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구·울주선원 수행법문

자애수행과 열반의 관계 (20151001.부산)

담마마-마까 2021. 11. 10. 09:00

https://youtu.be/RtqBc6HPqN8

* 자애수행과 열반의 관계 (20151001)

 

오늘은 「자애수행과 열반의 관계」에 대한 것, "자애수행의 두 가지 방법"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보통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자애수행을 할 때, 기본적으로 하는 게 있죠?

열 가지 장애가 없는 상태에서 자애수행을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고요하게 앉아서 수행할 수 있는 장소에 가서, 여러 일상사들 없이 뭐 가족이나 여러 가지 걱정할 것, 해야 할 일들이 있고 이런 거 없이, 그리고 조금 소리가 안 나는 곳 이런 곳들에서 수행을 할 준비를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고 나서 수행 장소에서 자애수행들을 합니다..

보통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이로움이 있기를, 내가 몸이나 마음에서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런 수행들을 시작으로 해서 전체로 넓혀나가는 그런 수행들을 합니다. 그게 보통 일상적인 자애수행 방법입니다.

 

아까 제목에 「자애수행과 해탈의 관계」라고 얘기했죠? 그렇게만 수행하면 해탈에 이르게 될까요?

(수행자 대답 : 자애수행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은데요.)

안될 것 같다? 그런데 경전에는, 멧따숫따 같은 경우에는 마지막 부분에 '그런 자애수행을 하는 자들은 다시는 태내에 들지 않는다. 모태에 들지 않는다' 하고 적어놨는데, 모태에 들지 않는다는 거는 자애수행으로 아라한에 이른다는 얘기잖아.

그런데 어디를 봐도 자애수행으로 아라한에 이른다는 얘기는 없죠? 경전에서도 그걸 아라한에 들었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닌 부분이죠. 조금 다르게 설명한 부분입니다.

분명한 것은 자애수행만으로도 해탈에 버금가는 불환과까지는 이를 수가 있다 하고 하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래서 불환과에 이르고 나서는 범천세계에 나서 범천세계 거기에서 아라한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해탈에 버금가는 그런 상태가 되는 거죠.

 

어떻게 수행하기에 그렇게 될까? 자애수행만으로!

경전을 한번 들여다볼게요.

자애경의 기본골격들을 이루고 있는 자애수행을 하기 위해서 갖춰야 될 조건에 대한 얘기들,

그러고 나서 자애수행을 하기 위해서 일상생활에서 해야 할 일들, 갖춰야 될 것들에 대한 것,

그러고 나서 자애수행을 어느 대상으로 할 것인가 하는 것,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부터 해서 넓혀나갈 건지 하는 수행의 방법에 대한 얘기들,

그렇게 수행을 할 때 자애의 마음들을 어떻게 가져야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얘기들,

그러고 나면 해탈에 이른다, 그 해탈에 이르고 나면 어떤 이익들이 있다 하는 것들이 자애수행, 자애경(Karaṇīya Metta Sutta)의 기본적인 구조입니다.

 

자애수행 하기 전에 기본적으로 갖춰야 되는 것들에 대한 것을 적어놓은 게 뭐가 있느냐면

'삭꼬(sakko)'라 해서 어떤 일들을 하든지 서투르게 하는 것들은 자꾸 피해라 하는 거라. 정확하고 능숙하게, 뭐든지 하더라도!

어제 누군가가 찾아온 사람이 있어요. 찾아왔는데 밖에서 문을 열고 탁 들어오다가 문에 머리를 탁 찧었어. 문을 열고 닫고 하는 게 능숙하지 못하니까 찧은 거겠지. 그렇지 않으면 문을 열면서 이미 들어갈 마음이 생겨서 문이 닫기기도 전에 이미 들어갈려고 하는 마음들이 강하게 일어나니까 머리를 찧어버린 거라.

