남에 대해서 아낌없이 베풀어라' 그래서 그건 알고 있는데 그걸 하지 못하는 거라. 실천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거라. 「알고 있다」는 함정은 바로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봤을 때 이 스님들이 딱 그 상태에 있게 되는 거라. 이 상황에서 이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반드시 체험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가 부처님한테 질문을 하게 되는 거라.

 

「부처님! 2개의 법이 있다고 설하셨습니다. 그 2개의 법이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여기에서 두 개의 법은 뭘 얘기할까? 부처님은 하나로, 두 개로, 세 개로, 네 개로 이렇게 각각 구분해서 설명한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상응부 경전 같은 경우에는 그걸 모아서 하나의 경전으로써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거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른 부분에서 다른 경전에서도 그렇게 몇 가지로 나누어 가지고 설명한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게 일반인들이 이해하기는 수월하죠?

스님도 그 방법을 즐겨 씁니다. 뭘 법문하더라도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구분해줘가지고 설명을 해주면 어쨌든 여러분들 범위내에서는 다른 건 다 놓쳐도 그건 그래도 조금은 기억은 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기억이 잘되라고 그런 방법을 사용을 하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꼭 마찬가지였습니다. 근데 두 개로 설한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세간적인 법이 있고 출세간적인 법이 있고, 또 공부해야 될 법이 있고 공부하지 않아도 될 상태에 도달한 것이 있고, 이런 식으로 두 가지로 구분해 놓은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실천하는 데는 그다지 그렇게 그거 알고 있다 해가지고, 또 그거 모르고 있다 해가지고 별 문제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게 출세간적인 법이면 어떻고 이게 세간적인 법이면 어떨 거라? 또 출세간법은 따라야 되는 거고 세간법은 따르지 마라 하고 부처님이 얘기했다고 해서, 그거 알고 있다고 해가지고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만약에 명예와 이익 같은 거 그거 크게 중요한 부분 아니니까 그것에 신경쓰지 마라 해가지고 그것을 따르지마라 그렇게 얘기했는데, 실제로는 그걸 알고 있지만, 나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 있으면 나는 불같이 방어를 행할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걸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처님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때 얘기하는 것이 뭐냐면, 그럼 실천해가지고 이분들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이 뭘까 하는 것을 부처님이 다시 얘기합니다.

여러분 수행에 두 가지 방법이 뭐가 있어요?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이다. 그것이 두 가지이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기 선원에서도 앉아서 수행들을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사마타적인 방법으로, 어떤 사람은 위빳사나 수행적인 방법으로 수행들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것을 하더라도 그것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를 다 해야 됩니까? 아니면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해야 됩니까? 그것에 대한 것이 이 글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전에 반드시 알아야 되는 것은, 내가 수행에서 어느 정도의 체험을 했다, 또는 수행에서 체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뭔가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알고 있어도 그것이 실천되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테라와다 불자로서 오래도록 살아가더라도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아, 부처님 가르침하고는 정반대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실천 안 하고 있는 거라.

 

계를 지켜라 했는데, 오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오계를 실천 안 합니다. 오늘 같이 팔계를 받았는데 팔계를 무시해버리고 오후에 뭐 먹어버리고, 씨익 웃는 거 보니 그런 사람이 있는 모양이네? 그럴 것 같으면 실천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어도 그건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만약에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보면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안 지키면 그거 안 지킨 것에 대해서 지적질은 잘 합니다. 자기는 안 지키고 있으면서. 그런 오류에 빠지지마. 그래서 여러분이 뭔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요. 그건 여러분의 범위내에서 알고 있는 것뿐이라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 자신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나만 완전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완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까 웃은 사람같이 팔계를 지켜야 되는데 오후에 뭘 먹어버리는 실수를 범하듯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거라. 그럼 그 실수에 대해서 용서하고 이해해주는 마음들이 생겨나야 되는 것인데, 그런 마음들이 안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은 심각한 상황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뭔가를 "알고 있다", "나는 완전하다" 하는 것들은 일단 먼저 버려버려야 됩니다.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게 먼저 우선이 돼야 됩니다.

