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요함에 빠질 때의 마음 자세-분명한 이해1 (20071004)
※『위빳사나 수행입문』교재 _ 제 3장 분명한 알아차림을 위한 수행방법
1. 고요함에 빠질 때의 마음 자세
자! 한번 봅시다.
좌선을 할 때는 몸이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대상이 간단합니다.
호흡이 일어남 사라짐이든, 아니면 느낌이 일어남 사라짐이든 대상이 간단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방황하는 것이 좀 적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것이 연속적으로 어느 정도 알아차려 나가집니다. 그렇죠!
그런데 행선 때는 어떻습니까? 경행 때는? 연속성을 잃기가 쉽죠!
몸이 걷다가 조금 더 뒤뚱뒤뚱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또한 생각도 일어나기 때문에 뒤뚱거릴 뿐아니라 알아차리는 강도가 연속적이지를 못해서 갭(gap)이 있기 때문에 뒤뚱뒤뚱하게 돼있습니다.
또 그것만 있습니까? 앉아있을 때는 눈을 감고 있지만, 경행할 때는 눈뜨고 있으니까 대상이 막 보인다고. 조금 전까지 부산에 뭐 무슨 축제하는가 빵빠레 울려쌌고 할 거 같으면 거기에 온데 귀가 쏠리고 하다 보면 걸어가다가 멈춰. 그러지?
그러니까 외부적으로 향하는 눈길을 끄는 대상들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알아차림이 연속적이질 못합니다, 좌선보다는! 평균적인 걸 얘기합니다.
쉽게 알아차림이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연속적인 것들이.
그런데 일상의 알아차림은 어떻습니까? 더 산만하지?
여러분들 경행하다가도 천천히 자리에 가서 앉으십시오 할 거 같으면 다 잊어먹어. 좀 있으면 우당탕탕. 조금 전에 경행할 때는 그래도 아무 소리 없이 하다가도, 자리에 돌아가 앉으십시오 하면 뭔가 삐그덕삐그덕 해쌌고, 그때부터는 알아차림이 연속적인 게 아니고 안 알아차리는 게 연속적이라.
수행 초기에는 일상생활에서 알아차리는 것이 굉장히 힘듭니다. 쉽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알아차리는 것이 잠깐 잠깐이라도 있게 되고 또 알아차리게 되면 수행에서는 큰 진전을 가져옵니다. 뭐 하기가 쉽습니까? 일상적인 것 중에. 주부들은 많이 하는 게 방 청소하고 설거지라. 그때만이라도 한번 해봐. 또 일반인들은 어떤 때입니까 밥 먹을 때입니다. 조금 내가 한 십 분 정도 더 늦게 먹는다 해가지고 큰 탈 안 납니다. 오히려 소화가 더 잘되지. 더 오래오래 씹으니까.
그런데 일상의 알아차림은 알아차릴 것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좀 힘이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일상의 알아차림을 할 때는 단순하게 사띠(sati)만으로는 힘이 드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일상의 알아차림을 얘기할 때는 삼빠자나(sampajāna)를 하라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스님이 2장하고 3장을 구분해놨던 이유가 그런 이유들이 있습니다.
연속적으로 알아차림이 있으면 당연히 집중력은 높아집니다.
그래서 실재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도와줍니다. 또 실재가 드러나지게 되고.
'일어남'이라는 것하고 일어남을 아는 것은 틀림없이 별개죠.
일어나는 것은 물질적이든 정신적인 현상일 뿐이고,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은 마음으로 아는 겁니다. 두 개가 원인·결과로써 묶어져 있는 거죠! 몸과 마음의 관계는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뭐냐면 삼빠자나(sampajāna)입니다. '분명한 앎'입니다.
사띠(sati)만 연속해서 알 경우에는 확연하게 아는 것이 적습니다. 알아차리긴 알아차리더라도. 그런데 삼빠자나로써 알아차릴 때는 두리뭉실한 부분은 없습니다. 확연하게 드러나지게 됩니다. 또한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삼빠자나를 할 경우에는 그런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할 거 같으면 모든 주의를 기울여서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부처님이 그 예를 뭐에다 들어놨는지 아십니까?
