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사띠 위빳사나[고급반]

1. 입선 수행, 와선수행 (20070920)

담마마-마까 2020. 1. 12. 16:13

https://youtu.be/JuBEo8Mnl-4

1. 입선 수행, 와선 수행 (20070920)

 

※『위빳사나 수행입문』교재 _ 제2장 구체적인 수행방법에 대한 법문입니다.

 

오늘 입선 수행법에 대한 얘기를 마저 하겠습니다.

입선 수행은 언제 한다고 돼 있습니까?

졸음을 쫓아내기 위할 때, 그리고 경행대에서 경행을 일정한 거리로 한 후에 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돌린 후나 걸음을 멈췄을 때 하는 수행이 입선수행입니다.

 

! 입선수행 어떻게 합니까?

경행을 하다가 입선수행 할 경우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서 있는 상태, 지금은 자세, 손이고 뭐고 다 돼있는 상태입니다. 그대로 딱 멈춰섰습니다.

그럼 맨 먼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서있음'하고 관찰을 해야 되죠!

마음이 몸의 상체-머리끝부터 하체-발바닥까지 몸의 느낌을 쭉 느끼면서 '서있음' 하면서 알아차려야 됩니다. 이때도 꼭 마찬가지로 서 있는 몸의 형태를 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서 있으니까 당연히 움직임이 없습니다. 서 있는데 일어나는 느낌들, 느낌들을 볼려고 하십시오.

 

특히 경행을 오래도록 했을 때는 발바닥 끝이나 손끝이나 이런 데 느낌이 굉장히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 느낌들을 재빨리 캐치를 해서 관찰을 해야 됩니다. 관찰을 하더라도 그 느낌을 관찰하면서 그 느낌이 사라지는, 일어났다가 금방 사라지는구나 하는 사실만 알면 됩니다. 그래서 '서있음'하고 관찰을 할 때는 그렇게 관찰을 해야 됩니다.

 

또한 서 있는 상태를 관찰할 때 오래도록 경행을 하고 나면 몸이 많이 피곤해집니다.

그럴 경우에는 멈추고 싶은 생각이나 게으른 생각들이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서있음' 하고 관찰할 때 가슴에서 느낌들이 굉장히 강하게 나타나집니다. 그러면 가슴의 느낌들을 관찰하도록 그렇게 하면 됩니다.

경행을 할 때 수행하는 것이 잘 안 됐을 때는 틀림없이 상기들이 일어나 있습니다. 그럼 '서있음'하고 관찰했을 때는 얼굴 쪽에서 일어나는 화끈화끈하는 느낌들이 있게 돼있습니다. 그것들이 '서있음' 할 때 관찰해야 될 것들입니다.

내가 서있는 이 몸의 모양을 관찰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서 있는 것이 관찰이 되고 나면 '서있음'하고 관찰하고 나서는, 이제 마음을 발바닥에 두도록 하십시오. 발바닥이 마룻바닥하고 딱 닿아있는 것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닿음' 하면서 발바닥이 닿아있는 느낌들을 관찰하도록 해보십시오. 이해하겠습니까?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의 제자들 중에 '웃띠야'라고 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제 곧 죽을병에 걸렸거든요. 그러니까 관찰을 아무리 하려해도 잘 안돼. 왜 그런지 아세요? 병이 있는 사람들은 왜 관찰이 잘 안 되는지 아십니까?

(수행자 대답)

그렇죠. 마음이 병에 가 있을 거 같으면 병에서 일어나는 느낌도 수행의 대상이라는 생각을 해버리면 간단해버리는데 대부분은 그렇게 못하거든. '내가 이 아픈 걸 빨리 몰아내야지' 하는 생각을 일으킨다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조급해지고 또 그렇게 관찰을 하다 보니까 화가 일어나지고-미세한 겁니다. 뭐 불뚝불뚝 성질내는 것만 화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대상만 자연스럽게 관찰을 못 해나가는 거라.

이 웃띠야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한테 간청을 합니다. "부처님! 내가 이러는데 내가 꼭 이 병으로 죽음에 이르기 전에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싶습니다. 꼭 한마디만 일러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뭐라고 했겠습니까?

 

"시작을 청정히 하라."

