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좌선하며 알아차릴 때의 분명한 이해2 (20071011)
※ 『위빳사나 수행입문』교재 _ 제 3장 분명한 알아차림을 위한 수행방법
2. 좌선하며 알아차릴 때의 분명한 이해
오늘은 여러분들이 가장 좋은 보시만 많이 받아가지고 가는 겁니다.
오늘 보시 벌써 몇 번 받았어요? 아침부터 해가지고. 원래 마지막 보시를 하고 받아 가면 닙바나-깨달음에 이른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보통 보시할 거 같으면 먹는 음식 나눠주고 주는 것들이죠. 이것은 건강을 유지하고 그 다음생이든 이생이든 그렇게 밖에 안 되지만, 스님들 가사를 지어 올린다든지 옷이라든지 이런 거 할 거 같으면 뭐랄까 예뻐진다 그럽니까? 좀 덕스럽게 생기고 이런 것들이 가능해지고, 그다음에 필요품들 스님이 필요한 거든 아니면 운송수단이든 이런 것들을 해주고 할 거 같으면 부유로워지게 되고 그러니까 아무래도 좀 편리해지니까 편리한 만큼 부유로워지게 되어있고, 그다음에 하는 것이 캔들 향초 같은 거 빛 같은 거 이런 것들을 할 거 같으면 시력이 맑아지고 머리가 좋아지고 이런 공덕이 있는데, 거주지 이런 거주지를 할 거 같으면 앞에 있는 네 가지를 다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이 담마! 담마를 듣고 나눠주고 할 거 같으면 그 앞에 다섯 가지 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죠. 여러분들이 이 몸을 받아 태어났을 때 마지막까지 결국 해야 될 것이 완전하게 부처님과 같은 분이 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 나아가는 길을 제공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마만큼 소중한 겁니다. 여러분도 오늘은 어쨌든 많이 지어놓은 겁니다. 다 까먹지 말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교재 한 번 봅시다.
좌선하며 알아차릴 때의 분명한 이해 부분입니다.
분명한 이해라고 하는 것은 행주좌와(行住坐臥)라고 하는 일상적인 생활, 일상적인 생활에서 알아차림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그런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일상적인 육체적인 행위나 아니면 정신적인 행위나 이런 것들을 분명하게 알고 이해해가지고, 그에 맞게끔 알아차림을 유지시켜 나갈 것이냐, 동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제시해 놓은 부분입니다.
앞에 부분 2장에 좌선하며 알아차리는 부분을 좀 더 세밀하게 들어가는 부분이 됩니다. 물론 문장으로 봐가지고는 앞에 2장 부분이 훨씬 많습니다. 기초적인 걸 설명해야 되니까! 지금 3장에 좌선하는 방법에 대한 것들은 좀 적습니다. 적어도 훨씬 양이 많은 것들입니다.
부처님은 '알아차림과 분명한 이해, 분명한 앎은 새의 양 날개와 같다'하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마만큼 한 날개로써도 날아갈 수 있지만 양 날개를 달면 바르고 똑바르게 날아갈 수 있다는 그런 의미로써 해놔 놨습니다.
마음을 대상에 챙겨서 알아차림이 있으면 또한 분명한 이해도 있게 되고, 또 분명한 이해가 있으면 알아차림이 더욱더 잘되게끔 되어있다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눈떴을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항상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해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 삼빠자나(sampajāna)라고 하는 분명한 이해 부분은 통상적으로는 잘 드러나지지를 않습니다. 잘 드러나지지는 않는데 어쨌든 익혀나가야 될 부분입니다.
칼 쓰는 사람들은 칼자루를 본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손잡는 부분이 옴폭 패여져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도 두들겨대니까 손 부분이 조금씩 조금씩 나도 모르게 그게 파여들어가서 손자국이 딱 나있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삼빠자나는 그런 거와 마찬가지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하고 내일은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칼의 손잡이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 년 뒤에 볼 거 같으면 분명하게 차이가 있게 돼있다는 얘깁니다.
삼빠자나-분명한 이해를 익힌다는 것은 그와 마찬가지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해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지금 당장 안된다 해가지고 실망할 필요도 없고, 또 그것을 모를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스님이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혀지고 이 부분이 다음에 또 한번 더 하게 되면 또 하게 되고 할 거 같으면 또 자연스럽게 익혀지게 됩니다.
