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사띠 위빳사나[고급반]

5. 경행하며 알아차릴 때의 분명한 이해3 (20071025)

담마마-마까 2020. 1. 14. 23:14

https://youtu.be/uNl-Y5FIu_w

5. 경행하며 알아차릴 때의 분명한 이해3 (20071025)

 

『위빳사나 수행입문』교재 _ 제 3장 분명한 알아차림을 위한 수행방법

3. 경행하며 알아차릴 때의 분명한 이해

 

자! 교재 펴보십시오. 오늘은 경행하며 알아차릴 때의 분명한 이해 부분이죠?

프린트물이 거기까지 나갔죠? 뒤에 연결되는 부분은 아직 안 내보내 준 거 같습니다. 다음 주에 내보내 줄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교재 없는 분들은 옆에서 같이 봐봐요. 뭘, 프린트물을 어떤 걸 잡고 있는데요?

그거는 프린트물이 얼마 안됩니다. 한 장 반 정도밖에 안 되죠? 한장반인데 한장반이라도 스님 설명을 잘 들어야 됩니다.

 

분명한 이해, 분명한 앎이라고 하는 것은 일상생활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들입니다.

쉽게 말해서 현재 내가 하는 행위가 깨달음을 이루는데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를, 그다음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수행이 적절한지 아닌지, 노력이 강한 건지 집중이 강한 건지 알아차림이 강한 건지, 이런 것들을 잘 판단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고, 관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실재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림 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그리고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집착하지 않고 행위들을 하고 있는지 없는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과 함께 하는 것이 이 분명한 이해 부분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그냥 사띠 하나로써 다 이뤄져 온 상황입니다.

알아차림은 알아차림인데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이해하는 상태에서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것을 지금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알아차리는 것을 계속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연속적으로 알아차리면 집중력은 그마만큼 높아집니다. 결과적으로 관념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에 대해서 알아차리게 되기 때문에 분명한 앎-삼빠자나(sampajāna)를 얻게 됩니다. 그게 이 장에서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사띠(sati), 하나의 포인트만 봤을 때는

위빳사나(vipassanā)라는 거는 사마디(samādhi)에 속합니다.

사마디(samādhi) 마찬가지로 사마디에 속합니다.

위리야(vīriya) 마찬가지로 사마디에 속합니다.

맞습니까? 한 포인트로 봤을 때는 여러분들이 수행하는 도구들이 보통 뭐 다섯 가지 도구들을 얘기하지만은 어쨌든 크게는 이 세 가지 도구입니다. 세 가지 도구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만 봤을 때는 전부 사마디에 포함이 됩니다.

이것을 위빳사나로 전환시켜줄 수 있는 것이 뭡니까? 겨냥하는 것이 끊어지지 않도록 겨냥겨냥겨냥 겨냥겨냥 변해가도록 하는 것들뿐입니다. 그걸 이뤄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명확하게 이해하는 부분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하는 겁니다.

 

만약에 수행을 해나가다가 내가 알아차림을 계속 반복하고 있어도,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고 관찰하고 있어도 그거 외에는 별 신통하게 모르겠다, 반복적으로 그냥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고 있다. 이럴 거 같으면 이 장에서 배워야 되는 건 뭐냐 하면 거기서 내가 내 스스로 점검을 해봐야 되는 거라.

점검을 해서 '! 내가 지금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걸 점검을 해봐야 됩니다. 그래서 내 수행에서 뭐가 문제가 되고 뭐가 부족하다는 것들을 알아나가야 만이 이것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대상이 자꾸 드러나지지 않고 그냥 개념만, 실재적인 게 드러나지 않고 개념만 가지고 수행을 하고 있다 할 거 같으면 뭔가 방법이 틀렸다는 거라. 뭔가.

수행자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그 특징과 특징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현상들, 그 특징이 하고 있는 역할들 이런 것들이 드러나져야 됩니다.

 

비 오는 날을 한번 예를 들어 보십시오.

번개가 번쩍 칩니다. 번개를 하나의 예로 들었을 때 그 번개의 특징은 뭡니까? 뭔가 번쩍하는 거죠? 번쩍하는 겁니다. 밝은 빛이 탁 이렇게 우리 눈에 포착되는 겁니다. 아주 짧은 찰나에. 그게 번개의 특징입니다. 그럼 그 번개는 뭐로 가지고 내가, 저게 밝은 빛이 번쩍한다고 해가지고 그걸 번개라고는 안 하죠? 그럼 뭘 가지고 저게 번개다 하고 얘기합니까? 번개가 어떤 기능들을 하기 때문에? 번쩍할 때 어떻게 됩니까? 그 부근에는 환하게 그 부분이 드러나 집니다. 어두운 걸 몰아내는 기능을 해준다는 겁니다. 그걸 보고 우리는 번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행을 할 때 한 번 예를 들어봅시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하고 인제 경행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걷고 있다는 것을 뭐로 가지고 알 수 있습니까?