 

평소 하는 일들에 그렇게 실수가 많은 분들은 이 '삭꼬' 부분을 보강하는 것이, 어떤 일을 하든지 정확하고 능숙하게 할 수 있도록 자꾸 훈련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는데 실수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 한의사 분들도 있으니까 침 찌를 때 처음부터 잘 찔렀나? 자꾸 하다 보니까 정확하게 잘 찌르게 되는 거지. 자꾸 능숙하게 되어서 눈을 감고 이렇게 만지더라도 훤히 그게 보여서 툭 찌를 수 있을 정도로 될 때, 그 일에 능숙하게 됐다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라. 그래서 되도록 일상생활에서 실수하는 것들을 자꾸 줄여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 '우주(ujū)'라 해서 뭘 하더라도 대충하고 애매모호하게 끝낼려고 하는 게 아니고 확실하게 끝내라. 시작을 했으면 그것을 분명하게 끝내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먹은 것에 대해서 그것이 실패하고 성공하고 하는 것, 그걸 중요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먹은 것에 대해서 끝까지 쭉 해나갈려고 하는 마음들, 그걸 끝까지 해나가게 될 때 그게 성공하는 비결이라고 그렇게들 얘기합니다.

그래서 '우주'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확실하게 하는 것, 애매모호하게 뭔가를 할려고 하고, 일을 끝마치지 못하는 것들을 어떤 핑계를 대가지고 자꾸 넘어갈려고 하지 말고, 그런 자신들을 자꾸 자책할 수 있도록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수후주(suhujū)', 하더라도 그것이 바른 방법으로 정직하게. 그것이 선한 마음으로 뭔가를 하는 것이 돼야 되는 것이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나쁜 방법으로 그것들을 성취할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선한 마음으로 했을 때 그것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한 것은 분명하게 이익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목적이 달성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선한 업들을 계속 쌓게 됩니다. 그래서 올바른 것들로서 정직하게 살아가도록 하라.

 

그다음에 '수와쪼(suvaco)', 사람 말을 잘 듣는 훈련들을 하라. 말을 많이 할려고 하지 말고 잘 듣는 연습, 잘 듣는 연습을 하고 나면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부드럽게 말하는 훈련들을 하라. 말을 할 때 자애의 마음들을 지니고 말을 하게 되고, 또는 알아차림을 지니고 말을 하게 되고, 이렇게 부드럽게 말해야 된다. 그래서 잘 듣고 부드럽게 말하는 훈련들을 자꾸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무두(mudu)'라 해서 온화하라. 자신은 온화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데 대부분 온화하지 못합니다.

어제 또 이 가사를 입고 온 스님이 한 분 있었어요. 한국 스님인데 희한하게 아랫가사는 입지 않고 윗가사만 툭 걸치고, 몰라 나한테 찾아온다고 해서 그렇게 하고 왔는지 그렇게 하고 왔드라고. 왔는데 어제는 그냥 계속 듣기만 했어. 하도 대승스님들 죽일놈 살릴놈, 본인도 대승스님으로 있으면서 죽일놈 살릴놈 하는 거라. 그러면서 그 스님이 내린 게 뭐냐면 대승스님들이 자비롭지 못해가지고 그렇다는 얘기를 하는 거라. 본인이 자비롭지 못하고 계속 남을 비판하고 하는 것을 자기 자신은 모르는 거라.

온화하다는 것은 그와 반대되는 것들입니다. 어떤 것들에 대해서 비판하려는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고, 그리고 어떤 일들을 하든지 간에 항상 그걸 자애로운 마음으로 자꾸 보게 될 때, 그리고 그런 것들이 신경쓰이지 않게 될 때, 내가 바르게 해놨을 거 같으면 뭐 그렇게 신경 쓸 게 뭐 있어? 그렇지 못할 경우엔 자신이 자꾸 경쟁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난다든지, 비판할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은 온화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온화하도록 자꾸 노력하라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그다음에 '아나띠마니(anatimānī)' 하는 것은 '아띠마니'라 해서 고만해지는 것, 거만해지는 것, 거만하지 않도록 하라. 겸손하라는 거라. 자기 자신을 자꾸 낮추고 겸손하도록 자꾸 노력하라.

그다음에 '산뚯사꼬(Santussako)'라 해서 만족할 줄 알아라. 많든 적든 그것에 대해서 항상 만족할 줄 아는 버릇들을 들이고.

그다음에 '수바로(subharo)' 해서 이거는 어찌 보면 출가한 스님들에게 해당이 되는데, 누가 도와주고 뭘 하고 할 때 부담스럽지 않게끔, 뭘 자꾸 요구하고 하면 부담스러워서, 도와주는데 부담스럽지 않게끔 하라.

