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위빳사나[기초수행반]

기초수행26. 법념처7. 오온(五蘊) (20080314)

담마마-마까 2020. 1. 10. 21:01

 https://youtu.be/-ns32U_xeLU

* 기초수행26. 법념처7. 오온(五蘊) (20080314)

계속해서 법념처에 대한 것들입니다.

저번 시간까지 다섯 가지 장애에 대한 설명을 다 끝냈습니다. 수행 중에 일어난 다섯 가지 장애 부분이었는데 감각적인 욕망과 악의, 혼침·망상, 들뜸, 의심 이런 것들이 다섯 가지 장애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감각적인 욕망은 망상의 형태로 많이 일어나지고, 악의는 통증의 형태로 일어나지고, 혼침·망상은 졸리는 것으로 일어나지고, 들뜨는 것들은 싫증으로 나타나지고, 의심은 의심으로 나타나진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수행 중에 망상이나 통증이나 졸림이나 싫증이나 의심들이 일어날 거 같으면 '아! 이 통증은 내가 악의를 가짐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구나' 하고 바르게 알아차리도록 하라. 싫증이 일어날 때도 '내가 대상에 집중하지 못해서 그리고 마음이 들떠있구나' 하고 판단을 내려서 그것을 관찰의 대상으로 하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법념처의 두 번째에 해당되는 오온(五蘊, Pañcakkhandhā)입니다.

 

오온은 「나」라고 하는 것들을 불교적으로 분석해보면 다섯 가지 덩어리가 발견됩니다. 그 이외에는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을 이루는 것이 이 오온이라는 것입니다.

루빠칸다(rūpakkhandhā), 웨다나칸다(vedanākkhandhā), 산냐칸다(saññākkhandhā), 상카라칸다(saṅkhārakkhandhā), 윈냐나칸다(viññānakkhandhā) 해서 색·수·상·행·식 온(蘊) 해서 다섯 가집니다.

 

다섯 가지의 덩어리(蘊)라고 해도 가만히 멈추어 있는 것들이 아니라 꼭 폭포와 같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변해가고 있는 것들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계속해서 변하는 이 다섯 가지 덩어리에 '나'라고 하는 것을 서로 집착해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오온은 우리가 수행에서 근본적으로 알아차려야 될 궁극적인 실재(paramattha), 즉 물질(rūpa)과 마음의 작용(cetasika, 심소), 마음(citta), 그리고 열반(nibbāna) 그것인데, 물질과 마음의 작용, 마음이라고 하는 이 세 가지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에 해당이 됩니다.

물질은 색온이고, 마음의 작용은 수·상·행온이고, 마음은 일반적으로 식온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열반을 체험하고 열반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실재를 알기 위한 도구로써, 이 오온을 실재적인 것으로서 알아차려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 덩어리로 궁극적 실재로서 알아차릴 대상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 오온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매순간 새롭게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법념처라고 하는 것은 이런 다섯 가지 대상, 오온을 '나'라고 하는 것과 동일시하지 않고 '나'라고 집착하지도 않고 이 오온을 단지 법으로써 객관화하여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이 오온에서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삼법인을 확인하는 것들입니다.

 

수행에서 이렇게 몸과 마음을 관찰할 때 만나는 대상 이 색·수·상·행·식을 법으로써 알아차리다 보면 집중력도 깊어지고 알아차리는 힘들도 점점 더 강해지고, 그리고 좀 더 자신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이렇게 외부적인 대상, 외부적인 몸과 마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이 세 가지 특성들을 관찰을 통해 명확하게 알아서 오온에서 '나'라고 하는 집착을 떼어버릴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조건지워진 것들은 반드시 조건에 의해서 변화해서 소멸한다 하는 사실. 그래서 일어난 것들은 반드시 소멸해서 항상(恒常)하는 것이 없다 하는 무상의 성질.

또한 이런 조건지워진 것들이기 때문에 조건에 의해서 영원하지 못하고 조건에 의해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은 불만족스럽다고 하는 것들.