 

여러분이 완전할 거 같으면 뭐하러 수행을 해서 수행을 실천할려고 할 거라? 수행할 필요가 없지. 완전한 사람도 수행을 하는 판인데,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건 어불성설이라.

부처님도 수행을 안 하고 사셨습니까? 깨달은 이후에? 그 제자들이 그랬습니까? 어느 누구도 그런 적이 없다는 거라. 하물며 아직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무조건 부처님 가르침만 특히 테라와다 불교가 좋다 해싸니까 그것만 무조건 배울려고만 한다, 그거는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들을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안 만큼 그것이 실천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부분이다 하는 겁니다.

 

이제 사마타(samatha)와 위빳사나(vipassanā) 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보통 사마타 수행을 얘기할 때 '아눗사띠(anussati)'라는 빨리어 용어를 많이 쓰고,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는 '아누빳사나(anupassanā)' 라는 용어를 많이 씁니다.

 

'아눗사띠'라고 하는 것은 '따라가면서 그 하나의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것'들입니다. 여기에도 사띠가 있죠! 그렇다고 해도 위빳사나의 사띠하고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아눗사띠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대상만'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한국에서 많이 하고 있는 화두 "이뭣고" 다, 그러면 "이뭣고"만 끊임없이 해야되는 겁니다. 그것도 불교적인 아눗사띠는 아니지만 어쨌든 아눗사띠와 같은 종류입니다. 또는 성모마리아를 염한다. 그러면 성모마리아만 끊임없이 염해야 되는 겁니다. 사띠해야 되는 겁니다. 그걸 아눗사띠라고 얘기합니다. 다른 것들은 일체 하지 않습니다.

 

일체 하지 않는다는 것은 뭘 얘기하냐면,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 하나의 대상에만 가있어야 되는 것이지 다른 데 가 있으면 안되는 거라. 마음이 그 하나의 대상이 가 있을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움직이면 안 되겠죠!

움직이려면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절대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걸어다녀도 안 되는 거고, 어떠한 경우든지 손을 뻗어서도 안 되는 것들이라. 그냥 가만히 앉아가지고 그것만 해야 되는 거라.

 

쉽게 말하면 여러분이 일반적으로 하고 있는 염불하고는 다르죠? 염불은 '칭념'이 아니고 '칭송'입니다.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말을 하고 절을 하고 또 염주도 돌리고 해도 관계는 없습니다. 그것은 찬탄하기 위한 도구지. 그걸 아눗사띠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눗사띠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하나의 대상입니다. 하나의 대상으로부터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뭐해요? 코끝에 있는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요 하나의 대상만 끊임없이 알아차립니다. 다른 어떤 것도 알아차려서는 안됩니다. 거기서 어떤 느낌이 있든지 아니면 뭔 생각이 있든지 전부다 배제해버리고 그것이 일어나든 말든 놔둬버리고, 마음은 오로지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에만 그대로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아눗사띠'는 '사마타 수행방법이다' 하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타 수행방법은 딱 40가지로 한정을 해놓았습니다. 아눗사띠는 10가지인데 어떤 곳에는 6가지로 얘기하는데, 사마타 수행의 종류는 40가지로 딱 한정이 돼있습니다. 거기에 포함 안 되는 게 뭐가 있을까? 조금 전에 얘기한 '이뭣고' 라고 하는 화두, 아니면 어떤 신을 계속 사띠-알아차림하는 것, 마리아라든지 여호와신 이런 것들은 불교적인 수행방법엔 포함이 안 됩니다.

사마타 수행은 다른 종교에서도 묵상명상, 요가명상 뭐 어떤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불교적인 거하고는 다릅니다. 왜 그럼 부처님은 그걸 불교적인 수행-사마타 수행에 포함을 안 시켰을까? 왜 그래요?

