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초수행25. 법념처6. 오장애_혼침, 들뜸, 의심 (20080307)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법념처를 계속 하겠습니다.
지금 법념처에 다섯 가지 장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감각적인 욕망, 악의, 혼침, 들뜸, 의심 이 다섯 가지가 다 장애입니다.
어떤 형태로 나타나느냐 하면 감각적인 욕망은 망상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악의를 가지고 분노하고 하는 것은 통증으로 나타나고, 혼침․망상․게으름 피우고 하는 것은 졸림으로 나타나고, 들뜨고 하는 것은 싫증으로 나타나지고, 의심은 의심으로써 나타나진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런 수행 중에서 망상이나 통증이나 졸림이나 싫증이나 의심이 나타나면 아! 이것이 다섯 가지 장애이구나 하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혼침, 망상, 게으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행복하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보통 합니다.
부처님은 "모든 생명은 행복하게 되고 싶다라고 생각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수카까마 부따니(sukhakāma bhūtāni)" 그렇게 법구경에 게송이 나옵니다.
행복을 누구든지 좇아가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그렇다는 겁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진 것은 모두 자신의 행복을 바라고 또 그것을 희망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생명은 모두 다 행복하게 되고 싶다라는 희망이 있는데 모두 다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 용어에서 '알라시야(ālasiya)'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게으름 피운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 '게으름이라는 것이 일어나면 아무것도 이뤄지는 것이 없다'라고 얘길하죠. 그래서 부처님은 행복하게 안 되는 원인의 하나로써 이 게으름 피우는 알라시야(ālasiya)라고 얘기를 합니다.
태국에서 옛날에 공부를 할 때인데, 어는 한 스님은 연세가 조금 들기는 했어도 굉장히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남들이 놀 때도 놀지 않고 항상 책을 옆에 끼고 공부를 하는 스님이셨습니다. 스물네 시간 살펴봐도 화를 내는 일도 없고, 노는 일도 없고, 그렇게 자는 시간도 많지 않은 것 같고, 항상 책을 읽는 그런 스님이었는데 시험을 쳐서 성적이 나오면 맨날 십 점, 이십 점이 고작이거든.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스님이 머리가 나쁘다든지 아니면 뇌에 이상이 있다든지 아니면 교우 관계에 문제가 있다든지 아니면 몸이 허약하다든지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항상 책을 보고 손에서 떼어놓지 않는데도 결과는 그렇게 나쁘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스님을 보면서 그때 생각한 것이 '아! 게으름이란 것이 진짜 이런 것이구나'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가만히 그 스님 공부하는 것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자기가 아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이해할려고 하지를 않는다는 거라. 큰스님들이 아무리 경에 대해서 얘기를 하더라도 열심히는 듣고 있는데 이해할려고 하지를 않는다는 거라.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는 것입니다. 책은 손에서 놓고 있지는 않지만 듣고 있는 모습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참 공부 잘하고 있다 하고 생각을 하는데 자기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겁니다. '음! 저것은 내가 모르는 것' 하고 한쪽 귀로 들었다가 한쪽 귀로 그냥 흘려버린다는 거라.
그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과가 나쁘면 그것은 게으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하고 생각을 해야 되겠구나' 하고 판단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수행을 한다고 열심히 노력을 하고 있는데, 가르쳐주는 방법으로 하지 않고 여러분 방법으로 할 거 같으면 수행의 성취가 더디고 또 수행이 잘 무르익질 않을 겁니다.
게으름 피우고 있는 겁니다.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이고. 내가 하는 이 방법이 맞다고 판단을 내리고, 스님들의 말씀이나 경전들을 읽고 듣고 하지만 그걸 그대로 할려고 하질 않는다는 거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게으름의 성격은 뭐냐 하면 자신을 속이는데 사용을 합니다. 몇 시간 공부했느냐, 몇 시간 수행했느냐, 아니면 철야를 해서 수행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결과들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들입니다.
마음이 향하는 두 개의 방향이 있습니다.