이 삼빠자나(sampajāna)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여러분들 같이 담마를 듣고 또 그에 맞춰서 공부를 하면서 계속해서 되풀이해서 숙고하는 것으로 인해서 더 확신을 가지고 갈 수가 있습니다.
이 삼빠자나는 어떤 면에서는 여러분들이 수행하고 있는 나마(nāma)와 루빠(rūpa),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에 대한, 똑바른 이해를 위한 조건이기도 합니다. 사띠(sati)로서 만은 완전하게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을 이해하기는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칼자루가 닳는 거와 같이 생각을 하고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조급해한다고 해가지고 될 것은 아닙니다.
보통 일상적으로 '사띠, 사띠, 위빳사나가 사띠다' 할 거 같으면 사띠만 끊임없이 이어갈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죠? 자꾸 알아차리릴려고 그러고 알아차림이 안 되면 금방 또 돌아와서 알아차려 나가려고 하고 이렇게 합니다.
거기서 하나의 병폐가 생겨나갑니다. 사띠를 자꾸 계발시켜 나갈려고 하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생각이 개입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을 사띠로써 알아차려 나갈 때가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고 있는데 순일하게 일어남 사라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단 말이라. 마음이 밖으로 툭 나갈 때도 있으면 그럼 '아니지,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생각하고 다시 일어남 사라짐으로 돌아옵니다. 보통 그러죠?
그런데 조금 전에 다시 일어남 사라짐으로 돌아오기 전에 '어! 아니지. 내가 이러면 안 되지' 하고 생각했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들은 사띠를 하지 못한 거죠! 이렇게 생각을 사띠화시켜버릴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 부분만큼은 지나간 부분인데 오히려 '이러면 안 되지' 하고 생각할 동안에 그냥 바로 대상으로 돌아와버리든지 안 그러면 생각 자체를 관찰해버리면 되는데, 보통 통상적으로 그렇게 안 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과거로 돌아갔다가 '아니지'하고 다시 또 돌아오게 돼있다는 거라. 이중으로 흘려버리는 시간들이 많아지게 돼있다는 거라.
이게 보통 사띠만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병 중에 하납니다.
순일하게 쭉 연결만 될 거 같으면 뭐가 문제겠냐마는, 그렇게 안 되거든.
그런데 이 삼빠자나를 계발시켜 나가다 보면 그 갭이 없어져버립니다. 미래로 달아난다든지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 없어져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순일하게 전체를 알아차리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 알아차림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한 가지 사띠만 가지고 할 때보다도 훨씬 많을 수밖에 없게 돼있다는 겁니다.
자! 밑에 부분을 한번 봅시다.
'숨을 들이쉬면 배가 희미하게 부르기 시작해서 계속해서 불러오게 되고 몸에서 호흡이 시작되자마자 마음도 일어남도 시작됩니다.'
호흡이 불러올 때 명칭으로-명칭은 마음으로써 하는 겁니다. 명칭으로써 '일어남'하고 시작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호흡이 있으면 알아차림도 일어납니다. 호흡이 끝나면 그 알아차림도 끝난다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인데 이 부분은 어떻게 보면 좀 쉬운 얘기 같죠? 쉬운 얘기 같은데 느슨하게 알아차리지 않으면 대충대충 넘어가버리고, 대충대충 수행을 해버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윙 하는 소리가 들립니까? 그리고 여러분들 눈으로 스님을 보고 있죠? 그리고 생각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기도 할 겁니다. 어쩌면 이런 대상들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그 대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미 마음이 죽은 상태가 돼버린다는 겁니다. 왜 계속 나타납니까? 그 대상을 내가 인식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이 없으면 대상은 절대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앞에 있는 부처님 한번 본다고 해봐요. 부처님을 본다.
그러면 부처님을 보는 의식이 일어나지 않으면 부처님은 여러분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보는 의식, 시각대상이 나타나야 만이 보게 된다는 겁니다. 보게 되죠!
그런데 보게만 됩니까? 보고 나서 여러분 눈을 한번 감아보십시오. 부처님이 다시 보입니까? 보여지죠! 잔상이 남아있죠! 그걸 부처님이 여러분들에게 보여지게 된다는 겁니다. 보게 되고 또한 보여지게 된다는 겁니다.