그러한 특성들을 알아차리고 이런 조건지워져서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오온을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또 내가 그 몸과 마음을 조절하는 것들이 아니라 조건에 인해서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오온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하는 사실, 무아구나 하는 사실. 그러한 특성들을 알아차려나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이렇게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짧은 찰나 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오온은 법으로써 알아차릴 대상이지 집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씩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루빡칸다(rūpakkhandhā), 색온()이라고 그럽니다.

 

나라고 하는 이 몸을 분석해보면 우선 루빠(rūpa, 色)의 덩어리(蘊, khandhā)가 발견됩니다. 루빠는 '나'라고 하는 물질, 나의 몸입니다.

 

물질을 내 몸이라고 집착하면 괴롭습니다.

있는 그대로 물질의 실재하는 성품인 사대(사대요소)를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의 몸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몸으로 인해서 즐겁다, 몸이야말로 중요하다 라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씻고 멋을 부리고, 또 이 몸이 살기 위한 집을 만들거나 하면서 필사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 몸의 노예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몸으로 인해서 아만심이 증장되거나 허세를 부리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다투기도 합니다. 온 세상은 거의 몸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고 나면 이 색온-루빠칸다라고 하는 것이 남습니다. 이 몸이 남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라고 생각해서 시간과 돈을 들여서 소중히 하는 이 몸은 죽고 나서 느낌이라는 감정을 빼고 냉정하게 보면 단순하게 시체입니다.

 

그냥 루빠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몸은 굉장히 빠르게 변화해 갈 뿐입니다.

그런 변화에는 살아있는 동안의 변화도 있고, 죽고 나서의 변화도 있습니다. 어느 쪽을 보더라도 기분 좋게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있을 때는 젊고 건강하다 싶은데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늙고 병들고 아프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죽고 나서도 물론 몸에서 나오는 것들은 땀이나 대소변이나 침이나 고름이나 심지어 구더기까지 기분 나쁜 것들뿐입니다. 이 몸이라는 것은 계속하여서 쇠퇴하고 낡아가고 악화되어 망가져 갈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 계속하여서 이 몸을 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새롭게 씻어주고 다듬어주고 수리를 해서, 다시 또 몸을 만들고, 또 내일 그렇게 만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몸을 유지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이 몸이라고 하는 물질, 물질이 최고다 하는 삶에서는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되고 어느 것 하나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왜? 몸은 계속하여 변해나가는 물질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떤 '나'라고 하는 것,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항상 조건에 인해서 생겨난 것은 조건에 인해서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인 이 몸을 변하지 않기를 바라면 그것은 곧 괴로움입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이 몸을 관찰할 때 몸이 변하는 것들을 알아차려야 되고, 이런 변하는 것에서 법의 성품을 통찰할 수 있어야 만이 지혜가 생겨나는 것들입니다.

 

냉정하게 관찰해보면 이 몸이라고 하는 물질의 현상은 단순하게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사대(四大)요소의 변화로써 받아들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만이 이 몸으로 인해서 괴롭지 않게 되고, 이 몸으로 인해서 무상․고․무아를 통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웨다나칸다(vedanākkhandhā), 수온()입니다.

 

또 이 몸을 관찰해보니까 두 번째 발견되는 것들이 웨다나(vedanā, 受)의 덩어리(蘊, khandhā)입니다. 웨다나는 느낌·감각·느끼는 것들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보는 것, 코로 냄새 맡는 것, 혀로 맛보는 것, 몸으로 느끼는 것.

인간은 이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에 각각의 대상이 접하는 것에 의해서 항상 어떤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조금만 관찰해보면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계속하여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느끼는 덩어리라는 말을 붙여서 수온(受蘊)이라고 합니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접촉해서 일어나는 느낌을 단순히 느낌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나의 느낌'이라고 집착하게 되어서 괴롭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은 항상 느낌이 있게 되어있습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떤 느낌이든지 단지 느낌이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그래서 그 느낌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즉시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고, 사라지면 사라지는 것을 즉시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느낌도 조건지워진 것들이기 때문에 조건에 의해서 일어났다가 조건에 의해서 사라질 뿐입니다.

