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구·울주선원 수행법문

사무량심(四無量心) (20180428. 울주)

담마마-마까 2022. 5. 31. 10:00

https://youtu.be/OYBDNfwlEcc

* 사무량심(四無量心) (20180428. 울주)

 

프린트물 사무량심 보겠습니다. 사무량심(四無量心)은 뭐 뭐죠?

자·비·희·사(慈悲喜捨)- 멧따(mettā), 까루나(karuṇā), 무디따(muditā), 우뻭카(upekkhā) 그렇게 얘기합니다. 네 가지는 한량이 없기 때문에, 한정이 없기 때문에 무량심(無量心)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조금 전에 스님들 탁발 받았죠? 탁발 받을 때 스님들이 하는 게송이 '행복하기를' 하고 게송을 합니다. 그거는 어디에 속할까? 보통 그걸 '야타 와리와하 뿌라 빠리뿌렌띠(Yathā vārivahā pūrā, paripūrenti sāgaraṁ)' 하면서 하는 그 게송들을 '아누모다나(anumodanā, 회향)'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축복을 회향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아누모다 빠까'라 해서 '감사함'에 대한 것들을 얘기할 때 보통 그걸 줄여가지고 그냥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아니면 '공양 올린 분들이 행복하기를'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거는 어떻게 되죠? '사무량심'은 특정인을 정하는 것이 아니고 한량없이 뻗어나가는 건데, '감사함'이라고 하는 것은 한정돼있죠!

누가 나에게 공양물을 올렸다, '아, 저 공양물을 올린 것들은 얼마나 고생을 해가면서 올렸을까' 하면서 그 마음을 고맙게 받아들여서, '내가 이 공양으로써 끼니를 해결해서 수행에 더욱 열심히 해서 아라한과에 이르고 이 법을 전해주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집니다. 어찌 보면 그런 마음들은 사무량심 중에서 '까루나'에 해당이 됩니다.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분들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고, 어떤 것이 바른 것이고 어떤 것이 이익된 것인지를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 바르게 알려줄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는 것들, 그런 것들을 보통 '까딴뉴따(kataññutā)'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을 '감사하는 마음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보통 탁발 받을 때 가지는 마음들은 '까루나(karuṇā)'의 마음들에 보통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잘 알아야 되는 게 '사무량심'과 그런 '감사하다는 마음'들은 분명하게 차이가 있다는 거라.

사무량심은 수행의 도구죠! 수행을 통해서 그것이 지혜가 드러나지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그런 형태들을 띱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얘기했던 '아누모다 빠까' 아니면 '까딴뉴따, 뚜삐빠낫따' 이렇게 얘기합니다.

'감사하다'는 것, 그것은 수행의 도구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선한 마음을 지니는 것에는 해당이 되겠죠!

그것도 인제 꼭 선한 마음을 지닌다고는 얘기를 못합니다. 뭔가 내가 댓가를 바라고 '고맙습니다'하는 경우 그것은 탐·진·치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마음을 그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내가 받은 것에 대해서 고마워할 줄 알고, 그런 것들은 감사함의 영역에 들어가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수행의 영역에는 속하지 않는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인제 자비희사라고 하는 사무량심과 그런 감사하다는 것들의 차이입니다.

 

기본적으로 여러분들이 가져야 되는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혼자 살 수는 없다, 더불어서 살아야 되고, 또 인간뿐 아니라 자연과도 더불어서 살아야되기 때문에 그것들과 공존할려고 하고 그것들에 대한, 받은 것들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마워할 줄 아는 마음들을 항상 지녀야 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마음을 증장시키기 위해서, 마음을 선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지 그것이 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수행으로 연결될려고 할 것 같으면 그러한 마음들을 자비희사의 마음으로 바꿔줘야 됩니다.

 

예를 들면은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친구같이 아주 친한 이 같은 마음을 지니고 그런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마음들을 지닌다고 할 것 같으면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자애의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 감사하는 마음이 자애의 마음으로 옮겨가서 그 자애의 마음을 그 친한 이들에게, 그 친하게 도움을 받은 이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보낼 수가 있습니다. 그 마음이 점점 더 넓어지면은 그 사람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보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감사함'이라고 하는 것들이 '자애의 마음'으로 바뀌기도 하고,

조금 전 스님들 같이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까루나의 마음, 측은한 마음들을 지니기도 합니다. '아, 참 저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것들에 대해서 얼마만큼 수고로움을 가졌을까' 하는 그런 마음을 지니면 그건 '까루나'의 마음으로 바뀌어나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뭔가를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도움을 준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했다, 그리고 나도 그 도움 받은 것에 대해서 기뻐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면 그 감사의 마음이 '무디따'라고 하는 기쁨의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 안 되는 것이 감사함의 마음이 자비희(慈悲喜)는 되는데 사(捨)는, 사(捨)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평등한 마음'을 지닌다는 것은 감사함의 마음하고는 별개의 마음입니다.