 

요가 명상하는 것을 한번 보십시오. 요가명상은 맨 처음에 신에게 먼저 찬탄하는 것, 그러고 나서 신에 대해서 생각을 합니다. 다른 종교, 어떤 종교든 다 꼭 마찬가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지금 대승불교 같이 관념적인 것으로써, 그러니까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것들입니다. 아미타불이든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 것도 실제 존재했던 인물이 아니고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어쨌든 그런 개념을 붙잡고 있든지 아니면 신을 인정하는 상태에서 그 신에 대해서 하나의 대상을 붙잡고 있든지 그 방법밖에는 없다는 거라.

 

그러니까 부처님이 봤을 때는 전통적으로 많이 쓰여져왔던 수행이라고 하는 것들을 불교에 받아들이기는 해야 되는데 그것은 아니라는 거라.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고나서 보니까 천지창조를 하고 좌지우지 하는 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그걸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잖아.

그리고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밥먹고 먹고 마시고 보고 듣고 하는 실제적인 것인데, 그 실제하고 관계없는 것들을 하는 것? 그것은 관념일 뿐이지 일상생활하고는 전혀 관계없다고 보는 거라. 그래서 무기라고 해가지고 이것은 대답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하고 배제해버린 것들이라는 거라.

그러니 당연히 그런 것들은 배제가 된 상태에서 불교적인 사마타 수행의 방법으로 정리가 되게 됩니다.

 

다른 어떤 종교를 보더라도 '사마타' 라고 하는 명칭을 써서 하는 곳은 없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묵주명상, 염불명상, 아니면 뭐 무슨 명상, 요가명상, 이렇게 하지만 '사마타'라고 하는 것을 쓰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뭐라 그래요? '사마타'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사마타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이것이 사마타 수행이다 하고 얘기할 수 있을려고 할 것 같으면 불교적인 것이 아니면 사마타 수행의 종류에 들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아, 이것도 사마타다, 하나의 대상에 그냥 마음을 두고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으니까 그것도 사마타 수행이겠지’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사마타 수행은 절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거라.

 

불교적인 사마타 수행이라는 것은 반드시 딱 한정돼있습니다. 40가지로. 그 40가지 범주 내에 드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스승에게 “아, 나는 어떤 수행을 할까요?” 물어봐가지고 그것을 받고 나서 반드시 그 수행법대로 반드시 따라야 되는 것이지, 또 자기 혼자 ‘아, 나는 이게 맞겠다’ 해가지고 그걸 할 수 있는 것들은 사실은 아닌닙니다. 그마만큼 엄격하게 처리를 하는 것이 사마타 수행이라고 분명히 여러분들은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아까 처음에 얘기해 준 2가지 법은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이라고 하는데, 사마타 수행을 먼저 하고 그다음에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 전통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2가지를 동시에 다 같이 다 하면 참 좋습니다.

부처님도 그렇게 해왔고, 옛날 스님들도 다 그렇게 해온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사마타 수행해서 어느 정도 선정을 체험하고 나서 그러면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되는가? 그리해야 되요?

시간이 많이 있는 사람들은, 아직 젊은 분들은 그리해도 됩니다. 특히 출가한 스님들은 할 일이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근데 게중에는 나이 드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그 방법으로 해가지고는 언제 이루어 질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마타를 완성했다 해가지고 수행이 끝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삼매를 자유자재로 들고 나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번뇌가 소멸된다든지 아니면 윤회로부터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에, 그거 해가지고 끝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분들은 이 방법을 추천 안 합니다.

또 한 분들은 죽음에 대해서 자꾸 사무치게 생각이 듭니다.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사마타 수행을 하더라도 사마디라고 하는 삼매에 빠지는 것이 힘들고, 또 그런 분들은 그 방법대로 해가지고는 사마타 수행으로 결과를 이루어내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래서 ',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경각심이 자꾸 일어나는 사람들은 또 이 방법대로 사마타 하고 위빳사나를 하고 하는 방법은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사마타 수행을 먼저 시작을 해야 될까?