왜 이렇게 될까? 물질적인 현상은 부처님이라는 대상과 내 눈이라는 대상입니다. 눈을 통해서 마음이 일어납니다. 일차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시각 밖의 대상과 안의 대상, 내 눈이라는 안의 대상과 밖에 있는 대상이 만나져서 의식이 일어나지게 됩니다. 그걸 통상적으로 뭐라 합니까? 일어나는 의식입니다. 그러니까 보는 의식이 됩니다.
보는 의식인데 보는 의식에서 내가 '봄' '봄' '봄' '봄'하고 알아차릴 거 같으면 절대 저 대상은 나에게 보여지지 않습니다. 스님 소리가 들릴 때 '소리들림' '소리들림' '소리들림'하고 알아차릴 거 같으면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고 단막단막 끊어지는 거하고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저 보는 대상이 나에게 보여지게 되는 경우엔 어떻게 됩니까? 저 대상을 내 안으로 끌어들이게 되는 거죠. 잔상으로써 남아있든 그게 니밋따(nimitta)든 아니면 산냐(saññā)라 해서 형상화시킨 것이든. 이런 것들로 인해서 내 안으로 끌여들여서 그것이 과거에 존재했던 인식들하고 결합을 해야 됩니다.
만약에 저걸 처음 보는 대상이다 할 거 같으면 저걸 부처님이라고 내가 인식을 못합니다. 아무리 봤지만 보는 거하고 보여지는 것이 일치를 못시킵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런 경험들이 쭉 쌓여왔기 때문에 보는 거하고 보여지는 거하고 일치를 시킨다는 거라. 일치를 시키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더라도 저 부처님을 떠올릴 수가 있게 된다는 거라.
그럼 마음은 똑같은 대상이지만 두 가지를 하고 있습니다. 보는 거, 보여지는 거!
그런데 그거는 순차적으로 일어나죠? 보는 것이 있어야만이 보여지게 돼있습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뭐냐면 바로 이것을 이해한다는 겁니다. 보고 보여지고 하는 것들을 이해한다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거는 어떻게 됩니까? 사띠라고 알아차림이 이 사띠에서 또 저 사띠로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사띠들이 이어져야만이 보고 보여지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이해할 수가 있다하는 얘깁니다. 그 이어지는 것들을 뭐라고 합니까? 그걸 '삼빠자나'라고 합니다.
딱 부처님을 보는 것 이것은 사띠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보고 보여지는 것으로써 연결되는 동작으로써 쭉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삼빠자나!
그래서 사띠와 삼빠자나로 인해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생겨나가게 된다는 겁니다.
자! 그렇게 하다 보니까 어떻게 돼요? 사람들이 저거에 대해서 알음알이를 일으키죠? 좋고 싫은 느낌들이 일어나서 좋은 것은 취할려고 하고 나쁜 것은 벗어날려고 하고 이렇게 인식들이 발전을 해나갑니다.
그럼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자! 앞에 있는 꽃을 한번 봅시다. 꽃을 보면 어떻게 돼요? 꽃은 사라지는 것입니까?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까? 내 눈에 보이는 꽃은. 응? 사라집니까? 어떻게 사라집니까? (수행자 대답)
언젠가는 사라지는 걸 지금 내가 얘기할려고 꺼내는 거 아닙니다.
즉각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가, 아닌가 하는 걸 얘기하는 겁니다. 예? 가만히 있습니까? 그런데 아까 뭐라 그랬어요? 사띠라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 사띠도 안 하고 있다는 얘기잖아. 맞습니까?
그것이 물질적인 현상이든 정신적인 현상이든 저것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분명한 이해'라는 겁니다. 그렇게 알아야 만이 어떻게 돼? 저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돼? '예쁜 꽃', '내 꺼', '가져와야지'
그 밑에 보면 그런 부분이 써져 있을 겁니다.
저 꽃은 어떻게 됩니까? 실재하는 거죠? 실재하는 겁니다.
수행에서는 뭘 대상으로 삼으라 그랬어요? 실재하는 걸 대상으로, 빠라맛타 담마(paramattha dhamma)!