느낌의 어떤 주체도 없는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멍하게 있는 우리에게 잘 파악되지 않겠지만, 인간이 느끼는 감각·느낌은 실질적인 것은 아픔뿐입니다. 최근 의학계에서도 "신경으로 느끼는 정보는 아픔뿐이다"하고 과학잡지에 발표를 하기도 했습니다.

 

부처님은 2,600여년 가까이 전에 이미 "느끼는 것은 모두 근심이라고 나는 말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이 "나는 말한다."하고 말씀하실 때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없어도 이것은 진리이다."라고 강조할 때 씁니다. "나는 느끼는 것은 모두가 둑카-근심·고통·괴로움이라고 말한다."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서 있으면 몸이 아파서 앉고 싶어집니다.

앉으면 바로 편하다고 느끼지만 계속 앉아있으면 또 몸이 아파서 싫증을 내게 됩니다. 잘 관찰해보면 그 아픔이라고 하는 매우 가벼운 느낌은, 서 있으니까 아파서 앉고 싶어져서 앉았을 때, 앉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계속 서있는 것에 의해서 몸의 아픔이 앉아있는 새로운 느낌으로 바뀌었는데 그 바뀐 것이 기쁨으로 편하다 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우리가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렇게 마음으로 느끼는, 부담을 느끼는 양의 괴로움의 양이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 괴로울 때 부모가 도와주면 기쁨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는 괴로움, 근심이라고 하는 것이 전제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즐거운 느낌이든 괴로운 느낌이든 기본적으로 아픔,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이 항상 상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느끼는 것은 모두가 근심·괴로움이다 하고 나는 말한다."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고 듣고 맛보고 하는 일도 그러한 느낌들도 모두 아픔입니다.

너무나 완만한 아픔이므로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지 느끼는 대상의 양이 커지면 아픔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좌선하고 앉아있을 때 처음에는 아픔이라고 몰랐는데 아픔의 양이 점점 더 강해지니까 아프다 하고 느끼는 것뿐입니다. 매우 강한 빛을 보면 눈이 아파지고 강한 소리를 들으면 귀가 아픕니다.

그처럼 느끼는 것은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근심, 아픔에 지나지 않은 것인데 우리는 그러한 감각 느낌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을 뿐입니다. 항상 좋은 느낌은 없는가, 좋은 감각은 없는가 하고 찾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기분 좋은 느낌들만 요구하고 그것을 위해서 다투기도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느끼는 것도 굉장히 빨리 변화하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흘러 떨어지는 폭포와 같이 계속하여 변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나'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것을 보면 '내가 보았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소리를 들으면 '내가 들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나', 이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은 대부분 이 웨다나로부터 태어나게 됩니다.

 

결국 실체가 아닌 '나', 관념뿐인 '나'라고 하는 말에 속아버리게 됩니다.

'나'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분석해보면 실체가 없습니다. 단순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라고 하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느낌은 이와 같이 계속하여 사라지고 계속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반복해나가고 거기에는 '본래의 나'라든지 '나의 영혼', '나의 것'이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산냐칸다(saññākkhandhā), 상온()입니다.

 

또 관찰해보니까 발견되는 것이 산냐(saññā, 想) 기능의 덩어리(蘊, khandhā)입니다. 산냐(想)는 지식과 같은 것으로 일부러 의식하지 않아도 아는 기능입니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아침이다, 낮이다, 이것은 책상이다, 의자다, 고양이다, 나는 학생이다'하고 생각할 것도 없이 매우 많은 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차 운전할 때 빨간 신호를 보면 브레이크를 밟고, 커브가 있으면 핸들을 꺽는 것, 그것도 모두 산냐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교육은 산냐를 늘리는 역할을 해줍니다.