가장 대표적인 것, 망상 많이 하는 사람들. 수행할 때 앉았다 그러면 오만 생각들이 머리를 지배해가지고 수행대상하고는 관계없이 망상으로만 하다가 끝나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사마타 수행을 먼저 하는 것이 맞습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짧게라도 그 사마타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이 맞습니다.

또 하나는 어떤 사람들이 해야 되느냐면 침착하지 못한 사람들. 뭔가를 꾸준하게 하지 못하고 이거 했다가 저거 했다가 하면서 마음이 자꾸 방황하는 사람들. 꾸준하게 앉아있지도 못하고, 또 꾸준하게 뭔가를 하지도 못하고, 그러면 당연히 결과도 시원찮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침착하지 못한 사람들도 사마타 수행을 먼저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경우에 해당이 되지 않으면 대부분은 바로 그냥 위빳사나 수행을 해도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사마타 수행을 먼저 한다고 해봅시다.

그 뒤에 3페이지에 보면은 「집중력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들을 적어놓았습니다.

 

그걸 하기 전에 만약에 예를 들면은, 나는 앉았다 하면 망상만 맨날 자꾸 일어나는데, 생각은 자꾸 '아이구, 내가 지금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는 강박관념이 자꾸 일어난다 하는 사람들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나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하는 생각이 자꾸 일어나는 사람들은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 맞는데,

망상도 많이 일어나고 집중도 잘 못한다, 2가지를 다 하고 있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어떻게 해야 되요? 대체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뭘 하느냐면 '무상수관' '고수관' '무아수관'을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마타 수행은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두는 것이고,

위빳사나 수행은 하나의 대상이 아니고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에서 어떤 대상이든 자꾸 바꾸어가면서 마음을 두는 겁니다.

 

그런데 무상수관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따라가면서 그것을 관찰하는데, 어떠한 경우든지 '무상하다는 생각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겁니다.

누군가와 말을 했다, 그럴 것 같으면 그 말을 따라가야 되는 것이 아니고 '무상하다는 생각을 먼저 일으켜야' 됩니다. 저렇게 화를 내는 것도 무상한 것이다 하는 생각을 일으키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무상·고·무아는 뭡니까? 진리입니다. 진리! 진리에 마음을 두는 것이 '무상수관' '고수관' '무아수관' 입니다. 진리에다 마음을 두고 그 말을 듣는 거라.

그런데 기본적인 조건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어요? '무상하다'는 진리에다가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진리에다가 마음을 둘 것 같으면 적어도 그사람이 하는 말에 대해서 내가 성내고 하는 것들은 일어나지 않고, 무상한데 뭐 성낼게 뭐 있어? 그러면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마음은 고요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해가고 있고, 그러면서 무상하다는 생각으로 쭉 계속 가게 되는 거라.

그걸 '무상수관' '고수관' '무아수관' 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구체적으로 그거 하는 방법에 대한 것은 사마타 수행, 위빳사나 수행에 대한 것들을, 『붓다의 실천심리학』이라고 해가지고 8권으로 펴낸 것, 그거 가지고들 있죠? 거기에 자세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그것들을 참조하도록 하십시오.

자! 그러면 먼저 사마타 수행에 대한 것 개괄적으로 얘기하고,

 

사마타 수행은 뭐라?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고정해서 그것을 따라가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이 추천한 방법으로 할 거 같으면 거기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탐··치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근데 부처님이 추천한 40가지 외의 다른 것들로 한다? 탐·진·치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내가 입시준비하고 있는 아들을 위해서 만약에 아들만 생각하면서 한다? 마음에 탐욕이 안 일어날 거 같애요? 자기 아들 잘되길 바라고 하는 건데? 기본적으로 그렇게 탐욕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거라. 신에 대해서 명상한다? 나도 신이 되고 싶은데? 나도 신과 같은 범아일여가 되고 싶은데, 나라고 하는 것이 범천과 같다고 하고 될려고 마음을 먹게 되는데, 집착하는 마음이 없이 그걸 할 수 있겠어요?