발의 움직임으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경행하고 있다 하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 그 드러나는 특징들입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경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경행을 하고 있을 때는 어떤 걸 압니까?

긴장감이라든지 아니면 딱딱함이라든지 아니면 물컹함이라든지 가벼움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압니다. 경행을 할 때 드러나는 특징들은 또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경행은 어떻게 됩니까?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하는 겁니다.

내가 경행을 했다 안 했다 하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은 뭡니까?

발이 여기 있던 것들이 조금 있으면 이쪽으로 옮겨지는 것들입니다. 분명히 이쪽에서 이동을 했습니다. 그게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수행을 할 때 이 사실을 이해하고 안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사람은 삼빠자나를 하고 있는 겁니다.

경행을 할 때 한번 여러분들이 잘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에 경행을 할 때 어떻게 됩니까?

자! 다리가 두 발 딱 서 있다. 그럼 내가 '걷고자 함' 하는 의도가 일어나야 됩니다. 그럼 '걷고자 함' 하는 의도로 인해서 어떻게 됩니까? 몸엔 갈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몸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긴장하게 됩니다. 걸을려고 할 거 같으면 긴장을 하지 않으면 걸을 수가 없습니다. 몸이 긴장감이 생기게 되고 그 긴장감으로 인해서 이 몸은 앞으로, 실재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걸 우리는 통상적으로 '걷는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걸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실재적으로 걷는 '나'라고 하는 것은 없죠! 의도로 인해서 긴장감이 생겨났고 긴장감으로 인해서 몸이 걷는 결과가 생겨났고 원인·결과 원인·결과의 연속일 뿐입니다.

걷는다는 것에는 단지 걸을려고 하는 의도-의도라고 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의도하고 그다음에 걷는 물질적인 걸음만이 있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거 같으면 몸과 마음의 관계로써 이해를 하게 됩니다.

 

밑에 한번 보십시오.

'경행할 때는 발에 마음을 집중하여 걸어감으로 알아차린다.

오른발 왼발로 알아차리고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음으로 알아차린다.' 이렇게 돼있습니다.

걸을 때는 발걸음을 주시하면서 오른발을 들었는지 왼발을 들었는지 하는 걸 먼저 관찰해서 알아차려야 됩니다. 발을 들어서 놓을 때까지는 드는 동작에는 연속된 움직임이 있습니다. 내려놓을 때도 연속된 움직임이 있게 돼있습니다. 틀림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연속되게 돼있지 지 혼자서 쭉 아무것도 없이 연속되고 일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모두 알아차리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오른발 왼발 아니면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라는 것은, 하나의 행위에는 연속된 것이 끊어지고 이어지고 끊어지고 이어지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아라는 겁니다.

 

그래서 '빨리 걸을 때는 왼발을 걸었는지 오른발을 걸었는지를 갖다가 주시해서 알아차리도록 하라.' 그러면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하면서 알아차립니다.

조금 더 빨라지면 어떻게 됩니까? '들어올림' '내려놓음' '들어올림' '내려놓음' 합니다.

조금 더 빠르면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이렇게 합니다.

빨리 걸을 때나 먼 길을 갈 때는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하고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죠? 경행은 보통 뭐라 그럽니까?

빨리어로 '짱까마'라 그럽니다. 짱까마(caṅkama)! '천천히 부드럽게 걷는다' 하는 뜻입니다. 그렇게 경행을 할려면 적어도 세 단계 정도씩 관찰을 하면서 천천히 걷는 것이 낫습니다. 발을 들어올리고, 앞으로 나아가고, 내려놓고!

발을 드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차리도록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발을 들을 때는 발이 무거운지 가벼운지, 발을 내려놓을 때는 무거운지 가벼운지를 갖다가 알아차리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 밑에 보면, '들면 서서히 들리는 것의 시작부터 들림이 끝날 때까지 마음이 대상에 집중하여 붙어서 따라갈 수 있어야 된다.'하고 얘기 합니다.

왜 그런가?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는 부분을 봤을 때 하나의 동작만 봅시다.

들어올릴 때 여러분들이 아는 거는 뭡니까? 여기 교재에 나와 있습니다.