시작을 청정히 하라. 알아차려 나갈 때 다른 것들을 개입시키지 마라. 좌선에서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할 때 다른 일체의 것들은 개입시키지 말아라는 거라. 자연적인 호흡을 그냥 물 흐르듯이 알아차리라는 거라.

설혹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왜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까'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면 알아차리는 대로 못 알아차리면 못 알아차리는 대로 넘어가고 그다음에 또 대상이 나타나면 대상만 그대로 시작을 그렇게 청정하게 바로 하라는 거라.

'병이 있으니까 아프다. 내가 이 아픔을 몰아내야지' 생각하고 아픔을 관찰할 거 같으면 이미 청정해지지 못한 상태라는 거라. 그건 안된다는 거라. 아프면 '아프다'하고 알아차리라는 거라. 웃띠야는 결국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아라한에 도달합니다.

 

입선 수행을 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서서 관찰을 할 때는 서서 느껴지는 게 아예 없으면 느껴지는 게 아예 없는 그대로 흘려보내. 서서 '서있음' 하고 관찰할 때 그중에 어느 부분, 아까 스님이 얘기한 것 중에 어느 부분 하나라도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냥 그것만 그냥 자연스럽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시작부터 해서 중간, 끝날 때까지를 알아차리라는 거라.

설혹 그렇게 못하고 '띠끔'하는 느낌이라도 알아차렸다면 그거로서 그냥 끝내고, 다시 다른 느낌들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족족 알아차려라.

'서있음'할 때 주의해야 될 게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이렇게 수행이 좀 되어나가면 그다음에는 해야 되는 게 뭐냐 하면,

이미 마음은 대상에 몰입이 되는 상태이기 때문에 느낌들을 관찰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대상인 호흡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서 있으면 당연히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이 관찰이 돼 나가집니다. 거기에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관찰하도록 해보십시오.

 

경행을 하고 있는 상태는 눈을 뜨고 있는 상태입니다.

눈을 뜨고 있을 때 앞의 대상이 전혀 안 보이면서 호흡이 '일어남' '사라짐'을 한다고 할 거 같으면 '아! 그래도 내가 경행수행에서 참 큰 이익을 얻고 있구나' 하고 판단을 내리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소리 들리고 앞의 대상 보이면서 '일어남' '사라짐'을 한다고 할 거 같으면 즉각 중단을 하십시오. 즉각 중단을 하고 '걷고자 함'하고 마음을 내고 나서 걷도록, 경행을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입선수행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서있음' 하면서 서 있는 상태에서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관찰하는 것이고, 발바닥이 지면에 닿아있는 느낌들을 관찰하는 것이고, 또한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으면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 있는 상태는 오래도록 관찰을 하면 안 됩니다.

보통 사람들이 시간을 초과해버리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재미가 있으니까! 서있는 상태에서는 집중력이 굉장히 강해집니다. 그런데 그걸 내가 좋아하는 것에 끄달려 들어가며 수행을 하니까 당연히 그거는 안됩니다. 안 되는데도 되는 것처럼 보이니까 매달려가지고 오래도록 수행을 합니다. 나중에 굉장히 피곤해집니다.

피곤해질 뿐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정신적인 이상을 일으키기까지도 합니다. 자기 스스로 일으키는 생각들이 몸의 허상, 몸의 백골관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거기에 매여버리면 경행을 하지 않더라도 일상적일 때도 그런 것들이 자꾸 나타나집니다. 잘못될 수 있으니까 반드시 5분에서 10분 이상은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고, 서 있는 상태에서 가끔씩 우리 도반님들을 보면, 대상을 잘 알아차린다고 스스로 대상을 만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손을 앞뒤로 돌리면서 올렸다가 내렸다가 하면서 관찰을 잘하는 것처럼 의도를 내어가지고 하기도 합니다. 그거는 금하도록 해야 됩니다. 의도를 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 그다음에 12. 와선 수행 부분입니다.

 

추석 다가오니까 어떤 사람들은 휴가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 우리 여자 도반님들은 시댁가서, 아니면 친정가서 일해야 되니까 추석이 별로 즐겁지는 않을 거지만 그래도 일상을 벗어나게 되거든. 그때는 힘들지만 어쨌든 시간들이 나니까 재밌는 일들도 있고 그렇게 되는데, 이 몸이라는 것들도 일상적인 생활에서 좀 벗어나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휴가 보내줄 필요가 있습니다.