 

개념으로 한다?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어리석음이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자기 나름대로 그것이 되도록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개념을 가지고 할 것 같으면 이 사람이 경험한 것하고 저사람이 경험한 것하고 다 다릅니다. 어리석은 상태에서 경험한 것들이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런데 부처님이 추천한 40가지 방법들은 누구든지 경험한 것들은 누구든지 똑같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불교적인 사마타 수행을 할 거 같으면 탐··치가 억눌러지는 역할들을 합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 하나의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있으면 적어도 마음에서 ‘아, 내가 탐심이 없구나’ ‘진심이 없구나 또는 치심이 없구나’ 하는 것을 누구든지 알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탐심이 없다고 알 것 같으면 그거만큼 좋은 게 어디 있어? 마음이 고요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음에서는 일정하게 환희심이 일어납니다. ‘아, 이거 하니까 내가 참 좋으네’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아눗사띠'의 가장 대표적인게 '붓다아눗사띠' 입니다.

부처님에 대해서 아눗사띠를 하는 것. 부처님이 계신 것처럼 부처님의 모습을 상상을 합니다. 또 부처님의 32상 80종호를 일일이 다 기억을 해서 그것을 해도 괜찮고, 그렇지 않으면 여기 앞에 있는 부처님을 보고 부처님 모습을 떠올려도 관계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그러고 나서 부처님의 공덕에 대해서 '아라항' 하면서 '아, 번뇌를 여의신 분이지 저 분은. 번뇌를 여의신 저 분은 얼마나 고요하고 좋을까? 아, 나도 번뇌를 여의도록 노력해야 되겠다' 그런 마음으로 자꾸 바뀌어나갑니다.

 

쉽게 말하면 붓다눗사띠를 하는데 뭐로 연결되요? 진리로 연결되는 거라.

번뇌가 없는 상태로 만들어지는 자기 자신을 진리로 연결시켜주는 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런 아눗사띠를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그 대상이 어떤 것이든 간에 진리로 연결됩니다. 당연히 진리는 여러분들에게 더 큰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게 돼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은 당연히 고요해질 뿐아니라 기쁨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만약에 이렇게 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바르게 불교적인 사마타 수행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 그래서 기쁨이 일어나지면은 마음은 더 고요해지고 행복해지게 되는 거고, 그렇게 행복해지면 나중엔 더욱더 알아차림을 유지하게 되면은 평온한 상태가 되는 거고, 그 상태들을 계속 유지를 하게 되는 거고, 그렇게 자꾸 바뀌어야 됩니다.

 

경전에는 그걸 이렇게 적어 놨습니다.

"부처님에게 확고히 고정되면 그 사람의 마음은 정직해진다."

'아, 내가 번뇌가 있구나' 하는 사실을 알면 번뇌가 있다는 것을 알고 번뇌를 없앨려고 더 노력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 사람은 정직해진다는 거라. 나에게 탐·진·치가 있으면 있다고 알고, 없으면 없다고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거라. 없어지게 되면 없어졌다고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거라.

 

정직해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 사람은 의미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아라항'이라고 하는 의미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아라항이 그냥 한글로 응공이라고 해서 응공이라는 의미가 뭔지를 분명하게 파악을 하게 된다는 거라. 응공은 사실은 아라한의 의미 일부 밖에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라항을 풀이할 때 '번뇌를 여의신 분'이라고 풀이를 하지, 그걸 응공이라고 풀이를 잘 안 합니다. 어쨌든 그러한 의미들이 분명하게 파악이 된다는 거라.

 

그 의미가 파악이 되고 그것이 밝아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법에 대해서 법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라. '법이 명료해진다'는 거라.

그런 상태가 되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빠못자(pāmojja)'라 해가지고 환희심이 일어납니다. 법에 대한 환희심.