실재하는 것은 뭡니까?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재하지 않는 거는 뭡니까? 꽃이라는 개념(paññatti)입니다.
여러분들이 꽃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왜 꽃이 안 사라집니까? 개념화시키고 형상화시키고 형태화시켜버리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 거라. 일반적으로 볼 때는 전부다가 형태화시켜버리게 되는 거라.
내가 여기를 본다 할 거 같으면 '어! 누구' 이미 벌써 형태화되고 개념화시켜버리는 거라. 그러면 이미 거기에 집착이 들어가버린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사물을 볼 때는 어떤 경우든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먼저 분리를 해버리고 날 거 같으면 개념화시켜버리는 일들이 적어지게 되는 거라. 처음엔 안 됩니다. 당연히 안 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하다가 보면 그게 가능하게끔 된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할려고 할 거 같으면 실재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생각으로 인해서 만들어지는 사실이기 때문에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그릇된 생각,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때 알아차림을 분명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호흡도 분명하게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할 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고 할 때는 거기에는 어떠한 생각도 들어가지 않아야만이 그 하나하나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조건지워진 것들은 어떤 것이든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고 있다 말입니다.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대상을 놓고 볼 때는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의 연속체라는 사실을 발견을 못 하는 것뿐입니다.
발견 못 하는 것은 그것을 이미지화하고 생각이 들어가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걸 쏙 잡아빼버린다고 할 거 같으면 끊임없이 사띠 사띠 사띠 사띠해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띠를 이어나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 작업을 이 장에서 여러분들에게 도와줄 수 있도록 해나가는 것입니다.
자!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할 거 같으면 가장 먼저 선행돼야 될 것들이, 또 같이 해야 되는 것이 그 대상에 대한 집중입니다.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집중하는 거는 뭡니까? 어떤 걸 얘기합니까?
한 대상에 한 번 탁 포인트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것을 집중이라 그럽니다.
그 포인트를 맞추는게 길어질 거 같으면 그 집중이 계속 길어지기 때문에 삼매라고 얘기하는 거고, 그게 짧을 거 같으면 찰나삼매라고 얘기하는 거고, 그게 쭉 이어질 거 같으면 깊은 삼매라고 얘기하는 거고 이렇게 얘길 합니다.
어쨌든 집중은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포인트로써 탁칵 맞추는 겁니다. 예를 들면 송곳 두 개를 이렇게 가서 딱 마주칠 때, 마지막 끝에 탁 부딪칠 때 이것을 집중이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 집중은 마음과 함께 일어납니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그 집중도 없습니다. 마음이 있어야만 알아차리듯이 대상이 아무리 있더라도 마음이 없을 거 같으면 내가 보지를 못 하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이 집중도 꼭 마찬가집니다.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중을 어디에다 넣어놨습니까? 마음부수에다 넣어놓은 거라. 쩨따시카(cetasika) 라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의 마음부수인 것이지, 어떨 때는 있을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안 일어날 수도 있는 부분이라는 거라. 그래서 이 집중이라는 것은 그 집중으로만 봤을 때는 결코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사라지듯이, 집중도 마음이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났다가 마음이 사라질 때 같이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송곳은 두 개 탁칵 하고 나면 그 순간에 탁 닿았다가는 즉각적으로 떨어지게 돼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집중을 정확하게 이해를 할려고 할 거 같으면 삼매에 들어가는 초입 부분에 가면 이 부분이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런 현상들이 몸과 마음이 똑 송곳이 부딪치듯이 딱깍딱깍 하듯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 부분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아! 이게 집중이라는 거구나. 마음과 함께 일어났다가 마음과 함께 사라지는구나'하는 마음부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지게 됩니다.
몸과 마음에 대해서 집중한다고 하는 것은 보통 생각이 집착으로써 물들어 있기 때문에 집중이 길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집착을 제거를 해버리고 날 것 같으면 집중도 반드시 일어났다가 사라져버립니다.
마찬가지죠. 알아차림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집중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노력도 똑같이 이와 같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모든 것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겁니다. 여러분들 물질적인 것들 또 정신적인 것들 모든 것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이렇게 받아들여버리고 날거 같으면 어디에도 집착할 수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을 "올바른 이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올바른 이해를 계발하기 위해서 내가 인위적으로 조절을 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알아차리는 순간이 있고 또한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이 있을 수가 있다는 사실만 알면 됩니다. 자꾸 그렇게 해서 넘어가야 만이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해나가게 됩니다.