게으름 피우지 않는 사람이나 게으름 피우지 않는 생명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다 조금씩은 게으름을 피우게 되어있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우리들을 두 방향으로 이끌어 나갑니다.
행복하게 되고 싶어서 노력하겠다 하는 방향과, 가만히 있으니까 즐겁고 편해서 게으름 피우고 싶다 하는 방향, 완전히 극과 극의 양쪽으로 끌려가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자신이 어느 쪽에 치우치고 있는가 하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알라시야(ālasiya)의 반댓말로 '위리야(vīriya)'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힘쓴다. 노력한다'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수행을 잘하고 싶다고 하면 생각을 한번 다시 해보십시오.
자신의 마음에 선천적으로 독과 같은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이 붙어있다 하고 생각을 하십시오.
그것을 내가 일부러 증장시킬려고, 키울려고 하지 않아도 이미 붙어져있다 하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 알라시야 라고 하는 바이러스가 몸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위리야라고 하는 노력의 약을 먹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위리야라고 하는 것은 힘쓰는 것이고, 정진하는 것이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 알라시야라고 하는 게으름이라고 하는 바이러스를 물리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들입니다. 억지로라도 힘써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알라시야라고 하는 게으름을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 더 기억해야 될 것은 이 게으름 피우고 하는 것들은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보통 몸 안에 항체가 있으면 한 번 걸린 바이러스는 다시는 걸리질 않습니다. 그런데 감기 바이러스 같은 경우에는 언제든지 형태를 바꾸어서 우리 몸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감기를 몰아내도 그다음에 또 감기가 들어오고 또 들어오고 이렇게 합니다. 이 알라시야도 똑 마찬가집니다. 감기와 같은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언제든지 게으름 피우겠다고 하는 바이러스가 일어나게끔 돼있습니다.
노력이라는 약을 지속적으로 먹어주지 않으면, 일어나면 노력하고 일어나면 노력하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을 몰아낼 수가 없는 겁니다.
한번은 잘 되었으니까 노력해서 게으름 피우는 것들을 갖다가 알아차리고 몰아냈으니까 다음엔 또 잘할 수 있다 해서 마음을 안심시켜줘 버리면 바로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이 일어나집니다.
저번에는 아주 열심히 노력하고 그렇게 해서 성공을 했지만 자기 자신을 과잉 포장해버립니다. 그것이 게으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몸은 항상 이 두 개의 에너지가 서로 충돌하고 있다 하고 생각을 해줘야 됩니다.
게으름피우는 나쁜 에너지 그래서 마음의 기능들을 둔하게 해주는 에너지,
또 하나는 의지력을 가지고 노력하고 하는 에너지 이 두 개가 항상 저울추 같이 왔다갔다하게 돼있습니다.
어떤 것이 일어나느냐, 어떤 것이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수행이 더뎌지고, 빨라지고 하는 겁니다. 이 알라시야라고 하는 것과 위리야라고 하는 것은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촉매와 같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게으름을 피우든 노력하든 스스로 하는 것들입니다. 기원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의 마음으로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서 게으름을 피우고, 노력을 하고 하는 겁니다.
수행을 해나갈 때 마음이 침체되어버리면 게으름이 일어나지고, 또 수행 상에서 나른해지고, 또 무기력해지고, 그래서 기지개나 하품을 하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나타납니다.
이런 장애가 일어날 때는 즉시 그것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이런 게으름 피우고 하는 침체된 마음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물들어버리고 탐닉해버립니다. 그래서 졸음에 떨어지고 게으름에 자기 자신을 던져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게으름이 있고 침체된 마음으로 해서 혼침(thīna)이 있고 하는 것이 싫다고 해가지고 배척하려는 마음을 일으켜도 그것은 알아차리는 것들을 놓쳐버리는 겁니다. 수행을 할 때는 이런 것들과 싸우지도 말고 배척할려고 화를 내지도 말고, 단지 그렇게 해서 오는 졸림(middha)이라든지 나른함이라든지 무기력함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아서 그때의 몸과 마음의 현상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게으름, 혼침 이런 것에 빠지면 물에 이끼가 덮여있는 것과 같다'하고 경에는 얘기합니다. 이끼가 끼면 자신의 얼굴을 비춰볼 수가 없습니다. 알아차림을 지속해나갈 수가 없고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루빨리 이런 혼침과 게으름에 빠져있는 자기 자신의 감옥에서부터 빠져나오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들뜸-후회(uddhacca-kukkucca)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마음이 들뜨면 불안정해집니다. 또는 지난 일들을 후회하고 스스로 자책해버리게 됩니다. 그런 마음이 일어났으면, 그 마음을 없앨려고 할 거 같으면 더욱더 들뜨고 후회하게 됩니다. 단지 그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도록 해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느낌들을 후회하고 들뜨고 했을 때 일어나는 느낌들을 알아차리고 지켜보도록만 해야 됩니다.