다리를 아는 겁니까? 아니면 그 움직임을 아는 겁니까? 아니면 특성을 아는 겁니까? 뭘 알고 있습니까?

움직임과 특성이 어떻게 드러나집니까?

조금 전에 스님이 얘기했듯이 세 가지로 구분해서 특성과 드러남과 기능을 얘기해보십시오.

하나 하나씩 얘기해봅시다. 그럼 발을 들어올릴 때 얘기를 합시다.

발을 들어올릴 때는 어떤 특성들이 있습니까?

기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발을 들 때의 기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러면 드러나는 것은 어떻게 드러나 집니까?

그렇지. 당연히!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삼빠자나라는 거라. 그 사실을!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면 그걸 이해를 안 한다는 거라.

여기에서 여기까지 그냥 스르르 들리는 것으로 생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관념적으로만 빠져버리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발이 그냥 들리는 것으로 이해를 해버립니다. 모양과 형태를 보게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다리를 아는 거라. 발이 그냥 올라가는 것으로 알게 되는 거라. 발이.

 

절대 발이 올라가는 게 아닙니다.

발이 올라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개념에 싸여있을 때 얘길 합니다.

그거는 수행 안 하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발이 올라간다고 얘길하면 안됩니다.

절대 발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발이 뭡니까?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념일 뿐입니다. 왜 개념을 가지고 발이 올라가는 것으로 자꾸 인식을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그 뒤에 보면, '움직임을 알아라.'

알아차림과 집중이 강해지면 수행을 하다 보면 그래서 발이라고 하는 개념은 사라져버리고 실재하는 움직임이 드러나 집니다.

그 움직임은 뭐로 가지고 드러나 집니까?

움직임은 뭔가가 지탱해주기 때문에 움직여나가는 겁니다.

발이 여기 있다. 그럼 발이 이렇게 올라와진단 말입니다. 올라와지는 움직임을 알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뭔가가 여기 이만큼 올라오고, 여기 이만큼 올라오고, 여기 이만큼 올라오고 하는 걸 갖다가 지탱해주는 힘이 있어야만이 이게 움직임을 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 지탱해주는 거는 뭡니까? 뭐로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까?

가볍고 무겁고 하는 느낌으로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 가볍고 무겁고 하는 느낌으로 그 움직임을.

 

내가 움직임을 직접 보는 게 아니다 말입니다.

그거는 어떤 요소입니까? 바람의 요소!

지탱해주는 이게 바람의 요소구나 하는 걸 내가 빨리 이해를 해야 된다는 거라. 발이 올라오는 움직임은 아! 이렇게 지탱해주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의 요소로 인해서 이렇게 올라와지는구나. 그것도 끊임없이 변해나가는 것으로서! 그걸 이해를 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밑에 세 번째에 있는, '어떤 특성을 아는가?'

어떤 특성을 알아야 됩니까? 들어올리면? 나아가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뭐 뜨거운 느낌들도 있을 거고 가벼운 느낌들도 있을 거고, 뻣뻣한 느낌들도 있을 거고 발바닥이 땅에 닿았을 때는 물컹하는 그런 느낌들도 있을 거란 말이라. 그렇죠!

그거는 다 무슨 요소들입니까?

똑같이 바람의 요소들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땅의 요소들이나, 불의 요소들이나, 물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은 뭡니까? 바람의 요소들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봅시다.

딱딱하다 아니면 물렁하다 하는 것은 개념입니까? 실재입니까?

실재입니까? 그 실재하는 것도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틀림없이 변합니다.

여기 이것을 눌렀을 때 딱딱합니다. 맞습니까? 그럼 이거보다도 더 강한 다이아몬드로 누를 때 그거는 더 딱딱합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봤을 때 이거는 뭡니까? 물컹한 겁니다. 다이아몬드에 비하면.

그러면 조금 전에 이거는 딱딱하다 했는데 상대적인 것이 나타났을 때는 이건 어떻게 됩니까? 물컹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게 물컹하든 딱딱하든 내가 실재하는 것을 느낀 것뿐입니다.

단지 물컹하고 딱딱하고 하는 것은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지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사람들이 발을 들어올릴 때 가벼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무거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럽니다.

 

예를 들어보면, 내가 지금 기분이 좋다. 그럼 발을 들어올릴 때 어떤 느낌들이 강하겠습니까? 가볍다! 내가 싫은 느낌이 들 때는 수행하기 싫단 말이라. 그럼 발을 들을 때 어떻게 됩니까? 무거운 느낌이 듭니다!