"양동이에 가득 기름을 채워가지고 완전하게 가득 채워가지고 머리 위에다 이고 걸어가는 것 같이 마음을 쓰면서 알아차려라." 하고 그럽니다. 한 발짝이라도 딴 생각 한다든지 한 발짝이라도 살며시 디디지 않을 거 같으면 그 기름이 쏟아진다는 거라. 꽉 잡고 있으니까 확 다 쏟지는 않겠지만 출렁거리면서 쏟아지게 되어있다는 거라. 모든 주의를 양동이에 두지 않으면 기름은 흐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분명하게 알려고 할 거 같으면 그렇게 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자! 손을 한번 보십시오. 손을 오므렸다가 펴고, 다시 또 오므리고 한번 해보십시오. 통상적으로 우리가 알아차리지 않을 때는 그냥 이렇게 합니다. 그러죠? 스님이 말을 하면서도 이렇게 하듯이. 안 알아차리더라도 내가 말을 하면서 이걸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한번 알아차리면서 한번 해보십시오. 팔을 구부릴 때 하고 팔을 펼 때, 구부릴 때는 어떻습니까? 또 펼 때는 어떻습니까? 구부릴 때는 가벼움이 있죠? 펼 때는 무거움이 있습니까? 그거는 확실합니까? 그럴 때도 팔을 들 때는 가벼움이 있고 내릴 때는 무거움이 있다고 그랬죠? 그러면 팔을 구부릴 때는 가벼움이 있는데 가벼움이 증가합니까, 가벼움이 감소합니까? 감소합니까? 팔을 펼 때 무거움이 증가합니까, 감소합니까?
사띠라고 하는 것은 팔을 구부리고 펴고 하면 '아! 이게 가벼움이 있구나, 무거움이 있구나' 하는 걸 아는 정도입니다.
삼빠자나라고 하는 것은 '이 가벼움이 증가하는가, 또 무거움이 증가하는가'까지를 아는 것입니다.
경행을 할 때 발을 들어 올릴 때 가벼움이 있다. 가벼움이 증가합니까, 감소합니까? 증가하죠! 확실하게 알 수가 있습니까? 내려놓을 때는 무거움이 증가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알겠죠! 나아갈 때는 가벼움이 어떻습니까? 나아갈 때도 가벼움이 증가를 합니다. 다음에 걸을 때 확인들을 한번 해보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들이 삼빠자나인데, 왜 그러면 가벼움이 증가를 하고 무거움이 증가를 하는 겁니까? 무거움이 점차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은 뭡니까? 사대요소 중에서. 땅의 요소와 물의 요소가 점점 더 증가한다는 겁니다. 가벼움이 증가한다는 것은 바람의 요소와 불의 요소가 증가한다는 겁니다.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벼움이 증가할 때는 뜨끈뜨끈하는 느낌들도 같이 일어날 수도 있고, 무거움이 증가할 때는 딱딱한 느낌들도 같이 일어나지기도 합니다.
자! 이런 것이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들인데 그렇게 할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수행자 대답)
그거는 기본이고, 천천히 하는 것은! 수행하려면 수행의 기본 세 가지는 분명하게 스님이 얘기를 했습니다. 그것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그거는 기본인 것이고,
되도록이면 대상 중에서 한 점을 자꾸 향하도록 해야 됩니다. 대상을 자꾸 좁혀가도록 해야 됩니다. 좁혀주지 않고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연속적으로 해나가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좁은 범위로써 대상을 자꾸 잡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되도록 머리를 수그려야 되는 거고, 대상도 넓게 퍼질려고 하지 말고 좁게 자꾸 잡아나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밖으로 향하는 것을 안으로만 집어넣도록 마음을 그렇게 써야 됩니다. 그것이 이렇게 해나가면 분명하게 아는 것이 어렵지 않게 해나가질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고요함에 빠질 때의 마음 자세. 그렇게 적어놨습니다.
크게 어려운 부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고요함에 빠지는 것은 왜 빠집니까? 대부분이 그 상태에 너무 오래 머물기 때문에 빠집니다. 수행해 나가다가 수행이 어느 정도 잘 되고 하니까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지거든. 그러니까 대상을 놓쳤든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든 간에 활력이 확 떨어졌거든. 그런데 집중력이 약해지니까 어떻게 돼? 그러한 상태를 계속 지속적으로 이어나갈려고 그러는 거라. 그럴 때는 즉시 아! 내가 집중력이 약해졌다 하는 사실을 알고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서 행동들을 해나가야 됩니다.