후회하고 들뜨고 하는 것은 좋은 마음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바른 마음이 일어나지게 됩니다. 그래서 바른 마음으로 인해서 앞선 불선심을 일으킨 것들을 제거해버리게 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들뜨고 후회하고 하는 것은 분노의 하나입니다.
'아! 내가 참 나쁜 짓을 했구나. 실패했구나' 하고 후회하고 하는 것.
'내가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공부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을 하는 것.
후회를 하고 할 때는 몸과 마음의 활력은 곧바로 멈춰버립니다. 후회했을 때를 생각해야 되니까! 그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알아차려야 되겠다 하는 노력의 힘, 의지가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원래 사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금니를 악물고 '제대로 하자' 하고 생각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노력을 하는 겁니다. 그 노력만으로 충분한 겁니다. 결과가 어떤 결과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스스로 노력을 했다고 할 거 같으면 후회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잘못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어! 그렇구나' 하고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런 적극적인 마음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부처님 당시 때 앙굴리말라라고 하는 존자가 있었습니다.
꼬살라 왕의, 요즘말로 할 거 같으면 참모입니다. 참모 중에 각가라고 하는 대신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 각가 대신이 아들이 태어나고 나서 점을 쳐보니까 이 아이가 나라를 망치는 살인자가 될 것이라고 점괘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꼬살라 왕에게 그것을 얘기하니까 왕이 물어봅니다.
혼자서 살인행위를 일으키는 것이냐 아니면 여러 명이 무리를 지어서 일으키는 것이냐 하고 물어보니까, 완전하게 혼자 단독으로 하는 것이다 하고 각가 대신이 얘기를 하니까, 왕이 생각해봅니다. 혼자 그래봐야 이 큰 대륙에, 이 꼬살라라고 하는 큰 대륙에 한 사람을 감당 못하겠느냐, 그리고 내가 아끼는 각가 대신의 아들인데 한사람 어떻게 못하겠느냐 싶어서 그냥 살려주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기대로 인해서 '아힝사까'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생명에 대해서 항상 부드럽고 자애롭고 상냥하게 대하라 하는 그런 뜻으로써, 아힘사까 죽이지 말라라는 그런 뜻으로써 붙여줍니다.
아힝사까는 머리고 좋고 예의범절도 바르고 학문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학교에서는 다른 학생들의 시샘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나쁜 소문을 돌려서 선생님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어버립니다. 분노에 물들어 있는 선생님이 이 아힝사까를 죽일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아힝사까에게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천명의 생명을 신에게 제물로써 바쳐야 된다. 그래서 천명의 손가락을 잘라 오너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선생님 말씀을 성실하게 듣는 이 아힝사까가 거절을 할 수 없어서 결국은 산에 틀어박혀서 살인을 시작합니다. 죽인 사람의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모아서 고리를 만들어서 목에 겁니다. 그래서 앙굴리말라 라는 별칭을 얻게 됩니다. 손가락으로 만든 목걸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목걸이를 걸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이 꼬살라 왕국은 한 사람의 살인자를 잡기 위해서 군대도 파견하고 여러 가지 소탕 작전을 하지만 결국은 죽이지를 못합니다. 잡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으로 인해서 이 앙굴리말라가 제도를 받게 됩니다.