그다음에는 환희심이 일어나고 나면 '희열'이 일어납니다. ‘아 되게 좋다!’ 법이라고 하는 것들이 일어나면.

그러고 나면 몸에서는 기쁨들이 일어납니다. '삐띠(pīti)'라고 하는 것들이. 그리고 마음에서도 기쁨들이 일어납니다.

그러고 나면 다시 몸이 가벼워지는 상태가 됩니다. 그걸 '빳삿디까(passaddhika)' 라고 얘기합니다. 경안의 상태, 평안해 지면서 몸과 마음, 몸이 아주 가벼워지는 상태.

그다음에 몸이 가벼워지고 나면 마음조차도 행복해지는 거라. 가벼워지고 행복해지는 '수카(sukha)'라고 하는 것들이 일어납니다.

그 상태가 일어나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런 행복한 마음은 '사마디(samādhi)'-삼매에 들게끔 하는 거라.

 

그게 기본적으로 사마타 수행을 하면서 일어나는 진행과정들입니다.

 

이 과정들을 빨리하고 천천히 하고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이 과정이 뒤죽박죽이 된다든지 아니면, 어떤 거는 빼먹고 진행이 된다든지 이런 것들은 없다는 거라. 누구든지 경험하는 것은 그사람은 반드시 그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자신이 인식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인 것일 뿐이지. 그게 사마타 수행입니다.

 

집중력의 기능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집중하면서 법의 소중함을 알고 법을 따라서 실천할려고 하는 마음이 강해지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삼매가지고 거기서 그냥 삼매놀음에 빠져버린다는 거라. 삼매에 빠져있으면 뭐할 건데? 거기에 있으면 좋고 평안하고 대상이 없이 고요할지는 몰라도 그렇게 해가지고 살 수 있어요? 그 삼매에서 나와서 밥도 먹고 일도 해야 되는데?

법의 소중함을 거기서 얻지 못할 거 같으면 그거는 바른 불교적인 사마타 수행이 되지 못한다는 거라.

「집중력의 기능」은 그런 것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거기 4페이지에 보면 「사람은 만능이 될 수 없다」 하는 부분은 지나치겠습니다.

그다음에 「사마디에 오욕은 방해꾼」이다 하는 것도 지나치겠습니다.

수행하는데 오욕락으로부터 벗어나져야 되는데 오욕락을 가지고 사마타 수행을 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사마디를 형성하는 데는 크게 방해꾼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보통 보면 사마타 수행을 하고 나면, 그다음으로는 「관찰수행」으로 들어갑니다.

아까 관찰수행은 위빳사나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위빳사나는 아까 뭐라고 했어요? '아누빳사나'라고 했습니다.

아까 조금 전에 '아눗사띠(anussati)'는 아누(anu)에 사띠(sati) 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대상을 따라가면서 그것을 계속적으로 관찰'해야 되는 거고, 알아차림을 하는 것인데, 아누빳사나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아누빳사나(anupassanā)''지속적으로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잘못 착각할 것 같으면 이것도 대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대상이 일어나면 대상이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겁니다.

이거는 어떻게 되요? 동시적으로 일어나지는 겁니다. 대상이 일어남과 동시에 마음은 그것을 알아차리려고 해야됩니다. 그것이 사띠의 역할이라.

 

그런데 그 사띠를 어떻게 해야 된다고? 아누빳사나, 지속적으로! 사띠가 한 번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그때 대상은 어떻게 되요? 어떠한 대상이든 대상은 일어났으면 반드시 변하게 돼있습니다. 지속적으로 그걸 알아차리면 어떻게 해야 되요? 무상하게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라.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면 그것이 불만족스럽게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라.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면 그 어디에도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거고.