그다음에 '압빠낏쪼(appakicco)', 잡다한 일들을 자꾸 줄이라는 거라. 예비수행 하기 위해서 예비 열 가지 장애 중에 하나에도 그 잡다한 일들이 있습니다. 잡다한 일들이 많으면 수행을 지속해나가기 힘듭니다. 잡다한 일들을 줄이라.

그다음에 열 번째가 '살라후까웃띠(sallahukavutti)', 간소하게 살아라. 간소하게 간편하게.

그다음 열한 번째가 '산띤드리요(santindriyo)', 고요한 상태에서 예의범절들을 잘 지키는 것들.

그다음에 열두 번째가 판단하는 능력들이 분명하게 있을 것. 아, 이것들은 진리에 부합하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그런 판단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할 수 있도록 자꾸 공부들을 해나가야 됩니다. (니빠꼬 nipako)

그다음에 열세 번째가 표리부동한 것들을 없애는 것. (압빠갑보 appagabbho)

그다음에 열네 번째가 집착하는 것들을 줄여나가는 것, 가족들이나 이런 것들에 집착하는 것들 (꿀레수 아나누깃도 kulesu ananugiddho)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비판할 수 있는 것들 나쁜 일들을 되도록 자꾸 줄여나가는 것들. (나 짜 쿳당 사마-짜레- 낀찌, 예-나 윈뉴- 빠레- 우빠와데이융.)

 

이런 것들이 자애경에서 설한, 자애수행을 하기 위해서 일상생활에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이것들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자애수행을 '내가 행복하기를' 이렇게 해가지고는 그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사마타의 일종으로만 수행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마타 수행만으로 해가지고는 어떠한 경우든지 도와 과에 이르기는 힘들어.

 

그래서 자애수행으로 불환과에 이르렀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먼저 예비적인 것들을, 자애를 계발하기 위한 것들을 계속적으로 만들어나가야 되는 거라.

여기 경전에서는 열네 개의 항목을 들어놨지만, 이거보다 더 많을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해나갈 때 자애수행으로 불환과에 이르기 위해서 열반에 이르기 위한 다리 역할들을 튼튼하게 하게 된다 하는 거라.

 

그러고 나서 경전에 설해놓은 게 뭐냐면

'빠산노 붓다사사네(pasanno buddhasāsane)'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계속적으로 훈련들을 해오고 나면 부처님 가르침을 듣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에서 기쁨이 일어난다는 거라.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 차이들이 있습니다.

스님 법문들이 유튜브로 올려졌지? 가끔 유튜브로 올려진 법문들을 듣고 전화가 오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스님, 기분이 너무 좋고 기뻐가지고 전화를 했다는 거라.' 뭔 법문 들었는지 나도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런 것들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기뻐하는 것들이 일어나는데 그게 계속 지속되면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그때 탁 그러고 나서 끝나. 그러다가 누군가가 자신을 건들면 금방 또 화가 일어나고 기쁨은 언제 일어났는지 모르게 사라져버린 상태라.

 

가르침에 대해서 기쁨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그것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보통 "기쁨을 일으키는 데는 두 가지가 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법문을 통해서라든지 아니면 경전을 통해서라든지 이런 것들을 통해서 기쁨을 일으킬 수는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불교도가 아니라도 아니면 기독교인이라도 얼마든지 수행을 배우고 수행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불교를 믿지 않더라도, 그것에 대해 신뢰하지 않더라도, 또 그 길을 따라가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수행을 해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항상 한계를 지닙니다.

결정적인 부분에 탁 들어가면 부딪쳐서 거기서 수행을 중단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수행을 해보니까 '나'라고 하는 존재에 대해서 뭔가 알갱이가 있다는 사실이 이때까지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라. 그리고 뭔가 '신이 모든 것들을 해줄 것이다' 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의심이 가기 시작을 하게 되는 거라. 그렇게 되면 내가 기독교 교리하고 자꾸 상반되는 거라. 그러면 대부분 사람들은 수행하는 것을 중단을 탁 합니다. 중단하고 자신의 원래의 종교로 돌아가게 됩니다.

일정한 부분에서는 기쁨을 얻었고, 거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수행을 해나가기는 하는데 항상 그것은 한계성을 지닙니다.