느낌에 따라서 좋고, 싫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에 따라서 일어나는 느낌이 이렇게 달라진다는 거라. 수행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안 되겠죠!

자! 그런 특성들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어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분명한 이해라고 한다.'하고 적어놨습니다.

 

그다음에 '뒤에서 미는 것 같은가? 앞에서 당기는 것 같은가?'

어때요? 발걸음 이렇게 나아갈 때 잡아댕기는 거 같애요, 밀어주는 거 같애요?

그렇죠? 앞으로 나아갈 때는 꼭 밀어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는 언젭니까? 내려놓을 때는 잡아당기는 것 같습니다. 무거움이 강해지니까 당연히 잡아댕기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가끔씩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하죠?

 

발을 들어올릴 때 땅바닥이 요렇게 손바닥같이 톡 치올리듯이 이렇게 칩니다. 그걸 어떻게 느끼냐면 수행을 하다 보면 발이 한꺼번에 이렇게 툭, 마지막 순간에 툭 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꼭 밑에서 툭 튕겨주는 것 같애. 밀어줘버리는 것 같애.

또 발을 내려놓을 때 어떤 때는 아주 예민하게 될 때는 거의 발이 닿기 직전에 보면 누가 다왔다고 촉 잡아댕기는 것 같애. 그럼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발이 툭 닿기도 하고.

그래서 뒤에서 미는 것 같은가, 앞에서 당기는 것 같은가 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라. 이게 재밌다보면 사람들이 경행만 할라고 그럽니다. 경행만, 자꾸 이것만. 그러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도 바람의 요소가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바람의 요소가!

절대 거기에 얽매여 들어가 버리면 안 됩니다. 좋고 싫은 곳들에 얽매여 들어가 버릴 것 같으면 수행은 거기서 또 중단을 해버립니다.

 

그다음에 그 뒤에 부분을 한번 봅시다.

이렇게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되고, 내가 알아차릴 때 대상이 나타난 것, 알아차림 한 것, 마음이 대상에 일치가 됐는지, 그 일치가 됐을 때 어떤 특성들을 알았는지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수행할 때 보통 어떤 행동들을 하기 전에 사람들이 의도를 관찰하기 참 어렵다고 그럽니다. 왜 어려운 겁니까? 의도를 꾸준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겁니다. 한번 마음을 먹어보십시오. 내가 요놈 의도는 꼭 관찰 해보겠다 하고 마음을 먹으면 봐집니다. 충분하게 내가 인내하지 않고 그것을 알아차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도를 관찰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 의도를 관찰할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최대한 행동을 느리게 해야 되죠!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해도 겨우 의도를 관찰 할동말동 합니다. 그것도 끈질기게, 끈기있게 행동해야 만이 의도를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의도를 관찰하기 쉬울 때가 언제입니까? 경행할 때.

발을 들어올리기 전입니다. 항상 발을 들어올리기 전입니다.

내가 일으키는 의도에 따라서 올라가는 발이 천차만별로 달라집니다. 맞습니까? 내가 '나아가고자 함' 이렇게 의도를 낸다고 해서 나아가집니다.

그런데 나아가고자 하는 의도를 낼 때 어떤 마음 상태이냐에 따라서 나아가지는 것이 달라집니다.

어떨 때는 발이 훅 들리기도 하고, 어떨 때는 발이 천천히 들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더 멀리 뛸려고 발이 급격하게 올라오기도 하고 각각 다 다릅니다. 의도가 없다고 할 거 같으면, 행위와 마음이 일치된 상태라고 할 거 같으면 그런 현상이 없어야 됩니다. 왜 그런 행동들이 나타납니까? 마음이 앞서기 때문에!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결과가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동작이 끝나고 다음 동작이 이어질 때 의도를 관찰하기가 가장 수월합니다.

한번 해보십시오. 그래서 발을 내려놓고 나서 다시 들기 전에, 발이 동작이 완전히 끝나고 나서 그다음 동작을 턴을 하기 전에, 또 조금씩 더 예민해지면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기 전에, 나아가고 나서 내려오기 전에, 항상 하나의 행위 행위가 끝나고 나면 그 의도를 관찰하기가 수월해집니다.

 

그러다가 의도가 하나의 행위 안에서, 의도로 인해서 행위가 일어나지고 의도로 인해서 행위가 일어나지는 것을 또한 관찰하게 됩니다.