 

육근(六根)이 육경(六境)과 접촉할 때 이미 과거에 저장해놓은 정보에 의해서 지각하게 됩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지각작용을 합니다.

상은 그 대상을 받아들여서 인식하는 역할도 하고, 또 상이 여러 가지가 엉켜버리면 귀신이라든지 산신령과 같은 헛것을 보는 역할도 하는 겁니다. 상은 마음의 작용의 하나일 뿐입니다. 하나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것을 자기만의 색깔로 덧칠을 하고 덧칠을 해서 또 하나의 새로운 관념, 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상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조건지워진대로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이 자기의 상에 집착하면 괴롭습니다.

이 상은 내 관점에서 본 오염된 정보들입니다. 이것을 바른 것이라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모든 관념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념을 떠난 실재를 보아야 진리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산냐에도 집착하고 있어서 '나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 나는 그 사람이 선등님이다,'하고 알고 있다 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단순한 말인데 실제는 '그 선등님'을 재확인하는 기능이 있구나 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선원장이란 직함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들어서 나를 우연히 안 것뿐입니다. 과학자든지 채소가게 주인이든지 산냐의 종류가 다를 뿐입니다.

그 산냐가 있어서 '나'라고 하는 집착이, 우리에게 지혜로운 것들이 일어나게 하는 것을 방해하게 하는 겁니다.

 

산냐는 머릿속에서 계속 망상으로써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나는 의사다, 나는 남자다, 나는 한국인이다' 이렇게 망상을 해서 괴로움을 만들어냅니다. 그런 개념과 맞지 않으면 다투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조화를 가져오는 망상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망상은 항상 사람들 간에 부조화를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릴 때는 부모한테 혼이 났다고 생각하여 계속하여 괴로워하는 것도 이 산냐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다양한 것들을 생각해내서 망상의 흐름을 계속하여 만들고 괴로워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나다'라고 하며 집착하고 있는 겁니다.

 

산냐도 엄밀하게 살펴보고 관찰해보면 계속하여 변하고 흘러가는 것뿐입니다.

'나의 것' '나'라고 하는 실체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미 상으로 저장된 정보는 '내가 본다'고 하는 그릇된 견해, '나'라고 하는 견해의 바탕에서 만들어진 오염된 정보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과거에 알고 있는 기억은 이 순간의 실재가 아니고 허상이고 관념입니다. 허상을 실재라고 착각하면 괴로움을 당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상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릴 대상으로서 맞이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 네 번째가, 상카라칸다(saṅkhārakkhandhā), 행온() 입니다.

 

또 나를 관찰해보니까 그다음에 찾아낸 것이 상카라(saṅkhāra) 라고 하는 마음의 기능입니다. 조금만 자신을 관찰해보면 마음속에서 '뭔가 하고 싶다'라고 하는 기분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상카라 입니다.

 

빵을 먹고 싶다 하면서 빵을 먹으면서 홍차를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어떤 것을 하는 것과 동시에 그래서 다음은 이것을 하고 싶다, 또 다음은 이것을 하고 싶다라고 끝이 없이, 침착해지지 않은 상태를 계속하여 만들어나갑니다. 사람은 찰나 간에도 생각하지 않고 머리를 텅 비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한 일들도 자꾸자꾸 복잡하게 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뭘 먹고 싶다 했을 때, 프랑스 요리 먹을까, 중국요리 먹을까, 일식을 먹을까, 또는 술을 곁들여서 먹을까, 먹는 방법은 어떤 것을 어떻게 먹을까, 또 요리할 때는 어떻게 만들어 먹을까 하고 항상 뭘 하고 싶다 하는 것들이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온갖 감정들을 만들어내서 괴로워합니다.

먹고 싶은 프랑스 요리를 못 먹어서 괴로워하고, 내가 음악을 하고 싶고 요리학원에 다니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괴로워하고, 이렇게 온갖 감정들을 만들어내서 괴로워하는 것들입니다.