 

그래서 그것보다는 뒤에 것들을 해나가는 걸 보통 '빠산노(pasanno)'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기쁨을 얻도록 하라' 그렇게 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완전하게 납득을 해서 인정해버리는 것. 아, 진짜 나라고 하는 것이 없구나, 특정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것이든 변하는 모든 존재들, 신도 거기에 포함해서 모든 것들은 변하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성품이구나 하는 사실을 딱 인정을 해버리는 거라. 그거는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고 납득하고 인정한다는 얘긴 거라.

 

그래서 거기서 오는 기쁨들은 앞에 것과는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그렇게 됐을 때는 그분은 지속적으로 더 계속해나갈 수가 있게 되는 거라. 인젠 더 이상 교회 가는 일도 있고 성당에 가는 일도 있고 그렇게 하지만 그것은 그냥 종교적인 일인 것이지 그것들로 인해가지고 내가 신을 인정하라고 하는 것들은 아니라는 거라. 자신의 길과 또는 종교를 가지는 것들은 분명하게 차이를 두게 되는 거라. 그걸 이해하고 인정하고 납득한 것으로 인해서 나아가는 법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해서 생기는 것들은 꼭 한 번 유튜브를 통해서 법문을 듣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을 동일하게 아니면 비슷한 상태에서 계속적으로 누려나가게 되는 거라.

꼭 법문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들, 대상을 만나든 아니면 내가 수행을 통해서든 그 기쁨은 동일하게 계속적으로 누려나가게 되는 거라.

그게 바른 방법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도 그 이해의 레벨들을 조금 더 높일 수 있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럴려면 아까 얘기했던 자애수행, 일상생활에서 하는 자애수행을 꾸준하게 자꾸 해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뒷받침이 될 때 꼭 그냥 아무것도 없더라도 자신을 돌아보면 '아, 내가 참 잘 산다' 하는 것들로도 기쁨을 일으키게 되는 거라.

그런 분들은 "기쁨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자애에 머물게 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항상 마음은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게 된다 하는 거라. 굳이 내가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괴로움이 없기를' 하지 않더라도 자애에 머물러서 살게 된다는 거라. 실제 생활에서 범천과 같은 생활들을 하게 된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납득하게 된다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은 항상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그래서 자애의 마음들을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일으키게 되는 거라. 그래서 자애의 마음이 밑바탕이 된 상태에서 수행들을 하게 되고, 자애의 마음이 밑바탕이 된 상태에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게 되는 거라. 몸과 말과 마음으로 하는 모든 것들은 자애의 행위가 돼버리는 거라. 그걸 '자애에 머물러 산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실제적으로는 자애수행들을 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해야 되는 것은 그 자애는 누가 수행을 하는 겁니까? 자기 자신이 하는 겁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셨다. 자기 자신이 물을 마시는 겁니다. 목마른 사람이 있으면 그 목마른 사람이 먹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먹는 게 아닙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자애를 방사를 해서 저 사람이 뭔가 일이 잘됐다. 자기 자신이 목말라서 물을 마셨는데 목마름이 해결된 거는 저 사람이란 얘기와 꼭 마찬가집니다.

그거는 여러분들 관할이 아닙니다. 자애는 어떤 경우든지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자애를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애수행에서 자애수행의 상태에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하는 것은 그 사람 일인 것이지 내 일이 아니라.

 

자애에 머물러 산다고 하는 것은 내가 몸과 말과 마음으로 하는 것들, 모든 것들에 자애의 행위들을 하고 있다는 것들이라. 그래서 항상 자애의 마음들이 넘쳐나게 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것들로 인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지, 내가 자애가 없어진 상태가 될 거 같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 영향을 못 받아버리는 거라.

그래서 자애라고 하는 것은 방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애라고 하는 것은 항상 '흘러넘친다' 하고 그렇게 비유들을 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영향을 받으려면 나에게 자애가 가득 차서 모든 행위들이, 신구의에서 하는 것들에서 흘러넘치게 될 때 다른 사람들이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데 자꾸 이걸 오해할 거 같으면, '난 너에게 자애를 보냈는데 왜 너는 마음을 계속 성을 내고 있느냐' 그렇게 얘기할 거 같으면 그건 잘못된 거라. 넘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걸 영향을 받을 거라. 그럼 자기 자신이 '아, 내가 아직 목마르구나' 물을 더 먹어야 되는 것이지, 그래서 자기 자신의 모든 행위들에 대해서 자애가 있도록 자꾸 해나가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게 경전에서 얘기하는 "자애수행의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아마추어들은 계속 일상생활에서 갖추어야 되는 열네 가지 부분을 갖추려는 생각이 없이 자애수행만 하려고 그럽니다. '행복하기를, 네가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그런데 실제 불환과에 이르렀고 해탈의 길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거라. 갖추어야 될 것들은 분명하게 갖추고, 그리고 모든 행위에서 신구의(身口意)를 통해서 자애의 행위가 자꾸 이루어지도록 자연스럽게 되도록 스스로 만들어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은 자애로써 똘똘똘 뭉치는 상태가 돼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 나아가는 길들이 있습니다.