자! 꽃을 한번 보십시요. 한번 더 상기시켜줄게요. 꽃을 예를 들면 안되겠네.
자! 스님 손가락 한번 보십시요. 움직입니까?
영화필름 예를 한번 보십시오.
영화필름은 한 장 한 장이 연결된 겁니다. 한 장 한 장은 절대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거 자체는 필름으로 봤을 때 일어나고 나서 사라져버립니다. 다음 장이 일어날 때는 그게 사라졌기 때문에 다음 장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영상사고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버립니다. 맞습니까?
여러분들의 알아차림도 그와 같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여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끊임없이 연속하는 현상이다' 하는 사실로써 바라보라는 거라. 영화를 보듯이! 이해하겠습니까?
옛날에 어느 선사가 깃발을 보고 '저게 바람이 움직이느냐, 마음이 움직이느냐' 그렇게 물어봤다고 그랬죠? 그 답을 뭐라 그랬어요? 내 마음이 움직인다고!
움직이는 마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사실은 그 움직이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겁니다. 단지 알아차림이 연속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는 겁니다. 영화필름도 똑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는 겁니다. 단지 일어났다가 사라진 것뿐입니다.
움직이는 여러분들, 내 손가락 아니면 내 몸, 여러분 자신 이렇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의 연속일 뿐이라고 생각할 거 같으면 그거 어디에다가 저게 아름답고 저게 예쁘고 저게 더럽고 그리할 수 있는 게 있느냐는 거라.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결국에.
이렇게 받아들이고 이렇게 알아야 만이 이미지라고 하는 전체적인 개념에 덜 집착하게 됩니다. '봄'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일시적인 것입니다. 지극히 찰나일 뿐입니다. 더러움도 극히 일시적인 것뿐입니다. 맛을 느끼는 것도 극히 일시적인 것일 뿐입니다.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극히 일시적인 것뿐이라는 거라.
우리 몸은 그거 제외하고 뭐가 있는데?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몸과 마음이라는 것은 이와 마찬가지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더 꼭 명심을 해야 되는 것은 만약에 저기서 개가 짖고 있다.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말입니다. 소리가 있고, 내 귀가 있기 때문에, 듣는 의식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듣는다' 하는 것이 발생하고,
그 듣는 것으로 인해서 내가 명확하게 인식을 하고 과거에 '아! 저 소리는 개의 소리였지' 하고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 소리가 나한테 '들리게끔' 됩니다. 그러죠? 그래서 '아! 그게 개의 소리다' 하고 생각을 했을 때 그 개의 소리가 안 나더라도 야! 너 개소리 한번 짖어봐 할 거 같으면 그와 똑같이 '멍멍' 짖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소리라는 것 하나만 딱 두고 봤을 때, 소리는 인식할 수 있습니까? 소리는 지가 압니까? 소리라는 것은 일체 아무것도 모릅니다. 내가 개소리를 짖는지, 내가 인식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거라. 맞습니까?
물질적인 것은 지 스스로 독립을 절대 못합니다.
여러분들 몸이 있지만은 내가 마음이 없는 몸은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거라. 인식은 둘째치고라도 아무것도 못해.
그런데 내가 아무리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은 이거는 아무런 작용을 못해.
물질적인 게 없을 거 같으면 이 마음도 아무런 작용도 못하는 거라.
내가 이 소리를 듣고 보고 냄새 맡고 내가 움직이고 이렇게 하는 건 뭣 때문에 하느냐는 거라.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결합 될 때만이 가능한 부분이라는 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거는 뭐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겁니까? 이와 같이 물질적인 것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거고, 그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정신적인 것들도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돼있다는 거라.
이 사실을 먼저 아는 것이 수행이 깊이 있게 들어가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해나가다 아! 이것은 물질적인 현상이고, 이것은 정신적인 현상이구나 하는 사실을 갖다가 자꾸 알아나가야 됩니다.
그 시발점이 어딥니까?
보고, 보여지고, 이해하는 이 삼단계를 가지고 가능해지는 부분입니다.