다만 '무언가를 하고 싶다'라고 한 것뿐인데, 거기에 통상적으로 과잉의미를 부여해서 집착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상카라, 행(行)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 순간의 행위를 일으키게 하는 마음의 의지작용일 뿐입니다.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무엇인가 하고 싶다'라는 에너지가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면, 그 이전 상태로부터 일어난 것인데 지금은 그 일어난 것은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는 것에 의해서 다음 행동을 하고 싶다라고 하는 에너지가 나오는 단지 그것뿐입니다. '가고 싶다' 라고 해서 목적지에 가서 도착하면 '돌아오고 싶다' 라고 하는 에너지가 또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그것을 '내가...' 라고 하는 망상·개념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입니다.

 

마음의 의지작용인 행은 그래서 일으키는 즉시 선업이나 불선업의 행위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과보를 만들어내면서 살아지게 돼있습니다. 일단 행위가 일어나면 그 행위에는 과보가 반드시 따르게 돼있습니다.

상카라라고 하는 행은 바른 선심의 행위도 있고 불선심의 행위도 있습니다.

탐욕, 화냄, 혐오, 후회, 인색함 등의 마음의 작용은 불선업을 일으키는 행온, 상카라칸다 입니다.

삿다-믿음, 사띠-알아차림, 멧따-자애, 빤냐-지혜 이런 것들은 선업을 일으키는 행온입니다.

 

어떤 행온이든지 그것이 설혹 분노이든 아니면 자애이든 어떤 행온이든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렇지만 나쁜 마음의 작용은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깨끗한 마음의 작용으로 바꿀 수는 있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도 자꾸만 변화하고 계속하여 흘러가서 일어나고 사라질 뿐입니다. 거기에는 '나라고 하는 것' '나라고 하는 실체'는 없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윈냐나칸다(viññānakkhandhā), 식온()입니다.

 

식(識, viññāna)이라고 인식하는 것이지만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아는 식(識)입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 이 윈냐나(viññāna) 입니다.

살아있는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윈냐나는 살아있는 생명, 살아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윈냐나를 조금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마음이 하는 것들,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그러한 기능입니다.

 

얼핏보면 웨다나(受)와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장미를 보고서,

그 장미를 보는 시각으로 무엇인가를 느끼는 것은 웨다나(受)이고,

예쁘다, 장미다 라고 인식하는 것은 윈냐나(識)입니다.

그 예쁘다, 장미다, 예쁜 장미라고 하는 구별·판단을 하기 위한 정보나 가치기준이 산냐(想)이고, 이 산냐를 사용해서 윈냐나(識)가 식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마음인 윈냐나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웨다나라고 하는 느낌, 그리고 산냐라고 하는 형상작용이 필요하고, 거기에 반드시 상카라라고 하는 의도-행(行)도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이 네 가지는 항상 함께 일어나고 함께 사라집니다. 식온(행온)이라고 하는 상카라칸다는 마음의 무더기인데, 생각이나 망상, 기분 등으로 표현됩니다.

 

우리의 마음(식)은 항상 마음의 작용인 수·상·행과 함께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손을 들 때도 이 네 가지가 함께 일어납니다. 마음이 손을 들고싶다 라고 해서 손을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나다'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렇지만은 어느 마음이 자신이라고 말합니까? 식온입니까, 상온입니까, 행온입니까, 수온입니까? 아무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오직 대상을 받아들여 '아는 기능'만 합니다.

그런데도 이 식온을 오온의 작용을 알아차리는 주체구나, 이 마음을 '나'로구나, '나'라고 집착하는 그런 유신견, 이런 유신견이 있는 한은 괴로움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마음은 똑같이 순간순간 변화하고 소멸합니다. 계속하여 변화해 나갑니다. 거기에는 '나'라고 하는 실체, 영혼이라고 하는 보물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는 안식(眼識)은 조건에 의해서 사라집니다.