 

행․주․좌 모든 것을 관찰을 하는데 몸으로 봤을 때는 몸은 쉬는 것은 아닙니다. 행․주․좌에서는! 그런데 누웠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몸의 기능들이 멈춰버리죠!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몸이 휴가 받은 거라.

그런데 마음은 어떻게 됩니까? 다른 때보다도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을 하게 됩니다. 누워있을 때는!

 

몸이 쉬어버리니까 최고 먼저 드러나는 게 뭡니까? 호흡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호흡을 관찰하기가 쉬워집니다. 누워있을 때는! 그래서 통상적으로 스님이 그러죠. "자기 전에나 일어나자마자 배를 관찰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관찰이 잘 안 될 때는 손을 배에다 올려가지고 관찰을 하라." 그랬습니다. 이 와선 수행은 스님의 실제적인 경험으로 봐 가지고도 굉장히 큰 이익을 갖다 줍니다.

 

밑에 스님이 아라한이 된 아난존자의 예를 들어가지고 비유를 해놨습니다.

꼭 아난존자가 아니더라도 여러분들이 잠시 동안이라도 이 수행을 해보면 참으로 이 부처님의 수행법 위빳사나가 훌륭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단박에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 전에 딱 일 분, 일어나자마자 딱 일 분만 해보십시오. 이 와선 수행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자! 누우면 몸이 최대한 이완되기 때문에 호흡을 잘 관찰할 수가 있고 호흡을 알아차리기가 쉬워집니다.

또한 마음도 이완이 되기 때문에 마음을 관찰하기도 수월해집니다.

그래서 자리에 누운 상태에서 현재 내가 마음이 들떠있는가, 고요한가, 어두워있는가 하는 여러 가지 마음의 상태를 한번만 알아차릴려고 해보십시오.

 

그리고 바닥에 닿아있는 몸의 상태를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한번 해보십시오.

가슴에 마음을 두고 내가 지금 마음의 상태가 어떤가 하고 느낌으로 알아차리고 나서, 몸이 누워있는데 바닥에 머리하고 어깨하고 엉덩이하고 발뒤꿈치하고, 어디가 닿아있는데 그 닿아있는 느낌이 어떻는가 하는 것을 차례대로 한번 보도록 해보십시오. 머리 닿아있는 느낌하고 엉덩이 발 이런 데가 각각 닿아있는 느낌들이 다 다르게 되어있습니다. 똑같이 닿아있는데도 느낌들이 다 다릅니다. 예리하다면 틀림없이 여러분들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느낌들을 알아차리고 나서 즉각적으로 배의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하도록 해보십시오.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이렇게 해서 설혹 잠이 든다고 하더라도 큰 이익입니다.

우선 숙면을 취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번뇌 없이 잠이 들기 때문에 악몽을 꾼다든지 아니면 잠을 잔 듯이 안 잔 듯이 이렇게 선잠을 자지 않게 됩니다. 깊이 푹 자게 됩니다.

그런데 통상적으로 마음이 이완이 안 되어있을 때는 누워가지고도 '일어남' '사라짐'하고 관찰을 하고 있으면 잠이 잘 안 옵니다.

왜? 마음이 긴장돼 있기 때문에! '자야 되는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일어남' '사라짐' 해서는 안됩니다.

그럴 때는 즉시 자기의 마음을 한번 잘 관찰을 해보도록 하십시오.

아까 스님이 얘기했던 방법을 그대로 지금 현재의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떤가 하고 한번 관찰을 해보십시오. 틀림없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나있습니다. '내일 내가 일찍 일어나 나가야 되는데, 지금 잠을 자야 내일 일하러 가는데 지장이 없는데, 와 이리 잠이 안 오노. 빨리 자야 되는데' 이런 두려움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자기의 현재의 마음의 상태를 한번 딱 관찰하고 나서 '아! 두려움이 있다'하고 판단이 들면 누워서 하면 안 됩니다. 일어나서 좌선을 해야 됩니다. '두려움' '두려움' 하면서 관찰을 하고 나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 앉아있는 좌선 상태에서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대부분 그렇게 하면 바로 잠에 떨어집니다.

누워서 한다고 아무리 용을 써봐야 누워있는 게 훨씬 편하기는 편한데, 그런 이미 마음에 장애가 생긴 상태는 누워 있어가지고 아무리 해봐야 그건 헛일이라. 안 되는 거라. 그럴 때는 앉아서 좌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잠에 듭니다. 그러면 누워서 한두 번 관찰하면 바로 잠에 듭니다.