모든 동작, 여기서 올라오는 동작에 만약에 1초가 걸린다. 그 1초 안에는 의도가 수백 번도 더 들어가집니다. 마음은 찰나라고 그랬습니다. 마음은 찰나 간에 일어났다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면 내가 의도를 내지 않을 거 같으면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행위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올라오다가 중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도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행위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의도를 관찰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은 내가 충분하게 인내하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인제는 분명한 이해를, 앎을 배웠으면 그것을 이해하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원인·결과 원인·결과로써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영속하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알게끔 돼야 됩니다.

 

자! 한 번 더 살펴봅시다.

발을 들 때 어떤 게 먼저 일어납니까? 들어올리려는 의도가 먼저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들어올리는 물질적인 현상이 하나하나 나타나지게 됩니다. 들어올리는 의도는 정신적인 현상입니다. 들어올릴려고 하는 마음은 인식하는 의식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들어올림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나서 들어올릴 때, 사람들이 들어올릴 때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느낌들이 들어가 버리면 그에 따라서 일어나는 느낌도 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느낌에 대한 것들, 느낌 무더기가 분명하게 있습니다. 이 느낌 무더기는 들어올리는 것을 인식하는 지각무더기가 또한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들어올리는 마음 상태가 있게 돼있습니다.

그럴 때는 마치 행위를 할 때 발을 누군가가 '들어올리라 들어올리라' 하는 것처럼 보여 버립니다. 그것이 뭡니까? 의도입니다.

 

이렇게 해서 정신적인 현상, 들어올리려는 의도 안에는 느낌, 지각, 의도, 의식이라고 하는 네 가지 정신적인 무더기가 있습니다.

들어올려지는 움직임은 뭡니까? 물질적인 무더기죠! 그것까지 합해서 물질과 비물질, 나마와 루빠로써 이루어졌다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들어올리려는 의도와 들어올려지는 현상, 이것으로써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들어올려지는 의도 안에 느낌들이 결합이 돼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집착하게 되죠! 느낌을 느낌으로써만 관찰이 돼버리면 되는데 느낌에서 집착을 하게 되니까 좋고 싫은 것으로써 발전이 돼나가게 되는 겁니다.

발을 하나 움직이는 것도 그와 같이 돼나갑니다. 그래서 들어올리는 동작 하나에서 내가 어떨 때는 가벼운 느낌이 들고 어떨 때는 무거움의 느낌이 든다 할 거 같으면 아!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에 끄달려 들어가면서 수행하고 있구나 하는 걸 자기가 알아차려야 됩니다.

 

이렇게 하다가 보면 다섯 가지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고 하는 것에는 끊임없이 이렇게 정신적인 현상과 물질적인 현상의 결합으로 인해서 일어나집니다.

그 하나라도 어그러질 거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거기서 중단이 돼버립니다.

어떤 것도 찰나찰나에 정신적이든 육체적인 현상들은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의도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물질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정신적인 의도 안에도 '들어올리라'고 하는 의도가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지각하지는 못합니다. 정신적인 무더기들도 마찬가지 이렇게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하나의 무더기, 하나의 무더기들이. 그 어디에서 항상하는 것이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무상을 알게 되고, 이러한 무상들이 찰나찰나 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굉장히 빠르게 느껴집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찰나 찰나입니다.

두려워옵니다. 두렵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아! 이렇게 두렵고 무서운 것이구나. 괴롭다' 하는 느낌들을 받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내가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라. 내가 관찰을 하면 할수록 그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 속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게 무상 고 무아입니다.

수행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분명한 이해가 확립이 되게끔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다음 시간에는 세 가지 특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 부분입니다.

조금 전에 세 가지 특성 얘기를 했죠! 어떤 특성들입니까?

현상에는, 실재하는 것에는 고유하게 존재하는 특성들이 있습니다. 고유하게 존재하는 특성들이. 그렇죠? 없습니까, 고유하게 존재하는 특성들이? 지·수·화·풍이라는 그 특성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그 특성을 아는 겁니다.

그 특성은 어떻습니까? 항상 그것도 있는 것이 아니죠! 일어난 것이 있으면 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연속되는 것이 아니고 단계 단계 단계 단계에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걸 순차적이라고 그럽니다. 하나의 현상에는 순차적인 특성들이 또 있게 됩니다.

그런 순차적인 특성이 있는 반면에 또 보편적인 특성이 있죠! 어떤 보편적인 겁니까? 무상·고·무아입니다. 수행에서 발견해야 되는 부분들이 바로 그 부분들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 부분에 대한 분명한 이해 부분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 내용은 조금 많은데 그래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