부처님이 앙굴리말라 가까이 와서 돌아서 걸어가는데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을 죽일려고 쫓아옵니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부처님을 쫓아갈 수가 없습니다. 천천히 걷고 있는 부처님을.
“게 섰거라. 사문아” 하고 얘기하니까 부처님이 그럽니다.
“나는 이미 서 있는데 너는 서 있지 못하지 않느냐” 하고 얘길 합니다.
앙굴리말라가 생각을 해보니까 '나보다 빨리 가기 때문에 내가 못 잡는 것인데, 어째 저 사문은 자기는 서 있다고 할까?' 해서 그 사실을 물어봅니다.
부처님은 이미 살인을 저지르고 악행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서 전부 다 멈춰버렸다 하는 거라. 앙굴리말라는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거라. 그 말에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래서 이 앙굴리말라가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한 게송이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해도 후회하지 않고 더 큰 선으로써 가린다고 할 거 같으면 구름으로부터 나온 해와 같이 이 세상을 비춘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불교는 범한 죄에 대해서 후회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후회할 때마다 죄의 무게는 더욱더 커져버리기 때문입니다. 후회할 때마다 자신이 범한 죄의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다시 떠오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 내가 이런 싫은 일을 했다. 이런 안 좋은 일을 했다. 나는 죄인이다.'하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은 자꾸 어두워져가고 낙담해져 갈 뿐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를 파괴하게 되는 겁니다.
"후회는 분노와 같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후회를 하지 말고 그냥 일반적으로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참회를 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에 무엇인가 소소한 나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생활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처님한테 이렇게 참회하는 게송이 있습니다.
「제가 몸에 의해서나 말에 의해서나 마음으로 의해서
나도 모르게 저지른 소소한 잘못들을 부처님께 참회합니다.」
하고 출가한 스님들은 아침저녁으로 예불할 때 이 게송을 외웁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실수로 길을 가다가 개미를 밟아 죽일 수도 있고, 또 나도 모르게 남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단지 내가 모르는 동안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만한 마음들이 없어져 버립니다. 겸허해지고 조심해서 생활하게 됩니다. 아! 내가 잘못을 범할지도 모른다 하고 생각하면 긴장감이 있게 됩니다. 그런 긴장감이 없으면 자신은 앙굴리말라와 같은 그런 위험한 존재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항상 정직한 마음, 겸허한 마음으로 참회하는 것을 생활화해서 습관으로 몸에 익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참회를 하고, 그래서 자신이 범한 죄를 다시 발견하도록 해야 됩니다.
두 번 다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도 또 다른 잘못을 나는 범할 우려가 있다. 그건 확실한 것이다. 나도 모르게 그런 잘못을 범할 우려들이 있다.
그것을 알 거 같으면 이 탐진치라는 것을 갖다가 없애기 위해서 수행에 노력하는 마음이 자꾸자꾸 생깁니다. 완전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내가 잘못을 범해서 끝이 없는 이 나그네길, 윤회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왜 하루빨리 수행에서 이것을 완전하게 없앨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든지 잘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경각심을 항상 가져야 되고 그런 잘못에 대해서 후회할 것이 아니라, 또한 그로 인해서 마음이 들뜰 것이 아니라 참회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경전에 '후회하고 들뜨고 하는 것은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과 같다'하고 얘기합니다.
그런 물에는 자신의 얼굴을 바르게 비춰볼 수가 없습니다. 일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안정되지 않듯이 마음이 불안정하면 현실을 바르게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 수행의 길이고, 어떤 것이 바르지 않는 길인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른길인가 하는 것들에 대해서 바르게 파악할 수가 없고 인지할 수가 없어서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들뜨고 후회하는 것에 빠지는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자유로운 사람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렇게 들뜨고 후회하는 것이 일어나면 수행에서는 싫증이라는 것으로써 나타납니다.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 싫어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그 싫어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아! 이것이 들뜸과 후회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이구나'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마지막 다섯 번째,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의심! 회의적 의심(vicikicchā)을 알아차려라 하는 겁니다.