생각이 생각을 일으킨다고 그럽니다. 그런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해나가야 됩니다.

 

그런데 이 와선 수행이 또 중요한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지금 수행의 상태가 얼마정도 돼있는가 하는 걸 바로 측정할 수가 있습니다.

오래도록 수행해도 알아차림이 면밀히 이어진다. 나태와 게으름에 빠지지도 않고, 마음이 들뜨거나 두려움에 휩싸이지도 않으면서 오래도록 수행을 해나간다, 그러면 나에게는 굉장한 알아차림과 집중력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고 누워있는데 잡념만 자꾸 생기고, 누워서 관찰하고 있는데 금방 잠에 떨어진다. '아이고! 내가 참 공부 더 열심히 해야 되겠구나.'

 

잠을 자지 않고 누워서 관찰하다가 밤을 새기도 합니다. 누워서 관찰하는 상태에서! 스님도 마찬가지였고 지금 수행을 지도하는 스승들은 대부분 얼마 동안 이 과정들을 다 겪습니다. 짧게는 일주일 동안 그렇게 잠을 안 자기도 하고, 아니면 한 달 두 달 이렇게! 그런데도 피곤한 줄 모르고 오히려 가볍고 그런 상태들을 경험들을 하거든.

여러분들도 내가 지금 수행이 얼마나 되었나 하는 것을 잘 측정하는 방법으로 사용을 하도록 하십시오.

 

이걸 유용하게 쓰면요 죽을 때 사악도에는 안 빠집니다. 거짓말 같죠?

매일 누워서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잠드는 버릇을 들여놔 놓으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죽음도 '일어남' '사라짐'입니다. 사라졌다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알아차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그래서 죽음을 맞이할 때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이 원인이 돼서 다음 결과를 받는 다음 몸은 똑같이 맑은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어찌 나쁜데 떨어질 거라. 죽음의 순간에 잘 죽음을 맞이하고 조금 더 나은 몸을 받을려고 할 거 같으면 이 연습을 자꾸 하도록 해야 됩니다.

 

반드시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이 와선 수행을 하면서 설혹 하다가 안 되더라도 한번 해보십시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먼저 누워있는 상태에서 이 와선 수행을 해보도록 노력을 해보십시오. 단 몇 초라도! 단 몇 분이라도! 그렇게 해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한번 봅시다. 밑으로, 아난 존자가 침대에 눕는 자세에서 '누움' '누움' 하면서 눕다가 아라한이 되었다 했는데, 왜 그러면 밤새껏 경행을 했는데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을까?

위리야(vīriya)라고 스님이 적어놨죠? 노력!

노력이 마음집중보다 강하고 힘이 있으면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은 들뜨게 됩니다. 산만해지고. 웃닷짜(uddhacca, 들뜸)라고 그러죠!

그런데 처음 보통 수행하는 사람들은 마음집중이 굉장히 약하죠? 오히려 용만 씁니다. 용만! 할려고 막 용만 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 헤매는 거라! 헤맨다는 게 들뜨기 때문에 헤매는 거라.

그럴 때는 즉각 마음을 따라잡도록 해야 됩니다. 있는 그대로 그 마음, 내가 들떠있으면 '들떠있음'하고 알아차리고,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으면 '가라앉아있음' 하면서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지켜볼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노력의 힘하고 마음집중의 힘이 균형을 맞춰나갑니다.

 

그런데 이 수다원까지 이르른 이 아난다 존자 같은 경우에는 그거보다도 더 정도가 지나친 거라. 어쨌든 오늘 밤에 깨달음에 이르러야 되는 거라. 그래야 내일 500명(아라한들)이 결집을 하는 1차 결집에 참가를 한단 말이라. 아라한이 안 되면 참가를 못 해. 어쨌든 용을 써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어쨌든 아라한이 될려고 꿰뚫어 보는 앎을 갖다가 이룰려고 더욱더 열정적으로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라. 수행하는데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돼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수행의 균형이 깨져버리는 거라.

 

마음이 산만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아난다가 즉각 중단을 합니다. 그래서 아! 내 몸이 피곤해있기 때문에 그 피곤한 몸을 잠시 휴가 보내줘야 되겠다는, 쉬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쉬러 가는 단 몇 초, 찰나 몇 초에 깨달음에 이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마음집중과 노력이 균형을 맞춰버리기 때문에!