그래서 위빳사나의 3가지 특성은 무상·고·무아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위빳사나의 기능은 사띠(sati)의 기능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사띠(sati)를 잘못 이해할 것 같으면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절대 그렇지를 않습니다.

sati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이든 그 알아차리는 것이 지속적으로 되는 것들을 사띠의 기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띠 삼빠자나는 반드시 따라온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알아차리는 것이 지속적으로 분명하게 알아차리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무상··무아로써 분명하게 아는 겁니다.

그걸 위빳사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대상은 어떤 대상들이라? 지금 나타나는 대상은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되는데, 그 대상은 어떤 대상이 나한테 나타날 줄 알아서? 생각이 나타날 수도 있고 손을 뻗으면 손을 뻗은 것이 대상이 될 수도 있고, 갖가지 것이 대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특정한 대상은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일어난 대상, 일어난 대상을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을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알아차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위빳사나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니까 어떻게 되요? 삼매에 빠져있을 수는 없습니다. 단지 지속적으로 알아차림이 유지되면,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 같은 경우에는 "카니까 사마디(khaṇika samādhi) 라고 해가지고 찰나삼매다. 삼매와 같은 찰나적인 삼매가 계속적으로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삼매와 다름이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것이 삼매이다, 아니다 하는 것은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라. 그것은 글로써 존재하는 것이지 실제 수행에서는 이게 카니까 사마디인지 뭔지 그거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가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있는가, 아닌가? 그것만 염두에 두라는 거라.

 

끊임없이 알아차리면 당연히 어떻게 되요? 무상하게 알게 되는 거고, 고로써 알게 되는 거고, 무아로써 알게 돼있다는 거라. 그러면 그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당연히 없어지게 되는 거고, 집착하는 것이 없으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되겠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거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거 같으면 대상은 소멸하는 것이고 사라진다는 사실로써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이고, 그러면 어떤 대상이든 일어났으면 사라지고 소멸되는 것으로써 보이게 되면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는 것이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해탈로 이르게 됩니다.

그게 위빳사나 수행방법입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으로 인해서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 사마타 수행으로 인해서 사마디가 형성됐다고 해서 삼매가 형성됐다고 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한다는 거라.

 

그런데 사마타 수행은 반드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요합니다.

? 집중하는 힘이 없으면은 어떠한 경우든지 알아차림은 약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럼 알아차림이 자꾸 끊어져버립니다. 대상을 끊임없이 그걸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되는데 알아차림이 자꾸 끊어져버리는 거라. 그럴 때는 반드시 사마타 수행을 잠시라도 해주면 다시 그것들을 보완하는 역할들을 해주는 거라.

 

예를 들어봅시다. 코로,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 ‘들이쉼’ ‘내쉼’하고 알아차리고 있다. 처음에는 '들이쉼' '내쉼'만 알아차린다고 합시다.

그래서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에서 탐·진·치 없이 대상만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상태가 될 거 같으면, 그다음에는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의 느낌을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들이쉬는 느낌하고 내쉬는 느낌하고 다르구나' 하고 처음에는 알게 되고, 들이쉬는 느낌에도 똑같은 것이 아니고 변하고 있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렇게 진행돼나가는데 그러다가 보니까, 들이쉬는 숨이 변하고 있다고 하는 찰나 간에 대상을 놓쳐버립니다. 그래서 언제 들이쉬는 숨이 끝나는지를 모르게 됩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요? 다시 사마타적인 방법으로 돌아오도록 하라는 거라. 다시 그냥 들이쉼 내쉼하고 알아차리는 거고.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데에다 집중만 하는 거고. 집중하는 힘이 커졌을 때 다시 그 느낌으로 전환해가지고, 들이쉴 때의 느낌들이 변하는 것들을 보면 그게 또 잡혀나간다는 거라.

 

그래서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어떤 면에서는 분리할 수 없는 겁니다.

근데 이걸 자꾸 사람들은 분리를 하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이게 사마타적인 것인지 이게 위빳사나적인 것인지 그거 구분 안 해도 되고, 수행을 하나만 고집해가지고 그것으로 쭉 나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은 보면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들이 수행에서는 크게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합니다. 특히 장애부분이 나타났을 경우에는 사마타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눌러준 상태에서 다시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을 해주는 것이 가장 효과인 방법입니다.