어쨌든 감사함의 마음을 지닌 채 사무량심 중에 어떤 특정한 것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적어도 그것은 선한 마음이 수행할 수 있는 마음으로 바뀌어나가게 됩니다. 그럴 때 바르게 수행을 해나갈 수 있는 근거가 돼나갑니다.

 

프린트물을 내줬듯이 사무량심은 여러분들이 어떤 상황에 닥치더라도 그 사무량심을 개발을 해나가라는 뜻입니다. 또 그러한 사무량심은 어떠한 경우도 걸림이 없이 펼칠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조금 전에 스님들이 탁발 받는 감사함에 대해서, 그것을 사무량심으로 전향하는 것들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감사하다는 것도 달리 마음을 먹으면 악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또 감사한 것이 어떤 경우에는 선한 마음이 되기도 합니다. 그 선한 마음이 될 때 그것을 사무량심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오늘 계를 받았다. 계를 받은 것도 그것을 지킬려고 하는 것도 선한 마음이 일어나야 만이 그 계를 지킬 수가 있습니다. 어, 내가 오늘은 다른 사람들에게 싫어하는 말이나 아니면 미워하는 마음 없이 바른말만 하겠다 하고 해서 '바른말을 했을 때 나에게 기쁨이 일어난다고, 다른 사람도 그 말을 듣고 기뻐한다고' 그와 같은 마음을 계율을 지킴으로 해가지고 나는 기뻐하는 마음의 수행을 계속 닦아나갈 수가 있게 된다는 겁니다.

선한 마음을, 어떠한 마음을 지니든지 간에 그것은 사무량심으로 전환시킬 수가 있습니다. 꼭 굳이 사무량심의 게송을 외우면서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이런 마음만 지닌다고 해서 사무량심을 다 닦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살아가면서 찰나 찰나가 그 사무량심을 닦기 위한 도구들입니다.

찰나 찰나가 여러분들이 사띠 할 수 있는 도구들입니다. 수행과 일상생활이라고 하는 것, 여러분 살아가는 것은 이와 같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자꾸 떼어놓아서 볼려고 하지 말고 이것들을 어떻게 하면 내가 사무량심을 개발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이것을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할 수가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마타 수행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마음을 항상 선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도록, 선심소가 일어나야 만이 선심소로 인해서 수행도, 사무량심도, 사띠도 지속적으로 해나갈 수가 있게 됩니다. 그게 여러분들에게 프린트물로 내준 사무량심의 서두 부분입니다.

그래서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이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쭉 한번 읽어보시면 '아, 이것이 내가 평생 동안 수행을 하기 위한 전초 단계로써 이러한 마음들을 항상 지녀야 되겠다' 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실제 수행을 해보면 사무량심은, 어떠한 마음을 지닌 채 사띠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경을 하나 독송을 하더라도 자애의 마음을 지닌 채 독송을 했을 때 오는 희열은 큽니다. 그런데 아무리 의미를 알고 내용을 알고 있더라도 자애의 마음 없이 그냥 경을 독송하는 것으로 오는 희열은 그에 미치지 못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항상 사무량심은 내 가까이 두어야 되는 거고,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런 마음의 요소다 하는 것들을 염두에 두고 그 나눠준 프린트물들을 읽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하나 더 얘기하고 싶은 게 얼마 전에 어느 스님한테서 전화가 왔었어요.

"경전에서 자살을 용인한 것이 있습니까?" 하고.

경전에 자살을 용인한 것이 있습니까? 분명하게 해야 될 것은 없습니다!

 

깨달음에 이르신 분들은, 아라한에 이르신 분들은 호흡을 분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몸의 상태를 보고 '아, 내가 언제 정도 목숨이 끊어지겠다' 하는 것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길게는 세 달, 짧게는 하루 전에 내가 언제 죽음을 맞겠다 하고 미리 대비를 하게 됩니다. 그런 분들은 부처님한테 가서 "부처님, 저는 삼일 후에 열반에 들겠습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때 부처님은 "그래 네가 그래도 번뇌에 승리했고 참 잘 살았다." 하면서 부처님이 그 열반에 드는 것을 허락을 하게 됩니다. 자칫 잘못 이해를 하면 그것을, 죽는 것을 용인하는 것으로 얘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테라가타나 테리가타에 보면 그런 부분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살을 용인한 것은 없습니다.

 

자살은 어떤 겁니까? 자신에게 진 겁니다. 성냄에 졌든지, 아니면 우울에 졌든지, 아니면 욕심난 것에 졌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의 싸움에 졌든지 어떤 식으로든 져서 자기 자신을 방기해 버리는 형태가 자살입니다.