내 지금 현재 있는 마음, 들떠있는 마음, 과도한 노력을 하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니까,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들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는 거라.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알아차려지면 힘이 안 듭니다. 아! 내가 노력이 과했구나 하는 걸 알아차리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돼? 힘들이지 않고 알아차려나가는 거라. 그러니까 노력이 자연히 줄어든다는 거라. 노력이 줄어들면서 당연히 마음집중의 힘이 강해져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어느 선에서 이게 균형을 맞춰지는 거라.

이 마음집중의 덕으로 인해서 노력은 더욱더 안정되게 되는 거라. 확고해지고, 벗어날려고 하지 않게 되고, 느슨하지도 강하지도 않게 되고, 그러니까 바로 현상에 대해서 꿰뚫어 볼 수가 있게 되는 거라.

 

이거는 지금 아난다 존자의 예고,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마음집중이 약하죠? 그렇죠? 마음집중이 약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라고 그랬어요? 명칭 붙여야 됩니다. 명칭! 집중이 안 되고 마음이 이리저리 왔다리갔다리 하는데 어떻게 할 거라? 붙잡아 매줘야 할 거 아니라, 마음을! 가는 놈을 잡아갖고 붙잡아줘야 되는 거라.

그래서 '마음챙김의 벗은 바로 명칭 붙이는 것이다' 하고 얘길 하는 거라.

명칭을 안 붙이면 당연히 마음집중이 약하니까 대상이 다 도망가버리고 놓쳐버리는 거라. 수행에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명칭 붙이는 것을 갖다가 항상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명칭을 붙이도록 그렇게 해나가야 됩니다.

 

또한 마음집중이, 선등님은 잘 들어야 됩니다.

마음집중이 너무 강하고 노력의 힘이 약하면 잘 게을러집니다. 그래서 누워서 수행할 때도 금방 잠에 들든지, 앉아 좌선할 때도 앉았다 그러면 어떤 경우는 잡니다. 마음집중이 과도하기 때문에!

대상은 어떤 경우든 움직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지 마음이고, 지는 움직이라 나는 요 가만히 붙잡혀 있는다 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돼? 대상하고는 관계없이 지는 지 혼자 거기에 쳐박혀 있는 거라. 거 잠이 안 오고 돼 그게? 잠이 오는 거라.

 

경행할 때도 꼭 마찬가지라. 발은 이미 저만큼 지 혼자 가고 있는데 지는 '나아감' 하고 거기 붙잡혀 있는 거라. 발은 이미 내려가고 있는데. 그게 경행이 되겠어요? 발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쨌든 대상에 붙잡혀 있으니까. 몸은 잘 뒤뚱거리지 않는 것 같으니까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수행 잘하는 것 같죠? 그런데 그거는 속이지는 못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은 속이지 못하는 거라.

 

집중이 강하면 노력이 약해져 있는 상태에서는 반드시 그런 상태가 됩니다.

그런 것들은 잘 조절을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12과까지를 마치는 것으로 해서, 그 밑에 부분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음식 먹기부터 시작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삼보에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이 법문 글은 아짠 빤냐와로 마하테로 스님께서 설하신 법문들에서 녹음된 것을 토대로 필사한 내용입니다.

 

개인적인 공부로써 삼장법사 스님의 법문을 듣고 옮겨 적으며 되도록이면 최대한 선원장 스님의 육성을 그대로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옮긴이의 앎과 노력이 부족하여 법문 본래의 뜻과 요지를 오롯하게 담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부디 법문내용의 속뜻을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변형 없이 오롯이 전해주시는 붓다의 길따라 선원장 스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올바르고 귀중한 법문들이 설해질 수 있는 장소와 조건을 유지해주시고, 설해진 법문들을 잘 보존해오신 선배도반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로서로 힘이 되어주시는 모든 테라와다 도반님들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존재들에게 공덕이 골고루 나누어지길 바랍니다.

 

모든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이 가르침으로 인해 법의 눈이 열리고 지혜가 증장되어지기를

이 가르침이 실천수행으로 이어져 닙바나의 토대가 굳건해지기를

 

 

202212월 다시 필사하며 담마마-마까 올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