그 밑에 한번 보십시오.
'수행을 할 때 내가 뭘 알고 있는가 하는 걸 느낌으로 알아차려나간다.'
호흡이라든지 걷는다든지 하는 모든 움직임은 물질적인 현상입니다.
그러한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알아차리는 마음은 정신적인 현상입니다.
내가 집중력이 얼마 정도 되는가 하는 것에 따라서 이 두 가지 현상에 대한 것들을 명확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손을 움직이는 거하고 그것을 아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손을 움직일 때 또 마음을 내는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또 알게 되고, 집중력의 차이에 따라서 이렇게 자꾸자꾸 더 알아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 내가 지금 뭘 느끼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알 거 같으면, 그 느낌에 대한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을 구분할 수가 있기 때문에, 고요함에 빠졌을 때는 빨리 빠져나갈 수가 있습니다.
고요하게 될 때 한번 여러분들 가슴을 한번 잘 살펴보십시오. 상태가 어떻는가. 거의 대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수행이 잘 되나간다고 하는 것은 모양이나 형태가 드러나는 것은 아예 없어져버리다가, 움직임이 드러나는 것 수축감이나 팽창감이나 하는 움직임이 드러나는 것들도 감소를 해지다가, 그러고 나서 실재적으로 일어나는 따가움이라든지 아니면 아픈 느낌이라든지 하는 그런 감각들이 자꾸자꾸 드러나지게 됩니다.
그게 수행의 세 가지 기본적인 형태입니다.
그럴 거 같으면 수행이 잘 되나가면,
고요하게 되어있으면 고요한 느낌들을 분명하게 내가 알아야 되는데,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고요한 것들이 아무런 느낌들을 내가 발견을 하지 못하거든. 그럼 뭐라고 봐야 됩니까?
대상을 놓친 것밖에 안됩니다! 마음이 흐리멍텅하게 돼있는 상태라.
그럴 때 그 느낌들을 보고 빨리 아! 이것은 정신적인 현상이고 이것은 물질적인 현상이다 하는 것을 느낌으로써 빨리 구분을 자꾸 지어줘야 만이 마음이 활력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고요한 상태에서 고요함 그 자체를 느낌으로써 알 수가 있어야 되는 거고, 그 고요함 자체에 빠져있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알아차림이 굉장히 잘되고 강해지면, 생각은 멈춰버립니다.
뭘 생각하고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전부 다 중단돼버립니다.
그럴 때 어떻게 됩니까? 마음이 틀림없이 고요하게 침잠됩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 가슴의 느낌을 한번 보십시오.
아리다 못해 터질 것 같습니다. 터질 것 같애요.
그때의 느낌들 하고 대상을 놓쳤을 때의 느낌들하고는 틀림없이 다릅니다.
아무런 느낌이 없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거는 사띠를 하다가 대상을 놓쳐서 사띠가 연속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라.
자! 그렇게 한번 밑으로 쭉 내려가 봅시다. (수행자 질문)
고요하게 되는 현상에서는 부처가 나타났다든지 보살이 나타났다든지 그런 이미지 같은 것들이 드러날 때들도 있습니다. 맹하게 있을 때도 있지만, 내가 뭐 하는지도 모르고 있을 때도 있지만, 이런 것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때 실재하는 몸의 느낌을 보도록 하라 하고 적어놨습니다.
양손을 요렇게 한번 맞대보십시오. 어떤 느낌들이 있습니까?
따뜻하죠. 또? 부드러운 느낌들이 있습니까? 또 어떤 느낌들이 있습니까?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밖에 없어요? 그렇지. 툭툭 튀는 그런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느낌들이 일어나집니다. 그걸 누가 표현을 좀 해주라고 할 거 같으면 표현을 못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뭡니까? 실재하는 거죠! 실재하는 겁니다. 따뜻하고, 그런 툭툭 튀는 움직임들이 있고 하는 것들은! 거기에서 무슨 '나'라는 것이 있습니까? 내 손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그럴 때는 전혀 없습니다. 어떤 형태의 물질적인 것도 없습니다. 단지 따뜻하고 부드럽고 톡톡 튀는 느낌들, 움직임들, 그런 성질만 있을 뿐입니다.