의심에 빠지면, 여러분들은 이것은 잘 알겁니다. 바르게 이해하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포기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게 됩니다.
경전에는 '의심에 빠지면 흙탕물을 휘저어놓은 것과 같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당연히 앞에 것들과 더 다르게 탁해져 있는 흙탕물에는 얼굴을 전혀 비춰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의심은 가장 해로운 장애에 들어갑니다. 완전하게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강도에게 빼앗겨버리는 거와 마찬가지다 하는 겁니다.
수행을 통해서 부처님 말씀이 진리인가 아닌가 하는 것들을 조사·확인하고 스승이 얘기하는 것들을 제대로 가르쳐 주고 있는가 하는 것을 조사·확인 할 수 있을 때 이 회의적 의심은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이때까지 2500여년 불교가 이어오면서 부처님 가르침은 진리라는 것은 확인돼왔습니다.
굳이 여러분들이 확인을 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인정해왔습니다.
확인할 시간이 없으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하십시오.
그런 부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는 스승의 말씀도 제대로 된 가르침입니다.
의심해야 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방법, 스승들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들을 즉시 알아차리고, 이미 일어난 의심들을 더욱 키우는 자양분을 만들지 않도록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수행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해서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다섯 가지 장애는 장애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알아차릴 수행의 대상입니다.
이렇게 수행을 해나갈 때 다섯 가지 장애를 법으로써 알아차리면 알아차림의 힘들도 더욱더 강해질 뿐 아니라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도 쌓여집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장애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수행자는 그 장애에 휩쓸려 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수행을 하면 누구에게나 이 장애는 찾아옵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 다섯 가지 장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됩니다.
인정해서, 그런 장애들에 대해서, 그런 현상들에 대해서 반응을 하지 않고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 순간의 마음을 알아차리도록 하고 즉시 몸으로 돌아와서 가슴에서 느껴지는 변화들을 알아차리면 그 느낌들은 사라집니다.
그럴 때 다시 수행의 주대상, 호흡이면 호흡 경행이면 경행 이런 과정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이렇게 해야 만이 장애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힘을 더욱더 키우게 되고 장애를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다섯 가지 장애는 여러분들에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힘들을 키워주고 참고 견디는 칸띠바라밀(khantipāramī) 인내력을 증장시켜 줍니다. 이런 노력으로 인해서 알아차림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면 사마디-고요한 선정삼매를 얻게 되고 결국에는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법의 참된 성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 가지 장애는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수행대상으로써 진리를 볼 수 있게 할 것이냐, 아니면 알아차림이 없이 그 장애에 휩쓸려 갈 것이냐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입니다.
장애가 일어나면 그 장애를 먼저 인정하도록 하십시오.
'어! 이런 장애가 있구나. 내가 의심을 하고 있구나. 내가 졸리는구나. 내가 망상피우고 있구나. 통증이 있구나. 싫어하는 마음이 있구나.' 하는 그런 것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없는 것처럼 몰아낼려고도 하지 말고, 부딪쳐서 싸울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그걸 있는 그대로 인정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그 현상에 대해서 일절 반응하지 않고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졸리면 졸린다고 명칭을 붙여가면서 알아차리고, 통증이 있으면 통증이 있다고 '통증' '통증'하면서 통증에 직접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알아차리기만 하십시오.
그렇게 했을 때 그때의 순간의 마음을 즉시 알아차리도록 하고 나서 알아차림이 엷어질 때 가슴으로 돌아와 가슴에서 일어나는 느낌의 변화, 반드시 느낌은 변합니다. 그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려서 느낌의 변화가 완전하게 사라졌을 때 수행의 주대상으로 돌아오도록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법념처 두 번째 부분, 오온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루빠칸다(rūpakkhandha), 웨다나칸다(vedanākkhandha),
산냐칸다(saññākkhandha), 상카라칸다(saṅkhārakkhandha),
윈냐냐칸다(viññāṇakkhandha)
이렇게 해서 색·수·상·행·식온 (色 受 想 行 識蘊) 그렇게 다섯 가지에 대한 것들을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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