 

그렇게 되지 못하면 사띠의 힘이 약하면 장애가 일어나면 그걸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는 반드시 사마타로 전환을 해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순수한 위빳사나 수행을 하든, 아니면 사마타적인 수행만 하든, 아니면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병행하든 그건 각자의 상태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여러분들이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게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게 됨으로 인해가지고 당연히 여러분들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타적인 방법으로 할 것이냐, 위빳사나적인 방법으로 할 것이냐 하는 것은 사실은 무의미하다는 거라. 그것을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대신에 명심해야 되는 것은 사마타 수행으로 인해서 삼매를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그 삼매는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무상·고·무아에 대한 지혜를 얻었다. 그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뭔가 대상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무상·고·무아로써 자꾸 보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도 그 지혜가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항상 명심을 해두어야 됩니다.

사마디가 사라져버리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지혜가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에 다시 시작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대로 그 상태에서 다시 시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에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 도달하고 나면 그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냐나(ñāṇa)'라고 하는 지혜가 분명하게 내가 이루어지고 나면 그 밑으로는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자! 이번 포인트를 한번 봅시다.

• 해탈에의 길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이다.

• 사마타 수행에 의해서 정신적인 힘이 갖춰진다.

• 위빳사나 수행에 의해서 지혜가 나타난다.

• 지혜가 나타나면 집착이 사라지고 해탈에 이르게 된다.

이게 기본적인 구조이다, 그게 불교적인 수행이다, 하고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대구 붓다야나 선원에 호잔님이라고 있죠? 그분한테 ‘참 저분은 그래도 지식적으로만 불교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내가 감탄했던 것이,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어요. 다툼이 있어가지고 자기 견해를 자꾸 내세우다 보니까 해피스님하고 충돌이 됐어요. 그걸 해피스님이 의의제기를 했어요. 근데 그 호잔님이 탁 그 마음을 내더라고. 아, 내가 테라와다 스님을 비난하는 것은 내가 잘못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내가 잘못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에게도 다른 데에도 공지를 올리겠습니다. 그 얘기를 할 때 스님은 참 고마웠어요. 그래도 불교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저렇게 실천해서 저런 상태에까지 이르렀구나 하는 것들을 보면서 ‘아, 그래도 그분은 참 잘해나가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견해 바꾸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는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상태에서는. 그렇더라도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 정직할 수 있다는 것은, 어쨌든 그때 당시에는 탐·진·치 없이 자기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겁니다.

단추를 끼울 수 있는 것은 그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보면서 ‘아이고, 재가자가 출가한 스님보다 훨씬 낫네’ 속으로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과를 받아냈을지는 몰라도 사과를 한 사람이 이겼다는 거라. 내가 볼 때는. 이기고 지고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단지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 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만 판단을 하는 기준이 돼야 됩니다. 내 의도대로 뭔가를 갖다가 했다, 그래서 그 의도대로 됐다, 그럼 그 사람이 잘 한 거라? 누구도 그걸 불교에서는 잘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차라리 양보를 하고 다툼이 없이 하는 것이 있고, 그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사람이 이긴 거라.

 

가끔씩 뭔가 다투는 사람들을 봤을 때 스님이 봤을 때는 한심한 거라. 똑같은 상태인데 그것으로 이기는 것만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떨 때는 참 한심한 거라. 저렇게 해가지고 불교를 배워서 뭐할꼬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러지 말아라는 거라. 적어도 하나라도 실천을 해나가는 사람이면 그 진리가 눈에 보입니다. 그 진리가 눈에 보여야만이 그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어느 수행을 하든지 사마타 수행을 하든지 위빳사나 수행을 하든지 가장 먼저 탁 드러나는 것이 그 진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반드시 그 진리에 눈을 뜰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