여러분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언제든지 이길 수 있는 조건은 됩니다. 번뇌에 이길 수도 있고, 또 탐·진·치에 이길 수도 있고, 또 이 윤회로부터 이길 수 있는 조건이 돼있습니다. 그럼 그 길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은 그렇게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 어디를 보더라도 자살을 용인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물론 아라한이 되기 전에 스스로 자살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출가자인 경우 그렇게 자살했을 경우에 목숨이 끊어지는 걸 보고, 그리고 통증이 일어나는 걸 보고 그것들에 대해서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분명하게 알아서 아라한에 이르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몸의 현상을 멈출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고, 아라한이 되어서 죽음을 맞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아라한이 되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띠까 같은 경우도 그런 형태였습니다.

부처님은 아라한이 됐을 경우에는 "참 훌륭하다" 자살이 훌륭하다는 게 아니고, 아라한이 된 것이 훌륭하다고 얘기하는 것이지, 자살한 것을 훌륭하다고 얘기한 적은 없다는 거라.

부처님이 자살에 대해서 "자살은 나쁜 것이다" 하고 금기시해놓지 않았다고 해서 자살을 용인했다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그걸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주고 싶고, 정리를 해봤습니다.

오래 산다고 좋은 것은 아니죠? 사는 동안에 얼마만큼 선한 마음을 지니고 선한 일들을 많이 하고, 얼마만큼 도와 과에 이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무지하고 어리석게 탐·진·치를 지니고 장수한다 해가지고 그거는 부처님이 칭찬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그리고 경전에 하나 나와 있는 게 자살을 한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다음 세상이 행복하게 된다고 얘기한 적은 전혀 없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일으키는 생각이나 아니면 여러 가지 중한 업이나, 여러 가지 죽음에서 일으키는 의식들이 다음 생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만약에 습관을 잘 쌓아왔으면 설혹 급작스럽게 죽는다든지, 설혹 자살하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음 세상은 좋은 세상에 태어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은 깨달음에 이른 분들은 자살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거라. 그러면 아직 여러분들은 다음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윤회의 세상에 있다는 거라. 그럼 마지막 순간에도 자살보다는 완전히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택하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라는 거라.

 

그리고 어떠한 경우도, 그 사람이 자살하는 경우든, 급작스럽게 죽는 경우든, 아니면 수명을 다 살고 죽든지, 누구든지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대통령도 노숙자도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어떠한 사람들도 누구든지 다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죽고 나서 어떻게 될 것인가? 해탈한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될 것이고, 선한 공덕을 많이 쌓은 사람들은 그 과보로 좀 더 나은 다음 세상에 있을 것이고, 악한 일들을 많이 한 사람들은 지금보다도 더 나쁜 조건에 떨어질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거라.

 

그렇지만은 윤회를 하든 윤회를 하지 않든 어쨌든 누구든지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항상 명심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선한 일들을 행할려고 하고, 죄를 범하지 마라 하는 겁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이생에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은 여러분밖에 없다는 거라. 인간의 몸 밖에 없다는 거라. 가장 좋은 조건을 타고 난 겁니다. 이생에서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이 조건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어떤 삶을 살든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두려움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이런 걸 받지 않고 바르게 죽는 연습들을 자꾸 하도록 해야 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훈련이라든지, 죽음을 받아들이는 훈련이라든지, 항상 마음을 무상하다는데 둔다든지, 그리고 도와 과에 이르렀다든지 해서, 죽음의 순간에 죽음을 바르게 받아들이고 평온한 마음으로써 맞이할 수 있는 준비들은 항상 해야 된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의 삶은, 또한 죽음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태어났으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고 죽었으면 윤회하는 세상에서는 다시 또 태어나는 겁니다. 피할려고도 하지 말고 두려워도 하지말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이지, 생과 죽음은 여러분들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부분입니다.

 

호흡 하나에도 여러분들에게는 일어남과 사라짐이 있습니다. 태어남과 죽음이 있습니다. 항상 그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살을 한다든지 아니면 뭔가 패배해서 낙오하고 낙담하기보다는 그 기회가 나에게는 더 좋은 기회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더욱더 분발하는 마음들을 자꾸 가지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저는 간단하게 여기까지 하고 다른 스님들 말씀 조금씩 듣도록 하겠습니다.

 

22:10 이후 자공 스님의 사성제에 대한 법문, 수마나 스님의 자비명상, 떼자사미 스님의 자비실천 등이 이어집니다.

 

https://blog.daum.net/alfl6843/1764

 

사무량심(CATU-APPAMAÑÑĀ-CITTA, 四無量心) (20141205.대구법문교재)

* 사무량심(CATU-APPAMAÑÑĀ-CITTA, 四無量心) (20141205) 「자비」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불교적 답입니다. 불교도가 목표로 하는 것은 지혜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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