통상적으로 감각적인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인식 과정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보는 과정이 있습니다. 보는 과정이 있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 감각대상이 마음의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과정, 다시 경험하는 과정, 보여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은 똑같은 마음인 것 같지만 틀림없이 다릅니다.
조금 전에는 물질적인 것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마음이었고, 지금은 정신적인 것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틀림없이 다른 부분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 과정이 다시 또 다른 과정으로써 진행돼 나가게 됩니다.
이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실제적으로는 이 순간에 일어나는 실재하는 것이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수행은 말짱 꽝이라는 거라. 말짱 꽝! 그런데 큰 의미는 없지만은 어쨌든 노력은 자꾸 해나가야 되는 부분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칼자루에 손자국 처음부터 안 생깁니다. 계속 하다보면 생겨나게 돼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다가 보면 몸과 마음의, 밑에 부분에 적혀져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현상을 구분하게 되고 또한 의도나 원인과 결과 등도 관찰을 하게 되서 항상함이 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생각이나 행동 이런 것이 '나'라고 하는 착각에서 벗어나게 돼서, 모든 것이 일시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조건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는 것으로 알게 됩니다.'
거기에 보면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린 그것이 무엇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데는 두 부분이 있다. 보는 것 한 부분과, 보이는 것 한 부분 두 부분으로써 나누어진다.' 하고 스님이 적어놨습니다.
그 두 부분이 충족되어야 만이 완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이 성립된다 하는 것입니다.
자! 호흡에서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합니다.
불러오는 것이 나타나는 것, 불러오는 것을 내가 보는 과정입니다. 그렇죠!
그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불러오는 걸 인식하고 나면 그 불러오는 대상이 나에게 보여지는 때가 됩니다.
그때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명칭을 붙이죠! 그래서 배가 불러올 때 '일어남' 하고 명칭을 붙여줍니다.
명칭을 붙일 때는 그럼 언제 붙이게 됩니까? 보여질 때죠! 볼 때가 아니라 보여질 때 명칭을 붙이게 됩니다.
그런데 보는 거하고 보여지는 것은 아주 찰나찰나이기 때문에 거의 갭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탁 보면 바로 대상을 아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보면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보고, 보여지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명칭을, 정신적인 현상에 명칭을 붙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배가 여기서 시작이 돼서 육체적으로 불러오기 시작하면 이걸 불러온다는 아는 마음이 있단 말입니다. 안단 말이라.
그 아는 마음을 관찰해야 되기 때문에 관찰하는 마음이 또 따로 일어나게 됩니다.
맞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걸 내가 모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합니다. 내가 인식을 하든 하지 않든 배는 불러오고 꺼지고 있습니다. 맞죠? 조금 전에 얘기했습니다.
육체적인 현상은 마음과 결합하지 않으면 지 혼자 스스로 독립할 수 없다고! 그러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는 지 혼자서 합니까?
큰 무더기로 한번 봅시다.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읍!' 하고 멈출 거 같으면 호흡하는 것도 멈출 수가 있는 겁니다. 어쨌든 마음이 작용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질 때는!
그런데 그걸 우리는 알아차릴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 마음을 다시 또 알아차리는 겁니다. 맞습니까?
마음도 이렇게 두 가지로써 쌍으로써 일어나게끔 돼있습니다. 정신적인 것도 쌍으로 일어날 뿐아니라, 육체적인 것도-육체적인 것에는 호흡이라는 것이, 물질적인 것이 움직이게 됩니다. 육체적인 것도 이렇게 쌍으로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틀림없습니까?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이게 물질적인 현상이고 이게 정신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구분을 할 수가 있게끔 된다는 거라.
자! 배가 불러오는 것을 명칭을 붙여서 알아차릴 때까지는 어쨌든 실재하는 것이 됩니다. 실재 배가 불어오고 꺼지는 것을 아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참 하다 보면 어떻게 됩니까? 어떨 때는 오토매틱이 돼버리죠!
자동적으로 배하고는 관계없이 지 혼자서 '일어남' '사라짐' 하고 있습니다. 이때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일어남 사라짐을 이미 개념화시켜버립니다. 실재하고는 관계없이 형상화시켜 나가버리게 됩니다. 이때는 어떻게 됩니까?