부처가 나타났는데 그 느낌을 알 수가 있습니까? 부처의 느낌이 있습니까?
실재하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들 부처가 혹시 설혹 나타났다 하더라도 밖의 대상입니다. 여러분들은 실재하는 여러분들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밖의 대상이 나타났을 때는 밖의 대상이 나타났다는 것만 알고 빨리 마음을 안으로 돌리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고요해지고 할 거 같으면 더 빨리 더 알아차림을 갖다가 많이 할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밑에 보면 '고요해지면 몸 전체를 알아차려라.' 하고 적어놨습니다.
'일어남' '사라짐' 하다가 고요하고 그럴 거 같으면, 그런 느낌들에 파묻힐 거 같으면 '일어남' '사라짐' '앉음' '닿음' 하면서 몸 전체 대상을 이쪽저쪽으로 자꾸 이동해가면서 마음의 활력을 불어넣도록 만들어줘야 됩니다. 그래야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려 나가줄 수가 있습니다. 삼빠자나를 계발할 수 있는 것은 그 방법이라는 겁니다.
밑에 '마음의 성질은 고요해지면 쉬고 싶어 합니다.'
쉬고 싶어 하기 때문에 현상들, 이미지들, 빛이라든지 형상들이라 하는 것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나타날 때는 또는 두려운 것들이 나타나지기도 합니다. 절대 기뻐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단지 대상으로써 받아들이고 그냥 알아차리기만 하고 안의 대상으로 돌아오도록 그렇게 자꾸 해야 됩니다.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는 사람들이 참 잘 못 빠져나옵니다. 그러죠? 보통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두려운 게 나타나도 못 빠져나오고, 기쁜 게 나타나도 못 빠져나옵니다.
수행은 되도록 그 폭을 좁히는 것들입니다. 그럴 때 도움이 되는 것들은 뭡니까? 담마 위짜야(dhammavicaya)! 담마에 대한 조사입니다.
빨리 부처님에 대한, 부처님 법에 대한 조사를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가끔씩 스님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냥 '아라항 삼마삼붓도 부터 해가지고, 이띠삐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삼붓도(Iti pi so, Bhagavā Arahaṁ Sammāsambuddho)' 쭉 해가지고 삼보에 대한 예찬을 하나씩 하나씩 돼 씹습니다. '아라항' 음 무슨 뜻이지. '삼마삼붓도'하면 그것도 한번 되씹어보고, '에히빠시꼬(Ehipassiko)'하면 그것도 한번 되씹어보고, '빳짯당 윈뉴히띠(Paccattaṁ veditabbo viññūhi ti)'하면 그것도 한번 되씹어보고 이런 식으로 법에 대한 조사들을 하면서 마음에 활력을 넣어줍니다.
그거 한 번만 딱 하고 나면요 부처도 다 달아나버리고 저 귀신도 다 달아나버리고 없습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을 때는, 만약에 그것이 안 될 때는 법문을 귀담아들었던 사람들은 법문의 내용 중에 한두 대목만을 자꾸 기억하려고 해야 됩니다.
'아! 우리 스님이 가장 친한 친구는 자기 자신이라고 했지. 왜 자기 자신이 가장 친한 친구라고 했을까?' 하고 되돌려보기도 하고 그중에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말라고 했는데 왜 그런 얘기를 했을까?' 이런 식으로 하나씩 하나씩 조사를 해보는 거라. 그럴 거 같으면 거기에서 기쁨의 현상들이나 환희심들이 일어나면서 이 현상들을 물리쳐나가 줄 수 있습니다.
노력을 배가시키고 환희심을 일어나게끔 해줄 수 있는 것이 법의 조사입니다.
법의 조사를 통해서 해나갈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일어나는 것들을 빨리 벗어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2. 좌선하며 알아차릴 때의 분명한 이해 부분은 다음 시간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디맛자 빠리요사나(ādimajjha pariyosāna)' 이런 거 빨리어 기본적인 단어들 거기 적어준 것들은 되도록이면 그거는 외우십시요.
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ādimajjha pariyosānakalyāṇattā 불법은 시작·중간·끝이 모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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