불환과에 이르는 길!

그것이 첫 번째가 뭐냐면 마음이 '항상 기쁨의 상태에 이르기 위한 자격을 갖췄다' 하는 마음이 탁 듭니다. 어떤 것들을 보더라도 항상 온화하고 기쁨의 상태가 일어나는 상태가 돼있다는 거라. 설혹 남이 나를 욕하더라도, 아니면 남이 뭔가를 나쁜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들을 싫은 마음으로써 보는 것들이 아니고 기쁨의 마음으로, 자애의 마음으로 그것들을 보게 된다는 거라. 그게 일상생활에서 쭉 갖추어나가서 신구의에서 자애가 형성이 될 때 갖추어지는 첫 번째 조건, '자애의 자격을 갖췄다' 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면 그다음에 이뤄지는 것들이 뭐냐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분명하게 납득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설한 삼법인, 사성제 이런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납득을 하게 됩니다. 아,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다 하는 사실을! 자신이 직접 해봤으니까! 자신이 또 그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길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게 두 번째 일어나는 과정들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되는 것이 뭐냐면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

모든 생명들은 항상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모든 생명들이란 인간을 얘기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럴 수 있는 조건들을 갖췄기 때문에!

그런 조건을 갖춘 경우에는 누구든지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귀중한 존재로서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을 평등하게 자꾸 보게 됩니다. 내 자신이 괴로움을 당하길 바라지 않듯이 어떤 누구에게도 괴로움을 줄려고 하질 않는 거라.

 

그런 적이 있습니다. 태국에 있을 때 만행을 나갈 때 스님들이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이 뭐냐면 물거름망이라고 있습니다. 물을 먹을 때 항상 그 물을 걸러서 먹습니다. 지금 우리 정수기와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물을 정화하기 위해서 알맹이 같은 것을 물에 탁 넣으면 물이 정화된다는 그걸 가져가는 스님이 있었어요. 어느 나이든 스님이 그걸 보고 노발대발해요. 요즘 말로 할 거 같으면 '저 죽일 놈이 자기 살려고 남의 생명 다 죽인다'는 거라. 거름망은 적어도 물속에 있는 생명을 죽이지는 않는데 그 알맹이는 넣으면 물의 정화는 더 잘될지 몰라도 물속에 있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들은 모두 죽여버린다는 거라. 자기 살려고 남의 생명을 죽이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그것들을 쓰지 않습니다. 항상 물거름망을 가지고 다니면서 물을 정수를 해서 먹습니다. 그러고 나서 또 물거름망을 물 있는데 가서 또 탁탁 털어줘요.

 

자애가 항상 형성이 돼있을 때는 자신이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길 바라지 않듯이 다른 생명들도 똑같이 그렇게 합니다.

물론 정수가 잘 안 돼서 배가 탈나는 경우들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해서 자신이 죽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그 길을 택한다는 거라.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수돗물을 통해서 물을 받아먹습니다.

자애가 형성돼있는 사람들 같으면 물을 한번 먹을 때마다 '아, 이걸 위해서 참 많은 사람들이 수고를 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미생물이나 박테리아를 죽였다는 생각들이 미칩니다.

그럼 그것들에 대해서 고마워할 줄도 알고 안타까워할 줄도 알아야 됩니다. 물 하나를 먹을 때도! 모든 생명에 대해서 똑같은 그런 마음을 지닐 때에는 그런 마음들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물을 먹을 때도 그냥 함부로 먹질 않는다는 거라. 하물며 다른 음식을 먹을 때는 더하는 거라.

 

그게 모든 생명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을 지닌 상태에서 평등하게 보게 될 때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안 될 때는 억지로라도 하십시오.