안식은 일어나는 순간 사라지고 다음 순간 새로운 안식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식은 변화해나가고 계속하여 일어나고 사라질 뿐입니다. 그 순간의 조건에 의해서 대상을 아는 마음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찰나 찰나를 꿰뚫어 보는 알아차림이 없고, 원인·결과를 통찰하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내 것이다' '나다' '나의 영혼이다'하고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행한다'라고 하는 행온이 일어나게 되고,

'이 몸이 내 것이다' 하는 색온이 일어나게 되고,

'내가 느낀다' 하는 수온이 일어나게 되고,

'내가 무엇이다'하는 상온이 일어나게 되고,

'내가 안다'라고 하는 식온이 일어나게 되고.

그것에 집착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색수상행식은 이렇게 '이 몸이 내 것이다' '내가 행한다' '내가 느낀다' '내가 무엇이다' '내가 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안다'하고 판단할 때는 '아! 아니다. 단지 식온의 덩어리가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하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이런 다섯 개의 덩어리에 '나'라고 집착하는 한은 한없는 괴로움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올바르게 관찰하여서 그런 악순환으로부터 제발 탈출하라 하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만약 '나'라고 하는 것이 뭔가 하고 정말로 이해할 수 있으면 삶의 방법이 바뀝니다. 마음에 평안이 가져와지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목표로 해야 될 것이 뭔가? 열반이구나! 궁극적인 지혜를 얻어야 되겠구나! 하고 그것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명을 탈출하는 길이고 세상을 초월하는 길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이런 오온은 '나'라고 하는 집착에 의해서 말과 몸으로 행위를 하고, 또 그 행위로 인해서 새로운 일어남과 죽음이라는 윤회를 반복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색온은 물질이구나, 이 물질은 한 조각의 거품과 같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수온은 느낌이구나, 이 느낌은 물방울과 같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상온은 관념이고, 이 관념은 한편의 아지랑이와 같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행온은 마음의 작용으로 파초나무와 같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식온은 의식으로, 마치 요술을 부리는 환상과 같구나 하고 알아차리라 하고 경전에서는 얘기를 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오온을 '나'라고 알고 있던 잘못된 견해를 빨리 버려버려야 되고, 이 오온은 내가 아니고 조건에 의해서 단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실재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아차리고 확인해야 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도록 해야 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아닌 밖의 대상에 대해서 알아차리면 '내가 본다'하는 견해가 반드시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실재를 바르게 관찰하고 알아차릴 수가 없게 됩니다. 반드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만이 있는 그대로 관찰해서 바른 견해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궁극적인 진리를 볼 수 있는 대상은 이 오온입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입니다.

 

수행하면서 이런 오온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보이는 것(色)이나 소리(聲)나 냄새(香)나 맛(味)이나 감촉(觸)을 나의 것으로 집착하고 또한 좋아하고 또한 싫어하고 해서, 즐겁든 괴롭든 결국에는 괴로움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나'라고 집착하는 순간부터 오온에 대해서 탐욕이 일어나고, 이 탐욕이 주인이 되어서 행위를 하게 되어서, 계속적으로 탐욕의 성향들이 쌓여져가서 바꾸기 힘들게 되는 겁니다.

 

수행자는 오온을 바르게 관찰하면서 매순간 이 오온이 생멸하는 것을 알아차려서 오온으로 인해서 무상 고 무아를 알아차리도록 해서, 그 어디에도 실재하는 '나'가 없구나 하는 것들을 확연하게 꿰뚫어 보아서 오온으로부터 자유롭게 돼야 합니다.

단지 '오온은 물질과 비물질, 몸과 마음의 덩어리이다. 그 안에는 변하지 않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것들을 반드시 알아차리도록 해서 이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서 생사윤회를 끊도록 해야 됩니다.

 

이 오온은 단지 좋은 대상입니다. 수행의 대상입니다.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나에게 보여주는 도구이구나. 얼마나 좋은 도구를 내가 가지고 있는가 하고 알아차려야 될 것입니다. 수행하는 마음들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법념처의 세 번째 십이처(十二處)에 대해서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