전혀 수행하고는 관계없이, 물론 어떨 때는 마음이 고요하게 되고 그럴 수는 있겠지마는 그건 대상에 붙잡혀 있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어쨌든 실재하는 거와는 관계없이 돼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물의 현상이 전혀 드러나지지 않습니다. 기쁨의 현상이라든지, 아니면 어떤 느낌의 현상이라든지, 아니면 이게 육체적인 현상이고 이게 정신적인 현상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전혀 안 드러나게 돼있다는 겁니다.
일단은 모든 것이 개념화되고 날 거 같으면 거기서 수행은 끝나버립니다.
여러분들도 사물을 대할 때 그게 육체적인 현상이든 정신적인 현상이든 그것이 개념화돼버리고 날 것 같으면 이미 거기에는 내가 한 발을 갖다가 폭 빠뜨린 경우가 돼버립니다. 업이 생성되어 버린다는 겁니다.
그 개념화되기 전에 할 수 있는 것이 뭡니까?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려나가는 것! 눈과 밖의 대상이 만나서, 만난 것으로 인해서 접촉이 일어날 때, 접촉이 일어나는 상태에서 그다음에 일어나는 게 뭡니까? 느낌이 일어나집니다.
그 사이에서 내가 중단을 시켜나가버려야 만이 지속적으로 내가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럴려고 할 거 같으면 얼마나 내가 빨리 움직여야 됩니까? 마음이. 얼마나 빨리 움직여야 돼? 굉장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이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평범하게 앉아가지고, 거기에도 적어 놨습니다.
그냥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이거 할려고 생각할 거 같으면 평생 앉아서 그거하고 있습니다. 그냥 그것밖에는 몰라.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평생 그냥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요것만 하다가 한평생 다 보내버리게 됩니다. 맞아요?
자! 그 밑에 부분에 한번 보십시오.
'실제적인 수행의 영역에서 물질과 관련된 부분은 세 부분이 있다.'하고 해놨습니다.
(외관적인 물질(모양)과 양식적인 물질(상태, 모습)과 특성적인 물질)
외관, 모습, 상태 이런 것(ākāra)을 아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이 '아까라(ākāra)'라고 하는 그러한 상태를 뚫고,
배가 불러오고 꺼지는 순간에 일어나는 움직임과 긴장감, 떨림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이것이 특성적인 물질입니다.
이러한 특성이 두드러지게 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이 분명한 이해, 분명한 앎을 성취해나갈 수가 있게 됩니다.
여기도 적어놨는데, '보기만 하고 보이지 않는다면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스님이 해놨습니다. 이 부분을 지금 다 할 수는 없고,
좌선하며 알아차릴 때의 분명한 이해는 이와 마찬가집니다.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조건으로 해야 만이 수행이 완벽하게 이루어져 나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하듯이 그냥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이렇게 할려는 마음은 아예 가지지 마십시오. 그렇게 할 거 같으면 평생 그렇게 그냥 하다가 말아버립니다. 조금 더 조금 더 내가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수행에 임해야만이, 그래도 단 한순간이라도 알아차림을 지속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연속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연속돼야 만이 이러한 현상이 보고 보여지게 됩니다. 보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걸 분명하게 이해를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한번 더 해보겠습니다.
볼 때 눈과 밖의 대상이 만납니다. 만나면 느낌들이 일어납니다.
느낌이 일어날 때 느낌은 한 점으로 모이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내 스스로가!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집중입니다.
그 집중으로 인해가지고 사띠가 이것을 탁 채어나간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이 대상을!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불러오는 시작부터 분명하게 한 단계씩 한 단계씩 알아차려나간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밖에 있는 저기 해변가에 파도를 한번 보십시오. 저 저쪽에서 일어난 파도가 여기 마지막 기슭에 와서 탁 부딪칠 때까지 끊임없이 너울너울너울너울 하고 다가와집니다. 배가 '일어남'하는 하나의 동작에는 이렇게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돼있습니다.
이거 한 번 볼 생각 없습니까?
이걸 볼 수 있어야 만이 보고, 보여지게 됩니다. 그냥 단순하게 배가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겠다 할 거 같으면 보는 것은 가능합니다. 배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는 있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수행을 해나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똑같은 것이 이어지는 겁니다.
경행하며 알아차릴 때의 분명한 이해 부분에 들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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