밥을 먹을 때든 물을 먹을 때든 '아, 참 고맙다.' '그 사람들이 소중하다.' 그리고 '내가 이런 것들로 인해서 다른 생명들이 피해를 입었으면 참 미안하다' 하는 마음들을 항상 가지게 되고, 그렇게 모든 것들을 섭취하고 마실 수 있도록 그렇게만 할 거 같으면 그래도 평등한 마음들은 조금씩은 더 길러집니다.

 

그렇게 될 때 그분은 이제는 진짜 자애에 머물러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일상들이 범천과 같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맞을 때도 고요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고 죽음 이후에는 범천계에 태어난다. 이생에서 그러한 삶이 몸에 익어지면 바로 불환과를 성취한 상태로서 머무르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이생에서 아라한에 이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아라한이 될 조건들을 충분히 갖추고 범천계에 태어나게 됩니다. 해탈에 이르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경전에는 자애수행을 하더라도 자애수행만으로도 해탈에 이른다 하고 얘기들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는 어머니의 태중에 들지 않게 된다.

 

그마만큼 자애수행은 모든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냥 자애수행으로 도와 과에 이르지 못한다 해서 그걸 등한시해야 할 부분은 결코 아닙니다.

어찌 보면 위빳사나 수행만이 최고다 해서 자애수행을 등한시 해버린다?, 그것은 다른 면으로 얘기할 거 같으면 부처님이 경전에서 많이 설명한 것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위빳사나 수행보다도 훨씬 많이 자애수행들에 대해서 설해놨습니다.

자애수행을 밑바탕으로 하지 않고 위빳사나를 하겠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지속해나가기 힘들다는 거라. 지혜를 얻어서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써 보기가 힘들게 된다는 거라. 일상생활에서도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서 보지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자애가 바탕이 된 상태에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자애가 바탕이 된 상태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자애로써도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자애를 자꾸 익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러고 나서 이어서 항상 평등하게 모든 생명을 대함으로 인해서, 항상 자애에 머무는 삶으로 되고 나면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오온에 대한 것들입니다.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조건지워진 것일 뿐이다 하는 겁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 조건 따라 일어났다가 조건 따라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다 하는 사실에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현상들 자신의 몸과 마음뿐 아니라 모든 것들, 물질적으로 구성된 것들, 그렇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구성된 것이라 하더라도 조건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라는 거라. 거기엔 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라.

그렇게 진행이 되면서 마음이 번뇌로부터 떠나버리게 된다는 거라.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로부터 떠난다는 것은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우리가 뭔가를 보게 된다. 보게 되면은 항상 번뇌가 일어납니다. 개념화시키기 때문에! 그런데 그 보는 것들은 무상하다고 볼 거 같으면 거기에서는 번뇌가 일어나질 않게 된다는 거라. 보는 것들을 형체로써 보게 되면은 개념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보는 것들을 본다고 볼 것 같으면 보이는 것들은 자꾸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상한 성품으로써 보게 되는 거라. 그렇게 되면은 보는 것으로 인해서 번뇌는 일어나지 않게 되는 거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분명하게 인식한다는 것은 그와 같은 겁니다.

무상 · 고 · 무아의 성품으로 본다는 얘깁니다.

불환과가 그런 것들입니다. 불환과에서 모든 번뇌가 사라집니다.

어떤 번뇌만 남겨두고? '나'라고 하는 것! 자신이 살아있기 때문에 나의 몸과 마음이 있다는 사실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서 보게 되는 거라. 그 오온은 무상한 성품, 고의 성품, 무아의 성품으로서 항상 인식을 하게 됩니다.

살아있으면서 바로 불환과의 상태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천에 태어났을 때는 이미 몸이라고 하는 현상들은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범천에 태어나면서 그 범천의 생을 마치면서 아라한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을 완전히 버린 상태가 돼버리는 겁니다.

 

그게 자애의 수행으로 얻어지는 이익이고 자애의 수행으로 인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들입니다.

 

여러분들은 항상 대상들을 무상한 성품으로 자꾸 볼 수 있도록, 고의 성품으로 볼 수 있도록, 무아의 성품으로 볼 수 있도록 자꾸 훈련들을 해나가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그것들은 바로 위빳사나 수행과 다름이 없어져 버립니다. 자애가 바탕이 돼있을 때 어떤 현상을 보더라도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